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치코트를 입은 하문천은 최고 가문의 기품을 자아내며 하현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그의 얼굴에 하현이 찍어준 손바닥 도장은 의사의 처리를 마쳤는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다만 하현의 예리한 시선에는 아직도 옅은 자국이 남아 지난 일을 잊지 않고 알려주었다.하문준은 이 장면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하문천이 도대체 어떤 행동을 보일지 무척 궁금해졌다.“문주 아닌가? 문주께서 어떻게 여길 다?”“어? 하현 아닌가? 자넨 또 여기 어쩐 일이야?”하문천은 청하지도 않았는데 하현의 요트 갑판으로 올라와 친한 척하며 하현에게 말을 걸었다.마치 오늘 아침 하문천이 하현에게 칼부림을 하려다 되레 하현에게 얼굴을 얻어맞은 일이 거짓말처럼 여겨질 정도로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하문천을 바라보았다.역시나 저 자리에 오를 만큼 속을 알 수 없는 늙은 여우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때린 자신의 손바닥은 아직도 얼얼한데 맞은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벌써 깡그리 잊은 모양새였다.능구렁이 같은 양반 같으니라고.하지만 하현은 하문천을 그냥 모른 척하지 않았다.“어르신, 여기서 또 보는군요.”“아침에 만났었는데 여기서 또 만날 줄은 정말 몰랐는데 말이죠.”“아침에 저한테 맞은 뺨은 괜찮으신지 모르겠습니다.”“진료받으시느라 치료비가 꽤나 들었겠죠?”“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젊은 혈기를 그만 주체하지 못하고 충동적이었네요.”“이렇게 하죠. 병원비, 제가 드리겠습니다.”“금액을 말씀해 주시면 수표를 끊어 드리죠.”하문천은 하현에게 화도 내지 않으며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하현, 뭐 그런 사소한 일 가지고 신경 쓰고 그래. 신경 쓸 거 없어.”“예전에 넷째가 상위에 오르기 전에는 모두 함께 총을 메고 전장을 누볐던 사이야.”“전쟁터에서 우리는 숱하게 상대한테 두들겨 맞았지.”“항성에 돌아왔을 때 권세가들은 그런 우릴 마구 비난하고 욕을 했지!”“그 순간 우리는 맹
찻잔을 든 하문천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손에 든 찻잔을 도저히 하문준에게 내밀 수가 없었다.그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하문준을 쳐다본 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넷째야. 네가 문주가 된 지 오래라서 이제 형제애가 많이 없어진 것 같구나.”“부잣집 사람들은 정이 없다는 말 난 안 믿었는데 이제 믿을 수밖에 없겠군.”하문준은 냉랭하게 말했다.“형님, 할 말이 있거든 바로 말씀하세요. 시간 낭비하지 마시구요.”하문천은 하문준이 이렇게 자신을 괄시할 줄 몰랐다.그러나 하문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둘째 형님이 전화했을 거야.”“내 아들을 풀어줘.”하문준은 차갑게 물었다.“왜요?”“구봉이는 내 아들이야. 비록 잘못은 했지만 죽을 만큼 큰 죄는 아니잖아.”“집법당이 모든 것을 관리한다고 하지만 집법당이 감히 우리 눈치를 안 볼 수 있겠어?”“우리 가문에는 남자도 많지 않아. 구봉이는 그중 최고라고 할 만한 자식이야.”“그리고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를 네 양아들로 입적할 수도 있고.”“어쨌든 네 조카잖아. 모두 한 가족인데 이렇게 내버려둘 순 없잖겠어?”“가장 중요한 것은 구봉이의 평안이 우리 항도 하 씨 가문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거야.”“젊은 세대 중에 구봉이만이 하구천을 대적할 만해.”“구봉이가 없으면 노부인은 모든 기대를 하구천한테만 쏟을 거라고.”“그렇게 된다면 넷째 네가 물러날 날도 머지않게 되는 거야.”하문천은 이렇게 하면 하문준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그런 얘기하지 마세요!”하문준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사람을 풀어주라면 풀어줄 수 있어요. 둘째 형의 체면도 세워 줄 수 있구요!”“하지만 한 가지만 묻죠. 형님은 뭘 내놓을 건가요?”하문천은 어안이 벙벙했다.하문준이 이런 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이건 하문준의 성격과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하지만 하문천도 이것이
