하민석은 왼손 손바닥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운명선, 사업선이 종횡으로 얽혀 있어 마치 바둑판 같았다. 그 위에서 자신의 운명을 보는 듯 하민석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나는 3년 동안 내 문하생으로 맴돌던 당신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당시 그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마음속에 무슨 마음이 있는 지는 당신들 스스로가 잘 알 것입니다…”“나 하민석이 당신들을 왜 기다렸는지 당신들 마음 속으로 계산해 보세요. 그가 당신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다해도 나는 그것보다 더 많이 당신들에게 줄 수 있어요…” “누군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를 염두 해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기회를 줄게요. 지금 나한테 말하세요. 나는 따지지 않고 떠나도록 내버려 둘게요…”“하지만 3년 전 그를 어쩔 수 없이 돌아가도록 만든 것은 우리 모두가 한 몫을 했다는 것은 잘 생각해 두세요…”마지막 말이 심한 천둥과 같이 떨어지자 왔다 갔다 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거의 터질 것 같았다.거의 무의식적으로 어떤 사람이 “탁탁” 땅에 무릎을 꿇고 울부짖는 소리로 말했다.“저는 둘째 도련님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고 절대 딴마음을 품지 않겠습니다!”“충성을 다하자! 날이 밝아온다!”평소에 상업계를 군림하던 거상들이 지금 이 순간은 마치 옛날 사회의 봉건 신하 같았다.그들의 눈앞에 있는 하민석은 마치 제왕 같았다. 하민석은 살며시 웃었지만 눈빛은 말할 수 없는 참담함으로 그는 서울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 아직도 모든 것을 되찾고 싶니? 아쉽지만, 넌 자격이 없어!”……옆 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하수진은 연못에서 꽃 구경을 하고 있었다. 푸른 쪽파같이 생긴 손가락 사이로 미끼가 떨어져 연못의 붉은 잉어, 푸른 잉어들이 쉴새 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미끼는 다 준비가 됐는데, 물고기는 또 몇 사람이나 먹을 수 있을까?”……삼일 후.설씨네 별장. 오늘은 좋은 날이다. 설씨네 집에서는 벌써 설씨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 너는 쇼핑몰 땅이 팔리면 네가 우리 집안에서 아무것도 아닌게 될까 두려운 거잖아!”“그런데 너는 우리 집안이 곧 남원으로 가서 발전하게 될 건 생각해 본적이 없지?”“앞으로 내 남편이 될 왕씨가 도와주면 우리 집안은 반드시 승승장구 할거야!” “네가 말만 잘 들으면 우리가 고기 먹을 때 국물 한 모금 정도는 나눠줄게, 안심해……”설지연은 이 순간 팔짱을 낀 채 도도한 모습을 보였다. “맞아! 남원으로 가자고 한 건 네 아버지이신데, 설마 너 네 아버지랑 맞서 싸우려고 하는 거야? 우리 설씨 집안이 남원에 가는 거에 영향을 주려고?” “만약에 네 아버지가 얘기를 꺼내지 않았으면 우리는 지금 매각하는 일 같은 건 생각할 필요도 없어!”“맞아, 이 모든 일은 다 너희 식구 때문이야. 지금 싸게 얻었다고 잘난 체 하는 거야!” “다른 프로젝트는 안 팔더라도 설은아 네 쇼핑몰 프로젝트는 반드시 제일 먼저 팔아야 해!”“……”이 순간, 적지 않은 설씨네 사람들이 입을 열고 큰 소리로 말했다. 분명 하나같이 지금 남원으로 달려가서 전설의 인물이 되기를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은아를 대할 때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설재석이 돌아 온 것이 결코 이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을 해치는 것처럼 보였다. 설은아는 한동안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설재석이 가지고 온 큰 프로젝트는 확실했다. 설씨네가 남원으로 가서 발전하는 것은 모두 설재석이 추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무의식 적으로 이렇게 하는 게 반드시 옳은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설씨 가족 앞에서 설은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설재석은 이 순간 자기와는 상관없다는 듯 싸늘한 모습을 보였다. 이번에 그는 설씨네 집에 돌아와 후계자 자리를 되찾으려 했으나 설씨네 태도는 그를 완전히 실망시켰다. 어떤 의견도 내놓고 싶지 않았다. “은아야. 너는 어떻
