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본 이걸윤과 하구천은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졌다.이영돈은 최고의 병왕이다!그들 둘이 합쳐도 그에게 맞서려면 전력을 다해야 할 정도로 강한 상대였다!그렇지 않으면 이영돈을 순식간에 제압할 수 없다.그러나 하현은 손쉽게, 너무나 손쉽게 이영돈의 얼굴을 날려 버리지 않는가?직접 보지 않았다면 이걸윤과 하구천은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하구천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이미 하현에 대한 경외심이 마음속에 자리잡은 하구천이었다.그러나 이 광경을 보고 하구천의 마음속엔 하현을 향한 경외심이 더욱더 짙게 깔렸다.“이것이 성전 기사의 수준이야? 수준이 너무 떨어지는데?”하현은 휴지를 꺼내 손바닥을 닦으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그러자 이걸윤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고 더 이상 지체할 겨를이 없는지 허리춤에 찬 총에 오른손을 대며 말했다.“하 씨, 당신 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어?”“난 전신이야!”“당신이 정말로 나와 싸우고 싶다면 아마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할 거야.”하구천도 차가운 눈빛으로 이걸윤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하현, 사람을 대할 땐 관대해야지. 너그럽게 용서해야 할 땐 용서하고 뒷일을 생각해야지.”“어젯밤 동 항독이 당신들한테 사정하러 갔을 땐 당신들 콧방귀도 안 뀌었잖아?”하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지금 내가 이치를 따지고 우위를 점하니까 뭐, 관대하게 대하라고?”“게다가 당신들은 지금 죽자고 나한테 덤비면서 난 당신들 말에 고분고분 따라야 하는 거야?”“대구 엔터테인먼트는 화 씨 가문 거라는 거 잊지 마!”“화 씨 가문 경호원 외에도 난 용문 항도 지회, 용전 항도 지부 사람들을 파견했어.”“당신들이 싸우자고 해도 난 아무 상관없어!”하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났다.이들은 모두 용문 사람들이었고 하나같이 칼을 들고 살벌할 얼굴로 이걸윤 일행을 쳐다보았다.이를 지켜보던 이걸윤과 하구천의 낯
”탕!”총알 한 발이 하구천의 복부에 떨어졌다.엄청난 충격으로 하구천의 몸이 튀어나와 한쪽 면의 유리에 세게 부딪혔다.유리는 거미줄 같은 균열을 드러내며 산산조각이 났다.다음 순간 하구천의 몸이 땅에 떨어지며 ‘윽'하고 외마디 소리가 터져 나왔다.순간 그는 피를 뿜어내며 낯빛이 극도로 일그러졌다.이걸윤의 행동이 너무나 급작스러워서 아무리 하구천이라고 할지라도 막을 수가 없었다.하구천은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상처에서 피가 솟구쳤다.“이 소주!”항도 하 씨 가문의 경호원들이 혼비백산한 채 놀라서 달려나와 하구천의 앞을 가로막았다.“이 씨 이 개자식! 우리 도련님은 당신을 위해 생사를 걸고 있는데 당신은 감히 등 뒤에 칼을 꽂다니!”몇몇 사람들은 얼른 구급상자를 열어 연신 소리쳤다.“얼른 처치해! 얼른 처치해서 병원으로 가야 해!”순간 카지노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항도 하 씨 가문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모두 정신이 혼미해졌다.성전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이걸윤은 분명 하구천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형제라고 외쳤다.그런데 왜 갑자기 방아쇠를 당긴 것일까?설마 총알이 잘못 날아든 것이었을까?처치를 마친 하구천은 들고 있던 알약을 얼른 삼켰고 그러자 창백한 그의 안색이 서서히 좋아지기 시작했다.그는 앞을 가로막고 있던 호위대를 밀어내고는 일그러진 얼굴로 이걸윤을 노려보았다.“이 소주, 당신 지금 이게 무슨 뜻이야?”형제가 서로 으르렁대는 모습을 보던 하현은 웃으며 손을 들어 다른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개가 악에 받혀 으르렁대고 있는 순간인데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장면인가?굳이 여기에 끼어들 필요가 있겠는가!심지어 하현은 자신들의 일행을 이끌고 4, 5미터 정도 뒤로 물러나 두 형제들에게 싸울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무슨 뜻이냐고?”이걸윤은 냉소를 지으며 하구천을 쳐다보았다.“나랑 당신이 의형제라고?”
