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훈은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경매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가 어디 있는지 이준혁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냥 조금 더 에돌아가는 수고를 무릅쓰고 윤혜인과 더 있고 싶어서 그런 것이었다.하지만 눈치 없는 김성훈이 찬란하게 웃으며 말했다.“앞으로 너희들이랑 좀 작작 다녀야겠어. 아니면 나까지 윤혜인 씨한테 홀대당하겠는걸?”이준혁이 고개를 돌려 김성훈을 힐끔 쳐다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넌 솔로 기간이 너무 오래된 것 같아.”“...”김성훈은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 이런 팩폭을 들어야 하는 걸까? 솔로가 뭔 죄인가?이준혁이 이내 이렇게 덧붙였다.“너랑 잘 어울릴만한 돈 많은 여자 알고 있는데.”김성훈은 입이 귀에 걸릴 정도였다.“걱정하지 마. 나 아직 짱짱해. 소개팅해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우씨 가문 셋째 딸, 우희 말이야.”“이런!”김성훈이 괴성을 질렀다.“어떻게 우희를 소개해 줄 생각해? 그런 드센 여자를 소개해 준다는 건 나보고 죽으라는 거 아니야?”우희는 사랑에 죽고 사는 사랑에 미친 여자로 소문나 있었다. 우희가 전에 쫓아다니던 남자는 그 공세를 이기지 못해 이민을 선택했고 다시는 서울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제일 중요한 건 우희가 아주 어릴 때 김성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김성훈이 외국으로 가고 나서야 목표를 바꿨다.김성훈이 귀국한 지도 꽤 오래됐지만 우희는 그를 떠올리지 못한 듯싶었다. 우희가 쫓아다니던 그 시간은 마치 악몽처럼 생각날 때마다 김성훈을 괴롭게 했다.“나한테 우희를 소개해 주면 나도 윤혜인 씨한테 다른 도련님 소개해 줘야지. 요즘 서울 재벌 3세들이 그렇게 우수하다던데. 야망이 큰데 연하라 풋풋하니 데리고 놀기 딱 좋지...”이준혁이 차갑게 웃으며 대뜸 이렇게 불렀다.“우희야.”김성훈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이름 부른다고 내가 무서워할 줄 알고? 나 김성훈, 이 세상에 무서울 게 하나 없...”“준혁 오빠!상큼한 목소리가 김
“나는...”육경한이 말끝을 맺기도 전에 소원이 비아냥댔다.“내가 왜 죽지 않고 살았나 했더니 다 너 때문이네. 죽은 것도 억울한데 내 명예까지 실추되는 게 억울했나 봐.”육경한의 잘생겼지만 차가운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왜? 할 말 없어?”소원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할 말 없으면 비켜. 기억해. 이건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가 될 거야. 다음은 없어.”소원이 이렇게 말하더니 몸을 돌렸다. 하지만 육경한이 큰 손바닥으로 소원을 벽에 바짝 밀었다.육경한은 어두운 눈동자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마치 앞에 선 소원까지 활활 태우려는 것 같았다.그는 소원을 부서트리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맞다고 하면?”이런 말을 하는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5년간 힘든 시간을 보내며 차갑던 마음도 그녀라면 무서울 정도로 뜨거워지는 사람으로 변했다.아득하고 절망적인 나날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눈앞에 보이는 이 사람을, 살아서 움직이는 이 사람을 놓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시뻘겋게 충혈된 육경한의 눈은 피가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캐물었다.“소원아, 나 진짜 너 사랑해. 너 없으면 못 살 정도로 말이야. 이제 어떡할 거야?”이렇게 말한 육경한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소원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 표정에서 육경한은 역겨움과 매정함을 읽어냈다.정확하게 읽었다. 소원은 그런 육경한에게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그저 죽도록 싫을 뿐이다. 이 감정을 육경한이 정확하게 보고 알아채고 깨닫길 바랐다. 소원에게 육경한은 그저 쓰레기일 뿐이라는 걸 말이다.“육경한, 너 정말 역겹다.”하지만 이 말은 육경한에게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육경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소원아, 그런 말로는 나 못 밀어내.”이제 더는 5년 전에 뭐만 하면 발끈하던 육경한이 아니었다.“네가 싫어하는
