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는 성혜인을 평탄한 바위에 내려 놓고 버섯을 씻으러 약수터를 찾아갔다.그가 떠나자마자 여자들의 따가운 시선이 성혜인을 향했다.“그렇게 업혀 올 거였으면 하이킹은 왜 온 거예요? 하이킹의 뜻을 알기나 해요? 지금 여기서 그쪽 출신이 가장 하찮은 거 알고 있죠? 그런 그쪽이 지 발로 걸어오는 게 아니라 남자 등에 업혀 온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성혜인은 지금 여유롭게 산 열매를 먹고 있다.오는 길에 반승제가 따서 준 열매인데 운이 좋은 사람만이 먹을 수 있는 열매라고 했다.한 손에 열매를 쥐고 성혜인은 시선을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렸다.“질투 나서 그러는 거 맞죠? 그렇게 셈 나면 이따가 승제 씨 오면 업어달라고 부탁해 보세요.”“너!”예상치 못한 대답에 여자는 말 문이 막히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때 마지막으로 캠핑 장소에 도착한 일행을 바라보고 입가에 차가운 웃음을 일었다.“몸이 편치 않은 설인아 씨도 저렇게 자기 발로 직접 걸어오는 데 누구는 참 주제 파악도 못하고 공주님 놀이하는 거 같지 않아요? 반승제 씨가 이제 그쪽 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세상 그 어느 남자가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여자를 원하겠어요. 여하튼 사람은 자기 팔자 대로 살아야 한다니깐.”도발하는 여자의 말에 성혜인은 바로 반박하려고 했지만 다른 이들도 거들기 시작했다.“그러게 말이에요. 공주님은 따로 있는 데 자기가 진짜 공주님인 줄 아나. 하도 반승제 씨가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면 지금처럼 이렇게 앉아서 우리하고 말할 기회 조차 없었을 거예요. 평생.”“여자는 뭐니 뭐니 해도 스스로 강해져야 하는 법이죠.”성혜인을 질투하고 있는 여자들은 그녀를 폄하하면서 자기를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포장하려고 했다.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세월과 함께 이 사회에도 여러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그 변화가 다양하다.전에는 단순한 여자가 대세였다면 지금은 독립적이고 스스로 일떠설 줄 아는 여자가 대세이다. 남자한테 기대지 않고 스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자 반승제는 바로 장갑을 벗어 던지고 한걸음에 달려왔다.성혜인이 그들에게 괴롭힘이라도 당했을까 봐 걱정 돼서 성큼성큼 걸어 왔다.“무슨 일이야?”구경하고 있던 이들은 순간 뭐라고 설명할 말이 없었다.이때 성혜인은 여유롭게 열매를 먹으며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승제 씨 안타깝다고 울던데요.”이에 반승제는 어리둥절하기만 했고 잇따라 눈에 가시라도 박힌 듯 인상을 찌푸렸다.“미친 거 아니야?”성혜인은 먹고 있던 열매를 하마터면 뿜어낼 뻔했다.그러더니 가까스로 열매를 삼키고 물까지 마시며 목을 축였다.예상치 못한 반승제의 반응에 설인아는 온몸이 굳어지면서 표정이 잔뜩 상기되었다.하지만 그 또한 잠시 바로 구구절절 반박하기 시작했다.“그게 아니라 성혜인 씨 말에 상처받아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난 거예요.”“뭐라고 그랬는데요?”“저더러 제3자라고 그랬어요.”“그럼, 아니란 말이에요?”반승제는 마냥 어이가 없었다. 더 이상 반응할 가치도 없다고 여기며 다시 장갑을 주섬주섬 끼고 성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좀 멀리 떨어져 있어. 너까지 전염돼서 저렇게 정신 줄 놓게 될까 봐 걱정 돼.”성혜인에게 또다시 열매를 뿜을 뻔한 위기가 찾아왔지만 이번에도 가까스로 참아냈다.모두가 보는 앞에서 웃음을 터뜨리지도 않았다.반승제의 말에 분위기는 한껏 어색해졌고 설인아는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설기웅은 한쪽에서 험악하게 굳은 얼굴로 반승제를 바라보고 있다.그러나 반승제는 그런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텐트를 다시 치기 시작했다.울고 있는 설인아를 바라보면서 속에서 열불이 났지만 아직은 반승제와 얼굴을 붉히고 싸우고 싶지 않았다.하여 전과 마찬가지로 설인아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제원으로 돌아가는 대로 내가 바로 찾아가서 얘기 할게. 울지 마.”설기웅과 엔디의 부축을 받으며 설인아는 자리 잡고 앉았다.그녀는 지금 붉어진 두 눈으로 성혜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다.성혜인이 덤덤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줄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다들 어느새 버섯 찌개에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성혜인은 일회용 그릇을 꺼내 찌개를 듬뿍 담아 반승제에게 건네주었다.“승제 씨, 어서 먹어봐요.”그는 받자마자 그대로 들이키며 찌개 맛을 보았는데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평소에 입맛이 까다롭기로 소문이 자자한 반승제도 칭찬을 아끼지 않을 만큼 맛이 일품인 찌개였다.뻣뻣한 도시락만 먹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 따뜻하고 시원한 찌개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임경헌과 온시환에게도 각자 한 그릇이 떠주고 다른 이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조금 전 성혜인을 비아냥거렸던 사람들은 지금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있으나 ‘본분’을 잃지 않고 옆에서 부채질하고 있다.