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난영이 하문준에게 가문의 후계자를 바꾸자고 은근히 암시하던 그때.항성 중심부에 있는 은밀한 별장 안에서 잠을 자던 하백진은 요란한 벨소리에 잠을 깼다.잠결에 전화를 받은 하백진은 순간 안색이 돌변했다.벌떡 일어난 그녀는 방을 나와 하구천의 방문을 두드렸다.뭔가 불안이 감도는 얼굴이었다.“큰일 났어.”“하구봉도 잡혔대.”“행화루 저격수를 잡으러 갔다가 가든 별장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났대!”“망할 놈의 하현도 그 자리에 있었다니! 그놈이 하구봉의 뺨을 때리고 온갖 체면을 짓밟아 버렸대!”“이 중요한 순간에 하문준이 돌아오다니!”“그가 직접 나서서 하구봉의 오른손을 망가뜨렸다지 뭐야!”“더 기가 막힌 일은 하구봉을 호위대 책임자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가문 집법당이 그를 심문하도록 명령했다는 거야!”“당난영의 심복이 하구봉 대신 그 자리에 올랐어.”“하현 그놈은 하문준의 귀빈이 되어 그와 동등한 신분을 얻었어. 누구도 감히 그를 건드리지 못하게 한 거지!”“구천아,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야!”“이러다가는 네 주변에 사람이 점점 더 줄어들 거라구!”여러 가지 일을 준비하느라 마음이 많이 초췌해서 잠을 설친 하구천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그는 진동으로 설정해둔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이미 많은 사람들이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수많은 메시지를 보내왔다.그는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후 천천히 물 한 잔을 마셨다.“구천아, 너 도대체 지금 뭐 하는 거야?!”“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렇게 한가롭게 앉아 있는 거야?!”“지금 큰일 났다는 거 몰라?”하백진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안절부절못했다.“빨리 가문 집법당 사람들에게 하구봉을 풀어주고 하운빈을 그 자리에 앉지 못하게 해! 그렇지 않으면 호위대는 당난영의 손에 떨어진다고! 그러면 우린 손발이 잘린 꼴이 되는 거야!”“아니야. 이건 하문준이 내린 명령이었으니 네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게 아니야!”“가자, 우리 노부인을 찾
”내가 하구봉에게 명령을 내린 거예요.”“하지만 그것은 항도 하 씨 가문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행화루의 저격수를 심문하려고 한 거죠.”“행화루의 저격수가 당난영을 암살하려 한 것도 확실하니까요!”“난 항도 하 씨 가문 후계자로 내정된 소주로서 중요한 순간에 권력을 휘두른 거예요. 나의 잘못을 묻는다면 윗선에 물어보지 않고 자행했다는 거 하나뿐이에요. 그 외에 내가 또 무슨 잘못을 했나요?”“내가 하구봉에게 당난영을 치라고 명령한 것도 아니고 호위대 사람들을 함부로 행동하게 한 것도 아니잖아요.”하구천은 물을 마시며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게다가 방금 들은 바에 의하면 행화루의 저격수는 그 자리에서 이미 죽었다더군요!”“아까는 그런 말이 없었죠. 행화루 저격수가 잡혔다 정도의 소문만 돌았죠. 이는 당난영과 하현이 짜고 일부러 날 함정에 빠뜨리려고 수작을 부린 거라고요.”“다만 그들도 내가 아니라 하구봉이 함정에 빠질 줄은 몰랐겠죠...”“행화루의 저격수가 죽었대?!”하백진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녀가 제일 걱정하는 것이 살아있는 저격수의 입이었다.하지만 저격수가 죽은 이 마당에 증인이 없어졌는데 그녀가 뭘 더 두려워하겠는가?하구천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을 꺼내 방금 부하들이 보낸 동영상을 보여주었다.행화루 저격수가 구덩이에 묻히는 장면이었다.하백진은 이 광경을 보고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당난영 그 천한 여자가 하현이랑 붙어먹은 거 아니야?!”“오죽하면 둘이 손잡고 우릴 함정에 빠뜨리겠어?”“빌어먹을!”“그놈들 때문에 우리는 강력한 아군을 잃었어!”하구천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새옹지마가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내가 하구봉에게 움직이라고 명령했을 때 사실 그의 실패를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어요.”“하현이 반격할 줄은 예상했지만 문주가 마침 그때 돌아올 줄은 전혀 몰랐을 뿐이에요!”“그래도 상관없어요. 어쨌든 이번 일로 셋째 숙부님
