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민의 얼굴은 조금 붉어졌다. 그녀는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아직 못 하는 것도 많지만 천천히 배울게요. 시환 씨가 원하는 건 뭐든 다 배울 수 있어요.”공지민의 말투는 단호했고 시선은 온시환의 코끝에 있는 작은 점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그녀가 이 점을 유독 좋아한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 함께 밤을 보냈을 때부터 발견했다. 그녀가 가끔 점에 입을 맞추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이 점이 그렇게 매력적인가?’온시환은 웃음이 나왔다.“이 점이 그렇게 좋아?”“네, 정말 좋아요.”그녀는 망설임 없이 대답하며 천천히 그의 품에 안겼다.“제 생각에는 시환 씨 몸에서 가장 멋진 부분이에요.”온시환의 외모는 그 자체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때로는 다정하면서도 나쁜 남자의 매력을 동시에 지닌 그는 누구에게나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하지만 그의 코끝에 있는 점이 가장 멋지다고 말한 사람은 공지민이 처음이었다.그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얘 혹시 이상한 취향이라도 있는 건가?’그러나 공지민이 이 점을 바라보는 눈빛은 순수한 집착과 동경 그 자체였다. 이는 그녀가 온시환에게 깊이 빠져 있음을 의미했고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만족했다.온시환은 작게 웃으며 손을 뻗어 그녀의 옷 속으로 천천히 파고들었다.“좋아해 줘서 고마워. 우리 자기가 할 줄 아는 게 이렇게 많다니, 내가 상을 줘야겠네?”공지민의 얼굴은 더 빨개졌고 그녀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대답하지 못했다.그녀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온시환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여자가 얼굴을 붉힌다는 건 그 어떤 고백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니까.그는 마음이 살짝 누그러진 것을 느끼며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려 부드럽게 키스했다.주변에 있던 가정부들은 상황을 알아차리고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온시환은 그녀와 10분 동안 키스하다가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고 소파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두 시간만 잘 거야. 너
공지민의 눈이 순간 반짝이며 온시환을 따라 차에 올랐다.차는 한 호텔 앞에 멈췄고 온시환은 가장 먼저 숙취 해소제를 몇 알 삼켰다. 창가 쪽에 주눅 든 모습으로 앉아 있는 공지민을 보며 그는 잠시 망설였다.공지민은 화려한 미모를 가진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얌전하고 순수해 보였으며 전형적인 모범생 같은 스타일이었다.늘 섹시하고 화끈한 여자를 만나왔던 온시환은 지금의 그녀 같은 모습이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다만 오늘 함께하는 자리에서 누군가 공지민을 탐내게 되면 그가 정말 순순히 내어줄 수 있을까?‘겨우 요리를 잘해서? 돈만 쓰면 더 잘하는 요리사를 고용할 수 있지 않나?’잠깐 쓸데없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는 금세 머릿속에서 떨쳐냈다.참 우스운 생각이었다. 그는 결론을 내리자마자 마음속의 망설임이 깨끗이 사라졌다.“정말 나랑 같이 들어가겠다는 거야? 오늘 만나는 사람들이 어떤 부류인지 알고 있긴 해? 너도 배우라면 알겠지만 감독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뻔히 알잖아. 게다가 오늘 데리고 온 여자는 기본적으로 교환 가능한 걸로 간주해. 누가 널 원한다고 하면 내가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어.”공지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조용히 말했다.“그럼 여기서 기다릴게요. 시환 씨가 술을 많이 마시면 제가 운전해서 모셔다드릴 수 있으니까요.”그녀의 소심하지만 배려 어린 말투에 온시환은 왠지 모르게 흐뭇한 마음이 스며들었다. 온시환은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그래, 우리 자기가 이렇게 귀엽고 착하니까, 오늘 밤 누가 널 원한다고 해도 내가 딱 잘라 거절할게.”온시환의 농담 섞인 말에도 공지민은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듯 보였다. 그녀는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참아낼 수 있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공지민이 배우로 활동한 몇 년 동안 이 호텔에 와본 적은 없었지만 전에 들은 적은 있었다. 이곳은 보안이 철저하고 회원제로 운영되어 기자나 파파라치 같은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한다. 호텔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은 기록에
