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하가 일행을 이끌고 삼계호텔 꼭대기 층에 나타났을 때는 이미 주변 정리가 끝난 상황이었다.타일 틈새에 묻은 핏물까지 말끔히 닦여져 있었다.여기저기 뿌려진 공기 청정제와 따뜻한 햇살에 지난밤의 피비린내는 모두 사라졌다.하현은 공중정원 한가운데 있는 긴 벤치에 앉아 있었다.벤치 앞에는 차와 다과가 예쁜 빛깔로 사람들의 시선을 유혹했지만 하현은 관심이 없는 듯 그저 찻잔을 기울이기만 했다.최영하가 나타나자 그는 최영하에게 앉으라며 손짓을 했다.항성과 도성에 온 이후 그는 많은 여자들을 알게 되었다.화소혜, 동리아, 강옥연 등등...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 정말 그의 최측근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최영하뿐이었다.게다가 최영하의 결단력 있는 일 처리가 하현은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이런 이유로 그는 용전 항도 지부에게 어젯밤 일을 맡긴 것이다.하현은 최영하가 잘 처리할 것이라는 믿음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어제 일, 당신 어떻게 생각해?”하현은 최영하에게 손수 차를 따라주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최영하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하현, 사송란은 그렇게 죽게 해선 안 되는 거였어.”“내가 죽인 거 아니야.”하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을 이었다.“그녀가 스스로 방아쇠를 당긴 거야.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을 무슨 수로 막겠어?”“현장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증언할 사람은 많아.”최영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문제는 그 사람들이 다 우리 쪽 사람들이라 진술에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거지.”“현장의 CCTV는 다 해킹된 상태라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이 사송란을 죽이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가 없어.”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왜?”“하구천과 오매 도관이 관청에 신고하려고 준비 중이야?”“항성의 왕법으로 날 제재하려고?”최영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경찰서 사람들한테 맡긴다면 우린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하지
”용오행 일은 해결됐어. 사송란 쪽은...”최영하는 하현이 분명 이 일에 대해 해결책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걸 알지만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 이 일은 하구천과 관련이 있다는 걸 말이야.”“다만 이 시체를 가지고 하구천을 찾아가도 아무 의미 없을 거야.”“우리가 아는 한 그는 말과 행동이 다르고 매정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니까.”“아마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남을 비난하려 들 거야. 우리한테 누명을 씌우려 한다면 더 일이 꼬여.”“그러니까 당신 뜻은...”최영하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끝을 흐렸다.그녀는 하현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지만 쉽게 믿어지지가 않았다.하현은 손가락을 튕기며 USB를 사송란의 주검 위에 던진 뒤 냉엄하게 말했다.“모든 CCTV가 다 망가져 있었지만 우리 쪽 사람들은 사송란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어 뒀지.”“시신은 오매 도관에 보내고 영상도 인터넷에 올릴 거야.”“아마 오매 도관에서 우리한테 뭐라고 하겠지.”하현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최영하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이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온다면 오매 도관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오매 도관의 일 처리 방식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하현은 이번 일의 피해자이지만 오매 도관은 일의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하고 반드시 선동자를 찾아내려고 난리를 부릴 것이다.그러면 이 선동자는 오매 도관의 미움을 살 것이고 항도 하 씨 가문 후계자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것도 어렵게 된다.최영하는 그제야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하현, 정말 천 리 밖을 내다보는 계획을 짰던 거구나!”“정말 대단해! 인정!”하현은 그녀에게 차를 한 잔 더 따라주며 조용히 말했다.“가능한 한 빨리 일을 정리해야지.”“그건 그렇고 나 누구한테 밥 한 끼 사야 해.”최영하는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밥을
