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시환이 아무리 뻔뻔하다 해도 이번에는 스스로 조금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아, 맞아. 네 이름 알아. 방금 갑자기 생각이 안 났던 거야. 근데 촬영 아직 안 끝났어?”공지민은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온시환은 그녀의 촬영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전 조연이에요. 후반에 촬영할 분량이 남아 있어요. 나중에 캐릭터가 흑화하거든요.”온시환은 이마를 문지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녀가 하녀 같은 배역인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그래서 왜 불렀어? 무슨 일이야?”그는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했다. 주변에서 스태프들이 모두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고 공지민과 자신이 엮였다는 소문이라도 퍼질까 봐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얼마 전 감독이 돌려 말하며 그녀와 관련해 떠본 것도 기억났다. 공지민이 감독에게 그와의 관계를 암시라도 했나 싶어 꺼림칙했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직접 다가오면서 순진한 척 행동하고 있었다.“아직 시환 씨 연락처가 없잖아요. 그리고 카톡 친구도 아니고요. 만약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시환 씨를 도와드릴 수 있게 연락처를 알려주세요.”예컨대, 지난번처럼 그가 술에 취해 운전할 사람이 없을 때 그녀가 가서 그를 데리고 올 수도 있었다.공지민은 고개를 들어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말은 다소 초라하게 들리기도 했다.“전에 말했잖아요. 저는 시환 씨를 쫓고 있어요. 그러니 저한테 기회를 주세요.”온시환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이 여자를 대담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겁이 많다고 해야 할까.대담하다고 하기에는 이미 두 번이나 그와 잠자리를 가졌으면서도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게다가 겁이 많다고 하기에는 대놓고 그를 쫓겠다고 말하는 건 또 처음이었다.온시환은 흥미를 느꼈다. 결국 그녀에게 번호를 주고 카톡 친구도 추가했다.공지민은 온시환의 연락처를 저장한 휴대폰을 품에 안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 그녀의 한심한 모습을 보고 문보영은 답답한
문보영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이미 할 말을 잃었다. 공지민의 동작은 마치 전문가처럼 완벽했다. 그녀의 발차기는 소하연의 경호원보다 더 능숙해 보였다.이게 정말 그녀가 몇 년 동안 데리고 다닌 여배우가 맞단 말인가. 이렇게 잘 싸우는 줄은 문보영조차 몰랐다.공지민은 소하연을 발로 찬 뒤 자신을 붙잡고 있던 두 경호원을 가볍게 제압했다. 기이한 동작으로 경호원들에게 매달리더니 온 힘을 실어 그들을 바닥에 무릎 꿇게 만들었다.소하연은 바닥에서 간신히 일어나 공지민을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복수를 결심했던 그녀였지만 공지민이 자신뿐만 아니라 두 경호원까지 제압하는 모습을 보고는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너 뭐야? 괴물 같은 힘을 가진 여자라니! 두고 봐. 대표님이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화를 삭이지 못한 소하연은 촬영장을 뛰쳐나가 곧바로 시벅 엔터의 본사로 향했다. 그녀는 김종찬 대표를 찾아가 눈물을 쏟아내며 부어오른 뺨을 보여줬다.“대표님, 저한테 온시환 씨를 꼬시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지금 제 얼굴이 이 모양이에요! 지민이 걔가 절 때리고 대표님이 붙여준 경호원까지 쓰러뜨렸어요!”김종찬은 소하연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소하연이 장난치는 거라 생각했다.그가 아는 공지민은 여리디여린 여자로, 두 경호원을 쓰러뜨릴 만한 힘이 있을 리 없었다.하지만 소하연의 진지한 표정에 결국 그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김종찬은 곧바로 공지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때 공지민은 여전히 촬영장에 있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어딘가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마치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기만 하면 그녀가 당장 주먹을 휘두를 것처럼 경계하는 눈빛이었다.문보영의 표정은 처음에는 어딘가 복잡해 보였지만 곧 걱정으로 가득 찼다.소하연의 뒤에는 김종찬이 버티고 있었다. 그가 그녀들의 직속 상사인 만큼 소하연이 김종찬을 찾아가면 공지민이 회사에서 철저히 배제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지민아,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단 시환 씨한테 전화해 봐