하문천이 떠난 후 하현은 일어서서 서류철을 몇 번 들춰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문주님, 무슨 생각이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이것들이 하문천의 손에 있었다는 걸 알았으니 당장에 빼앗아 그의 아들을 벌할 수도 있었습니다.”“이렇게 굳이 나서서 하구봉을 풀어주지 않아도 되구요. 게다가 복직이라니요?”“득보다 실이 더 많지 않습니까?”하문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이것들을 내가 찾은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나에게 준 것인지는 천지 차이야.”“적어도 노부인 앞에서는 완전히 다른 얘기지.”“하구봉을 풀어준 건 어쩔 수 없었어.”“그를 풀어주지 않으면 내가 무슨 핑계로 내 수양딸 하수진을 풀어줄 수 있겠는가?”하현의 눈동자가 약간 움츠러들었다.보아하니 하문준은 이미 많은 포석을 두고 일을 꾀하고 있는 듯했다.이렇게 되고 보니 정말 이번 노부인의 생신날은 대단한 잔치가 열릴 모양이다.하현은 눈빛을 반짝이며 하문준의 초대에 사양하지 않고 응답했다.“문주님, 노부인의 생신 잔치에 제 자리도 부탁드리겠습니다.”“그런 멋진 날 제가 빠지면 섭섭할 것 같아서요.”하문준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하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걱정하지 말게. 자네가 오지 않더라도 이미 자네 자리는 비워둘 참이었어!”“항도 하 씨 가문 노부인의 생신날 가문의 차기 주인이 결정되는 거야!”“이보다 더 큰일이 있을 수 없지!”“그런 날 자네가 동참하지 않는다면 정말 섭섭한 일이지 않겠나?”“꼭 참석하겠습니다.”하현도 사양하지 않고 확답했다.하문준이 하수진을 빼내려고 하는 걸 보니 필시 하현이 제안한 것을 고려한 것이 분명했다.하현은 상당히 기대가 되었다.결국 차기 문주 자리가 하수진에게 떨어진다면 하구천과 그의 일행들은 얼마나 분통해하는 얼굴을 할지 벌써부터 궁금해서 조바심이 생길 지경이었다.“아, 그렇지 이미 용옥 측과는 연락을 취해 두었으니 곧 그들이 내 수양딸을 데려올 거야.”“이치대로라면 아버지인 내가
항성 빅토리아항의 크루즈 터미널.적막이 밤바다를 가득 매운 이곳에 요트 한 척이 천천히 정박을 준비하고 있었다.해안가에는 벤츠 몇 대가 일자로 늘어섰고 화려한 옷차림으로 무장한 남녀 십여 명이 차 안에서 내려 정박하는 요트를 향해 걸어 나왔다.그동안 어떤 표정을 지었건 간에 그들은 지금 한껏 미소를 짓고 있었다.하구천은 입가에 미소를 드리우며 어디 있는지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용옥의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한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옷차림은 특별할 게 없었지만 양손에 붕대와 깁스를 한 것이 눈에 띄었다.하구봉이었다.하구봉이 이렇게 되기를 은근히 바랐던 하구천이었지만 용옥에서 나오게 된 하구봉을 보니 하구천은 감회가 새로웠다.그는 하민석, 곽영준 등과 함께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할 수 없는 감격에 휩싸인 표정으로 하구봉을 맞았다.“하구봉, 이번에 네가 이렇게 나올 수 있게 된 건 많은 형제들이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빈 덕분이야.”“앞으로 좋은 것도 많이 사 주고 잘 보답해 줘.”“작은 문주.”하구봉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공손히 하구천에게 인사했다.하구봉은 그동안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단지 자신이 풀려난 것을 보니 자신의 운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복직하고 호위대를 장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여전히 자신이 항도 하 씨 가문에서 가장 핵심적인 존재임을 보여주는 방증이었다.하구천과 인사를 나눈 후 하구봉은 담담한 표정으로 하민석과 곽영준 일행과 눈인사를 했다.어쨌든 하구봉도 항도 하 씨 가문 직계였으므로 하구천을 대면할 때를 제외하고 그 외 사람들에겐 여전히 위엄 있는 태도를 보였다.“돌아왔으니 됐어. 내가 손을 좀 써 달라고 한 것 때문에 네가 옥고를 치르게 된 거 정말 미안해. 내 잘못이야.”하구천은 호방하게 하구봉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그렇지만 걱정하지 마. 네가 고생한 거 내가 다 갚아줄 테니까.”“이번엔 체면을
하수진을 바라보는 하구천의 표정이 복잡해졌다.상대방이 그들의 뜻에 동참할지 어떨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흩어진 후에야 천천히 걸어갔다.하구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하수진을 정면으로 바라본 후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에게 다가갔다.“하수진, 돌아온 걸 환영해.”“우리가 마침 구봉이의 환영회를 하려던 참인데 너도 같이 갈래?”하수진은 하구천을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보다가 하구봉과 자신이 왜 이렇게 풀려나게 되었는지 알아차렸다.자신이 나온 것은 링에 올라 하구천과 싸우라는 의미였다.하구천도 분명 이런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하구천이 깍듯한 자세로 자신을 맞이하다니 하수진은 조금 의아했다.“하구천, 이런 중요한 시기에 내가 돌아온 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 거야.”“환영회에 같이 가자고? 진심이야?”하수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담백하게 말했다.하구천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하수진이 이 중요한 시기에 나타났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그가 모를 리 없었다.