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의 분위기가 순간 미묘해졌다.입구의 성혜인은 반승제가 왜 설인아를 안고 있는지 1분을 생각해도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의 모습은 그들이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입까지 맞췄을 기세였다.반승제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을 차리고 즉시 설인아를 밀어버렸다.설인아는 큰 힘을 받자 똑바로 서지 못하고 그대로 땅에 넘어졌다.그 모습을 본 설기웅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반승제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날렸고 결국 차마 피하지 못한 반승제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설기웅은 차가운 얼굴로 쭈그리고 앉아 설인아를 일으켜 세우더니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괜찮아, 인아야?”그러자 설인아가 눈시울을 붉히며 그의 품에 안겼다.“오빠, 나 가슴이 아파. 나...”곧 뺨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설인아는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설기웅은 서둘러 그녀의 몸을 뒤져 약을 찾아낸 후 입에 집어넣었고 설인아는 훌쩍거리며 그의 품에 안겨 다시 반승제를 보려 하지 않았다.이 상황은 누가 봐도 반승제의 잘못으로 보였다. 조금 전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뜨거웠으니 말이다.‘인아가 일방적으로 쫓는 줄 알고 와서 말리려 했더니, 반승제가 양쪽에서 두 사람을 갖고 노는 거였어?! 허허, 이게 대체 뭐야? 감히 설씨 가문 딸이 왜 이런 굴욕을 당해야 하는데!’“반승제, 네가 다른 여자를 가지고 놀면 나도 상관 안 해. 하지만 네가 내 여동생을 가지고 논다면 나는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반승제는 지금도 머리가 아팠다. 특히 억지로 그 혼란에 저항하려고 하니 더욱 아팠다.마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필사적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반승제는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 설기웅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도 않았다.뒤이어 설기웅은 조심스레 설인아를 부축하며 더욱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게다가 네 옆에는 지금 갖고 놀 여자가 있지 않나? 내 여동생은 저 여자랑 달라.”등장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성혜인에게 심한 말을 하지 않았던 설기웅은 이 순간 주저 없이
한편 방으로 돌아온 설인아는 아직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다.서러워하는 동생이 이내 안타까워진 설기웅은 동생이 따뜻하게 샤워하며 기분 전환할 수 있게끔 샤워 전 준비까지 직접 해주었다.하지만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설인아의 울음소리에 설기웅은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아직도 모르겠어? 그놈이 지금 너랑 성혜인 둘 다 재고 있잖아.”“나도 알고 있어. 머리로는 분명히 알고 있는데 내 마음이 그렇게 안 돼. 나한테 아무리 막돼 먹게 굴어도 난 그 사람이 좋아. 좋은 걸 나보고 어떡하라는 건데.”반승제에게 푹 빠진 설인아의 말과 행동에 설기웅은 눈에 가시라도 박힌 듯 인상을 찌푸렸다.그동안 도 넘을 정도로 집안에서 설인아를 애지중지 여긴 것이 잘못인 듯싶었다.이성과의 접촉마저 가능한 한 처단했었기에 이처럼 사랑이란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첫 단추부터 잘못 낀 것처럼.“그때도 승제 여보가 먼저 나한테 편지 쓰고 그랬었어. 난 그때 그 편지들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어. 몸만 건강했어도 이미 천백 번은 찾아갔을 건데 내가 많이 아팠잖아. 나만 괜찮았다면 우린 이미 예쁘게 사랑했을 거고 성혜인 그년이 끼어들 자리조차 없었을 거야.”“조금 전에 승제 여보가 나를 품속으로 끌어안을 때도 난 마냥 좋기만 했어. 밀어낼 수 없었다고.”설인아는 발개진 얼굴을 들어 설기웅을 바라보며 눈물을 닦았다.“그래서 하는 말인데 오빠가 나 좀 도와주면 안 돼? 나 승제 여보랑 결혼하고 싶어. 내가 아닌 성혜인을 마음에 두고 있는 승제 여보라도 상관없어. 난 그냥 승제 여보만 내 곁에 있으면 돼. 결혼하고 나면 나만 바라보고 나한테 엄청 잘 해 줄거야. 꼭 그러리라 믿어.”이성을 잃은 듯한 설인아의 말에 설기웅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랑에 올인한 동생이 낯설기만 했다.설인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설기웅의 커다란 손을 살포시 잡고 흔들었다.그러면서 반승제에 대한 자기의 마음이 얼마나 큰지 반승제를 위해서라면 존엄 따위를 모두 버릴 수 있다