“할아버지.”설은아는 설민혁을 보지 않고 할아버지를 보며 간청하는 얼굴로 말했다. “할아버지, 쇼핑몰 프로젝트는 우리가 정말 많이 심혈을 기울인 거잖아요. 이렇게 쉽게 버릴만큼 가치 없는 일이 아니에요.” “아니면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담보대출을 못 받으면 그 때 다시 매각을 고려해 보는 건 어때요?”설은아의 표정을 보자 설씨 어르신은 약간 흔들렸다. 하지만 이때 설민혁이 ‘탁’하며 책상을 내리치고는 호통을 쳤다.“설은아, 네가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구나!”“분명히 말하는데, 너는 우리 설씨네 회사의 재무 부장이고 쇼핑몰 프로젝트의 담당자일 뿐이야!”“회사 운영은 할아버지랑 내가 하는 거야. 너 같은 하인이 끼어들 곳이 없어!”“더구나 삼촌이 빨리, 모든 것을 빨리 해야 한다고 했다고!” “우리는 지금 프로젝트를 파는 일에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은데 이렇게 네가 참견을 했다가 만에 하나 고객들이 다 놀라서 가버리면 어떡해?”“프로젝트 파는 일이 우리 기대에 못 미치면 어떡할래?” “우리가 2천억 원을 제때에 모으지 못하면, 우리 설씨 가문의 손해가 얼마나 큰지 알기나 해?”설민혁은 지금 포용해주지 않고 속사포처럼 질문을 퍼부어댔다. 남원의 프로젝트는 설재석이 가지고 온 것이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의견을 밝히지 않았다. 설은아는 설씨 집안 사람들에게 집중적인 공격을 당했고, 지금은 정말 외톨이가 되었다. 대다수의 설씨 집안 사람들은 원래 설은아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한 달 동안 설은아가 재권을 쥐고 있는 관계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없어졌고 모두들 가난에 찌들어 있었다. 이제 설은아를 끌어내릴 기회가 온 이상 누가 이 기회를 놓치겠는가?특히 설지연은 더욱 설은아 앞에서 우쭐거리며 웃으며 말했다. “은아야, 다들 네 편이 아니라고 탓하지 마. 누가 네 남편보고 폐물이 되라고 했니?”“만약에 그가 내 미래의 남편처럼 신분이 있고 지위가 있었다면!”“네가
이때 설민혁이 제일 먼저 일어나 비웃으며 하현을 가리켰다.“쓸모없는 녀석아. 우리 설씨 집안이 지금 가족의 큰 일로 회의 중이잖아. 너 같은 데릴사위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여길 들어와? 만에 하나 네가 우리 가족의 비밀을 누설하면 그 때는 누가 책임 질 거야?”설은아는 설민혁을 노려보며 말했다. “설민혁, 너 너무 지나치게 굴지마. 하현 역시 우리 설씨 가족이야.”설민혁은 ‘피식’웃으며 말했다. “설은아, 너 여전히 순진하구나. 할아버지가 너랑 이 사람이랑 이혼시키지 않았다고 해서 이 사람이 설씨 가족인 줄 알아?”“그가 안씨 집안의 개 한 마리가 돼서 우리에게 프로젝트 하나 가져다줬다고 우리 설씨 집안에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니?”“내가 말했잖아. 우리 설씨 집안은 지금 옛날 같지 않다고. 지금도 우리는 안씨 가문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면, 우리 설씨 가문은 그 프로젝트를 할 생각이 없어!”여기까지 말하고 설민혁은 설씨 어르신을 보며 말했다. “할아버지, 제가 볼 때는요. 설은아를 바로 해고시키고 설씨 집안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당연히 우리 설씨 집안도 양심이 없는 집안은 아니니 이 두 폐물에게 매달 60만원씩 주면 밥은 먹을 수 있지 않겠어요?”이 말이 나오자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민혁에게 찬사를 보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매달 60만원씩 월급을 받는다면 나쁘지 않네. 설씨 어르신은 설재석을 깊이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웃을 듯 말 듯 설은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다른 사람들의 이견이 없으면 이렇게 하는 걸로 하자.”“쇼핑몰 프로젝트는 매각하고, 오늘부터 설은아는 회사의 모든 직책을 정리한다.” 이때 자신의 아버지가 입도 뻥긋하지 않자 설은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몇 달 동안의 그녀의 모든 노력이 산산조각 난 셈이다. 이 때 그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
하현이 이어서 막 입을 열려고 했다. 이때 설민혁이 정말 참지 못하고 책상을 치며 하현에게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너는 네 자신이 무슨 물건이라고 생각해? 할아버지가 이미 결정을 하셨는데 네까짓 데릴사위가 무슨 자격으로 말을 하는 거야?”하현은 그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설민혁, 넌 정말 바보냐? 아니면 멍청이냐? 나는 결정을 하기 전에 먼저 계약서를 살펴봐야 한다고 상기시켜 준거야!”“하엔 그룹은 당신들이 투자를 받고 싶으면 받고, 프로젝트를 팔고 싶으면 팔 수 있는 길가에 있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야. 네가 정말 왕씨 집안과 관계를 맺고 나면 하씨 면전에서 뛰어오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런 것들조차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이 일을 기어이 당장 해야겠냐고! 나는 너 같은 폐물이 무슨 자격으로 설씨 집안의 부사장이 됐는지 모르겠어.”“내가 말할게!”설민혁은 순간 격노했고 바로 손을 써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전에 정말 하현에게 가혹하게 당했었다. 지금 손을 쓰려고 했지만 오히려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산 채로 잡아먹을 듯 원망하는 눈으로 하현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하현은 그곳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난 후 마지막으로 설재석을 쳐다보며 말했다.“아버님. 