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송란의 눈에는 아직도 하현이 여자의 치마폭에 둘러싸인 물렁한 남자로 보이는 것이 분명했다.그래서 사송란은 하현과 최영하의 관계를 흔들어 놓기만 하면 뒤집을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하현은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사송란, 당신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직 모르겠어? 그런 말로 날 자극하는 건 아무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걸 모르겠냐고?”“내가 당신을 죽이려 했다면 방금 바로 죽였을 거야, 그런데 왜 지금까지 죽이지 않고 이렇게 기다렸을까?”“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사송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간단해. 당신 뒤에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말해! 누가 당신더러 날 죽이라고 명령했는지 말하라고! 내가 가서 되갚아줘야겠어!”하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아마 내 짐작이 맞다면 아무 생각 없는 그 하구천 짓일 거야!”“하지만 당신이 굳이 오매 도관에 누명을 씌운다 해도 난 이견이 없어.”“어차피 오매 도관을 찾아가 따져 묻고 싶었으니까!”하현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세상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송란을 쳐다보았다.사송란은 얼굴을 찡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하구천을 모함할 생각이야?”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신 지금 그 말, 그러니까 하구천은 사람을 보내 날 죽일 수는 있어도 난 하구천을 모함하면 안 된다는 얘기야?”“이렇게 말하고 보니 당신도 참 딱한 여자야.”“그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것도 모자라 아직도 마음속에서 그를 내려놓지 못하고 보호하려 애쓰다니!”“사송란, 하구천이 도대체 어떤 말로 당신을 구워삶았길래 이렇게 하구천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덤비는 거야? 너무 궁금한데?”“당신만을 사랑하겠다는 약속이라도 한 건가? 아니면 항도 하 씨 안주인 자리라도 주겠다고 약속한 건가?”“만약 당신이 그의 헛소리를 믿었다면 정말 소름 끼치는 일인데! 어떻게 그렇게 어리석고 멍청할 수가 있지?”하현의 말에 사송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눈앞의 하현은
최영하가 일행을 이끌고 삼계호텔 꼭대기 층에 나타났을 때는 이미 주변 정리가 끝난 상황이었다.타일 틈새에 묻은 핏물까지 말끔히 닦여져 있었다.여기저기 뿌려진 공기 청정제와 따뜻한 햇살에 지난밤의 피비린내는 모두 사라졌다.하현은 공중정원 한가운데 있는 긴 벤치에 앉아 있었다.벤치 앞에는 차와 다과가 예쁜 빛깔로 사람들의 시선을 유혹했지만 하현은 관심이 없는 듯 그저 찻잔을 기울이기만 했다.최영하가 나타나자 그는 최영하에게 앉으라며 손짓을 했다.항성과 도성에 온 이후 그는 많은 여자들을 알게 되었다.화소혜, 동리아, 강옥연 등등...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 정말 그의 최측근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최영하뿐이었다.게다가 최영하의 결단력 있는 일 처리가 하현은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이런 이유로 그는 용전 항도 지부에게 어젯밤 일을 맡긴 것이다.하현은 최영하가 잘 처리할 것이라는 믿음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어제 일, 당신 어떻게 생각해?”하현은 최영하에게 손수 차를 따라주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최영하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하현, 사송란은 그렇게 죽게 해선 안 되는 거였어.”“내가 죽인 거 아니야.”하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을 이었다.“그녀가 스스로 방아쇠를 당긴 거야.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을 무슨 수로 막겠어?”“현장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증언할 사람은 많아.”최영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문제는 그 사람들이 다 우리 쪽 사람들이라 진술에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거지.”“현장의 CCTV는 다 해킹된 상태라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이 사송란을 죽이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가 없어.”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왜?”“하구천과 오매 도관이 관청에 신고하려고 준비 중이야?”“항성의 왕법으로 날 제재하려고?”최영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경찰서 사람들한테 맡긴다면 우린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하지