온시환은 눈을 가늘게 뜨며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했다.‘소하연 옆에는 강한 경호원 두 명이 있지 않았나? 공지민이 어떻게 그들을 제압한 거지?’공지민은 온시환이 대답이 없자 그가 화난 줄로만 알았다.“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그 여자가 제 휴대폰을 빼앗아 부숴버렸거든요. 그래서 시환 씨 연락처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너무 화가 나서 그만 손이 먼저 나갔어요.”온시환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대신 그의 머릿속에는 당시의 상황이 그려지고 있었다.공지민은 점점 불안해졌다. 땀이 손바닥을 적셨고 온시환이 소하연의 편을 들며 자신을 꾸짖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네가 전화한 이유가 나더러 도와달라는 거야?”소하연은 시벅 엔터의 돈줄 같은 존재였고 공지민 역시 시벅 엔터 소속이었다. 그녀가 퇴출 위기에 처한 것도 전혀 놀랍지 않은 상황이었다.온시환은 공지민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전화한 줄 알았다. 그런데 몇 분을 기다린 끝에 그녀가 한 말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그냥 보고 싶어서요.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어요?”공지민 옆에 앉아 있던 문보영은 당연히 그녀가 지금 상황을 설명하며 도움을 요청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고작 보고 싶다는 거라니 너무 황당했다.“지민아, 너 지금 제정신이야? 이 와중에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당장 시환 씨한테 네 상황을 얘기해야지! 대표님이 사람 데리고 와서 널 끌고 가면 어쩔 건데!”하지만 공지민은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조용히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그저 온시환의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온시환은 그녀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 그러고는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지금 친구 집에서 아이 보고 있어.”말하고 나서야 자신의 사생활을 말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곧 그녀가 서주혁을 알 리 없다는 생각에 안도했다.“더 할 말 없으면 끊을게.”“시환 씨, 혹시 국 좋아하세요? 제가 앞으로 요리할 시간이 많을 것 같거든요. 좋아하신다면 자
문보영은 공지민을 위해 급히 김종찬에게 사정했다.“대표님, 지민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이번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이번 작품이 좋아서, 지민이가 충분히 대박 날 수 있는 기회예요. 소하연처럼 잘되면 회사에도 돈을 많이 벌어다 줄 거예요.”소하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보영의 뺨을 후려쳤다.“쟤 따위를 감히 나랑 비교해? 문보영, 너 미친 거 아니야? 너도 빨리 다른 연예인 맡아. 공지민 같은 천박한 애랑 같이 다니면 네 수준도 떨어질 거야. 네가 쟤랑 더 엮이면 앞으로 누가 너랑 일하고 싶어 하겠어?”매니저는 연예인 덕에 먹고사는 직업이다. 연예인이 잘나갈수록 매니저도 더 많은 돈을 번다. 하지만 문보영이 맡은 공지민은 늘 그저 그런 상태였다. 사실 문보영의 능력은 뛰어났지만 지금은 오히려 공지민 때문에 발목이 잡힌 상황이었다.뺨을 맞고도 문보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김종찬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김종찬은 소하연 편이었다. 지금의 문보영이 그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당장 나가. 내가 신인 붙여 줄 테니, 더 이상 나를 실망시키지 마. 네가 다른 회사로 간다고 해도 여기만큼 높은 기본급을 받을 순 없을 거야. 회사에서 배당금까지 주는 거 알지? 잘 생각해 봐.”바로 이런 이유로 문보영은 시벅 엔터를 떠날 수 없었다. 그녀는 공지민을 깊게 바라보았다. 둘은 단순히 매니저와 연예인의 관계를 넘어 친구 사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공지민을 구할 수 없었다.김종찬이 공지민과의 잠자리를 원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만약 그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한다면 끝까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공지민은 문보영을 보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어떻게 요리를 해야 온시환이 좋아할지 그 생각뿐이었다.그때 누군가 계약서를 공지민 옆에 던졌다. 시벅 엔터와 체결했던 계약서였다. 계약은 아직 2년이나 남아 있었다. 이 상황에서 만약 그녀가 활동을 중단한다면 피해는 어마어마할 것이다.연예계는 트렌드 변
공지민이 온시환에게 관심이 있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문보영은 그저 그녀가 온시환의 팬이라고만 생각했을 뿐, 일이 이렇게까지 발전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문보영도 더는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공지민은 이미 결정을 내렸고 이제 2년 동안 활동을 중단한다면 자신이 그녀의 매니저로 남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언니, 걱정하지 마. 사실 나도 온시환이 좋은 사람 아니라는 거 알아. 그래도 한 번쯤은 시도해 보고 싶어.”문보영은 갑자기 손을 뻗어 공지민을 꽉 끌어안았다.“네가 뭘 하는지 알고 있다면 괜찮아. 지민아, 그럼 2년 후에 다시 보자.”공지민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마치 온시환을 쫓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보였다.회사를 나온 뒤 그녀는 바로 온시환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집 주소를 물었다.온시환은 전화기 너머에서 이마를 문지르며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너 매일 촬영도 해야 하잖아. 