육경한의 눈동자는 여전히 어두웠지만 표정은 여러 번 변했다.“무슨 말이야?”육경한이 보기 드물게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소원이 빨간 입술로 묘한 웃음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허허. 육경한. 뭐든 다 알고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넌 탐욕스럽고 가식적이고 악독한 여자에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린 것뿐이야. 내가 말한 사람 누군지 알겠어? 네가 오랫동안 좋다고 물고 빨았던 진아연, 그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영락없는 사기꾼이야.”순간 육경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쇼는 이제 시작이었다. 소원은 이 순간을 참으로 오래 기다려왔다.소원은 육경한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 어떤 표정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육경한, 너 출국하기 전에 내가 찾아갔었다고 했던 거 기억나? 너는 안 믿을지 모르지만 나 진짜 찾아갔었다?”“갔을 뿐만 아니라 60억을 준비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려고 했어. 하지만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지.”전에는 코웃음 치며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던 이 에피소드가 지금은 육경한을 무섭게 했다. 마치 귓가에 누군가 듣지 말라고, 더는 들으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만약 그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게 와르르 무너진다면 멍청했던 과거와 그 과거에 상처받은 소원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온몸의 피가 쑥 빠져나간 것처럼 손끝까지 하얘진 육경한의 차가운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온몸으로 범접할 수 없는 무서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소원아, 지나간 일은 이제 꺼내지 말자. 내 곁으로 돌아오면 내가 잘해줄게.”지나간 과거가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전에는 진상에 조금 더 가까워졌지만 지금은 그 진상을 알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었다.하지만 소원은 육경한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육경한의 표정이 어두워지면 질수록 소원은 끊임없이 쏟아냈다. 소원이 손수 만든 지옥에 뛰어드는 육경한의 표정이 미치게 궁금했기 때문이다.“안 믿는 거 알아. 근데 우연이라는 게 참 무섭더라. 사라졌던
귓가에 울려 퍼졌던 절규와 절망을 육경한은 못 들은 척 차갑게 흘려보내곤 했었다.소원은 매 순간 변하는 남자의 표정을 보며 5년 만에 처음으로 진정한 희열을 느꼈다. 다른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짓는 가식적인 미소랑은 다르게 말이다.“육경한, 내가 지금 말한 거 L 국에서 범인이 8년 전 자백한 내용만 봐도 알 수 있어요.”“아니... 볼 필요 없어...”육경한은 목구멍에 뭐가 걸린 듯 버겁게 이 말을 뱉어냈다.더 찾아볼 필요가 뭐가 있을까?사실 전에 진아연이 위태로울 때 육경한에게 죽을 때까지 모르고 싶었던 진실을 털어놓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하지만 육경한은 그 진실을 외면했고 자기를 기만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지금까지 잘 덮어놓았던 보호막을 소원이 억지로 찢은 셈이라 더는 가릴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어둡고 추악한 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육경한은 더는 자신을 속일 수가 없었다.“육경한.”소원이 느긋하게 육경한의 이름을 부르더니 날카롭게 웃었다.“그런데 어떻게 서로 갚은 걸로 해?”“그러기엔 네 죄가 너무 크지?”이 한마디가 마치 풀스윙으로 날린 귀싸대기처럼 육경한의 볼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그는 벙찐 표정으로 영혼이 쑥 빠진 듯 좀비와도 같았다.육경한은 오랜만에 다시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이거로는 부족했다.소원이 보고 싶은 건 육경한이 처절한 슬픔에 빠진 모습이 아니었다. 소원은 자신이 겪었던 뼈저린 고통과 살을 에는 듯한 상처, 그리고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절망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소원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매혹적인 말투로 말했다.“나는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 네 쇼를 봐 줄 시간이 없어. 안녕.”육경한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안녕이라는 소원의 말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했다.“소원아, 가지 마.”목구멍은 끓는 물이라도 부은 듯 불타올라 목소리가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소원이 빨간 입술로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거 알아? 우리