하현은 시큰둥하게 말했다.“왜 우리가 접근해야 해? 당난영이 우리를 만나러 나오면 되잖아?”“당신이 날 대신해 말을 전해줄 사람을 좀 찾아줘. 강남 하 세자 하현이 당난영에게 간단한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 한다고.”하현의 단호한 표정을 보고 최영하는 약간 어리둥절했다.그녀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하현, 우리가 왜 이 중요한 순간에 당난영을 만나야 하는지 난 아직도 이해가 안 돼.”“곧 항도 하 씨 노부인의 생일이야. 그렇기 때문에 항도 하 씨 사람들은 당난영을 요주의 인물로 두고 바깥출입에 매우 삼엄하게 경계할 거야.”“왜냐하면 그들은 노부인의 생일에 당난영이 하구천을 자신의 아들로 삼겠다는 공표를 꼭 하게 만들어야 하거든.”“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당난영을 만난다는 건 항도 하 씨 가문에 정면으로 도발하는 행위야.”“권하고 싶지 않아.”하현은 단호하게 내뱉었다.“괜찮아.”“우리가 아무 행동을 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하구천이 가만히 우릴 내버려둘까? 어떻게든 우릴 죽이려고 하지 않겠어?”“그렇지만 노부인의 생일이 다가오니 하구천도 자신의 지위 확보를 위해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할 거야.”“하지만 그가 차기 문주 자리에 앉는다면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날 죽이려고 할 거야.”하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최영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그러니까 당신 말은...”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강남 하 씨 가문도 항도 하 씨 분파라 할 수 있어.”“강남 하 세자인 내가 항성에 이렇게 오래 와 있는 동안 항도 하 씨 문주 부인에게 간단히 식사 대접을 하는 거야.”“너무 과하지 않잖아?”“과하지 않지.”최영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마도 하구천이 머리가 좀 아프겠는데.”최영하는 하구천이 괴로워할 것을 기도하는 사람처럼 피식 웃으며 내뱉었다.하현은 원래 항도 하 씨 가문 일에 별로 흥미가 없었다.그러나 하구천이 계속해서 자신을 건드리자 그도
항성 태평산자락 허 씨 집안 별장.곽영준과 허지강은 서로 마주 앉았고 둘 다 안색은 좋지 않아 보였다.그들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차를 마시고 있는 하민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최신형 핸드폰을 가지고 시간을 보내던 하민석은 메시지가 뜨자 곽영준과 허지강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두 사람 모두 항성 S4니까 긴말하지 않겠어. 방금 내가 말한 거래, 할 의향이 있어?”“만약 할 의향이 있다면 오늘부터 우린 한 식구야. 내가 자리만 잡으면 두 사람 공은 잊지 않을 거야.”“만약 할 의향이 없다면 하구천한테 말할 수밖에 없지. 당신들 두 사람이 하구천을 배신하려 한다고. 그거면 충분해.”방금 하민석에게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하구천인 것이 분명했다.하민석의 말을 듣고 곽영준은 얼굴빛이 일그러지며 냉랭하게 말했다.“지금 하구천을 들먹이며 우릴 협박하는 거야?”“하민석,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증거도 없이 하구천이 당신 말을 믿을 것 같아?”“당신은 하구천이 키우는 개일 뿐이야!”“그렇지만 우리는 그와 호형호제하며 오랜 세월을 보냈어. 기르고 있던 개가 사실은 배은망덕한 늑대였다고 하구천에게 말한다면, 그 늑대가 항도 하 씨 가문의 문주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말한다면 하구천이 당신을 어떻게 할까? 가만 놔둘까?”하민석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가만 놔둘 거야.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난 그에게 충성을 다했고 심지어 항성 S4라는 이 타이틀도 하구천이 나한테 준 거야!”“하구천을 떠나서 내가 무슨 자격으로 윗자리에 앉겠어?”“그러니 그는 당신 말을 믿지 않을 거야.”“반면 여기 영상이 하나 있어. 이걸 다 보고도 지금처럼 침착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말을 하는 동안 하민석은 핸드폰을 꺼내 홀의 TV에 연결해 영상을 재생했다.“대장부가 태어났으면 천지를 한 번 호령해 봐야지!”“어떻게 남의 밑에서 오래 머물 수 있겠어!”화면 속 곽영준은 격앙되어 있었고 누구보다 오만방자