“시환 씨, 잘못 드셨다가 중독될 수도 있어요.”하지만 온시환은 이미 그릇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깨끗하게 마셔 버렸다.“승제도 먹었는데 멀쩡하잖아요. 그리고 죽어도 쟤가 먼저 죽어요.”약수터와 산 버섯으로 끓인 찌개의 시원함에 피로가 사라지면서 네 사람은 지금 두 그릇째 먹고 있다. 배불리 먹고 나서도 냄비에는 절반 정도 남아 있었다.다른 이들은 남은 찌개를 당연히 자기들에게 나누어 주리라 생각하며 그릇까지 준비해 두었는데 성혜인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찌개를 버렸다.“저기요!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에요? 아직 맛도 보지 못한 우리도 있어요.”“버릴지언정 나누지 않겠다는 건가요? 지금 그 행위에 평생 부끄러워해야 할 거예요.”“이기적이고 독한 년!”성혜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들을 상대로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어쩌면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밥을 먹고 나서 성혜인은 다른 사람들과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반승제는 지금 온시환과 지도를 보며 내일 아침에 산 열매를 따러 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바로 이때 성혜인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그 낯선 번호로 메시지가 와 있었다.[혜인아, 오른쪽에 있는 작은 길을 따라 내려 오거라. 내려와서 앞으로 200미터 정도 걸
성혜인이 굴러떨어진 곳은 마침 벼랑 끝에 있는 한 자락이었다.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등불과 주위 온천의 불빛으로 하여 주위 지형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그리고 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마찬가지로 굴러떨어진 반태승이 있었는데 그 누구도 그를 도와주지 않고 있다.성혜인은 앞으로 다가가 도와주려고 했지만 가면을 쓴 한 남자가 칼을 휘두르며 반태승 쪽으로 가고 있었다.순간 성혜인은 목숨을 마다하고 미친 듯이 달려가 반태승의 몸을 덥히며 보호하려고 했으나 칼은 반태승의 팔에 떨어지고 말았다.지금껏 살아오면서 별의별 풍파를 모조리 겪은 반태승인지라 이 정도 아픔에 끄떡도 없었다.성혜인은 반태승의 팔에 꽂힌 칼을 꼭 잡았다. 어떻게든 살리려고.이때 주위의 불빛이 한껏 밝아졌는데 별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든 것이다.조금 전 그곳에서 독사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다들 혼비백산이 된 것이었다.위험한 곳을 피해 이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던 중 지금 이 광경을 보게 된 것이다.겨우 놀란 가슴을 가라앉힌 그들은 또다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하지만 성혜인의 옆에 서 있던 가면을 쓴 남자, 즉 반태승을 공격하던 남자는 성혜인의 앞으로 순식간에 다가와 수호자의 모습을 보였다.남자의 정체는 배현우이다.성혜인은 칼을 꼭 쥐고 있던 손을 풀었는데 이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다.뒤에 있던 또 다른 가면을 쓴 남자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입을 열었다.“어르신께서 구체적인 주소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만 이곳을 떠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말을 마치고 그는 성혜인을 바라보며 인사를 전했다.“고생 많으셨습니다.”성혜인은 눈동자가 심하게 일렁이며 누군가가 바짓가랑이를 당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할아버지 괜찮을 거야.’하지만 만약 두 사람의 대본대로 연기를 하지 않는다면 배현우가 반태승을 상대로 또다시 칼을 휘두를 것만 같았다. 절대 살아나지 못하게.성혜인은 지금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하다.이때 수호자 자태를 보이던 배현우는 갑자기 뒤돌아서서 성혜인을
임경헌은 또다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형, 다른 사람들이 성혜인 씨를 스파이라고 그러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만을 유지했다. 그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이튿날 아침, 의사가 찾아와서 그에게 말했다.“어르신께서 두 분께 하실 말씀이 있답니다.”반태승은 이미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반승제와 임경헌은 방호복을 입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병실로 들어온 반승제를 겨우 바라보며 반태승은 좀 만 더 가까이 오라고 눈짓을 보냈다.반승제는 앞으로 좀 더 다가가 병실 전체를 진동하는 소독수 냄새를 맡으며 반태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반태승은 한 글자씩 힘겹게 뱉어내고 있다. “승제야, 혜인이랑 그만 헤어져.”그 말에 반승제는 사형 선고를 받은 것만 같았다.그전까지만 해도 어젯밤 자기가 목격한 모든 것이 오해였을 수도 있다고 여겼다.성혜인이 절대 자기 할아버지한테 손을 댈 리가 없다며 그게 어떠한 이유로든 그럴 수 없다며 장담했었다.