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시환은 생각난 김에 바로 피부과를 예약했다. 다음 날 당장 점을 제거하러 갈 작정이었다.공지민이 가장 좋아했던 그의 점을 없애버리면 그녀가 분명히 속상해할 거라 확신했다.그날 밤도 온시환은 술에 취해 흐트러진 채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 소파에 누웠지만 도무지 잠들 수 없었다. 그는 옆에 있는 쿠션을 안고 이리저리 뒤척였다. 침실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예전에는 혼자 있을 때도 이 집이 이렇게 텅 빈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몸과 마음이 모두 불편하고 견딜 수 없는 답답함이 몰려왔다.결국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차 열쇠를 들고 문을 나섰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공지민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현관문 앞에 주저앉은 온시환은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문을 두드릴 용기도 없었다.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날 자신이 한 행동이 얼마나 상처를 줬는지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공지민의 입장이었다면 평생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다음 날 아침, 공지민은 문을 열자마자 집안으로 쓰러지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순간 온시환은 눈을 번쩍 뜨며 그제야 자신이 어젯밤 술김에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는 얼른 일어나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나 속도 쓰리고 배도 고파.”공지민은 눈쌀을 찌푸리고 잠시 그를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채소를 사러 나갔다.그녀가 향한 곳은 근처의 마트였다.온시환은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공지민, 나 위가 아프다니까.”공지민은 대꾸하지 않고 마트로 들어가 장바구니를 들고 식재료를 고르기 시작했다.몇 번을 더 위가 아프다고 얘기했지만 반응이 없자 온시환은 더 이상 말도 못 하고 조용히 따라다녔다. 그는 처음 느껴보는 굴욕감에 이를 악물었다.공지민이 계산대에 다다르자 온시환은 서둘러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더니 점원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내 걸로 계산해요.”점원은 공지민을 힐끗 쳐
남자는 이미 잠들었는지 예리한 눈빛을 숨긴 채 눈을 감고 있었다.성혜인은 무기력한 자태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긴 생머리는 마침 예쁜 허리선을 보일 듯말듯 가렸다. 그녀가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우려고 했을 때,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얼마면 돼?”그의 말투에는 감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젯밤 술에 의한 열정은 이미 싸늘하게식어버렸다.성혜인이 약간 멈칫하다가 다시 옷을 주워 들었다.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이라니, 퍽 우습기는 했다.3년 전, 성혜인은 BH그룹 회장인 반태승을 구하는 일이 있었다. 때는 마침 그녀 집안의 SY그룹에 자금난이 닥쳤을 때인데,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반태승은 자신의 손자 반승제와 성혜인을 결혼시키고 SY 그룹에 600억이라는 거금을 투자했다.당사자인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코빼기를 비춘 적 없었고 두 사람이 법적으로 부부가 된 후에야 성혜인은 자신의 남편이 외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 3년 동안 허울뿐인 BH그룹 며느리는 많은 사람의 우스갯거리가 되었다.그런 두 사람이 첫 만남을 침대 위에서 가지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돈은 필요 없어요.”성혜인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숙취 때문인지 머리는 터질 것처럼 아팠다.“돈이 필요 없다면 이번 일을 핑계로 들러붙을 작정인가?”반승제는 피식 웃었고, 그 깊은 두 눈으로 성혜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뽀얗고 작은 얼굴에 적당히 좋은 몸매, 맑고 커다란 눈빛 덕에 얼굴도 예쁘장하기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꼼수를 부리는 여자는 많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은 여자는 또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반승제는 시선을 거뒀다.“네 몫의 돈은 섭섭지 않게 줄게. 하지만 네 몫이 아닌 것은 탐내지 마.”반승제는 어젯밤 확실히 술에 취했다. 하지만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그는 여자의 몸에 이성을 잃을 위인이 아니었다. 문제는 분명 여자가 건넨 술에 있었다.옷을 다 입고 난 성혜인은 자세를 바로 했다.어젯밤, 반씨 저택에서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업계의