”용오행 일은 해결됐어. 사송란 쪽은...”최영하는 하현이 분명 이 일에 대해 해결책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걸 알지만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 이 일은 하구천과 관련이 있다는 걸 말이야.”“다만 이 시체를 가지고 하구천을 찾아가도 아무 의미 없을 거야.”“우리가 아는 한 그는 말과 행동이 다르고 매정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니까.”“아마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남을 비난하려 들 거야. 우리한테 누명을 씌우려 한다면 더 일이 꼬여.”“그러니까 당신 뜻은...”최영하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끝을 흐렸다.그녀는 하현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지만 쉽게 믿어지지가 않았다.하현은 손가락을 튕기며 USB를 사송란의 주검 위에 던진 뒤 냉엄하게 말했다.“모든 CCTV가 다 망가져 있었지만 우리 쪽 사람들은 사송란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어 뒀지.”“시신은 오매 도관에 보내고 영상도 인터넷에 올릴 거야.”“아마 오매 도관에서 우리한테 뭐라고 하겠지.”하현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최영하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이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온다면 오매 도관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오매 도관의 일 처리 방식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하현은 이번 일의 피해자이지만 오매 도관은 일의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하고 반드시 선동자를 찾아내려고 난리를 부릴 것이다.그러면 이 선동자는 오매 도관의 미움을 살 것이고 항도 하 씨 가문 후계자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것도 어렵게 된다.최영하는 그제야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하현, 정말 천 리 밖을 내다보는 계획을 짰던 거구나!”“정말 대단해! 인정!”하현은 그녀에게 차를 한 잔 더 따라주며 조용히 말했다.“가능한 한 빨리 일을 정리해야지.”“그건 그렇고 나 누구한테 밥 한 끼 사야 해.”최영하는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밥을
하현은 시큰둥하게 말했다.“왜 우리가 접근해야 해? 당난영이 우리를 만나러 나오면 되잖아?”“당신이 날 대신해 말을 전해줄 사람을 좀 찾아줘. 강남 하 세자 하현이 당난영에게 간단한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 한다고.”하현의 단호한 표정을 보고 최영하는 약간 어리둥절했다.그녀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하현, 우리가 왜 이 중요한 순간에 당난영을 만나야 하는지 난 아직도 이해가 안 돼.”“곧 항도 하 씨 노부인의 생일이야. 그렇기 때문에 항도 하 씨 사람들은 당난영을 요주의 인물로 두고 바깥출입에 매우 삼엄하게 경계할 거야.”“왜냐하면 그들은 노부인의 생일에 당난영이 하구천을 자신의 아들로 삼겠다는 공표를 꼭 하게 만들어야 하거든.”“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당난영을 만난다는 건 항도 하 씨 가문에 정면으로 도발하는 행위야.”“권하고 싶지 않아.”하현은 단호하게 내뱉었다.“괜찮아.”“우리가 아무 행동을 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하구천이 가만히 우릴 내버려둘까? 어떻게든 우릴 죽이려고 하지 않겠어?”“그렇지만 노부인의 생일이 다가오니 하구천도 자신의 지위 확보를 위해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할 거야.”“하지만 그가 차기 문주 자리에 앉는다면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날 죽이려고 할 거야.”하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최영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그러니까 당신 말은...”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강남 하 씨 가문도 항도 하 씨 분파라 할 수 있어.”“강남 하 세자인 내가 항성에 이렇게 오래 와 있는 동안 항도 하 씨 문주 부인에게 간단히 식사 대접을 하는 거야.”“너무 과하지 않잖아?”“과하지 않지.”최영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마도 하구천이 머리가 좀 아프겠는데.”최영하는 하구천이 괴로워할 것을 기도하는 사람처럼 피식 웃으며 내뱉었다.하현은 원래 항도 하 씨 가문 일에 별로 흥미가 없었다.그러나 하구천이 계속해서 자신을 건드리자 그도
