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종이 울리자 연령은 얼른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손경민 일 줄이야!“여보!”그녀가 깜짝 놀라며 기쁜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손경민은 자신을 반기는 이러한 눈빛을 꽤 맘에 들어 했다. 그는 쇼핑몰을 지나다니다 사 온 선물을 옆에 두었다.연령은 얼른 남편을 집 안으로 초대하고 싶었지만 처음엔 열정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던 성혜인의 조언을 떠올리고 현관에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야기가 시작된 지 10분 되었을 무렵, 손경민의 뒤에 여자 한 명이 나타났다. 유시은이 한쪽에 아들의 손을 잡고 찾아온 것이었다.연령의 표정은 금세 백지장이 된 듯 창백해졌다. 이는 유시은이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두 사람의 집에 찾아온 것이었다.돌아서서 두 모자를 본 손경민의 얼굴에 기분 나쁜 기색이 역력했다.유시은이 점점 분수를 모르고 날뛴다. 감히 두 사람이 살던 집까지 찾아오다니.역시 평소에 너무 봐주고 산 것 같았다.그가 마침 유시은을 타일러 돌려보내려고 할 때, 유시은이 입을 열었다.“부인께 할 말이 있는데, 잠시만 자리 비켜주시겠어요?”유시은은 손경민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집 안으로 들어와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손경민을 밖에 세워둔 채.손경민이 자리에 없게 되자 연령도 더 이상 본색을 숨기지 않고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야, 이 천한 년아. 너나 성혜인이나 다 한통속이야. 두고 봐, 성혜인 처리하면 그다음은 너야.”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시은이 문을 걸어 잠가 손경민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그녀의 시선이 집 안을 한바퀴 훑더니, 곧 침실 입구에서 멈췄다. 그곳에는 두 사람을 보고 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다.아이는 뼈가 앙상했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듯했다.“연령 씨, 애한테 밥도 제대로 안 먹인 거예요?”이에 연령이 눈을 싸늘하게 희번덕거렸다.“내가 밥을 먹였으면 손경민이 우릴 퍽이나 보러 왔겠다. 유시은, 괜히 여기 찾아와서 착한 척 하지 마.”유시은도 손경민을 원
“이 녹취록은 회사 사람들한테 정리해서 보내달라고 할 테니 그때 트위터에 올려요. 시은 씨, 미리 말하지만 이 녹음본을 올리면 손경민, 그리고 연령에 대한 여론은 되돌릴 수 없을 거예요. 전 시은 씨는 도와줄 수 있지만 그 두 사람은 도와줄 수 없어요. 그때 가서 손경민 씨 돌려놓으란 부탁 해도 전 못해요.”유시은이 냉소했지만, 눈시울이 붉어졌다.“대표님, 대표님께선 저랑 한 약속만 지켜주세요.”고개를 끄덕인 성혜인은 바로 녹취록을 회사로 보냈고 유시은에게 또 당부했다.“홍보팀이 곧 시은 씨에게 장문의 글을 보낼 거예요. 시은 씨와 손경민, 그리고 연령 세 사람의 관계를 상세히 설명할 것이고 시은 씨가 미숙했던 것, 손경민의 성숙함에 반했던 것, 그리고 술로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를 강조할 거예요. 그러니까 시은 씨를 사랑에 미쳐 잠시 콩깍지가 쓰인 것으로 해명할 텐데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네.”“아, 그리고 한 가지 더. 현실을 직시해야 해요. 사랑에 미친것이든 어떻든 결국 시은 씨는 한 가정에 끼어든 거예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니까 주연은 하기 힘들어요. 하지만 조연으로 공백기 없이 쭉 연기할 수 있게 할 수 있어요. 시은 씨 연기도 꽤 잘하니까 시간이 있을 때 잘 다듬어봐요.”유시은이 후회하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잘 알고 있어요. 주연은 안 되겠죠.”성혜인의 일 처리 속도는 매우 빨랐다. 그녀는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홍보팀에서 정리한 문건과 녹음을 유시은에게 보냈다.그리고 유시은은 성혜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단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10분 후에 트위터에 올릴 것이라 메시지를 보냈다.성혜인도 시간을 주시하고 있었다.한편, 연령은 끝내 참지 못하고 지인에게 성혜인에 대한 험담을 하고 있었다.“그래. 그래. 그 온수빈 회사 대표. 너도 온수빈이라는 연예인 알지? 내 덕분에 위에서 끌어져 내린 사람. 지금 인터넷만 봐도 욕하는 사람이 넘쳐나. 꼬시다, 꼬셔. 그 대표라는 사람도 나한테 와서 굽신거리면서 부탁하는데. 진짜