그 시각 항성 순환 고속도로에서는 검은 포르쉐 한 대가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다.운전자는 금옥회관의 임세인이었다.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뭔가에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그녀는 당난영의 사람으로, 당난영에게 정보를 전하기 위해 수년간 금옥회관에 숨어 있었던 끄나풀이었다.그런데 방금 그녀가 무심코 룸을 지나갈 때 마침 하백진과 하구천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구천아, 곧 네가 자리에 오를 거야. 하 씨 가문 문주가 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그 여자가 노부인 생신날 너를 양자로 삼는다면 넌 명실상부 하 씨 가문을 손에 넣게 되는 거야.”“나까지 합치면 항도 하 씨 가문에서 다섯 명이 널 지지하는 거야. 네가 항도 하 씨 문주 자리에 앉는 건 따 놓은 당상인 거지!”“물론 일이 성사되면 가장 먼저 그 여자를 처리해야겠지!”“그 여자는 너한테 별로 호의적이지 않아. 만약 다른 젊은 경쟁자가 나타난다면 그녀는 언제든지 방향을 틀어 버릴 수가 있어!”이를 들은 임세인은 깜짝 놀라 옆에 있던 꽃병을 깨뜨리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 버렸다.분명 누군가 그녀를 쫓아와 죽일 것이다.그녀는 다른 것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얼른 자신의 포르쉐 차량에 뛰어올라 그녀의 주인인 당난영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지금 이 순간 임세인의 머릿속엔 이 소식을 얼른 당난영에게 전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그래야 자신이 살 수 있었다.그녀의 차 뒤에는 언제 따라붙었는지 도요타 미니밴이 몇 대 줄지어 있었다.이 미니밴들의 속도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여서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백미러로 미니밴에 있는 잘생긴 얼굴을 확인한 임세인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항도 하 씨 가문 하은수!한때 강남 하 씨 4대 거물 중 한 명인 하은수였다.그는 항성에 온 뒤로는 더없이 조용하게 하구천의 심복이 되어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들었다.하은수를 보자 임세인은 방금 자신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음을 확신
살벌한 총소리와 함께 포르쉐 차량에는 선명한 총탄 구멍이 생겼다.그러나 총알은 아주 근소한 차이로 임세인의 곁을 비껴갔다.임세인은 총알 세례의 표적이 되어 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가슴을 쓸어내렸다.“쾅!”그때 갑자기 녹색 도요타 프라도 한 대가 후미진 곳에서 기척도 없이 나타나 달려오더니 도요타 미니밴의 후미를 사정없이 들이받아 버렸다.“쾅!”도요타 미니밴은 그대로 뒤집혀 공중에서 바닥을 한번 보인 뒤에야 땅에 떨어졌고 안에 있던 저격수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낭패한 얼굴로 씩씩거렸다.그러나 도요타 프라도의 굉음은 멈출 줄을 모르고 기세등등하게 계속 앞을 향해 질주했다.“쾅쾅쾅!”도요타 미니밴들이 한 대씩 뒤집히면서 옆으로 넘어졌다.검은색 마스크를 쓴 총잡이가 차에서 기어나오자마자 미니밴은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하은수는 자신도 타고 있던 미니밴에서 기어나왔고 그의 얼굴에 파편들이 날아들었다.그의 얼굴은 말할 수 없이 일그러졌지만 뭔가 이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한 미묘한 빛을 띠었다.도요타 프라도의 운전석에 앉은 최영하와 조수석에 앉은 하현의 얼굴을 본 순간 하은수의 얼굴에는 매서운 칼바람이 불었다.그는 멀리 보이는 하현을 향해 칼로 목을 베는 자세를 보인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람들을 데리고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현장에는 번호판이 없는 도요타 미니밴 두 대만이 불타오르고 있었다.여기에 총탄 구멍이 난 포르쉐와 널브러진 탄피까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낯선 번호로 온 메시지를 보자마자 하현은 공해원에게 출처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공해원의 실력은 여전했다.그는 단 십여 분 만에 누군가가 노점상에서 그 낯선 전화번호를 구입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그 후 공해원은 그곳의 CCTV를 해킹해 구매자의 얼굴을 특정했다.비록 구매자의 얼굴은 낯설었지만 그의 차는 하민석과 연관되어 있었다.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하민석이란 것을 듣자마자 하현은
하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최영하를 향해 손짓을 했다.기절해 있는 임세인을 차에서 끌어내린 뒤 최영하는 트렁크에 있는 구급상자를 가져와 임세인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너무 놀라 기절해 있는 임세인은 단순 외상 정도만 있어서 별로 심각할 것이 없었다.최영하는 포도당 링거를 임세인에게 꽂아 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은 뒤 임세인은 드디어 의식을 되찾았다.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하현과 최영하라는 것을 본 순간 그녀의 눈에 복잡 미묘한 빛이 스쳐 지나갔고 무슨 말을 하려 해도 말들이 입속에서 뱅글뱅글 맴돌았다.하현은 담담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에 있는 정원 너머의 건물을 바라보았다.