”이걸윤,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하 씨 이놈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거냐고?”“내가 항성으로 불러들인 게 당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라고?”“무슨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하고 있어?!”“당신은 전신이야!”“누가 당신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겠어?”하구천은 거의 피를 토할 듯 소리쳤다.“이걸윤, 당신은 쓸모없는 인간이었어!”“오죽했으면 6년 전 이곳에서 사람들한테 쫓겨나듯이 항성을 떠났겠어!”“당신이 이렇게 금의환향하게 된 건 다 내 덕분이라고!”이걸윤은 싸늘한 눈빛으로 하구천을 바라보며 말했다.“아무리 뭐라고 떠들어대도 당신이 날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어.”“게다가 지금 당신은 전신의 명성을 더럽히고 있어.”“당신이 이렇게 하는 것은 성전 기사단을 더럽히고 노국을 더럽히는 짓이야!”“아무리 왕법이 당신을 용서한다고 해도 난 당신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그러자 이걸윤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어서 저놈을 쳐! 내 말 못 들었어?”“다 귀가 먹은 거야?”“죽여!”말이 떨어지자마자 이걸윤은 들고 있던 총을 다시 들어 그대로 전방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조심하세요!”몇몇 항도 하 씨 가문 호위대들이 순식간에 몸을 날려 하구천의 앞을 막았다.총알이 사방에서 날아들었고 호위대들은 모두 총알받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하구천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눈앞에서 섬뜩한 광경이 펼쳐지자 하구천의 눈동자가 움츠러들었다.“당신 정말 죽고 싶어?” 하구천은 화가 끓어올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이걸윤을 죽이려고 발걸음을 내디디려고 했으나 호위대가 그를 막고 섰다.“도련님, 지금 도련님은 다친 상태입니다. 그는 전신입니다. 도련님이 나설 상대가 아닙니다.”“우선 도련님은 여기를 벗어나십시오!”“항도 하 씨 가문이 온전해야 우리가 삽니다. 여기를 떠나기만 한다면 누가 도련님을 건드리겠습니다!”“도련님은 도자기 같은 존재이십니다. 어
하구천이 창문을 뛰쳐나온 순간 이미 성전 기사들이 몰려왔다.그들의 손에 든 총기는 항도 하 씨 가문 호위대의 손에 있는 것보다 더 많았다.머지않아 성전 기사들은 호위대를 짓눌러 무너뜨릴 태세였다.그러나 호위대들은 하구천이 떠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텼다.군중 속에서 최영하는 얼른 일어나 하현을 보고 하구천을 지금 잡을 것인지 말 것인지 물었다.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오늘 밤 그가 움직이지 않으면 승리는 그의 몫이다.그러나 움직이면 자신에게 무리가 될 수도 있었다.그래서 지금은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현은 생각한 것이다.“웅!”잠시 후 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하구천은 대구 엔터테인먼트를 성공적으로 탈출하여 자신의 전용 좌석에 앉은 것이 분명했다.“이걸윤, 하현. 오늘 밤 일, 내가 똑똑히 기억하겠어!”살의에 가득 찬 하구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하구천, 난 당신을 건드린 적이 없어. 원한이 있으면 정정당당하게 덤비는 되는 거야.”“당신이 머릿속으로 머리를 굴린 뒤에 날 건드린다면 나도 정당방위를 할 수밖에 없잖아.”하현의 말을 듣고 차에 있던 하구천은 하마터면 피를 뿜을 뻔했다.하현이 그의 속을 꿰뚫어 보듯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분명 하구천은 이걸윤 그 망나니에게 손을 쓰라고 부추겼는데 이런 결과가 되다니!도저히 하구천은 인정할 수 없었다.“개자식! 감히 도망을 치다니!”이걸윤의 안색이 확 변했다.하구천을 그냥 떠나보내면 하현이 따로 자신에게 손을 쓰지 않아도 자신이 곤란해진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이걸윤이었다.그는 지금 항도 하 씨 가문 호위대도 아랑곳하지 않고 곁에 남은 십여 명의 성전 기사들을 데리고 창가로 돌진한 후 모든 전력을 동원해 하구천을 향해 무자비하게 사격을 가했다.“탕탕탕탕!”총알이 빗발쳤으나 하구천의 운전사는 이미 멀리 차를
이걸윤은 안색이 확 변하며 입을 열었다.“하현, 내 부하들이 하구천의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잘 알잖아?”“내가 직접 나서지 않고서는 하구천을 죽일 수 없어!”하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덤덤하게 말했다.“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내가 말했잖아, 당신이 당신의 의형제를 죽일 수 있다면 난 당신을 죽이지 않겠다고.”“그런데 지금 당신이 그를 죽일 수도 없는데 여길 이렇게 떠나려고 한다면 그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당신은 여기서 매복할 인력을 배치하거나 전화를 걸어 병력을 파견하도록 요청할 수도 있어.”“당신이 능력만 있다면 여기서 당신이 뭘 하든 난 막지 않을 거야.”“단 한 가지, 당신은 여기서 한 발자국도 떠날 수 없어.”