육경환은 마치 희망이라도 본 듯 모든 걸 포기할 각오로 소원의 손목을 꼭 잡았다.“소원아, 나 안 믿는 거 알아. 근데 나 정말 후회해. 네가 떠난 그날부터 뼈저리게 후회했어. 그때야 발견했지. 너를 원망하는 것보다 너를 사랑하는 게 더 많았다는 걸.”육경한은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 남은 핑계가 얼마 남지 않은 원망이었지만 진실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의 원망은 애초부터 모래성에 쌓아 올렸기에 진실의 공격을 받은 순간 그대로 와르르 무너졌다.하지만 소원은 더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사랑한다니, 육경환이 지금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우스웠다.그녀에게 육경환은 그녀의 명예를 짓밟고 그녀의 회사를 무너트리고 그녀의 가족을 핍박해 죽게 만든 사람일 뿐이다.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한 육경환이 매 순간 지옥이었으면 했다.그런데 지금 감히 ‘사랑’을 거론하다니. 소원은 육경환에게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묻고 싶었다.소원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원망을 꾹꾹 누른 채 덤덤하게 말했다.“대표님, 기회를 원한다고요? 뭐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육경한은 머리가 하얘졌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곧이어 소원이 전시 센터 대문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대표님, 저기 보여요? 저기는 전시 센터에서도 유동 인구가 제일 많은 곳이죠. 저기 가서 기회 줄 때까지 무릎 꿇고 있어요. 어때요?”육경한은 소원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향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는 전시 센터의 랜드 마크인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하여 중요한 회의나 경매, 그리고 기자회견에 참가하는 사람이라면 꼭 지나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육경한은 그냥 앞에 서 있기만 해도 뉴스에 날 정도인데 무릎을 꿇고 있는다면 더 대박일 것이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얼마나 큰 파문을 일으킬지 알 수 있었다.육경한의 표정을 살핀 소원의 입가에 조롱의 미소가 걸렸다.“대표님, 조금 전만 해도 후회한다고 그러더니, 이제 그 후회가 얼마나 싸고 우스운
참으로 큰 도약이 아닐 수 없었다.윤혜인이 노크하자 안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윤혜인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울로 누군지 확인한 이진영이 순간 경계하기 시작했다.“당신 누구야?”윤혜인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이진영 씨는 제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기자회견을 열어 나를 폭로하겠다는 거예요?”이진영이 넋을 잃더니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당신이 우리 남편을 꼬신 그 사람이에요?”윤혜인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이진영 씨, 입은 삐뚤어도 말은 똑바로 하라고 했어요. 제가 그쪽 남편에 의해 누명을 쓴 건 맞아요. 근데 남편분 아직 집에 들어가지 않은 거 보면 모르겠어요?”이진영은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남편이 안에 갇혀 있는데 전혀 관심하지 않고 누구의 감언이설을 들었는지 윤혜인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여론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굳이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사법 체계가 고작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의 영향은 받지 않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하지만 윤혜인은 이진영이 멍청한지 아닌지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냥 이 사건의 배후가 대가만 치르면 된다.감히 곽아름까지 들먹이다니, 윤혜인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줄 생각이었다.폭로를 좋아한다면 이번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의 대스타로 만들어주겠다고 다짐했다.사실 이진영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임세희가 이 기회에 여론의 힘을 빌려 남편도 살리고 사람들에게 피해자 이미지도 굳힐 수 있다고 알려줘서 그대로 한 것뿐이었다. 그렇게 일약 톱스타로 올라가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여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우리 남편 가정적이기로 소문난 사람이에요. 모함할 생각이라면 포기해요.”“그냥 우리 남편한테 빌붙어서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을 생각이었나 보죠?”“약을 탄 것도 모자라 검색어까지 내리고, 지금 이렇게 찾아와서 훈수까지 두는 거예요?”윤혜인의 눈동자는 경멸을 감추지 못했다. 윤혜인은 이진영의 머리로 어떻게 살벌한 정글
