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이 이렇게 말한 것도 사실 이진영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이진영의 체면을 지켜준다고 그녀를 용서하는 건 아니었다.그녀가 팬을 시켜 곽아름이 다니는 유치원을 공격한 것만으로도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지시나 부추김을 받아서 한 일이라고 해도 한가지는 설명할 수 있었다.이진영은 원래부터 악한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공인으로서 팬들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그 힘을 빌려 악을 도모한다면 정말 동기가 불순하고 심보가 사악한 자가 틀림없었다.이진영이 코웃음 치며 조롱했다.“웃기지 마요. 내 체면을 왜 당신이 지켜줘요?”이진영의 눈에 윤혜인은 서울로 상경해 일거리를 찾으러 온 젊은 여자로밖에 안 보였다.젊고 예쁜 여자가 서울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몸을 팔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조건을 거론한단 말인가.이진영은 피해자 연기만 잘하면 돈과 명예를 다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한 이진영이 얄짤없이 말했다.“당신이 뭔데 이래요! 몸 파는 여자 주제에 자기 걱정이나 해요.”윤혜인이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렸다. 눈동자는 차갑기 그지없었다.이진영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다면 더 입씨름할 필요도 없었다. 이 사람의 민낯을 팬에게 드러내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윤혜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이진영 씨, 기자 회견에서 원하던 바를 이루길 바랄게요.”이 말을 뒤로 윤혜인은 이진영이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먼저 대기실에서 나왔다.윤혜인의 예쁜 날개뼈와 아름다운 몸매, 그리고 움직일 때마다 보이는 매혹적인 자태는 누가 봐도 있는 집에서 곱게 자란 아가씨 같았다. 이진영이 아무리 후천적으로 배운다 해도 배워낼 수 없는 뼈에 새겨진 기품이었다.순간 이진영은 걷잡을 수 없는 화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이내 음침한 눈빛으로 툴툴거렸다.“잘난 척은. 내가 조금 이따 내 팬들에게 호되게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이진영의 기자회견은 예정된 시간에 맞춰 시작되었
관중석에 앉은 팬들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진영아, 울지 마!”“진영아, 힘내!”“진영아, 너는 아무 잘못 없어! 사과 안 해도 돼!”아래 서 있는 기자들도 일부는 그들이 미리 손 써놓은 사람이었다. 질문지도 사전에 맞췄기에 질문지에 있는 문제만 질문했다.“이진영 씨, 남편의 외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이진영 씨, 내연녀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계신가요?”“...”이진영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먼저 제 남편은 유혹을 당한 거지 바람을 피운 건 아닙니다. 우리 사이에 끼어든 여자는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습니다. 질문 사항 있다면 지금 그 내연녀도 현장에 있으니 직접 물어보시는 게 좋겠네요.”이 말에 현장이 들끓기 시작했다. 누군데 이 정도로 나대는 건지 저마다 궁금해했다.윤혜인은 가만히 있었다. 뒤집어씌운 게 사실도 아니니 절대 먼저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이때 임세희가 침통한 표정으로 윤혜인을 힘껏 밀었다“혜인 씨, 또 이런 짓 하고 다니는 거예요? 했으면 반성의 기미라도 보여야지 현장까지 오는 건 뭐예요? 아내분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윤혜인에게로 쏠렸다. 몇몇 기자들은 기레기 정신을 발휘해 그쪽으로 뛰어가 임세희를 인터뷰하기 시작했다.임세희가 DS 디자인 작업실 이사인 걸 아는 사람도 있었기에 바로 임세희의 이름을 찍어 이렇게 물었다.“임 대표님, 이분도 혹시 대표님 친구인가요? 왜 ‘또’라는 단어가 붙었을까요? 전에도 그런 적이 있다는 말씀이세요?”임세희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으며 큰 비밀이라도 얘기했다는 듯 생쇼를 했다.“제 남자 친구까지 꼬셨다고 한 적은 없어요. 절대 함부로 추측하지 마요. 그런 일은 없었어요.”기자들은 눈치가 빠르기로 소문난 사람들이었기에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그럼 이 여자분이 남자 친구한테도 찝쩍거렸다는 겁니까?”“아니요. 아닙니다. 다 지나간 일이니 함부로 추측하지는 말아주세요. 안 그러면 윤혜인 씨를 뒤에서 보호해 주고 있는 사