그가 이미 소식을 들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설령 소식을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전개였다.하문준 슬하에는 아들이 없었다.결국 하문준이 하구천을 대항해 내밀 수 있는 카드는 수양딸 하수진밖에 없다.하지만 수양딸은 수양딸일 뿐이다.어떻게 항도 하 씨 가문 직계인 자신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기껏해야 링 위의 스파링 파트너 정도밖에 되지 않겠는가?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자 하구천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 가득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하수진, 네가 풀려난 이유를 너도 알고 있고 나도 알고 있어. 그렇지만 넌 절대로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수 없을 거야.”“그렇다면 차라리 우리 둘이 손을 잡는 건 어때? 그러면 나중에 항도 하 씨 가문은 결국 너와 나의 손에 넘어올 테니까 말이야.”“원한다면 문주 부인 자리까지도 약속할 수 있어.”“문주 부인?”하수진은 손에 들고 있던 신문지를 공중에 던졌
”맞아, 예전에는 내가 딸인 걸 줄곧 후회했어.”“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하수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남자면 어떻고 여자면 어때?”“사내대장부는 포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하지만 어떤 이들은 또 이렇게 말해.”“여자지만 남자에게 뒤지지 않겠다고!”“난 오랫동안 기다려 왔어!”“십 년을 넘게 기다려 왔다고!”“오직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던 거야!”“조금도 물러서지 않을 거야.”“내가 대단하다는 걸 보여주려는 게 아니야.”“여자여도 할 수 있다는 걸 모두에게 알리고 싶어!”하현은 감탄해 마지않으며 박수를 쳤다.“대단해. 역시 하 씨 가문 문주의 수양딸다워!”“어쩐지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하구천이 당신과 손을 잡으려고 하더라니.”“심지어 문주 부인의 자리를 내놓고 당신을 회유하려 들었어.”“그는 당신처럼 태어난 여자는 돈과 물욕에는 넘어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당신이 원하는 것은 오직 권세욕뿐이라고 생각한 거지.”“항도 하 씨 가문에선 오직 문주와 문주 부인만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야.”“만약 그가 당신을 그의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의 원대한 꿈에 당신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거야.”하수진이 담담하게 말했다.“예전의 나였다면 걸림돌로 작용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달라.”하현은 옅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이런 일로 하수진과 쓸데없는 언쟁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하문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하수진은 분명 과거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하현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문주께서 오늘 여기에 날 보낸 것은 당신을 잘 대접하길 원하셨기 때문이야.”“그런데 우리 사이가 좀 그렇지?”“밥은 안 먹어도 될 것 같고, 그럼 어디로 갈 거야? 가는 데까지 내가 데려다줄게.”하현은 빨리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싶었다.하구천에게 그녀를 보낸 다음 둘이 죽기 살기로 싸
하수진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하현을 바라보았다.자신을 받아줄 마음이 정말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하수진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더니 무덤덤하게 말했다.“알았어. 알았으니까 진정하라고.”“내가 나왔을 때 아버지는 이미 나한테 분부를 내리셨어.”“아버지가 나한테 내리신 임무는 노부인 생신 전에 항도 하 씨 가문 산하의 항도 재단을 완전히 손에 넣는 거야.”“항도 재단의 모든 권한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하구천과 싸워 볼 만해.”“이렇게 열심히 나서서 하면 내가 뒤에서 열심히 깃발을 흔들며 당신을 응원할게!”하현이 미소를 지으며 항도 재단 사무실이 있는 곳을 검색해 최문성에게 얼른 사람을 보내라고 전했다.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만 수행하고 얼른 빠질 생각이었던 것이다.하수진은 좌석에 놓여 있던 태블릿 PC를 들어 메일을 확인하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오늘 아침 아버지가 항도 재단 주식을 모두 내 명의로 양도하셨어.”