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민의 눈이 순간 반짝이며 온시환을 따라 차에 올랐다.차는 한 호텔 앞에 멈췄고 온시환은 가장 먼저 숙취 해소제를 몇 알 삼켰다. 창가 쪽에 주눅 든 모습으로 앉아 있는 공지민을 보며 그는 잠시 망설였다.공지민은 화려한 미모를 가진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얌전하고 순수해 보였으며 전형적인 모범생 같은 스타일이었다.늘 섹시하고 화끈한 여자를 만나왔던 온시환은 지금의 그녀 같은 모습이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다만 오늘 함께하는 자리에서 누군가 공지민을 탐내게 되면 그가 정말 순순히 내어줄 수 있을까?‘겨우 요리를 잘해서? 돈만 쓰면 더 잘하는 요리사를 고용할 수 있지 않나?’잠깐 쓸데없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는 금세 머릿속에서 떨쳐냈다.참 우스운 생각이었다. 그는 결론을 내리자마자 마음속의 망설임이 깨끗이 사라졌다.“정말 나랑 같이 들어가겠다는 거야? 오늘 만나는 사람들이 어떤 부류인지 알고 있긴 해? 너도 배우라면 알겠지만 감독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뻔히 알잖아. 게다가 오늘 데리고 온 여자는 기본적으로 교환 가능한 걸로 간주해. 누가 널 원한다고 하면 내가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어.”공지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조용히 말했다.“그럼 여기서 기다릴게요. 시환 씨가 술을 많이 마시면 제가 운전해서 모셔다드릴 수 있으니까요.”그녀의 소심하지만 배려 어린 말투에 온시환은 왠지 모르게 흐뭇한 마음이 스며들었다. 온시환은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그래, 우리 자기가 이렇게 귀엽고 착하니까, 오늘 밤 누가 널 원한다고 해도 내가 딱 잘라 거절할게.”온시환의 농담 섞인 말에도 공지민은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듯 보였다. 그녀는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참아낼 수 있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공지민이 배우로 활동한 몇 년 동안 이 호텔에 와본 적은 없었지만 전에 들은 적은 있었다. 이곳은 보안이 철저하고 회원제로 운영되어 기자나 파파라치 같은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한다. 호텔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은 기록에
온시환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공지민이 보내는 간절한 도움의 시선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공지민은 마치 몸이 굳어버린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분명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그가 약속했었다. 그녀를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겠다고. 하지만 들어온 지 채 10분도 안 돼 온시환은 자신의 말을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공지민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박민준의 손이 그녀를 향해 뻗어왔다. 그의 거친 손길이 그녀를 억지로 품에 안았다.“예전에 내가 너를 안으려 했더니 뺨을 날리더라? 이제 보니 네가 도도한 게 아니라 내 침대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거였군. 빌어먹을.”박민준은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그녀의 턱을 잡고 강제로 키스하려 했다.공지민은 겁에 질려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뺨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박민준이 그녀의 뺨을 힘껏 때렸고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소리를 들었다.이때 누군가 분위기가 험악해질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에 얼른 중재에 나섰다.“박 감독님, 고작 여자 때문에 이러실 필요 없잖아요. 게다가 이분은 온 작가님이 데리고 온 분인데 개라도 주인 앞에서는 가려서 때리셔야죠.”박민준은 자신의 행동이 충동적이었다는 걸 깨닫고 곧바로 얼굴에 미안한 기색을 띄우며 온시환에게 사과했다.“시환 씨, 미안해. 내가 실수로 손이 먼저 나갔네. 기분 상했다면 시환 씨도 품에 있는 여자 한 대 쳐도 돼. 나는 이런 게 오히려 좋더라고.”온시환은 품 안의 여자를 한 번 쓱 훑어보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난 여자는 안 때려. 여자는 사랑으로 다뤄야지. 그렇게 손부터 올리니까 어떤 여자가 박 감독이랑 입 맞추고 싶겠어?”그가 농담처럼 가볍게 받아넘기자 방 안의 긴장감이 어느 정도 풀렸다. 모두가 분위기를 바꿔 다른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한편 공지민은 당장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박민준의 손이 그녀의 치마 속을 거칠게 파고들어 은밀한 부위에 닿으려 했다.공지민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박민준이