심인우는 방금 목격한 장면을 생각하고 있다가 번뜩 정신 차리고 대답했다.“바로 조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반승제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는 성혜인이 저급한 밀당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조사한다면 그녀의 덫에 걸리는 것일지도 몰랐다.“됐어요.”‘어차피 알아서 다시 나타날 사람인데 조사는 무슨...’성혜인은 후다닥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서 구석구석 몇 번이나 씻은 다음에야 침대에 누웠다.눈을 감으면 아직도 어젯밤의 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생소한 느낌과 심장이 터질 것만같은 느낌은 아직도 생생했다.솔직히 첫 경험 상대가 반승제라는 것은 그다지 나쁜 일도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단미, 윤단미...’어쩌면 이게 바로 반승제가 이혼하려는 이유일 지도 몰랐다.정신이 극도로 피곤한 와중에도 신체적인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성혜인은 몸을 돌렸지만 여전히 불편했다. 그래서 아예 몸을 일으켜 서랍 속의 혼인증명서를 꺼냈다.두 사람이 결혼할 때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반태승의 힘으로 성혜인 혼자서도 혼인증명서를 받아올 수 있었다.성혜인은 처음으로 혼인증명서 속에 함께 적혀 있는 자신과 반승제를 이름을 찬찬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다시 서랍을 닫고 성혜원을 만나러 병원으로 출발했다.성혜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점심 시간이었고 병실을 지키고 있던 간병인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혼자서 조용히 쉬고 있던 성혜원은 성혜인을 발견하자마자 기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언니가 어떻게 왔어?”성혜원의 안색은 약간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아주 똘망똘망했다.“아빠가 또 헛걱정하고 있지? 내가 괜찮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믿지 않는다니까.”성혜인은 침대 옆에 앉아 따듯한 물을 건네며 말했다.“그게 어떻게 헛걱정이야.”성혜원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자주 입원했었다. 그래서 성휘도 그녀를 유난히 아꼈다.“그래도 난 병원에 있기 싫어. 엄마가 감시하고 있지, 끼니도 죽으로 밖에 못 때
정장을 차려입은 성한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왠지 모르게 그가 불편했던 성혜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성혜원의 약을 건넸다.“저는 이미 혜원을 만나고 왔어요. 이 약은 저 대신 이모한테 전해줘요.”성한은 눈썹을 찡긋하며 말했다.“같이 가자. 우리도 오래간만에 만났잖아.”“아니에요.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어서...”성혜인은 약만 건네주고 바로 병원에서 나왔다.성한은 제자리에 멈춰선 채 성혜인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저도 모르게 성혜인이 들고 있던 약을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예쁘게 생긴 젊은 여자가 연고를 들고 산부인과에서 나왔다라... 이 장면을 보고서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성한은 입꼬리를 쓱 올렸다. 그는 차가운 인상의 성혜인이 이토록 문란한 사생활을 즐길줄은 몰랐다. 남편이 3년 동안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독수공방에 지친 그녀가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급할 것 없어. 혜인이 집으로 돌아온 순간 나에게도 기회가 생길 테니까.’성혜인은 차에 올라타고 나서고 기분이 약간 언짢았다.소윤이 자식 둘을 데리고 성씨 저택에 와서부터는 매일 성한과 마주쳐야 했는데 성혜인은 그가 상당히 불편했다.성휘는 성한을 내보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의 난감한 표정에 도무지 그렇게 하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소윤과 성혜원에게 미안했던 성휘는 성한에게도 아주 잘해줬고, 그 속에 껴서 불편하게 지내기 싫었던 성혜인은 단호히 집을 나왔다.이제 와서 보니 그녀야말로 성씨 집안의 제삼자 같았다.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성혜인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 온 사람의이름을 확인하고 나자 안 그래도 언짢았던 기분이 더 나빠졌다.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성혜인은 한숨을 쉬며 수락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어머니.”전화를 건 사람은 반승제의 어머니인 백연서였다.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부터 재벌 집 출신인 ‘시어머니’는 성혜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성혜인도 반태승 앞에서만 손자며느리 역할을