하지만 반태승이 이러한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어젯밤 성혜인이 칼을 휘두른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반태승은 그의 손을 놓고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며 입가에 쓴웃음이 일었다.“혜인이랑 헤어져…”반승제는 다시 그의 손을 꼭 잡았다.“승제야, 하늘에 맹세해…”반태승은 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온몸을 떨었다. 반승제에게 잡혀 있는 손마저도 부들부들 떨렸다.성혜인이랑 헤어지겠다고 하늘에 맹세하게끔 하고 싶었던 것이다.하지만 반승제는 단 한 글자도 뱉을 수 없었다.그저 묵묵히 반태승의 손을 꼭 잡은 채 평온함을 드러냈다.반태승은 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손등에 핏줄도 불끈 튀어나왔다.그동안 그는 10여 근이나 빠졌고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이러한 말을 하고 나서 힘이 들어 눈을 감았다.두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10분이었고 시간이 되자마자 간호사가 들어왔다.반승제와 임경헌은 병실에서 나와 입고 있던 방호복도 도로
성혜인은 지금 어딘가에 갇혀있다. 방 내부에 창문이 없고 지붕은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었으므로 하늘을 제외한 바깥의 풍경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성혜인은 자신이 있는 곳이 대략 어디쯤인지도 짐작할 수 없다.물론 언제부터 쓰러졌었는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지 못했다. 깨어나 보니 이곳이었으니까.성혜인은 반승제를 물었던 뱀이 떠올라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독성이 강한 뱀은 사람에게 치명적이다.반승제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 배현우는 또 무슨 목적이지?“문 열어! 문 열라고!”두 시간이 넘도록 문을 두드리며 소리 질렀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결국 지친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았고 곧이어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문이 열리고 배현우가 걸어들어왔다.방 안에 있는 것은 오직 벽에 걸린 시계뿐이었다. 시계는 밤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곧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한 성혜인이 배현우의 눈에 들어왔다. 성혜인은 바닥에 웅크려 앉아 팔로 무릎을 꼭 껴안고 있었다.배현우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성혜인의 턱을 받치고 좌우로 얼굴을 살펴보았다.성혜인이 혐오감을 느끼며 그의 손을 쳐냈다. 옛날의 부드럽고 다정하던 배현우 선배가 도대체 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건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배현우와 어르신의 관계도 궁금했다.배현우가 혼자서 계획했다고 하기에 어제의 일은 스케일이 컸다. 어르신은 그중 가장 주요한 일환일 것이다.어르신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르신은 독뱀이 들어있는 상자를 직접 건네준 사람이었다.그녀가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너무 많이 밀려오는 생각에 두통까지 느꼈다. 그 계획에서 어르신이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하셨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하필 그녀가 단검을 들고 있을 때 반승제가 나타났다. 그리고 우연히도 그녀의 상자에서 독뱀이 나왔다.문득 어제의 장면이 떠올랐다. 뱀에게 물린 순간 그녀를 바라보던 반승제의 충격받은 얼굴이.그 얼굴을 보는 성혜인은 고통스러웠다. 가슴이 찢어지게 아파졌다.지금 그녀는 자신의 턱을 어루만
배현우는 잔에 담긴 술을 다 마신 후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밤 12시, 잠에서 깬 그는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향하더니 이것저것 먹을 것을 만들어 성혜인이 갇혀있는 방으로 향했다.성혜인은 여전히 두 무릎을 안은 자세로 앉아있었다. 성혜인은 그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단번에 얼굴을 구겼다.그는 성혜인을 일으키고는 식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일단 뭐라도 좀 먹어.”부드러운 말투와 의자까지 당겨주는 매너 있는 모습에 성혜인이 수상쩍게 바라보았다. 심지어 미친 거 아니냐는 생각까지 들었다.반승우가 그녀를 바라보더니 씁쓸하게 눈을 피했다.“설명하자면 복잡해서 지금 내 상황을 알려줄 수가 없어. 그냥 내 몸에 성질 더러운 사람 하나가 살고 있다고 생각해.”성혜인은 대답이 없다.반승우가 위안해 주고 싶은 마음에 등을 토닥이려다가, 배현우의 일로 그럴 자격조차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레 손을 내려놓았다.“밖에 사람들이 감시하고 있어서 아직은 나갈 수 없어. 일단 밥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어. 나중에 도와줄 테니까. 난 내 몸속에 있는 이 사람이 누군지 제대로 알아볼게.” 성혜인은 그의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몸속에 있는 사람? 