이준혁이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아무 감정 없는 말투로 말했다.“저것들 치워버려!”주훈은 저것들이라고 불리는 사람을 쭉 훑어봤다. 제일 소리가 높은 사람은 다름 아닌 몇몇 팬들과 기자, 그리고 임세희와 이진영이었다.기자회견의 주인공을 치워버린다는 건 기자회견이 끝나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준혁의 명령이라 주훈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주훈이 옆에 선 보디가드에게 손짓하며 움직이라고 사인을 보냈다.“잠깐만.”이준혁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참 지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일단 좀 지켜보지.”그가 이 일에 끼어드는 걸 윤혜인이 싫어하니 망정이지 아니면 진짜 더는 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윤혜인이 가지고 있는 카드를 생각하며 이준혁은 최대한 화를 삭였다. 윤혜인이 잘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윤혜인의 수완을 연습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은 이준혁이 고개를 살짝 돌려 이렇게 말했다.“보디가드를 혜인이 저쪽으로 더 보내. 누가 손찌검이라도 하면 바로 잡아낼 수 있게 말이야.”이준혁은 여은의 실력으로 막아내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장에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윤혜인이 뭘 하든 간에 이준혁은 그녀의 안전이 최우위라고 생각했다.현장에 있는 팬들은 기자의 감언이설에 속아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말해! 벙어리야?”“파렴치한 여자 같으니. 다른 사람의 남편을 꼬실 때도 이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지는 않았겠지.”더는 참을 수 없어 엉덩이를 들썩이던 몇몇 팬들은 행동을 보이기도 전에 까만 슈트를 입은 보디가드에 의해 바닥에 제압되고 말았다.놀란 윤혜인이 보디가드의 눈빛을 따라가 보니 주훈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기다란 체구의 이준혁이 보였다. 둘은 뒷문 쪽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한쪽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모습이 마치 듬직한 산처럼 안전감을 주었다.윤혜인이 드디어 입을 열어 반박했다.“이진영 씨, 제가 남편을 꼬셨다고 했는데 증거 있나요?”우쭐대던 이진영은 갑작스레
쥐고 흔들기 쉽다고 생각한 이진영이 갑자기 임세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임세희는 애써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부드럽게 말했다.“이진영 씨, 일단 내 말 좀 들어봐요. 나는 진짜 그런 적 없어요. 저 영상 속에 나오는 사람 정말 내가 아니라고요.”“아니긴 뭐가 아니야!”“빌어먹을 년이! 내 남편의 침대에 기어오른 것도 모자라 입김까지 불어 넣어? 그리고 지금은 나를 시켜서 다른 사람 모함이나 시키고! 내가 오늘 너랑 끝장 본다!”이진영이 이렇게 말하더니 테이블을 넘어가 임세희의 머리채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그러고는 사정없이 이리저리 마구 흔들었다.순간 기자회견장은 시원한 따귀 소리가 들려왔다.철썩. 철썩. 철썩.이진영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이런 역겹고 억울한 상황은 처음이었다. 임세희의 착한 척이 이 정도로 완벽할 줄은 몰랐다. 지금은 그냥 임세희를 때려죽이고 싶은 생각뿐이었고 이미지 관리는 진작에 포기했다.임세희는 몰아치는 이진영의 따귀 공세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다 반응하고는 이진영을 할퀴며 엉겨 붙어 싸웠다.이진영이 욕설을 퍼부었다.“빌어먹을 년! 내 남편을 꼬신 것도 모자라 나를 모함까지 해? 내가 오늘 너 때려죽이고 만다!”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몇몇 팬들은 혼란한 틈을 타 무대 위로 올라가 임세희를 폭행하는 데 동참하며 이진영과 함께 싸웠다.이진영은 때리면 때릴수록 더 흥분했다. 따돌림과 폭행에 능했으니 말이다. 이진영은 옆에서 팬들을 부추겼다.“사정없이 막 때려요. 오늘 내가 저년 얼굴 못쓰게 만들 거예요. 그래야 앞으로 유부남 꼬실 생각 못 하지.”이성을 잃은 팬들은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바로 임세희의 머리채를 잡거나 얼굴을 잡아 뜯으며 미친 좀비들처럼 임세희를 물고 뜯었다.“아악! 이거 놔!”임세희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너무 아팠다. 누군가의 손톱에 제대로 할퀸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눈이 돌아간 팬들은 임세희의 고함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점점 매섭게 잡아