드디어 문이 열리고 반승제가 아닌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반승제의 비서인 심인우였다.“사모님, 대표님께서는 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건 사모님께 전해달라고 하신 선물입니다.”백연서는 반승제에게 돌아와서 저녁밥이나 먹으라고 했지 성혜인이 있다는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괜히 얘기를 꺼냈다가 그의 성격으로 원래 오려고 했던 것도 안 올수 있기 때문이다.그녀는 심인우가 건네는 꽃다발을 받아들며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그래, 승제가 바쁜 건 나도 알고 있으니... 대신 몸조리 잘하라고 전해주렴.”심인우는 머리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집 안으로 들어온 백연서는 성혜인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손을 휘적였다.“너도 이만 돌아가. 승제가 시간 있을 때 다시 부를 테니까.”“네.”성혜인은 애초부터 남아서 밥 먹을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심인우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흐릿한 뒷모습 만으로도 반승제가 아님을 알아차렸다.게다가 오늘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혼 서류가 준비되지 않았으니 말이다.다시 차에 올라타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성혜인은 빨간불을 기다리며 회사 단톡방을열어 봤다.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단톡방은 아주 시끄러웠다.‘반승제가 이번에 결혼하러 돌아왔다면서요? 네이처 빌리지에 비싼 값을 주고 펜션을 샀다고 하던데 곧 인테리어도 하겠죠?’‘사장님이 반승제랑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하지 않았어요? 혹시 실내 디자인 일을 저희 쪽에서 할 수 있을까요?”“만약 가능하다면 저희가 엄청 덕을 보겠는데요? 반승제 정도의 재벌이라면 일은 둘째 치고 말이라도 섞어보고 싶어요...”반승제가 결혼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는 뉴스에도 전혀 나온 적이 없는 일이었다.이 화제에 관심 없었던 성혜인은 휴대전화를 끄려고 했는데 마침 사장 양한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지금 잠깐 문라이트로 올 수 있어? 네가 디자인했던 펜션에 관심 있는 고객이 있는데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
반승제 근처의 아우라는 마치 여름이란 겪어본 적 없는 것처럼 차가웠다.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성혜인을 바라보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가지.”성혜인은 반승제를 따라 문라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은 저마다 단정한 태도로 허리 굽혀 인사했다.그렇게 조용히 걷고 있던 반제승가 갑자기 멈춰서서 몸을 돌렸다. 성혜인도 따라 멈춰서서는 덤덤하게 자본주의 미소를 지었다.“너 임경헌한테서 얼마나 받았어?”성혜인은 임경헌과 반승제가 어떤 사이인지 몰랐다. 반씨 일가의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니 이것도 당연하였다.반승제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으로서 그녀는 그냥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겠거니 했다.“사장님 말로는 2억 정도 한다고 했어요.”“이 짓거리를 하는데 사장도 있어?”반승제는 진심으로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문라이트에서 비밀스러운 거래가 이뤄진다는 것을 임경헌에게 들어본 적은 있지만 자신이 당사자가 될 줄은 또 몰랐다.어찌 됐든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와서 고민하기에는 늦었다.반승제는 다시 몸을 돌려 룸으로 걸어갔고 성혜인도 묵묵히 따라갔다.“임경헌 말로 너희가 부르는 값은 높지만, 서비스는 확실하다고 했지?”성혜인은 그동안 많은 고객을 만나왔다. 대부분 사람이 다 부자라서 가격만큼은 충분하게 줬지만 물론 아닌 사람도 있었다.성혜인은 반승제의 말을 듣자마자 기계처럼 대답했다.“반승제 씨, 가격에 관해서는 충분히 서비스와 정비례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서비스와 정비례 한다라...’반승제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래? 만약 내가 네 서비스에 만족하지 못했다면?”어색한 반응에 가만히 있을 줄밖에 모르던 성혜인에게는 서비스고 뭐고 할 것도 없었다.게다가 반승제는 그녀의 얼굴과 몸매가 수억 원을 주고 살 정도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돈 벌기 참 쉬운 직종이군.’성혜인은 ‘고객이 왕이다’라는 생각 하나로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그럼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요? 제가 최
잠깐 놀란 건 사실이지만 성혜인은 상대가 자신을 알아볼 걱정은 하지 않았다.왜냐하면 명절에도 반태승만 따로 만났기에 반씨 집안의 다른 가족들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반제승 본인도 자신의 아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데 다른 사람은 더 알 턱이 없었다.어두운 표정으로 떠난 반제승을 떠올리며 성혜인은 약간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반승제 씨는 아무래도 제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아요.”예쁜 여자라면 직업이고 뭐고를 떠나 사족을 못 쓰는 임경헌은 물씬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그럴 리가요. 혜인 씨의 디자인은 제가 본 것 중 최고였어요. 