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디짧은 한마디는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다.화들짝 놀란 성혜인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누구지? 왜 이 시간에 이런 장난을 하는 거지?’[잠옷 예쁘네.]잇따라 오는 메시지에 성혜인은 파르르 떨리고 말았다.감시 카메라로 가득했던 전에 그 방이 떠오르면서 다시금 심장이 철렁이고 역겨웠다.성혜인은 침대에서 바로 내려와 불을 끄고 사방을 훑어보았다.하지만 감시 카메라 따위를 숨길 만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이윽고 그녀는 창문 앞으로 다가갔는데 커튼을 치려는 순간 적막함을 깨는 알림 소리가 다시 무섭게 들려왔다.[여기저기 찾아다니는 네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알아? 지난번에 내가 너무 심했었지? 우리 혜인이 그 뒤로 피임약은 먹었나 모르겠네.]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바로 배현우이다.커튼을 손에 꼭 쥐고 있던 성혜인은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손에 땀이 흥건해졌다.주저 없이 커튼을 치고 밖에서 방안을 들여다볼 수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침대로 돌아와 앉았다. 벌벌 떨면서.그 뒤로 메시지는 더 이상 오지 않았지만 성혜인은 내내 안절부절못했다.모든 걸 확인하고도 불안한지 그녀는 화장실로 가서 다시 한번 자세히 훑어보았다.그 어느 구석에도 그의 흔적이 없다는 것을 여러 번 체크하고 나서야 침대로 돌아와 다시 누울 수 있었다.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문을 두드렸고 노크 소리에 성혜인은 얼어붙고 말았다.긴장감에 피가 바짝 마르는 것만 같았다. 가까스로 문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인 채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다.하지만 칠흑 같은 어둠만 덩그러니 남은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누군가가 일부러 막아 놓은 것이 분명한 듯싶다.성혜인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 같은 시각 반승제는 홀로 침대에 덩그러니 누운 채 무척이나 괴로워하고 있다.‘왜 이렇게 힘들고 아프지? 너무 괴로워...’반승제는 그가 마신 술에 이름 모를 약물이 여러 가지나 들어간 사실을 모르고 있다.설인아의 손을 거친 약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넣은
반승제의 소리가 들려오자 성혜인은 두 눈을 반짝였다.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것처럼.그러나 배현우의 입에서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는 몸을 천천히 숙이며 코끝이 대일 정도로 성혜인과 얼굴을 마주했다.다가오는 배현우의 모습에 성혜인은 순간 속이 울렁거려 옆으로 피했다.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은 심정이다.이때 배현우는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너 나랑 그런 일이 있었잖아. 그 모든 걸 알고 있는 반승제는 과연 예전처럼 널 대할 수 있을까? 너랑 잠자리할 때마다 우리가 떠오르지 않겠어? 우리도 그렇게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는지 아니면 더 뜨겁게 사랑했는지 속으로 비교해 보지 않을 것 같아? 솔직히 말했다고 해서 걔가 질투하지 않을 것 같아? 아니, 걔 엄청 질투하던데. 오죽했으면 온 세상을 뒤져가면서 날 찾으려고 했겠어. 걔가 날 미친 듯이 찾는 바람에 내가 한동안 숨어 있었잖아. 그것도 꽤 처량하게. 성혜인, 너 보통 여자가 아니더라.”성혜인은 반승제가 배현우를 몰래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찾지 말라고 반승제에게 신신당부를 했으니 당연히 찾지 않을 줄 알았다.하지만 실은 속으로 엄청 신경 쓰였던 것이고 괜찮은 척 연기를 했었던 것이다.배현우는 성혜인의 손을 잡고 억지로 자기와 눈이 마주치게끔 했다.그러고는 성혜인을 바라보며 한참을 웃더니 그제야 풀어주었다.성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방안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밖에 있는 반승제가 다시 애타게 그녀를 불렀다.“혜인아? 자?”그의 소리가 들려오는 동시에 배현우는 창문으로 다가가 훌쩍 뛰어내렸다.이 모든 것이 벌어지기 전에 성혜인은 방 안을 살피면서 창문으로 간 적이 있다. 단번에 뛰어 내리기에는 꽤 높은 높이인데.성혜인은 시선을 내리깔며 거의 벗겨질 듯한 잠옷을 바라보았다.밖에서 계속 반승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새 잠옷을 꺼내 입고 난 뒤 문을 열어주었다.문이 열리는 순간 반승제의 코끝