그때 항도 하 씨 가문 경호원 한 무리가 돌진해 왔다.어찌 되었든 이곳은 항도 하 씨 가문 당주 부인 당난영의 별장이었다.누군가가 대문을 부수고 격렬한 총격이 벌어졌으니 경호원들이 들이닥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움직이지 마!”“당신들 누구야?”“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선두에 선 경호원은 직접 총을 들고 보란 듯이 안전장치를 풀며 경계하는 표정으로 하현과 최영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최영하가 앞으로 나오며 신분증을 보여주었다.“용전 항도 지부 최영하입니다.”“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은 당주 부인의 심복 임세인이구요.”“방금 임세인이 쫓기고 있는 것을 보고 지나가다 구했어요.”최영하는 막힘없이 단호하고 간단명료하게 말했다.최영하의 말을 들으며 그녀가 보여주는 신분증에 시선을 돌린 경호원들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부인의 심복이 쫓기고 있었다고?용전 항도 지부 책임자가 그녀를 구했다고?이 일은 아무리 봐도 우연의 일치는 아닌 듯 보였다.드라마도 이렇게는 찍지 않을 것이다!...십여 분 후 하현과 최영하 두 사람은 럭셔리하면서도 빈티지한 거실에 앉았다.최영하는 당난영의 신분 때문인지 적잖이 긴장하는 눈치
당난영이 나타나자 하현은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이 여인은 기품 있는 외모에 풍채도 단아하고 우아했다.젊었을 때는 아마 경국지색의 미인으로 손색이 없었을 듯 보였다.가장 매혹적인 것은 그녀의 미간에 서려 있는 아련한 슬픔이었다.보는 사람들의 보호 본능을 확 불러일으키는 듯한 아련하고 애잔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하현 같은 인물도 보는 순간 애잔한 마음이 솟아올랐다.하지만 그는 매우 이성적인 인물이다.순간 솟아오르는 본능을 억누르고 담담한 모습으로 화장기 없는 당난영을 유심히 쳐다보았다.최영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인사했다.“최영하라고 합니다. 부인께 인사 올립니다.”“아, 최영하. 오랜만에 보는데 벌써 이렇게 컸군.”당난영은 최영하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다가 하현에게 눈길을 돌리며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이분은?”“부인, 소개 올리겠습니다.”“이분은 용문 집법당의 당주이자 강남 하 세자, 하현입니다.”최영하가 하현을 가리키며 소개했다.용문 집법당 당주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당난영의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놀라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얼핏 봐도 젊어 보이는데 용문 안에서 만 명 이상을 거느리는 자리에 올랐다니, 그녀로서는 적잖이 의외였다.하지만 하 세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당난영의 가냘픈 몸이 살짝 요동쳤다.분명 강남 하 씨 가문에서 일어난 일을 그녀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강남 하 세자라 불리는 하현이었다.마음이 담담하고 평소 욕심이 없는 당난영도 하현에게 눈길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당난영이 하현을 꿰뚫어 보듯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자 하현은 뭔가 깨달은 듯 갑자기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부인, 혹시 어디 편찮으십니까?”하현의 말을 들은 당난영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구석에 서 있던 항도 하 씨 가문 경호원들은 하현의 거침없는 말을 듣고 흠칫 놀라며 안색이 급변했다.당난영은 줄곧 우울한 상태였지만
허탈해하는 하현의 표정을 살피며 설은아가 입을 열었다.“하현, 뭘 선물하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당신이 우리 결혼기념일을 기억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하현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하현, 오늘 내가 당신한테 전화를 한 것은 더 이상 우리의 과거 일을 언급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어서였어.”“김탁우와의 사이는 이미 멀어졌어.”“엄마 기분이 좀 나아지면 내가 직접 말씀드릴 거야.”“당신이랑 재혼할 거라고.”“그러니 더 이상 우리 엄마랑 싸우지 마, 알았지?”설은아는 하현을 무척이나 아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게다가 그녀는 간민효를 마주했을 때 하현을 빼앗길까 봐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다.하현은 쓴웃음을 지었다.다른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다만 최희정은 아마 두 사람의 재혼을 승낙하지 않을 것이다.하현이 그리 강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최희정이라는 여자는 혼자서 모래폭풍도 무찌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박하는 어느새 설 씨 집안에 도착했다.