저희 사촌 형이 경영을 배우는 동시에 예술도 배웠거든요. 그래서 무조건 보아냈을 거예요. 오늘은 그냥 이혼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 같아요.”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 양한겸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반승제 씨가 결혼했다고요?”임경헌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진작에 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이혼하느라 변호사랑 골머리를 앓는 모양이에요.”임경헌은 성인이 되고 나서 흥청망청 노느라 집으로 돌아간 적이 별로 없었다. 그도 그저 반승제에게 할아버지가 찾아준 아내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결혼 얘기를 처음 들은 양한겸은 궁금한 듯 계속해서 물었다.“저는 네이처 빌리지의 펜션이 신혼집인 줄 알았어요. 만약 신혼집이 아니라면 혼자 사시는 집인가요?”임경헌은 성혜인에게 와서 앉으라고 손짓하며 말했다.“신혼집이기는 해요. 저희 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할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지금의 형수랑 결혼했거든요. 그래서 이 집은 좋아하는 여자랑 결혼하면 같이 살려고 준비하는 것 같아요.”임경헌은 이렇게 말하면서 성혜인에게 주스를 건네줬다.“형이 곧 다시 온다고 했으니, 그때 다시 혜인 씨의 설계도를 보여주자고요. 형도 무조건좋아할 거예요.”성혜인은 주스를 받아 들면서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제가 후에 꼭 밥 살게요.”임경헌은 성혜인의 당당한 태도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말
“무슨 얘기?”반승제의 말투는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앞으로 네 마음대로 이상한 여자 소개해 주지 마.”자신의 사촌 동생이 고객 중 한 명이라니, 반승제는 도저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이런 것을 더 즐기는 독특한 취향의 소유자는 어디에나 있었다. 금욕적인 생활을하는 반승제는 당연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임경헌이 밖에서 이상한 것을 배워왔다고 생각하며 그는 조만간 잔소리를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형, 진짜 안 올 거예요? 제가 형이랑 맞는 사람을 찾느라 한참 헤맸단 말이에요.”인테리어가 필요한 집이라면 임경헌에게도 몇 채 있었기에 그는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형이 싫으면 제가 냉큼 데려갈 거예요. 저는 아주 마음에 들거든요.”반승제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너 이제 이상한 사람들이랑 어울리지 말고 BH그룹으로 와서 인턴부터 시작해. 네 어머니가 이미 나한테 다 얘기했어. 그러니 넌 내일부터 출근해,”반승제는 임경헌에게 반발할 시간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임경헌은 난감한 표정으로 성혜인을 바라봤다.성혜인은 바로 자신이 거절당했음을 알아차리고 위로했다.“괜찮아요. 반승제 씨가 따로 마음에 드는 디자이너가 있나 보죠.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사는 펜션이라면 신중하게 선택하는 게 당연한 거예요.”임경헌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그럴 리가 없는데... 저는 아직도 디자이너를 찾고 있다고 들었거든요.”성혜인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거래도 인연을 따져요. 저랑 반승제 씨는 인연이 아닌가 보죠.”“제가 후에라도 다시 물어볼게요. 만약 형이 싫다고 하면 제집을 디자인해 줘요. 저는 혜인 씨의 스타일이 엄청 마음에 들었거든요.”성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알아봐 주셔서 고마워요.”임경헌은 또 전화 한 통을 받더니 두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늘 저녁은 제가 낼게요.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하는데 전화번호를 줄 수 있어요? 저희는 다음 날에 다시 만나요.”성혜인은 주저 없이 자신의 번
온시환은 생각난 김에 바로 피부과를 예약했다. 다음 날 당장 점을 제거하러 갈 작정이었다.공지민이 가장 좋아했던 그의 점을 없애버리면 그녀가 분명히 속상해할 거라 확신했다.그날 밤도 온시환은 술에 취해 흐트러진 채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 소파에 누웠지만 도무지 잠들 수 없었다. 그는 옆에 있는 쿠션을 안고 이리저리 뒤척였다. 침실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예전에는 혼자 있을 때도 이 집이 이렇게 텅 빈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몸과 마음이 모두 불편하고 견딜 수 없는 답답함이 몰려왔다.결국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차 열쇠를 들고 문을 나섰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공지민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현관문 앞에 주저앉은 온시환은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문을 두드릴 용기도 없었다.