당당한 하구천의 말에 하백진의 얼굴에는 마침내 미소가 번졌다.그녀는 기지개를 켜며 빙긋이 웃었다.“그럼 이제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누워서 셋째 오빠와 넷째 오빠가 죽기 살기로 싸우는 걸 보기만 하면 되는 거야?”하구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할 게 없는 건 아니에요.”“어쨌든 하구봉은 저격수를 잡아오라는 나의 명령을 듣고 간 거예요.”“지금 그가 이 지경이 된 데는 내 책임도 다소 있어요.”“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셋째 숙부와 하구봉은 분명 불만이 생길 거예요.”“그러면 내가 구해야 할까요?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봐요.”“적절하게 때를 봐서 구하는 시늉을 하고 생색을 내면 되죠. 우리가 최선을 다했다고 하구봉이 느끼게끔만 하면 되니까요.”“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그저 시늉만 하는 일이죠.”“해외에 오래 있었던 문주가 내부적으로 갈라진 항도 하 씨 가문을 도대체 어떻게 강하게 뭉칠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군요!”“우리가 사정한다고 하구봉을 놓아준다면 문주의 권위가 제대로 서겠어요?”“반대로 문주가 우리의 체면도 세워 주지 않고 하구봉을 처벌하려 한다면 셋째 숙부님의 체면은 또 어떻게 되겠어요?”“정말 기대가 되네요. 우리 하 씨 가문 문주께서 어떻게 처리하실지...”요 며칠 동안 하현한테서 연달아 처참히 당한 것이 하구천을 더욱 신중하게 만들었다.그의 목적은 간단했다.항도 하 씨 가문 문주로서 하문준의 위신을 손상시켜 자신의 지위에 도움이 되도록 하려는 것이다.하구천의 치밀한 계획에 하백진은 감탄해 마지않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구천아, 네가 이렇게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 놓으니 난 정말 마음이 놓여.”“이제 항도 하 씨 가문은 네 손에 달렸어. 틀림없어!”“앞으로 우리 항도 하 씨 가문이 네 손에 있다면 반드시 더욱더 빛날 거야. 5대 문벌의 우두머리였던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거라구!”하백진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구천은 옅은 미소를 지을 뿐 이에
항도 하 씨 가문 가든 별장.어젯밤 일련의 일 때문에 당난영은 하현의 안전이 걱정되어 그를 억지로 별장에 머물게 했다.게다가 그가 항성과 도성에 있는 동안은 반드시 가든 별장에 머물라는 말도 더했다.하현은 줄곧 거절했지만 결국 그녀의 호의를 저버릴 수가 없어 승낙했다.아무래도 가든 별장에는 사람들의 온기가 감도는 곳이어서 냉랭한 삼계호텔보다 훨씬 나은 거처이긴 했다.거기다 어젯밤 일이 전초전에 불과하다고 예감한 하현은 더더욱 가든 별장을 떠날 수가 없었다.그도 그들을 맞서기 위해 이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잠에서 깬 하현은 핸드폰을 열어 이메일을 확인했다.공해원이 보낸 대구의 최신 소식이 와 있었다.그의 말에 따르면 설은아는 대구에서 이미 공식적으로 상석에 올랐지만 그녀의 위신은 여전히 안정적이지 못했다.그녀의 집에는 그녀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줄곧 그녀의 지위와 출생을 의심하고 있는 형국이었다.설은아는 내부의 안정과 집안 내부 고위층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한다.하현은 설은아의 성장에 감탄해하며 한편으로는 그녀의 고군분투에 걱정이 되기도 했다.그는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볼까 생각했으나 잠시 고민 끝에 핸드폰을 내려놓았다.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냉철하고 매서운 눈빛을 유지할 수 있었다.그러나 유독 명목상의 아내를 대할 때만은 무덤덤하고 냉철하게 대할 수 없었다.공해원이 이메일에서 의도치 않게 설은아와 최희정에 관한 소식을 언급했기 때문이었다.최희정은 아직도 여전히 탐욕이 그득했다.몸도 많이 회복된 최희정은 대하의 상류층 도련님들과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으며 어떻게든 설은아와 연을 맺어 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천박한 장모의 눈에 하현은 설은아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대였을 것이다.천일그룹의 모든 자산을 그녀의 경연진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는 것은 이미 최희정의 역린을 건드린 꼴이었다.공해원에게 계속 그 일을 지켜보라고 답신한 뒤 하현은 한숨을 내쉬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한 무리의 사람들이 또 달려 나왔다.이 사람들은 항도 하 씨 가문 사람들이 아니었다.그러나 항성과 도성에서 내로라하는 젊은 세대였다.곽영준, 허지강, 진홍두 등이 모두 모습을 드러내었다.이 사람들은 항성과 도성을 이끄는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결코 얕잡아볼 상대들이 아니었다.하현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이 장면을 주시했다.그는 하구천의 사람들을 적잖이 죽였고 중립적인 위치에 있던 많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그런데 하구천이 뜻밖에도 이런 영향력을 행사할 줄은 몰랐다.항도 하 씨 가문 유력한 휴계자는 역시 명불허전이었다.게다가 하현이 유심히 보니 항도 하 씨 가문 다섯 아들 중 후사가 없는 넷째 아들 쪽을 제외한 모든 집에서 사람이 왔다.이들의 소란스러운 외침에 가든 별장의 발코니에 하나둘 구경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비쳤다.