온시환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공지민이 보내는 간절한 도움의 시선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공지민은 마치 몸이 굳어버린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분명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그가 약속했었다. 그녀를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겠다고. 하지만 들어온 지 채 10분도 안 돼 온시환은 자신의 말을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공지민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박민준의 손이 그녀를 향해 뻗어왔다. 그의 거친 손길이 그녀를 억지로 품에 안았다.“예전에 내가 너를 안으려 했더니 뺨을 날리더라? 이제 보니 네가 도도한 게 아니라 내 침대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거였군. 빌어먹을.”박민준은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그녀의 턱을 잡고 강제로 키스하려 했다.공지민은 겁에 질려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뺨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박민준이 그녀의 뺨을 힘껏 때렸고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소리를 들었다.이때 누군가 분위기가 험악해질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에 얼른 중재에 나섰다.“박 감독님, 고작 여자 때문에 이러실 필요 없잖아요. 게다가 이분은 온 작가님이 데리고 온 분인데 개라도 주인 앞에서는 가려서 때리셔야죠.”박민준은 자신의 행동이 충동적이었다는 걸 깨닫고 곧바로 얼굴에 미안한 기색을 띄우며 온시환에게 사과했다.“시환 씨, 미안해. 내가 실수로 손이 먼저 나갔네. 기분 상했다면 시환 씨도 품에 있는 여자 한 대 쳐도 돼. 나는 이런 게 오히려 좋더라고.”온시환은 품 안의 여자를 한 번 쓱 훑어보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난 여자는 안 때려. 여자는 사랑으로 다뤄야지. 그렇게 손부터 올리니까 어떤 여자가 박 감독이랑 입 맞추고 싶겠어?”그가 농담처럼 가볍게 받아넘기자 방 안의 긴장감이 어느 정도 풀렸다. 모두가 분위기를 바꿔 다른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한편 공지민은 당장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박민준의 손이 그녀의 치마 속을 거칠게 파고들어 은밀한 부위에 닿으려 했다.공지민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박민준이
공지민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의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왜요?”온시환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왜냐고? 그는 애초에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법 따윈 태생적으로 몰랐다. 그런 그에게 왜냐고 묻는 그녀가 어쩐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온시환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이미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 그러니까 오늘 돌아가면 네 집에서 조용히 있어. 앞으로도 내 집에 와서 밥을 해줄 필요 없어. 우리 집엔 가정부가 있으니까.”공지민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흘러내렸다.하지만 온시환은 전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이번엔 정말 포기하겠지.’그러나 공지민은 울음을 그치자마자 그에게 달려들었다. 두 손으로 그의 셔츠 깃을 움켜잡고 발끝을 세워 키스하기 시작했다.온시환은 뒤로 물러서며 벽에 기대게 되었고 두 사람은 그대로 키스를 이어갔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자신의 입술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그녀가 그를 깨문 것이었다.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밀어내고는 입술을 손으로 닦았다. 손에 묻은 피가 보였다.“개냐, 너? 왜 물고 난리야.”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안에 새로운 감정이 피어올랐다.온시환은 공지민을 옆에 있는 작은 칸으로 끌고 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치마를 들어 올렸다.“여기 아까 다른 사람이 만졌던 곳인데, 안 더러워요?”공지민은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러자 온시환은 피식 웃었다.“손만 스쳤다고 더러워지냐? 웃기네.”그는 기분 좋은 듯 그녀의 귀에 입을 맞췄다.“아무리 그래도 자기는 깨끗해. 자, 다리 벌려 봐.”공지민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온순하게 그의 말에 따랐다.온시환은 그녀의 그런 순종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그는 더 이상 저녁 약속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깊게 빠져들던 중 누군가 화장실로 들어왔다.온시환은 재빨