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날 자신이 한 행동이 얼마나 상처를 줬는지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공지민의 입장이었다면 평생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다음 날 아침, 공지민은 문을 열자마자 집안으로 쓰러지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순간 온시환은 눈을 번쩍 뜨며 그제야 자신이 어젯밤 술김에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는 얼른 일어나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나 속도 쓰리고 배도 고파.”공지민은 눈쌀을 찌푸리고 잠시 그를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채소를 사러 나갔다.그녀가 향한 곳은 근처의 마트였다.온시환은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공지민, 나 위가 아프다니까.”공지민은 대꾸하지 않고 마트로 들어가 장바구니를 들고 식재료를 고르기 시작했다.몇 번을 더 위가 아프다고 얘기했지만 반응이 없자 온시환은 더 이상 말도 못 하고 조용히 따라다녔다. 그는 처음 느껴보는 굴욕감에 이를 악물었다.공지민이 계산대에 다다르자 온시환은 서둘러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더니 점원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내 걸로 계산해요.”점원은 공지민을 힐끗 쳐
온시환은 자신의 별장으로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전날 밤, VIP룸에서의 굴욕적인 상황이 떠오르며 분이 치밀었고 무엇보다 공지민이 정말 이별을 고한 것에 더 화가 났다.그는 줄곧 공지민이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믿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든 그녀는 늘 용서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함께 살면서도 그녀의 내면에 뭔가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불안감이 떠나지 않았다.그렇다고 그녀의 과거를 파헤칠 마음은 없었다. 괜히 그러면 자신이 그녀를 너무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얼굴에 음울한 기색이 스친 그는 옆에 있던 가정부에게 명령했다.“공지민 물건 다 챙겨서 쓰레기통에 버려요. 다시는 이 집에 들이지 마요.”가정부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일주일 전만 해도 둘 사이가 화목해 보였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온시환과 공지민은 보기 드문 잘 어울리는 커플로 여겨졌기에 이 갑작스러운 이별이 내심 놀라웠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질문을 던지지 못했고 그가 시키는 대로 공지민의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10분 정도 지나서 정리를 마쳤지만 공지민의 소지품이라고 해봤자 작은 여행용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가방을 본 온시환은 순간 멍해졌다.“이게 다야? 이게 어떻게 오래 살 사람 짐이라고 할 수 있어? 휴가 온 사람 짐 같잖아.”가정부가 조심스레 물었다.“이걸 정말 버릴까요?”온시환은 가방을 바라보며 짜증이 더욱 올라왔다.“버려요! 두 번 다시 이 집에서 공지민의 흔적을 보고 싶지 않아요.”가정부가 가방을 밖으로 옮기려던 순간 온시환이 다시 소리쳤다.“잠깐, 기다려요! 일단 가져갈지 물어보고 결정할게요.”그는 전화할 핑계를 찾은 듯 서둘러 공지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이미 그의 번호를 차단했는지 연결되지 않는다는 기계적인 음성만 반복해서 들려왔다.그는 다급히 SNS로 메시지를 보내려 했으나 그녀가 이미 친구 목록에서 자신을 삭제한 것을 확인했다.‘진짜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온
그러나 거리로 나와 차가운 바람을 맞자 온시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VIP룸에서 있었던 일들이 너무 굴욕적이었다. 줬던 선물을 되찾고 공지민을 쫓아 나온 자신이 더욱 비참해 보였다.손에 쥔 시계를 꽉 움켜잡고 그는 잠시 망설이다 차에 올라탔다. 이미 술을 마신 상태였지만 신경 쓸 여유도 없이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하지만 공지민은 그의 별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마 그녀의 집으로 갔을 거라고 짐작한 온시환은 곧바로 사람을 불러 그녀의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집에 도착한 그는 문 앞에서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초인종을 눌러도 공지민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공지민은 안방 침대에 앉아 손에 구은우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 사진 속 구은우는 교복을 입고 있었고 코 옆에 있는 작은 점이 유독 눈에 띄었다. 사진 속의 소년은 풋풋한 청춘의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공지민은 사진을 손에 쥔 채 바닥에 앉아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진이 망가질까 두려워 손에 너무 힘을 주지도 못했다.밖에서는 온시환이 계속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 소음이 그녀를 더욱 짜증 나게 할 뿐이었다. 결국 공지민은 모든 소리를 외면하기로 마음먹었다.