하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먼저 들어가. 난 요즘...”“내려! 여긴 당신 집이야!”설은아는 억지로 하현을 차에서 끌어내렸다.“오늘 밤 여기서 자.”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설은아의 손에 이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집안에 들어가니 식탁에는 이미 음식이 그득하게 차려져 있었다.최희정과 설재석 외에 그들의 양아들 이영산과 며느리 장리나도 함께 모여 있었다.네 사람이 82년산 라피트를 마시며 얼굴이 볼그레한 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십여 개의 선물 상자가 쌓여 있었는데 그중 몇 개의 상자에는 김 씨 가문 로고가 박혀 있었다.김탁우가 방문한 것이 틀림없었다.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하현이 나타나자 최희정의 낯빛이 일그러지며 순식간에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자네, 여긴 어쩐 일이야?”“와서 밥 먹어.”로열 회관의 일로 설재석은 여전히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고
”하 대사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아마 지금쯤 감옥에서 죽었을 거야!”“당신한테 하루의 시간을 주겠어! 우리 왕 씨 가문의 돈 일억을 갚지 않으면 바로 경찰서에 신고할 거야!”“감옥에 들어갈 준비나 하라고!”“그럼 그만 꺼져!”왕부인이 다시 손을 휘둘러 우소희의 얼굴을 날려 버렸다.망했다!완전히 망했다!우소희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며 끊임없이 통곡했다....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설은아는 하현의 차에 앉아 의문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도대체 우소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어떻게 하다가 왕 씨 가문에 일억을 빚진 거냐고?”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왕 씨 가문 딸 왕자혜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는데 마침 내가 그녀를 구해 주게 되었어...”설은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 당신이 어떻게 사람을 구해? 당신이 의술을 알아?”하현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모르지. 난 단지 차에서 그녀를 빼내서 폭발하기 직전의 차에서 구해 준 것뿐이야...”“그때 마침 우소희가 구급차 간호사로 왔는데 내가 한 일을 자신이 한 것으로 둔갑시켜 공을 가로챘지.”“그래서 왕 씨 가문에선 고마움의 뜻으로 그녀에게 일억을 준 거야.”“나중에 왕문빈의 부인이 진실을 알게 되었고 우소희의 잘못이 드러났지.”“하지만 부인은 우선은 딸의 부상이 더 염려되어서 잠시 우소희 일은 따지지 않았던 거야. 그런데 뜻밖에도 우소희가 그 돈을 먹고 튈 줄은 몰랐지.”“게다가 그 돈으로 사기를 쳐 돈 많은 거물을 낚은 거야...”하현은 기가 차다는 듯한 얼굴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그렇게 된 거구나.”설은아는 그제야 모든 걸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우다금 모녀가 휘룡만 집을 산다며 뛰어다니더라니.”“우소희가 아주 눈먼 거물을 잘 속인 거였군!”하현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만 안타깝게도 운이 조금 모자랐던 거야. 여기서 부인을 만났으니.”“집도 날아가고
”저는 왕 사장님이 주신 휘룡만 1호를 보러 왔습니다.”하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휘룡만의 문턱이 이렇게 높은 줄은 몰랐습니다. 매니저가 다짜고짜 절 도둑놈으로 몰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요.”“왕 사장님이 저한테 뭐라고 해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하현의 말을 듣고 왕문빈의 부인은 눈꺼풀이 펄쩍 뛰었다.그녀는 순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손을 휘둘러 남자 매니저의 얼굴을 때렸다.“퍽!”“개자식! 눈이 멀었군!”“하 대사님은 우리 왕 씨 가문 귀빈이야!”“그런데 도둑이라니?!”“네가 뭔데 함부로 그딴 소리를 해?!”“경찰에 신고를 한다고?”“감옥에 가둔다고?”“죽고 싶은 거야?”“꺼져!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옳고 그름도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사람을 얕보는 당신 같은 직원은 필요없어!”왕문빈의 부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하현이 누구인가?왕자혜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다.주 씨 가문 귀빈이자 풍수의 대가, 무도의 고수였고 심지어 자신도 그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해야 했던 사람이었다.