언제 시간이 있어서 국을 끓여 준다는 거야? 그리고 내 몸값을 생각해 봐. 나를 모시겠다고 줄 서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그런데 너는 딱히 눈에 띄는 장점도 없잖아.”“시환 씨, 저 회사에서 활동 정지당했어요. 이제 시간이 많아졌으니 시환 씨를 더 열심히 따라다닐 수 있어요. 국 끓이는 건 시작일 뿐이에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그보다 훨씬 많아요.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온시환은 잠시 침묵했다.‘활동 정지라니?’그런 큰일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다니 온시환은 이 여자가 제정신이 아닌지 싶었다.연예인이 활동 정지를 당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상황일 텐데,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너 제정신이야? 활동 정지가 뭘 의미하는지 진짜 몰라서 그래?”“알아요. 그러니까 주소가 어디예요? 오늘 밤 바로 가서 국 끓여드릴게요.”온시환은 그녀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답답함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이 여자가 어디까지 할
공지민의 눈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바로 일어서려 했지만 너무 오래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탓에 다리가 저려 중심을 잃고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온시환은 그녀를 붙잡아 세우며 미간을 찌푸렸다.“너 제정신이야? 여기서 그렇게 오래 기다렸다고?”“경호원이 절 안 들여보내더라고요.”온시환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옆에 있는 경호원을 쳐다봤다.“이 사람 얼굴 잘 기억해 둬. 다음부터는 바로 들여보내.”“네, 대표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공지민은 온시환의 몸에서 술 냄새를 맡았다.“술 마셨죠? 아쉽게도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어서 사골국을 끓이긴 힘들겠네요. 대신 제가 해장국은 잘 끓이거든요. 안으로 들어가서 바로 준비할게요.”그녀는 온시환을 부축해 걸음을 옮겼다. 약 10분 정도 걸어 별장 입구에 도착하니, 온시환은 손가락으로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대신 자신의 지문으로 문을 열었다.집 안으로 들어가자 온시환은 술기운 탓인지 문득 공지민에게서 좋은 향기가 난다고 느꼈다. 그는 갑자기 그녀를 잡아당겨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이며 손을 들어 그녀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씻고 온 거야?”공지민은 얼굴이 빨개지며 대답했다.“네, 씻고 왔어요.”온시환은 그녀의 치마를 벗겨내며 거침없이 행동을 이어갔다.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키스하려 했지만 온시환은 고개를 돌려 피했다.“난 키스하는 거 안 좋아해.”그리고 이어서 말했다.“애초에 복잡한 과정은 별로야. 그냥 바로 시작하는 게 좋아.”공지민은 속눈썹을 내리며 속삭였다.“알겠어요. 익숙해질게요.”그날 밤, 온시환은 자신의 욕구를 완전히 풀며 만족감을 느꼈다. 평소 그녀의 성격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침대에서는 의외로 잘 맞았다.모든 게 끝난 후 그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공지민은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가려 했으나 온시환이 문 앞에서 그녀를 밀어내며 말했다.“혼자 씻을 테니까 밖에서 기다려.”공지민은 할 수 없이 침실 안에 남아 그를 기다렸다.그녀는 온시환의 침실을 둘러보았다. 처음
“시환아, 이번엔 또 얼마나 오래 즐기려고? 우리 내기할까? 저 여자가 말하는 너를 꼬신다는 게 사실 그냥 네 관심을 끌기 위한 다른 방법일 뿐이야. 두 달도 못 가서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떠날걸?”온시환은 옆에 있던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나도 그렇게 생각해. 똑똑한 것 같으면서 딱히 똑똑하지도 않아.”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온시환은 공지민이 바로 뒤에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얼마나 오래 거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공지민은 방금 샤워를 끝낸 듯 온몸이 윤기가 돌았다. 마치 투명한 복숭아처럼 탐스러워 보였다.온시환의 목울대가 두어 번 움찔했다. 그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가 불을 껐다.공지민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랐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침대 위로 던졌다.“시환 씨?”온시환은 그녀의 다리를 단단히 잡아 눌러 무릎을 꿇었다.공지민의 얼굴이 붉게 물들며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거기는 안 돼요!”그녀가 간절히 애원하며 눈물을 글썽일 때쯤 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공지민은 온몸을 떨며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침대 시트를 꽉 쥐고 있었다.온시환은 키스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실 그건 거짓말이었다. 지금껏 키스한 여자는 많았다. 다만 이런 키스를 한 건 처음이었다.방금 공지민에게서는 마치 유혹하는 듯한 향기가 났다.공지민은 온시환의 품에 기대어 그가 마음을 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온시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냉정하게 그녀를 침대에서 밀어내며 말했다.“이제 그만 가봐. 내가 사람을 불러서 집에 데려다줄게.”공지민은 마치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옷을 입었다.온시환은 침대에 앉아 휴대폰을 보며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힐끔 쳐다봤다. 붙잡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그는 여자를 고르는데 크게 까다롭지 않았지만 자신의 별장에서 밤을 보내게 하지는 않았다.공지민은 운전기사가 데려다주는 차에 몸을 싣고
