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시환은 자신의 별장으로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전날 밤, VIP룸에서의 굴욕적인 상황이 떠오르며 분이 치밀었고 무엇보다 공지민이 정말 이별을 고한 것에 더 화가 났다.그는 줄곧 공지민이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믿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든 그녀는 늘 용서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함께 살면서도 그녀의 내면에 뭔가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불안감이 떠나지 않았다.그렇다고 그녀의 과거를 파헤칠 마음은 없었다. 괜히 그러면 자신이 그녀를 너무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얼굴에 음울한 기색이 스친 그는 옆에 있던 가정부에게 명령했다.“공지민 물건 다 챙겨서 쓰레기통에 버려요. 다시는 이 집에 들이지 마요.”가정부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일주일 전만 해도 둘 사이가 화목해 보였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온시환과 공지민은 보기 드문 잘 어울리는 커플로 여겨졌기에 이 갑작스러운 이별이 내심 놀라웠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질문을 던지지 못했고 그가 시키는 대로 공지민의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10분 정도 지나서 정리를 마쳤지만 공지민의 소지품이라고 해봤자 작은 여행용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가방을 본 온시환은 순간 멍해졌다.“이게 다야? 이게 어떻게 오래 살 사람 짐이라고 할 수 있어? 휴가 온 사람 짐 같잖아.”가정부가 조심스레 물었다.“이걸 정말 버릴까요?”온시환은 가방을 바라보며 짜증이 더욱 올라왔다.“버려요! 두 번 다시 이 집에서 공지민의 흔적을 보고 싶지 않아요.”가정부가 가방을 밖으로 옮기려던 순간 온시환이 다시 소리쳤다.“잠깐, 기다려요! 일단 가져갈지 물어보고 결정할게요.”그는 전화할 핑계를 찾은 듯 서둘러 공지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이미 그의 번호를 차단했는지 연결되지 않는다는 기계적인 음성만 반복해서 들려왔다.그는 다급히 SNS로 메시지를 보내려 했으나 그녀가 이미 친구 목록에서 자신을 삭제한 것을 확인했다.‘진짜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온
온시환은 생각난 김에 바로 피부과를 예약했다. 다음 날 당장 점을 제거하러 갈 작정이었다.공지민이 가장 좋아했던 그의 점을 없애버리면 그녀가 분명히 속상해할 거라 확신했다.그날 밤도 온시환은 술에 취해 흐트러진 채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 소파에 누웠지만 도무지 잠들 수 없었다. 그는 옆에 있는 쿠션을 안고 이리저리 뒤척였다. 침실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예전에는 혼자 있을 때도 이 집이 이렇게 텅 빈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몸과 마음이 모두 불편하고 견딜 수 없는 답답함이 몰려왔다.결국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차 열쇠를 들고 문을 나섰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공지민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현관문 앞에 주저앉은 온시환은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문을 두드릴 용기도 없었다.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날 자신이 한 행동이 얼마나 상처를 줬는지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공지민의 입장이었다면 평생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다음 날 아침, 공지민은 문을 열자마자 집안으로 쓰러지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순간 온시환은 눈을 번쩍 뜨며 그제야 자신이 어젯밤 술김에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는 얼른 일어나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나 속도 쓰리고 배도 고파.”공지민은 눈쌀을 찌푸리고 잠시 그를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채소를 사러 나갔다.그녀가 향한 곳은 근처의 마트였다.온시환은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공지민, 나 위가 아프다니까.”공지민은 대꾸하지 않고 마트로 들어가 장바구니를 들고 식재료를 고르기 시작했다.몇 번을 더 위가 아프다고 얘기했지만 반응이 없자 온시환은 더 이상 말도 못 하고 조용히 따라다녔다. 그는 처음 느껴보는 굴욕감에 이를 악물었다.공지민이 계산대에 다다르자 온시환은 서둘러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더니 점원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내 걸로 계산해요.”점원은 공지민을 힐끗 쳐