반승제는 우습기만 했다. 그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설기웅을 쳐다보았다.설인아는 자기로 인해 두 사람이 행여나 싸우기라도 할까 봐 잔뜩 억울한 모습으로 설기웅을 말렸다.“나 괜찮아. 승제 씨가 날 싫어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내가 너무 주제넘게 말을 많이 한 거야.”도도한 설인아가 반승제를 위해 자태를 한껏 낮추는 걸 보면서 어떤 이들은 그녀가 안타깝기도 했다. 그녀에게 너무 불공평하다면서.하지만 반승제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감히 선뜻 나서서 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설기웅은 천천히 반승제를 향해 다가갔는데 두 사람은 10여 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다.한 치의 오차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신체 조건을 가진 두 남자가 대치하고 있으니 곧 폭풍 전야가 올 것만 같았다.“반 대표님, 하이킹 끝나고 제원으로 돌아가서 얘기 좀 합시다.”두 가문의 혼인에 대해 제대로 얘기할 자리도 인제 슬슬 마련해야 한다.하지만 반승제는 그를 무시한 채 빠른 걸음으로 성혜인 옆에 다가갔다. 얘기하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서.이에 설기웅은 계속 따져 들지 않았다. 어차피 순순히 자기 프레임에 맞게 움직이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이때 설인아는 걱정스러워하며 설기웅의 팔짱을 껴안았다.“오빠, 미안해…”설기웅 앞에만 서면 설인아는 늘 지금처럼 착하기만 했다. 일단 설기웅이 화가 났다 싶으면 재빠르게 눈치채고 사과부터 한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하여 설기웅은 단 한 번도 쓴소리를 한 적이 없고 설인아를 애지중지 소중히 여겨 온 것이다.“네가 왜 미안해하는데? 네 잘못 아니야. 그리고 우리 인아 원하는 대로 오빠가 꼭 만들어 줄게. 걱정하지 마.”설인아도 가방을 메고 있지 않다. 옆에 든든한 오빠 설기웅이 대신 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설기웅의 말에 그녀는 활짝 웃으며 팔을 더욱 꼭 끌어안고는 애교를 부렸다.“알았어. 우리 오빠만 믿고 있을게.”다들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는데 갑작스러운 에피소드로 분위기는 한껏 가
반승제는 성혜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혜인아, 얼른 업혀.”발목이 퉁퉁 부은 성혜인은 당분간 걷기조차 힘들 것으로 보인다.반승제는 매고 있던 가방을 임경헌과 온시환에게 건네주며 성혜인을 등에 업으려고 했다.다른 남자도 아니고 자기 남자 친구가 업어주겠다고 하는 데 업히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하여 성혜인은 망설임 없이 반승제의 등에 업혀 목을 꼭 감싸안았다.체격이 우람한 반승제는 가벼운 성혜인을 벌떡 업고 일어섰다.워낙 힘이 좋은 반승제 인지라 거뜬하게 업고 난 뒤 무게를 느끼는 여유까지 부렸다.“요즘 살 빠진 것 같은데?”툭 한 마디 던지고 그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채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설인아는 떠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힘없이 울고 있는 동생의 모습에 설기웅은 가슴 한쪽 곁이 미어졌다.“울지 마.”“오빠, 나 그렇게 별로야?”설기웅은 순간 뭐라고 위안해야 할지 몰랐다. ‘반승제!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 나쁜 X아!’“그런 거 아니야. 우리 인아가 뭐가 아쉬워서. 하이킹 끝나고 오빠가 따로 얘기할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설인아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내내 연기를 하고 있다.그 목적은 단 하나 설기웅을 완전한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함이다.행여나 그도 설우현처럼 여자 친구 있는 남자를 건드리지 말라며 그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자기를 말릴까 봐 걱정되었다.수단을 바꾼 설인아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사랑을 위해 존엄 따위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순정파’ 연기를 하고 있다.그러면 모든 이들의 동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자기편도 많아질 것이라 믿었다.과연 자기 계략대로 넘어온 설기웅의 행실을 느끼면서 그녀는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의 등에 업혀 가고 있는 성혜인을 바라보면서 설인아는 눈에 독을 품었다.오늘 밤에 엔디도 움직이게 되어 있으니 아무리 운 좋은 성혜인이라도 절대 피해 갈 수 없으리라 자신만만했다.성혜인은 자기를 쏘아
