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이 찍힌 곳은 다름 아닌 화장실이었기 때문이다.윤혜인이 설명했다.“호텔에 있는 패밀리 화장실이 남자 화장실과 가까웠거든? 호텔 주방에서 일하는 스태프가 화장실에 갔다가 이상한 소리를 듣고 통풍구를 통해 올라간 거야. 그러다 화끈한 장면을 보고 찍은 거지.”정말 단순한 우연이었다. 통풍구로 올라가는 건 호텔 스태프가 아니면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이 영상이 없다 해도 복도 CCTV 영상을 곽경천이 복구해 냈다. 그것으로도 윤혜인의 결백은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었다. 비록 임세희가 나오는 영상보다는 덜 흥미진진하겠지만 말이다.더 신기한 건 이 영상을 건네준 사람이 주훈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건 이준혁도 봤다는 말이다.첫사랑이 이렇게 방탕하게 노는 걸 알았으니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윤혜인이 그 첫사랑을 이렇게 괴롭히는 데도 가만히 있는 걸 봐서는 첫사랑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윤혜인은 복잡한 생각을 버리고 소원의 손을 잡으며 애교를 부렸다.“여기 전시 센터 꼭대기에 맛있는 훠궈집이 있대. 온천에서 반신욕도 할 수 있고. 우리 훠궈 먹고 마사지도 받으러 가자. 어때?”“그래.”멀지 않은 곳. 김성훈이 두 여자의 행복한 뒷모습을 보며 오버했다.“와, 나 이제 윤혜인 씨를 내 우상으로 삼으려고. 인간쓰레기를 치워버리는 방법이 아주 일품인데?”김성훈의 이준혁의 어깨를 툭 치며 비아냥댔다.“네 도움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 설마 실망한 거 아니지?”이준혁이 잠깐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자기를 보호할 수 있으면 좋은 거지.”김성훈이 웃었다.“대범한 척하기는. 아까 진짜 일말의 걱정도 없었어?”“아니, 걱정 안 해.”이준혁이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웃었다.“무슨 일이 있든 내가 지켜줄 거니까.”김성훈은 그런 이준혁이 별로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사랑에 빠진 이준혁이라니. 윤혜인 씨가 사람을 죽이겠다고 해도 너는 칼을
“치워!”소종이 그런 육경한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봤다.“대표님, 이러면 안 돼요. 정말 더위라도 먹으면 심각해진다고요!”“괜찮아.”육경한의 얇은 입술은 어느새 말라서 터져 있었다.“나 괜찮아.”소종은 별수 없이 육경한과 같이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한계가 왔다.바닥에 깔린 타일이 뜨거운 햇빛을 받아 뜨겁게 달궈진 상태였다. 바지를 입고 있어도 닿으면 델 정도로 뜨거웠다. 고기를 올리면 익을 것 같았다.소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을 차렸다. 이따가 육경한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소종이 힘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그렇게 또 3시간이 지났다.육경한의 얼굴은 빨갛던데로부터 하얗게 질렸고 허리도 처음 시작할 때와는 다르게 구부정해졌다.분명 8월 한여름이라 햇빛이 쨍쨍한데 육경한은 오한이 느껴졌다. 한기가 끝도 없이 몸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 같았다.추워도 너무 추웠다. 육경한은 자기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마도 더위를 먹은 듯싶었다.더위가 심하지 않다면 버텨낼 수 있겠지만 더위를 심하게 먹거나 열사병이라도 걸리면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목숨이 귀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소원이 돌아왔으니 죽는 게 아쉬워지는 육경한이었다.이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려왔는데, 꿈에서도 이날만을 그리며 5년을 버텼다. 지금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는 없다.육경한은 뭔가 생각났는지 허리춤에서 날카로운 잭나이프를 꺼냈다. 그러고는 이내 푹하고 다리에 힘껏 찔러넣었다. 고통이 육경한의 의식을 잠시나마 돌아오게 했다.한 번 더 찌르려다 소종이 이를 발견하고 나이프를 낚아챘다.“대표님!”소종이 두려움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육경한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다리에 난 상처를 잡아 뜯으며 정신을 차리고 더 꿇어있으려 했다.다급해진 소종이 얼른 앰뷸런스를 불렀다.구급대가 도착했지만 육경한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다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렇게 천천히 굳어가고 있었다.소종이 무릎을
저녁이 되자 번개가 하늘을 갈랐다.육경한은 쏟아지는 비에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여기에 꿇어있은 지도 이제 7시간이 다 되었다.폭우를 맞고도 육경한은 좋아지지 않았다. 점점 머리가 무거웠고 목구멍에 뭐가 막힌 듯 숨쉬기도 힘들었다.숨을 들이쉴 때마다 물이 기도로 흘러 들어갔다. 육경한은 어깨를 들썩이며 빗속에서 계속 기침만 해댔다. 들숨과 함께 빗물이 다시 기도로 흘러 들어갔고 그렇게 악순환은 계속되었다.풉!육경한이 끝내 피를 한 웅큼 토해냈다. 하지만 그 피는 이내 비에 말끔히 씻겨나갔다. 입가에 묻은 피가 하얘진 입술과 비교되어 더 빨갛게 보였다.“대표님!”소종이 손에 들었던 우산을 내팽개치고는 휘청거리는 남자를 꼭 끌어안고 울먹거리다가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대표님, 제발 부탁드려요... 우리 병원에 좀 가요...”소종이 애타게 타일렀다. 정말 이 모든 걸 대신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소종은 육경한이 외국에서 구한 노숙자였다. 육경한을 만나기 전 그는 늘 사람들에게 맞기만 했는데 그 처지는 강아지보다도 못했다.그러던 어느 날.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를 신은 육경한이 소종의 등에 올라타 그를 구타한 양아치를 걷어찼다.그때 소종은 허리가 눌리는 바람에 바닥에 웅크린 채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런 소종을 향해 손을 내밀어주며 이렇게 물었다.“너 나 따라다니는 게 어때?”그날은 소종이 구원을 받은 날이자 새로 태어난 날이기도 했다. 육경한은 소종에게 권투와 호신술을 도와줬다. 그렇게 두 사람은 외국에서 같이 시장을 개척해 나갔다.소종은 마음속으로 깊이 다짐했다. 평생 이 남자에게만 충성하겠다고, 절대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겠다고 말이다.육경한의 꺼져가는 의식이 소종에 의해 다시 조금 돌아왔다. 그는 소종을 밀어내더니 마치 뭐에 씐 사람처럼 혼자 계속 중얼거렸다.“소원이 그랬어... 만족하면... 내게도... 기회를 준다고...”육경한이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목구멍은 유리 조각을 삼킨 듯 너무 아팠고 말할 때마다 피