문밖에서 한참 소란을 피우던 온시환은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다가 화가 나 자신의 뺨을 때렸다.그는 정말 최악이었다. 그게 그녀의 전 재산의 절반으로 마련한 선물이었는데 그걸 대수롭지 않게 다른 여자에게 주다니.만약 자신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그는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을 것이다.온시환은 다시 초인종을 누르며 계속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한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응답이 없자 공지민이 집에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그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 문보영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문보영도 계속 그녀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결국 온시환은 어쩔 수 없이 서주혁에게 전화해 공지민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서주혁은 빠르게 그녀의 휴대폰 위치를 확인해 그녀가 집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온시환은 방 안의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누군가 그에게 눈치를 주고 있었지만 그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다 공지민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30억이 너한테는 별거 아닐지 몰라도, 그 시계를 아무에게나 막 주는 건 아니지 않니?”온시환의 몸이 바짝 굳어버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자, 공지민이 어느새 방 안으로 들어와 그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방금 내가 했던 말들을 지민이가 다 들은 걸까?’“지민아...”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온시환은 옆에 있던 여자를 서둘러 밀어냈다.공지민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가 이렇게까지 조용하니, 온시환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멈추질 않았다.언제나 당당했던 그는 지금 처음으로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공지민의 손을 붙잡으며 그는 간절하게 말했다.“지민아, 들어봐.”공지민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옆에 앉아 있는 여자의 손목으로 향했다.그녀의 손목에 찬 시계가 바로 그 시계임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가슴 속에서 분노와 서러움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었다.‘은우라면 절대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지 않았을 거야.’공지민은 속으로 생각했다.‘어떻게 온시환 같은 사람을 은우의 대체품으로 삼을 수 있었을까? 은우와는 전혀 다르잖아.’공지민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온시환의 머리 위로 그대로 들이부었다.방 안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온시환은 여자들 사이에서 방탕한 것으로 유명했고 여자들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으로도 악명 높았다.그런데 지금은 하찮게 생각하던 여자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그를 망신 주는 상황에 부닥쳤다.온시환은 옆에 있던 휴지를 집어 들어 머리를 닦았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화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주저 없이 공지민의 뺨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찰싹, 공지민의 얼굴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싸늘한 시선을
온시환은 그녀가 하는 게임을 흘낏 보며 물었다.“이 게임이 그렇게 재밌어? 작은 캐릭터 하나 끌고 다니면서 퍼즐 푸는 게 뭐가 그리 재미있는데.”그는 공지민의 손을 잡아 자신의 손안에 쥐며 말했다.“그만하고 밖에 나가서 술이나 마시자. 그게 훨씬 재밌어. 그리고 보영 씨가 너한테 연기 다시 할 생각 없냐고 물어봤잖아? 같이 나가서 감독들도 좀 만나고 좋잖아.”“시환 씨, 정말 가고 싶지 않아요.”공지민은 원래부터 조용한 성격이었다. 연예계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도 억지로 감당한 일들이 많았다. 만약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다면 결코 자신을 힘들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그녀의 차가운 반응에 살짝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공지민이 자신에게 그다지 열정적이지 않은 것만 같았다.지난 한 주 동안 두 사람은 꽤 잘 지냈다. 함께 밥을 먹고, 꽃을 구경하고, 목욕을 하며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온시환도 이런 따뜻한 순간은 처음이었다.그러나 한 주가 지나니 살짝 지루해졌다. 그는 천성적으로 북적이는 분위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공지민이 자신을 위해 조금이라도 변해주길 바랐다.하지만 공지민은 단호히 거절했다.온시환은 더 이상 억지로 끌어내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말했다.“알았어. 난 지성이랑 술 마시러 갔다 올게. 늦지 않게 들어올게.”“네.”공지민은 여전히 태블릿을 손에 들고 조용히 퍼즐 게임을 이어갔다.온시환은 그녀를 뒤로하고 술자리로 향했지만 그의 얼굴은 내내 굳어 있었다.그가 술집 룸에 들어서자마자 추지성이 농담을 던졌다.“너 오늘도 안 나왔으면, 우린 진짜 네가 스님이라도 된 줄 알았을 거야.”온시환은 방금 친구들과 한 내기를 떠올리며 팔목에 찬 30억짜리 시계를 자랑하듯 보여주었다.추지성이 한눈에 그 시계를 알아보고 물었다.“이거 그 30억짜리 맞지?”온시환은 눈빛에 살짝 자부심을 띠며 대답했다.“그래, 바로 배달왔지. 지민이 걔 자기는 명품 하나 안 사면서 나한테 돈 쓰는 건 눈