그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반승우가 성혜인의 앞에 와서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마주치며 진실하게 말했다.“절대 널 해치지 않을 거야. 물론 반승제도.”그의 말이 끝나기에 바쁘게 머릿속에 배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착한 척 위선 떨지 마. 만약 내가 네 두 번째 인격이라면 내가 형성된 이유는 네가 지금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야. 네 동생이 네가 가져야 할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네가 사랑하는 여자까지 가졌으니까.”그러나 반승우는 들려오는 소리에 아랑곳 하지 않고 성혜인을 바라볼 뿐이었다.성혜인 역시 고개 숙여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순간에야 그녀는 배현우가 자신이 알던 다정한 선배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왜 이 모든 일에 휘말려 든 건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반승우가 몸을
배현우는 그토록 담담하게 그동안 겪은 일들을 알려주고 있었다.“할아버지께서 그렇게 자랑스러워하고 아끼던 손자는 짐승처럼 실험대에 누워있었어요. 그 사람들의 눈에 저는 그저 해부당할 토끼 한 마리 정도로 보였겠죠. 이 모든 게 그때 할아버지께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동의해서 생긴 일이에요.”“이러고 보면 승제는 얼마나 운이 좋은 아이예요? 지금 승제는 가문의 후계자인 동시에 할아버지께서 애지중지하시는 가문의 보물단지가 되었죠. 오직 저만이 가장 최전선에서 이 모든 걸 감당해 내고 있어요. 제가 만약 형이 아니었다면 승제를 보호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요?”몸도 좋지 않은 반태승이 어떻게 이러한 말들을 멀쩡하게 들을 수 있겠는가.그토록 훌륭하고 사랑받던 아이가 차가운 실험대에서 실험당했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피를 토하며 고통을 호소했다.젊었을 적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그였지만, 나이가 들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가족의 소중함이었다.반태승이 가장 아끼는 두 손자가 바로 반승제와 반승우다.이 몇 년간 반승우가 죽었다고 확신한 이후 그는 반씨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반승제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둔 지금, 아끼던 손자가 끌려가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냈을까. 사람답지 못한 대우를 받으면서 얼마나 수치스럽고 슬펐을까. 이 모든 건 절대 반승우 혼자서 감당할 일이 아니었다.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온 온순한 부잣집 도련님이 어쩌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되었을까.배현우는 태연한 얼굴로 할아버지께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반태승은 충격으로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졌고 깨어났을 때는 몸무게마저 줄어있었다.이런 상황들을 지켜보면서도 반승우는 배현우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반승우는 최근 자신의 무능함을 점점 더 느끼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배현우의 힘은 점점 더 강해졌고 반승우는 몸의 통제권을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배현우는 할아버지의 손자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이용하고 협박하여
공지민은 섬에서 한 달을 푹 쉬었고 그 사이 연승혁의 상처도 조금씩 나아졌다.그녀는 텔레비전에서 염정아의 판결 결과를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염정아는 카메라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분명히 이는 그녀가 선택한 결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운명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으니까.판결 결과를 본 날 공지민은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주변의 바람이 매우 거셌다. 그녀는 자신이 흘리는 눈물이 악어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염정아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칼을 쥐여준 것처럼 느껴졌다.공지민은 입을 틀어막으며 울음소리가 흘러나오지 않게 참았으며 고통에 젖어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고 연승혁이 다가왔다.“지민아, 오늘 밤에 해산물 바비큐 할 건데 저번에 먹었던 킹크랩 또 먹을래? 이따가 나랑 시장에 가서 사 오자.”연승혁은 공지민 앞에 서서 그녀의 붉어진 눈을 보더니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울었어?”최근 며칠 동안 연승혁은 매우 부드러워졌고 이전의 그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의 친구들이 여기 있었다면 아마 그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바람이 너무 세서 눈에 모래가 들어갔어요.”