소원이 다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소종이었다.구급차를 부르려는데 소종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비틀거리며 다가왔다.“소원 씨, 저는 괜찮습니다.”소종에게서 선명한 혈흔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다리가 조금 불편해 보일 뿐이었다.거세게 내린 비가 완충 작용을 해줬는지 그렇게 심각하게 넘어지지는 않았다.소원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그래도 검사는 해야죠. 일단은 신고하고 기록을 남겨야 할 것 같네요. 아니면 앞으로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소원 씨!”소종이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었다.“소원 씨,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제가 찾아온 건 우리 대표님 좀 가서 봐주셨으면 해서입니다.”소원이 그런 소종을 덤덤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종은 빨갛게 부어오른 눈으로 울먹이며 말했다.“소원 씨, 대표님 지금 8시간째 무릎 꿇고 계십니다. 점심에는 하마터면 더위를 먹을 뻔했는데 지금은 폭우까지 맞았어요. 아까는 피도 많이 토하셨고요. 저러다 정말 무슨 일 날 것 같습니다...”소종은 소원을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에 육경한의 비참한 상태를 최대한 과장해서 말해줬다.하지만 소원은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이렇게 말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소종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고 싶었던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한참 숨을 고른 소종이 다시 입을 열었다.“소원 씨, 소원 씨가 내뱉은 한마디로 대표님은 계속 같은 자리에 꿇어 계십니다.”소원이 웃음을 터트렸다.“육 대표님이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하라면 하라는 대로 다 해요?”“...”“소원 씨, 대표님이 지난 5년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아세요?”소종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은 업무를 보는 것 외에 매일 같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 그 시체가 소원 씨인 줄 알고 늘 함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호흡기가 감염되어 심한 폐렴에 걸리셨죠. 그래서 가끔 각혈도 하시고 숨
소종이 가까이 다가가 보니 육경한은 엄지를 다리에 난 상처에 깊숙이 찔러넣고 있었다. 상처는 이미 비를 맞아 하얗게 번져 있었다. 밖으로 새어 나오는 피만 아니었으면 산 사람이 아니라 시체라고 봐도 무방했다.육경한은 지금 의식이 완전 흐릿한 상태였다. 입술을 뻐끔거리고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소종은 그의 입 모양을 따라 하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겨우 알아냈다.“소원아...”소종은 더는 참지 못하고 바닥에 꿇어앉은 채 큰소리로 울부짖었다.“대표님, 죄송해요... 소원 씨를 아직 찾지 못했어요...”소종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사실을 얘기한다면 육경한의 몸으로 더는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못 찾은 게 아니야...”육경한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소종은 육경한이 직접 훈련한 사람이었기에 소원이 다시 나타난 이상 찾아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소종이 그에게 거짓말을 한 건 처음이었기에 육경한도 문제 삼지는 않았다. 육경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지지리도 못나게 웃어 보였다.“오기 싫다고 했지? 그렇지?”소종이 죄책감에 고개를 끄덕이며 울먹였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소원 씨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어요...”“소원이... 뭐래?”육경한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새로운 피가 새어 나왔다. 마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허약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거짓말하지 마. 나... 나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아... 무슨 말... 소원이 무슨 말 했는데...”소종은 한 번 거짓말하는데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게다가 이미 들킨 상황에서 한 번 더 거짓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소종은 소원이 한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육경한에게 전했다.소원의 질문은 너무나 강력했다. 소종이 덤덤하게 전달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말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원망이 느껴졌다.애초에 그 계약을 훔쳐서 바친 사람은 진아연이었지만 일부러 남겨둔 건 육경한이었다.만약 그때 소원의 뜻에 따라 그 계약만 잘 없앴어도 소원의 아버지는 그렇게 비참한 결말을 맞지 않았을 것이