공지민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의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왜요?”온시환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왜냐고? 그는 애초에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법 따윈 태생적으로 몰랐다. 그런 그에게 왜냐고 묻는 그녀가 어쩐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온시환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이미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 그러니까 오늘 돌아가면 네 집에서 조용히 있어. 앞으로도 내 집에 와서 밥을 해줄 필요 없어. 우리 집엔 가정부가 있으니까.”공지민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흘러내렸다.하지만 온시환은 전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이번엔 정말 포기하겠지.’그러나 공지민은 울음을 그치자마자 그에게 달려들었다. 두 손으로 그의 셔츠 깃을 움켜잡고 발끝을 세워 키스하기 시작했다.온시환은 뒤로 물러서며 벽에 기대게 되었고 두 사람은 그대로 키스를 이어갔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자신의 입술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그녀가 그를 깨문 것이었다.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밀어내고는 입술을 손으로 닦았다. 손에 묻은 피가 보였다.“개냐, 너? 왜 물고 난리야.”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안에 새로운 감정이 피어올랐다.온시환은 공지민을 옆에 있는 작은 칸으로 끌고 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치마를 들어 올렸다.“여기 아까 다른 사람이 만졌던 곳인데, 안 더러워요?”공지민은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러자 온시환은 피식 웃었다.“손만 스쳤다고 더러워지냐? 웃기네.”그는 기분 좋은 듯 그녀의 귀에 입을 맞췄다.“아무리 그래도 자기는 깨끗해. 자, 다리 벌려 봐.”공지민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온순하게 그의 말에 따랐다.온시환은 그녀의 그런 순종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그는 더 이상 저녁 약속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깊게 빠져들던 중 누군가 화장실로 들어왔다.온시환은 재빨
공지민은 온순하고 얌전한 인상이라, 절대 다른 남자를 만나는 사람이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명백히 긴장하고 있었다.“아니에요, 다른 남자는 없어요. 그냥 제 침실이 너무 엉망이라... 우리 손님방에서 자면 안 될까요?”온시환은 금세 이해했다. 그녀가 그를 너무 좋아해서 그의 앞에서 지저분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였다.그는 기분이 한층 좋아져 살짝 목에 맨 넥타이를 당기며 말했다.“그래. 그럼 손님방으로 안내해 봐.”손님방의 침대는 조금 작았지만 두 사람이 눕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었다.온시환은 샤워를 하고 나서 허리에 수건 하나만 둘러쓰고 나왔다. 공지민도 샤워를 마치고 나서 방의 불을 끄는 순간 그가 그녀를 덮쳤다.“한 번만 키스하게 해.”그녀는 바로 입술을 내밀었지만 온시환은 아래쪽으로 내려갔다.공지민은 온몸이 굳어져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감각에 휩싸였다.“안 돼요, 더러워요.”하지만 온시환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만족할 만큼 그녀를 애무한 뒤에야 천천히 그녀 옆에 누웠다. 그러고는 다시 그녀의 입술에 한참 키스했다.공지민은 이런 상황이 익숙지 않아 중간에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그가 말했다.“왜? 자기 냄새도 싫은 거야?”공지민은 조금 꺼려졌다. 온시환이 이렇게 해주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지만 다른 여자에게도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그러나 그는 지난번에 이런 건 처음이라고 말했었다.“시환 씨, 이런 거 좋아하세요?”온시환은 웃음을 참으며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질투해?”“제가 질투하면 앞으로 이런 거 안 하실 건가요?”“맹세컨대 자기 말고는 이런 걸 한 적이 없어.”다른 여자들에게는 그도 꺼려졌지만 공지민에게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온시환은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녀의 유혹에 빠져들었다.공지민은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진짜든 아니든 믿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온시환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이제 자자. 시간이 늦었어.”하지만 공지민은 좀처럼 잠들 수