성혜인이 회사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 전화기 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연령이라는 분이 만나고 싶답니다.”“돌아가라 해요.”성혜인의 말투는 아무런 기복 없이 담담했다. 전화를 끊은 성혜인은 인터넷에 올라온 피드백을 지켜보았다.예상치 못한 반응에 연령은 당황하며 그제야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녀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로비 직원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정말 실례지만 위층에 가서 대표님 찾아봐 주면 안 될까요. 저 정말 중요한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연령이 막무가내로 요청하자 직원은 겁을 먹고 경비원을 불렀다.그리고 회사 밖으로 내쫓겨 난 연령은 원망의 화살을 성혜인에게로 돌렸다.성혜인 하나 때문에 그녀는 지금 이렇게나 많은 사람에게 욕을 먹고 있다.그녀는 계속해서 트위터에 글을 올리며 온수빈을 모함하려 했다.하지만 네티즌들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정신 나간 미치광이 취급을 했다.손경민마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마구 따졌다.“너 어디서 미움 산 거 아니야? 아무리 돈을 써도 실검을 내릴 수 없어. 아니, 넌 네 딸한테 밥도 안 주냐? 독한 것.”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심한 욕설을 들으니 연령은 급격하게 슬퍼지며 무너질 것 같았다.“당신도 할 말 없어요! 우리 딸이 이렇게 된 건 다 바람피운 당신 때문이에요!”“이미 사람 시켜서 딸 데려오라고 했어. 이제 넌 딸 볼 자격도 없어. 이혼해. 어차피 이제 평판도 망한 마당에 이혼 안 할 이유도 없지.”연령은 남편이 절대 자신과 이혼할 수 없다고 굳게 믿었었다. 그는 유명인이었고 평판이 나빠질까, 늘 걱정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믿었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이혼하자 하니 연령은 극히 당황스러웠다.“여보, 내가 잘못했어. 이혼만은... 이혼만은 제발 하지 말자.”하지만 손경민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하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기에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손경민의 평판은 심각하게 나빠졌다. 어쨌든 자폐증 아이를 두고 바람을 피웠기 때
스카이웨어 룸의 소파에 반승제가 앉아 있다. 그 앞 테이블 위에는 얼마나 마셨는지 모를 술병들이 어지럽게 놓여있다.서주혁은 그의 곁에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는데 아마 반승우에 관한 말을 하는듯했다.반승우는 상류층에게 자신이 실험당하던 일부분 기억과 칩을 숨긴 위치를 잊었다며 전에 친했던 사람들과 많이 접촉해야 기억이 떠올 수 있다고 했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친했던 사람은 서주혁, 반승제, 성혜인이었다.그리고 모든 반씨가문의 사람들도 포함.서주혁은 초조하게 핸드폰을 내려놓았고 반승제는 곁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상사의 답답한 모습에 서주혁이 울분을 터뜨렸다.“정말 이대로 이렇게 쉽게 반승우가 집안에 들어오게 할 거야? 오늘 밤 반씨가문 사람들이 환영회를 연단다. 네가 여기에서 이렇게 허송세월만 하고 파티에 얼굴도 비치지 않으면 불화설이 돌 거야. 듣기론 사모님께서도 오고 계신다는데!”반승제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와인잔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서주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예전에 승우 형이 살아있다는 걸 몰랐을 때도 여기저기 소식을 알아보긴 했지만, 정말 돌아왔을 때는 분명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녔어. 승우 형은 BH 그룹의 대표 자리를 되찾으려 하고 있고 특히 널 가문에서 배척하려고 해. 승우 형은 확실히 변했어. 겉모습은 변함없지만 확실히 너에 대한 공격성이 늘었어.”말을 마친 그는 옆에 놓여있는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인상을 찡그리며 말을 보탰다.“승제야, 전엔 둘 관계가 이렇게 나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했는데. 전에 승우 형이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했을 때, 네 엄마는 네게 털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강아지를 입양해 왔고, 그 사실을 모르던 승우 형이 오히려 나중에 알고는 다시 보냈잖아. 어렸을 때 네가 친구와 싸우고 와서 울면 널 위로해 주던 사람도 항상 네 형이었어. 어릴 때 네가 맞고 다니면 형이 와서 도와주기까지 했었는데.”그러나 어제 본 반승우의 분위기는 전과 많이 달랐다.반승제가 들고 있던 와