온시환은 아파트 단지를 몇 걸음 벗어나다가 멈춰 섰다. 괜스레 짜증이 났다.그는 여자를 달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공지민과 싸울 때마다 늘 이렇게 격하게 감정을 폭발시키곤 했고 자신이 봐도 너무 미성숙한 모습이었다.온시환은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분명 오늘은 그녀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찾아간 건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자 억눌려 있던 감정이 다시 요동쳤다. 결국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또다시 큰소리를 지르고 말았다.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때까지도 공지민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온시환의 속은 점점 타들어 갔다.그렇다고 집에 돌아갈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집에 가봤자 지루하기만 할 테니까.연달아 담배를 다섯 대나 피웠지만 공지민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여자한테 이렇게 매달릴 필요가 있을까?설마 진짜 공지민을 내려놓지 못하는 걸까?결국 그는 차에 올라타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별장 소파에 앉아도 왠지 공기가 무겁게만 느껴지며 심장이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온시환은 한 주 동안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술자리도 피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혼자 시간을 보냈다. 그런 그에게 추지성이 전화를 걸어왔다.“너 지민 씨랑 화해한 거야? 아니면 왜 갑자기 집에서 틀어박혔어?”그 말을 듣자 온시환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사실 그는 얼마 전 점을 제거하려고 예약을 했었다. 공지민이 가장 좋아하는 게 자신의 코 옆 작은 점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막상 시술하러 가니 계속 망설이게 되었다.그녀가 분명히 좋아할 만한 걸 없애는 건 그녀를 더 아프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지민은 단 한 번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결심을 굳힌 것처럼 보였다.온시환은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려 술자리에도 나가지 않고 매일 휴대폰만 바라보며 공지민의 메시지를 기다렸다. 하지만 2주가 지나도록 그녀에게선 아무 소식도 없었다.‘세상에 이렇게
성질머리가 개차반인 그녀는 공지민을 보자마자 눈을 치켜뜨며 비아냥댔다.“지루해하는 거 뻔히 알면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또 시환 씨 집에 찾아온 거야? 그날 밤 다 봤으면서 화도 안 나? 여자라면 자존심 좀 챙겨야 하잖아. 널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뭐 하러 계속 들이대?”온시환에게는 여자가 많고도 많았다. 게다가 모두 득달같이 달려와 그의 곁을 지키려는 상황에서 공지민은 괜히 쓸데없이 끼어든 자신이 순간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더 이상 머무를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공지민은 망설임 없이 차에 올라타 액셀을 밟아 그 자리를 떠났다.두 시간 전쯤 온시환은 SNS에 글을 올렸다.[너무 아프고 힘들어.]그 한마디에 반응이 폭발했다. 그의 친구들뿐 아니라 과거 그와 얽힌 여자들까지 소식을 듣고 몰려왔다. 그중 몇몇은 문 앞에서 서로 비아냥거리고 경쟁하다가 결국 네 명만 남아 집 안으로 들어왔다.온시환은 몸 상태가 진짜 좋지 않았지만 공지민이 올 것을 기대하며 모든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휴가를 줬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는 친구 추가조차 하지 않았다.초인종 소리에 마지못해 일어나 문을 열었을 때 온시환의 눈앞에 서 있던 건 공지민이 아닌 다른 네 명의 여자들이었다. 모두 과거에 그와 얽힌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중에는 최근 가장 잘나가는 여배우도 있었다.온시환은 문 너머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지만 네 명의 여자들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애타게 기다리던 공지민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정말 이렇게 냉정한 거야?’그는 속눈썹을 내리깔며 쓴웃음을 지었다.“여긴 왜 왔어?”“아프다면서요. 돌봐주러 왔어요.”한 여자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온시환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필요 없어.”온시환은 즉시 문을 닫아버렸다. 이전까지 온시환은 늘 여자들에게 친절했다. 관계를 가진 이들에게 필요한 자원을 아낌없이 제공하고 세심하게 배려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이번처럼 노골적으로 무례하게 대했던 적은 처음이었다.예전의
