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민은 온순하고 얌전한 인상이라, 절대 다른 남자를 만나는 사람이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명백히 긴장하고 있었다.“아니에요, 다른 남자는 없어요. 그냥 제 침실이 너무 엉망이라... 우리 손님방에서 자면 안 될까요?”온시환은 금세 이해했다. 그녀가 그를 너무 좋아해서 그의 앞에서 지저분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였다.그는 기분이 한층 좋아져 살짝 목에 맨 넥타이를 당기며 말했다.“그래. 그럼 손님방으로 안내해 봐.”손님방의 침대는 조금 작았지만 두 사람이 눕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었다.온시환은 샤워를 하고 나서 허리에 수건 하나만 둘러쓰고 나왔다. 공지민도 샤워를 마치고 나서 방의 불을 끄는 순간 그가 그녀를 덮쳤다.“한 번만 키스하게 해.”그녀는 바로 입술을 내밀었지만 온시환은 아래쪽으로 내려갔다.공지민은 온몸이 굳어져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감각에 휩싸였다.“안 돼요, 더러워요.”하지만 온시환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만족할 만큼 그녀를 애무한 뒤에야 천천히 그녀 옆에 누웠다. 그러고는 다시 그녀의 입술에 한참 키스했다.공지민은 이런 상황이 익숙지 않아 중간에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그가 말했다.“왜? 자기 냄새도 싫은 거야?”공지민은 조금 꺼려졌다. 온시환이 이렇게 해주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지만 다른 여자에게도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그러나 그는 지난번에 이런 건 처음이라고 말했었다.“시환 씨, 이런 거 좋아하세요?”온시환은 웃음을 참으며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질투해?”“제가 질투하면 앞으로 이런 거 안 하실 건가요?”“맹세컨대 자기 말고는 이런 걸 한 적이 없어.”다른 여자들에게는 그도 꺼려졌지만 공지민에게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온시환은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녀의 유혹에 빠져들었다.공지민은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진짜든 아니든 믿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온시환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이제 자자. 시간이 늦었어.”하지만 공지민은 좀처럼 잠들 수
온시환은 공지민이 감히 다른 남자를 숨길 용기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매일 아침 그의 별장으로 와서 음식을 해주는 모습이 그 증거였다.하지만 온시환은 곧 깨달았다. 그녀가 남자를 숨겼다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어차피 그는 그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재미로 함께하고 있었을 뿐, 그녀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고 해서 그녀를 놓아줄 리가 없었다.처음부터 그녀가 스스로 다가온 것이었고 그가 질릴 때까지는 그녀를 떠날 수 없게 만들 생각이었다.“원래 네 컴퓨터를 좀 빌려서 대본을 수정하려 했는데, 보아하니 그냥 돌아가야겠네.”공지민은 서둘러 앞으로 다가섰다.“어제 술 드셨잖아요.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혹시라도 경찰 검문에 걸리면 귀찮은 일이 생길 수 있었다.온시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발적으로 하는 일인데 굳이 부담스러울 필요는 없었다.공지민은 그를 집에 데려다준 후 혼자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온시환은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대본을 몇 줄 수정하기도 전에 전화가 걸려 왔다.“추지성이 그러던데, 너 요즘 집에 숨겨둔 여자가 있다며? 도대체 누구야? 우리 온 작가를 정착하게 만든 여자가?”온시환은 추지성이 어디 가서 말을 못 참는 성격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분명 그가 두 사람의 일을 부풀려 떠벌린 게 틀림없었다.정착? 그 단어는 온시환과는 어울리지 않았다.“난 그런 생각 한 적 없으니까 헛소리하지 마.”“근데 추지성이 그러더라. 네가 완전히 잡혀서 매일 그 여자가 해주는 밥만 먹고 있다던데? 너희 별장에 혹시 요리사가 필요한 거야?”“그건 걔가 요리를 잘해서 그런 거지. 시간이 된다면 너도 와서 한 번 먹어봐.”상대방은 정말 흥미가 생긴 듯했지만 온시환의 태도에 더 궁금해졌다.“좋아. 근데 그 여자 이름이 뭐야? 도대체 누구길래 그렇게 요리를 잘해?”“공지민. 별로 유명하지 않은 배우야. 아마 너는 모를 거야.”상