“만약 떠나려고 한다면 내 부하들의 총이 당신의 심장에 꽂힐 거야. 그때 가서 날 탓하지 마.”“얼토당토않은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두는 게 좋을 거야, 이걸윤.”“내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으니까.”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것 같은 하현의 얼굴을 보며 이걸윤은 차가운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총구를 들어 올려 전방을 향해 겨누었다.그러나 그는 곧 다시 총구를 내려놓아야 했다.그가 총구를 앞으로 향하자 수십 개의 총구멍이 자신의 이마를 겨냥했기 때문이다.그가 만약 하지 말아야 할 동작을 했으면 아마 선 채로 저세상 문턱을 넘었을 것이다.전쟁의 신이라도 이렇게 많은 총부리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게다가 최면에 힘을 쏟느라 이미 자신의 평소 실력의 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상태가 되었다.망했다!이런 생각이 이걸윤의 마음속에서 슬슬 똬리를 틀었다.그는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엄청난 아우라를 뿜으며 항성과 도성에 금의환향한 그였다.하지만 오늘 밤 그가 저지른 실수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그는 졌다.이미 판을 뒤집을 능력을 상실한 패잔병이 된 것이다.하현 이놈은 앞에서 사람을 죽일 뿐만 아니라 뒤에서 사람을 부추겼다.지금 그는
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급할 거 없어. 지금 가장 그를 원하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하구천이야.”“그렇다면 우리가 왜 하구천한테 이로운 일을 하는 겁니까?”“남겨두면 골칫거리나 되지 않겠습니까?”최문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이놈 만만치가 않네요.”“우리한테 잡힌 후 연신 비아냥거리고 있어요. 우리는 그를 어찌할 수 없다고 하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을 내보낼 수밖에 없을 거라고 했어요.”“정말 대장님의 명령이 없었더라면 이미 형틀에 매달았을 거예요.”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도 나름에는 전신인데 보통의 형벌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잠시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행동은 그의 의지를 부추기는 꼴밖에 되지 않을 거야.”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이걸윤은 인간쓰레기이지만 인간쓰레기도 남다른 데가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그를 파멸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굴복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그래도 방법이 있어.”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최문성에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한 뒤 말했다.최문성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대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 바람같이 사라졌다.“하현, 방금 문성이한테 뭐라고 한 거야?”최영하가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물었다.“방금 말했잖아. 아무리 용전 항도라고 해도 이걸윤 같은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는 없어.”“가장 간단한 방법이 가장 효과적일 때가 있어.”하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물론 효과가 있을지 어떨지는 며칠 후에 두고 봐야 알겠지만 말이야. 이런 건 발설해 버리면 효과가 떨어져.”하현은 옅은 미소를 띠며 찻잔을 들고 하수진을 바라보았다.“그건 그렇고, 약혼 취소된 거 미리 축하해.”“하지만 하구천이 이대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오늘 밤 그는 큰 손실을 입었어. 비록 항도 하 씨 가문이 그걸 핑계로 날 괴롭힐 수는 없겠지만 하구천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하수진과 최영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시각.항성 빅토리아 항 작은 꽃집 안에는 하백진이 메스를 사용해 하구천의 등에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납탄을 한 발 꺼냈다.그런 다음 하구천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꿰매고 상처를 아무는 약을 발라 처치를 마무리했다.하구천은 이마에 식은땀을 흘렸지만 눈가에 가득히 맺힌 원한은 그에게 이를 악물게 만들었다.그는 싸늘한 표정으로 원통해하며 말했다.“개자식!”“감히 나한테!”“그가 감히 이걸윤한테 날 죽이라고 명령해?”“간덩이가 부어도 한참 부었군!”맞은편에 있던 하문성은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 PC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태블릿 PC에서 그가 보던 것은 방금 하구천이 이걸윤에게 습격당하는 장면이었다.