윤혜인이 이렇게 말한 것도 사실 이진영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이진영의 체면을 지켜준다고 그녀를 용서하는 건 아니었다.그녀가 팬을 시켜 곽아름이 다니는 유치원을 공격한 것만으로도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지시나 부추김을 받아서 한 일이라고 해도 한가지는 설명할 수 있었다.이진영은 원래부터 악한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공인으로서 팬들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그 힘을 빌려 악을 도모한다면 정말 동기가 불순하고 심보가 사악한 자가 틀림없었다.이진영이 코웃음 치며 조롱했다.“웃기지 마요. 내 체면을 왜 당신이 지켜줘요?”이진영의 눈에 윤혜인은 서울로 상경해 일거리를 찾으러 온 젊은 여자로밖에 안 보였다.젊고 예쁜 여자가 서울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몸을 팔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조건을 거론한단 말인가.이진영은 피해자 연기만 잘하면 돈과 명예를 다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한 이진영이 얄짤없이 말했다.“당신이 뭔데 이래요! 몸 파는 여자 주제에 자기 걱정이나 해요.”윤혜인이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렸다. 눈동자는 차갑기 그지없었다.이진영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다면 더 입씨름할 필요도 없었다. 이 사람의 민낯을 팬에게 드러내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윤혜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이진영 씨, 기자 회견에서 원하던 바를 이루길 바랄게요.”이 말을 뒤로 윤혜인은 이진영이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먼저 대기실에서 나왔다.윤혜인의 예쁜 날개뼈와 아름다운 몸매, 그리고 움직일 때마다 보이는 매혹적인 자태는 누가 봐도 있는 집에서 곱게 자란 아가씨 같았다. 이진영이 아무리 후천적으로 배운다 해도 배워낼 수 없는 뼈에 새겨진 기품이었다.순간 이진영은 걷잡을 수 없는 화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이내 음침한 눈빛으로 툴툴거렸다.“잘난 척은. 내가 조금 이따 내 팬들에게 호되게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이진영의 기자회견은 예정된 시간에 맞춰 시작되었
관중석에 앉은 팬들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진영아, 울지 마!”“진영아, 힘내!”“진영아, 너는 아무 잘못 없어! 사과 안 해도 돼!”아래 서 있는 기자들도 일부는 그들이 미리 손 써놓은 사람이었다. 질문지도 사전에 맞췄기에 질문지에 있는 문제만 질문했다.“이진영 씨, 남편의 외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이진영 씨, 내연녀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계신가요?”“...”이진영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먼저 제 남편은 유혹을 당한 거지 바람을 피운 건 아닙니다. 우리 사이에 끼어든 여자는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습니다. 질문 사항 있다면 지금 그 내연녀도 현장에 있으니 직접 물어보시는 게 좋겠네요.”이 말에 현장이 들끓기 시작했다. 누군데 이 정도로 나대는 건지 저마다 궁금해했다.윤혜인은 가만히 있었다. 뒤집어씌운 게 사실도 아니니 절대 먼저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이때 임세희가 침통한 표정으로 윤혜인을 힘껏 밀었다“혜인 씨, 또 이런 짓 하고 다니는 거예요? 했으면 반성의 기미라도 보여야지 현장까지 오는 건 뭐예요? 아내분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윤혜인에게로 쏠렸다. 몇몇 기자들은 기레기 정신을 발휘해 그쪽으로 뛰어가 임세희를 인터뷰하기 시작했다.임세희가 DS 디자인 작업실 이사인 걸 아는 사람도 있었기에 바로 임세희의 이름을 찍어 이렇게 물었다.“임 대표님, 이분도 혹시 대표님 친구인가요? 왜 ‘또’라는 단어가 붙었을까요? 전에도 그런 적이 있다는 말씀이세요?”임세희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으며 큰 비밀이라도 얘기했다는 듯 생쇼를 했다.“제 남자 친구까지 꼬셨다고 한 적은 없어요. 절대 함부로 추측하지 마요. 그런 일은 없었어요.”기자들은 눈치가 빠르기로 소문난 사람들이었기에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그럼 이 여자분이 남자 친구한테도 찝쩍거렸다는 겁니까?”“아니요. 아닙니다. 다 지나간 일이니 함부로 추측하지는 말아주세요. 안 그러면 윤혜인 씨를 뒤에서 보호해 주고 있는 사
원진우가 점점 다가오자 윤혜인은 마지막 기회를 잡고 숨겨둔 막대를 다시 한번 휘둘렀다.하지만 이번에는 실패했다. 이미 대비하고 있던 원진우가 맨손으로 막대를 가볍게 붙잡아 꽉 쥐었기 때문이다.윤혜인은 막대를 빼앗으려고 온 힘을 다했지만 소용없었다.그 순간, 원진우는 다른 손으로 윤혜인의 목을 단숨에 움켜쥐고 그녀를 다락방 유일한 창틀 가장자리로 밀어붙였다.목이 졸려 말을 할 수 없었던 윤혜인은 두 손으로 창틀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이 다락방은 지상에서 족히 10미터는 넘게 높았다. 여기서 떨어진다면 죽지 않아도 식물인간이 될 것이 분명했다.이 순간, 원진우의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그의 눈에 더 이상 딸이라는 개념은 없었다.처음에는 딸에게 보상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윤혜인이 윤아름을 데리고 떠난 것은 원진우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었다.누구든 그의 역린을 건드리는 자는 심지어 친자식이라도 용서받지 못한다.윤혜인이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자 원진우는 냉소를 띠며 말했다.“아직도 말 안 할 거냐?”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죽고 싶어 안달이 났군.”