짧디짧은 한마디는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다.화들짝 놀란 성혜인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누구지? 왜 이 시간에 이런 장난을 하는 거지?’[잠옷 예쁘네.]잇따라 오는 메시지에 성혜인은 파르르 떨리고 말았다.감시 카메라로 가득했던 전에 그 방이 떠오르면서 다시금 심장이 철렁이고 역겨웠다.성혜인은 침대에서 바로 내려와 불을 끄고 사방을 훑어보았다.하지만 감시 카메라 따위를 숨길 만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이윽고 그녀는 창문 앞으로 다가갔는데 커튼을 치려는 순간 적막함을 깨는 알림 소리가 다시 무섭게 들려왔다.[여기저기 찾아다니는 네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알아? 지난번에 내가 너무 심했었지? 우리 혜인이 그 뒤로 피임약은 먹었나 모르겠네.]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바로 배현우이다.커튼을 손에 꼭 쥐고 있던 성혜인은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손에 땀이 흥건해졌다.주저 없이 커튼을 치고 밖에서 방안을 들여다볼 수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침대로 돌아와 앉았다. 벌벌 떨면서.그 뒤로 메시지는 더 이상 오지 않았지만 성혜인은 내내 안절부절못했다.모든 걸 확인하고도 불안한지 그녀는 화장실로 가서 다시 한번 자세히 훑어보았다.그 어느 구석에도 그의 흔적이 없다는 것을 여러 번 체크하고 나서야 침대로 돌아와 다시 누울 수 있었다.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문을 두드렸고 노크 소리에 성혜인은 얼어붙고 말았다.긴장감에 피가 바짝 마르는 것만 같았다. 가까스로 문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인 채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다.하지만 칠흑 같은 어둠만 덩그러니 남은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누군가가 일부러 막아 놓은 것이 분명한 듯싶다.성혜인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 같은 시각 반승제는 홀로 침대에 덩그러니 누운 채 무척이나 괴로워하고 있다.‘왜 이렇게 힘들고 아프지? 너무 괴로워...’반승제는 그가 마신 술에 이름 모를 약물이 여러 가지나 들어간 사실을 모르고 있다.설인아의 손을 거친 약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넣은
반승제의 소리가 들려오자 성혜인은 두 눈을 반짝였다.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것처럼.그러나 배현우의 입에서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는 몸을 천천히 숙이며 코끝이 대일 정도로 성혜인과 얼굴을 마주했다.다가오는 배현우의 모습에 성혜인은 순간 속이 울렁거려 옆으로 피했다.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은 심정이다.이때 배현우는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너 나랑 그런 일이 있었잖아. 그 모든 걸 알고 있는 반승제는 과연 예전처럼 널 대할 수 있을까? 너랑 잠자리할 때마다 우리가 떠오르지 않겠어? 우리도 그렇게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는지 아니면 더 뜨겁게 사랑했는지 속으로 비교해 보지 않을 것 같아? 솔직히 말했다고 해서 걔가 질투하지 않을 것 같아? 아니, 걔 엄청 질투하던데. 오죽했으면 온 세상을 뒤져가면서 날 찾으려고 했겠어. 걔가 날 미친 듯이 찾는 바람에 내가 한동안 숨어 있었잖아. 그것도 꽤 처량하게. 성혜인, 너 보통 여자가 아니더라.”성혜인은 반승제가 배현우를 몰래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찾지 말라고 반승제에게 신신당부를 했으니 당연히 찾지 않을 줄 알았다.하지만 실은 속으로 엄청 신경 쓰였던 것이고 괜찮은 척 연기를 했었던 것이다.배현우는 성혜인의 손을 잡고 억지로 자기와 눈이 마주치게끔 했다.그러고는 성혜인을 바라보며 한참을 웃더니 그제야 풀어주었다.성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방안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밖에 있는 반승제가 다시 애타게 그녀를 불렀다.“혜인아? 자?”그의 소리가 들려오는 동시에 배현우는 창문으로 다가가 훌쩍 뛰어내렸다.이 모든 것이 벌어지기 전에 성혜인은 방 안을 살피면서 창문으로 간 적이 있다. 단번에 뛰어 내리기에는 꽤 높은 높이인데.성혜인은 시선을 내리깔며 거의 벗겨질 듯한 잠옷을 바라보았다.밖에서 계속 반승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새 잠옷을 꺼내 입고 난 뒤 문을 열어주었다.문이 열리는 순간 반승제의 코끝
반승제는 우습기만 했다. 그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설기웅을 쳐다보았다.설인아는 자기로 인해 두 사람이 행여나 싸우기라도 할까 봐 잔뜩 억울한 모습으로 설기웅을 말렸다.“나 괜찮아. 승제 씨가 날 싫어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내가 너무 주제넘게 말을 많이 한 거야.”도도한 설인아가 반승제를 위해 자태를 한껏 낮추는 걸 보면서 어떤 이들은 그녀가 안타깝기도 했다. 그녀에게 너무 불공평하다면서.하지만 반승제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감히 선뜻 나서서 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설기웅은 천천히 반승제를 향해 다가갔는데 두 사람은 10여 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다.한 치의 오차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신체 조건을 가진 두 남자가 대치하고 있으니 곧 폭풍 전야가 올 것만 같았다.