“아니, 이걸윤 그놈은 머리가 나빠진 거야? 원래 나쁜 거야?”“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도 못 해?”“하현 그 개자식 말 몇 마디에 널 공격해?”“노국을 등에 업었다고 우리 항도 하 씨 가문이 감히 제깟 놈을 죽이지 못할 거라 생각하나 보지?”하문성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하구천의 부상이 안타까웠지만 한편으로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초조해 미칠 지경이었다.이걸윤이 이미 하현의 손에 넘어갔으니 약속대로라면 하수진과의 약혼도 당연히 물 건너 간 꼴이 되었다.하구천은 이걸윤이라는 의형제의 손에 총을 맞고 피를 흘렸다.이걸윤을 당당하게 금의환향시켰는데 정작 하구천은 조금도 이득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 발등을 찍은 꼴이 된 것이다.가장 중요한 건 하현과 하수진 둘 다 하구천을 직접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이렇게 되면 하문준이 하현의 뒤를 받치고 있는 상황에서 하구천이 떳떳하게 복수할 방법이 없다.그래서 늘 지극히 이성적이라고 자랑하던 하문성조차도 지금 화가 나서 안절부절못하는 것이었다.하구천은 이를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통증과 원망 때문에 이성을 잃을 지경이라 무슨 말도 하기 싫었다.“오빠, 너무 화내지 마. 이 일은
하문성과 하백진이 신중하게 머리를 맞대고 있을 즈음 항성에 불어닥치고 있는 회오리 속에 어두컴컴하게 불을 밝힌 가든 별장에 불청객이 몰려왔다.삼엄했던 주변 경비는 비바람 때문에 다소 느슨해져 있었다.가든 별장 본관 건물에는 이따금 사람 그림자가 왔다갔다할 뿐 고요하게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이들 사람 그림자는 모두 가든 별장 경호원들의 것이었다.대다수의 정예 경호원들은 하문준과 함께 떠난 상황이어서 이곳에 남은 경호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이때 어둑어둑한 불빛 아래 기사복을 입은 한 줄기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모습을 드러내었다.그는 손에 든 총구의 방아쇠를 소리 없이 당겨 감시 카메라 몇 개를 무력화하는 데 모두 성공했다.이후 그는 별장을 한 바퀴 빙 돌며 경호원이 몇 명 정도가 있는지 확인한 후 신호를 보냈다.잠시 후 기사복을 입은 십여 명의 대하계 성전 기사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모두 서양 검을 손에 쥔 채 싸늘한 표정으로 건물 가까이 다가갔다.그들은 아주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접근해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올라가!”다시 한번 상황을 확인한 뒤 선두에 선 혼혈 기사는 눈동자에 핏발이 선 채 뒤따르는 무리에게 지시했다.이 사람은 노국 황실 넷째 공주의 최측근 기사, 로자크이다.과거에 그는 성전 기사단 부단장으로 유라시아 전쟁에 나가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다.하지만 나중에 대하 총교관에게 놀라 주저앉은 뒤로는 더 이상 실력도 지위도 향상되지 못했다고 한다.은퇴 후 넷째 공주가 보디가드로 그를 불러들여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하지만 지금 그는 총교관에게 놀라 뒤로 나자빠졌을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누구보다 의기양양했다.그의 눈에 이 극동의 국제도시는 그가 다시 일어설 희망의 보이는 곳이었다.항성을 발아래 놓을 수만 있다면 아마 지난날 수치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본관 건물을 바라보던 로자크는 냉랭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계획대로 당
순간 장천중의 얼굴엔 제대로 영글지 못한 모자란 손자를 향한 한탄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이 떠올랐다.그 후로도 그는 장용호의 얼굴을 계속 때렸다.어느새 장용호은 피범벅이 된 채 얼굴이 볼썽사납게 부풀어 올랐다.장촌중은 장용호의 멱살을 잡고 바로 하현 앞에 내동댕이치며 무릎을 꿇었다.“대사, 용서해 주게.”“내가 잘못 가르쳤네.”“내가 이놈에게 화자결을 알려줬어!”“배움이 부족한 이놈이 자네 앞에서 이런 무례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용서해 주게.”“제발 한 번만 봐줘!”대사?!황보동이든 장용호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장천중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진홍민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새어 나오려는 비명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금정 제일 풍수지리사라 불리며 대하 풍수계에서 지위가 상당한 만세당 장천중이 하현을 대사라 칭하며 무릎을 꿇을 줄은!이 소식이 금정 전체에 퍼진다면 아마 모두들 깜짝 놀랄 것이다.“이놈아, 잘 들어!”“화자결은 하 대사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가르쳐 주신 거야!”이때 장천중은 손을 들어 또다시 장용호의 얼굴을 내리쳤다.