이 말과 함께 윤혜인의 몸 반쯤이 창밖으로 나갔다.“멈춰!”갑자기 아래에서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윤혜인은 몸이 거꾸로 매달려 있어 피가 거꾸로 흐르고 있었고 눈앞이 점점 어두워졌다.간신히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곽경천이 그곳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오빠가... 오빠가 드디어 왔어...’원진우가 서둘러 나왔던 탓에 데려온 네 명의 경호원은 이미 곽경천이 데려온 사람들에게 제압당한 상태였다.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본 원진우도 곽경천을 발견했다. 그러자 그는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오늘 무슨 날인가? 죽어야 할 사람들이 모두 모였군.”“이 미친놈! 내 여동생 당장 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곽경천이 외쳤다.원진우는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곽경천을 겨누며 말했다.“뭐? 날 죽
‘그래서 나한테 얌전히 기다리라고 한 거였어.’윤혜인은 창밖을 바라보며 푸른 섬에 눈길을 빼앗긴 윤아름을 돌아봤다.윤아름은 창밖의 풍경에 매료된 듯, 맑은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이윽고 윤혜인은 마음을 굳히고 부드럽게 말했다.“엄마.”윤아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윤혜인을 바라봤다.그러자 윤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게임 하나 해요...”원진우는 차 안에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운전하는 경호원은 고속으로 차를 몰며 윤혜인이 타고 도주한 검은 차량을 추적했다.그러던 와중 차량이 눈에 보이자 경호원은 차를 세우며 보고했다.“대표님, 저 앞에 있습니다.”원진우는 차에서 천천히 내려 차량 앞으로 다가갔다.차 안을 들여다봤지만 이미 텅 비어 있었다.그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말 들을 애가 아니지.”딱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 관절을 꺾더니 원진우는 생각에 잠겼다.‘찾으면 어떤 벌을 줘야 할까. 다리 힘줄과 손 힘줄을 끊을까, 아니면 독을 써서 목소리를 없앨까... 아니면 둘 다 한꺼번에 해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그는 특히 윤혜인이 윤아름을 데리고 도망치려 한 점에 분노했다.‘제 엄마를 유혹해 나를 떠나려 하다니...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어.’곧 원진우는 경호원들에게 지시했다.“주변을 샅샅이 수색해.”차량의 전력 시스템을 끊은 뒤부터 지금까지 겨우 15분이 지났다.때문에 그녀들이 멀리 도망쳤을 리는 없었다.잠시 후, 경호원이 돌아와 보고했다.“대표님, 앞쪽에 사람이 없는 교회 한 채를 발견했습니다.”주변에 흔적이 없는 걸 보니 교회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원진우는 교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가슴과 이마에 손가락을 대고 기도하듯 중얼거렸다.“주님, 제 죄를 용서하소서.”그 후 손짓으로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수색해.”건장한 경호원 네 명이 흩어져 교회 곳곳을 뒤졌다.그렇게 모든 곳을 수색한 후, 마지막으로 확인하지 못한 곳
게다가 원진우의 계획을 보니 해운성에서 그녀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계속 이동할 생각인 듯했다.아마 한곳에 머물지 않고 여러 군데를 거쳐 이동하겠다는 의도였으니 그의 행방을 찾기가 어려웠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윤혜인은 그제야 이해했다.그녀가 보낸 신호가 전송되었어도 곽경천 일행이 빠르게 도착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나라 하나를 건너야 하는 거리에서 아무리 빨리 와도 금방 닿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그녀는 차량에 내장된 스마트 시스템을 떠올리고 외국어로 시스템에 말을 걸어 보았다.“나 대신 신고 좀 해줘!”그러자 시스템의 인공지능이 대답했다.“현재 해운성 해안경비대로 연결 중입니다.”돌아오는 답변에 윤혜인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그녀는 대다수의 차량 시스템이 전화 통화는 불가능해도 긴급 신고는 가능할 것이라 짐작했다.‘해안경비대에 연락만 닿는다면 오빠가 도착할 때까지 안전하게 기다릴 수 있어. 아무리 원진우가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모든 나라에 그 세력이 미치게 할 수는 없을 거야.’윤혜인은 차를 멈추고 긴장된 마음으로 전화 연결을 기다렸다.삐빅 하는 두 번의 신호음 뒤에 전화가 연결되었다.통화 너머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상담원이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윤혜인은 다급히 말했다.“저와 제 어머니가 납치되었습니다.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범인이 저희를 추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상담원은 침착하게 물었다.“상대방이 누구인지, 그리고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세요.”