항성 태평산자락 허 씨 집안 별장.곽영준과 허지강은 서로 마주 앉았고 둘 다 안색은 좋지 않아 보였다.그들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차를 마시고 있는 하민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최신형 핸드폰을 가지고 시간을 보내던 하민석은 메시지가 뜨자 곽영준과 허지강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두 사람 모두 항성 S4니까 긴말하지 않겠어. 방금 내가 말한 거래, 할 의향이 있어?”“만약 할 의향이 있다면 오늘부터 우린 한 식구야. 내가 자리만 잡으면 두 사람 공은 잊지 않을 거야.”“만약 할 의향이 없다면 하구천한테 말할 수밖에 없지. 당신들 두 사람이 하구천을 배신하려 한다고. 그거면 충분해.”방금 하민석에게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하구천인 것이 분명했다.하민석의 말을 듣고 곽영준은 얼굴빛이 일그러지며 냉랭하게 말했다.“지금 하구천을 들먹이며 우릴 협박하는 거야?”“하민석,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증거도 없이 하구천이 당신 말을 믿을 것 같아?”“당신은 하구천이 키우는 개일 뿐이야!”“그렇지만 우리는 그와 호형호제하며 오랜 세월을 보냈어. 기르고 있던 개가 사실은 배은망덕한 늑대였다고 하구천에게 말한다면, 그 늑대가 항도 하 씨 가문의 문주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말한다면 하구천이 당신을 어떻게 할까? 가만 놔둘까?”하민석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가만 놔둘 거야.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난 그에게 충성을 다했고 심지어 항성 S4라는 이 타이틀도 하구천이 나한테 준 거야!”“하구천을 떠나서 내가 무슨 자격으로 윗자리에 앉겠어?”“그러니 그는 당신 말을 믿지 않을 거야.”“반면 여기 영상이 하나 있어. 이걸 다 보고도 지금처럼 침착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말을 하는 동안 하민석은 핸드폰을 꺼내 홀의 TV에 연결해 영상을 재생했다.“대장부가 태어났으면 천지를 한 번 호령해 봐야지!”“어떻게 남의 밑에서 오래 머물 수 있겠어!”화면 속 곽영준은 격앙되어 있었고 누구보다 오만방자
그 시각 항성 순환 고속도로에서는 검은 포르쉐 한 대가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다.운전자는 금옥회관의 임세인이었다.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뭔가에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그녀는 당난영의 사람으로, 당난영에게 정보를 전하기 위해 수년간 금옥회관에 숨어 있었던 끄나풀이었다.그런데 방금 그녀가 무심코 룸을 지나갈 때 마침 하백진과 하구천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구천아, 곧 네가 자리에 오를 거야. 하 씨 가문 문주가 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그 여자가 노부인 생신날 너를 양자로 삼는다면 넌 명실상부 하 씨 가문을 손에 넣게 되는 거야.”“나까지 합치면 항도 하 씨 가문에서 다섯 명이 널 지지하는 거야. 네가 항도 하 씨 문주 자리에 앉는 건 따 놓은 당상인 거지!”“물론 일이 성사되면 가장 먼저 그 여자를 처리해야겠지!”“그 여자는 너한테 별로 호의적이지 않아. 만약 다른 젊은 경쟁자가 나타난다면 그녀는 언제든지 방향을 틀어 버릴 수가 있어!”이를 들은 임세인은 깜짝 놀라 옆에 있던 꽃병을 깨뜨리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 버렸다.분명 누군가 그녀를 쫓아와 죽일 것이다.그녀는 다른 것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얼른 자신의 포르쉐 차량에 뛰어올라 그녀의 주인인 당난영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지금 이 순간 임세인의 머릿속엔 이 소식을 얼른 당난영에게 전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그래야 자신이 살 수 있었다.그녀의 차 뒤에는 언제 따라붙었는지 도요타 미니밴이 몇 대 줄지어 있었다.이 미니밴들의 속도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여서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백미러로 미니밴에 있는 잘생긴 얼굴을 확인한 임세인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항도 하 씨 가문 하은수!한때 강남 하 씨 4대 거물 중 한 명인 하은수였다.그는 항성에 온 뒤로는 더없이 조용하게 하구천의 심복이 되어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들었다.하은수를 보자 임세인은 방금 자신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음을 확신
살벌한 총소리와 함께 포르쉐 차량에는 선명한 총탄 구멍이 생겼다.그러나 총알은 아주 근소한 차이로 임세인의 곁을 비껴갔다.임세인은 총알 세례의 표적이 되어 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가슴을 쓸어내렸다.“쾅!”그때 갑자기 녹색 도요타 프라도 한 대가 후미진 곳에서 기척도 없이 나타나 달려오더니 도요타 미니밴의 후미를 사정없이 들이받아 버렸다.“쾅!”도요타 미니밴은 그대로 뒤집혀 공중에서 바닥을 한번 보인 뒤에야 땅에 떨어졌고 안에 있던 저격수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낭패한 얼굴로 씩씩거렸다.그러나 도요타 프라도의 굉음은 멈출 줄을 모르고 기세등등하게 계속 앞을 향해 질주했다.“쾅쾅쾅!”도요타 미니밴들이 한 대씩 뒤집히면서 옆으로 넘어졌다.