제가 당신을 의심하려고 하는 건 아닌데 왕씨 집안이 우리 설씨 집안에 너무 과분하게 잘해준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우리 설씨 집안과 합작을 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51%의 지분을 차지하도록 했어요. 이건 하늘에서 떨어진 떡이나 마찬가진데 혹시라도 우리 설씨 집안이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지 않으세요? 이 뜻은 명백했다. 왕씨 집안과 설씨 집안이 말하는 합작에는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설씨 집안이 남원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하현이 하는 말을 믿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설재석은 이때 차갑게 말했다.“하현, 비록 지금 프로젝트가 내 손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나 역시 지나칠 수가 없네. 하지만 내 인품을 걸고 이 프로젝트
한 줄기의 아름다운 그림자가 걸어 들어왔다. 이슬기였다. 그녀는 오늘 화장은 하지 않고 청바지에 흰 셔츠만 입었다. 그리고 검은 뿔테 안경을 썼고 머리는 포니 테일로 묶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습은 섹시하고 요염해 보였다. 순수하면서도 섹시한 두 가지의 모습이 동시에 드러나 눈길을 끌었다. 슬기가 나타나자 홀 안은 적막해졌다. 다들 놀라면서도 뭔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설마 슬기가 하엔 그룹을 대표해서 죄를 물으러 온 건가? 이와 동시에 적지 않은 설씨네 사내들의 슬기를 바라보는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정말 섹시한 매력이 있다. 정말 아름답다. 몸매도 섹시하다. 옛날 같았으면 이 설씨 집안 사람들은 감히 슬기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 같지 않았다. 설씨네 집안은 바로 남원의 가족이 되었다. 그들은 아마 이런 여자들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설민혁의 눈빛이 가장 거침이 없었다. 그는 이미 다 생각해 놓았다. 남원의 일이 결정될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는 반드시 이 여자를 얻을 방법을 찾을 것이다. “슬기 아가씨 어서 오세요. 얼른 앉아요!”설씨 어르신은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 역시 세상 물정에 훤한 지라 공손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지으며 주스를 대접하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비록 지금 설씨 집안은 하엔 그룹과 합작을 깨려고 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하엔 그룹의 입장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슬기가 온 이상 설씨 가문도 감히 소홀히 대할 수는 없었다. 슬기가 온 것을 보자, 설은아도 마음이 조금 불안했다. 그녀는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전에 투자하는 일로 슬기가 자신을 많이 도와주었는데 지금은 설씨 집안이 하엔 그룹의 동의도 없이 쇼핑몰 프로젝트를 팔려고 했다. 그래서 이 말이 입 주변을 맴돌고 있었지만 설은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슬기는 지금 앉지 않고 하이힐을 신고 설씨 어르신 곁으로 걸어갔다
설씨 어르신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는 지금 슬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비서님, 당신…… 그게 무슨 말입니까?”슬기는 가볍게 웃으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설민혁에게 시선이 갔다. 이 순간 설민혁은 온몸이 살짝 흔들렸고 일순간 얼굴이 험악해지기 시작했다.“설 회장님은 계약서를 꼼꼼히 보셨다고 하셨는데 제가 보기에 꼭 그렇지는 않은 거 같아요. 아마 당신이 본 것은 어떤 사람이 개정한 계약서 같네요.”“설 회장님이 계약서의 진짜 내용이 무엇인 지를 모르니 제가 오늘 서울 변호사 협회의 여 회장을 특별히 불러 계약서에 있는 내용과 계약서를 위반했을 경우 어떻게 되는 지 그 결과를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슬기는 말을 마친 뒤 가볍게 손뼉을 쳤다. 잠시 후 양복 차림의 중년 남성이 서류 가방을 들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 사람을 보자 설씨 어르신은 머리가 ‘핑’도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서울변호사협회의 여 회장으로, 신분이 꽤 높았다. 웬만한 가족과 기업은 그를 한 번 만나는 것도 어려웠다. 평일 낮에는 더 없이 어려웠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오늘 슬기의 수행원처럼 지금 여기에 나타났다. “여 회장님, 설 회장님의 가족들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해 주세요!”슬기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 후에 지체 없이 한쪽으로 가서 서 있었다. 동시에 아무런 기색 없이 하현이 있는 쪽을 향해 살짝 허리를 굽혔다. 슬기의 지시에 따라 여 회장은 고개를 들어올리며 그곳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야 설씨 어르신에게로 시선을 향하고 살짝 웃으며 말했다. “설 회장님, 오래간만입니다.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설씨 집안에 큰 일이 생겼다고요……”“무슨 큰 일이요?” 설씨 어르신은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그 당시 당신들과 하엔 그룹이 투자를 합의하고 서명한 계약서의 사본입니다. 먼저 한 번 보시죠……”여 회장은 서류 한 부를 꺼내 내밀어 설씨 어르신에게 건네주었다. 설씨 어르