사여빈, 하운빈 등도 발코니에서 이 광경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하지만 항도 하 씨 가문 문주 하문준과 당난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하현은 무릎을 꿇은 하구천의 모습을 보고 그를 달리 평가하게 되었다.하구천의 이런 행동은 온전히 사죄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그러나 문주 부부를 압박하고 인심을 사는 데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게다가 그는 하문준을 딜레마에 빠뜨렸다.이 사람들과 강하게 맞서면 그들의 체면을 세워 주지 않는 꼴이 되는 것이고 이대로 물러서면 하문준은 앞에서 완전히 체면을 구기는 꼴이 되는 것이다.천군만마를 데리고 돌아와 아내를 구했는데 다음날 아랫사람에게 뺨을 맞았으니 가문의 문주로서 하문준이 꼬리를 내리지 않고 배기겠는가?간단히 말하자면 하구천의 이런 수법은 하문준의 손발을 꽁꽁 묶어 버린 셈이다.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하구천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이 장면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하현은 이미 하구천이 완벽한 파국을 원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러자 하현은 얼른 최영하에게 전화를 걸어놓고 조용히
사여빈이 이 점을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하문준이 이 일에 나서면 절대 해결될 수 없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는 그녀였다.그러자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하구천, 지금 문주를 압박하는 거야?”하구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사여빈, 아니야. 오해야!”“내가 어찌 문주를 압박할 수 있겠어?”“난 문주를 존경하고 흠모할 뿐 다른 감정은 없어!”“다만 난 문주님의 큰 기대를 받을 자격이 없어. 동생들을 잘 교육시키지도 못했어. 그래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해!”“모든 것은 다 내가 잘못한 거니까 다른 사람을 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하구봉 사건은 이미 가문 집법당으로 이관되어 처리 중이야. 집법당 쪽에서 공평하고 공정하게 처리한 후 공개적으로 결과를 전달해 줄 거야.”사여빈은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신이 유죄인지 아닌지, 당신들이 연루되어 처벌을 받게 될지 어떨지는 내 소관도 아니고 문주님 소관도 아니야. 오직 집법당이 결정할 일이야!”“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당신들은 이곳에서 문주를 압박하고 석고대죄하고 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야? 뭘 하려는 거냐고?”사여빈도 바보가 아니다.그녀의 눈동자는 매섭게 하구천의 얼굴을 향했다.그의 마음을 이미 간파한 것이다.“당신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런 연극을 하는 거야?”“내가 이렇게 나서야만 했어?”“하구천,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돌아가.”하구천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사여빈, 다 내 잘못이라니까! 벌은 내가 받아야 해!”“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나라고! 문주께서 날 벌하지 않으시면 노부인을 찾아가 벌을 내리라고 할 거야!”“노부인은 분명 우리에게 벌을 내리실 거야!”“하구천, 지금 당신 해 보자는 거야? 노부인을 이용해 우릴 협박하는 거냐고!?”사여빈은 불같이 화를 내며 얼굴을 붉혔다.멀리서 기자들이 슬금슬금 접근하는 모습이 사여빈의 시야에 들어왔다.기자들도 슬슬 흥분하기 시작하는 듯했다.어쨌든
하구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하현이 자신에게 어떤 큰 선물을 줄 수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하구천이 하현에게 물어보려던 순간 하현은 손가락을 탁 튕겼다.그 모습을 본 용문 자제들이 종이 상자를 안고 나왔다.“이것은 우리 하구천과 약혼녀의 약혼사진이야!”“하구천, 아직 당신 약혼녀가 누구인지 제대로 밝힌 적 없지?”“모두들 관심 없으신가?”용문 자제들은 기자들에게 손에 든 사진을 하나씩 나눠주었다.기자들은 원래 하구천과 하문준 간의 실랑이를 보려고 왔었다.그러나 사진을 본 기자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굳어졌다.사진 속의 한 쌍을 본 기자들의 눈에서는 빛이 폭발했다.사진 속 배경은 항성 빅토리아 항이었고 남자는 잘생기고 말끔한 하구천이었다.그러나 여자는 아무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여자의 얼굴에 피어난 환한 미소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듯했다.하구천과 이런 다정한 사진을 찍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을 설명해 주었다.도대체 이 여자가 누구인지 모두가 궁금해하던 그때, 하현은 용문 자제에게 다가와 손짓을 했다.사진 뭉치를 받아든 하현은 매서운 눈빛으로 하구천의 일행에게 사진을 뿌렸다.하얀 눈송이처럼 하늘을 날아오른 사진들이 후두둑 하구천 일행들 눈앞에 떨어졌다.그제야 사진을 똑똑히 보게 된 사람들은 얼굴빛이 확 변했다.그들은 모두 사진 속 여주인공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구천은 창백해진 얼굴로 말을 더듬거렸다.“마, 말도 안 돼! 이미 필름과 파일을 폐기했는데 어떻게 이 사진이 남아 있을 수가 있어?!”“말도 안 돼!”하현은 하구천 앞에 서서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하구천, 지금은 디지털 시대야. 인터넷으로 못하는 게 없는 시대라고. 사진 원판은 컴퓨터에 저장할 수 있고 USB에도 저장할 수 있다는 거 몰라?”“컴퓨터 고수들은 널렸어. 그냥 가서 삭제한 사진 복구하는 데 30분도 걸리지 않아.”“다만 당신도 참 독한 사람이야. 이 여자의 목숨까지 이용하려