온시환은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어조에는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추지성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은근히 온시환을 힐끔거렸다. 그가 이런 말을 할 때 자신의 표정을 봤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꼭 버려진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모습이었다.병원에서 이틀 더 있으며 열이 완전히 내린 온시환은 드디어 퇴원했다.병원 문을 나선 그는 차에 올라탄 뒤 곧바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며칠 동안 참았던 담배라 그런지 한껏 들이마시며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추지성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건넸다. “너 요즘 우리랑 술 마시러도 안 가더라. 오늘 저녁에 좀 달려볼래?”“싫어.”짧게 대답한 온시환은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모든 게 그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공지민이 나타나기 전엔 내가 어떻게 살았더라?’그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이별 후폭풍이란 게 이렇게 크다니 온시환은 자신의 선택을 점점 더 후회했다.담배를 다 피운 그는 입을 열었다.“나 점 빼러 갈 거야.”추지성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웃음을 터뜨렸다.“갑자기 왜 그래? 너 그 점 매력 포인트잖아. 내가 들은 바로는 네 점 때문에 좋아하는 여자들도 많다던데.”온시환은 마치 뭔가에 화풀이라도 하듯 대꾸했다.“어쨌든 뺄 거야. 후회하게 만들어야지.”누구를 겨냥한 말인지 알 법도 했지만 추지성은 굳이 묻지 않았다. 후회를 바라는 건지 아니면 주목받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조용히 차를 몰았다.피부과 앞에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갑자기 망설였다.“야, 내가 점을 빼면 공지민이 나를 안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말을 하고 나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추지성은 담배를 꺼내려다 그 말을 듣고 손에서 떨어뜨리고 말았다.그가 아는 온시환은 이런 고민과는 거리가 멀었다. 과거의 그는 여자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더 홀가분해했다. 여자를 귀찮게 생각하며 잠자리만 원했다. 절대 여
아직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온시환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서두르며 빠르게 그녀를 따라갔다.공지민은 오늘 밤 문보영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나왔다. 문보영은 그녀에게 유일한 친구였기에 이 자리에 빠질 수 없었다.그동안 공지민은 집에 틀어박혀 미친 듯이 그 사진들을 바라보며 죽어가는 것 같은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하지만 그녀는 구은우에게 절대 죽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모든 것이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누군가 공지민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뒤돌아보니 온시환이었다.온시환은 많이 야윈 모습이었다. 그의 눈에는 약간의 취기가 감돌며 어딘가 멍한 기운이 함께 느껴졌다.“정말 너구나...”공지민은 사실 온시환에게 아무런 원망도 없었다. 온시환은 그녀의 몸을 원했고 그녀는 그에게서 감정적인 위안을 얻었다. 둘 사이에 빚진 건 없었다.“네, 시환 씨. 여긴...”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시환이 다가와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며 벽으로 밀어붙이더니 강아지처럼 여기저기를 물기라도 하듯 키스를 했다.공지민의 등은 벽에 부딪혀 아팠다. 그의 따뜻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이어서 볼과 목에 닿았다.혹시라도 누군가 지나갈까 봐 걱정된 그녀는 서둘러 그를 밀어냈다.“시환 씨...”말을 끝내기도 전에 온시환은 그녀를 옆에 있는 화장실로 끌고 들어갔다.“지민아,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온시환은 그녀를 안고 세면대 위에 앉혔다. 두 손은 그녀를 감싸고 있었고 그의 눈은 여전히 취기가 서려 있었지만 어딘가 깨어 있는 듯했다.이곳은 언제든 누군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었다.공지민은 한숨을 쉬며 그를 밀어냈다.“얘기는 나중에 해요. 보영 언니가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요.”“나도 같이 가고 싶어.”온시환은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뺨에 대고 비비며 애교를 부리듯 말했다.공지민은 결국 마음이 약해져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난리 치면 안 돼요.”“안 할게. 이제 정말 안 그럴게.”술에