공지민은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다섯 가지 요리를 완성해 냈다.“어때요? 입맛에 맞으세요?”온시환은 솔직히 대답했다.“정말 맛있네.”그녀의 요리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기대 이상이었다.공지민은 그의 옆으로 다가와 몸을 숙이며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그럼 많이 드세요. 제가 매일 다른 메뉴로 만들어드릴게요. 분명 다 마음에 드실 거예요.”온시환의 맛있다는 말이 그녀를 무척 기쁘게 한 듯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만족감이 가득했고 턱을 괴고 그의 식사를 지켜보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온시환은 묘한 착각에 빠졌다. 마치 그와 공지민이 오래된 부부처럼 느껴졌다.그는 배부르게 식사를 마쳤지만 정작 공지민은 한 번도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출근 준비를 하며 온시환은 그녀가 앞치마를 두른 채 자신의 넥타이를 고쳐 매주는 모습을 보았다.“저녁에는 제가 저녁 식사를 준비해 둘게요. 만약 안 들어오시면 미리 알려주세요.”온시환은 고개를 대충 끄덕였지만 사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인상이 좋아지긴 했어도 그녀의 요리 솜씨 덕분일 뿐이었다. 그의 쓰레기 같은 본성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였다.집을 나선 온시환은 바로 자신이 자주 함께 작업하는 남자 작가 추지성을 만나러 갔다.이 업계에는 남성 작가가 많지 않았지만 추지성은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다.하지만 온시환과 추지성은 성향이 다소 달랐다. 온시환은 대중적인 막장 드라마를 주로 쓰는 반면, 추지성은 깊이 있는 작품으로 평단의 인정을 받는 편이었다. 하지만 둘은 자주 술을 함께 마시며 친분을 쌓아왔다.자리에 앉자마자 추지성이 음식을 시켰다.공지민의 요리를 맛본 이후라 온시환은 이제 밖에서 먹는 음식에 흥미가 없었다.추지성이 의자에 기대며 물었다.“너 요즘 또 여자 하나 키운다며? 설마 소하연은 아니겠지? 네가 그런 오글거리는 성격 가진 애랑도 엮일 줄은 몰랐네. 시환아, 네 취향 진짜 나날이 이상해진다.”온시환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무심하게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
구은우는 대학교 1학년 때 공지민과 사귀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놀러 갔다가 구은우가 파도에 휩쓸린 아이를 구하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아이는 무사했지만 구은우는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진짜 죽었네.’온시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는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었지만 추지성이 그의 손 가까이에 있던 담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또 피우려고? 오늘 하루에 대체 몇 대나 피운 거야? 게다가 여긴 병원이잖아. 금연 구역이라고.”온시환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한편 추지성은 서류를 한 번 살펴본 뒤 감탄을 내뱉었다.“와, 운명도 참 잔인하네. 그렇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 같이 놀러 갔는데, 결국 한 사람이 사고로 떠나버리다니. 남겨진 사람은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지. 아마 끊임없이 생각할 거야. 그날 바다에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데 말이야, 구은우는 공지민이 가장 사랑했던 해에 떠났어. 그리고 그해는 구은우가 공지민을 가장 사랑했던 해이기도 했지.”구은우는 열여덟 살 공지민의 삶에서 서서히 퇴장했다. 이후로 누가 나타나더라도 구은우를 대신할 순 없었다.이게 바로 운명의 장난이었다.추지성은 이제는 공지민에 대해 별다른 비난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온시환 자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공지민에게 그저 장난이었다고. 결국 장난이 과해져 자신은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는 가볍게 떠난 것뿐이었다.“그런데 시환아, 너 눈치챘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해가 네가 수술을 받았던 해랑 딱 겹쳐. 뭔가 운명 같지 않아?”온시환은 그런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적으로 웃었다.“남을 구하겠다고 여자 친구를 내버려두고 자기희생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결국 구해줬다는 그 아이는 당일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짐승을 구하는 게