”개자식!”하구천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하현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그의 행동은 문주를 압박하고 있던 하구천의 작전을 마구 흔들어 놓은 셈이었다.하구천은 갑자기 하현에게 달려들어 그가 가지고 있는 사진을 빼앗으려고 했다.“퍽!”하현은 손바닥 한 방으로 하구천을 때려눕혔다.그런 다음 하현은 아주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하구천, 미안해. 내가 뺨을 때리는 데 워낙 익숙해서 그만 손이 먼저 나가 버렸어. 실수였어. 미안.”하현의 말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하구천의 뺨을 때린 게 실수라고?저렇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을 하다니!하구천을 바보로 아는 것인가?하구천은 몸부림치며 일어섰고 안색이 말할 수 없이 일그러졌다.그는 앞으로 달려가 마구 소리를 질렀다.“저놈을 죽여! 죽여 버리라고!”순간 하구천의 머릿속에 치밀하게 세워져 있던 계획은 마구 헝클어졌다.승리를 거머쥐기 위해 애써 전략적으로 몸을 굽혀 왔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그의 뺨엔 벌건 손바닥 자국이 떠올라 그의 얼굴을 더욱 흉악스럽게 만들었다.오늘 하현을 결단 내지 않으면 이 일은 절대 끝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하구천의 뇌리를 스쳤다.하현은 매우 당황하여 쩔쩔매는 듯한 시늉을 하며 물러섰다.“하구천, 정말 실수였어. 정말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야.”“내가 방금 이렇게, 이렇게 때린 건...”“퍽!”하현은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들어 하구천의 얼굴을 쳤다.화를 참지 못하고 성질을 부리던 하구천이 다시 날뛰었고 힘 조절에 실패한 하현이 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사람을 죽일 듯이 달려들던 하구천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더니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에고, 내가 또 실수를 해 버렸네.”“하구천이 나한테 맞아서 기절을 해 버렸어.”“얼른 구급차 불러!”“병원비는 내가 다 내고 위자료도 지불할 테니까!”“어서 빨리!”기자들은 눈을
진홍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눈꺼풀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파르르 떨렸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다.자신이 한없이 무시했던 데릴사위가 이렇게 강한 자였다니?!그리고 자신이 의지했었던 남자가 이렇게 나약하게 무릎을 꿇고 얼굴이 부어터지도록 만신창이가 되다니!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복잡한 생각에 머릿속이 혼란스럽던 진홍민은 결국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그럴 리가 없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일어나! 모르는 건 죄가 아니야!”장천중과 장용호의 태도를 보고 잠자코 있던 하현이 결국 나서서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다만 앞으로는 꼭 기억해야 해. 우리가 풍수술을 배우는 것은 겉치레를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허세를 부리려고 하는 것도 아니야.”만약 오늘 자신이 마침 이 자리에 있지 않았더라면 장용호의 서툰 솜씨에 황보정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장용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습니다. 꼭 명심할게요! 우리 할아버지에게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지금부터 그 말을 꼭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겠습니다!”하현은 무릎을 꿇고 있는 장용호에겐 더 이상 눈길도 주지 않고 장천중을 쳐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화자결은 확실히 황보정의 체내에 있는 나쁜 기운과 사악한 기운을 없앨 수 있습니다.”