검은색 마스크를 쓴 총잡이가 차에서 기어나오자마자 미니밴은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하은수는 자신도 타고 있던 미니밴에서 기어나왔고 그의 얼굴에 파편들이 날아들었다.그의 얼굴은 말할 수 없이 일그러졌지만 뭔가 이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한 미묘한 빛을 띠었다.도요타 프라도의 운전석에 앉은 최영하와 조수석에 앉은 하현의 얼굴을 본 순간 하은수의 얼굴에는 매서운 칼바람이 불었다.그는 멀리 보이는 하현을 향해 칼로 목을 베는 자세를 보인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람들을 데리고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현장에는 번호판이 없는 도요타 미니밴 두 대만이 불타오르고 있었다.여기에 총탄 구멍이 난 포르쉐와 널브러진 탄피까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낯선 번호로 온 메시지를 보자마자 하현은 공해원에게 출처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공해원의 실력은 여전했다.그는 단 십여 분 만에 누군가가 노점상에서 그 낯선 전화번호를 구입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그 후 공해원은 그곳의 CCTV를 해킹해 구매자의 얼굴을 특정했다.비록 구매자의 얼굴은 낯설었지만 그의 차는 하민석과 연관되어 있었다.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하민석이란 것을 듣자마자 하현은
하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최영하를 향해 손짓을 했다.기절해 있는 임세인을 차에서 끌어내린 뒤 최영하는 트렁크에 있는 구급상자를 가져와 임세인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너무 놀라 기절해 있는 임세인은 단순 외상 정도만 있어서 별로 심각할 것이 없었다.최영하는 포도당 링거를 임세인에게 꽂아 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은 뒤 임세인은 드디어 의식을 되찾았다.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하현과 최영하라는 것을 본 순간 그녀의 눈에 복잡 미묘한 빛이 스쳐 지나갔고 무슨 말을 하려 해도 말들이 입속에서 뱅글뱅글 맴돌았다.하현은 담담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에 있는 정원 너머의 건물을 바라보았다.그때 항도 하 씨 가문 경호원 한 무리가 돌진해 왔다.어찌 되었든 이곳은 항도 하 씨 가문 당주 부인 당난영의 별장이었다.누군가가 대문을 부수고 격렬한 총격이 벌어졌으니 경호원들이 들이닥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움직이지 마!”“당신들 누구야?”“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선두에 선 경호원은 직접 총을 들고 보란 듯이 안전장치를 풀며 경계하는 표정으로 하현과 최영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최영하가 앞으로 나오며 신분증을 보여주었다.“용전 항도 지부 최영하입니다.”“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은 당주 부인의 심복 임세인이구요.”“방금 임세인이 쫓기고 있는 것을 보고 지나가다 구했어요.”최영하는 막힘없이 단호하고 간단명료하게 말했다.최영하의 말을 들으며 그녀가 보여주는 신분증에 시선을 돌린 경호원들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부인의 심복이 쫓기고 있었다고?용전 항도 지부 책임자가 그녀를 구했다고?이 일은 아무리 봐도 우연의 일치는 아닌 듯 보였다.드라마도 이렇게는 찍지 않을 것이다!...십여 분 후 하현과 최영하 두 사람은 럭셔리하면서도 빈티지한 거실에 앉았다.최영하는 당난영의 신분 때문인지 적잖이 긴장하는 눈치
진홍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눈꺼풀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파르르 떨렸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다.자신이 한없이 무시했던 데릴사위가 이렇게 강한 자였다니?!그리고 자신이 의지했었던 남자가 이렇게 나약하게 무릎을 꿇고 얼굴이 부어터지도록 만신창이가 되다니!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복잡한 생각에 머릿속이 혼란스럽던 진홍민은 결국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그럴 리가 없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일어나! 모르는 건 죄가 아니야!”장천중과 장용호의 태도를 보고 잠자코 있던 하현이 결국 나서서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다만 앞으로는 꼭 기억해야 해. 우리가 풍수술을 배우는 것은 겉치레를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허세를 부리려고 하는 것도 아니야.”만약 오늘 자신이 마침 이 자리에 있지 않았더라면 장용호의 서툰 솜씨에 황보정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장용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습니다. 꼭 명심할게요! 우리 할아버지에게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지금부터 그 말을 꼭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겠습니다!”