“다 오해예요. 일단 돌아가서 얘기해요.”반승제는 여전히 뒤돌아서 화난 듯 가라앉은 어투로 말했다.“싫어. 난 여기 있을 거야. 돌아가면 네 눈에 거슬릴 거 아니야.”성혜인이 아예 일어서더니 화난 척 언성을 높였다.“자꾸 이러면 저 진짜 갈 거예요.”반승제가 눈동자만 슬쩍 굴려 성혜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성혜인이 떠나려고 주섬주섬 물건을 챙기자 서둘러 일어났다.그러나 쫓아가지는 않고 마치 심문받는 범죄자처럼 엉거주춤 서 있었다.성혜인이 푹 한숨을 쉬었다.“손 잡아요. 데려다줄 테니까.”그제야 반승제가 제대로 성혜인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신발을 벗었다.“이거 신어.”술에 취했어도 성혜인이 신을 안 신고 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성혜인은 마음이 저렸다. 도대체 반승제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배현우가 그에게 그날 밤 일을 모두 알려준다면 자신은 반승제를 볼 낯이 없을 것 같았다.“안 신을 거예요. 승제 씨 신발은 내 발에 비해 너무 커요.”그가 다시 제 신발을 신고 살짝 상체를 숙였다.“그럼 업어줄까? 그날 소풍 갔을 때처럼.”두 사람이 보냈던 몇 번 되지 않는 오붓한 시간이었다.“승제 씨 취했잖아요.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안 돼. 네가 신을 안 신었잖아.”반승제가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는 여성 신발 한 켤레를 준비해 오라고 명령했다.그리곤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혜인이 발 사이즈로.”성혜인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왠지 취한 것 같지 않아 보였다.그런데 전화가 끊기자마자 손에 힘이 풀린 건지 전화를 떨구었다.성혜인이 휴대폰을 주우려고 허리를 굽혔다. 그런데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반승제가 끌어안더니 자기 다리 위에 앉히는 것이었다.그는 테이블 위의 티슈를 뽑아 발바닥을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성혜인은 왠지 겸연쩍은 마음이 들었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깨끗이 닦고 난 후 반승제는 쓰레기통에 티슈를 버렸다. 그리곤 성혜인의 허리를 껴안고 어깨에
심인우는 성혜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대표님을 많이 아끼시는듯하니 더 말 얹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결국 포레스트에는 성혜인이 홀로 들어갔고 심인우는 관리자를 시켜 흰둥이와 겨울이를 데려오게 했다.누군가 겨울이를 데려가려 하자 도우미 아주머니가 막으며 불안해했다.이에 성혜인이 급히 설명해 주었다.“아주머니, 제가 네이처 빌리지에서 앞으로 승제 씨랑 함께 살게 됐어요.”그 한마디에 유경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득하고 싶었지만 이건 두 사람 사이의 일이었다.유경아는 그저 겨울이를 보내기에 아쉬워 자꾸만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또 두 사람이 결혼한 지 3년 동안 소외당하던 성혜인이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졌다.“사모님, 전 사모님을 거의 제 친손녀로 여기고 있어요. 전 사모님이 괜히 그 사람 곁에서 힘들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사모님이 행복하다면야 기꺼이 보내드릴 수밖에요.”성혜인이 아주머니를 품에 꼭 안았다.“아주머니, 전 절대 당하고 살지 않아요. 나중에 정말 그 사람한테 실망하고 함께 살기 싫어진다면 제 발로 나올 거예요.”유경아가 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고 성혜인의 손등을 토닥였다.“네. 그럼 됐어요.”필요한 서류를 다 챙기고 성혜인이 거실 문을 나서려고 할 때 유경아가 문득 당부했다.“그쪽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으면 돌아와요. 반승제 씨가 잘해주지 않아도 그대로 뒤돌아 포레스트로 와요. 우린 계속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네. 그럴게요. 저도 자주 찾아뵐게요.”물건을 바리바리 들고 자동차로 향하던 그녀의 눈에 반승제가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물건을 들어주려 했다.“혜인아, 내가 할게.”S자 모양으로 엉거주춤하게 걷는 그의 모습에 성혜인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아뇨, 제가 할 수 있어요.”“내가 한다니까.”그가 딱 버티고 서서 가방을 가로채 가려고 했다.성혜인이 결국 성화를 못 이겨 가방을 건넸다. 넘어질 듯 몸을 못 가누던 그가 물건을 받더니