이런 말을 들었어도 공지민의 얼굴에는 아무런 상처받은 기색이 없었다.공지민은 그저 몇 마디를 더 당부하고는 온시환이 차에 오르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온시환은 백미러를 통해 그녀가 뒤에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공지민은 자동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그제야 천천히 돌아섰다.‘진짜 고집이 세긴 하네.’그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가 요리를 좋아한다면 계속 여기서 해주면 될 일이었다.한편 공지민은 방으로 돌아가서도 여전히 레시피를 연구하며 시간을 보냈다.별장에 있는 가정부는 그런 그녀를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지민 씨, 오늘 대표님 안 들어오실 거예요. 좀 쉬는 게 어때요?”온시환이 어디에 갔는지에 대해서는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는 대개 외박할 가능성이 높았다.공지민은 고개를 들어 가정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저 하나도 안 피곤해요. 요리 하나만 더 마무리하고 갈게요. 시환 씨 오시면 물어봐 주세요. 만약 오늘도 안 돌아오시면 저한테 연락해 주세요.”가정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온시환 주변의 다른 여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커리어나 이익을 위해 그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공지민은 그녀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어쩌면 공지민은 그중 가장 순진하고 어리석은 여자일지도 몰랐다. 공지민이 원하는 건 온시환의 마음뿐이었다.가정부는 더 말려보려고 했지만 공지민이 온시환을 너무 좋아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누가 뭐라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공지민은 결국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간단히 식사를 준비했다.그때 문보영이 전화를 걸어왔다.“지민아, 요즘 뭐 하고 살아?”“그냥 예전이랑 똑같지, 뭐.”“똑같긴 뭐가 똑같아. 요즘 대체 뭘 하는데?”“시환 씨 별장에서 밥하고 있어. 그 사람 위가 안 좋다길래 레시피 보면서 챙겨주고 있어.”문보영은 그 말을 듣자마자 화가 치밀었다.“야, 걔 돈 없어서
문보영은 화가 나서 전화를 끊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공지민에게 다시 문자 한 통을 보냈다.[믿지 못하겠으면 오늘 밤 한번 확인해 봐. 그 사람, 절대 집에 안 들어갈 거야.]공지민은 온시환이 정말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늘 다른 여자가 있었고 공지민처럼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그에게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슬프지 않았다. 단지 그 얼굴을 볼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으니까.한편 온시환은 저녁 모임 자리에 앉자마자 테이블로 걸어온 톱스타 배우를 맞이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얌전히 그의 접시에 반찬을 덜어주고 있었다.그녀는 유명세는 있었지만 아직 내세울 만한 대표작이 없었다. 지금 이 정도로 인기를 얻은 것도 결국 그저 예쁜 얼굴 덕이었다.온시환은 원래 쓰레기 같은 남자였기에 단번에 그녀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깨끗해?”테이블에 앉아 있던 감독과 투자자들은 온시환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을 보자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네, 깨끗해요.”온시환은 가볍게 웃으며 그녀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겼다.“좋아. 오늘 밤 나랑 있자.”한편 남자들끼리 술잔을 주고받으며 떠들기 시작했다. 추지성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한마디를 했다.“난 네가 오늘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집에 아직 그분이 있는 거 아니야?”다른 사람들도 농담 섞인 질문을 던졌다.“혹시 온 작가님, 몰래 결혼하신 거 아니에요?”추지성은 술잔을 비우고는 크게 웃었다.“말도 안 돼. 얘가 전에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결혼하는 놈은 다 개라고 했잖아. 지금 이렇게 편하게 노는 게 얼마나 좋아.”다들 웃음을 터뜨렸고 온시환은 옆에 있는 여자에게 술을 먹였다. 하지만 추지성의 말 때문에 순간적으로 공지민의 얼굴이 떠올랐다.추지성은 계속해서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온 작가는 몇 년 전 그 수술 이후로 그냥 지금을 즐기자는 마인드야.”그
추지성은 그동안 온시환이 농담 삼아 말하는 줄로만 알았다.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번번이 바람을 피우는 모습을 보고도 포기하지 않을 여자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공지민은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있었다.추지성은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쓰레기통에 던졌다.“내가 지금은 도와줄 시간이 없어요. 저쪽은 당분간 끝날 기미도 없고 난 빨리 가봐야 하니까 알아서 기다리세요.”추지성은 밖에서 남의 소리를 엿듣는 취미는 없었다. 원래는 온시환과 몇 마디 더 나누고 싶었지만 잠깐 사이에 그가 여자를 데리고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공지민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전 여기서 기다릴게요.”추지성은 더 이상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화장실 문이 열린 건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아무리 이곳이 깨끗하다 해도 결국 밖이라는 한계가 있었다.문을 열고 나온 온시환은 의자에 앉아 있는 공지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테이블 위에는 보온 도시락이 놓여 있었다.온시환은 걸음을 멈추고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지 의심했다. 