밖에서 지키고 있던 소종이 간호사의 말에 넋을 잃었다.육경한은 평소에 몸을 아끼는 편은 아니었지만 폐렴 말고는 다른 질병이 없었다. 하지만 소원이 내뱉은 말에 생명이 위급한 상황까지 될 줄은 몰랐다.소종이 멍한 표정으로 간호사에게 물었다.“비서라도 사인이 가능한가요?”간호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사인하면 법적 효력이 생기기 때문에 가족이 사인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대표님은 가족이 없습니다.”간호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결혼은요?”소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부모님은요?”“돌아가셨습니다.”간호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겉은 번지르르한 남자가 가족 하나 없다니. 저 정도 외모면 엄청나게 잘생겼는데 결혼을 못 하는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왜 대를 남길 생각을 못 했을까?간호사는 차트를 소종에게 건네주며 당부했다.“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옆에 사람이 없으면 안 돼요. 일단 사인하고 친척이나 꼭 와야 되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다 알리세요.”심부전은 급성질환이었기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간호사도 혹시나 남은 사람들이 후회를 안고 살아갈까 봐 귀띔한 것이었다.수술실 문이 닫혔다. 소종은 손에 든 차트를 보고 심장이 벌렁거렸다.간호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꼭 와야 되는 사람이라...소종이 얼른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입력했다....문 빌리지.샤워를 마친 소원이 아무렇게나 가운을 걸치고는 맨발로 러그를 밟고 창가로 향했다. 창가엔 갓 개봉한 와인이 놓여 있었다.소원은 와인을 잔에 조금 따랐다. 빨갛게 번지는 와인과 야경이 어우러져 황홀하기 그지없었다.이 도시는 여전히 참 번화했다. 그녀의 거지 같은 삶과는 달리 너무 아름다웠다.소원은 와인을 한 모금 맛보더니 이내 한잔을 다 비웠다. 미각이 잃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시면 취기가 올라왔다.소원은 편한 환경에 있으면서 의식이 흐릿한 걸 좋아했다. 운이 좋으면 부모님이 아직 살아있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그러면 화목했던 장면들이 떠올라 이 거지 같은
소원이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소 비서님, 육경한이 이 정도로 말 잘 듣는 사람인 거 알았으면 절대 꿇리지 않았을 거예요.”소종은 소원이 웃는 게 기괴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나긋한 말투로 말했다.“소원 씨, 저는 소원 씨를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냥 대표님 상황이 너무 안 좋은데 가족도 없고 서류에 사인할 사람도 없어서 그래요. 그리고 대표님이 지금 이 순간 누구를 제일 보고 싶어 하는지도 잘 알아요.”소원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소 비서님, 소 비서님이야말로 내 말뜻을 오해했어요. 내 말은...”소원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이 정도로 말 잘 듣는 줄 알았으면 바로 가서 죽으라고 했죠. 지옥에 가도 시원찮은데 죽으면 오히려 좋죠.”소종은 소원이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 정도로 육경한을 증오할 줄은 몰랐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소 비서님, 동생이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용서하라는 말이 나오는지? 무시한다고 매정한 건지?”소종은 반박할 수 없었다.소원의 말이 맞았다. 서로 입장이 다를 뿐이다. 육경한의 입장에서 생각하니까 그런 육경한이 마음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만약 친한 사람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용서는 개뿔 아마 당장이라도 가서 죽여버리고 싶을 것이다.소원은 듣고 싶지 않은 얘기가 자꾸 들려서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하여 귀찮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다음부터 내가 듣고 싶지 않아 하는 말은 하지 마세요. 내가 제일 듣고 싶은 말이라면 아마 육경한이 죽었다는 소식일 거예요.”뚝하는 소리와 함께 소원이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었다.세상이 왜 이 모양일까?육경한, 그녀에게 온갖 상처란 상처는 다 주고 한이 그룹을 파산하게 만들고 아버지를 핍박해 투신하게 하는 바람에 엄마까지 우울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렇게 육경한은 소원의 자존심을 짓밟았다.오해라는 한마디로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큰 상처를 줄 수는 없다. 그런
소원이 힘겨운 듯 이마를 짚으며 대답했다.“그래.”대답하는 목소리는 전보다 확연히 더 무거워졌다.서현재가 잠깐 침묵하더니 물었다.“누나, 유진이 목소리 듣고 싶지 않아요?”소원은 목구멍에 뭐가 걸린 듯 말이 나오지 않았고 가슴도 잔잔하게 아팠다.한참 지나서야 소원이 매정하고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아니.”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소원의 텅 빈 눈동자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원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모든 위장이 순간 무너지고 말았다.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소원은 유진을 사랑하면서도 증오했다.소원은 어깨를 들썩이며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채 힘없이 울기만 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안았지만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었다....임세희와 이진영이 서로 물고 뜯는 영상이 유출되자 아니나 다를까 며칠간 검색어를 독점했다. 