“반 대표님, 하이킹 끝나고 제원으로 돌아가서 얘기 좀 합시다.”두 가문의 혼인에 대해 제대로 얘기할 자리도 인제 슬슬 마련해야 한다.하지만 반승제는 그를 무시한 채 빠른 걸음으로 성혜인 옆에 다가갔다. 얘기하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서.이에 설기웅은 계속 따져 들지 않았다. 어차피 순순히 자기 프레임에 맞게 움직이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이때 설인아는 걱정스러워하며 설기웅의 팔짱을 껴안았다.“오빠, 미안해…”설기웅 앞에만 서면 설인아는 늘 지금처럼 착하기만 했다. 일단 설기웅이 화가 났다 싶으면 재빠르게 눈치채고 사과부터 한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하여 설기웅은 단 한 번도 쓴소리를 한 적이 없고 설인아를 애지중지 소중히 여겨 온 것이다.“네가 왜 미안해하는데? 네 잘못 아니야. 그리고 우리 인아 원하는 대로 오빠가 꼭 만들어 줄게. 걱정하지 마.”설인아도 가방을 메고 있지 않다. 옆에 든든한 오빠 설기웅이 대신 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설기웅의 말에 그녀는 활짝 웃으며 팔을 더욱 꼭 끌어안고는 애교를 부렸다.“알았어. 우리 오빠만 믿고 있을게.”다들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는데 갑작스러운 에피소드로 분위기는 한껏 가
반승제는 성혜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혜인아, 얼른 업혀.”발목이 퉁퉁 부은 성혜인은 당분간 걷기조차 힘들 것으로 보인다.반승제는 매고 있던 가방을 임경헌과 온시환에게 건네주며 성혜인을 등에 업으려고 했다.다른 남자도 아니고 자기 남자 친구가 업어주겠다고 하는 데 업히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하여 성혜인은 망설임 없이 반승제의 등에 업혀 목을 꼭 감싸안았다.체격이 우람한 반승제는 가벼운 성혜인을 벌떡 업고 일어섰다.워낙 힘이 좋은 반승제 인지라 거뜬하게 업고 난 뒤 무게를 느끼는 여유까지 부렸다.“요즘 살 빠진 것 같은데?”툭 한 마디 던지고 그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채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설인아는 떠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힘없이 울고 있는 동생의 모습에 설기웅은 가슴 한쪽 곁이 미어졌다.“울지 마.”“오빠, 나 그렇게 별로야?”설기웅은 순간 뭐라고 위안해야 할지 몰랐다. ‘반승제!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 나쁜 X아!’“그런 거 아니야. 우리 인아가 뭐가 아쉬워서. 하이킹 끝나고 오빠가 따로 얘기할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설인아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내내 연기를 하고 있다.그 목적은 단 하나 설기웅을 완전한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함이다.행여나 그도 설우현처럼 여자 친구 있는 남자를 건드리지 말라며 그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자기를 말릴까 봐 걱정되었다.수단을 바꾼 설인아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사랑을 위해 존엄 따위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순정파’ 연기를 하고 있다.그러면 모든 이들의 동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자기편도 많아질 것이라 믿었다.과연 자기 계략대로 넘어온 설기웅의 행실을 느끼면서 그녀는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의 등에 업혀 가고 있는 성혜인을 바라보면서 설인아는 눈에 독을 품었다.오늘 밤에 엔디도 움직이게 되어 있으니 아무리 운 좋은 성혜인이라도 절대 피해 갈 수 없으리라 자신만만했다.성혜인은 자기를 쏘아
반승제는 성혜인을 평탄한 바위에 내려 놓고 버섯을 씻으러 약수터를 찾아갔다.그가 떠나자마자 여자들의 따가운 시선이 성혜인을 향했다.“그렇게 업혀 올 거였으면 하이킹은 왜 온 거예요? 하이킹의 뜻을 알기나 해요? 지금 여기서 그쪽 출신이 가장 하찮은 거 알고 있죠? 그런 그쪽이 지 발로 걸어오는 게 아니라 남자 등에 업혀 온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성혜인은 지금 여유롭게 산 열매를 먹고 있다.오는 길에 반승제가 따서 준 열매인데 운이 좋은 사람만이 먹을 수 있는 열매라고 했다.한 손에 열매를 쥐고 성혜인은 시선을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렸다.“질투 나서 그러는 거 맞죠? 그렇게 셈 나면 이따가 승제 씨 오면 업어달라고 부탁해 보세요.”“너!”예상치 못한 대답에 여자는 말 문이 막히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때 마지막으로 캠핑 장소에 도착한 일행을 바라보고 입가에 차가운 웃음을 일었다.“몸이 편치 않은 설인아 씨도 저렇게 자기 발로 직접 걸어오는 데 누구는 참 주제 파악도 못하고 공주님 놀이하는 거 같지 않아요? 반승제 씨가 이제 그쪽 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세상 그 어느 남자가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여자를 원하겠어요. 여하튼 사람은 자기 팔자 대로 살아야 한다니깐.”도발하는 여자의 말에 성혜인은 바로 반박하려고 했지만 다른 이들도 거들기 시작했다.“그러게 말이에요. 공주님은 따로 있는 데 자기가 진짜 공주님인 줄 아나. 