뒤에 있던 여자가 천천히 손을 올려 그의 팔을 감았다.“시환 씨.”온시환은 갑자기 불편한 기분이 들어 여자의 손을 툭 뿌리쳤다.여자는 조금 놀랐지만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 말했다.“그럼 전 먼저 갈게요.”“그래.”온시환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는 갑자기 공지민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약간 짜증이 난 듯 이마를 찌푸린 채 담배를 한 모금 빨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여기는 왜 온 거야?”“시환 씨한테 약재가 들어간 국 좀 가져다주려고.”“필요 없어.”“필요해지면 말해요.”온시환은 왠지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공지민, 넌 눈치도 없어? 내가 짜증 내는 거 안 보여?”공지민은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온시환은 깊게
온시환은 천천히 담배를 피우며 그녀를 10분 정도 바라보았다. 공지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그는 천천히 차를 몰고 가서 그녀 앞에서 멈췄다.공지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를 보고 살짝 웃었다.“전 시환 씨가 이미 간 줄 알았어요.”“타.”그녀는 바로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차 창문은 모두 열려 있었지만 은은하게 담배 냄새가 느껴졌다.“담배 피웠어요?”“싫어?”많은 여자가 남자가 담배를 피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지민은 그의 앞에서 무언가를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는 표현을 잘하지 않았다.공지민이 가장 좋아하는 건 언제나 온시환 그 자체였다.이 사실을 떠올리자 온시환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준 뒤 그는 갑자기 오늘 밤 이곳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마침 공지민이 자연스레 물었다.“올라와서 좀 쉴래요?”온시환은 그녀의 말에 바로 차 문을 열고 내렸다.전에도 이곳에 온 적이 있었고 방 안은 여전히 아늑했다. 그는 소파에 가서 앉았다. 한편 공지민은 남은 국을 데워 그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국을 다 마신 후 몸을 뒤로 기대며 말했다.“이리 와.”공지민은 온시환의 옆으로 다가갔지만 몸을 기울인 순간 다른 여자의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그가 끌어안으려 하자 공지민은 드물게 몸을 살짝 뒤로 빼며 거리를 두었다.“먼저 씻어요.”온시환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자신의 소매를 맡아 보았다. 확실히 여성용 향수 냄새가 남아 있었다.“뭐야? 싫어?”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네 방 화장실 좀 쓸게.”“손님방에도 있어요. 다른 사람이 제 화장실 쓰는 거 좋아하지 않거든요.”공지민은 늘 온시환에게 순응적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온시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침실 문을 바라보았다.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지난번에도 그랬다. 그녀의 침실 안에 도대체 뭐가 있기에
온시환은 그녀가 자신의 코끝에 있는 작은 점을 좋아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첫날 밤에도 그녀는 그 점에 입을 맞췄고 그 후에도 매번 손끝으로 그곳을 살며시 만지곤 했다.남자든 여자든 침대 위에서는 각자만의 습관이 있다. 어떤 이는 입맞춤을 좋아하고 또 어떤 이는 목을 애무하기를 즐긴다. 아마 공지민은 조금 특별한 편일 것이다. 그녀는 코끝에 점이 있는 남자를 좋아했다.온시환은 눈에 잠시 자신만만한 빛을 띄웠다. 그의 외모가 아마 그녀의 취향에 꼭 맞았던 모양이다.“정말 그렇게 좋아?”“네, 좋아요.”그는 이 질문을 처음 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늘 같은 대답을 했다.온시환은 그녀를 침대에 눕혔고 이후의 일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새벽까지 이어진 뒤 그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남기고 잠들었다.공지민은 조용히 휴대폰을 들었고 추지성이 그녀에게 친구 추가 요청을 보낸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친구 요청을 수락했다.다음 날 아침,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온시환은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공지민은 일어나 간단히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그때 추지성이 그녀를 단톡방에 초대한 것을 알게 되었다. 단톡방에서는 사람들이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남자가 구질구질하게 구는 건 봤어도 여자가 이렇게까지 하는 건 처음 봤어.][시환아, 너 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길래 그 여자가 너밖에 모르게 된 거야?][이것도 꽤 귀찮겠는데? 한 여자랑만 자다 보면 금방 질리지 않겠어? 특히 시환이는 여자들의 유통기한이 3개월도 안 되잖아.][내가 봤을 때 그 여자도 참 한심해. 외모가 다른 여자들보다 못하니까 그런 집착으로 버티는 거겠지.][2천만 원 건다. 시환이는 절대 그 여자에게 넘어가지 않아.]곧이어 단톡방에서 내기를 시작했다.공지민이 내용을 더 확인하려는 순간 이미 단톡방에서 강퇴당한 상태였다.곧바로 추지성이 개인 메시지로 연락을 해왔다.[미안해요. 실수로 잘못 초대한 것 같아요.]추지성은 그 순간 몹시 불안해했다. 공지민을 친구로 추가