안에 든 내용이 너무 화끈했기 때문이다.이진영이 만났던 남자들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죄다 유부남이었다. 그중에는 도덕의 한계를 벗어난 인물도 들어있어 팬들은 역겨움을 금치 못했다.이진영의 팬덤은 뿔뿔이 흩어졌고 팬카페는 문을 닫게 되었다. 이진영 본인도 모든 광고에서 내려지고 말았다.이진영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 말고도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내야만 했다. 전에 벌어놓은 돈을 다 쏟아붓는다 해도 모자랐다.이어진 소식은 경찰이 이진영의 남편, 시누 엔터의 장 대표를 성추행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했다는 것이었다.그렇게 사건은 대반전을 이루었다.전에 곽아름이 다니는 유치원을 공격하던 광팬들도 경찰에 연행되었고 다른 팬들도 진심으로 반성하며 인터넷에 사과문을 올렸다.이런 행보에 윤혜인과 그녀의 작업실 ‘달밤’도 검색어에 올랐다.여러 큰 회사에서 협력 의향을 보였기에 업무량이 급증해 윤혜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보냈다.DS와 장기적으로 협력하던 고객들도 목표를 한국 본연의 미에 방점을 둔 ‘달밤’을 타깃으로 돌렸다.임세희는 DS 디자인 작업실의 이사로서 큰 잘못을 저지르다 보니 회사에 대한
주석훈이 웃으며 말했다.“허허. 몰랐죠? 저 평소엔 되게 허당이에요.”“변호사님 은근히 유머가 넘친다니까요.”주석훈은 언변에 능했기에 단 몇 마디에 간호사가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저기는 왜 저런 거래요? 아까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막더라고요.”주석훈이 물었다.“아, 저기요.”간호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어떤 여자애 한 명 들어왔는데 가족이 살해당했다나 뭐라나. 실어증에 걸려서 한마디도 못 했는데 평소 믿고 따르던 언니가 와서 입을 열었다고 들었어요.”주석훈이 물었다.“여자애요? 많이 놀랐나 보네요.”“그러게요.”간호사가 대답했다.“가족이 칼 맞고 죽었는데 누가 견딜 수 있겠어요.”“억울한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범인만 잡아도 다행 아니겠어요?”주석훈이 말했다.“어려울 것 같던데요?”간호사가 말했다.“뭐 유용한 단서가 안 나왔나 보더라고요. 아빠가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같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봤대요. 진술한 상황이 경찰이 알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경찰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내쉬더라고요.”간호사가 이렇게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건 안지영의 간호를 책임진 간호사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더 물으려는데 다른 간호사가 들어왔다.“어? 이 간호사 있었네? 저쪽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빨리 가봐.”이 간호사가 말했다.“알겠어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치료를 받은 주석훈이 이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이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괜찮다고 말했다.주석훈이 멀리 가고 나서야 다른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이 간호사, 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저 병실에서 나온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저 별말 안 했어요. 다들 아는 내용 얘기해준 거예요.”이 상황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인정하면 바보나 다름없었다.“그래. 앞으로 조심해. 자칫하다간 징계 먹을 수도 있어.”나이 많은 간호사가 귀띔했다.“알아요.”이 간호사가 얼른 대답했다.“아
소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잘됐다. 정말 너무 잘됐어요. 이번엔 하느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셨네요.”소원이 주석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제가 신세를 졌으니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요.”감염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확률이 반반이라 주석훈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주석훈의 마음이 그만큼 단단하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 멘탈이 무너졌을 것이다.소원은 다시 한번 주석훈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별거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주석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가 여기 있다는 건 유진도 여기 입원해 있는 건가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여기 없어요. 아는 동생 좀 보려고 여기 온 거예요.”“동생이요?”주석훈이 물었다.“소원 씨에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까요?”뜬금없는 초대였지만 원래도 열정적인 주석훈이 말하니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소원이 별다른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만나고 나오는 길에요. 전에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 지금쯤 이미 쉬려고 누웠을 거예요.”“아.”주석훈이 말했다.“그러면 데려다줄까요?”“아니요. 아니요.”소원이 얼른 대답했다.“데려다줄 사람이 있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경한이 다가왔다. 까만 트렌치코트가 육경한의 키를 더 커 보이게 했는데 강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소원에게로 걸어왔다.“가자.”육경한은 옆에 선 주석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육경한과 구면인 주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육경한은 작은 변호사 따윈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난감해진 소원이 분위기를 만회하려고 이렇게 말했다.“나오다가 마침 주 변호사님을 만났어.”육경한이 그제야 옆에 선 주석훈을 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주석훈은 전혀 난감해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피고가 잘 지내고 있으니 뿌