그런데 감히 매니저 따위가 하현을 건드려?살기가 싫은 건가?왕문빈의 부인은 가까스로 하현의 용서를 얻은 상태였다.하현이 자칫 기분이 언짢기라도 한다면 왕문빈이 자신을 내칠 수도 있었다.남자 매니저는 일그러진 얼굴을 가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모님, 어떻게 저한테...”“촥!”왕문빈의 부인은 또 한 번 세차게 그의 얼굴을 때렸다.“꺼지라고!”“못 들었어?”“내가 다시 한 번 말해야 알겠어?”“내가 직접 널 끌어내야 속이 시원하겠어?!”남자 매니저는 얼굴을 가린 채 아무 반박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혹시라도 반박했다간 어떤 지경이 될지 그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왕문빈의 부인이 어떤 스타일인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순간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하물며 하현이 정
”그가 훔쳤든 아니든, 내가 여기 있는 한 그는 훔친 겁니다!”“왕 사장님 머리가 어떻게 되셨더라도 절대 휘룡만 1호를 파실 분이 아닙니다!”“두 분이 솔직히 인정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용서할 기회를 드리죠!”“그렇지 않으면 정말 경호원을 불러 경찰서로 데리고 가라고 할 거예요!”남자 매니저는 색기가 가득 흐르는 눈빛으로 설은아를 바라보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음흉한 속내를 슬쩍 비쳤다.설은아는 기겁하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그러자 남자 매니저는 더욱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여사님, 제가 여사님 얼굴을 봐서 특별히 두 분께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안 그러면 두 분도 같이 경찰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할지 모릅니다. 쓸데없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고요.”“공범으로 몰려 죄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남자 매니저가 이렇게 말하자 우소희는 순간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설은아, 우리 모두 피차 내막을 잘 아는 사람들이잖아?”“체면 때문에 일부러 하현한테 이런 뻔뻔한 일을 시킬 필요는 없는 거 아니야?”설은아는 그녀의 말에 기절할 뻔했다.“뭐라고?”이때 하현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휘룡만 1호는 내가 산 게 아닌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주운 것도 아니에요.”“훔친 건 더더욱 아니고요.”“왜냐하면 왕 사장님이 저한테 주신 거니까요.”이 말을 들은 설은아는 약간 어리둥절해하며 믿기 어려워하는 표정을 지었다.“무슨 소리예요?”“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냐고요?!”“왕 사장님이 당신을 어떻게 안다고 그래요?”“어떻게 천억짜리 집을 당신한테 주냐고요?!”남자 매니저는 하현의 말을 듣고 ‘피식’하고 냉소를 흘리며 얼굴 가득 혐오의 빛을 띠었다.“당신은 정말 날 바보로 아는군요!”예쁘장한 여자 영업사원들도 모두 경멸하는 눈빛으로 하현을 노려보았다.나이도 많지 않은데 허풍이나 떨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 못마땅했던 것이다.우소희도 입을 삐죽거리며 시큰둥한
하현은 이 말을 듣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집은 내가 산 것이 아닙니다...”“뭐라고요?”하현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남자 매니저가 눈에 한기를 가득 머금은 채 하현을 노려보았다.“이 카드키, 훔친 거죠?”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눈이 동그래졌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보았다.훔친 거라고?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훔친 카드키를 들이밀며 자신이 이 집을 산 거라고? 돌았나?!방금까지 하현을 우러러보던 사람들의 눈빛은 갑자기 돌변했다.그들은 방금 하현을 그런 눈으로 본 자신들을 탓하며 3분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다.설은아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살짝 변하며 약간 걱정스러운 듯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 매니저를 바라보았다.“방금 당신이 한 말, 꼭 책임져야 합니다.”“책임이라고요? 그 책임을 어떻게 지는지 제대로 알려드리죠!”남자 매니저는 손가락을 튕겨서 경호원 몇 명을 불렀다.“휘룡만 1호는 우리 휘룡만에서 가장 귀한 물건입니다!”“이 집은 외부에 판매된 적이 없었고 저당 잡힌 것도 없습니다!”“이곳은 왕문빈 사장님의 개인 별장입니다!”“카드키도 분명 왕 사장님 손에 있을 겁니다!”“그런데 그게 어떻게 외부인인 당신 손에 있단 말이죠?!”“설마 오다가 주웠다고는 말하지 마세요!”“오다 주운 게 휘룡만 1호 카드키라니요?!”“어서 말해 봐요! 이 카드키, 왕 사장님한테서 훔친 겁니까?”“솔직히 말하면 관대하게 처리해 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장 관청에 신고해서 당신을 감옥에 처넣어 버리고 말 겁니다!”남자 매니저는 위엄 있는 얼굴로 속사포처럼 하현을 향해 퍼부었다.이로써 그는 자신이 꽤 성공한 사람처럼 느껴져 우쭐해졌다.데릴사위를 호통쳤을 뿐만 아니라 설은아 같은 미녀 앞에 꽤나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어서였다.가장 중요한 것은 왕문빈이 잃어버린 카드키를 되찾았다는 것이다.엄청난 공로임에 틀림없다!어쩌