“이제 딱 30프로야.”“하지만 계약서에 서명할 때 내가 한 가지 건의했어.”“내가 받은 주식 절반의 지분을 하 세자에게 넘기자고 말이야.”“간단히 말해서, 이제 항도 재단을 잘 조정해 나가는 일에 당신 하 세자도 힘써야 한다는 얘기야.”“그리고 한 가지 더.”“항도 재단의 회장은 하문성으로 한다는 것.”“하구천의 친아버지이자 내 큰아버지.”“항성과 도성에서 당신을 가장 죽이고 싶어 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지.”하현은 원래 완강히 거절할 생각이었다.그러나 하문성이라는 세 글자를 듣고는 바로 승낙했다.어찌 되었건 하수진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경험이 미숙한 젊은이일 뿐이다.그들이 마주할 사람은 하문성이었다.항도 하 씨 가문에서 지금의 문주 자리에 오를 뻔했던 사람.항성과 도성 두 도시의 혼란을 빨리 잠재우고 싶었던 하현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링에 오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하현과 하수진이 항도 재단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뒤쪽에는
”퍽!”하구천은 신경질적으로 태블릿 PC를 던졌다.“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항도 재단을 손에 넣어서 내 기반을 무너뜨리려 한다고?”하구천의 얼굴에 살벌하고 음흉한 기운이 끓어올랐다.“수년간 항도 재단은 항도 하 씨 가문 큰아들인 우리 집안 손에 있었어.”“그깟 외부인들이 뭔데 우리 집안의 물건에 손을 대?”“우리 집안을 뭘로 보고 그딴 짓을 하겠다는 거냐구?”...하구봉과 간단히 식사를 하고 그를 데려다준 후 하구천은 한시가 급한 사람처럼 바로 빅토리아항 근처에 있는 오피스텔로 돌아갔다.그가 어두운 표정으로 걸어들왔을 때 하백진은 언제 전통 의상으로 갈아입었는지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그녀가 연주한 것은 한밤의 야상곡으로 끝없는 쓸쓸함과 깊은 한기가 서린 곡이었다.다만 지금 이 순간 하구천에겐 세계의 명곡을 가져와 본들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는 앞으로 나가 ‘봥'하고 아무렇게나 건반을 눌러버렸다.“고모, 지금이 어느 때인데 한가롭게 피아노나 치고 앉아 있어요?”“전에 하구봉은 못 나올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그런데 오늘 하구봉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난 마중까지 나갔다고요!”“셋째 숙부 마음대로 된 거 아닌가요?”하백진은 눈썹을 약간 찡그리며 조곤조곤 말했다.“셋째 오빠가 하구봉을 빼내기 위해 적지 않은 대가를 치렀을 거야. 만약 내 예상이 맞다면 십 년 전 비밀에 대한 자료는 지금 넷째 오빠 하문준에게 가 있을 거야.”“그렇지만...”하백진은 희미한 미소를 띠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십 년 전 그 일은 하문준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어.”“진실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그 마지막 가림막을 들추지는 못할 거야.”“이렇게 된 이상 십 년 전 일은 오히려 중요하지 않게 되었어.”“적어도 이 일로 셋째 오빠는 계속 분탕질할 카드를 잃었고 하구봉도 반은 폐인이 된 상태이니 당분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기회를 봐서
허탈해하는 하현의 표정을 살피며 설은아가 입을 열었다.“하현, 뭘 선물하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당신이 우리 결혼기념일을 기억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하현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하현, 오늘 내가 당신한테 전화를 한 것은 더 이상 우리의 과거 일을 언급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어서였어.”“김탁우와의 사이는 이미 멀어졌어.”“엄마 기분이 좀 나아지면 내가 직접 말씀드릴 거야.”“당신이랑 재혼할 거라고.”“그러니 더 이상 우리 엄마랑 싸우지 마, 알았지?”설은아는 하현을 무척이나 아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게다가 그녀는 간민효를 마주했을 때 하현을 빼앗길까 봐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다.하현은 쓴웃음을 지었다.다른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다만 최희정은 아마 두 사람의 재혼을 승낙하지 않을 것이다.하현이 그리 강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최희정이라는 여자는 혼자서 모래폭풍도 무찌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박하는 어느새 설 씨 집안에 도착했다.하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먼저 들어가. 난 요즘...”“내려! 여긴 당신 집이야!”설은아는 억지로 하현을 차에서 끌어내렸다.“오늘 밤 여기서 자.”