제일 의심 가는 사람은 진아연이었다. 안상철은 여자관계가 간단한 편이었고 오랫동안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않고 싱글을 유지하면서 모든 심혈을 딸과 어른을 모시는 데 썼다.박혜순도 안상철을 여러 번 타일렀지만 그럴 때마다 안상철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싱글인 안상철이 이렇게 격렬하게 다툴 수 있는 사람은 진아연일 가능성이 컸다.경찰 조사가 끝나고 안지영도 검사를 받고 쉬어야 했기에 강민혜는 소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서야 소원은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소원은 진아연의 힘으로 안상철을 죽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방도 아닌 60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안상철은 180은 되는 큰 키를 가졌기에 큰 부상을 입어 몸이 허약해 툭하면 쓰러지는 진아연을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진아연은 얼마 전에 손목을 그으면서 피를 많이 흘렸던 터라 짧은 시간 내에 회복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진아연 말고도 다른 사람이 개입했다는 의미였다.멀쩡히 살아움직이는 사람을 60번이나 찔렀다는 건 웬만한 정신상태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이코패스가 잡히지 않고 사회에 섞여 들어간다면 악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강민혜의 생각도 소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진아연이 입원했을 때 강민혜도 만나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진아연은 절대 안상철을 쓰러트릴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검 결과를 보면 약물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안상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진아연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진아연 같은 몸집이라면 3, 4명이 더 와도 절대 안상철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그래도 일단 진아연을 잡는 게 우선이었다. 진아연을 잡아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진아연이 어디로 숨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소원은 의문만 가득 품은 채 병원 밖으로 나가다가 주석훈과 마주쳤다.“소원 씨, 여기서 마주치네요.”주석훈이 소원을 향해 헤벌쭉 웃자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어요.”소원은 안지영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어줬다.“내가 바이올린 계속하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 돈을 다시 찾으러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안지영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상철이 소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려줄 때 진아연이 그 돈을 줬는지 말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안상철의 말대로라면 진아연이 돈을 주려다가 결국 주지 않았으니 그 돈이 없어야 맞았지만 실제로 안상철은 그때 돈을 받은 것이다. 하긴 안상철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보수 없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딸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해도 외국으로 나가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확실치도 않은 약속을 쉽게 믿지 못했을 테고 일단은 확실한 무언가, 즉 돈을 줘야만 안상철이 소진용을 찾아갈 결심을 내렸을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결국 이 일을 소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소원은 안상철이 그 돈을 찾으러 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고 그 돈은 결국 경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결국 안상철의 탐욕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소원이 안지영을 위로했다.“아니에요. 그게 왜 지영 씨 탓이에요. 나쁜 사람이 몹쓸 짓을 저지른 건데. 지영 씨도 아버지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잖아요. 지영 씨, 일단 그날 있었던 일을 경찰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요. 최대한 자세하게 빠트린 것 없이 말해야 경찰도 빨리 범인을 찾을 수 있고 삼촌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예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안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너무 무서울 뿐이었는데 소원이 곁에 있으니 무서움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소원을 믿고 의지해왔는데 최근에는 소원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안지영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두려움을 가시기 위해 소원에게 옆에 앉아 있어 달라고 제안했고 강민혜도 안지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술하는 내내 소원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했다.안지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