윤혜인은 대답했다.“저희를 납치한 사람은 국제적으로 수배가 되어있습니다. 혐의도 한두 개가 아닐 겁니다.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르겠고 주변에 바다밖에 없어요. 내비게이션에서는 블루섬이라고 나옵니다.”윤혜인은 상대가 국제 수배범이라는 말을 일부러 꺼냈다. 경찰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였다.게다가 이번 원진우에 대한 폭로로 곽경천 일행이 그의 과거 행적을 어느 정도 파악했을 것이므로 국제 수배범이라는 표현이 적절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열렸다.윤혜인의 손에는 스마트 디스플레이 키가 들려있었는데 조금 전 원진우에게서 몰래 훔쳐 온 것이었다.그녀는 단 1초 만에 시동을 걸고 곧장 대문을 향해 내달렸다.대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지만 멈출 생각은 전혀 없는 듯 보였다. 그대로 부딪힐 각오인 듯 말이다.대문 앞에 서 있던 보안 요원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만약 차에 부딪혀 사람이 다치기라도 하면 책임을 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급히 원진우에게 상황을 보고했다.“선생님, 저기... 대문을 어떻게 할까요...”원진우는 차의 기세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멈출 기색이 전혀 없는 그 모습에, 겉보기에는 얌전해 보이는 윤혜인이 자신의 열정과 영리함을 꽤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결국 그는 짧게 고심한 후 단호히 말했다.“문 열어!”아무리 비싼 슈퍼카라 해도 이 속도로 대문을 들이받으면 운전자의 안전이 100%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었다.그리고 문을 열어주더라도 그녀가 도망칠 수는 없었다.슈퍼카가 대문에 닿기 직전, 대문이 위로 열렸다.순식간에 슈퍼카는 대문을 빠져나갔다.윤혜인은 눈 앞에 펼쳐진 넓은 도로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몇십 초를 기다린 끝에야 상황을 이해했다.“엄마, 우리 탈출했어요!”기쁨에 찬 외침이었다.윤아름은 아직도 조금 혼란스러운 상태였지만 딸의 말에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탈출’이라는 말은 지하실에 수십 년 동안 갇혀 있던 그녀에게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희망이었다.윤아름이 기뻐하며 창문을 두드리자 윤혜인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하지만 안전을 위해 반 정도만 내렸다.그 작은 틈으로도 윤아름은 크게 기뻐했다. 손가락을 밖으로 조금 내밀어 바람을 느끼며 냄새를 맡았다.자유로운 바람이 스치는 윤아름의 얼굴은 완전히 행복해 보였다.윤혜인은 엄마 윤아름의 이런 모습을 보며 모든 게 다 가치 있다고 느껴졌다.긴장으로 땀이 찼던 손바닥도 이제는 차갑게 식었고 조금 전 그녀는 원진우에게 조금의
그녀가 당한 모든 불행은 전부 이 남자 때문이었다.어머니의 사랑을 받아야 할 그녀는 이리저리 떠돌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원진우 씨, 지금 무슨 헛된 꿈을 꾸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쪽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떠날 거예요. 당신이 우리 엄마를 얼마나 오랫동안 감금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는지 절대 잊지 않았어요.”윤혜인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당신 같은 사람은 지옥에나 가야 해요!”그러자 원진우는 분노가 가득 찬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이렇게는 대화가 안 되겠군.”그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우리 세 식구에게는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까. 내가 얼마나 좋은 아버지인지 천천히 알게 될 거야.”윤혜인은 경계심을 품고 원진우를 응시했지만 그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그러나 곧 그 의도를 알게 되었다.원진우는 손짓으로 도우미를 불러 들어오게 한 후, 지시를 내렸다.“아가씨의 짐을 챙겨서 비행기에 실어라.”윤혜인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며 원진우는 느긋하게 설명했다.“우린 곧 떠날 거라서.”원진우가 윤아름과 자신을 데리고 떠나려 한다는 말에 윤혜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는 원진우가 매우 영리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수십 년 동안 윤아름을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던 걸 보면 그의 경계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이번에 끌려가면 아버지, 큰오빠, 아이들, 모든 가족과 친구들을 평생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난 안 가요!”윤혜인은 근처에 있던 의자를 집어 던지고 온 힘을 다해 문밖으로 뛰쳐나갔다.그러나 문에 도달하자마자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팔이 붙잡히고 말았다.곧 원진우는 넥타이로 그녀의 손을 묶은 뒤 그대로 어깨에 들쳐 업었다.시간이 촉박했다. 이미 이곳이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즉시 떠나야 했다.바깥에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떠나기만 하면 전처럼 윤아름과 윤혜인 모두 꽁꽁 아무도 모르게 숨