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설은아의 손에 이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집안에 들어가니 식탁에는 이미 음식이 그득하게 차려져 있었다.최희정과 설재석 외에 그들의 양아들 이영산과 며느리 장리나도 함께 모여 있었다.네 사람이 82년산 라피트를 마시며 얼굴이 볼그레한 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십여 개의 선물 상자가 쌓여 있었는데 그중 몇 개의 상자에는 김 씨 가문 로고가 박혀 있었다.김탁우가 방문한 것이 틀림없었다.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하현이 나타나자 최희정의 낯빛이 일그러지며 순식간에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자네, 여긴 어쩐 일이야?”“와서 밥 먹어.”로열 회관의 일로 설재석은 여전히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고
”하 대사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아마 지금쯤 감옥에서 죽었을 거야!”“당신한테 하루의 시간을 주겠어! 우리 왕 씨 가문의 돈 일억을 갚지 않으면 바로 경찰서에 신고할 거야!”“감옥에 들어갈 준비나 하라고!”“그럼 그만 꺼져!”왕부인이 다시 손을 휘둘러 우소희의 얼굴을 날려 버렸다.망했다!완전히 망했다!우소희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며 끊임없이 통곡했다....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설은아는 하현의 차에 앉아 의문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도대체 우소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어떻게 하다가 왕 씨 가문에 일억을 빚진 거냐고?”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왕 씨 가문 딸 왕자혜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는데 마침 내가 그녀를 구해 주게 되었어...”설은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 당신이 어떻게 사람을 구해? 당신이 의술을 알아?”하현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모르지. 난 단지 차에서 그녀를 빼내서 폭발하기 직전의 차에서 구해 준 것뿐이야...”“그때 마침 우소희가 구급차 간호사로 왔는데 내가 한 일을 자신이 한 것으로 둔갑시켜 공을 가로챘지.”“그래서 왕 씨 가문에선 고마움의 뜻으로 그녀에게 일억을 준 거야.”“나중에 왕문빈의 부인이 진실을 알게 되었고 우소희의 잘못이 드러났지.”“하지만 부인은 우선은 딸의 부상이 더 염려되어서 잠시 우소희 일은 따지지 않았던 거야. 그런데 뜻밖에도 우소희가 그 돈을 먹고 튈 줄은 몰랐지.”“게다가 그 돈으로 사기를 쳐 돈 많은 거물을 낚은 거야...”하현은 기가 차다는 듯한 얼굴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그렇게 된 거구나.”설은아는 그제야 모든 걸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우다금 모녀가 휘룡만 집을 산다며 뛰어다니더라니.”“우소희가 아주 눈먼 거물을 잘 속인 거였군!”하현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만 안타깝게도 운이 조금 모자랐던 거야. 여기서 부인을 만났으니.”“집도 날아가고
”저는 왕 사장님이 주신 휘룡만 1호를 보러 왔습니다.”하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휘룡만의 문턱이 이렇게 높은 줄은 몰랐습니다. 매니저가 다짜고짜 절 도둑놈으로 몰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요.”“왕 사장님이 저한테 뭐라고 해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하현의 말을 듣고 왕문빈의 부인은 눈꺼풀이 펄쩍 뛰었다.그녀는 순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손을 휘둘러 남자 매니저의 얼굴을 때렸다.“퍽!”“개자식! 눈이 멀었군!”“하 대사님은 우리 왕 씨 가문 귀빈이야!”“그런데 도둑이라니?!”“네가 뭔데 함부로 그딴 소리를 해?!”“경찰에 신고를 한다고?”“감옥에 가둔다고?”“죽고 싶은 거야?”“꺼져!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옳고 그름도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사람을 얕보는 당신 같은 직원은 필요없어!”왕문빈의 부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하현이 누구인가?왕자혜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다.주 씨 가문 귀빈이자 풍수의 대가, 무도의 고수였고 심지어 자신도 그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해야 했던 사람이었다.그런데 감히 매니저 따위가 하현을 건드려?살기가 싫은 건가?왕문빈의 부인은 가까스로 하현의 용서를 얻은 상태였다.하현이 자칫 기분이 언짢기라도 한다면 왕문빈이 자신을 내칠 수도 있었다.남자 매니저는 일그러진 얼굴을 가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모님, 어떻게 저한테...”“촥!”왕문빈의 부인은 또 한 번 세차게 그의 얼굴을 때렸다.“꺼지라고!”“못 들었어?”“내가 다시 한 번 말해야 알겠어?”“내가 직접 널 끌어내야 속이 시원하겠어?!”남자 매니저는 얼굴을 가린 채 아무 반박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혹시라도 반박했다간 어떤 지경이 될지 그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왕문빈의 부인이 어떤 스타일인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순간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하물며 하현이 정