휘룡만 1호?!그 가치가 천억이라고?하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벼락을 맞은 듯 멍해졌다.방금까지도 싸움에서 이긴 수탉처럼 의기양양했던 우다금은 설은아가 손에 든 카드키를 보며 온몸이 굳어 버렸다.우소희는 자신의 뺨을 때리며 이것이 꿈이 아님을 확인한 뒤 설은아를 쳐다보았다.우소희의 눈빛에는 부러움과 질투로 이글이글 타올랐다.스스로 상류층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오건우조차도 이 순간에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천억짜리 선물이라고?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농담을!자신의 몸값을 다 쳐도 살 수 없는 액수였다!설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이게 휘룡만 1호라고?”하현이 담담하게 말했다.“맞아. 휘룡만 1호.”“당신 주려고 준비했어. 결혼 3주년 기념 선물이야.”하현의 말을 듣고 주변에 있던 많은 분양사 직원과 손님들이 몰려들었다.모두들 귓속말로 서로 속삭이며 하현을 한껏 우러러보았다.다들 돈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저렇게 쉽게 천억을 들여 집을 산 사람은 처음 보았다.이것이 진정한 토호의 모습이 아닌가!하현을 얕잡아 보던 우소희는 순간 억지로 웃음을 쥐어짰다.“설은아, 하현이 어떤 사람인지 우린 모르지만 혹시 당신도 잘 모르는 거야?”“저 사람 혼자 힘으로 천억을 덥석 내놓는다고? 허! 그렇담 암퇘지도 나무에 올라갈 수 있겠군!”우다금도 옆에서 이를 갈며 거들었다.“맞아. 하현은 데릴사위야. 한 달 동안 네가 준 용돈으로 빌붙어 사는 사람이잖아?!”“그런데 어떻게 휘룡만 1호를 살 수 있단 말이야? 농담 좀 그만해! 정말 지겨워!”“분명히 인터넷에서 카드키 하나 사 가지고 너한테 준 걸 거야!”“우리 앞에 보여 주려고 말이야!”“설은아, 내가 사람 된 도리로 하나 가르쳐 줄게.”“사람이 아무리 허풍을 떨고 싶어도 체면까지 내팽개치면 안 되지.”우다금은 세상 물정에 해박한 어른인 양 하현을 꾸짖었다.“하현, 내가 꼭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사람이 이렇게
하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오건우를 쳐다보았다.오건우는 왠지 얼굴이 화끈화끈거리며 통증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잠시 후 그는 이를 악물고 은행 카드를 테이블 위에 내놓았다.“살게요! 내가 사요!”“전액 현금으로!”“이걸로 하겠습니다!”오건우는 49호를 가리켰다.더 비싼 집은 도저히 그의 능력 밖이었다.특가 주택 정도는 그의 능력으로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다.그러자 분양 직원은 함박미소를 띠며 말했다.“네, 그럼 수속 도와드리겠습니다.”일사천리로 구매 계약서가 준비되었고 서명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오건우, 당신 정말 대단해! 날 이렇게 사랑하다니!”우소희는 터져 나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계약서를 들고 오건우의 얼굴을 감싸안으며 미친 듯이 웃었다.정말 사람 하나는 잘 골랐어!이렇게 비싼 집을 사 주다니!이게 웬 떡이야!오건우의 마음속에 그녀를 향한 사랑이 이렇게 크게 자리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하지만 오건우는 이 계약으로 거의 이백억을 탕진하게 되어 유동자금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그는 화류계에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그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하지만 우소희가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가졌으니 앞으로 인맥은 비길 데 없어 넓어질 것이다.우소희가 왕문빈의 딸을 구해 주었다니 인정상 왕문빈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그것만으로도 우소희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자신이 우소희와 결혼하기만 한다면 우소희의 인맥이 곧 자신의 인맥이 된다.그렇게 되면 자신도 당당하게 왕문빈 앞에 얼굴을 내밀 수 있게 되고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일만 남게 된다.그 순간을 상상하니 지금 아무리 불쾌하고 떨떠름해도 오건우는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그의 얼굴 위에 이내 환한 미소가 번졌다.우다금 모녀는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원래 그녀는 이십억짜리 집이라도 사면 설 씨 집안에 충분히 체면이 서게 된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지금