공지민은 온순하고 얌전한 인상이라, 절대 다른 남자를 만나는 사람이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명백히 긴장하고 있었다.“아니에요, 다른 남자는 없어요. 그냥 제 침실이 너무 엉망이라... 우리 손님방에서 자면 안 될까요?”온시환은 금세 이해했다. 그녀가 그를 너무 좋아해서 그의 앞에서 지저분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였다.그는 기분이 한층 좋아져 살짝 목에 맨 넥타이를 당기며 말했다.“그래. 그럼 손님방으로 안내해 봐.”손님방의 침대는 조금 작았지만 두 사람이 눕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었다.온시환은 샤워를 하고 나서 허리에 수건 하나만 둘러쓰고 나왔다. 공지민도 샤워를 마치고 나서 방의 불을 끄는 순간 그가 그녀를 덮쳤다.“한 번만 키스하게 해.”그녀는 바로 입술을 내밀었지만 온시환은 아래쪽으로 내려갔다.공지민은 온몸이 굳어져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감각에 휩싸였다.“안 돼요, 더러워요.”하지만 온시환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만족할 만큼 그녀를 애무한 뒤에야 천천히 그녀 옆에 누웠다. 그러고는 다시 그녀의 입술에 한참 키스했다.공지민은 이런 상황이 익숙지 않아 중간에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그가 말했다.“왜? 자기 냄새도 싫은 거야?”공지민은 조금 꺼려졌다. 온시환이 이렇게 해주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지만 다른 여자에게도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그러나 그는 지난번에 이런 건 처음이라고 말했었다.“시환 씨, 이런 거 좋아하세요?”온시환은 웃음을 참으며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질투해?”“제가 질투하면 앞으로 이런 거 안 하실 건가요?”“맹세컨대 자기 말고는 이런 걸 한 적이 없어.”다른 여자들에게는 그도 꺼려졌지만 공지민에게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온시환은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녀의 유혹에 빠져들었다.공지민은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진짜든 아니든 믿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온시환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이제 자자. 시간이 늦었어.”하지만 공지민은 좀처럼 잠들 수
온시환은 공지민이 감히 다른 남자를 숨길 용기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매일 아침 그의 별장으로 와서 음식을 해주는 모습이 그 증거였다.하지만 온시환은 곧 깨달았다. 그녀가 남자를 숨겼다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어차피 그는 그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재미로 함께하고 있었을 뿐, 그녀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고 해서 그녀를 놓아줄 리가 없었다.처음부터 그녀가 스스로 다가온 것이었고 그가 질릴 때까지는 그녀를 떠날 수 없게 만들 생각이었다.“원래 네 컴퓨터를 좀 빌려서 대본을 수정하려 했는데, 보아하니 그냥 돌아가야겠네.”공지민은 서둘러 앞으로 다가섰다.“어제 술 드셨잖아요.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혹시라도 경찰 검문에 걸리면 귀찮은 일이 생길 수 있었다.온시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발적으로 하는 일인데 굳이 부담스러울 필요는 없었다.공지민은 그를 집에 데려다준 후 혼자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온시환은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대본을 몇 줄 수정하기도 전에 전화가 걸려 왔다.“추지성이 그러던데, 너 요즘 집에 숨겨둔 여자가 있다며? 도대체 누구야? 우리 온 작가를 정착하게 만든 여자가?”온시환은 추지성이 어디 가서 말을 못 참는 성격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분명 그가 두 사람의 일을 부풀려 떠벌린 게 틀림없었다.정착? 그 단어는 온시환과는 어울리지 않았다.“난 그런 생각 한 적 없으니까 헛소리하지 마.”“근데 추지성이 그러더라. 네가 완전히 잡혀서 매일 그 여자가 해주는 밥만 먹고 있다던데? 너희 별장에 혹시 요리사가 필요한 거야?”“그건 걔가 요리를 잘해서 그런 거지. 시간이 된다면 너도 와서 한 번 먹어봐.”상대방은 정말 흥미가 생긴 듯했지만 온시환의 태도에 더 궁금해졌다.“좋아. 근데 그 여자 이름이 뭐야? 도대체 누구길래 그렇게 요리를 잘해?”“공지민. 별로 유명하지 않은 배우야. 아마 너는 모를 거야.”상
이런 말을 들었어도 공지민의 얼굴에는 아무런 상처받은 기색이 없었다.공지민은 그저 몇 마디를 더 당부하고는 온시환이 차에 오르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온시환은 백미러를 통해 그녀가 뒤에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공지민은 자동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그제야 천천히 돌아섰다.‘진짜 고집이 세긴 하네.’그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가 요리를 좋아한다면 계속 여기서 해주면 될 일이었다.한편 공지민은 방으로 돌아가서도 여전히 레시피를 연구하며 시간을 보냈다.별장에 있는 가정부는 그런 그녀를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지민 씨, 오늘 대표님 안 들어오실 거예요. 좀 쉬는 게 어때요?”온시환이 어디에 갔는지에 대해서는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는 대개 외박할 가능성이 높았다.공지민은 고개를 들어 가정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저 하나도 안 피곤해요. 요리 하나만 더 마무리하고 갈게요. 시환 씨 오시면 물어봐 주세요. 만약 오늘도 안 돌아오시면 저한테 연락해 주세요.”가정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온시환 주변의 다른 여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커리어나 이익을 위해 그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공지민은 그녀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어쩌면 공지민은 그중 가장 순진하고 어리석은 여자일지도 몰랐다. 공지민이 원하는 건 온시환의 마음뿐이었다.가정부는 더 말려보려고 했지만 공지민이 온시환을 너무 좋아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누가 뭐라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공지민은 결국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간단히 식사를 준비했다.그때 문보영이 전화를 걸어왔다.“지민아, 요즘 뭐 하고 살아?”“그냥 예전이랑 똑같지, 뭐.”“똑같긴 뭐가 똑같아. 요즘 대체 뭘 하는데?”“시환 씨 별장에서 밥하고 있어. 그 사람 위가 안 좋다길래 레시피 보면서 챙겨주고 있어.”문보영은 그 말을 듣자마자 화가 치밀었다.“야, 걔 돈 없어서
