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이 찍힌 곳은 다름 아닌 화장실이었기 때문이다.윤혜인이 설명했다.“호텔에 있는 패밀리 화장실이 남자 화장실과 가까웠거든? 호텔 주방에서 일하는 스태프가 화장실에 갔다가 이상한 소리를 듣고 통풍구를 통해 올라간 거야. 그러다 화끈한 장면을 보고 찍은 거지.”정말 단순한 우연이었다. 통풍구로 올라가는 건 호텔 스태프가 아니면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이 영상이 없다 해도 복도 CCTV 영상을 곽경천이 복구해 냈다. 그것으로도 윤혜인의 결백은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었다. 비록 임세희가 나오는 영상보다는 덜 흥미진진하겠지만 말이다.더 신기한 건 이 영상을 건네준 사람이 주훈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건 이준혁도 봤다는 말이다.첫사랑이 이렇게 방탕하게 노는 걸 알았으니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윤혜인이 그 첫사랑을 이렇게 괴롭히는 데도 가만히 있는 걸 봐서는 첫사랑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윤혜인은 복잡한 생각을 버리고 소원의 손을 잡으며 애교를 부렸다.“여기 전시 센터 꼭대기에 맛있는 훠궈집이 있대. 온천에서 반신욕도 할 수 있고. 우리 훠궈 먹고 마사지도 받으러 가자. 어때?”“그래.”멀지 않은 곳. 김성훈이 두 여자의 행복한 뒷모습을 보며 오버했다.“와, 나 이제 윤혜인 씨를 내 우상으로 삼으려고. 인간쓰레기를 치워버리는 방법이 아주 일품인데?”김성훈의 이준혁의 어깨를 툭 치며 비아냥댔다.“네 도움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 설마 실망한 거 아니지?”이준혁이 잠깐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자기를 보호할 수 있으면 좋은 거지.”김성훈이 웃었다.“대범한 척하기는. 아까 진짜 일말의 걱정도 없었어?”“아니, 걱정 안 해.”이준혁이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웃었다.“무슨 일이 있든 내가 지켜줄 거니까.”김성훈은 그런 이준혁이 별로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사랑에 빠진 이준혁이라니. 윤혜인 씨가 사람을 죽이겠다고 해도 너는 칼을
“치워!”소종이 그런 육경한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봤다.“대표님, 이러면 안 돼요. 정말 더위라도 먹으면 심각해진다고요!”“괜찮아.”육경한의 얇은 입술은 어느새 말라서 터져 있었다.“나 괜찮아.”소종은 별수 없이 육경한과 같이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한계가 왔다.바닥에 깔린 타일이 뜨거운 햇빛을 받아 뜨겁게 달궈진 상태였다. 바지를 입고 있어도 닿으면 델 정도로 뜨거웠다. 고기를 올리면 익을 것 같았다.소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을 차렸다. 이따가 육경한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소종이 힘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그렇게 또 3시간이 지났다.육경한의 얼굴은 빨갛던데로부터 하얗게 질렸고 허리도 처음 시작할 때와는 다르게 구부정해졌다.분명 8월 한여름이라 햇빛이 쨍쨍한데 육경한은 오한이 느껴졌다. 한기가 끝도 없이 몸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 같았다.추워도 너무 추웠다. 육경한은 자기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마도 더위를 먹은 듯싶었다.더위가 심하지 않다면 버텨낼 수 있겠지만 더위를 심하게 먹거나 열사병이라도 걸리면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목숨이 귀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소원이 돌아왔으니 죽는 게 아쉬워지는 육경한이었다.이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려왔는데, 꿈에서도 이날만을 그리며 5년을 버텼다. 지금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는 없다.육경한은 뭔가 생각났는지 허리춤에서 날카로운 잭나이프를 꺼냈다. 그러고는 이내 푹하고 다리에 힘껏 찔러넣었다. 고통이 육경한의 의식을 잠시나마 돌아오게 했다.한 번 더 찌르려다 소종이 이를 발견하고 나이프를 낚아챘다.“대표님!”소종이 두려움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육경한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다리에 난 상처를 잡아 뜯으며 정신을 차리고 더 꿇어있으려 했다.다급해진 소종이 얼른 앰뷸런스를 불렀다.구급대가 도착했지만 육경한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다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렇게 천천히 굳어가고 있었다.소종이 무릎을
저녁이 되자 번개가 하늘을 갈랐다.육경한은 쏟아지는 비에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여기에 꿇어있은 지도 이제 7시간이 다 되었다.폭우를 맞고도 육경한은 좋아지지 않았다. 점점 머리가 무거웠고 목구멍에 뭐가 막힌 듯 숨쉬기도 힘들었다.숨을 들이쉴 때마다 물이 기도로 흘러 들어갔다. 육경한은 어깨를 들썩이며 빗속에서 계속 기침만 해댔다. 들숨과 함께 빗물이 다시 기도로 흘러 들어갔고 그렇게 악순환은 계속되었다.풉!육경한이 끝내 피를 한 웅큼 토해냈다. 하지만 그 피는 이내 비에 말끔히 씻겨나갔다. 입가에 묻은 피가 하얘진 입술과 비교되어 더 빨갛게 보였다.“대표님!”소종이 손에 들었던 우산을 내팽개치고는 휘청거리는 남자를 꼭 끌어안고 울먹거리다가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대표님, 제발 부탁드려요... 우리 병원에 좀 가요...”소종이 애타게 타일렀다. 정말 이 모든 걸 대신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소종은 육경한이 외국에서 구한 노숙자였다. 육경한을 만나기 전 그는 늘 사람들에게 맞기만 했는데 그 처지는 강아지보다도 못했다.그러던 어느 날.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를 신은 육경한이 소종의 등에 올라타 그를 구타한 양아치를 걷어찼다.그때 소종은 허리가 눌리는 바람에 바닥에 웅크린 채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런 소종을 향해 손을 내밀어주며 이렇게 물었다.“너 나 따라다니는 게 어때?”그날은 소종이 구원을 받은 날이자 새로 태어난 날이기도 했다. 육경한은 소종에게 권투와 호신술을 도와줬다. 그렇게 두 사람은 외국에서 같이 시장을 개척해 나갔다.소종은 마음속으로 깊이 다짐했다. 평생 이 남자에게만 충성하겠다고, 절대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겠다고 말이다.육경한의 꺼져가는 의식이 소종에 의해 다시 조금 돌아왔다. 그는 소종을 밀어내더니 마치 뭐에 씐 사람처럼 혼자 계속 중얼거렸다.“소원이 그랬어... 만족하면... 내게도... 기회를 준다고...”육경한이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목구멍은 유리 조각을 삼킨 듯 너무 아팠고 말할 때마다 피