연승혁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얼굴을 받쳐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혹시 뉴스 때문에 그래? 봤었어? 사실 무기징역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법정 쪽에 말대로라면 법정에서 자기가 직접 자백하며 죽는 걸 원했대. 아무도 살릴 수 없었어. 지민아,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말고 오늘 밤에 뭐 먹을지 생각해 보자.” 공지민의 눈빛에는 조롱이 가득했다. 오늘 밤 뭐 먹을지가 한 생명보다 중요하다고? 마음속에서 조롱이 커질수록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감동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의 목을 감싸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연승혁의 눈빛이 깊어지고 손은 그녀의 허리에 닿아 한껏 힘을 주었다. 공지민은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연승혁은 웃음을 터뜨렸고
온시환은 일어나서 집을 나와 헬기를 타고 염정아의 집에 가기로 했다. 그녀의 집에 아이들이 다섯 명이나 있었으니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옆에는 두 사람이 따라왔고 모두 그의 사람들이었다. 염정아의 집을 알아낸 후 그는 서둘러 그곳으로 갔다.아래층 슈퍼마켓 사장님은 그들을 보고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염정아에게 부탁받고 왔다는 걸 듣고 몇 마디 더 묻고 나서야 방 열쇠를 건넸다. 온시환은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문에는 작은 광고들이 잔뜩 붙어 있었고 집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그렇게 크지도 않아 보였다. 그는 열쇠를 꽂고 들어갔을 때 방 안에 있던 몇 명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 일부는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었고 일부는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었다.온시환은 입을 열려고 하다가 이 아이들이 아마 죽음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아이만이 어느 정도 어른스러워 보였다. “아저씨, 엄마 아빠가 우리 보러 오라고 하신 건가요? 우리는 언제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어요?”온시환은 웃어보려 했지만 어떻게 해도 웃어지지 않았다. 염정아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고 곧 처형될 예정이다. 그는 정말 이 아이들을 모두 복지관에 보내야 할까? 그는 잠깐 망설였다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아이들 챙겨. 제원으로 간다.”만약 아이들을 이곳 복지관에 두면 이곳은 너무 멀어서 아이들이 괴롭힘을 당해도 알지 못할 수 있다. 차라리 제원 복지관에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온시환은 이 아이들을 직접 돌볼 고민도 했었지만 그들을 보면 염정아의 인생이 떠올랐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고 그걸 떠올리면 마음이 불편했다.그는 제원의 복지관에 기부할 수 있었고 매주 사람을 보내 아이들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이 안정적으로 자라도록 챙기고 학교에 보내어 나중에 직장을 찾아서 스스로 먹고살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그는 늘 자신이 쓴 시나리오가 가장 막장 같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잔을 비우고 또 비웠다. 문득 공지민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속의 쓰라림도 점점 더 커졌다. 그때 VIP룸의 문이 열리고 반승제는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가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이러는 거야? 아니면 우리 다 같이 시간 내서 놀러라도 가자. 마침 혜인이도 요즘 놀러 가고 싶어 하던데.” 한때 온시환은 노는 걸 가장 즐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갈 생각만으로도 힘이 빠졌다. 그는 멍하니 손에 든 술잔을 바라보다가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그때 반승제가 물었던 적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그 여자가 나를 사랑하게 될까?’ 그때 그는 우습게 느껴졌다. 반승제처럼 완벽한 남자가 여자의 사랑이 부족할 리가 있나? 세상에 여자는 넘쳐나는데 이 여자가 아니면 다른 여자를 찾으면 될 일 아닌가.하지만 세상일은 돌고 도는 법이라더니 그도 결국 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하물며 그 사람은 그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를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른 남자의 감정을 갖고 장난치려 들었다. 그날 경찰서 앞에서 연승혁을 봤을 때 온시환은 공지민의 대략적인 계획을 알 것 같았다. 그때 연승혁이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은 분명히 순수하지 않았고 연승혁도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빠졌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온시환은 질투가 아니라 씁쓸함을 느꼈다. ‘연승혁 너도 참. 평생을 거만하게 살아온 네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가 오히려 네 목숨을 노리다니.” 온시환은 술을 또 한 모금 마시며 자신과 연승혁 중 누가 더 불행한지 가늠할 수 없었다. 옆에 앉아 있던 서주혁은 손을 천천히 내밀어 그가 마시려던 술을 가로챘다. “그만 마셔. 위 출혈 나서 병원에 실려서 가고 싶어?” 온시환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