하도 반승제 씨가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면 지금처럼 이렇게 앉아서 우리하고 말할 기회 조차 없었을 거예요. 평생.”“여자는 뭐니 뭐니 해도 스스로 강해져야 하는 법이죠.”성혜인을 질투하고 있는 여자들은 그녀를 폄하하면서 자기를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포장하려고 했다.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세월과 함께 이 사회에도 여러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그 변화가 다양하다.전에는 단순한 여자가 대세였다면 지금은 독립적이고 스스로 일떠설 줄 아는 여자가 대세이다. 남자한테 기대지 않고 스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자 반승제는 바로 장갑을 벗어 던지고 한걸음에 달려왔다.성혜인이 그들에게 괴롭힘이라도 당했을까 봐 걱정 돼서 성큼성큼 걸어 왔다.“무슨 일이야?”구경하고 있던 이들은 순간 뭐라고 설명할 말이 없었다.이때 성혜인은 여유롭게 열매를 먹으며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승제 씨 안타깝다고 울던데요.”이에 반승제는 어리둥절하기만 했고 잇따라 눈에 가시라도 박힌 듯 인상을 찌푸렸다.“미친 거 아니야?”성혜인은 먹고 있던 열매를 하마터면 뿜어낼 뻔했다.그러더니 가까스로 열매를 삼키고 물까지 마시며 목을 축였다.예상치 못한 반승제의 반응에 설인아는 온몸이 굳어지면서 표정이 잔뜩 상기되었다.하지만 그 또한 잠시 바로 구구절절 반박하기 시작했다.“그게 아니라 성혜인 씨 말에 상처받아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난 거예요.”“뭐라고 그랬는데요?”“저더러 제3자라고 그랬어요.”“그럼, 아니란 말이에요?”반승제는 마냥 어이가 없었다. 더 이상 반응할 가치도 없다고 여기며 다시 장갑을 주섬주섬 끼고 성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좀 멀리 떨어져 있어. 너까지 전염돼서 저렇게 정신 줄 놓게 될까 봐 걱정 돼.”성혜인에게 또다시 열매를 뿜을 뻔한 위기가 찾아왔지만 이번에도 가까스로 참아냈다.모두가 보는 앞에서 웃음을 터뜨리지도 않았다.반승제의 말에 분위기는 한껏 어색해졌고 설인아는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설기웅은 한쪽에서 험악하게 굳은 얼굴로 반승제를 바라보고 있다.그러나 반승제는 그런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텐트를 다시 치기 시작했다.울고 있는 설인아를 바라보면서 속에서 열불이 났지만 아직은 반승제와 얼굴을 붉히고 싸우고 싶지 않았다.하여 전과 마찬가지로 설인아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제원으로 돌아가는 대로 내가 바로 찾아가서 얘기 할게. 울지 마.”설기웅과 엔디의 부축을 받으며 설인아는 자리 잡고 앉았다.그녀는 지금 붉어진 두 눈으로 성혜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다.성혜인이 덤덤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줄
연승혁을 구해준 젊은 여의사는 연승혁의 얼굴을 힐끗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 여자분, 정말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나 봐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가끔 가슴이 저려요. 어쩌면 이건 또 하나의 운명적인 러브스토리일지도 모르겠네요.”하지만 그녀는 연승혁의 창백한 얼굴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속으로 비웃었다.‘공지민... 공지민...’그는 그 이름을 당장이라도 씹어 삼켜버리고 싶었다.여의사는 그의 상처를 다시 점검하며 말을 이었다.“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살아난 건 기적이에요. 총상이 심장을 빗나간 덕분에 살 수 있었던 거잖아요. 심장이 일반인과 다른 위치에 있었던 게 다행이었죠.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도 당신을 구하지 못했을 거예요. 도대체 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건가요? 정말 원수 같은 관계였던 거예요?”연승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며칠간 이어진 고열로 그의 몸은 기운이 빠져있었고, 근육은 마치 녹아내리는 듯 무력했다.의사는 그의 상처에 약을 바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바다에서 발견했을 때, 솔직히 죽은 줄 알았어요. 이 지역엔 상어가 많기로 유명한데, 상어가 당신을 건드리지 않은 것도 신기했죠. 잠시만 기다리면 죽 한 그릇 가져다드릴게요.”“감사합니다.”연승혁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거칠고 쉰 기운이 섞여 있었다.여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연승혁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여기는 내가 있던 섬이 아니야. 아마 근처 다른 섬일 거야. 내 부하들은 원래 섬에 남아 있겠지? 그런데 공지민은… 지금 어떻게 된 거지?’그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빨리 부하들과 연락해서 공지민을 붙잡아야 해. 그녀를 내 손에 넣고 천천히, 철저히 갚아줄 거야.’연승혁은 이를 악물며 결심했다.그가 살아남아야 할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공지민을 짓밟고 복수하는 것이었다.그는 온몸의 상처가 고통스러웠지만,