소원이 육경한을 불러세우더니 따라서 나오며 병실 문을 닫았다.“현재 일은 내가 오해했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원은 옳고 그름에 명확한 사람이었기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허심탄회한 모습은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태도였다.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티가 나지는 않았다.“도와준 거 아니야.”육경한은 연적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았다. 소원도 더는 이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본론으로 돌아왔다.“진아연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도 찾고 있어. 찾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줄래?”진아연이 잡혀들어가기 전에 물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만약 교활한 진아연을 그대로 들여보낸다면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게 뻔했고 베일에 싸인 배후의 지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직접 물어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응. 알겠어. 너는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찾고 있으니까.”진아연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기에 진아연을 찾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 배후는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수단도 만만치 않았다.소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일인데 무슨 일이 있든 직접 헤쳐나가고 싶었다.그때 소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민혜가 걸어온 전화였다.“소원 씨, 안상철이 죽었어요.”전화를 받자마자 강민혜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쿵.머릿속에서 뭔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삼촌이 왜?’소원의 계획대로라면 안상철은 지금쯤 안지영과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죽어버린 건지 의문이었다.‘지영 씨는...’소원이 얼른 물었다.“그러면 지영 씨는요? 딸은 어떻게 됐어요?”강민혜가 말했다.“딸은 안전한 상태지만 충격을 많이 받아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입을 열려 하지 않아서 경찰이 무슨 질문을 하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어... 어떻게 이런 일이...”소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안
그때 문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소원이었다.소원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육경한이 이 정도로 양보했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었다.“현재야...”“누나...”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네가 먼저 말해.”소원이 양보하자 서현재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누나, 그거 알아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한 건 다 안정된 삶을 되찾고 누나랑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지금은...”서현재가 뜸을 들이더니 씁쓸하게 말했다.“지금은 그저 누나가 잘 있기만 하면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요. 언제든 누나가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그 자리에 있을게요.”순간 서현재는 능력이든 다른 부분이든 육경한과 비길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앞으로 몇 년간 피타는 노력을 거쳐 원하던 자리까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육경한처럼 해탈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은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이기적이고 쪼잔해지고 질투에 휩싸이기 마련인데 유진도 아이를 받아들였으니 소원이 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건 시간 문제라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자꾸만 벼랑 끝으로 떨어졌지만 소원만 행복하다면 서현재로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소원은 그런 서현재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뱉은 건 결국 한마디였다.“현재 너는 나의 영원한 가족이야. 유진도 그렇고.”서로에게 위안이 되던 나날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서현재가 유진을 돌봐준 것도 소원은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든 앞으로든 서현재가 원하는 바를 이뤄줄 수가 없었기에 차라리 가족이라는 자리로 남는 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소원은 이미 서현재에게 다시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소원의 중점은 아이를 돌보는 것과 아버지가 만든 회사를 다시 일궈내는 것,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다.“누나, 나도 잊지 않을게요.”서현재는 이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병실로 돌아오는데 육경한이 침대맡에 앉아 깊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