연승혁의 상처가 조금 나아졌을 때 공지민은 그를 데리고 해변을 거닐었다. 마치 그들이 처음 섬에 왔을 때처럼. 연승혁은 체력이 좋아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연인처럼 보였다. 이 섬에 와서 부상을 당한 그날을 제외하고 그는 매일 자신과 공지민이 연인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진실이 무엇인지. 그것은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다. 그날 두 사람이 다시 여기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을 때 연승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지민아, 여기서 돌아가면 나랑 함께할래?” 공지민은 잠시 의아해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우리가 이미 함께 있는 게 아니에요? 전에 우리가 미혼 부부였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긴 한데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네가 나를 선택한다면 그 문제들은 내가 모두 해결할 거야.” 김경자 쪽에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가 한 일이 기존의 규범을 어기는 일이었지만 반대하는 이들을 모두 없애 버리면 그만이었다. 예전처럼 말이다. 어차피 김경자도 그가 하는 방식에는 이미 익숙해졌을 터였다. 그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짓더니 그녀를 품에 안았다. “너만 원하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공지민은 속눈썹을 내렸다. 머릿속에는 연승혁과의 일보다는 염정아가 떠올랐다. ‘염정아가 원아정을 죽인 사건이 그렇게 커졌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온시환은 염정아를 도왔을까?’ 그녀는 심지어 이런 생각도 했다.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온시환은 슬퍼할까?’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예전부터 살고 싶은 의욕이 없었다. 그래서 제원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반드시 방법을 찾아 연승혁이 자신과 함께 여기 남아있게 할 것이다. 마치 그때 구은우가 영원히 바닷가에 남았던 것처럼. 제원 쪽에서 온시환은 더 이상 공지민과 연락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그가 들은 바에 따르면 공지민은 이미 연승혁과 함께 그 섬으로 갔고 그 섬에는 그가 배치해
공지민이 눈을 떴을 때 천장이 보였는데 연승혁이 말한 대로 안전해진 것 같았다.그녀는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연승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지민은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밖에 서 있던 연승혁의 부하들은 그녀가 나오는 걸 보고 격정스런 눈빛을 지었다. “공지민 씨, 괜찮으신가요?”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오빠는요?”“형님은 아직 의식이 없으십니다.” “오빠 보러 가고 싶어요.”그때 그녀는 일부러 미친 척하며 그를 몇 번 밀쳤고 기억에 의하면 그를 불더미 속에 밀어 넣었다. 그의 등은 아마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하지만 연승혁은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안고 탈출할 수 있었으며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잘 보호했다.공지민은 감동하기보다는 오히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원래는 그와 함께 그곳에서 같이 죽을 생각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무사히 살아남았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연승혁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연승혁은 병상에 누워 있었고 의사가 그의 상처를 살펴보고 있었다.섬의 의료 수준은 제원에 미치지 못했다. 연승혁은 등 부상으로 인해 이미 이틀째 의식을 찾지 못했고 의사는 감염을 우려하며 그의 곁을 이틀 동안 지키고 있었다. 공지민의 눈빛에 조롱의 기색이 스쳤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왜 이 사람은 타 죽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곧 눈가가 붉어진 채 천천히 병상 옆에 앉았다.“오빠는 괜찮아졌나요?”의사는 그녀를 보며 공손하게 답했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이제 깨어나기만 기다리면 됩니다.”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승혁의 손을 잡았고 그대로 병상 옆에 앉아 떠나지 않았다.의사는 곧 방을 떠났고 방 안에는 연승혁과 공지민 두 사람만 남았다.공지민은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이 방에는 카메라가 없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 베개를 가져다 이 남자를 질식시켜 죽일 생각도 했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그녀가 그렇게 하려던 찰나