한편, 공지민의 손목은 도망치지 못하도록 연승혁의 손목에 수갑으로 묶여 연결되어 있었다.그녀의 팔에서 추적기를 제거한 상처는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다.예전 같았다면, 연승혁은 그런 그녀를 보고 가슴 아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녀를 보며 비웃었다.“아프지?”그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조롱이 담겨 있었다.공지민은 입술을 꾹 다물고,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고의로 손을 들어 그녀의 상처 부위를 세게 눌렀다.공지민의 이마에 미세하게 주름이 잡혔지만 그녀는 애써 표정을 숨겼다.그녀의 부어오른 뺨에는 뚜렷한 손바닥 자국이 남아 있었다.연승혁은 두 차례나 그녀의 얼굴을 전력으로 때렸고, 그의 힘은 보통 남성보다 훨씬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지민은 고통을 내색하지 않았다.조금이라도 속도를 늦추면 연승혁은 손목을 강하게 잡아당겼다.공지민은 억지로 몇 걸음 더 걸어야 했고 때로는 그 자리에서 넘어지기도 했다.그럴 때마다 연승혁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지 않고 그대로 끌고 갔다. 그는 그녀를 철저히 짓밟고 싶어 했다.그녀의 뼈 하나하나를 부수고, 가슴속을 도려내 그녀의 심장이 얼마나 검게 변했는지 확인하고 싶을 정도로 원망하고 있었다.그들은 숨겨진 산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드디어 도착한 장소에서 누군가가 커다란 바위를 밀어 통로를 열었다.바위 아래에는 깊숙한 지하 통로가 나타났다.공지민은 통로 안으로 끌려 들어가면서도 발로 땅에 흔적을 남기려 했지만, 연승혁은 재빠르게 눈치채고 그녀를 세게 끌어안으며 흔적을 모두 지워버렸다.그는 차갑게 속삭였다.“공지민, 지금 나를 더 화나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사람을 다루는 방식은 잘 알 텐데? 너를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게 만들지도 몰라.”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며,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죽는 게 편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널 철저히 망가뜨릴 방법은 많아.”그는 다시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네가 목숨 따윈 잃어도 상관없다며? 좋아. 그렇다면 내가 구은
수천 명의 경찰이 산림을 완전히 포위하고 며칠째 수색을 이어갔지만, 연승혁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그가 이미 이 지역에 지하통로를 준비해 두고 몰래 출국하려 한다는 추측까지 나왔다.하지만 이 넓은 산림에서 지하통로를 찾는 것은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반승제와 서주혁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수색에 참여한 경찰들에게 온시환의 위치를 물었고, 가까스로 그를 찾아갔을 때 온시환은 땅에 주저앉아 있었다.그의 신발은 진흙으로 뒤덮여 원래 색조차 알아볼 수 없었고, 온몸은 진창에 범벅이 되어 처참한 모습이었다.“시환아.”반승제가 그를 불렀지만, 온시환은 마치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반응하지 않았다.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고, 또렷한 발소리가 들리고서야 반승제와 서주혁이 다가온 것을 알아차렸다.서주혁은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 모습은 그들에게 처음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여러 번 이런 모습의 온시환을 본 적이 있었다.반승제는 깊은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아직 못 찾았어? 너무 조급해하지 마.”온시환은 입가를 살짝 비틀며 쓴웃음을 지었다.‘조급하지 않을 수 있나. 연승혁 같은 인간이 공지민을 그냥 놔둘 리가 없잖아.’그의 머릿속은 최악의 상상들로 가득 차 있었다.‘공지민이 이미 어딘가에 묻혔을지도 모르는데... 아니면 지금 어딘가에서 내가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르지...’그는 온갖 방법으로 그녀를 붙잡으려 애썼다.하지만 정작 그녀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조차 미련 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그제야 그는 반승제가 했던 말을 비로소 이해했다.‘사랑이라는 건 참 아이러니한 거야. 한 사람이 내리치고, 또 한 사람이 기꺼이 그걸 받아들여야만 이어지는 관계니까.’고개를 숙이자, 눈이 시큰해졌지만 눈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몸은 불편했고, 세상은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연승혁은 옆에 놓여 있던 칼을 들어 별다른 경고도 없이 공지민의 팔에 있는 추적기를 제거하기 시작했다.칼날이 그녀의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추적기를 도려내는 과정은 잔인하고 서툴렀다. 피와 살점이 엉겨 붙은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고, 피는 그녀의 팔에서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공지민은 입술을 꽉 깨문 채 비명을 삼켰다.