하현은 무릎을 꿇고 있는 장용호에겐 더 이상 눈길도 주지 않고 장천중을 쳐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화자결은 확실히 황보정의 체내에 있는 나쁜 기운과 사악한 기운을 없앨 수 있습니다.”“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기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은 될지 모르나 그녀의 두 눈을 뜨게 할 수는 없습니다!”“작은 배가 안정적으로 항해할 수 있게 하려면 파도도 바람도 잔잔해야 하지만 한편으론 작은 배의 능력이 충분히 좋아야 멀리 항해할 수 있는 이치와 똑같습니다.”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하현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그래서 화자결은 황보정의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아! 화자결로도 해결 못 하는 건가?”장천중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난 하 대사의 방법으로 하면 황보정의 문제를 말끔히 해결할 수 있을
순간 장천중의 얼굴엔 제대로 영글지 못한 모자란 손자를 향한 한탄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이 떠올랐다.그 후로도 그는 장용호의 얼굴을 계속 때렸다.어느새 장용호은 피범벅이 된 채 얼굴이 볼썽사납게 부풀어 올랐다.장촌중은 장용호의 멱살을 잡고 바로 하현 앞에 내동댕이치며 무릎을 꿇었다.“대사, 용서해 주게.”“내가 잘못 가르쳤네.”“내가 이놈에게 화자결을 알려줬어!”“배움이 부족한 이놈이 자네 앞에서 이런 무례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용서해 주게.”“제발 한 번만 봐줘!”대사?!황보동이든 장용호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장천중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진홍민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새어 나오려는 비명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금정 제일 풍수지리사라 불리며 대하 풍수계에서 지위가 상당한 만세당 장천중이 하현을 대사라 칭하며 무릎을 꿇을 줄은!이 소식이 금정 전체에 퍼진다면 아마 모두들 깜짝 놀랄 것이다.“이놈아, 잘 들어!”“화자결은 하 대사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가르쳐 주신 거야!”이때 장천중은 손을 들어 또다시 장용호의 얼굴을 내리쳤다.장용호는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하현은 내 스승일 뿐만 아니라 네 조상님이나 마찬가지인 분이야!”“넌 지금 조상님에게 대드는 하극상을 보인 거야! 오만하기 그지없는 행동을 한 거라고! 얼른 용서를 빌어!”장천중은 배움이 모자란 손자가 황보정의 몸을 살피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손자가 목숨을 잃을까 봐 얼른 달려온 것이다.역시나 모자란 자신의 손자는 잘난 척 기고만장해서는 도리어 하현에게 비법을 도둑질했다고 뒤집어 씌우고 있었던 것이다.이 광경을 본 장천중은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정신이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안하무인한 짓을 할 수 있는가?이런 행동을 하면 만세당의 그 수많은 명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거라는 걸 모르
황보정은 온몸이 약간 회복된 듯 보였으나 갑자기 오돌오돌 떨기 시작했다.약간의 추위를 느끼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장용호는 이를 보고 매우 흡족해하며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들어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은 자세를 보였다.“자, 이제 마지막 한 수를 쓰겠습니다.”“화자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죠.”“거기, 당신은 좀 나가주지. 내가 하는 방법을 몰래 훔쳐볼 생각하지 말고!”“이건 우리 만세당의 독점술이나 마찬가지니까!”“검은 속내를 가진 사람들이 이런 걸 배우면 곤란하지!”말을 마친 뒤 장용호는 팔짱을 낀 채 거만한 자세를 보였다.하현이 떠나지 않으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겠다는 표시였다.“독점술?”하현은 이 말을 듣고 냉소를 흘렸다.“장천중이 알려줬어?”“개자식! 어디서 함부로 내 할아버지 함자를 입에 올리는 거야?”“게다가 우리 독점술을 누가 알려줬건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장용호는 하현과 실랑이를 벌였다.“아무튼 간에 난 당신 같은 나쁜 놈은 보고 싶지 않아!”“여기서 당장 꺼져 주지 않으면 난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야!”옆에 있던 진홍민도 나서서 장용호의 말을 거들었다.“하현, 당신은 그냥 나쁜 사기꾼일 뿐이야!”“당신이 여기서 지켜보고 있다면 장용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을 거야!”“왜냐하면 당신이 몰래 촬영해서 그 영상을 누구한테 팔지 모르는 일이니까!”“당신 같은 사람이 못 할 짓이 뭐야?”간민효는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하지만 하현이 손을 가로저으며 그녀를 만류했고 이어 장용호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따가 기운을 풀어주려고 마지막 한 수로 침을 놓을 때 꼭 명심해. 반드시 주사 광물을 찍어야 해.”“풀어진 기운은 몸 안에 유입되어야 해. 공중에 함부로 흩어져서는 안 돼.”“그렇지 않으면 황보정은 숨이 막혀서 바로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그렇게 되면 당신은 사람을 구하기는커녕 오