장용호는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하현은 내 스승일 뿐만 아니라 네 조상님이나 마찬가지인 분이야!”“넌 지금 조상님에게 대드는 하극상을 보인 거야! 오만하기 그지없는 행동을 한 거라고! 얼른 용서를 빌어!”장천중은 배움이 모자란 손자가 황보정의 몸을 살피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손자가 목숨을 잃을까 봐 얼른 달려온 것이다.역시나 모자란 자신의 손자는 잘난 척 기고만장해서는 도리어 하현에게 비법을 도둑질했다고 뒤집어 씌우고 있었던 것이다.이 광경을 본 장천중은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정신이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안하무인한 짓을 할 수 있는가?이런 행동을 하면 만세당의 그 수많은 명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거라는 걸 모르
황보정은 온몸이 약간 회복된 듯 보였으나 갑자기 오돌오돌 떨기 시작했다.약간의 추위를 느끼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장용호는 이를 보고 매우 흡족해하며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들어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은 자세를 보였다.“자, 이제 마지막 한 수를 쓰겠습니다.”“화자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죠.”“거기, 당신은 좀 나가주지. 내가 하는 방법을 몰래 훔쳐볼 생각하지 말고!”“이건 우리 만세당의 독점술이나 마찬가지니까!”“검은 속내를 가진 사람들이 이런 걸 배우면 곤란하지!”말을 마친 뒤 장용호는 팔짱을 낀 채 거만한 자세를 보였다.하현이 떠나지 않으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겠다는 표시였다.“독점술?”하현은 이 말을 듣고 냉소를 흘렸다.“장천중이 알려줬어?”“개자식! 어디서 함부로 내 할아버지 함자를 입에 올리는 거야?”“게다가 우리 독점술을 누가 알려줬건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장용호는 하현과 실랑이를 벌였다.“아무튼 간에 난 당신 같은 나쁜 놈은 보고 싶지 않아!”“여기서 당장 꺼져 주지 않으면 난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야!”옆에 있던 진홍민도 나서서 장용호의 말을 거들었다.“하현, 당신은 그냥 나쁜 사기꾼일 뿐이야!”“당신이 여기서 지켜보고 있다면 장용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을 거야!”“왜냐하면 당신이 몰래 촬영해서 그 영상을 누구한테 팔지 모르는 일이니까!”“당신 같은 사람이 못 할 짓이 뭐야?”간민효는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하지만 하현이 손을 가로저으며 그녀를 만류했고 이어 장용호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따가 기운을 풀어주려고 마지막 한 수로 침을 놓을 때 꼭 명심해. 반드시 주사 광물을 찍어야 해.”“풀어진 기운은 몸 안에 유입되어야 해. 공중에 함부로 흩어져서는 안 돼.”“그렇지 않으면 황보정은 숨이 막혀서 바로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그렇게 되면 당신은 사람을 구하기는커녕 오
장용호는 진홍민의 눈빛을 알아듣고 헛기침을 하며 희미한 미소를 보이다 입을 열었다.“황보대사님, 친한 사이일수록 돈 관계는 확실히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요즘 그런 소문이 들리더라고요.”“누군가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이 집복당을 무료로 준다고요, 사실입니까?”황보동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진홍민을 쳐다본 뒤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맞아, 당신이 내 손녀를 구해 줄 수만 있다면 이 집복당을 가져도 돼.”“게다가 우리 황보 집안을 잇게 되는 거야.”황보동의 말을 듣고 진홍민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장용호, 걱정하지 마. 우리 이모할아버지는 한번 내뱉은 말은 절대로 지키는 사람이야!”“그래도 당신이 안심을 못 하겠다면 내가 나서서 보증할게!”“퍽!”황보동은 다른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기 귀찮아 서가에서 계약서 한 장을 꺼내 장용호 앞에 내던지듯 내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난 이미 계약서까지 다 준비해 두고 있었어.”“누구라도 내 손녀를 구해 낸다면 바로 이 계약서를 가져갈 수 있어.”진홍민은 흥분된 표정으로 계약서를 얼른 낚아채 눈을 반짝이며 살펴보았다.“맞아. 이 계약서는 원본이고 유효해. 양측이 여기 서명만 하면 돼.”“좋아요. 황보대사님이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니 저도 모든 걸 다 쏟아 보겠습니다!”“여러분들에게 주역에서 가장 뛰어난 풍수술과 화자결을 보여드리죠!”말을 마치며 장용호는 호탕한 웃음을 보인 뒤 들고 있던 꾸러미에서 은침 한 개와 붉은 주사 광물을 꺼냈다.“우선 황보정의 온몸에 가득 찬 살기를 제거하여 그녀의 몸을 회복시킨 다음 기력을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하현은 장용호의 말을 듣고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러자 장용호는 바로 은침을 쥐고 소독한 후 약간의 주사 광물을 묻힌 후 천천히 황보정의 눈썹 위에 찍었다.이를 지켜보던 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시작부터 틀렸어.”장용호는 이 말을 듣고 미간