얼굴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며칠 전 고열에 시달렸던 몸은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저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겨우 버틸 뿐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고통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대충 지혈제를 뿌리고, 그녀를 차 안으로 던져 넣었다.그리고 차 문이 닫히자마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운전석으로 돌아갔다.그 시각, 제원에 있던 온시환은 추적기의 신호가 갑자기 끊긴 것을 확인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는 이미 연승혁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정부 관계자를 살해하고, 연씨 가문의 자산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소문도 그의 귀에 들어와 있었다.‘공지민이 연승혁에게 끌려갔나?’그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연승혁이 그녀를 그냥 두지 않을 거야. 공지민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치욕적인 패배였을 테니까.’온시환은 곧바로 추적기가 마지막으로 신호를 보낸 깊은 산림 지대로 향했다.경찰도 이미 그 지역을 수색하기 시작했지만, 연승혁은 1급 지명수배자로, 그의 출국을 막기 위해 전국이 비상 상태였다.깊은 산속, 경찰은 헬리콥터와 1,000명이 넘는 인력을 투입해 그 지역을 수색하고 있었다.온시환도 경찰들과 함께 산에 들어가 하늘과 땅 사이에 그물을 치고 연승혁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그는 기도하듯 마음속으로 되뇌었다.‘제발, 제발 연승혁을 자극하지 않아야 할 텐데... 그 자식은 이미 미쳤으니까. 정부 관계자도 죽였는데, 공지민을 해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산속의 수색은 3일째로 접어들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온시환은 흙투성이가 된 바지와 신발, 피로에 절은 몸으로 움직였다. 그는
공지민은 고개를 한쪽으로 떨구며 피 묻은 입술 사이로 미소를 지었다.“연승혁, 너는 구은우의 발바닥만큼의 가치도 없는 존재야.”“닥쳐!”연승혁은 다시 한번 그녀의 뺨을 세게 때렸다.공지민의 양쪽 뺨은 이미 부어올라 흉측해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로 핏기 없는 입술 사이로 침을 뱉었더니, 침에서도 피 맛이 느껴졌다.연승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운전석으로 돌아가 차를 몰았다.공지민은 수갑에 묶인 채로 타오르는 뺨의 고통에도 무덤덤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대체 왜 연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거지?’그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통해 그녀는 상황을 알게 되었다.연승혁이 이미 제원에 잠깐 돌아가 연씨 가문을 조사하러 온 정부 관계자 몇 명을 살해한 뒤 모든 현금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소식이었다.지금 그는 해외로 도피하면 다시는 국내로 돌아올 수 없겠지만, 그만큼의 재산이면 해외에서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흘러나오는 뉴스를 들으며 비웃음을 터뜨렸다.“연씨 가문의 후계자가 이제 뉴스에 나오는 도망자가 됐네? 참 불쌍하게 됐네. 전국 경찰들이 널 찾고 있겠지. 네가 사형 선고를 받지 않으면 국민들이 실망할 거야.”연승혁은 아무 말 없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지만, 그녀의 조롱이 그의 눈빛을 더 차갑게 만들었다.공지민은 그의 반응이 없자 흥미를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결국 달리던 차는 어느 한적한 곳에 멈췄다. 그곳에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연승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짧은 대화를 나눈 연승혁은 공지민을 이들에게 넘기고 헬리콥터로 옮겼다.헬리콥터가 날아오르자, 연승혁은 안전벨트를 풀고 공지민을 출입문 쪽으로 밀쳤다.문이 열리며 찬바람과 함께 숨이 막힐 듯한 추위가 몰아쳤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이 그의 손안에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무서워?”연승혁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물었다.공지민은 입술을 꽉 다물고 비웃듯 웃었다.‘죽음 따윈 두렵지 않아.’그는 그녀를 다