장용호는 진홍민의 눈빛을 알아듣고 헛기침을 하며 희미한 미소를 보이다 입을 열었다.“황보대사님, 친한 사이일수록 돈 관계는 확실히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요즘 그런 소문이 들리더라고요.”“누군가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이 집복당을 무료로 준다고요, 사실입니까?”황보동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진홍민을 쳐다본 뒤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맞아, 당신이 내 손녀를 구해 줄 수만 있다면 이 집복당을 가져도 돼.”“게다가 우리 황보 집안을 잇게 되는 거야.”황보동의 말을 듣고 진홍민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장용호, 걱정하지 마. 우리 이모할아버지는 한번 내뱉은 말은 절대로 지키는 사람이야!”“그래도 당신이 안심을 못 하겠다면 내가 나서서 보증할게!”“퍽!”황보동은 다른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기 귀찮아 서가에서 계약서 한 장을 꺼내 장용호 앞에 내던지듯 내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난 이미 계약서까지 다 준비해 두고 있었어.”“누구라도 내 손녀를 구해 낸다면 바로 이 계약서를 가져갈 수 있어.”진홍민은 흥분된 표정으로 계약서를 얼른 낚아채 눈을 반짝이며 살펴보았다.“맞아. 이 계약서는 원본이고 유효해. 양측이 여기 서명만 하면 돼.”“좋아요. 황보대사님이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니 저도 모든 걸 다 쏟아 보겠습니다!”“여러분들에게 주역에서 가장 뛰어난 풍수술과 화자결을 보여드리죠!”말을 마치며 장용호는 호탕한 웃음을 보인 뒤 들고 있던 꾸러미에서 은침 한 개와 붉은 주사 광물을 꺼냈다.“우선 황보정의 온몸에 가득 찬 살기를 제거하여 그녀의 몸을 회복시킨 다음 기력을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하현은 장용호의 말을 듣고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러자 장용호는 바로 은침을 쥐고 소독한 후 약간의 주사 광물을 묻힌 후 천천히 황보정의 눈썹 위에 찍었다.이를 지켜보던 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시작부터 틀렸어.”장용호는 이 말을 듣고 미간
서류 뭉치에는 하현의 사진과 철인도 완벽하게 찍혀 있었다.진홍민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허! 가짜 증명서인 게 틀림없어!”그녀는 냉소를 연발했다.“이모할아버지, 정말로 이 사기꾼을 믿기로 하신 건 아니죠?”“야! 사기 치려고 별짓을 다하는구나!”진홍민의 비아냥거림에 줄곧 입을 열지 않았던 장용호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이며 앞으로 나왔다.“황보대사님, 어디서 이런 사기꾼을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요.”“왜 이런 사기꾼을 믿게 된 거예요? 도저히 모르겠어요.”“전 단지 지금 황보정의 상황은 우리 만세당 말고는 절대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실히 말해 두고 싶어요.”황보동은 자신감 넘치는 장용호의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이유가 뭔가?”“이유요?”장용호는 팔짱을 진 채 도도한 표정으로 말했다.“난 주역의 ‘화자결’을 전수받았기 때문이죠.”“세상의 모든 재앙을 다 물리칠 수 있다고요!”‘화자결’이라는 세 글자를 듣고 황보동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뭐라고? 주역?”“그럴 리가 없는데. 주역은 오래전에 전수가 끊겼는데.”“자네 날 속일 셈인가?”황보동이 의아한 눈빛으로 몰아붙이자 장용호는 더욱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말했다.“우리 할아버지는 얼마 전 진정한 고수에게서 가르침을 받으셨죠. 쉬쉬하며 음성적으로 전해지던 주역의 ‘화자결’을 몽땅 전수해 받았다고요!”“이걸 전수받은 풍수지리사는 죽은 사람도 살릴 수가 있어요!”여기까지 말한 장용호는 세상을 발아래 둔 사람처럼 기고만장하게 턱을 치켜들었다.“내가 보기엔 황보정은 천기를 누설한 죄로 이런 벌을 받은 거예요!”“내가 그녀를 그 업보에서 벗어나게 해 주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입니다.”이 말을 듣고 진홍민이 재빨리 끼어들었다.“이모할아버지, 어서 장 대사님을 오라고 하세요!”“그는 명문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절대로 남을 속이거나 하지 않을 거예요!”주역의 화자결?하현은 이를 듣고 어이가 없다는 듯 헛