서류 뭉치에는 하현의 사진과 철인도 완벽하게 찍혀 있었다.진홍민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허! 가짜 증명서인 게 틀림없어!”그녀는 냉소를 연발했다.“이모할아버지, 정말로 이 사기꾼을 믿기로 하신 건 아니죠?”“야! 사기 치려고 별짓을 다하는구나!”진홍민의 비아냥거림에 줄곧 입을 열지 않았던 장용호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이며 앞으로 나왔다.“황보대사님, 어디서 이런 사기꾼을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요.”“왜 이런 사기꾼을 믿게 된 거예요? 도저히 모르겠어요.”“전 단지 지금 황보정의 상황은 우리 만세당 말고는 절대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실히 말해 두고 싶어요.”황보동은 자신감 넘치는 장용호의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이유가 뭔가?”“이유요?”장용호는 팔짱을 진 채 도도한 표정으로 말했다.“난 주역의 ‘화자결’을 전수받았기 때문이죠.”“세상의 모든 재앙을 다 물리칠 수 있다고요!”‘화자결’이라는 세 글자를 듣고 황보동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뭐라고? 주역?”“그럴 리가 없는데. 주역은 오래전에 전수가 끊겼는데.”“자네 날 속일 셈인가?”황보동이 의아한 눈빛으로 몰아붙이자 장용호는 더욱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말했다.“우리 할아버지는 얼마 전 진정한 고수에게서 가르침을 받으셨죠. 쉬쉬하며 음성적으로 전해지던 주역의 ‘화자결’을 몽땅 전수해 받았다고요!”“이걸 전수받은 풍수지리사는 죽은 사람도 살릴 수가 있어요!”여기까지 말한 장용호는 세상을 발아래 둔 사람처럼 기고만장하게 턱을 치켜들었다.“내가 보기엔 황보정은 천기를 누설한 죄로 이런 벌을 받은 거예요!”“내가 그녀를 그 업보에서 벗어나게 해 주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입니다.”이 말을 듣고 진홍민이 재빨리 끼어들었다.“이모할아버지, 어서 장 대사님을 오라고 하세요!”“그는 명문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절대로 남을 속이거나 하지 않을 거예요!”주역의 화자결?하현은 이를 듣고 어이가 없다는 듯 헛
진홍민이 적반하장의 자세를 보이자 하현은 그녀를 상대하기조차 싫어졌다.하지만 진홍민은 여전히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하현을 문밖으로 내쫓을 태세를 보였다.그때 황보동이 황급히 그녀를 가로막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홍민아, 진정해. 함부로 이러지 마!”황보정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언니, 나 괜찮아.”“괜찮다니?”“마침 내가 왔기에 망정이지 내가 아니었다면 넌 이미 죽은 목숨이 되었을 거야!”진홍민은 거만한 얼굴로 황보동의 손을 뿌리치며 하현 앞으로 걸어갔다.뺨이라도 한 대 때릴 듯 그녀의 행보는 거셌다.“개자식! 지난번 일은 아직 계산도 안 했어!”“우리 오빠의 일을 다 망쳐 놓고 이제는 감히 내 사촌동생한테까지 손을 쓰려고 해?”“흥! 사는 게 귀찮아?”“퍽!”하현이 손을 쓰기도 전에 옆에 있던 간민효가 갑자기 한 발짝 내디디며 손바닥으로 진홍민을 후려갈겼다.“하현한테 이 무슨 무례한 짓이야! 죽고 싶어?”간민효의 노기 어린 말투와 간 씨 가문이라는 신분에 진홍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분명 간민효를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방금 진홍민의 관심은 온통 하현에게 쏠려 있어서 옆에 있던 간민효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간민효가 왜 거기에 있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 거친 숨을 씩씩거렸지만 진홍민은 감히 간민효에게 뭐라고 대거리를 할 수가 없었다.진홍민은 얼굴을 가리고 표독스럽게 말했다.“이모할아버지, 보셨죠?”“감히 내가 한마디했다고 사람을 때리다니!”“이런 사람을 가만히 두면 안 되잖아요?!”지금 진홍민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초조했다.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런 게 아니다.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만약 정말로 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한다면?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눈독을 들이던 집을 엄한 놈이 차지하면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현이 정말로 이백억 집을