“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기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은 될지 모르나 그녀의 두 눈을 뜨게 할 수는 없습니다!”“작은 배가 안정적으로 항해할 수 있게 하려면 파도도 바람도 잔잔해야 하지만 한편으론 작은 배의 능력이 충분히 좋아야 멀리 항해할 수 있는 이치와 똑같습니다.”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하현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그래서 화자결은 황보정의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아! 화자결로도 해결 못 하는 건가?”장천중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난 하 대사의 방법으로 하면 황보정의 문제를 말끔히 해결할 수 있을
순간 장천중의 얼굴엔 제대로 영글지 못한 모자란 손자를 향한 한탄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이 떠올랐다.그 후로도 그는 장용호의 얼굴을 계속 때렸다.어느새 장용호은 피범벅이 된 채 얼굴이 볼썽사납게 부풀어 올랐다.장촌중은 장용호의 멱살을 잡고 바로 하현 앞에 내동댕이치며 무릎을 꿇었다.“대사, 용서해 주게.”“내가 잘못 가르쳤네.”“내가 이놈에게 화자결을 알려줬어!”“배움이 부족한 이놈이 자네 앞에서 이런 무례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용서해 주게.”“제발 한 번만 봐줘!”대사?!황보동이든 장용호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장천중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진홍민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새어 나오려는 비명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금정 제일 풍수지리사라 불리며 대하 풍수계에서 지위가 상당한 만세당 장천중이 하현을 대사라 칭하며 무릎을 꿇을 줄은!이 소식이 금정 전체에 퍼진다면 아마 모두들 깜짝 놀랄 것이다.“이놈아, 잘 들어!”“화자결은 하 대사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가르쳐 주신 거야!”이때 장천중은 손을 들어 또다시 장용호의 얼굴을 내리쳤다.장용호는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하현은 내 스승일 뿐만 아니라 네 조상님이나 마찬가지인 분이야!”“넌 지금 조상님에게 대드는 하극상을 보인 거야! 오만하기 그지없는 행동을 한 거라고! 얼른 용서를 빌어!”장천중은 배움이 모자란 손자가 황보정의 몸을 살피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손자가 목숨을 잃을까 봐 얼른 달려온 것이다.역시나 모자란 자신의 손자는 잘난 척 기고만장해서는 도리어 하현에게 비법을 도둑질했다고 뒤집어 씌우고 있었던 것이다.이 광경을 본 장천중은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정신이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안하무인한 짓을 할 수 있는가?이런 행동을 하면 만세당의 그 수많은 명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거라는 걸 모르
황보정은 온몸이 약간 회복된 듯 보였으나 갑자기 오돌오돌 떨기 시작했다.약간의 추위를 느끼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장용호는 이를 보고 매우 흡족해하며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들어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은 자세를 보였다.“자, 이제 마지막 한 수를 쓰겠습니다.”“화자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죠.”“거기, 당신은 좀 나가주지. 내가 하는 방법을 몰래 훔쳐볼 생각하지 말고!”“이건 우리 만세당의 독점술이나 마찬가지니까!”“검은 속내를 가진 사람들이 이런 걸 배우면 곤란하지!”말을 마친 뒤 장용호는 팔짱을 낀 채 거만한 자세를 보였다.하현이 떠나지 않으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겠다는 표시였다.“독점술?”하현은 이 말을 듣고 냉소를 흘렸다.“장천중이 알려줬어?”“개자식! 어디서 함부로 내 할아버지 함자를 입에 올리는 거야?”“게다가 우리 독점술을 누가 알려줬건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장용호는 하현과 실랑이를 벌였다.“아무튼 간에 난 당신 같은 나쁜 놈은 보고 싶지 않아!”“여기서 당장 꺼져 주지 않으면 난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야!”옆에 있던 진홍민도 나서서 장용호의 말을 거들었다.“하현, 당신은 그냥 나쁜 사기꾼일 뿐이야!”“당신이 여기서 지켜보고 있다면 장용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을 거야!”“왜냐하면 당신이 몰래 촬영해서 그 영상을 누구한테 팔지 모르는 일이니까!”“당신 같은 사람이 못 할 짓이 뭐야?”간민효는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하지만 하현이 손을 가로저으며 그녀를 만류했고 이어 장용호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따가 기운을 풀어주려고 마지막 한 수로 침을 놓을 때 꼭 명심해. 반드시 주사 광물을 찍어야 해.”“풀어진 기운은 몸 안에 유입되어야 해. 공중에 함부로 흩어져서는 안 돼.”“그렇지 않으면 황보정은 숨이 막혀서 바로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그렇게 되면 당신은 사람을 구하기는커녕 오