오하윤은 더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공지민이 말을 끊어버렸다.공지민의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온시환의 손을 잡았다.“저 좀 피곤해요. 아마 멀미 때문인 것 같아요.”다른 남자들이 서둘러 맞장구쳤다.“그럼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네요.”이 펜션은 휴가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고 이 계절에는 산 위 꽃이 만개하는 때였다. 온시환도 예전에 한 번 왔던 곳으로 모두가 좋아했기에 이번에도 다시 함께 오게 되었다.펜션에 들어선 이후로 공지민은 줄곧 말이 없었다. 온시환이 가끔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건성으로 대답했다.“왜 그래? 그렇게 힘들면 조금 쉬어.” 공지민은 고등학교 때 매우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다른 사람들과 말 섞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반대로 오하윤은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오하윤은 공지민이 차갑고 도도한 척한다고 생각해 그녀를 차도녀라고 불렀다.오하윤의 눈에 공지민은 남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그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으로 보였다.한 번은 오하윤이 공지민을 곤란하게 만들려 여학생 화장실에 가두려고 했는데 구은우가 이를 목격하고 공지민을 데리고 나왔다.구은우는 공지민의 소꿉친구로 그녀를 매우 아꼈다. 그는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아 모두에게 인기 있는 인물이었다.오하윤은 구은우를 열렬히 좋아했기에 그가 공지민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보며 더욱 그녀를 싫어하게 되었다.그 3년 동안 구은우는 공지민의 곁을 지켰다. 등하교 때마다 그녀의 가방을 들어주는 것은 물론 그녀의 편의를 항상 챙겼다.그러나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공지민은 연예인이 되었고 그녀의 곁에는 더 이상 구은우가 없었다.‘하, 연예인이 되었다고 은우 같은 사람은 이제 안중에도 없다는 거겠지. 그래서 은우를 차버리고 온시환을 만났을 거야.’오하윤은 온시환을 알고 있었다. 그런 남자는 그녀가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공지민이라고 가능할까?공지민이 분명 예전처럼 남자를 발판으로 삼으려는 거라고 생각했다.오하윤은 비웃음을 흘리며 공지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
구은우는 대학교 1학년 때 공지민과 사귀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놀러 갔다가 구은우가 파도에 휩쓸린 아이를 구하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아이는 무사했지만 구은우는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진짜 죽었네.’온시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는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었지만 추지성이 그의 손 가까이에 있던 담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또 피우려고? 오늘 하루에 대체 몇 대나 피운 거야? 게다가 여긴 병원이잖아. 금연 구역이라고.”온시환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한편 추지성은 서류를 한 번 살펴본 뒤 감탄을 내뱉었다.“와, 운명도 참 잔인하네. 그렇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 같이 놀러 갔는데, 결국 한 사람이 사고로 떠나버리다니. 남겨진 사람은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지. 아마 끊임없이 생각할 거야. 그날 바다에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데 말이야, 구은우는 공지민이 가장 사랑했던 해에 떠났어. 그리고 그해는 구은우가 공지민을 가장 사랑했던 해이기도 했지.”구은우는 열여덟 살 공지민의 삶에서 서서히 퇴장했다. 이후로 누가 나타나더라도 구은우를 대신할 순 없었다.이게 바로 운명의 장난이었다.추지성은 이제는 공지민에 대해 별다른 비난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온시환 자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공지민에게 그저 장난이었다고. 결국 장난이 과해져 자신은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는 가볍게 떠난 것뿐이었다.“그런데 시환아, 너 눈치챘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해가 네가 수술을 받았던 해랑 딱 겹쳐. 뭔가 운명 같지 않아?”온시환은 그런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적으로 웃었다.“남을 구하겠다고 여자 친구를 내버려두고 자기희생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결국 구해줬다는 그 아이는 당일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짐승을 구하는 게