남자는 이미 죽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연승혁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옆에 있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옆에 있던 부하들에게 짧게 말했다. “정리해. 난 먼저 간다.” 호텔 쪽에는 이미 그의 부하들을 배치해 두었으니 원래라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방금 그 남자의 말이 자꾸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직접 돌아가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승혁은 자신이 공지민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이걸 단순한 게임으로만 여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만약 공지민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원래는 30분은 걸려야 할 거리였지만 그는 10여 분 만에 도착했다. 그가 머물던 호텔은 이미 짙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고 서둘러 앞으로 나가 자신의 부하를 붙잡고 물었다. “공지민 어디 있어!” “형님, 공지민 씨는 아직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방 안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연승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바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불길은 이미 너무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고 섬의 소방은 아직 빠르지 않아 불은 이미 1층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번져 있었다. 지금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연승혁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밖에서 소식을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어쩌면 공지민이 운 좋게 스스로 탈출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이성을 차릴 수 없었다. 곧바로 옆에 있던 사람들을 밀쳐내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자신이 자던 방으로 들어갔다. “공지민! 공지민!” 그는 큰 소리로 외쳤고 곧 방 한구석에서 공지민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짙은 연기에 눈을 뜰 수 없었던 연승혁은 최대한 몸을 낮추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공지민은 방구석에 웅
연승혁은 즉시 공지민을 바라보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넌 이 방에 가만히 있어. 내가 가서 그 사람을 처리하고 나서 나랑 같이 제국으로 돌아가자.”공지민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오빠가 위험하진 않겠죠?”“걱정하지 마. 금방 돌아올 테니까 한잠 푹 자고 있어.”연승혁이 묵고 있는 호텔은 이 섬에서 가장 큰 호텔로 매우 호화로운 데다가 그의 부하들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공지민은 안전했다.공지민은 서서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연승혁은 겨우 몇 걸음을 걸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매우 불안했고 심지어 공지민이 그와 함께 움직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건 결코 안전하지 않았고 그 사람이 혹시나 손에 총이 있다면 공지민은 위험할 수 있었다.그는 신이 아니었고 공지민을 100%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약간의 과실로 그녀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는 감히 모험할 수 없었고 그녀를 호텔에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연승혁은 차에 올라탔고 차는 30분 동안 달리다가 암초가 있는 곳에 멈췄다.근처의 암초는 크고 새까맣기 때문에 숨어 있기에 좋은 장소였다.연승혁은 옆에 있는 부하한테 물었다.“여기에 있는 게 확실해?”“네. 확실해요. 저희 쪽 사람들이 지금 수색하고 있어요. 늦어도 30분이면 결과가 나올 거예요.”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소매를 입고 있었는데 평소의 옷차림과는 전혀 달랐고 휴가를 온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양측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연승혁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이제 그 사람은 도망칠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하들은 온몸이 새까만 남자를 붙들고 걸어왔다.어쩐지 이 남자가 그렇게 오랫동안 숨어 있더라니 그의 몸에는 검은 물감이 칠해져 있었고 마치 암초와 융합된 것처럼 보였으며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연승혁은 담배에 불을 붙였고 밤바다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그는 심호흡한 뒤 그 남자