윤혜인이 갑자기 손을 들자 봉투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안에 들어있던 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윤혜인은 자료를 보고 싶은 생각보다는 하얀 나무젓가락을 들어 원진우의 목에 찔러넣고 싶었다. 두 사람은 신장 차이가 있었지만 원진우는 지금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이고 있어 윤혜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뾰족하게 자른 나무젓가락이 그대로 원진우의 목에 들어갔다. 그러자 피가 나무젓가락을 타고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하지만 떨어지는 피의 양에서 윤혜인은 글렀다는 걸 알아챘다. 동맥을 찌르지 못했으니 원진우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원진우는 고개를 들어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를 보더니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윤혜인을 바라봤다.“나 죽이고 싶어요?”원진우가 차분하게 물었다. 까만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고요했다. 윤혜인이 뒤로 물러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곧 사람들이 나와 엄마를 구하러 들이닥칠 거예요. 도망은 꿈도 꾸지 마요.;원진우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연락이 됐나 보네요.”윤혜인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윤혜인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원진우는 어떻게 된 일인지 충분히 알아챘을 것이다. 아니면 윤혜인도 이렇게 무모하게 나가기보다는 계속 위장하는 걸 선택했을 것이다.원진우는 목에 꽂혀있는 젓가락을 뽑지도 처리하지도 않은 채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제법인데? 역시 내 핏줄이라 그런가? 배짱이 커.”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간사하기로 소문난 원진우가 친자 감정을 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미 자기 핏줄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원진우는 윤혜인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모든 걸 알아차렸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나 속이려 했나 본데...”원진우가 허리를 굽혀 서류를 줍더니 윤혜인에게 건네줬다.“봐... 네 말이 맞아. 너 정말 내 딸이야.”“...”윤혜인은 원진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내 결과지에 적힌 숫자에 눈길이 갔다.99.99%.그럴
문이 삐걱 열리더니 원진우가 안으로 돌아왔다. 표정이 밝아진 윤아름을 보고 원진우의 표정도 살짝 풀렸지만 그렇다고 단둘이 있는 시간을 연장해 주지는 않았다.“시간 됐어요.”원진우가 덤덤하게 말하더니 윤아름이 의향도 물어보지 않고 윤아름을 번쩍 안아 들고는 방에서 나갔다.다음날.윤아름이 제시간에 나타나자 윤혜인은 그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려줬다. 이야기가 결말까지 이어지자 윤아름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더니 이성을 잃은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이거야?”윤아름이 마술을 부리듯 손목에 묶었던 레이스를 풀더니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헤헤 웃었다.“이거?”윤혜인은 원하던 물건이 윤아름 몸에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손목에 묶여있는 레이스가 그저 장식이라고만 생각했다. 윤혜인은 얼른 자수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위치 추적기가 아직 들어있었다. 윤혜인은 자수를 더듬거리며 버튼을 찾더니 꾹 눌렀다. 그때 문 쪽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 윤혜인이 얼른 자수를 윤아름의 손목에 묶어줬다.발신기의 발신 기회는 고작 두번이었다. 마지막 한 번을 사용했으니 이제 더는 기회가 없다. 윤혜인은 윤아름이 다시 끌려가는 걸 보고 너무 안타까웠지만 곧 구출될 거라는 희망을 안고 꾹 참았다.한편, 곽경천과 배남준은 북안도를 이 잡듯이 뒤지며 윤혜인을 찾고 있었다. 원진우의 출입국 기록이 없는 걸 봐서는 아직 북안도에 숨어있다는 의미였다.이준혁도 온 힘을 다해 윤혜인을 찾았다. 꼬박 3일을 눈도 붙이지 못하고 돌아치던 이준혁은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잠깐 휴식하려 했다.그때 문이 열리더니 주훈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안으로 들어왔다.“발신기... 발신기에서 또 한 번의 신호를 보내왔습니다.”이준혁이 얼른 외투를 집어 들더니 지하 차고로 향했다. 가는 길에 주훈은 발신기 주변에 위험 물체가 있는지 탐색했다. 이준혁은 이 소식을 곽경천과 배남준에게 알렸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했지만 목표는 똑같이 윤혜인과 윤아름을 구해내는 것이었다.