뭐?이 땅이 하엔 그룹 소유일 뿐만 아니라, 게다가 지금 하엔 그룹에게 6천억 원을 배상해야 한다고?이 말을 듣자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 회장을 쳐다보는 눈빛이 침체되었다. “말도 안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며칠 전에도 계약서를 꺼내서 훑어봤는데! 이렇지 않았어! 민혁아 빨리 계약서 좀 꺼내봐!”설씨 어르신은 지금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만약 일찍 이런 조항을 알았다면 그가 어떻게 섣불리 쇼핑몰 프로젝트를 팔려고 할 수 있었겠는가?”“할아버지……”설민혁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전에 설씨 어르신께 보여준 계약서는 그 당시 설은아가 서명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조작한 것이었다. 그는 너무 남원에 가고 싶었다. 왜냐하면 남원의 프로젝트는 이미 그의 손에 들어갈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에서 설은아의 손에 속박당하는 느낌을 받았고 남원에 가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계약서를 조작한 것이었다. 이 일을 위해 하엔 그룹의 몇 명 고위층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조용히 처리하도록 했다. 원래 설민혁의 계획대로라면 설씨 집안은 하엔 그룹에 찾아갈 필요도 없고 설씨 집안 쪽에서 돈을 돌려주면 그만이었다. 여러 가지로 다 계산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엔 그룹의 그 고위직 임원들이 한 말은 쓸모 없는 것이었는가? 슬기가 갑자기 찾아왔다. 책상을 뒤엎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설민혁은 이마의 식은땀을 훔쳐내며 말했다. “이 비서님, 우리 사이에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닌가요? 이 일을 하기 전에 저는 특별히 하엔 그룹과 그 고위직 임원들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들이 모두 대답하기를……”슬기는 말을 끊으며 말했다. “설씨 집안은 회장이 한 말이 보증이 됩니까? 아니면 고위직 임원이 한 말이 보증이 됩니까?”“당연히 회장님 말이죠……”설민혁은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회장님이 말씀하셨어요. 어떤 사람이 하엔 그룹의 첫 번째
”손님, 다시 한번 자세히 보세요!”“손님 옆에 있는 남자가 밥 먹는 거 말고 뭘 할 줄 알겠어요?”“보세요! 지금도 아무 거절도 못 하잖아요!”“그런데 왕 도련님은 어때요? 손님 옆에 있는 저 남자보다 몇천 배는 더 좋죠! 만약 손님이 이 기회를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거예요!”말을 하면서 여자 종업원은 하현에게 눈을 내리깔았다.그녀는 줄곧 하현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궁상스럽기 짝이 없는 이 남자를 무시한 것이 틀림없었다.그녀의 눈에 금정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남자는 오직 왕인걸이었다.설은아는 더 이상 여자 종업원과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 홧김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저리 꺼져요!”여자 종업원도 냉소를 흘리며 지지 않고 대꾸했다.“손님, 정말 어지간하시네요!”“그렇게 있는 척하면 뭐가 좋아요? 무슨 소용이 있냐구요?”설은아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목소리로 말했다.“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당신 사장한테 말해서 당신을 해고해 버릴 거예요! 두고 보세요!”바로 그때 이들의 모습을 흐릿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던 왕인걸이 와인잔을 움켜쥐고 천천히 걸어왔다.걸을 때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얼마나 당차고 당당한지 보는 사람들마저 숨이 막힐 정도였다.그의 길을 막고 있던 일부 손님들은 얼른 길을 내주었다.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을 일부러 만들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이다.왕인걸은 마치 원하는 것은 모두 손에 넣겠다는 듯 거만하고 당당하게 걸어왔다.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지금 히죽히죽 웃으며 다가왔다.“쯧쯧쯧, 결국 왕인걸이 이렇게 여자를 빼앗는군!”“자고로 왕인걸의 눈에 띈 여자가 도망갈 곳이 어디 있겠어? 순순히 그의 품에 안기는 게 능사지!”“예전에 청순미녀라고 이름을 날리던 어린 스타가 처음에는 왕인걸한테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었지.”“그러다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어? 왕인걸이 모든 지원을 끊자 결국엔 그에게 기어들어왔지.”“그리고 자기가 여신급 여자를 데리고 다니는 줄 알고 왕