문보영은 화가 나서 전화를 끊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공지민에게 다시 문자 한 통을 보냈다.[믿지 못하겠으면 오늘 밤 한번 확인해 봐. 그 사람, 절대 집에 안 들어갈 거야.]공지민은 온시환이 정말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늘 다른 여자가 있었고 공지민처럼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그에게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슬프지 않았다. 단지 그 얼굴을 볼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으니까.한편 온시환은 저녁 모임 자리에 앉자마자 테이블로 걸어온 톱스타 배우를 맞이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얌전히 그의 접시에 반찬을 덜어주고 있었다.그녀는 유명세는 있었지만 아직 내세울 만한 대표작이 없었다. 지금 이 정도로 인기를 얻은 것도 결국 그저 예쁜 얼굴 덕이었다.온시환은 원래 쓰레기 같은 남자였기에 단번에 그녀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깨끗해?”테이블에 앉아 있던 감독과 투자자들은 온시환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을 보자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네, 깨끗해요.”온시환은 가볍게 웃으며 그녀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겼다.“좋아. 오늘 밤 나랑 있자.”한편 남자들끼리 술잔을 주고받으며 떠들기 시작했다. 추지성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한마디를 했다.“난 네가 오늘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집에 아직 그분이 있는 거 아니야?”다른 사람들도 농담 섞인 질문을 던졌다.“혹시 온 작가님, 몰래 결혼하신 거 아니에요?”추지성은 술잔을 비우고는 크게 웃었다.“말도 안 돼. 얘가 전에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결혼하는 놈은 다 개라고 했잖아. 지금 이렇게 편하게 노는 게 얼마나 좋아.”다들 웃음을 터뜨렸고 온시환은 옆에 있는 여자에게 술을 먹였다. 하지만 추지성의 말 때문에 순간적으로 공지민의 얼굴이 떠올랐다.추지성은 계속해서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온 작가는 몇 년 전 그 수술 이후로 그냥 지금을 즐기자는 마인드야.”그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
구은우는 대학교 1학년 때 공지민과 사귀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놀러 갔다가 구은우가 파도에 휩쓸린 아이를 구하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아이는 무사했지만 구은우는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진짜 죽었네.’온시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는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었지만 추지성이 그의 손 가까이에 있던 담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또 피우려고? 오늘 하루에 대체 몇 대나 피운 거야? 게다가 여긴 병원이잖아. 금연 구역이라고.”온시환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한편 추지성은 서류를 한 번 살펴본 뒤 감탄을 내뱉었다.“와, 운명도 참 잔인하네. 그렇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 같이 놀러 갔는데, 결국 한 사람이 사고로 떠나버리다니. 남겨진 사람은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지. 아마 끊임없이 생각할 거야. 그날 바다에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데 말이야, 구은우는 공지민이 가장 사랑했던 해에 떠났어. 그리고 그해는 구은우가 공지민을 가장 사랑했던 해이기도 했지.”구은우는 열여덟 살 공지민의 삶에서 서서히 퇴장했다. 이후로 누가 나타나더라도 구은우를 대신할 순 없었다.이게 바로 운명의 장난이었다.추지성은 이제는 공지민에 대해 별다른 비난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온시환 자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공지민에게 그저 장난이었다고. 결국 장난이 과해져 자신은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는 가볍게 떠난 것뿐이었다.“그런데 시환아, 너 눈치챘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해가 네가 수술을 받았던 해랑 딱 겹쳐. 뭔가 운명 같지 않아?”온시환은 그런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적으로 웃었다.“남을 구하겠다고 여자 친구를 내버려두고 자기희생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결국 구해줬다는 그 아이는 당일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짐승을 구하는 게