연승혁은 한동안 그녀와 꽁냥꽁냥하다가 해변의 경치를 구경하러 가자고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공지민은 바다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구은우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후 그녀는 평생 악몽 속에서 살았다.그녀는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며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리기 시작했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연승혁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모래 위를 걸었다.“지민아, 어때? 여기 달이 특별히 예쁜 것 같지 않아?”공지민은 얼굴에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뻐요. 이렇게 예쁜 달은 처음 봐요.”연승혁의 입꼬리는 올라갔고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말없이 서 있었다.그는 정말로 여기의 달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여자와 함께 경치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뭔가 더 특별했고 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공지민은 내내 연승혁한테 맞춰줬고 그가 바닷물을 만지고 싶다고 해서 그녀도 따라나섰다.바닷물에 발을 담그면서 연승혁이 물었다.“이런 해변을 보고 있으면 뭔가 떠오르는 게 있어?”공지민의 눈에는 의문으로 가득 찼고 그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연승혁은 구은우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다. 그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공지민은 그때 구은우를 매우 사랑했고 그들이 서로를 가장 열정적으로 사랑할 때 구은우가 사망했는데 그녀가 그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이상우가 최면술을 사용했음에 불구하고 연승혁은 그녀가 갑자기 기억해 낼까 봐서 걱정이었다.하지만 공지민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연승혁은 안도감을 느꼈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기억 안 나면 됐어. 손 줘봐. 우리 여기 좀 둘러보다가 돌아가자.”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오빠가 잡으려는 그 사람은요?” “아마 일주일 안에 잡힐 거야. 이 섬이 제국만큼 크지는 않지만 숨을 수 있는 동굴이 많아. 그 사람이 이곳에 들어온 후 바로 숨어버렸어. 그래서 내 부하들이 그를 찾아내려면 구석구석을 돌아다녀야 해.”그들이 며
공지민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저 연승혁한테 기대어 있기만 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누군가가 그녀를 들어 올려 따뜻한 침대에 눕혔다.이곳은 작은 섬으로 보였고 원주민들도 꽤 많아서 야시장은 매우 북적거렸다.공지민은 안겨서 이동하는 동안 많은 노점상들의 외침 소리를 들었다.또 30분이 지났을 때 음식의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연승혁은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왜 이렇게 많이 자는 거야? 너 하루 종일 잠만 잤어. 얼른 일어나서 뭐라도 좀 먹어. 이따가 야시장 구경하러 가보자.”“사람 잡으러 왔다면서 야시장을 구경할 기분은 나요?”“그 사람이 지금 이 원주민들 사이에 있어. 멀리 도망가지 못할 거야. 이곳의 출입구는 이미 부하들이 지키고 있어서 그 사람이 함정에 빠뜨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돼.”공지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기울여 그의 뺨에 뽀뽀했다.“역시 오빠는 대단해요.” 연승혁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그는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듯했다.“네 약혼자가 될 수 있는 걸 봐서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그러고 보니 네가 보는 눈이 있네.”“그럼요. 내가 안목이 높긴 하죠.” 그녀의 말을 들은 연승혁은 기분이 더 좋아졌고 그녀를 품에 껴안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야시장에서 파는 것들인데 먹고 싶은 게 있나 봐봐.”연승혁은 많은 음식을 사 왔고 그녀는 확실히 배가 고파서 그의 품에 안겨 마음껏 먹기 시작했다.연승혁은 여자가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전부다 네 거니까 천천히 먹어.” “오빠가 뺏어 먹을까 봐 그러죠.”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는 연승혁의 눈이 깊어졌다.공지민은 눈치채지 못한 듯 모든 음식을 다 먹고 나서 곧장 침대에서 일어났다.“야시장 구경하러 간다면서요? 얼른 가요. 나도 너무 구경하고 싶고 이곳의 풍습이 궁금해요. 여기 국내는 아니겠죠?”연승혁은 그녀가 어린아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