그러다 늙고 힘 빠진 제작자를 만나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었고 과거에서 벗어나 이미지를 다시 수립할 수 있었다.어렵게 포장한 이미지인데 임세희가 때문에 그 민낯이 적나라하게 사람들 앞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제일 짜증 나는 건 임세희가 한 말이 다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아마 미리 조사한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기자들과 팬들이 들었으니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이진영은 화가 난 나머지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당장이라도 임세희의 입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이진영은 신고 있던 8cm짜리 하이힐을 벗어들고 테이블 아래로 달려가 하이힐로 임세희의 입을 마구 후려갈겼다.하이힐은 바로 임세희의 입을 피범벅으로 만들어 버렸다.풉!임세희가 더는 견뎌내지 못하고 피를 한 모금 뿜어냈다. 토해낸 피를 보니 부러진 이빨도 두 개 보였다. 이진영이 마구 휘두른 하이힐에 이빨까지 나간 것이다.“아악!”임세희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을힘을 다해 반항했다. 버둥거리던 두 손으로 이진영의 머리를 부여잡더니 테이블 다리에 가져다 박았다.두 사람이 머리채를 잡고 싸운 지도 어느새 반 시간이 지나갔다. 옷도 찢겨서 너덜너덜해졌고 꼴이 말이 아니었다.어떤 사람은 라이브를 켜고 이 재미난 장면을 생중계했다. 이진영과 임세희가 개처럼 물어뜯으며 싸운 일은 시사를 다루는 인플루언서들에 의해 또 한 번 전파되었다.순간 인터넷이 뜨겁게 달구어졌다.[이진영이 그간 보여준 청순한 이미지가 다 가짜라니. 그러면 그 나이 많은 남편도 한통속 아니야?][늙은 남자를 그렇게 많이 만났다는 것도 충격인데 계부까지? 너무 에바 아니야?][젠장. 21세기에 아직도 이런 드라마에나 있을 법한 막장이 현실에 존재한다고?][임세희라는 사람 신상 파봤는데,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닌 것 같던데? 전에 이선 그룹 대표님과 엮이고 싶어서 뻘짓하다가 이선 그룹 홈페이지에서 바로 공지 떴던데? 대표 이준혁에게는 부인밖에 없다고.”“임0희와 올드 장의 뜨거운 영상, 모자이크가 없는 버전을 보고 싶다면 대댓
영상이 찍힌 곳은 다름 아닌 화장실이었기 때문이다.윤혜인이 설명했다.“호텔에 있는 패밀리 화장실이 남자 화장실과 가까웠거든? 호텔 주방에서 일하는 스태프가 화장실에 갔다가 이상한 소리를 듣고 통풍구를 통해 올라간 거야. 그러다 화끈한 장면을 보고 찍은 거지.”정말 단순한 우연이었다. 통풍구로 올라가는 건 호텔 스태프가 아니면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이 영상이 없다 해도 복도 CCTV 영상을 곽경천이 복구해 냈다. 그것으로도 윤혜인의 결백은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었다. 비록 임세희가 나오는 영상보다는 덜 흥미진진하겠지만 말이다.더 신기한 건 이 영상을 건네준 사람이 주훈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건 이준혁도 봤다는 말이다.첫사랑이 이렇게 방탕하게 노는 걸 알았으니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윤혜인이 그 첫사랑을 이렇게 괴롭히는 데도 가만히 있는 걸 봐서는 첫사랑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윤혜인은 복잡한 생각을 버리고 소원의 손을 잡으며 애교를 부렸다.“여기 전시 센터 꼭대기에 맛있는 훠궈집이 있대. 온천에서 반신욕도 할 수 있고. 우리 훠궈 먹고 마사지도 받으러 가자. 어때?”“그래.”멀지 않은 곳. 김성훈이 두 여자의 행복한 뒷모습을 보며 오버했다.“와, 나 이제 윤혜인 씨를 내 우상으로 삼으려고. 인간쓰레기를 치워버리는 방법이 아주 일품인데?”김성훈의 이준혁의 어깨를 툭 치며 비아냥댔다.“네 도움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 설마 실망한 거 아니지?”이준혁이 잠깐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자기를 보호할 수 있으면 좋은 거지.”김성훈이 웃었다.“대범한 척하기는. 아까 진짜 일말의 걱정도 없었어?”“아니, 걱정 안 해.”이준혁이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웃었다.“무슨 일이 있든 내가 지켜줄 거니까.”김성훈은 그런 이준혁이 별로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사랑에 빠진 이준혁이라니. 윤혜인 씨가 사람을 죽이겠다고 해도 너는 칼을
“치워!”소종이 그런 육경한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봤다.“대표님, 이러면 안 돼요. 정말 더위라도 먹으면 심각해진다고요!”“괜찮아.”육경한의 얇은 입술은 어느새 말라서 터져 있었다.“나 괜찮아.”소종은 별수 없이 육경한과 같이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한계가 왔다.바닥에 깔린 타일이 뜨거운 햇빛을 받아 뜨겁게 달궈진 상태였다. 바지를 입고 있어도 닿으면 델 정도로 뜨거웠다. 고기를 올리면 익을 것 같았다.소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을 차렸다. 이따가 육경한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소종이 힘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그렇게 또 3시간이 지났다.육경한의 얼굴은 빨갛던데로부터 하얗게 질렸고 허리도 처음 시작할 때와는 다르게 구부정해졌다.분명 8월 한여름이라 햇빛이 쨍쨍한데 육경한은 오한이 느껴졌다. 한기가 끝도 없이 몸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 같았다.추워도 너무 추웠다. 육경한은 자기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마도 더위를 먹은 듯싶었다.더위가 심하지 않다면 버텨낼 수 있겠지만 더위를 심하게 먹거나 열사병이라도 걸리면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목숨이 귀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소원이 돌아왔으니 죽는 게 아쉬워지는 육경한이었다.