장용호는 진홍민의 눈빛을 알아듣고 헛기침을 하며 희미한 미소를 보이다 입을 열었다.“황보대사님, 친한 사이일수록 돈 관계는 확실히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요즘 그런 소문이 들리더라고요.”“누군가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이 집복당을 무료로 준다고요, 사실입니까?”황보동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진홍민을 쳐다본 뒤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맞아, 당신이 내 손녀를 구해 줄 수만 있다면 이 집복당을 가져도 돼.”“게다가 우리 황보 집안을 잇게 되는 거야.”황보동의 말을 듣고 진홍민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장용호, 걱정하지 마. 우리 이모할아버지는 한번 내뱉은 말은 절대로 지키는 사람이야!”“그래도 당신이 안심을 못 하겠다면 내가 나서서 보증할게!”“퍽!”황보동은 다른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기 귀찮아 서가에서 계약서 한 장을 꺼내 장용호 앞에 내던지듯 내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난 이미 계약서까지 다 준비해 두고 있었어.”“누구라도 내 손녀를 구해 낸다면 바로 이 계약서를 가져갈 수 있어.”진홍민은 흥분된 표정으로 계약서를 얼른 낚아채 눈을 반짝이며 살펴보았다.“맞아. 이 계약서는 원본이고 유효해. 양측이 여기 서명만 하면 돼.”“좋아요. 황보대사님이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니 저도 모든 걸 다 쏟아 보겠습니다!”“여러분들에게 주역에서 가장 뛰어난 풍수술과 화자결을 보여드리죠!”말을 마치며 장용호는 호탕한 웃음을 보인 뒤 들고 있던 꾸러미에서 은침 한 개와 붉은 주사 광물을 꺼냈다.“우선 황보정의 온몸에 가득 찬 살기를 제거하여 그녀의 몸을 회복시킨 다음 기력을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하현은 장용호의 말을 듣고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러자 장용호는 바로 은침을 쥐고 소독한 후 약간의 주사 광물을 묻힌 후 천천히 황보정의 눈썹 위에 찍었다.이를 지켜보던 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시작부터 틀렸어.”장용호는 이 말을 듣고 미간
서류 뭉치에는 하현의 사진과 철인도 완벽하게 찍혀 있었다.진홍민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허! 가짜 증명서인 게 틀림없어!”그녀는 냉소를 연발했다.“이모할아버지, 정말로 이 사기꾼을 믿기로 하신 건 아니죠?”“야! 사기 치려고 별짓을 다하는구나!”진홍민의 비아냥거림에 줄곧 입을 열지 않았던 장용호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이며 앞으로 나왔다.“황보대사님, 어디서 이런 사기꾼을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요.”“왜 이런 사기꾼을 믿게 된 거예요? 도저히 모르겠어요.”“전 단지 지금 황보정의 상황은 우리 만세당 말고는 절대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실히 말해 두고 싶어요.”황보동은 자신감 넘치는 장용호의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이유가 뭔가?”“이유요?”장용호는 팔짱을 진 채 도도한 표정으로 말했다.“난 주역의 ‘화자결’을 전수받았기 때문이죠.”“세상의 모든 재앙을 다 물리칠 수 있다고요!”‘화자결’이라는 세 글자를 듣고 황보동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뭐라고? 주역?”“그럴 리가 없는데. 주역은 오래전에 전수가 끊겼는데.”“자네 날 속일 셈인가?”황보동이 의아한 눈빛으로 몰아붙이자 장용호는 더욱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말했다.“우리 할아버지는 얼마 전 진정한 고수에게서 가르침을 받으셨죠. 쉬쉬하며 음성적으로 전해지던 주역의 ‘화자결’을 몽땅 전수해 받았다고요!”“이걸 전수받은 풍수지리사는 죽은 사람도 살릴 수가 있어요!”여기까지 말한 장용호는 세상을 발아래 둔 사람처럼 기고만장하게 턱을 치켜들었다.“내가 보기엔 황보정은 천기를 누설한 죄로 이런 벌을 받은 거예요!”“내가 그녀를 그 업보에서 벗어나게 해 주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입니다.”이 말을 듣고 진홍민이 재빨리 끼어들었다.“이모할아버지, 어서 장 대사님을 오라고 하세요!”“그는 명문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절대로 남을 속이거나 하지 않을 거예요!”주역의 화자결?하현은 이를 듣고 어이가 없다는 듯 헛