온시환은 공지민이 감히 다른 남자를 숨길 용기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매일 아침 그의 별장으로 와서 음식을 해주는 모습이 그 증거였다.하지만 온시환은 곧 깨달았다. 그녀가 남자를 숨겼다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어차피 그는 그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재미로 함께하고 있었을 뿐, 그녀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고 해서 그녀를 놓아줄 리가 없었다.처음부터 그녀가 스스로 다가온 것이었고 그가 질릴 때까지는 그녀를 떠날 수 없게 만들 생각이었다.“원래 네 컴퓨터를 좀 빌려서 대본을 수정하려 했는데, 보아하니 그냥 돌아가야겠네.”공지민은 서둘러 앞으로 다가섰다.“어제 술 드셨잖아요.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혹시라도 경찰 검문에 걸리면 귀찮은 일이 생길 수 있었다.온시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발적으로 하는 일인데 굳이 부담스러울 필요는 없었다.공지민은 그를 집에 데려다준 후 혼자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온시환은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대본을 몇 줄 수정하기도 전에 전화가 걸려 왔다.“추지성이 그러던데, 너 요즘 집에 숨겨둔 여자가 있다며? 도대체 누구야? 우리 온 작가를 정착하게 만든 여자가?”온시환은 추지성이 어디 가서 말을 못 참는 성격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분명 그가 두 사람의 일을 부풀려 떠벌린 게 틀림없었다.정착? 그 단어는 온시환과는 어울리지 않았다.“난 그런 생각 한 적 없으니까 헛소리하지 마.”“근데 추지성이 그러더라. 네가 완전히 잡혀서 매일 그 여자가 해주는 밥만 먹고 있다던데? 너희 별장에 혹시 요리사가 필요한 거야?”“그건 걔가 요리를 잘해서 그런 거지. 시간이 된다면 너도 와서 한 번 먹어봐.”상대방은 정말 흥미가 생긴 듯했지만 온시환의 태도에 더 궁금해졌다.“좋아. 근데 그 여자 이름이 뭐야? 도대체 누구길래 그렇게 요리를 잘해?”“공지민. 별로 유명하지 않은 배우야. 아마 너는 모를 거야.”상
이런 말을 들었어도 공지민의 얼굴에는 아무런 상처받은 기색이 없었다.공지민은 그저 몇 마디를 더 당부하고는 온시환이 차에 오르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온시환은 백미러를 통해 그녀가 뒤에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공지민은 자동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그제야 천천히 돌아섰다.‘진짜 고집이 세긴 하네.’그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가 요리를 좋아한다면 계속 여기서 해주면 될 일이었다.한편 공지민은 방으로 돌아가서도 여전히 레시피를 연구하며 시간을 보냈다.별장에 있는 가정부는 그런 그녀를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지민 씨, 오늘 대표님 안 들어오실 거예요. 좀 쉬는 게 어때요?”온시환이 어디에 갔는지에 대해서는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는 대개 외박할 가능성이 높았다.공지민은 고개를 들어 가정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저 하나도 안 피곤해요. 요리 하나만 더 마무리하고 갈게요. 시환 씨 오시면 물어봐 주세요. 만약 오늘도 안 돌아오시면 저한테 연락해 주세요.”가정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온시환 주변의 다른 여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커리어나 이익을 위해 그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공지민은 그녀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어쩌면 공지민은 그중 가장 순진하고 어리석은 여자일지도 몰랐다. 공지민이 원하는 건 온시환의 마음뿐이었다.가정부는 더 말려보려고 했지만 공지민이 온시환을 너무 좋아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누가 뭐라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공지민은 결국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간단히 식사를 준비했다.그때 문보영이 전화를 걸어왔다.“지민아, 요즘 뭐 하고 살아?”“그냥 예전이랑 똑같지, 뭐.”“똑같긴 뭐가 똑같아. 요즘 대체 뭘 하는데?”“시환 씨 별장에서 밥하고 있어. 그 사람 위가 안 좋다길래 레시피 보면서 챙겨주고 있어.”문보영은 그 말을 듣자마자 화가 치밀었다.“야, 걔 돈 없어서