”안녕하세요.”하현과 설은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곱게 화장을 한 종업원이 82년산 라피트 한 병을 들고 다가왔다.“저분이 두 분께 드리는 것이니 받아주세요.”종업원은 설은아와 하현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귀한 82년산 라피트 한 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술을 보냈어요? 82년산 라피트를?”하현과 설은아는 모두 약간 어리둥절해하면서 종업원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지방시에서 옷을 맞춰 입은 멋진 남자가 와인잔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는 젊고 멋있고 부유해 보였다.딱 봐도 금정에서 성공한 사람 같았다.그리고 그의 곁에는 화려한 옷차림의 남녀 몇 명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순간 그들은 하현과 설은아를 바라보며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하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설은아가 주저하지 않고 냉랭하게 말했다.“죄송하지만 난 저분을 몰라요. 그러니 이거 가져가세요!”“그게...”설은아의 차가운 눈빛에 여자 종업원은 눈썹을 찡그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손님, 손님 뜻은 알겠지만 왕 씨 가문 도련님이 다른 사람한테 이렇게 대하는 건 아주 드물어요. 그러니 저분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예요.”“어쨌든 금정에 왔으니 저분이 젊고 잘생기고 부유하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테니까요!”“많은 여자들이 저분한테 시선 한 번 받으려고 해도 좀체 기회가 없었다구요!”“저분이 와인을 한 병 주셨어요. 그것도 82년산 라피트 한 병을요! 설마 당신들은 이게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르는 건 아니겠죠?”“정말 이해가 안 되네요. 왜 거절하시는 거예요?”예쁜 종업원은 설은아가 배려라는 걸 너무 모른다고 생각한 듯했다.보아하니 왕 씨 가문 도련님은 이곳의 단골이고 신분이 범상치 않으며 이 여자 종업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모양이었다.이것은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이었다.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앞에 있는 안줏거리를 씹었다.계속 먹자니 맛이 나쁘지 않았다.방금 비행기
저녁 6시, 금정 쇼핑센터 맞은편에 있는 금정 포장마차.포장마차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곳은 금정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 중 하나이고 매일 수천 번까지 번호가 매겨진다고 한다.그리고 입구에 있는 주차장에는 모두 각양각색의 고급 차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설은아는 진작부터 하현을 이곳에 데리고 와서 식사를 하려고 마음먹었다.그래서 그녀는 가방에서 번호표를 꺼냈을 때 적잖이 놀랐다.두 사람이 차를 세우고 금정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서자 저녁 식사가 절정인 이때 화려한 옷을 입은 손님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설은아는 종업원에게 번호표를 제시했고 두 사람은 미리 남겨둔 자리로 안내되었다.이 과정에서 설은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확 끌었다.화장을 곱게 하고 팔과 허벅지를 드러낸 여자들과 달리 설은아는 별로 화장기도 없지만 외모나 기질로 보아 모든 사람들을 압도하기 충분했다.예쁜 여자를 옆에 둔 남자들도 설은아를 힐끔힐끔 쳐다보았고 눈에선 뜨거운 시선이 광선처럼 빛났다.이 사람들 중에는 금정의 부잣집 2세들도 있었고 이제 막 사업에 분투해 성공 가도에 진입한 사람들도 있었다.물론 의기양양하고 패기 넘치는 스타트업 종사자들도 많았다.기질과 스타일로 볼 때 이 사람들은 하현을 앞서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그래서 설은아 옆에 있는 하현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야유를 보냈다.그러나 설은아는 이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리에 앉은 후 테이블 사이사이를 지나가는 주문 기계에 몇 가지 특별 요리를 주문한 다음 손을 뻗어 하현에게 차를 따라주었다.모처럼 부드러운 여인의 손길을 느끼며 하현은 술을 한잔 마신 뒤 설은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샤넬의 코트를 입은 그녀는 늘씬하고 매력적인 몸매를 가졌다.여기에 옥처럼 빛나는 외모와 가끔 다리를 꼴 때마다 흘러내리는 미끈한 각선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달나게 했다.하현은 설은아가 사업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면서 더욱 눈부시게 빛나는 슈퍼우먼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찻잔