온시환은 그대로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정장에 먼지가 묻어 뿌옇게 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일 꼭대기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이 그를 다시 끌어당기려 하자 온시환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지민아, 오늘 밤의 달 좀 봐.”공지민은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오늘 달은 분명 아름다웠고 내일 날씨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며 신중하게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지민은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공지민이 떠나는 것을 본 온시환은 당황해 급히 뒤쫓으려다 그만 술에 취한 상태로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을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으로 본 적이 없었다.그는 흙투성이가 된 정장차림으로 그녀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다리가 심하게 다친 듯 몇 번을 시도해도 실패하고 말았다.강렬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어느 정도 맑게 해주었고 그제야 그는 현실을 자각했다.‘이건 꿈이 아니야. 지민이가 정말 나를 보러 온 거야.’공지민은 그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다쳤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병원에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나섰다.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온시환은 공지민의 손목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 같았다.공지민은 옆에 있던 의사에게 물었다.“얼마나 쉬어야 하나요?”“2주 정도는 안정이 필요해요. 당분간은 목발을 써야 할 거예요.”공지민은 병원 매점에서 목발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온시환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온시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공지민은 목발을
온시환이 집에 돌착했을 때도 서주혁의 팔을 붙잡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서주혁이 그를 떼어내면 온시환은 다시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지민아...”“난 정말 모르겠어. 왜 날 대체품으로 삼았어? 그렇게 구은우가 좋으면 그냥 그 사람 찾아가면 되잖아.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건데.”“내가 네 장난감이냐, 나는 당해도 싸다 이거야?”서주혁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창피해서 버리고 가버리고 싶었다.온시환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한동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서주혁은 가정부에게 그를 잘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온시환의 집을 나섰다. 취한 사람과 더 이상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서주혁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시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공지민이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조금 황당했다. 경찰은 온시환이 음주 운전을 하다 적발되었으니 와서 그를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공지민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친구분을 데려가 주실 수 있을까요? 음주 운전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면 안 될까요?”“그분께서는 당신에게만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와도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했고요.”공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결국 경찰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잠든 그의 모습은 차분해 보였고 평소의 산만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공지민은 경찰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온시환이 다시는 음주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는 보증을 하고 나서야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아 살짝 당겼다.온시환은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그녀를 보고 꿈을 꾸는 줄 알았다.갑자기 꿈속 공지민의 얼굴이 사라질까 봐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지민아?”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차가운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대체 원하는 게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