방에 돌아온 성혜인은 반승제가 아직도 신발을 신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분명히 슬리퍼가 발 옆에 떡하니 있었음에도 그는 신지 못했고 결국 거꾸로 신은 채 욕실로 가려 했다.성혜인은 그의 손목 하나에 수갑을 채우고, 다른 한쪽은 침대에 걸어놓았다.“푹 쉬고 있어요. 얼른 샤워하고 올게요.”다시 침대에 앉은 반승제는 제 손목에 채워진 것을 보더니 눈을 반짝였다.“혜인아, 나 이거 좋아.”성혜인:“...”응큼한것.성혜인은 속으로 욕하고는 바로 옷가지들을 챙겨 샤워하러 갔다.이제 반승제가 마구 돌아다니다 다칠 걱정은 안 해도 된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성혜인은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렸다.반승제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성혜인을 주시하고 있다.머리를 다 말린 성혜인이 가까이 다가와 수갑을 풀어주었다.“찰칵.”수갑이 풀리는 순간, 그가 몸을 돌려 성혜인을 덮쳤다. 그리곤 이성을 잃은 듯 다급히 잠옷의 단추를 풀려고 했다.하지만 너무 취했던 탓인지 단추가 자꾸 손에 잡히지 않았다.성혜인이 그의 손을 잡고 타일렀다.“저 졸린데... 자면 안 돼요?”성혜인의 말 한마디에 반승제가 순순히 물러나더니 성혜인을 품에 안고 1분이 안 되어 잠에 들었다.요즘 통 잠에 못 든 그는 다크써클이 진했다.성혜인은 잠에 들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인터넷 여론을 살폈다. 회사에 대한 영향이 확실히 적어졌음을 확인해서야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귓가에 반승제의 맑은 숨결이 느껴졌고 머릿속엔 서주혁의 말이 떠올랐다.반승제가 원하는 건 혜인 씨의 태도 뿐이에요.혜인 씨가 달래주기만 한다면 그게 거짓이라도 믿어줄 거예요.성혜인이 몸을 기울여 반승제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속눈썹은 길고 짙었으며 잠든 그의 모습은 말 잘 듣는 어린아이같이 예뻤다.그 얼굴을 감상하다 보니 성혜인은 마음이 나른해졌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성혜인은 우선 노트북을 켜서 메일들을 처리한 뒤 주방의 셰프에게 위장을 녹일만한 수프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이
성혜인의 곁으로 다가선 반승제는 화판 위의 흰둥이 그림을 발견했다. 그림 속의 흰둥이는 위풍당당한 자세로 의자에 엎드려 있었다.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지만 그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한쪽에 앉았다.“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길 왔대?”성혜인의 붓을 든 손이 멈칫했다. 하룻밤 사이에 태도가 변한 그를 보니 성혜인은 그저 웃기기만 했다.성혜인은 아무 대답 없이 그림을 이어서 그렸다.그러자 반승제는 담배 한 대를 꺼내 라이터 불을 붙이려 했다.이전에 성혜인 앞에서 담배를 꺼내지도 피우지도 않던 그는 최근 들어 점점 담배를 피우는 횟수가 많아지고 있었다.오직 니코틴만이 그의 슬픈 마음을 마비시킬 수 있는 것 같았다.“집 안에서 담배 피우지 마세요.”반승제가 성혜인을 힐끗 바라보더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왜? 심기가 불편해? 아, 인정.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비흡연자니까.”성혜인이 붓을 들고 있다가 또 멈칫했다. 그제야 성혜인은 그가 아마 어제 필름이 끊겼을 거로 추측했다. 아마 어젯밤 동거하자던 말도 다 잊은 것 같았다.말은 밉살스럽게 했어도 반승제는 끝내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았다.그는 담배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옆에 있는 책을 들었다.그러나 자신이 책을 거꾸로 들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성 대표님은 오늘 안 바쁜가 보지? 아침 일찍부터 여기 온 걸 보니, 설마 BH 회사 대표 자리 내놓으라고 하러 온 건 아니겠지?”반씨가문의 다른 사람들처럼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반승우에게 넘기도록.짐짓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성혜인이 한참 응시하더니 붓을 내려놓았다.“어제 누가 스카이웨이에서 취해서는 자꾸 같이 살자고 조르길래, 그러자고 했어요.”반승제 손에 들려있던 책이 땅바닥을 향해 쿵 내리찧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성혜인을 쳐다보았다.성혜인은 이미 그를 일으켜 세워 자기 그림을 보게 하고 있었다.“똑같죠. 진짜 강아지 같지 않게 위풍당당하게 앉아있어요.”“누가 흰둥이가 강아지래?”“그럼요?”“늑대야.”두 사람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