진홍민이 적반하장의 자세를 보이자 하현은 그녀를 상대하기조차 싫어졌다.하지만 진홍민은 여전히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하현을 문밖으로 내쫓을 태세를 보였다.그때 황보동이 황급히 그녀를 가로막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홍민아, 진정해. 함부로 이러지 마!”황보정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언니, 나 괜찮아.”“괜찮다니?”“마침 내가 왔기에 망정이지 내가 아니었다면 넌 이미 죽은 목숨이 되었을 거야!”진홍민은 거만한 얼굴로 황보동의 손을 뿌리치며 하현 앞으로 걸어갔다.뺨이라도 한 대 때릴 듯 그녀의 행보는 거셌다.“개자식! 지난번 일은 아직 계산도 안 했어!”“우리 오빠의 일을 다 망쳐 놓고 이제는 감히 내 사촌동생한테까지 손을 쓰려고 해?”“흥! 사는 게 귀찮아?”“퍽!”하현이 손을 쓰기도 전에 옆에 있던 간민효가 갑자기 한 발짝 내디디며 손바닥으로 진홍민을 후려갈겼다.“하현한테 이 무슨 무례한 짓이야! 죽고 싶어?”간민효의 노기 어린 말투와 간 씨 가문이라는 신분에 진홍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분명 간민효를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방금 진홍민의 관심은 온통 하현에게 쏠려 있어서 옆에 있던 간민효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간민효가 왜 거기에 있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 거친 숨을 씩씩거렸지만 진홍민은 감히 간민효에게 뭐라고 대거리를 할 수가 없었다.진홍민은 얼굴을 가리고 표독스럽게 말했다.“이모할아버지, 보셨죠?”“감히 내가 한마디했다고 사람을 때리다니!”“이런 사람을 가만히 두면 안 되잖아요?!”지금 진홍민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초조했다.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런 게 아니다.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만약 정말로 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한다면?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눈독을 들이던 집을 엄한 놈이 차지하면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현이 정말로 이백억 집을
간민효 일행은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이 회랑에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 중 무도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선두에 서 있는 것이 하현의 눈에 들어왔다.남자는 체구가 약간 왜소했지만 얼굴에는 자신만만함이 가득 묻어났다.자세히 보니 그의 생김새가 장천중과 비슷했다.황보동을 본 젊은 남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황보대사님, 안녕하세요.”다만 인사를 하는 그의 표정에는 오만한 기운이 가득 풍겼다.“진홍민, 만세당 사람들을 데려왔구만?”황보동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젊은 남자를 잠시 위아래로 훑어본 뒤 입을 열었다.“당신이 장 대사의 손자, 장용호인가?”장용호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황보대사님, 기억력이 아주 좋으십니다. 그저 몇 년 전에 우연히 만났을 뿐인데 절 기억하시다니요!”그러자 진홍민이 희미한 미소를 내걸며 입을 열었다.“이모할아버지, 장용호는 정말 좋은 친구예요!”“그는 풍수지리로는 금정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예요!”“무엇보다 최근 내공이 훨씬 더 강하고 깊어졌어요!”“내가 정이를 생각해서 특별히 모셔온 사람이라고요.”여기까지 말한 진홍민의 눈동자에 의미심장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이 친구한테 정이를 한번 보라고 해 보세요. 어차피 지금은 다른 방법도 없잖아요?”황보동은 오만한 미소로 당당하게 서 있는 장용호를 바라보며 말했다.“솔직히 말하자면 자네 할아버지가 이미 손을 써 보았다네.”“하지만 실력이 모자라서 더는 어떻게 할 수 있다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했네.”“그리고 자네, 할아버지의 재주를 90% 이상을 전수받았다고 해도 아마 내 손녀를 치료할 수는 없을 거야.”황보동은 자신감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이미 하 대사를 불렀거든.”“하 대사가 나서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야.”황보동은 분명 만세당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금정 제일의 풍수사라 불리는 장천중은 아무것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우리 집을 산다고요?”황보정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할아버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에요?”황보동은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바로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아무리 총명한 황보정이라고 해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반신반의하던 그녀는 하현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숨결과 목소리를 들어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그런데 이 젊은 남자가 할아버지를 제압한 풍수대사라고?