온시환은 천천히 손을 놓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래, 알았어.”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한마디를 내뱉었지만 온시환의 눈가는 아직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러나 공지민은 이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온시환이 또 심심풀이로 자신을 괴롭히려 한다고 생각했다.차인 걸 인정하지 못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고 여겼다.온시환 같은 남자가 진심일 리 없었다. 설령 진심이라 해도, 공지민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그는 식당 밖에 홀로 서 있었다.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공지민이 택시를 타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잠시 후, 그는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야, 오늘 한 잔 하자.”반승제는 흔쾌히 응했다.이상하게 오늘 밤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는 서주혁까지 불렀다.두 사람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이미 여러 병의 술을 비운 상태였다.“시환아, 너 대체 왜 이래?”온시환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가에는 이미 취기가 가득했다.“뭐 하는 거야? 얼른 앉아. 오늘은 취하지 않으면 못 가!”혼자서 술을 퍼마신 온시환을 보며 반승제는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너 혹시 무슨 고민 있냐?”“고민은 무슨... 그냥 술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거지. 하하.”서주혁은 말없이 나무토막처럼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 그는 분위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반승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들을 모두 치우고 온시환 앞에 과일주스를 내밀었다.“솔직하게 얘기해. 무슨 일이야?”그 말을 듣자마자 온시환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반승제는 그가 웃는 줄 알았다. 웃을 때도 어깨가 들썩이긴 마찬가지니까.“뭐야, 웃긴 얘기라도 있어?”그는 온시환의 몸을 돌려보았고 그제야 그의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야, 주혁아! 이거 봐. 시환이가 울고 있어!”온시환은 그 말을 듣고 얼른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꺼져!”반승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자동차가 레스토랑 앞에 멈춰서자 공지민이 먼저 내려서 안으로 들어갔다.곧이어 온시환도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자리를 예약 해둔 터라 직원이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공지민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의 푸른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비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왜, 내가 이제 그 점이 없으니까 나를 쳐다볼 생각도 없어진 거야?”공지민은 그가 귀찮을 뿐이었다. 이미 진실을 알았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지, 굳이 이런 말로 둘 다 어색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그러나 온시환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날카로운 말을 뱉었다.“네가 다니던 고등학교 가서 구은우 사진 봤어. 솔직히, 별로 잘생긴 것도 아니던데.”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지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온시환은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지만 오히려 더 그녀를 찌르는 말을 꺼냈다.“그렇게 좋으면 왜 안 찾아가? 아니면 이미 결혼이라도 한 거야? 네가 이러거 있는 거 보면, 그 자식도 너를 기다리지 않은 모양이지? 참 안 됐네.”그때 마침 직원이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말없이 잔을 들어 올린 공지민은 그대로 커피를 온시환에게 끼얹었다.온시환은 이전에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감정적인 반응이 반갑기까지 했다.마치 나무토막처럼 감정 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공지민은 얼굴을 잔뜩 굳히고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정신이 좀 들었어?”온시환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옆에 있는 냅킨을 집어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어쩌지? 평생 정신 못 차릴 것 같아. 공지민, 난 지금도 이해가 안 돼. 왜 날 대체품으로 썼는지. 진짜 그 점 하나 때문이야?”그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지 않는 이상 그는 평생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없을 터였다.그래서 그는 더더욱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심지어 그