“아름아, 왜 그래?”원진우가 앞으로 다가와 윤아름이 도대체 왜 그러는지 확인하려 했다. 뒤를 힐끔 돌아본 윤아름이 원진우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지르더니 윤혜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윤아름이 오히려 애가 된 것 같았다.“삼촌, 일단 나가 계세요. 삼촌이 여기 있으면 오히려 자극만 받을 거예요.”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진우는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지만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윤아름을 보고 한발 양보했다.“윤혜인 씨, 얌전하게만 있으면 절대 다치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할게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원진우가 타이름 반 협박 반으로 말했다. 얕은 수작을 부리면 벌을 내리겠다는 경고였다. 윤혜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윤아름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엄마, 엄마, 나 혜인이야...”원진우는 겨우 차분해진 윤아름을 보며 더는 자극하기 싫어 방에서 나갔다. 윤혜인은 방문이 닫히는 걸 똑똑히 보았다. 오전에 방안을 둘러보며 카메라가 없다는 건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새 거처를 바꿔서 그런지 아니면 윤아름을 데리고 떠날 계획이라 그런지 여기는 카메라가 없었다.“엄마, 미안해요. 아팠죠?”윤혜인이 얼른 윤아름의 등을 확인했지만 다행히 살짝 빨개진 정도였다. 이런 위험한 수를 둔 건 윤아름이 조금만 이상해도 원진우가 신경 쓴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윤아름의 정서를 이용해 원진우를 영향 주려 했다. 다행히 그 방법이 제대로 먹혔다. 윤아름이 아닌 윤혜인이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면 죽을 정도가 아니고서는 원진우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윤아름은 여전히 아무 감각이 없는 듯했지만 윤혜인이 친근하게 다가가도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저 멍한 눈으로 윤혜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을 깜빡였다가 윤혜인이 사라질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팔을 잡고 눈물을 뚝뚝 떨궜다.“엄마...”윤혜인은 한참 동안 속 시원하게 울더니 울음을 그치고는 물었다.“엄마, 그때 그 자수는 어디에다 뒀어요?”윤혜인이 물은 자수는
윤혜인이 문 앞으로 다가가 힘껏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화들짝 놀란 도우미가 얼른 달려와 윤혜인을 막았다.“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만하세요.”도우미가 윤혜인을 안더니 힘껏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윤혜인은 문을 두드릴 수 없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엄마. 엄마. 엄마.”윤혜인이 큰 소리로 외치자 바깥에서 들리던 웅얼거리는 소리가 달라졌다.쿵.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쿵. 쿵. 쿵.휠체어로 문을 힘껏 부수는 소리와 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사모님.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돼요.”윤혜인이 더 높은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 엄마.”방 안에 있던 도우미가 윤혜인의 입술을 틀어막자 윤혜인이 팔다리를 마구 버둥대며 웅얼웅얼 소리를 냈다.문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망가졌다. 문이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쌩하고 들어왔다. 윤아름은 큰 꽃병 하나를 이고 들어와 윤혜인의 입을 막고 있는 도우미를 내리쳤다. 도우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윤아름이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윤혜인을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윤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다시 안아보는 거라 윤혜인도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도우미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다른 도우미를 보고 윤아름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긴 윤아름은 아까 정신이 살짝 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원진우가 윤아름을 다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기에 과분하게 말렸다가 윤아름이 다치는 날에는 도우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이때 소식을 들은 원진우가 다급하게 걸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녀를 보게 되었다. 원진우는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윤혜인은 정상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멍하던 예전과 비기면 정서라는 게 생겼다. 윤혜인이 확실히 윤아름을 치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