이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려왔는데, 꿈에서도 이날만을 그리며 5년을 버텼다. 지금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는 없다.육경한은 뭔가 생각났는지 허리춤에서 날카로운 잭나이프를 꺼냈다. 그러고는 이내 푹하고 다리에 힘껏 찔러넣었다. 고통이 육경한의 의식을 잠시나마 돌아오게 했다.한 번 더 찌르려다 소종이 이를 발견하고 나이프를 낚아챘다.“대표님!”소종이 두려움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육경한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다리에 난 상처를 잡아 뜯으며 정신을 차리고 더 꿇어있으려 했다.다급해진 소종이 얼른 앰뷸런스를 불렀다.구급대가 도착했지만 육경한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다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렇게 천천히 굳어가고 있었다.소종이 무릎을
저녁이 되자 번개가 하늘을 갈랐다.육경한은 쏟아지는 비에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여기에 꿇어있은 지도 이제 7시간이 다 되었다.폭우를 맞고도 육경한은 좋아지지 않았다. 점점 머리가 무거웠고 목구멍에 뭐가 막힌 듯 숨쉬기도 힘들었다.숨을 들이쉴 때마다 물이 기도로 흘러 들어갔다. 육경한은 어깨를 들썩이며 빗속에서 계속 기침만 해댔다. 들숨과 함께 빗물이 다시 기도로 흘러 들어갔고 그렇게 악순환은 계속되었다.풉!육경한이 끝내 피를 한 웅큼 토해냈다. 하지만 그 피는 이내 비에 말끔히 씻겨나갔다. 입가에 묻은 피가 하얘진 입술과 비교되어 더 빨갛게 보였다.“대표님!”소종이 손에 들었던 우산을 내팽개치고는 휘청거리는 남자를 꼭 끌어안고 울먹거리다가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대표님, 제발 부탁드려요... 우리 병원에 좀 가요...”소종이 애타게 타일렀다. 정말 이 모든 걸 대신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소종은 육경한이 외국에서 구한 노숙자였다. 육경한을 만나기 전 그는 늘 사람들에게 맞기만 했는데 그 처지는 강아지보다도 못했다.그러던 어느 날.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를 신은 육경한이 소종의 등에 올라타 그를 구타한 양아치를 걷어찼다.그때 소종은 허리가 눌리는 바람에 바닥에 웅크린 채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런 소종을 향해 손을 내밀어주며 이렇게 물었다.“너 나 따라다니는 게 어때?”그날은 소종이 구원을 받은 날이자 새로 태어난 날이기도 했다. 육경한은 소종에게 권투와 호신술을 도와줬다. 그렇게 두 사람은 외국에서 같이 시장을 개척해 나갔다.소종은 마음속으로 깊이 다짐했다. 평생 이 남자에게만 충성하겠다고, 절대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겠다고 말이다.육경한의 꺼져가는 의식이 소종에 의해 다시 조금 돌아왔다. 그는 소종을 밀어내더니 마치 뭐에 씐 사람처럼 혼자 계속 중얼거렸다.“소원이 그랬어... 만족하면... 내게도... 기회를 준다고...”육경한이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목구멍은 유리 조각을 삼킨 듯 너무 아팠고 말할 때마다 피
원진우가 점점 다가오자 윤혜인은 마지막 기회를 잡고 숨겨둔 막대를 다시 한번 휘둘렀다.하지만 이번에는 실패했다. 이미 대비하고 있던 원진우가 맨손으로 막대를 가볍게 붙잡아 꽉 쥐었기 때문이다.윤혜인은 막대를 빼앗으려고 온 힘을 다했지만 소용없었다.그 순간, 원진우는 다른 손으로 윤혜인의 목을 단숨에 움켜쥐고 그녀를 다락방 유일한 창틀 가장자리로 밀어붙였다.목이 졸려 말을 할 수 없었던 윤혜인은 두 손으로 창틀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이 다락방은 지상에서 족히 10미터는 넘게 높았다. 여기서 떨어진다면 죽지 않아도 식물인간이 될 것이 분명했다.이 순간, 원진우의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그의 눈에 더 이상 딸이라는 개념은 없었다.처음에는 딸에게 보상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윤혜인이 윤아름을 데리고 떠난 것은 원진우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었다.누구든 그의 역린을 건드리는 자는 심지어 친자식이라도 용서받지 못한다.윤혜인이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자 원진우는 냉소를 띠며 말했다.“아직도 말 안 할 거냐?”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죽고 싶어 안달이 났군.”이 말과 함께 윤혜인의 몸 반쯤이 창밖으로 나갔다.“멈춰!”갑자기 아래에서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윤혜인은 몸이 거꾸로 매달려 있어 피가 거꾸로 흐르고 있었고 눈앞이 점점 어두워졌다.간신히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곽경천이 그곳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오빠가... 오빠가 드디어 왔어...’원진우가 서둘러 나왔던 탓에 데려온 네 명의 경호원은 이미 곽경천이 데려온 사람들에게 제압당한 상태였다.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본 원진우도 곽경천을 발견했다. 그러자 그는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오늘 무슨 날인가? 죽어야 할 사람들이 모두 모였군.”“이 미친놈! 내 여동생 당장 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곽경천이 외쳤다.원진우는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곽경천을 겨누며 말했다.“뭐? 날 죽