이때 간민효는 하현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져서 잔뜩 호기심이 솟아올랐다.그녀는 다시 하현에게 조금 더 다가가 그의 귀에 대고 입김을 불어넣으며 말했다.“하현, 오늘 밤 시간 있어? 같이 밥 한 끼 할까?”“고맙지만 오늘 밤 하현은 시간이 없어!”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설은아가 마침내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당당하게 걸어와 하현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겨 팔짱을 끼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하현은 오늘 밤 나와 함께 저녁을 먹을 거거든.”간민효는 설은아를 보고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말했다.“설은아, 이 사람이 그 능력 없는 네 전남편이야?”하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비슷한 외모에 비슷한 나이대의 두 여인을 쳐다보았다.설은아와 간민효가 아는 사이?하지만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 것이 정상이었다.모두 금정에서 내로라하는 정상급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설은아는 간민효에게 무슨 설명을 하기도 귀찮아서 얼른 하현을 끌고 VIP 출구로 나와 자신의 빨간 페라리로 들어갔다.그 후 그녀가 가속페달을 밟자 차는 굉음을 내며 쌩하니 그 자리를 떠났다.갑자기 혼자가 된 간민효는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조수석에 탄 하현은 안전벨트를 매면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오랜만에 만난 전처, 아니 와이프라고 해야 하나?이런 어색하고 떨떠름한 자리라니!차는 금정 국제공항을 빠져나왔고 하현이 금정의 가을빛을 감상할 사이도 없이 설은아는 거칠게 차를 몰았다.그리고 가속페달을 사정없이 밟으며 그녀는 떠보는 듯 입을 열었다.“간민효, 예쁘고 상냥하지?”맞는 말이었다.간민효는 전신급에 달하는 독술을 가졌으면서도 아름답고 성격도 시원시원했다.그리고 몇 시간 동안 함께 지내면서 하현은 그녀의 기질이 참 따뜻하고 상냥하다는 것도 알았다.그러나 차 안을 뒤덮은 질투의 불길을 느끼며 하현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간민효가 어느 정도 사람 좋고 매력적이라는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비행기는 어느새 금정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하현과 간민효는 함께 VIP 통로를 걸었다.얼핏 보면 두 사람이 한 쌍의 연인처럼 보였다.이에 간민효의 뒤를 따르던 양복 차림의 남자는 못마땅한지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두 사람은 공항의 VIP 출구에 다다랐고 간민효는 하현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현,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지만 가는 길까지 내가 데려다줄게.”하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야. 비행기 탔을 때 이미 아내한테 내 일정을 보냈어.”“아마 마중 나올 거야.”“아내?”‘아내’ 라는 말을 들은 간민효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하현의 네 번째 손가락을 쳐다보았다.반지가 없었다.간민효의 눈빛을 알아차린 하현이 입을 열었다.“아, 이제 전처라고 봐야지.”하현의 말을 듣고 간민효는 그제야 소리 없이 웃었고 한층 더 하현에게 관심이 생기는 것 같았다.“하현, 당신에게 아내가 있든 없든 간에 내가 말했듯이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전화해. 금정에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게.”“자, 우리 작별의 포옹이라도 해!”이 말을 들은 몇 명의 사내들이 모두 순식간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하나같이 험악한 얼굴로 하현을 노려보았다.“자, 다음에 또 봐!”하현도 험악한 표정의 남자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앞으로 나가 간민효와 포옹을 나누고 그녀의 귀에 대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참, 마침 내가 무학에 어느 정도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당신 몸에 뭔가 병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 아마 십중팔구는 입신에 이르는 독술과 관련이 있을 거야.”“그래서 말인데 내가 필요할 땐 언제든 연락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도와줄게.”말을 하면서 하현은 쪽지 한 장을 여자의 가슴에 쑤셔 넣었다.이 행동은 예의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행동을 함으로써 하현은 침착하게 기운의 광선을 통과해서 여자의 심맥을 보호했다.“내 병을 눈치챘어?”