간민효 일행은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이 회랑에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 중 무도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선두에 서 있는 것이 하현의 눈에 들어왔다.남자는 체구가 약간 왜소했지만 얼굴에는 자신만만함이 가득 묻어났다.자세히 보니 그의 생김새가 장천중과 비슷했다.황보동을 본 젊은 남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황보대사님, 안녕하세요.”다만 인사를 하는 그의 표정에는 오만한 기운이 가득 풍겼다.“진홍민, 만세당 사람들을 데려왔구만?”황보동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젊은 남자를 잠시 위아래로 훑어본 뒤 입을 열었다.“당신이 장 대사의 손자, 장용호인가?”장용호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황보대사님, 기억력이 아주 좋으십니다. 그저 몇 년 전에 우연히 만났을 뿐인데 절 기억하시다니요!”그러자 진홍민이 희미한 미소를 내걸며 입을 열었다.“이모할아버지, 장용호는 정말 좋은 친구예요!”“그는 풍수지리로는 금정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예요!”“무엇보다 최근 내공이 훨씬 더 강하고 깊어졌어요!”“내가 정이를 생각해서 특별히 모셔온 사람이라고요.”여기까지 말한 진홍민의 눈동자에 의미심장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이 친구한테 정이를 한번 보라고 해 보세요. 어차피 지금은 다른 방법도 없잖아요?”황보동은 오만한 미소로 당당하게 서 있는 장용호를 바라보며 말했다.“솔직히 말하자면 자네 할아버지가 이미 손을 써 보았다네.”“하지만 실력이 모자라서 더는 어떻게 할 수 있다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했네.”“그리고 자네, 할아버지의 재주를 90% 이상을 전수받았다고 해도 아마 내 손녀를 치료할 수는 없을 거야.”황보동은 자신감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이미 하 대사를 불렀거든.”“하 대사가 나서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야.”황보동은 분명 만세당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금정 제일의 풍수사라 불리는 장천중은 아무것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우리 집을 산다고요?”황보정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할아버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에요?”황보동은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바로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아무리 총명한 황보정이라고 해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반신반의하던 그녀는 하현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숨결과 목소리를 들어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그런데 이 젊은 남자가 할아버지를 제압한 풍수대사라고?무슨 그런 농담을?!하지만 황보정은 평소 도도한 할아버지의 성품으로 봤을 때 하현이 정말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더라면 절대 할아버지의 눈에 들었을 리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이런 생각이 스치자 황보정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하현은 더 이상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하현이라고 합니다.”황보정은 하현에게 말했다.“하 대사님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다만 하 대사님은 절대 부담 가지지 마세요. 전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저는 천기를 누설해서 이런 벌을 받았어요.”황보정은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천기누설? 그래서 벌을 받았다고요?”하현은 옅은 미소를 보이며 담담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부담 느끼지 않으니까요.”황보정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하현, 그게 무슨 뜻이에요?”하현은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내 말은 이건 업보나 벌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해결할 수 있다는 거죠.”황보동은 하현의 말을 듣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하 대사, 정말 할 수 있겠는가?’예전 같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심지어 무당이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국내외 내로라하는 대사들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결과는 처참할 정도로 속수무책이었다.그런데 하현에게 방법이 있다고?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하지만 하현이 조금 전까지 보인 행동으로