서현재는 육경한이 그를 내쫓는다는 걸 알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아직 망하진 않았어요.”육경한은 그를 관심해 주는 게 아니라 그가 쫄딱 망해서 서울에서 더는 살 수 없기를 바랐지만 서현재도 유진의 아빠라는 말이 떠올라 톡 까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육경한도 유진의 아빠인 서현재가 너무 궁색해지는 건 싫었다.“서한 가문의 제일 큰 라이벌이 요즘 해성으로 실사하러 갔다고 들었는데.”육경한이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하자 서현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현재는 아직 모르는 소식이었다. 해성에서 새로 거론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때 라이벌 회사가 해성으로 간다는 같은 프로젝트를 노린다는 의미였다. 라이벌 회사라 같은 영업 범위였기에 경쟁하는 건 정상이지만 토론이 끝나가는 프로젝트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서현재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고마워요.”육경한이 콧방귀를 뀌었다.“약육강식인 세상에서는 승자가 왕이 되는 법이야. 능력이 부족한 건 다른 사람 탓해도 쓸모없어.”이 말은 서현재가 육경한이 했던 탄압을 복수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이었다. 육경한이 없었다면 서한 그룹이 흔들릴 때 다른 회사에서 서한 그룹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무너져가는 회사라도 떨어질 부스러기는 남아있었다. 게다가 서한 그룹은 완전히 가치를 잃은것도 아니었기에 기회를 노려 서한 그룹의 주문을 앗아간다면 체급을 늘이고 있는 회사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기회를 노리던 일부 회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 회사들에게 육경한과 경쟁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으니 말이다.물론 육경한의 실력도 서울을 제패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용하는 방식과 수단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에 매우 힘든 것들이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는 3시간 만에 한 상장 회사를 파산하게 만든 적도 있으니 육경한을 건드린다는 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서현재도 숨 돌릴 시간이 있
상황이 매우 긴급했기에 육경한은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으로 나와 곁을 지켰고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은 운이 좋으면 빨리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10년을 기다려도 힘들었다. 게다가 유진의 몸 상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소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진에게 그 알약을 먹이려고 했고 육경한도 동의했다. 소원도 잘 회복하고 있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건 약효가 정말 신기하다는 의미였다.약을 먹기 전에 소원과 육경한이 유진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유진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했고 오히려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꼭 나아서 더 좋은 유진이가 될게요.”유진은 그 알약을 먹은 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등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작기도 했고 체질이 약해서 감당 능력이 어른과는 비길 수 없었다.소원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고 서현재도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 유진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그 감정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기에 유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 육경한은 서현재를 보고도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서현재의 눈빛에서 유진에 대한 걱정을 보아내서 그런 것 같았다.서현재는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유진도 서현재를 좋아했기에 육경한은 유진이 깨어났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길 바랐다. 아버지가 된 후로 육경한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감정이라는 게 들어갔다.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제일 큰 변화였다.지금 이 세 사람에겐 같은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진의 건강이었다.세 사람이 이렇게 화목하게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은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 여기 있으니 병원의 모든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알약을 복용한 이튿날 밤, 유진이 잠에서 깼고 얼굴에 윤기가 감도는 게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검사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