진홍민이 적반하장의 자세를 보이자 하현은 그녀를 상대하기조차 싫어졌다.하지만 진홍민은 여전히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하현을 문밖으로 내쫓을 태세를 보였다.그때 황보동이 황급히 그녀를 가로막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홍민아, 진정해. 함부로 이러지 마!”황보정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언니, 나 괜찮아.”“괜찮다니?”“마침 내가 왔기에 망정이지 내가 아니었다면 넌 이미 죽은 목숨이 되었을 거야!”진홍민은 거만한 얼굴로 황보동의 손을 뿌리치며 하현 앞으로 걸어갔다.뺨이라도 한 대 때릴 듯 그녀의 행보는 거셌다.“개자식! 지난번 일은 아직 계산도 안 했어!”“우리 오빠의 일을 다 망쳐 놓고 이제는 감히 내 사촌동생한테까지 손을 쓰려고 해?”“흥! 사는 게 귀찮아?”“퍽!”하현이 손을 쓰기도 전에 옆에 있던 간민효가 갑자기 한 발짝 내디디며 손바닥으로 진홍민을 후려갈겼다.“하현한테 이 무슨 무례한 짓이야! 죽고 싶어?”간민효의 노기 어린 말투와 간 씨 가문이라는 신분에 진홍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분명 간민효를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방금 진홍민의 관심은 온통 하현에게 쏠려 있어서 옆에 있던 간민효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간민효가 왜 거기에 있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 거친 숨을 씩씩거렸지만 진홍민은 감히 간민효에게 뭐라고 대거리를 할 수가 없었다.진홍민은 얼굴을 가리고 표독스럽게 말했다.“이모할아버지, 보셨죠?”“감히 내가 한마디했다고 사람을 때리다니!”“이런 사람을 가만히 두면 안 되잖아요?!”지금 진홍민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초조했다.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런 게 아니다.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만약 정말로 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한다면?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눈독을 들이던 집을 엄한 놈이 차지하면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현이 정말로 이백억 집을
간민효 일행은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이 회랑에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 중 무도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선두에 서 있는 것이 하현의 눈에 들어왔다.남자는 체구가 약간 왜소했지만 얼굴에는 자신만만함이 가득 묻어났다.자세히 보니 그의 생김새가 장천중과 비슷했다.황보동을 본 젊은 남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황보대사님, 안녕하세요.”다만 인사를 하는 그의 표정에는 오만한 기운이 가득 풍겼다.“진홍민, 만세당 사람들을 데려왔구만?”황보동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젊은 남자를 잠시 위아래로 훑어본 뒤 입을 열었다.“당신이 장 대사의 손자, 장용호인가?”장용호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황보대사님, 기억력이 아주 좋으십니다. 그저 몇 년 전에 우연히 만났을 뿐인데 절 기억하시다니요!”그러자 진홍민이 희미한 미소를 내걸며 입을 열었다.“이모할아버지, 장용호는 정말 좋은 친구예요!”“그는 풍수지리로는 금정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예요!”“무엇보다 최근 내공이 훨씬 더 강하고 깊어졌어요!”“내가 정이를 생각해서 특별히 모셔온 사람이라고요.”여기까지 말한 진홍민의 눈동자에 의미심장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이 친구한테 정이를 한번 보라고 해 보세요. 어차피 지금은 다른 방법도 없잖아요?”황보동은 오만한 미소로 당당하게 서 있는 장용호를 바라보며 말했다.“솔직히 말하자면 자네 할아버지가 이미 손을 써 보았다네.”“하지만 실력이 모자라서 더는 어떻게 할 수 있다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했네.”“그리고 자네, 할아버지의 재주를 90% 이상을 전수받았다고 해도 아마 내 손녀를 치료할 수는 없을 거야.”황보동은 자신감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이미 하 대사를 불렀거든.”“하 대사가 나서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야.”황보동은 분명 만세당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금정 제일의 풍수사라 불리는 장천중은 아무것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우리 집을 산다고요?”황보정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할아버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에요?”황보동은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바로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아무리 총명한 황보정이라고 해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반신반의하던 그녀는 하현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숨결과 목소리를 들어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그런데 이 젊은 남자가 할아버지를 제압한 풍수대사라고?