온시환은 그대로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정장에 먼지가 묻어 뿌옇게 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일 꼭대기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이 그를 다시 끌어당기려 하자 온시환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지민아, 오늘 밤의 달 좀 봐.”공지민은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오늘 달은 분명 아름다웠고 내일 날씨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며 신중하게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지민은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공지민이 떠나는 것을 본 온시환은 당황해 급히 뒤쫓으려다 그만 술에 취한 상태로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을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으로 본 적이 없었다.그는 흙투성이가 된 정장차림으로 그녀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다리가 심하게 다친 듯 몇 번을 시도해도 실패하고 말았다.강렬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어느 정도 맑게 해주었고 그제야 그는 현실을 자각했다.‘이건 꿈이 아니야. 지민이가 정말 나를 보러 온 거야.’공지민은 그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다쳤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병원에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나섰다.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온시환은 공지민의 손목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 같았다.공지민은 옆에 있던 의사에게 물었다.“얼마나 쉬어야 하나요?”“2주 정도는 안정이 필요해요. 당분간은 목발을 써야 할 거예요.”공지민은 병원 매점에서 목발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온시환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온시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공지민은 목발을
온시환이 집에 돌착했을 때도 서주혁의 팔을 붙잡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서주혁이 그를 떼어내면 온시환은 다시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지민아...”“난 정말 모르겠어. 왜 날 대체품으로 삼았어? 그렇게 구은우가 좋으면 그냥 그 사람 찾아가면 되잖아.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건데.”“내가 네 장난감이냐, 나는 당해도 싸다 이거야?”서주혁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창피해서 버리고 가버리고 싶었다.온시환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한동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서주혁은 가정부에게 그를 잘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온시환의 집을 나섰다. 취한 사람과 더 이상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서주혁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시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공지민이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조금 황당했다. 경찰은 온시환이 음주 운전을 하다 적발되었으니 와서 그를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공지민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친구분을 데려가 주실 수 있을까요? 음주 운전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면 안 될까요?”“그분께서는 당신에게만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와도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했고요.”공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결국 경찰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잠든 그의 모습은 차분해 보였고 평소의 산만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공지민은 경찰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온시환이 다시는 음주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는 보증을 하고 나서야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아 살짝 당겼다.온시환은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그녀를 보고 꿈을 꾸는 줄 알았다.갑자기 꿈속 공지민의 얼굴이 사라질까 봐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지민아?”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차가운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대체 원하는 게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