집복당 후원과 앞뜰을 잇는 긴 회랑.회랑 양옆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꽃 사이를 숨바꼭질하는 금붕어들이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었다.이곳은 비록 오래되었지만 유명한 정원과도 맞먹는 유려한 풍광과 격조가 느껴졌다.아름드리나무가 테두리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고 연못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고즈넉한 정자, 단단한 선비의 기상이 넘치는 바위 정원, 그 사이를 유유히 유람하는 맑고 고요한 물줄기.더운 여름에도 이곳에서는 상쾌하고 서늘한 바람이 일렁거려서 무릉도원과도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가운데 있는 정자에는 흰색 긴 치마를 입고 단정하게 하나로 머리를 묶은 화장기 없는 여자가 있었다.그녀는 손에 나침반을 들고 있었는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그녀의 곁에는 오래된 죽간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촉감으로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칼로 빼곡하게 글자를 새겨 놓았다.눈이 멀고 온몸에 힘이 빠져도 글과 그림을 향한 열정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은 것 같았다.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현의 눈에서는 절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요즘 젊은 여자들 대부분은 겉모습을 꾸미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서 미인이란 미인은 도처에 널렸다.하지만 이렇게 기품 있고 우아한 여자는 찾기 어렵다.“할아버지, 정말 우리 집복당을 팔 생각이세요?”발자국 소리를 들은 듯 뭔가를 눈치챈 황보정이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표정을 말했다.“저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천기를 누설한 업보로 이렇게 된 거라고 말했잖아요?”“조상님들이 물러주신 이 집복당을 판다고 해도 내 병을 고쳐줄 사람을 구할 수 없어요. 다 헛수고라고요.”“그러니까 할아버지, 나중에 죽어서 조상님 뵐 낯도 없어서 전전긍긍하시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두세요. 제발 부탁이에요.”황보정은 글과 그림에 대한 열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장 중요한 착한 마음씨와 효를 심성에 장착하고 있었다.그래서 하현은 그녀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정아, 넌 내 하나밖에
하현의 몇 마디에 모든 문제가 줄줄이 해결되었다.손님들은 갑자기 우르르 몰려와서 하현이 자신의 문제도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그들이 믿고 떠받들던 황보동은 한켠에 방치되었다.하현은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등을 빠른 속도로 설명하며 근본적인 원인부터 해결책까지 한 번에 술술 늘어놓았다.다들 놀란 표정으로 하현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고 문제가 해결되자 감격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놀라운 것은 이 모든 과정에서 하현이 붉은 주사 광물을 가지고 각종 부적을 그려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이웃들은 모두 집복당에 젊은 신선이 왔다고 말하며 달려 나갔다.심지어 일부 아줌마들은 자기 딸이 몇 년 동안 시집도 못 가는 일까지 하현에게 도움을 청하고 나섰다.하현은 한 명 한 명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많은 의견과 해결책들을 제시했다.즉석에서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당사자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경우도 많았다.소위 풍수지리사들이 대부분 이와 같은 일을 한다.이 과정에서 황보동은 옆에서 하현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그는 들으면 들을수록 표정이 엄숙하고 경건해졌다.하현이 하는 말들은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서로 다 알고 지내는 이웃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평소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누구보다 황보동이 잘 알고 있었다.하현이 침착하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고 황보동의 눈빛은 어느새 그에 대한 경의로 가득 찼다.황보동의 기억 속에 그가 이런 광경을 본 적은 어린 시절뿐이었던 것 같았다.그래서 하현의 모습을 보자 황보동은 아련한 설렘마저 느끼게 되었다.결국 황보동은 자발적으로 책상 옆으로 가서 하현의 조수로 변신해 부적 그리는 것을 도왔다.“하 대사, 당신이 진정한 대사일세!”손님들이 모두 떠난 뒤에야 황보동은 하현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자네는 나를 훨씬 능가하는 재주를 가졌어!”“자네가 이 집복당을 이어간다면 그건 모든 사람들이 복을 얻는 것과 같아!”그의 인생에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