”그가 훔쳤든 아니든, 내가 여기 있는 한 그는 훔친 겁니다!”“왕 사장님 머리가 어떻게 되셨더라도 절대 휘룡만 1호를 파실 분이 아닙니다!”“두 분이 솔직히 인정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용서할 기회를 드리죠!”“그렇지 않으면 정말 경호원을 불러 경찰서로 데리고 가라고 할 거예요!”남자 매니저는 색기가 가득 흐르는 눈빛으로 설은아를 바라보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음흉한 속내를 슬쩍 비쳤다.설은아는 기겁하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그러자 남자 매니저는 더욱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여사님, 제가 여사님 얼굴을 봐서 특별히 두 분께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안 그러면 두 분도 같이 경찰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할지 모릅니다. 쓸데없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고요.”“공범으로 몰려 죄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남자 매니저가 이렇게 말하자 우소희는 순간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설은아, 우리 모두 피차 내막을 잘 아는 사람들이잖아?”“체면 때문에 일부러 하현한테 이런 뻔뻔한 일을 시킬 필요는 없는 거 아니야?”설은아는 그녀의 말에 기절할 뻔했다.“뭐라고?”이때 하현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휘룡만 1호는 내가 산 게 아닌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주운 것도 아니에요.”“훔친 건 더더욱 아니고요.”“왜냐하면 왕 사장님이 저한테 주신 거니까요.”이 말을 들은 설은아는 약간 어리둥절해하며 믿기 어려워하는 표정을 지었다.“무슨 소리예요?”“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냐고요?!”“왕 사장님이 당신을 어떻게 안다고 그래요?”“어떻게 천억짜리 집을 당신한테 주냐고요?!”남자 매니저는 하현의 말을 듣고 ‘피식’하고 냉소를 흘리며 얼굴 가득 혐오의 빛을 띠었다.“당신은 정말 날 바보로 아는군요!”예쁘장한 여자 영업사원들도 모두 경멸하는 눈빛으로 하현을 노려보았다.나이도 많지 않은데 허풍이나 떨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 못마땅했던 것이다.우소희도 입을 삐죽거리며 시큰둥한
하현은 이 말을 듣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집은 내가 산 것이 아닙니다...”“뭐라고요?”하현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남자 매니저가 눈에 한기를 가득 머금은 채 하현을 노려보았다.“이 카드키, 훔친 거죠?”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눈이 동그래졌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보았다.훔친 거라고?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훔친 카드키를 들이밀며 자신이 이 집을 산 거라고? 돌았나?!방금까지 하현을 우러러보던 사람들의 눈빛은 갑자기 돌변했다.그들은 방금 하현을 그런 눈으로 본 자신들을 탓하며 3분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다.설은아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살짝 변하며 약간 걱정스러운 듯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 매니저를 바라보았다.“방금 당신이 한 말, 꼭 책임져야 합니다.”“책임이라고요? 그 책임을 어떻게 지는지 제대로 알려드리죠!”남자 매니저는 손가락을 튕겨서 경호원 몇 명을 불렀다.“휘룡만 1호는 우리 휘룡만에서 가장 귀한 물건입니다!”“이 집은 외부에 판매된 적이 없었고 저당 잡힌 것도 없습니다!”“이곳은 왕문빈 사장님의 개인 별장입니다!”“카드키도 분명 왕 사장님 손에 있을 겁니다!”“그런데 그게 어떻게 외부인인 당신 손에 있단 말이죠?!”“설마 오다가 주웠다고는 말하지 마세요!”“오다 주운 게 휘룡만 1호 카드키라니요?!”“어서 말해 봐요! 이 카드키, 왕 사장님한테서 훔친 겁니까?”“솔직히 말하면 관대하게 처리해 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장 관청에 신고해서 당신을 감옥에 처넣어 버리고 말 겁니다!”남자 매니저는 위엄 있는 얼굴로 속사포처럼 하현을 향해 퍼부었다.이로써 그는 자신이 꽤 성공한 사람처럼 느껴져 우쭐해졌다.데릴사위를 호통쳤을 뿐만 아니라 설은아 같은 미녀 앞에 꽤나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어서였다.가장 중요한 것은 왕문빈이 잃어버린 카드키를 되찾았다는 것이다.엄청난 공로임에 틀림없다!어쩌