온시환은 그대로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정장에 먼지가 묻어 뿌옇게 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일 꼭대기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이 그를 다시 끌어당기려 하자 온시환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지민아, 오늘 밤의 달 좀 봐.”공지민은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오늘 달은 분명 아름다웠고 내일 날씨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며 신중하게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지민은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공지민이 떠나는 것을 본 온시환은 당황해 급히 뒤쫓으려다 그만 술에 취한 상태로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을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으로 본 적이 없었다.그는 흙투성이가 된 정장차림으로 그녀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다리가 심하게 다친 듯 몇 번을 시도해도 실패하고 말았다.강렬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어느 정도 맑게 해주었고 그제야 그는 현실을 자각했다.‘이건 꿈이 아니야. 지민이가 정말 나를 보러 온 거야.’공지민은 그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다쳤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병원에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나섰다.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온시환은 공지민의 손목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 같았다.공지민은 옆에 있던 의사에게 물었다.“얼마나 쉬어야 하나요?”“2주 정도는 안정이 필요해요. 당분간은 목발을 써야 할 거예요.”공지민은 병원 매점에서 목발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온시환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온시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공지민은 목발을
온시환이 집에 돌착했을 때도 서주혁의 팔을 붙잡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서주혁이 그를 떼어내면 온시환은 다시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지민아...”“난 정말 모르겠어. 왜 날 대체품으로 삼았어? 그렇게 구은우가 좋으면 그냥 그 사람 찾아가면 되잖아.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건데.”“내가 네 장난감이냐, 나는 당해도 싸다 이거야?”서주혁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창피해서 버리고 가버리고 싶었다.온시환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한동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서주혁은 가정부에게 그를 잘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온시환의 집을 나섰다. 취한 사람과 더 이상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서주혁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시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공지민이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조금 황당했다. 경찰은 온시환이 음주 운전을 하다 적발되었으니 와서 그를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공지민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친구분을 데려가 주실 수 있을까요? 음주 운전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면 안 될까요?”“그분께서는 당신에게만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와도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했고요.”공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결국 경찰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잠든 그의 모습은 차분해 보였고 평소의 산만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공지민은 경찰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온시환이 다시는 음주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는 보증을 하고 나서야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아 살짝 당겼다.온시환은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그녀를 보고 꿈을 꾸는 줄 알았다.갑자기 꿈속 공지민의 얼굴이 사라질까 봐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지민아?”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차가운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대체 원하는 게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