공지민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불안함이었다. 이곳은 더 이상 그녀에게 따뜻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 않았다.머릿속에는 연정아가 총살당하던 순간과, 자신이 연승혁을 총으로 쏘던 순간이 계속 떠올랐다.‘구은우가 저세상에서 내가 이런 방식으로 복수한 걸 알면, 분명 나를 비웃겠지. 얼마나 비참하냐고.’공지민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웃음은 금세 눈물로 변하며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그녀는 계단 위에 앉아 멀리 펼쳐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오래전, 그녀는 구은우를 위해 작은 나무를 심었다.그 나무 곁에는 구은우가 그녀에게 건넸던 소중한 물건들이 함께 묻혀 있었다.그녀는 너무 아파서, 너무 두려워서, 오랜 세월 동안 그곳을 찾지 못했다.그 나무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한적한 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아름다운 꽃들로 둘러싸여 있어 언제나 고요하고 평화로웠다.오늘은 문득, 그곳을 찾아가 보고 싶었다.천천히 걸음을 옮겨 도착한 그곳은 예상치 못한 모습이었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던 그곳의 무덤은 누군가에 의해 파헤쳐져 있었다.그 안에는 썩은 야생개의 사체가 놓여 있었고, 피와 구더기가 들끓는 끔찍한 냄새가 퍼져 나왔다.공지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내가 잘못 본 거겠지.’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가까이 다가가 확인했다. 그러나 관 안의 것은 분명히 썩은 야생개의 사체였다.‘이 무덤은 나만 아는 곳인데... 그리고 이곳에 온 적도 거의 없는데,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그녀는 무덤 위에 놓인 작은 종이쪽지를 발견했다.돌로 눌려 있던 쪽지는 누군가가 그녀를 기다리며 일부러 남겨둔 것이 분명했다.쪽지를 집어 든 순간, 공지민의 온몸이 얼어붙었다.쪽지에 쓰인 필체는 그녀가 잘 아는 글씨, 바로 연승혁의 글씨였다.[지민아, 선물은 마음에 들어?]그녀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며, 손에 쥔 쪽지를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고, 피가 흘렀다.‘연승혁이... 죽지 않았다고?’공지민은
온시환은 공지민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통화 중이던 전화를 내팽개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병실에 도착했을 때, 공지민의 얼굴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고 온몸은 고열에 휩싸여 있었다.게다가 의사는 그녀의 체온이 이미 40도를 넘어섰다고 경고했다.“열이 더 내려가지 않으면 뇌에 손상이 갈 수도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하셔야 합니다.”그 말에 온시환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는 침대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손등에 키스를 반복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그의 손길조차 느끼지 못한 채 깊은 열병 속에 갇혀 있었다.온시환의 마음속은 분노와 절망으로 뒤엉켰다.‘가겠다고 해서 보내줬더니, 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죽어도 상관없다며 그렇게 태연하던 사람이 도대체 왜 이렇게 불쌍한 꼴을 하는 거냐고!’그녀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온시환을 불안하게 만들었다.의사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열을 내리려 했지만, 그녀의 상태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공지민은 계속해서 악몽에 시달리는 듯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온시환은 병상 곁에서 하루 종일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웃음을 유발하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체온은 여전히 내려갈 줄 몰랐다.결국 의사는 그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조언했다.그 말에 온시환은 이성을 잃고 병실의 물건을 모조리 집어 던졌다.“무슨 준비를 하라는 거예요! 그녀가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고작 열 때문인데 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거냐고요! 당장 최고로 실력 있는 의사를 불러와요!”분노를 쏟아낸 뒤, 그는 다시 공지민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속삭였다.“공지민, 제발 깨어나. 너는 죽으면 안 돼. 제발 일어나 줘.”의사들은 온시환의 정신 상태를 우려하며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반승제는 서주혁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왔다.그들이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이미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덥수룩한 수염에, 눈은 공