휘룡만 1호?!그 가치가 천억이라고?하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벼락을 맞은 듯 멍해졌다.방금까지도 싸움에서 이긴 수탉처럼 의기양양했던 우다금은 설은아가 손에 든 카드키를 보며 온몸이 굳어 버렸다.우소희는 자신의 뺨을 때리며 이것이 꿈이 아님을 확인한 뒤 설은아를 쳐다보았다.우소희의 눈빛에는 부러움과 질투로 이글이글 타올랐다.스스로 상류층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오건우조차도 이 순간에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천억짜리 선물이라고?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농담을!자신의 몸값을 다 쳐도 살 수 없는 액수였다!설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이게 휘룡만 1호라고?”하현이 담담하게 말했다.“맞아. 휘룡만 1호.”“당신 주려고 준비했어. 결혼 3주년 기념 선물이야.”하현의 말을 듣고 주변에 있던 많은 분양사 직원과 손님들이 몰려들었다.모두들 귓속말로 서로 속삭이며 하현을 한껏 우러러보았다.다들 돈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저렇게 쉽게 천억을 들여 집을 산 사람은 처음 보았다.이것이 진정한 토호의 모습이 아닌가!하현을 얕잡아 보던 우소희는 순간 억지로 웃음을 쥐어짰다.“설은아, 하현이 어떤 사람인지 우린 모르지만 혹시 당신도 잘 모르는 거야?”“저 사람 혼자 힘으로 천억을 덥석 내놓는다고? 허! 그렇담 암퇘지도 나무에 올라갈 수 있겠군!”우다금도 옆에서 이를 갈며 거들었다.“맞아. 하현은 데릴사위야. 한 달 동안 네가 준 용돈으로 빌붙어 사는 사람이잖아?!”“그런데 어떻게 휘룡만 1호를 살 수 있단 말이야? 농담 좀 그만해! 정말 지겨워!”“분명히 인터넷에서 카드키 하나 사 가지고 너한테 준 걸 거야!”“우리 앞에 보여 주려고 말이야!”“설은아, 내가 사람 된 도리로 하나 가르쳐 줄게.”“사람이 아무리 허풍을 떨고 싶어도 체면까지 내팽개치면 안 되지.”우다금은 세상 물정에 해박한 어른인 양 하현을 꾸짖었다.“하현, 내가 꼭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사람이 이렇게
하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오건우를 쳐다보았다.오건우는 왠지 얼굴이 화끈화끈거리며 통증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잠시 후 그는 이를 악물고 은행 카드를 테이블 위에 내놓았다.“살게요! 내가 사요!”“전액 현금으로!”“이걸로 하겠습니다!”오건우는 49호를 가리켰다.더 비싼 집은 도저히 그의 능력 밖이었다.특가 주택 정도는 그의 능력으로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다.그러자 분양 직원은 함박미소를 띠며 말했다.“네, 그럼 수속 도와드리겠습니다.”일사천리로 구매 계약서가 준비되었고 서명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오건우, 당신 정말 대단해! 날 이렇게 사랑하다니!”우소희는 터져 나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계약서를 들고 오건우의 얼굴을 감싸안으며 미친 듯이 웃었다.정말 사람 하나는 잘 골랐어!이렇게 비싼 집을 사 주다니!이게 웬 떡이야!오건우의 마음속에 그녀를 향한 사랑이 이렇게 크게 자리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하지만 오건우는 이 계약으로 거의 이백억을 탕진하게 되어 유동자금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그는 화류계에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그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하지만 우소희가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가졌으니 앞으로 인맥은 비길 데 없어 넓어질 것이다.우소희가 왕문빈의 딸을 구해 주었다니 인정상 왕문빈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그것만으로도 우소희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자신이 우소희와 결혼하기만 한다면 우소희의 인맥이 곧 자신의 인맥이 된다.그렇게 되면 자신도 당당하게 왕문빈 앞에 얼굴을 내밀 수 있게 되고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일만 남게 된다.그 순간을 상상하니 지금 아무리 불쾌하고 떨떠름해도 오건우는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그의 얼굴 위에 이내 환한 미소가 번졌다.우다금 모녀는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원래 그녀는 이십억짜리 집이라도 사면 설 씨 집안에 충분히 체면이 서게 된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지금