그들의 눈에는 하현이 간민효를 잡아먹기라도 할 짐승처럼 보이는 것이 분명했다.하현은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간민효의 손을 놓았다.하지만 그의 손아귀에는 여전히 어두운 기운이 남아 있었다.간민효는 아무 말없이 미소를 보였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하현, 어쨌든 당신 덕에 위기를 모면했어요.”“내가 미리 독을 넣긴 했지만 비행기가 그대로 출발해서 폭발하기라도 했다면 무고한 생명들이 영문도 모르고 죽음을 당했을 거예요.”“이 무고한 생명들의 죽음은 모두 나한테 책임이 있었을 거구요.”간민효는 멍한 눈빛으로 말을 마친 후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그래서 이래저래 난 하현 당신에게 신세를 졌어요.”“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은 나 간민효의 친구가 된 거예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나 간민효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울게요. 절대 모른 척하지 않을 거예요!”“진부한 말이지만 이게 내 진심이에요!”“내가 없어도 내 명함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가거나 혹은 약혼자를 찾아가도...”말을 하면서 간민효는 명함을 꺼내 하현의 손에 쥐여주었다.“그들은 최선을 다해 당신을 도와줄 거예요!”하현은 손안에 든 명함을 보았다.이것은 특수 목기로 조각한 것이었다.이름 하나와 전화번호만 새겨져 있어서 보기에는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이런 명함은 딱 봐도 아무나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하현은 자신도 모르게 자세히 명함을 살피기 시작했다.명함 모서리에 몇 가지 비밀 문양 같은 것이 있었다.역시 금정 간 씨 가문다웠다.5대 문벌 중 문벌의 기원지인 금정을 떠나지 않고 지켜온 금정 간 씨 가문!금정 간 씨 가문은 다른 오래된 문벌보다 신비에 가까운 기세를 가진 강력한 집안이었다.이 여자는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신분도 간석준보다 훨씬 높았다.이런 생각들이 하현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가자 그는 간민효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아, 고맙습니다.”그러나 하현은 간민효의 명
하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특히 깁스를 한 여자가 죽기 직전에 한 ‘독’이라는 말에 눈앞에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여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이 아름다운 검은 옷의 여인에게 신의 경지에 가까운 독술이 있을 줄은 몰랐다.이렇게 속을 알 수 없는 데다 아름답기까지 한 여자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그렇지 않으면 자칫하다가 사소한 부주의로 의외의 실패를 맛볼 수가 있다.동시에 하현은 상대방의 정체에 대해 추측하기 시작했다.신분이 비할 바 없이 높고 독극물에 대해서도 해박하다.게다가 간 씨 성을 가지고 있다.이쯤 되고 보니 상대의 신분은 알 만할 것 같았다.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 요소가 없었기 때문에 하현은 그녀의 신분을 캐지 않았다.하현은 이제 죽은 여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상대가 자신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한 이유지만 죽은 사람에겐 더 이상 관심을 둘 가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곧이어 중년 수사대장이 하현을 찾아와 간단한 조서를 작성했다.하현은 금정으로 가는 일이 더 급했기 때문에 두 스튜어디스에게 공을 넘겼다.양효리라는 이름의 스튜어디스는 잘 협조할 생각이었지만 이다송이 그녀를 막았다.이 모습이 하현의 흥미를 끌었다.양효리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이다송 같은 여자와 절친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하룻밤 사이에 두 남자와 뒤엉키는 여자는 아무리 보아도 보통은 아닐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양효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부지불식중에 이다송에게 물들어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이미 자신과 얽힌 일은 모두 끝났기 때문에 하현도 더는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않았다.곧 일등석은 말끔히 청소되었고 특수 약물을 뿌린 뒤여서 그런지 좀 전의 피비린내는 모두 싹 사라졌다.하현은 자신의 좌석에 앉아 비행기가 이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이때 향기로운 바람이 코끝을 스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그러자 간 씨 성을