반승제는 성혜인을 평탄한 바위에 내려 놓고 버섯을 씻으러 약수터를 찾아갔다.그가 떠나자마자 여자들의 따가운 시선이 성혜인을 향했다.“그렇게 업혀 올 거였으면 하이킹은 왜 온 거예요? 하이킹의 뜻을 알기나 해요? 지금 여기서 그쪽 출신이 가장 하찮은 거 알고 있죠? 그런 그쪽이 지 발로 걸어오는 게 아니라 남자 등에 업혀 온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성혜인은 지금 여유롭게 산 열매를 먹고 있다.오는 길에 반승제가 따서 준 열매인데 운이 좋은 사람만이 먹을 수 있는 열매라고 했다.한 손에 열매를 쥐고 성혜인은 시선을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렸다.“질투 나서 그러는 거 맞죠? 그렇게 셈 나면 이따가 승제 씨 오면 업어달라고 부탁해 보세요.”“너!”예상치 못한 대답에 여자는 말 문이 막히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때 마지막으로 캠핑 장소에 도착한 일행을 바라보고 입가에 차가운 웃음을 일었다.“몸이 편치 않은 설인아 씨도 저렇게 자기 발로 직접 걸어오는 데 누구는 참 주제 파악도 못하고 공주님 놀이하는 거 같지 않아요? 반승제 씨가 이제 그쪽 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세상 그 어느 남자가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여자를 원하겠어요. 여하튼 사람은 자기 팔자 대로 살아야 한다니깐.”도발하는 여자의 말에 성혜인은 바로 반박하려고 했지만 다른 이들도 거들기 시작했다.“그러게 말이에요. 공주님은 따로 있는 데 자기가 진짜 공주님인 줄 아나. 하도 반승제 씨가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면 지금처럼 이렇게 앉아서 우리하고 말할 기회 조차 없었을 거예요. 평생.”“여자는 뭐니 뭐니 해도 스스로 강해져야 하는 법이죠.”성혜인을 질투하고 있는 여자들은 그녀를 폄하하면서 자기를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포장하려고 했다.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세월과 함께 이 사회에도 여러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그 변화가 다양하다.전에는 단순한 여자가 대세였다면 지금은 독립적이고 스스로 일떠설 줄 아는 여자가 대세이다. 남자한테 기대지 않고 스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자 반승제는 바로 장갑을 벗어 던지고 한걸음에 달려왔다.성혜인이 그들에게 괴롭힘이라도 당했을까 봐 걱정 돼서 성큼성큼 걸어 왔다.“무슨 일이야?”구경하고 있던 이들은 순간 뭐라고 설명할 말이 없었다.이때 성혜인은 여유롭게 열매를 먹으며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승제 씨 안타깝다고 울던데요.”이에 반승제는 어리둥절하기만 했고 잇따라 눈에 가시라도 박힌 듯 인상을 찌푸렸다.“미친 거 아니야?”성혜인은 먹고 있던 열매를 하마터면 뿜어낼 뻔했다.그러더니 가까스로 열매를 삼키고 물까지 마시며 목을 축였다.예상치 못한 반승제의 반응에 설인아는 온몸이 굳어지면서 표정이 잔뜩 상기되었다.하지만 그 또한 잠시 바로 구구절절 반박하기 시작했다.“그게 아니라 성혜인 씨 말에 상처받아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난 거예요.”“뭐라고 그랬는데요?”“저더러 제3자라고 그랬어요.”“그럼, 아니란 말이에요?”반승제는 마냥 어이가 없었다. 더 이상 반응할 가치도 없다고 여기며 다시 장갑을 주섬주섬 끼고 성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좀 멀리 떨어져 있어. 너까지 전염돼서 저렇게 정신 줄 놓게 될까 봐 걱정 돼.”성혜인에게 또다시 열매를 뿜을 뻔한 위기가 찾아왔지만 이번에도 가까스로 참아냈다.모두가 보는 앞에서 웃음을 터뜨리지도 않았다.반승제의 말에 분위기는 한껏 어색해졌고 설인아는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설기웅은 한쪽에서 험악하게 굳은 얼굴로 반승제를 바라보고 있다.그러나 반승제는 그런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텐트를 다시 치기 시작했다.울고 있는 설인아를 바라보면서 속에서 열불이 났지만 아직은 반승제와 얼굴을 붉히고 싸우고 싶지 않았다.하여 전과 마찬가지로 설인아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제원으로 돌아가는 대로 내가 바로 찾아가서 얘기 할게. 울지 마.”설기웅과 엔디의 부축을 받으며 설인아는 자리 잡고 앉았다.그녀는 지금 붉어진 두 눈으로 성혜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다.성혜인이 덤덤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줄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다들 어느새 버섯 찌개에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성혜인은 일회용 그릇을 꺼내 찌개를 듬뿍 담아 반승제에게 건네주었다.“승제 씨, 어서 먹어봐요.”그는 받자마자 그대로 들이키며 찌개 맛을 보았는데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평소에 입맛이 까다롭기로 소문이 자자한 반승제도 칭찬을 아끼지 않을 만큼 맛이 일품인 찌개였다.