‘그래서 나한테 얌전히 기다리라고 한 거였어.’윤혜인은 창밖을 바라보며 푸른 섬에 눈길을 빼앗긴 윤아름을 돌아봤다.윤아름은 창밖의 풍경에 매료된 듯, 맑은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이윽고 윤혜인은 마음을 굳히고 부드럽게 말했다.“엄마.”윤아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윤혜인을 바라봤다.그러자 윤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게임 하나 해요...”원진우는 차 안에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운전하는 경호원은 고속으로 차를 몰며 윤혜인이 타고 도주한 검은 차량을 추적했다.그러던 와중 차량이 눈에 보이자 경호원은 차를 세우며 보고했다.“대표님, 저 앞에 있습니다.”원진우는 차에서 천천히 내려 차량 앞으로 다가갔다.차 안을 들여다봤지만 이미 텅 비어 있었다.그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말 들을 애가 아니지.”딱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 관절을 꺾더니 원진우는 생각에 잠겼다.‘찾으면 어떤 벌을 줘야 할까. 다리 힘줄과 손 힘줄을 끊을까, 아니면 독을 써서 목소리를 없앨까... 아니면 둘 다 한꺼번에 해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그는 특히 윤혜인이 윤아름을 데리고 도망치려 한 점에 분노했다.‘제 엄마를 유혹해 나를 떠나려 하다니...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어.’곧 원진우는 경호원들에게 지시했다.“주변을 샅샅이 수색해.”차량의 전력 시스템을 끊은 뒤부터 지금까지 겨우 15분이 지났다.때문에 그녀들이 멀리 도망쳤을 리는 없었다.잠시 후, 경호원이 돌아와 보고했다.“대표님, 앞쪽에 사람이 없는 교회 한 채를 발견했습니다.”주변에 흔적이 없는 걸 보니 교회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원진우는 교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가슴과 이마에 손가락을 대고 기도하듯 중얼거렸다.“주님, 제 죄를 용서하소서.”그 후 손짓으로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수색해.”건장한 경호원 네 명이 흩어져 교회 곳곳을 뒤졌다.그렇게 모든 곳을 수색한 후, 마지막으로 확인하지 못한 곳
게다가 원진우의 계획을 보니 해운성에서 그녀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계속 이동할 생각인 듯했다.아마 한곳에 머물지 않고 여러 군데를 거쳐 이동하겠다는 의도였으니 그의 행방을 찾기가 어려웠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윤혜인은 그제야 이해했다.그녀가 보낸 신호가 전송되었어도 곽경천 일행이 빠르게 도착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나라 하나를 건너야 하는 거리에서 아무리 빨리 와도 금방 닿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그녀는 차량에 내장된 스마트 시스템을 떠올리고 외국어로 시스템에 말을 걸어 보았다.“나 대신 신고 좀 해줘!”그러자 시스템의 인공지능이 대답했다.“현재 해운성 해안경비대로 연결 중입니다.”돌아오는 답변에 윤혜인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그녀는 대다수의 차량 시스템이 전화 통화는 불가능해도 긴급 신고는 가능할 것이라 짐작했다.‘해안경비대에 연락만 닿는다면 오빠가 도착할 때까지 안전하게 기다릴 수 있어. 아무리 원진우가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모든 나라에 그 세력이 미치게 할 수는 없을 거야.’윤혜인은 차를 멈추고 긴장된 마음으로 전화 연결을 기다렸다.삐빅 하는 두 번의 신호음 뒤에 전화가 연결되었다.통화 너머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상담원이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윤혜인은 다급히 말했다.“저와 제 어머니가 납치되었습니다.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범인이 저희를 추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상담원은 침착하게 물었다.“상대방이 누구인지, 그리고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세요.”윤혜인은 대답했다.“저희를 납치한 사람은 국제적으로 수배가 되어있습니다. 혐의도 한두 개가 아닐 겁니다.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르겠고 주변에 바다밖에 없어요. 내비게이션에서는 블루섬이라고 나옵니다.”윤혜인은 상대가 국제 수배범이라는 말을 일부러 꺼냈다. 경찰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였다.