”어머! 오건우, 200억이잖아?”우소희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오건우에게 온몸을 기대어 애교를 부렸다.“당신 같은 부자한테 200억은 껌이잖아. 나 이 집 갖고 싶어!”우소희는 영리한 여자였다.오건우라는 황금거위를 이용해 거액의 집 한 채를 꿀꺽 삼키고 싶었던 것이다.어쨌든 그녀는 지금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겸비한 돈 많은 여자이지 않은가!그녀가 왕문빈 부부에게 체면이 깎인 일은 현재 병원 내부에서만 알고 있으며 온라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여전히 여신격의 의사로 알고 있다.겉모습이 꽤나 예쁘장한 우소희는 왕문빈의 일억을 가지고 고급 장소에 출입하며 재벌 2세들의 관심을 끌었다.수많은 추파 속에 오건우를 선택한 우소희는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그를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그래야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게 된다.오건우는 지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새파랗게 변했다.그러나 그도 체면을 의식하며 깊은 숨을 들이마신 뒤 가식적인 모습으로 사진을 몇 번 찍어 누군가에게 보냈다.오건우의 입에서 ‘어우, 와’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우소희, 방금 우리 집 풍수지리사에게 특별히 물어봤어.”“그런데 이 집은 보기에는 위치도 좋아 보이고 멀끔해 보이지만 결함이 굉장히 많다고 해.”“바람길의 입구에 위치해 있어서 교살과 노살을 막고 있대.”“그러니까 말이야. 이 집은 다른 사람들의 재난을 막아주고 있는 형상이어서 들어가서 살게 되면 병들고 아플지도 모른대.”“우리 대사님 말씀에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집 말고 다른 집이 있는지 둘러보자.”“가격대가 다 이렇게 비슷비슷한가요?”오건우는 분양 직원에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그 의미는 분명했다.더 저렴한 물건이 없냐는 뜻이었다.직원은 오건우의 눈짓에 웃으며 말했다.“손님, 이미 이 가격도 싼 거예요.”“이 집은 도로 입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특가를 진행하는 거예요.”“48호 가격은 250억이에요. 그리고 다른 건...”
”됐어! 소희야, 다른 사람 상처에 소금 뿌리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좋지 않은 행동이야!”이때 공작새처럼 차려입은 우다금이 나서서 원만하게 수습하려는 척 단아한 표정을 지었다.“하현이 단지 체면이 깎일까 봐 한번 해 본 소리일 뿐이야.”“우리야 이런 일이 많으니 스스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지만 저런 사람들이야 남하고 비교될까 봐 더 잘난 척하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어?”“게다가 우린 지금 상류층 사람이야. 저런 데릴사위랑 실랑이를 할 필요가 뭐 있어?”“격 떨어져!”“그러니까 얼른 집이나 보자고. 빨리 수속 밟아야 하잖아?”“저런 사람과 실랑이를 하다가 좋은 집을 놓치면 우리만 손해지!”우다금은 빈정거리면서 분양 단지를 설명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려 흡족한 눈빛으로 대형 분양 단지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이런 집을 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예비 사위 오건우도 이런 큰집에 헛돈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그저 칠팔십 평짜리 방 세 개 정도 되는 집이라도 살 수 있다면 감지덕지일 것이다.“자, 설은아. 하현. 당신들은 먼저 돌아가.”“우리는 집을 산 후에 개인 모임이 있어서 식사도 해야 해.”“그곳은 너무 고급스러운 자리라 여러 명을 데리고 가긴 좀 안 맞거든. 함부로 데려갔다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엄한 말이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안 그래?”하현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설은아가 끌고 나오는 바람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설은아는 돼먹지도 않은 우다금 모녀와 더는 화를 내며 상대할 이유가 없다고 느꼈다.아무런 의미없는 실랑이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만약 최희정이 가라고 그녀를 등 떠밀지 않았더라면 아마 설은아는 죽어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오건우는 설은아가 이렇게 떠나게 될까 봐 노심초사했다.자신의 부를 과시할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이다.오건우는 헛기침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우소희, 당신이 골라 봐. 마음에 드는 거 있는지 보자고.”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