온시환은 천천히 손을 놓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래, 알았어.”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한마디를 내뱉었지만 온시환의 눈가는 아직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러나 공지민은 이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온시환이 또 심심풀이로 자신을 괴롭히려 한다고 생각했다.차인 걸 인정하지 못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고 여겼다.온시환 같은 남자가 진심일 리 없었다. 설령 진심이라 해도, 공지민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그는 식당 밖에 홀로 서 있었다.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공지민이 택시를 타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잠시 후, 그는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야, 오늘 한 잔 하자.”반승제는 흔쾌히 응했다.이상하게 오늘 밤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는 서주혁까지 불렀다.두 사람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이미 여러 병의 술을 비운 상태였다.“시환아, 너 대체 왜 이래?”온시환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가에는 이미 취기가 가득했다.“뭐 하는 거야? 얼른 앉아. 오늘은 취하지 않으면 못 가!”혼자서 술을 퍼마신 온시환을 보며 반승제는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너 혹시 무슨 고민 있냐?”“고민은 무슨... 그냥 술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거지. 하하.”서주혁은 말없이 나무토막처럼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 그는 분위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반승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들을 모두 치우고 온시환 앞에 과일주스를 내밀었다.“솔직하게 얘기해. 무슨 일이야?”그 말을 듣자마자 온시환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반승제는 그가 웃는 줄 알았다. 웃을 때도 어깨가 들썩이긴 마찬가지니까.“뭐야, 웃긴 얘기라도 있어?”그는 온시환의 몸을 돌려보았고 그제야 그의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야, 주혁아! 이거 봐. 시환이가 울고 있어!”온시환은 그 말을 듣고 얼른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꺼져!”반승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자동차가 레스토랑 앞에 멈춰서자 공지민이 먼저 내려서 안으로 들어갔다.곧이어 온시환도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자리를 예약 해둔 터라 직원이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공지민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의 푸른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비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왜, 내가 이제 그 점이 없으니까 나를 쳐다볼 생각도 없어진 거야?”공지민은 그가 귀찮을 뿐이었다. 이미 진실을 알았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지, 굳이 이런 말로 둘 다 어색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그러나 온시환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날카로운 말을 뱉었다.“네가 다니던 고등학교 가서 구은우 사진 봤어. 솔직히, 별로 잘생긴 것도 아니던데.”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지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온시환은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지만 오히려 더 그녀를 찌르는 말을 꺼냈다.“그렇게 좋으면 왜 안 찾아가? 아니면 이미 결혼이라도 한 거야? 네가 이러거 있는 거 보면, 그 자식도 너를 기다리지 않은 모양이지? 참 안 됐네.”그때 마침 직원이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말없이 잔을 들어 올린 공지민은 그대로 커피를 온시환에게 끼얹었다.온시환은 이전에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감정적인 반응이 반갑기까지 했다.마치 나무토막처럼 감정 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공지민은 얼굴을 잔뜩 굳히고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정신이 좀 들었어?”온시환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옆에 있는 냅킨을 집어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어쩌지? 평생 정신 못 차릴 것 같아. 공지민, 난 지금도 이해가 안 돼. 왜 날 대체품으로 썼는지. 진짜 그 점 하나 때문이야?”그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지 않는 이상 그는 평생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없을 터였다.그래서 그는 더더욱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심지어 그