게다가 이번 원진우에 대한 폭로로 곽경천 일행이 그의 과거 행적을 어느 정도 파악했을 것이므로 국제 수배범이라는 표현이 적절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열렸다.윤혜인의 손에는 스마트 디스플레이 키가 들려있었는데 조금 전 원진우에게서 몰래 훔쳐 온 것이었다.그녀는 단 1초 만에 시동을 걸고 곧장 대문을 향해 내달렸다.대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지만 멈출 생각은 전혀 없는 듯 보였다. 그대로 부딪힐 각오인 듯 말이다.대문 앞에 서 있던 보안 요원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만약 차에 부딪혀 사람이 다치기라도 하면 책임을 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급히 원진우에게 상황을 보고했다.“선생님, 저기... 대문을 어떻게 할까요...”원진우는 차의 기세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멈출 기색이 전혀 없는 그 모습에, 겉보기에는 얌전해 보이는 윤혜인이 자신의 열정과 영리함을 꽤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결국 그는 짧게 고심한 후 단호히 말했다.“문 열어!”아무리 비싼 슈퍼카라 해도 이 속도로 대문을 들이받으면 운전자의 안전이 100%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었다.그리고 문을 열어주더라도 그녀가 도망칠 수는 없었다.슈퍼카가 대문에 닿기 직전, 대문이 위로 열렸다.순식간에 슈퍼카는 대문을 빠져나갔다.윤혜인은 눈 앞에 펼쳐진 넓은 도로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몇십 초를 기다린 끝에야 상황을 이해했다.“엄마, 우리 탈출했어요!”기쁨에 찬 외침이었다.윤아름은 아직도 조금 혼란스러운 상태였지만 딸의 말에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탈출’이라는 말은 지하실에 수십 년 동안 갇혀 있던 그녀에게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희망이었다.윤아름이 기뻐하며 창문을 두드리자 윤혜인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하지만 안전을 위해 반 정도만 내렸다.그 작은 틈으로도 윤아름은 크게 기뻐했다. 손가락을 밖으로 조금 내밀어 바람을 느끼며 냄새를 맡았다.자유로운 바람이 스치는 윤아름의 얼굴은 완전히 행복해 보였다.윤혜인은 엄마 윤아름의 이런 모습을 보며 모든 게 다 가치 있다고 느껴졌다.긴장으로 땀이 찼던 손바닥도 이제는 차갑게 식었고 조금 전 그녀는 원진우에게 조금의
그녀가 당한 모든 불행은 전부 이 남자 때문이었다.어머니의 사랑을 받아야 할 그녀는 이리저리 떠돌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원진우 씨, 지금 무슨 헛된 꿈을 꾸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쪽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떠날 거예요. 당신이 우리 엄마를 얼마나 오랫동안 감금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는지 절대 잊지 않았어요.”윤혜인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당신 같은 사람은 지옥에나 가야 해요!”그러자 원진우는 분노가 가득 찬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이렇게는 대화가 안 되겠군.”그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우리 세 식구에게는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까. 내가 얼마나 좋은 아버지인지 천천히 알게 될 거야.”윤혜인은 경계심을 품고 원진우를 응시했지만 그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그러나 곧 그 의도를 알게 되었다.원진우는 손짓으로 도우미를 불러 들어오게 한 후, 지시를 내렸다.“아가씨의 짐을 챙겨서 비행기에 실어라.”윤혜인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며 원진우는 느긋하게 설명했다.“우린 곧 떠날 거라서.”원진우가 윤아름과 자신을 데리고 떠나려 한다는 말에 윤혜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는 원진우가 매우 영리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수십 년 동안 윤아름을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던 걸 보면 그의 경계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이번에 끌려가면 아버지, 큰오빠, 아이들, 모든 가족과 친구들을 평생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난 안 가요!”윤혜인은 근처에 있던 의자를 집어 던지고 온 힘을 다해 문밖으로 뛰쳐나갔다.그러나 문에 도달하자마자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팔이 붙잡히고 말았다.곧 원진우는 넥타이로 그녀의 손을 묶은 뒤 그대로 어깨에 들쳐 업었다.시간이 촉박했다. 이미 이곳이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즉시 떠나야 했다.바깥에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떠나기만 하면 전처럼 윤아름과 윤혜인 모두 꽁꽁 아무도 모르게 숨