무슨 그런 농담을?!하지만 황보정은 평소 도도한 할아버지의 성품으로 봤을 때 하현이 정말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더라면 절대 할아버지의 눈에 들었을 리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이런 생각이 스치자 황보정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하현은 더 이상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하현이라고 합니다.”황보정은 하현에게 말했다.“하 대사님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다만 하 대사님은 절대 부담 가지지 마세요. 전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저는 천기를 누설해서 이런 벌을 받았어요.”황보정은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천기누설? 그래서 벌을 받았다고요?”하현은 옅은 미소를 보이며 담담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부담 느끼지 않으니까요.”황보정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하현, 그게 무슨 뜻이에요?”하현은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내 말은 이건 업보나 벌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해결할 수 있다는 거죠.”황보동은 하현의 말을 듣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하 대사, 정말 할 수 있겠는가?’예전 같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심지어 무당이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국내외 내로라하는 대사들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결과는 처참할 정도로 속수무책이었다.그런데 하현에게 방법이 있다고?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하지만 하현이 조금 전까지 보인 행동으로
집복당 후원과 앞뜰을 잇는 긴 회랑.회랑 양옆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꽃 사이를 숨바꼭질하는 금붕어들이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었다.이곳은 비록 오래되었지만 유명한 정원과도 맞먹는 유려한 풍광과 격조가 느껴졌다.아름드리나무가 테두리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고 연못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고즈넉한 정자, 단단한 선비의 기상이 넘치는 바위 정원, 그 사이를 유유히 유람하는 맑고 고요한 물줄기.더운 여름에도 이곳에서는 상쾌하고 서늘한 바람이 일렁거려서 무릉도원과도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가운데 있는 정자에는 흰색 긴 치마를 입고 단정하게 하나로 머리를 묶은 화장기 없는 여자가 있었다.그녀는 손에 나침반을 들고 있었는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그녀의 곁에는 오래된 죽간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촉감으로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칼로 빼곡하게 글자를 새겨 놓았다.눈이 멀고 온몸에 힘이 빠져도 글과 그림을 향한 열정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은 것 같았다.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현의 눈에서는 절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요즘 젊은 여자들 대부분은 겉모습을 꾸미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서 미인이란 미인은 도처에 널렸다.하지만 이렇게 기품 있고 우아한 여자는 찾기 어렵다.“할아버지, 정말 우리 집복당을 팔 생각이세요?”발자국 소리를 들은 듯 뭔가를 눈치챈 황보정이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표정을 말했다.“저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천기를 누설한 업보로 이렇게 된 거라고 말했잖아요?”“조상님들이 물러주신 이 집복당을 판다고 해도 내 병을 고쳐줄 사람을 구할 수 없어요. 다 헛수고라고요.”“그러니까 할아버지, 나중에 죽어서 조상님 뵐 낯도 없어서 전전긍긍하시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두세요. 제발 부탁이에요.”황보정은 글과 그림에 대한 열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장 중요한 착한 마음씨와 효를 심성에 장착하고 있었다.그래서 하현은 그녀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정아, 넌 내 하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