경찰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서로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여자의 말이 틀린 데가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하현은 오히려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깁스를 했다고 불법은 아니지. 하지만 깁스 안에 규조토를 섞으면 불법이지.”하현은 천천히 손에 든 홍차를 깁스 위에 뿌렸다.하현의 말과 행동을 보고 있으니 어느새 여자의 안색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규조토는 매우 특별한 화학 물질이었기 때문에 약용이나 C4 총기의 원료로만 쓰인다.“규조토를 폭발시키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물질이 필요하지. 게다가 그건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야. 바로 알코올이지!”“규조토 위에 소주, 보드카 등 독한 술을 한 잔만 뿌려도 끔찍한 폭발이 일어날 수 있어!”“그 폭발의 위력은 아주 무서워!”“이론적으로 깁스 형태로 만들 정도로 규조토를 썼다면 그 폭발력은 어마어마해. 아마 이 비행기는 중간 어느 지점에서 두 동강이 나고도 남아!”“아마도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공중에서 폭발했을 거야!”“그러면 이 비행기에 있는 사람들 모두 죽는 거지!”“뼈도 하나 못 추릴 만큼 가루가 되어서 흩어지는 거야!”여기까지 말한 하현은 스튜어디스에게 비상 탈출구를 열라고 지시한 다음 작은 깁스 부스러기를 집어서 떨어뜨리며 보드카 한 잔을 뿌렸다.“쾅!”보드카와 깁스 부스러기가 닿는 순간 굉음과 함께 불꽃이 번지는 것이 보였다.이다송과 양효리는 모두 아연실색했다.만약 정말로 비행 중인 비행기 안에서 폭발이 일어난다면 모두 죽는다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간단히 말해서, 하현은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듯했지만 그의 행동이 모두의 생명을 살린 것이다!깁스를 한 여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하현을 노려보았다.하현이 자신의 계략을 모두 간파했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중년 형사는 식은땀을 쫙 흘렸다.신고가 들어온 비행기를 자신이 살핀 뒤에
하지만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흥미로운 듯한 눈빛으로 하현을 바라보았다.그러자 그녀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그녀는 분명 하현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고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보려는 심사인 듯했다.“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죠.”“여러분의 시야의 사각지대를 노리고 뭔가를 숨기는 사람도 많으니까요.”하현은 홍차를 한 잔 따라 마시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공항 경찰이라 그런가? 별로 프로답지 못하시군요들!”“내가 경찰서장이라면 다른 일 다 제쳐두고 당신들 해고하는 일부터 할 겁니다!”“당신들은 스스로가 다 찾아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C4 총기를 가장 잘 숨기기 좋은 곳을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거예요!”말을 하면서 하현은 들고 있던 홍차를 여자의 다친 왼손에 부었다.“아!”여자는 뜨거운 찻물에 데여 비명을 지르며 하현을 향해 버럭 화를 냈다.“개자식! 지금 뭐 하는 거야?”“다친 손인데 조사할 게 뭐 있다는 거야?”“내가 정말 C4 총기를 숨기고 있는 줄 알아?”“설마 나 스스로 내 목숨을 끊고 당신들과 이 자리에서 죽으려고 한다고 거야?”“난 연봉 수억을 받는 임원이야. 내 목숨은 누구보다 소중해!”말을 하면서 여자는 수사대장에게 지갑에 든 명함을 꺼내 신분을 증명하려고 제시하려고 했다.그러자 제일 앞에 있던 중년의 수사대장이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젊은이, 여기서 이렇게 함부로 굴지 마. 우쭐대고 싶어서 주위의 시선을 좀 모으려나 본데!”“방금 우리가 확인했어. C4 총기 같은 건 전혀 없었어!”하현은 중년 형사의 경고를 무시한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왼손을 다쳤다고 했지만 몸에서는 아무 약 냄새도 나지 않아.”“그리고 지금 보니 당신은 얼굴에 아주 풀메이크업을 했군. 분명 본인이 한 거겠지.”“그런데 말이야. 한 손으로는 이렇게 완벽한 화장을 할 수 없어.”“무엇보다 팔을 다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