온시환이 막 농담이라고 말하려던 찰나 단체 채팅방에 또다시 메시지가 올라왔다. 이번엔 그를 태그한 메시지였다.[시환아, 우리 기대 저버리지 마. 너 같은 역대급 쓰레기마저 변하면 우리 전부 다 집에 가서 얌전히 장가가야 할지도 몰라.] 이들 중 온시환과 친한 사람들의 가족들은 그를 반면 교훈으로 삼곤 했다.만약 그런 그마저 안정된 삶을 택한다면 그들에게도 위기가 찾아올 게 뻔했다.비교 대상이 사라지면 그들의 삶은 더 팍팍해질 테니까.온시환은 바로 답장을 보냈다.[기다려. 지민이가 60억을 모아 놨다더라. 지금 나한테 30억짜리 시계 하나 사준다고 했거든.]추지성은 곧바로 엄지를 치켜든 이모티콘을 보냈고 다른 사람들도 연이어 반응했다.온시환은 은근히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나중에 공지민에게 120억 정도 보상해 주면 되겠지.’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 한구석의 찜찜함을 내려놓았다.그러고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30억짜리 시계 사진을 공지민에게 보냈다.공지민은 그 사진을 바로 문보영에게 전달했다. 문보영은 과거 유명 브랜드들과 협력하던 사람이었기에 이런 고급 시계를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문보영은 시계 사진을 확인하자마자 공지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이거 뭐야? 네가 필요한 거 아니잖아, 그치?”“응. 시환 씨가 갖고 싶다고 해서.”문보영은 한숨을 쉬며 소리쳤다.“공지민, 너 정말 제정신이야? 30억이 그 자식한테는 푼돈일지 몰라도, 넌 그 돈 모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같이 잔 것도 모자라서 이제 돈까지 갖다 바칠 생각이야?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딨어? 온시환이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돼? 그 인간이 너를 이렇게까지 매달리게 할 정도로 특별하다고? 차라리 오늘 밤에 나랑 파티에 가자. 내가 더 멋지고 잘생긴 사람들 소개해 줄게. 온시환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이 많아.”“부탁이야, 언니. 이 시계 최대한 빨리 구할 수 있어?”문보영은 공지민의 단호한 태도에 가슴이 답답해졌다.“너는 그렇게 아끼고
아침이 밝을 때까지 푹 잔 뒤 온시환은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공지민이 요리책을 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를 보면 언제나 묘한 안정감이 느껴졌다.항상 조용하고 담담한 그녀의 모습은 몇 년간 연예계에 몸담았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어떻게 이토록 차분하고 담백한 성격으로 그런 환경에서 버텼을까.그러다 그녀가 그와 가까워지고 싶어서 연예계에 들어갔다는 말을 떠올리자 가슴 한쪽이 먹먹해졌다.둘이 아침을 함께 먹은 후 공지민은 책 한 권을 꺼내 들더니 저녁에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다.온시환은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저녁엔 내가 약속이 있어서 밖에서 먹어야 해. 너도 같이 가자.”공지민은 몸을 약간 굳히며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었다.“싫어요. 전 시끄러운 자리는 별로 안 좋아해요.”“근데 너 연기할 땐 술자리에서도 잘 버티던데, 그땐 어떻게 했어?”“억지로 참았죠.”“지금은 왜 안 참아?”“이젠 연기도 안 하고 시환 씨는 제 남자 친구니까요.”온시환은 그녀의 말에 기분이 좋아져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래, 지금 남자 친구 앞에서 애교 부리는 거구나?”그는 일어나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다시 웃으며 그녀의 무릎에 누웠다.코끝의 작은 점이 더 매혹적으로 보였고 웃음기 어린 눈빛과 어우러져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공지민은 그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가볍게 만지작거렸다.온시환은 예전엔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적었다. 사람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가지거나, 영감을 얻기 위해 밖으로 나가곤 했다. 집에 있으면 늘 외로움만 느껴졌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공지민이 곁에 있어서인지 집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햇볕을 받으며 집에 있는 게 이렇게나 포근하고 편안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몸속 깊은 곳까지 나른함이 스며드는 느낌이었다.그는 공지민과 함께 일주일을 집에서 보냈다. 그러다 추지성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너 요즘 왜 이렇게 조용해? 설마 착실하게 살기로 한 건 아니겠지?”평소라면 서로의