문보영은 화가 나서 전화를 끊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공지민에게 다시 문자 한 통을 보냈다.[믿지 못하겠으면 오늘 밤 한번 확인해 봐. 그 사람, 절대 집에 안 들어갈 거야.]공지민은 온시환이 정말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늘 다른 여자가 있었고 공지민처럼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그에게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슬프지 않았다. 단지 그 얼굴을 볼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으니까.한편 온시환은 저녁 모임 자리에 앉자마자 테이블로 걸어온 톱스타 배우를 맞이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얌전히 그의 접시에 반찬을 덜어주고 있었다.그녀는 유명세는 있었지만 아직 내세울 만한 대표작이 없었다. 지금 이 정도로 인기를 얻은 것도 결국 그저 예쁜 얼굴 덕이었다.온시환은 원래 쓰레기 같은 남자였기에 단번에 그녀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깨끗해?”테이블에 앉아 있던 감독과 투자자들은 온시환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을 보자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네, 깨끗해요.”온시환은 가볍게 웃으며 그녀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겼다.“좋아. 오늘 밤 나랑 있자.”한편 남자들끼리 술잔을 주고받으며 떠들기 시작했다. 추지성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한마디를 했다.“난 네가 오늘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집에 아직 그분이 있는 거 아니야?”다른 사람들도 농담 섞인 질문을 던졌다.“혹시 온 작가님, 몰래 결혼하신 거 아니에요?”추지성은 술잔을 비우고는 크게 웃었다.“말도 안 돼. 얘가 전에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결혼하는 놈은 다 개라고 했잖아. 지금 이렇게 편하게 노는 게 얼마나 좋아.”다들 웃음을 터뜨렸고 온시환은 옆에 있는 여자에게 술을 먹였다. 하지만 추지성의 말 때문에 순간적으로 공지민의 얼굴이 떠올랐다.추지성은 계속해서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온 작가는 몇 년 전 그 수술 이후로 그냥 지금을 즐기자는 마인드야.”그
추지성은 그동안 온시환이 농담 삼아 말하는 줄로만 알았다.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번번이 바람을 피우는 모습을 보고도 포기하지 않을 여자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공지민은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있었다.추지성은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쓰레기통에 던졌다.“내가 지금은 도와줄 시간이 없어요. 저쪽은 당분간 끝날 기미도 없고 난 빨리 가봐야 하니까 알아서 기다리세요.”추지성은 밖에서 남의 소리를 엿듣는 취미는 없었다. 원래는 온시환과 몇 마디 더 나누고 싶었지만 잠깐 사이에 그가 여자를 데리고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공지민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전 여기서 기다릴게요.”추지성은 더 이상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화장실 문이 열린 건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아무리 이곳이 깨끗하다 해도 결국 밖이라는 한계가 있었다.문을 열고 나온 온시환은 의자에 앉아 있는 공지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테이블 위에는 보온 도시락이 놓여 있었다.온시환은 걸음을 멈추고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지 의심했다. 뒤에 있던 여자가 천천히 손을 올려 그의 팔을 감았다.“시환 씨.”온시환은 갑자기 불편한 기분이 들어 여자의 손을 툭 뿌리쳤다.여자는 조금 놀랐지만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 말했다.“그럼 전 먼저 갈게요.”“그래.”온시환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는 갑자기 공지민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약간 짜증이 난 듯 이마를 찌푸린 채 담배를 한 모금 빨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여기는 왜 온 거야?”“시환 씨한테 약재가 들어간 국 좀 가져다주려고.”“필요 없어.”“필요해지면 말해요.”온시환은 왠지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공지민, 넌 눈치도 없어? 내가 짜증 내는 거 안 보여?”공지민은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온시환은 깊게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