온시환은 공지민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첫사랑을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왜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고 그에게 와서 상처를 남겼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더 한심한 건 자신이었다. 대체품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몰래 보러 온 자신이 더 우스웠다.온시환의 차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주차돼 있었다. 연예계에서 그의 영향력 덕분에 차를 촬영장 근처에 세워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그는 창문 너머로 공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문 장면 촬영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아픈 손목을 문지르는 모습, 옆에 있던 낯선 여성과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별다른 장면도 아닌데 온시환은 끝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공지민은 오후 촬영을 마치고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때 문보영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공지민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한쪽으로는 그날 밤 목격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다른 한쪽으로는 문보영이 여전히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사실이 마음에 남았다.하지만 그녀는 이제 둘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문보영은 공지민이 그날 밤의 일을 봤다는 걸 몰랐다. 여전히 밝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걱정했다.“지민아, 요즘 다시 촬영 시작했어? 혹시 회사로 돌아올 생각은 없어? 내가 대표님께 한 번 말씀드릴 수 있어. 사실 대표님도 꽤 후회되시는 것 같더라. 요즘 네 인지도도 높잖아.”“아니, 괜찮아.”“그런데 너랑 시환 씨... 지민아, 너희 두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파티에 데려왔을 때만 해도 잘 될 줄 알았는데, 요즘은 연락도 안 한다고 하던데.”예전 같았으면 공지민은 문보영의 말을 진심 어린 걱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문보영이 정말 궁금한 건 온시환이 여자 친구가 있는지 여부라는 걸.“헤어졌어. 이번에는 정말 끝이야.”문보영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넌 괜찮아? 너 시환 씨 정말 좋아했잖아. 혹시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너를 상처 준 거야?
당연히 취했다. 취하지 않았으면 온시환의 성격상 추지성에게 사과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추지성은 온시환에게 다시 술병을 열어주며 말했다.“아직 덜 취한 것 같으니 더 마셔.”온시환은 희미하게 뜬 눈으로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지성아, 나 지민이 고등학교에 가봤어. 그리고 지민이 첫사랑을 알게 됐지. 꽤 괜찮게 생겼더라.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뭔지 알아?”“뭔데?”“내 코끝 여기.”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끝을 가리켰다. 여전히 흐릿한 눈빛이었다.“여기에 구은우랑 똑같은 점이 있었잖아. 공지민은 아마 그 점 때문에 나에게 잘해줬던 거야. 너도 우습지 않냐?”그는 입으로 우습다고 말했지만 눈빛에는 슬픔이 넘칠 듯 담겨 있었다.추지성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누구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가지고 놀고 싶을 뿐이었고 막상 손에 넣으면 금세 흥미를 잃었다.“못 가지는 게 가장 좋은 거지. 손에 넣으면 금방 싫증 나는 법이거든.”“지성아, 나 여기가... 정말 아프다.”추지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야, 네가 진짜 내 친구 아니었으면 벌써 널 집어 수영장에 던져 넣어버렸을 거다. 여자를 두고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술 더 마셔야겠어.”“안 마셔. 마시면 더 괴로워질 뿐이야.”온시환은 그 말을 끝으로 옆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추지성은 옆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려다 그의 축축한 속눈썹을 보고 멈칫했다.‘설마 또 울었어? 요즘 완전 여자 같아. 조금만 힘들어도 시도 때도 없이 우네.’온시환은 원래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특히 수년 전 큰 수술을 받은 후, 의사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뒤로 그는 늘 세상을 가볍게 여겼다.그가 쓰는 드라마 대본들도 대부분 막장극이었고 그는 막장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막장이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돌아와 부메랑처럼 자신을 찌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밤중에 온시환은 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