무슨 그런 농담을?!하지만 황보정은 평소 도도한 할아버지의 성품으로 봤을 때 하현이 정말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더라면 절대 할아버지의 눈에 들었을 리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이런 생각이 스치자 황보정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하현은 더 이상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하현이라고 합니다.”황보정은 하현에게 말했다.“하 대사님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다만 하 대사님은 절대 부담 가지지 마세요. 전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저는 천기를 누설해서 이런 벌을 받았어요.”황보정은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천기누설? 그래서 벌을 받았다고요?”하현은 옅은 미소를 보이며 담담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부담 느끼지 않으니까요.”황보정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하현, 그게 무슨 뜻이에요?”하현은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내 말은 이건 업보나 벌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해결할 수 있다는 거죠.”황보동은 하현의 말을 듣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하 대사, 정말 할 수 있겠는가?’예전 같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심지어 무당이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국내외 내로라하는 대사들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결과는 처참할 정도로 속수무책이었다.그런데 하현에게 방법이 있다고?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하지만 하현이 조금 전까지 보인 행동으로
집복당 후원과 앞뜰을 잇는 긴 회랑.회랑 양옆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꽃 사이를 숨바꼭질하는 금붕어들이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었다.이곳은 비록 오래되었지만 유명한 정원과도 맞먹는 유려한 풍광과 격조가 느껴졌다.아름드리나무가 테두리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고 연못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고즈넉한 정자, 단단한 선비의 기상이 넘치는 바위 정원, 그 사이를 유유히 유람하는 맑고 고요한 물줄기.더운 여름에도 이곳에서는 상쾌하고 서늘한 바람이 일렁거려서 무릉도원과도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가운데 있는 정자에는 흰색 긴 치마를 입고 단정하게 하나로 머리를 묶은 화장기 없는 여자가 있었다.그녀는 손에 나침반을 들고 있었는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그녀의 곁에는 오래된 죽간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촉감으로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칼로 빼곡하게 글자를 새겨 놓았다.눈이 멀고 온몸에 힘이 빠져도 글과 그림을 향한 열정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은 것 같았다.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현의 눈에서는 절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요즘 젊은 여자들 대부분은 겉모습을 꾸미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서 미인이란 미인은 도처에 널렸다.하지만 이렇게 기품 있고 우아한 여자는 찾기 어렵다.“할아버지, 정말 우리 집복당을 팔 생각이세요?”발자국 소리를 들은 듯 뭔가를 눈치챈 황보정이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표정을 말했다.“저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천기를 누설한 업보로 이렇게 된 거라고 말했잖아요?”“조상님들이 물러주신 이 집복당을 판다고 해도 내 병을 고쳐줄 사람을 구할 수 없어요. 다 헛수고라고요.”“그러니까 할아버지, 나중에 죽어서 조상님 뵐 낯도 없어서 전전긍긍하시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두세요. 제발 부탁이에요.”황보정은 글과 그림에 대한 열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장 중요한 착한 마음씨와 효를 심성에 장착하고 있었다.그래서 하현은 그녀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정아, 넌 내 하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