온시환은 공지민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첫사랑을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왜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고 그에게 와서 상처를 남겼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더 한심한 건 자신이었다. 대체품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몰래 보러 온 자신이 더 우스웠다.온시환의 차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주차돼 있었다. 연예계에서 그의 영향력 덕분에 차를 촬영장 근처에 세워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그는 창문 너머로 공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문 장면 촬영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아픈 손목을 문지르는 모습, 옆에 있던 낯선 여성과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별다른 장면도 아닌데 온시환은 끝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공지민은 오후 촬영을 마치고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때 문보영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공지민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한쪽으로는 그날 밤 목격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다른 한쪽으로는 문보영이 여전히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사실이 마음에 남았다.하지만 그녀는 이제 둘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문보영은 공지민이 그날 밤의 일을 봤다는 걸 몰랐다. 여전히 밝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걱정했다.“지민아, 요즘 다시 촬영 시작했어? 혹시 회사로 돌아올 생각은 없어? 내가 대표님께 한 번 말씀드릴 수 있어. 사실 대표님도 꽤 후회되시는 것 같더라. 요즘 네 인지도도 높잖아.”“아니, 괜찮아.”“그런데 너랑 시환 씨... 지민아, 너희 두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파티에 데려왔을 때만 해도 잘 될 줄 알았는데, 요즘은 연락도 안 한다고 하던데.”예전 같았으면 공지민은 문보영의 말을 진심 어린 걱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문보영이 정말 궁금한 건 온시환이 여자 친구가 있는지 여부라는 걸.“헤어졌어. 이번에는 정말 끝이야.”문보영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넌 괜찮아? 너 시환 씨 정말 좋아했잖아. 혹시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너를 상처 준 거야?
당연히 취했다. 취하지 않았으면 온시환의 성격상 추지성에게 사과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추지성은 온시환에게 다시 술병을 열어주며 말했다.“아직 덜 취한 것 같으니 더 마셔.”온시환은 희미하게 뜬 눈으로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지성아, 나 지민이 고등학교에 가봤어. 그리고 지민이 첫사랑을 알게 됐지. 꽤 괜찮게 생겼더라.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뭔지 알아?”“뭔데?”“내 코끝 여기.”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끝을 가리켰다. 여전히 흐릿한 눈빛이었다.“여기에 구은우랑 똑같은 점이 있었잖아. 공지민은 아마 그 점 때문에 나에게 잘해줬던 거야. 너도 우습지 않냐?”그는 입으로 우습다고 말했지만 눈빛에는 슬픔이 넘칠 듯 담겨 있었다.추지성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누구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가지고 놀고 싶을 뿐이었고 막상 손에 넣으면 금세 흥미를 잃었다.“못 가지는 게 가장 좋은 거지. 손에 넣으면 금방 싫증 나는 법이거든.”“지성아, 나 여기가... 정말 아프다.”추지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야, 네가 진짜 내 친구 아니었으면 벌써 널 집어 수영장에 던져 넣어버렸을 거다. 여자를 두고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술 더 마셔야겠어.”“안 마셔. 마시면 더 괴로워질 뿐이야.”온시환은 그 말을 끝으로 옆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추지성은 옆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려다 그의 축축한 속눈썹을 보고 멈칫했다.‘설마 또 울었어? 요즘 완전 여자 같아. 조금만 힘들어도 시도 때도 없이 우네.’온시환은 원래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특히 수년 전 큰 수술을 받은 후, 의사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뒤로 그는 늘 세상을 가볍게 여겼다.그가 쓰는 드라마 대본들도 대부분 막장극이었고 그는 막장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막장이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돌아와 부메랑처럼 자신을 찌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밤중에 온시환은 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