온시환은 천천히 손을 놓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래, 알았어.”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한마디를 내뱉었지만 온시환의 눈가는 아직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러나 공지민은 이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온시환이 또 심심풀이로 자신을 괴롭히려 한다고 생각했다.차인 걸 인정하지 못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고 여겼다.온시환 같은 남자가 진심일 리 없었다. 설령 진심이라 해도, 공지민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그는 식당 밖에 홀로 서 있었다.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공지민이 택시를 타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잠시 후, 그는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야, 오늘 한 잔 하자.”반승제는 흔쾌히 응했다.이상하게 오늘 밤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는 서주혁까지 불렀다.두 사람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이미 여러 병의 술을 비운 상태였다.“시환아, 너 대체 왜 이래?”온시환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가에는 이미 취기가 가득했다.“뭐 하는 거야? 얼른 앉아. 오늘은 취하지 않으면 못 가!”혼자서 술을 퍼마신 온시환을 보며 반승제는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너 혹시 무슨 고민 있냐?”“고민은 무슨... 그냥 술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거지. 하하.”서주혁은 말없이 나무토막처럼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 그는 분위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반승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들을 모두 치우고 온시환 앞에 과일주스를 내밀었다.“솔직하게 얘기해. 무슨 일이야?”그 말을 듣자마자 온시환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반승제는 그가 웃는 줄 알았다. 웃을 때도 어깨가 들썩이긴 마찬가지니까.“뭐야, 웃긴 얘기라도 있어?”그는 온시환의 몸을 돌려보았고 그제야 그의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야, 주혁아! 이거 봐. 시환이가 울고 있어!”온시환은 그 말을 듣고 얼른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꺼져!”반승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자동차가 레스토랑 앞에 멈춰서자 공지민이 먼저 내려서 안으로 들어갔다.곧이어 온시환도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자리를 예약 해둔 터라 직원이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공지민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의 푸른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비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왜, 내가 이제 그 점이 없으니까 나를 쳐다볼 생각도 없어진 거야?”공지민은 그가 귀찮을 뿐이었다. 이미 진실을 알았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지, 굳이 이런 말로 둘 다 어색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그러나 온시환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날카로운 말을 뱉었다.“네가 다니던 고등학교 가서 구은우 사진 봤어. 솔직히, 별로 잘생긴 것도 아니던데.”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지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온시환은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지만 오히려 더 그녀를 찌르는 말을 꺼냈다.“그렇게 좋으면 왜 안 찾아가? 아니면 이미 결혼이라도 한 거야? 네가 이러거 있는 거 보면, 그 자식도 너를 기다리지 않은 모양이지? 참 안 됐네.”그때 마침 직원이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말없이 잔을 들어 올린 공지민은 그대로 커피를 온시환에게 끼얹었다.온시환은 이전에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감정적인 반응이 반갑기까지 했다.마치 나무토막처럼 감정 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공지민은 얼굴을 잔뜩 굳히고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정신이 좀 들었어?”온시환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옆에 있는 냅킨을 집어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어쩌지? 평생 정신 못 차릴 것 같아. 공지민, 난 지금도 이해가 안 돼. 왜 날 대체품으로 썼는지. 진짜 그 점 하나 때문이야?”그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지 않는 이상 그는 평생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없을 터였다.그래서 그는 더더욱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심지어 그