윤혜인이 갑자기 손을 들자 봉투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안에 들어있던 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윤혜인은 자료를 보고 싶은 생각보다는 하얀 나무젓가락을 들어 원진우의 목에 찔러넣고 싶었다. 두 사람은 신장 차이가 있었지만 원진우는 지금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이고 있어 윤혜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뾰족하게 자른 나무젓가락이 그대로 원진우의 목에 들어갔다. 그러자 피가 나무젓가락을 타고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하지만 떨어지는 피의 양에서 윤혜인은 글렀다는 걸 알아챘다. 동맥을 찌르지 못했으니 원진우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원진우는 고개를 들어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를 보더니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윤혜인을 바라봤다.“나 죽이고 싶어요?”원진우가 차분하게 물었다. 까만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고요했다. 윤혜인이 뒤로 물러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곧 사람들이 나와 엄마를 구하러 들이닥칠 거예요. 도망은 꿈도 꾸지 마요.;원진우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연락이 됐나 보네요.”윤혜인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윤혜인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원진우는 어떻게 된 일인지 충분히 알아챘을 것이다. 아니면 윤혜인도 이렇게 무모하게 나가기보다는 계속 위장하는 걸 선택했을 것이다.원진우는 목에 꽂혀있는 젓가락을 뽑지도 처리하지도 않은 채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제법인데? 역시 내 핏줄이라 그런가? 배짱이 커.”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간사하기로 소문난 원진우가 친자 감정을 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미 자기 핏줄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원진우는 윤혜인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모든 걸 알아차렸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나 속이려 했나 본데...”원진우가 허리를 굽혀 서류를 줍더니 윤혜인에게 건네줬다.“봐... 네 말이 맞아. 너 정말 내 딸이야.”“...”윤혜인은 원진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내 결과지에 적힌 숫자에 눈길이 갔다.99.99%.그럴
문이 삐걱 열리더니 원진우가 안으로 돌아왔다. 표정이 밝아진 윤아름을 보고 원진우의 표정도 살짝 풀렸지만 그렇다고 단둘이 있는 시간을 연장해 주지는 않았다.“시간 됐어요.”원진우가 덤덤하게 말하더니 윤아름이 의향도 물어보지 않고 윤아름을 번쩍 안아 들고는 방에서 나갔다.다음날.윤아름이 제시간에 나타나자 윤혜인은 그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려줬다. 이야기가 결말까지 이어지자 윤아름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더니 이성을 잃은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이거야?”윤아름이 마술을 부리듯 손목에 묶었던 레이스를 풀더니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헤헤 웃었다.“이거?”윤혜인은 원하던 물건이 윤아름 몸에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손목에 묶여있는 레이스가 그저 장식이라고만 생각했다. 윤혜인은 얼른 자수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위치 추적기가 아직 들어있었다. 윤혜인은 자수를 더듬거리며 버튼을 찾더니 꾹 눌렀다. 그때 문 쪽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 윤혜인이 얼른 자수를 윤아름의 손목에 묶어줬다.발신기의 발신 기회는 고작 두번이었다. 마지막 한 번을 사용했으니 이제 더는 기회가 없다. 윤혜인은 윤아름이 다시 끌려가는 걸 보고 너무 안타까웠지만 곧 구출될 거라는 희망을 안고 꾹 참았다.한편, 곽경천과 배남준은 북안도를 이 잡듯이 뒤지며 윤혜인을 찾고 있었다. 원진우의 출입국 기록이 없는 걸 봐서는 아직 북안도에 숨어있다는 의미였다.이준혁도 온 힘을 다해 윤혜인을 찾았다. 꼬박 3일을 눈도 붙이지 못하고 돌아치던 이준혁은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잠깐 휴식하려 했다.그때 문이 열리더니 주훈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안으로 들어왔다.“발신기... 발신기에서 또 한 번의 신호를 보내왔습니다.”이준혁이 얼른 외투를 집어 들더니 지하 차고로 향했다. 가는 길에 주훈은 발신기 주변에 위험 물체가 있는지 탐색했다. 이준혁은 이 소식을 곽경천과 배남준에게 알렸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했지만 목표는 똑같이 윤혜인과 윤아름을 구해내는 것이었다.