뻣뻣한 도시락만 먹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 따뜻하고 시원한 찌개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임경헌과 온시환에게도 각자 한 그릇이 떠주고 다른 이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조금 전 성혜인을 비아냥거렸던 사람들은 지금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있으나 ‘본분’을 잃지 않고 옆에서 부채질하고 있다.“시환 씨, 잘못 드셨다가 중독될 수도 있어요.”하지만 온시환은 이미 그릇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깨끗하게 마셔 버렸다.“승제도 먹었는데 멀쩡하잖아요. 그리고 죽어도 쟤가 먼저 죽어요.”약수터와 산 버섯으로 끓인 찌개의 시원함에 피로가 사라지면서 네 사람은 지금 두 그릇째 먹고 있다. 배불리 먹고 나서도 냄비에는 절반 정도 남아 있었다.다른 이들은 남은 찌개를 당연히 자기들에게 나누어 주리라 생각하며 그릇까지 준비해 두었는데 성혜인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찌개를 버렸다.“저기요!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에요? 아직 맛도 보지 못한 우리도 있어요.”“버릴지언정 나누지 않겠다는 건가요? 지금 그 행위에 평생 부끄러워해야 할 거예요.”“이기적이고 독한 년!”성혜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들을 상대로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어쩌면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밥을 먹고 나서 성혜인은 다른 사람들과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반승제는 지금 온시환과 지도를 보며 내일 아침에 산 열매를 따러 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바로 이때 성혜인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그 낯선 번호로 메시지가 와 있었다.[혜인아, 오른쪽에 있는 작은 길을 따라 내려 오거라. 내려와서 앞으로 200미터 정도 걸
성혜인이 굴러떨어진 곳은 마침 벼랑 끝에 있는 한 자락이었다.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등불과 주위 온천의 불빛으로 하여 주위 지형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그리고 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마찬가지로 굴러떨어진 반태승이 있었는데 그 누구도 그를 도와주지 않고 있다.성혜인은 앞으로 다가가 도와주려고 했지만 가면을 쓴 한 남자가 칼을 휘두르며 반태승 쪽으로 가고 있었다.순간 성혜인은 목숨을 마다하고 미친 듯이 달려가 반태승의 몸을 덥히며 보호하려고 했으나 칼은 반태승의 팔에 떨어지고 말았다.지금껏 살아오면서 별의별 풍파를 모조리 겪은 반태승인지라 이 정도 아픔에 끄떡도 없었다.성혜인은 반태승의 팔에 꽂힌 칼을 꼭 잡았다. 어떻게든 살리려고.이때 주위의 불빛이 한껏 밝아졌는데 별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든 것이다.조금 전 그곳에서 독사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다들 혼비백산이 된 것이었다.위험한 곳을 피해 이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던 중 지금 이 광경을 보게 된 것이다.겨우 놀란 가슴을 가라앉힌 그들은 또다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하지만 성혜인의 옆에 서 있던 가면을 쓴 남자, 즉 반태승을 공격하던 남자는 성혜인의 앞으로 순식간에 다가와 수호자의 모습을 보였다.남자의 정체는 배현우이다.성혜인은 칼을 꼭 쥐고 있던 손을 풀었는데 이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다.뒤에 있던 또 다른 가면을 쓴 남자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입을 열었다.“어르신께서 구체적인 주소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만 이곳을 떠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말을 마치고 그는 성혜인을 바라보며 인사를 전했다.“고생 많으셨습니다.”성혜인은 눈동자가 심하게 일렁이며 누군가가 바짓가랑이를 당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할아버지 괜찮을 거야.’하지만 만약 두 사람의 대본대로 연기를 하지 않는다면 배현우가 반태승을 상대로 또다시 칼을 휘두를 것만 같았다. 절대 살아나지 못하게.성혜인은 지금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하다.이때 수호자 자태를 보이던 배현우는 갑자기 뒤돌아서서 성혜인을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