온시환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머릿속으로 계산을 굴렸다.‘원진은 연승혁과 꽤나 깊은 인연이 있나 보네. 지금 모두가 연씨 가문의 회사를 인수하려고 난리인데, 연승혁과 얽혀 있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가만히 있는 걸 보면 말이야.’온시환은 잠시 망설이다가 떠보는 듯 물었다.“설마 연승혁을 대신해 복수라도 하려는 건 아니겠지?”‘복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이상, 연승혁이 확실히 무슨 일을 당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었다.원진은 깊게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시며 어딘가로 멍한 시선을 보냈다.“그건 아니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사업을 시작한 순간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각오하지. 다만 궁금할 뿐이야. 그 녀석이 대체 어떻게 죽었는지 말이야. 연승혁은 항상 신중했던 사람이잖아. 수많은 사람이 그를 노렸지만, 단 한 번 기회를 잡는 것조차 어려웠어. 그런데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걸까?”온시환은 공지민의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간단히 답했다.“죽을 때가 돼서 죽은 거겠지...”원진은 그 말을 듣더니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어쨌든 축하해!”그 한마디를 남기고는 전화를 끊었다.온시환은 요즘 연씨 가문의 재산을 하나둘씩 인수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공지민 곁에 머물렀다.연정아의 판결은 이미 사형, 즉시 집행으로 확정되어 있었기에 집행일이 다가오자, 온시환은 공지민의 감정 상태를 염려하며 그녀를 웃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그러던 어느 날, 공지민이 뜻밖의 부탁을 했다.“연정아의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배웅할 방법이 없을까?”사형 집행은 외부인의 참관이 엄격히 금지되었고, 정부 차량을 따라야 하는 만큼 일반인은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하지만 공지민이 처음으로 부탁한 일이었기에 온시환은 바로 서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주혁은 폭넓은 인맥을 갖고 있었던 터라 단 10분 만에 공지민이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었다.공지민이 차를 타고 떠나
안정숙은 동시에 의문을 품었다. 공지민의 이야기는 마치 그녀의 경험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지민이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 도대체 누구의 이야기란 말이야?’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공지민이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렸다.“저도 그 소녀의 인생이 여기서 끝났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더 끔찍한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죠.”공지민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 소녀의 고등학교 동창이 그녀를 찾아왔거든요. 동창은 소녀가 사실 재벌가의 숨겨진 핏줄, 유산 상속이 가능한 재벌가 손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녀를 이용하려고 했던 거였죠.”공지민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소녀는 돈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동창이 제안한 조건을 받아들였죠. 동창은 그녀에게 4억 원을 건네며 제원으로 가자고 했어요. 그리고 한 집에 머물게 했죠. 소녀는 자신이 정말로 대가문의 숨겨진 핏줄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하지만 그녀는 그 가문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죠. 그녀의 목표는 단 하나였어요. 돈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 동생과 함께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었어요.”안정숙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쳐 지나갔다. 공지민은 고개를 살짝 들며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그녀의 동생이 나쁜 여자에게 속아 제원으로 끌려왔어요. 그리고 교통사고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죠. 차에 치인 채로 몇 킬로미터나 끌려가 시신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어요.”안정숙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은 조용히, 그러나 날카롭게 말을 계속했다.“소녀는 그 동창에게 이렇게 말했죠. 자신과 동생은 둘 다 피해자일 뿐이라고요. 그녀는 한때 동생을 미워했어요. 동생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진흙탕처럼 망가졌고 원하지 않았던 아이들까지 낳아야 했으며 평생을 작은 마을에 갇혀 살아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동생이 죽자, 그녀는 예상하지 못했던 깊은 슬픔을 느꼈어요.”공지민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안정숙을 바라보았다.“처음 떠오른 기억은 바로 자신이 힘들어 울고 있을 때, 부모님은 외면했지만 그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