“아름아, 왜 그래?”원진우가 앞으로 다가와 윤아름이 도대체 왜 그러는지 확인하려 했다. 뒤를 힐끔 돌아본 윤아름이 원진우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지르더니 윤혜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윤아름이 오히려 애가 된 것 같았다.“삼촌, 일단 나가 계세요. 삼촌이 여기 있으면 오히려 자극만 받을 거예요.”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진우는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지만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윤아름을 보고 한발 양보했다.“윤혜인 씨, 얌전하게만 있으면 절대 다치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할게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원진우가 타이름 반 협박 반으로 말했다. 얕은 수작을 부리면 벌을 내리겠다는 경고였다. 윤혜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윤아름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엄마, 엄마, 나 혜인이야...”원진우는 겨우 차분해진 윤아름을 보며 더는 자극하기 싫어 방에서 나갔다. 윤혜인은 방문이 닫히는 걸 똑똑히 보았다. 오전에 방안을 둘러보며 카메라가 없다는 건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새 거처를 바꿔서 그런지 아니면 윤아름을 데리고 떠날 계획이라 그런지 여기는 카메라가 없었다.“엄마, 미안해요. 아팠죠?”윤혜인이 얼른 윤아름의 등을 확인했지만 다행히 살짝 빨개진 정도였다. 이런 위험한 수를 둔 건 윤아름이 조금만 이상해도 원진우가 신경 쓴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윤아름의 정서를 이용해 원진우를 영향 주려 했다. 다행히 그 방법이 제대로 먹혔다. 윤아름이 아닌 윤혜인이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면 죽을 정도가 아니고서는 원진우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윤아름은 여전히 아무 감각이 없는 듯했지만 윤혜인이 친근하게 다가가도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저 멍한 눈으로 윤혜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을 깜빡였다가 윤혜인이 사라질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팔을 잡고 눈물을 뚝뚝 떨궜다.“엄마...”윤혜인은 한참 동안 속 시원하게 울더니 울음을 그치고는 물었다.“엄마, 그때 그 자수는 어디에다 뒀어요?”윤혜인이 물은 자수는
윤혜인이 문 앞으로 다가가 힘껏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화들짝 놀란 도우미가 얼른 달려와 윤혜인을 막았다.“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만하세요.”도우미가 윤혜인을 안더니 힘껏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윤혜인은 문을 두드릴 수 없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엄마. 엄마. 엄마.”윤혜인이 큰 소리로 외치자 바깥에서 들리던 웅얼거리는 소리가 달라졌다.쿵.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쿵. 쿵. 쿵.휠체어로 문을 힘껏 부수는 소리와 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사모님.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돼요.”윤혜인이 더 높은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 엄마.”방 안에 있던 도우미가 윤혜인의 입술을 틀어막자 윤혜인이 팔다리를 마구 버둥대며 웅얼웅얼 소리를 냈다.문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망가졌다. 문이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쌩하고 들어왔다. 윤아름은 큰 꽃병 하나를 이고 들어와 윤혜인의 입을 막고 있는 도우미를 내리쳤다. 도우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윤아름이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윤혜인을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윤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다시 안아보는 거라 윤혜인도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도우미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다른 도우미를 보고 윤아름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긴 윤아름은 아까 정신이 살짝 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원진우가 윤아름을 다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기에 과분하게 말렸다가 윤아름이 다치는 날에는 도우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이때 소식을 들은 원진우가 다급하게 걸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녀를 보게 되었다. 원진우는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윤혜인은 정상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멍하던 예전과 비기면 정서라는 게 생겼다. 윤혜인이 확실히 윤아름을 치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