공지민은 방을 나와 큰길가로 나섰을 때도 아직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그녀와 문보영은 친구였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문보영이 온시환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그를 헐뜯기 바빴다. 온시환은 쓰레기 같은 남자라며 여자들에게 조금의 책임감도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말끝마다 온시환을 싫어하는 티를 냈고 심지어 공지민이 온시환을 좋아한다고 알게 되었을 때는 온갖 방법으로 만류하기까지 했다.이 두 사람이 엮일 줄은 공지민은 죽어도 생각지 못했다.그녀는 차에 올라타 대리운전 기사에게 바로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한편, 온시환은 곁에 있던 문보영을 밀쳐내며 술기운이 한순간에 깨졌다.“뭐 하는 거예요?”문보영은 술기운에 취해 입맞춤을 했던 터라 정신이 돌아오자 머릿속이 하얘졌다.그녀는 급히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미안해요, 술에 취해서 그랬어요.”문보영은 정말 취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히 온시환에게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게다가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의 남자 친구 아닌가.이미 오래전에 마음을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이런 일을 벌이다니 문보영 자신도 믿어지지 않았다.온시환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입가를 세게 문지르며 말했다.“이 일 지민이가 알아선 안 돼요. 먼저 돌아가요.”문보영은 여전히 속이 쓰렸다. 그녀는 오랫동안 온시환을 짝사랑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를 온갖 안 좋은 말로 깎아내렸던 것도 사실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공지민과 온시환이 함께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녀는 스스로 감정을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술김에 이런 짓을 벌이다니.그녀는 공지민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짝사랑에 마침표를 찍은 것 같기도 했다.문보영은 방으로 돌아와 공지민이 없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다.“지민이는 어디 갔어?”“네가 나간 지 10분 정도 후에 지민 씨도 따라 나갔어. 조금 있다가 혼자 돌아오더니 온 작가님은 기다리지
온시환이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보이는 새하얀 천장을 보며 며칠 전 일이 다시금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는 손을 들어 이마를 문지르며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을 뽑았다.추지성이 그를 보며 눈을 잔뜩 부라렸다.“또 어디 가려고?”“집에 가야지.”“뭐?”온시환은 더 이상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추지성을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고 바로 차를 타고 떠났다.추지성은 그 모습을 보며 어이없을 따름이었다.“진짜 왜 저러는 거야? 병이나 제대로 고치지, 대체 뭘 또 꾸미려고.”...점을 제거한 후, 온시환은 혼자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그는 집에서 일주일 동안 쉬며 상처가 아물고 몸 상태도 완전히 회복되었다.추지성이 그를 보러 올 때는 양손 가득 이것저것 들고 왔다.“다행히 이번엔 남의 또 집 복도에서 기다리며 찌질하게 굴진 않았네. 정말 다행이다.”“다신 그러지 않을 거야.”추지성은 가까이 다가와 그의 얼굴을 살피더니 말했다.“진짜 점을 뺐네? 그냥 여자 하나 때문인데 그럴 필요까지 있었어?”온시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입안이 씁쓸하기만 했다.추지성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아, 참. 지난번에 만났던 오하윤 알지? 걔가 요즘 제원에 있더라. 어제도 봤는데, 지금은 내 파트너야. 참 웃긴 여자야. 온갖 속내를 얼굴에 다 쓰고 다니더라고.”온시환의 오하윤의 얼굴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그녀가 공지민의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사실만 떠올랐다.“아, 그리고 말이야. 하윤이가 그러던데 지민 씨가 첫사랑을 잊지 못했다고 하더라. 어쩌면 널 대체품으로 보고 있는 걸지도 몰라.”온시환의 눈매가 가늘게 좁아졌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었다. 그가 대체품이라고?“하! 말도 안 돼.”“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하윤이가 그러더라고. 그 남자 이름이 구은우라나? 코끝에 점이 하나 있었다던데, 너랑 딱 그거 하나 닮았대. 생긴 건 전혀 다르다고.”추지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시환의 표정이 한순간에 어두워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