온시환은 공지민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첫사랑을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왜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고 그에게 와서 상처를 남겼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더 한심한 건 자신이었다. 대체품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몰래 보러 온 자신이 더 우스웠다.온시환의 차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주차돼 있었다. 연예계에서 그의 영향력 덕분에 차를 촬영장 근처에 세워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그는 창문 너머로 공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문 장면 촬영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아픈 손목을 문지르는 모습, 옆에 있던 낯선 여성과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별다른 장면도 아닌데 온시환은 끝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공지민은 오후 촬영을 마치고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때 문보영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공지민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한쪽으로는 그날 밤 목격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다른 한쪽으로는 문보영이 여전히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사실이 마음에 남았다.하지만 그녀는 이제 둘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문보영은 공지민이 그날 밤의 일을 봤다는 걸 몰랐다. 여전히 밝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걱정했다.“지민아, 요즘 다시 촬영 시작했어? 혹시 회사로 돌아올 생각은 없어? 내가 대표님께 한 번 말씀드릴 수 있어. 사실 대표님도 꽤 후회되시는 것 같더라. 요즘 네 인지도도 높잖아.”“아니, 괜찮아.”“그런데 너랑 시환 씨... 지민아, 너희 두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파티에 데려왔을 때만 해도 잘 될 줄 알았는데, 요즘은 연락도 안 한다고 하던데.”예전 같았으면 공지민은 문보영의 말을 진심 어린 걱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문보영이 정말 궁금한 건 온시환이 여자 친구가 있는지 여부라는 걸.“헤어졌어. 이번에는 정말 끝이야.”문보영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넌 괜찮아? 너 시환 씨 정말 좋아했잖아. 혹시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너를 상처 준 거야?
당연히 취했다. 취하지 않았으면 온시환의 성격상 추지성에게 사과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추지성은 온시환에게 다시 술병을 열어주며 말했다.“아직 덜 취한 것 같으니 더 마셔.”온시환은 희미하게 뜬 눈으로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지성아, 나 지민이 고등학교에 가봤어. 그리고 지민이 첫사랑을 알게 됐지. 꽤 괜찮게 생겼더라.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뭔지 알아?”“뭔데?”“내 코끝 여기.”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끝을 가리켰다. 여전히 흐릿한 눈빛이었다.“여기에 구은우랑 똑같은 점이 있었잖아. 공지민은 아마 그 점 때문에 나에게 잘해줬던 거야. 너도 우습지 않냐?”그는 입으로 우습다고 말했지만 눈빛에는 슬픔이 넘칠 듯 담겨 있었다.추지성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누구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가지고 놀고 싶을 뿐이었고 막상 손에 넣으면 금세 흥미를 잃었다.“못 가지는 게 가장 좋은 거지. 손에 넣으면 금방 싫증 나는 법이거든.”“지성아, 나 여기가... 정말 아프다.”추지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야, 네가 진짜 내 친구 아니었으면 벌써 널 집어 수영장에 던져 넣어버렸을 거다. 여자를 두고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술 더 마셔야겠어.”“안 마셔. 마시면 더 괴로워질 뿐이야.”온시환은 그 말을 끝으로 옆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추지성은 옆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려다 그의 축축한 속눈썹을 보고 멈칫했다.‘설마 또 울었어? 요즘 완전 여자 같아. 조금만 힘들어도 시도 때도 없이 우네.’온시환은 원래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특히 수년 전 큰 수술을 받은 후, 의사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뒤로 그는 늘 세상을 가볍게 여겼다.그가 쓰는 드라마 대본들도 대부분 막장극이었고 그는 막장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막장이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돌아와 부메랑처럼 자신을 찌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밤중에 온시환은 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