온시환은 심지어 이삿짐센터까지 불러 자신의 차를 따라오게 했다.한편 공지민은 집 안에서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초인종 소리를 들었다.‘이 시간에 누구지?’그녀는 인터폰 화면을 확인하고는 온시환이라는 것을 알았다.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문을 열었지만 온시환의 뒤에 서 있는 이삿짐센터 직원들을 보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이건 또 뭐예요?”“네가 우리 집으로 이사하기 싫다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직접 이삿짐센터를 불렀어. 넌 짐만 챙겨서 나랑 같이 가면 돼.”온시환이 그녀의 손을 잡으려 하자 공지민은 단호하게 뿌리쳤다.그녀의 안방에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물건들이 많았다. 게다가 온시환과 함께 사는 건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온시환은 자신이 직접 찾아온 걸 그녀가 기뻐할 거라 기대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기쁨이라고는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문 앞에 서 있던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둘 사이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그럼 짐을 옮길까요, 아니면 그냥 돌아갈까요?”온시환이 대답하기도 전에 공지민이 단호하게 말했다.“여긴 제 집이에요. 이사 안 가요.”온시환은 순간 자신이 우스꽝스러운 광대가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며 화가 치밀었다.“이게 무슨 뜻이야? 공지민, 내가 그동안 너한테 너무 관대하게 굴었나 봐?”공지민은 그 말을 듣고 헛웃음이 나왔다.온시환이 이 말만큼 자주 하는 게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생각하기엔 그가 언제 자신을 관대하게 대했다는 건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아마 구은우와 비교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녀는 항상 온시환에게서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으려 했다.구은우와 닮은 건 코끝의 점 하나와 그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 외에는 단 하나도 비슷한 점이 없었다.하지만 코끝의 작은 점을 볼 때마다 그녀는 마음이 약해졌다. 그 점이 너무도 닮아서, 그녀의 원칙마저 무너뜨릴 정도였다.공지민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옅은 웃음을 지었다.“요즘 좀 피곤해요. 이사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시환 씨가 여
그러나 어차피 공지민은 그를 정말 좋아하니까 조금 잘난 척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공지민이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온시환은 느긋하게 술 한 잔을 들이켰다. 여전히 예전과 같은 여유로운 태도였다.“그래서 내가 말하는 거야. 너희도 여자를 너무 대단하게 여기지 마. 여자 때문에 죽네 사네 하는 거, 남자로서 진짜 쪽팔린 일이야.”서주혁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시환은 그의 아픈 기억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 어깨를 으쓱하며 넘겼다.“봐, 내가 우리 중에서 제일 쿨한 놈일걸?”반승제가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그 말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온시환은 남녀 관계에서 자존심을 가장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당당히 턱을 치켜들었다.“걱정하지 마. 후회하지 않을 거야. 너희는 내가 부러워서 이를 갈게 될걸.”반승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고 화제를 서주혁에게 돌리려 했다. 하지만 장하리 사건 이후 서주혁은 지나치게 말수가 적어졌다.얼마 전에도 몇 번 모임을 제안했지만 서주혁은 항상 집에서 서보겸을 돌봐야 한다며 나오지 않았다.몇 사람은 조용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온시환은 그런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온시환은 예전에 반승제가 성혜인을 쫓아다니던 모습을 보며 속으로 다짐했다.‘난 절대 여자 때문에 저렇게 하지 않을 거야.’그 다짐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비록 자신이 꽤 비열하다는 걸 인정하더라도 말이다.다만 온시환의 삶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최우선으로 두는 게 중요했다.비록 지금 공지민과 연애를 시작했지만 그가 그녀에게 모든 걸 맞추는 건 불가능했다.온시환은 한참을 술자리에 있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집으로 돌아오자 온시환은 문득 공지민이 여전히 그녀의 집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온시환은 바로 공지민에게 전화를 걸어 앞으로 자기 집으로 들어와 살라고 말했다.그는 공지민이 기뻐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