”어머! 오건우, 200억이잖아?”우소희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오건우에게 온몸을 기대어 애교를 부렸다.“당신 같은 부자한테 200억은 껌이잖아. 나 이 집 갖고 싶어!”우소희는 영리한 여자였다.오건우라는 황금거위를 이용해 거액의 집 한 채를 꿀꺽 삼키고 싶었던 것이다.어쨌든 그녀는 지금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겸비한 돈 많은 여자이지 않은가!그녀가 왕문빈 부부에게 체면이 깎인 일은 현재 병원 내부에서만 알고 있으며 온라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여전히 여신격의 의사로 알고 있다.겉모습이 꽤나 예쁘장한 우소희는 왕문빈의 일억을 가지고 고급 장소에 출입하며 재벌 2세들의 관심을 끌었다.수많은 추파 속에 오건우를 선택한 우소희는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그를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그래야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게 된다.오건우는 지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새파랗게 변했다.그러나 그도 체면을 의식하며 깊은 숨을 들이마신 뒤 가식적인 모습으로 사진을 몇 번 찍어 누군가에게 보냈다.오건우의 입에서 ‘어우, 와’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우소희, 방금 우리 집 풍수지리사에게 특별히 물어봤어.”“그런데 이 집은 보기에는 위치도 좋아 보이고 멀끔해 보이지만 결함이 굉장히 많다고 해.”“바람길의 입구에 위치해 있어서 교살과 노살을 막고 있대.”“그러니까 말이야. 이 집은 다른 사람들의 재난을 막아주고 있는 형상이어서 들어가서 살게 되면 병들고 아플지도 모른대.”“우리 대사님 말씀에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집 말고 다른 집이 있는지 둘러보자.”“가격대가 다 이렇게 비슷비슷한가요?”오건우는 분양 직원에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그 의미는 분명했다.더 저렴한 물건이 없냐는 뜻이었다.직원은 오건우의 눈짓에 웃으며 말했다.“손님, 이미 이 가격도 싼 거예요.”“이 집은 도로 입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특가를 진행하는 거예요.”“48호 가격은 250억이에요. 그리고 다른 건...”
”됐어! 소희야, 다른 사람 상처에 소금 뿌리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좋지 않은 행동이야!”이때 공작새처럼 차려입은 우다금이 나서서 원만하게 수습하려는 척 단아한 표정을 지었다.“하현이 단지 체면이 깎일까 봐 한번 해 본 소리일 뿐이야.”“우리야 이런 일이 많으니 스스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지만 저런 사람들이야 남하고 비교될까 봐 더 잘난 척하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어?”“게다가 우린 지금 상류층 사람이야. 저런 데릴사위랑 실랑이를 할 필요가 뭐 있어?”“격 떨어져!”“그러니까 얼른 집이나 보자고. 빨리 수속 밟아야 하잖아?”“저런 사람과 실랑이를 하다가 좋은 집을 놓치면 우리만 손해지!”우다금은 빈정거리면서 분양 단지를 설명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려 흡족한 눈빛으로 대형 분양 단지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이런 집을 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예비 사위 오건우도 이런 큰집에 헛돈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그저 칠팔십 평짜리 방 세 개 정도 되는 집이라도 살 수 있다면 감지덕지일 것이다.“자, 설은아. 하현. 당신들은 먼저 돌아가.”“우리는 집을 산 후에 개인 모임이 있어서 식사도 해야 해.”“그곳은 너무 고급스러운 자리라 여러 명을 데리고 가긴 좀 안 맞거든. 함부로 데려갔다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엄한 말이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안 그래?”하현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설은아가 끌고 나오는 바람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설은아는 돼먹지도 않은 우다금 모녀와 더는 화를 내며 상대할 이유가 없다고 느꼈다.아무런 의미없는 실랑이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만약 최희정이 가라고 그녀를 등 떠밀지 않았더라면 아마 설은아는 죽어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오건우는 설은아가 이렇게 떠나게 될까 봐 노심초사했다.자신의 부를 과시할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이다.오건우는 헛기침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우소희, 당신이 골라 봐. 마음에 드는 거 있는지 보자고.”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