소원이 다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소종이었다.구급차를 부르려는데 소종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비틀거리며 다가왔다.“소원 씨, 저는 괜찮습니다.”소종에게서 선명한 혈흔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다리가 조금 불편해 보일 뿐이었다.거세게 내린 비가 완충 작용을 해줬는지 그렇게 심각하게 넘어지지는 않았다.소원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그래도 검사는 해야죠. 일단은 신고하고 기록을 남겨야 할 것 같네요. 아니면 앞으로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소원 씨!”소종이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었다.“소원 씨,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제가 찾아온 건 우리 대표님 좀 가서 봐주셨으면 해서입니다.”소원이 그런 소종을 덤덤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종은 빨갛게 부어오른 눈으로 울먹이며 말했다.“소원 씨, 대표님 지금 8시간째 무릎 꿇고 계십니다. 점심에는 하마터면 더위를 먹을 뻔했는데 지금은 폭우까지 맞았어요. 아까는 피도 많이 토하셨고요. 저러다 정말 무슨 일 날 것 같습니다...”소종은 소원을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에 육경한의 비참한 상태를 최대한 과장해서 말해줬다.하지만 소원은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이렇게 말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소종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고 싶었던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한참 숨을 고른 소종이 다시 입을 열었다.“소원 씨, 소원 씨가 내뱉은 한마디로 대표님은 계속 같은 자리에 꿇어 계십니다.”소원이 웃음을 터트렸다.“육 대표님이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하라면 하라는 대로 다 해요?”“...”“소원 씨, 대표님이 지난 5년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아세요?”소종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은 업무를 보는 것 외에 매일 같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 그 시체가 소원 씨인 줄 알고 늘 함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호흡기가 감염되어 심한 폐렴에 걸리셨죠. 그래서 가끔 각혈도 하시고 숨
소종이 가까이 다가가 보니 육경한은 엄지를 다리에 난 상처에 깊숙이 찔러넣고 있었다. 상처는 이미 비를 맞아 하얗게 번져 있었다. 밖으로 새어 나오는 피만 아니었으면 산 사람이 아니라 시체라고 봐도 무방했다.육경한은 지금 의식이 완전 흐릿한 상태였다. 입술을 뻐끔거리고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소종은 그의 입 모양을 따라 하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겨우 알아냈다.“소원아...”소종은 더는 참지 못하고 바닥에 꿇어앉은 채 큰소리로 울부짖었다.“대표님, 죄송해요... 소원 씨를 아직 찾지 못했어요...”소종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사실을 얘기한다면 육경한의 몸으로 더는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못 찾은 게 아니야...”육경한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소종은 육경한이 직접 훈련한 사람이었기에 소원이 다시 나타난 이상 찾아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소종이 그에게 거짓말을 한 건 처음이었기에 육경한도 문제 삼지는 않았다. 육경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지지리도 못나게 웃어 보였다.“오기 싫다고 했지? 그렇지?”소종이 죄책감에 고개를 끄덕이며 울먹였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소원 씨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어요...”“소원이... 뭐래?”육경한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새로운 피가 새어 나왔다. 마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허약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거짓말하지 마. 나... 나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아... 무슨 말... 소원이 무슨 말 했는데...”소종은 한 번 거짓말하는데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게다가 이미 들킨 상황에서 한 번 더 거짓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소종은 소원이 한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육경한에게 전했다.소원의 질문은 너무나 강력했다. 소종이 덤덤하게 전달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말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원망이 느껴졌다.애초에 그 계약을 훔쳐서 바친 사람은 진아연이었지만 일부러 남겨둔 건 육경한이었다.만약 그때 소원의 뜻에 따라 그 계약만 잘 없앴어도 소원의 아버지는 그렇게 비참한 결말을 맞지 않았을 것이
밖에서 지키고 있던 소종이 간호사의 말에 넋을 잃었다.육경한은 평소에 몸을 아끼는 편은 아니었지만 폐렴 말고는 다른 질병이 없었다. 하지만 소원이 내뱉은 말에 생명이 위급한 상황까지 될 줄은 몰랐다.소종이 멍한 표정으로 간호사에게 물었다.“비서라도 사인이 가능한가요?”간호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사인하면 법적 효력이 생기기 때문에 가족이 사인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대표님은 가족이 없습니다.”간호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결혼은요?”소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부모님은요?”“돌아가셨습니다.”간호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겉은 번지르르한 남자가 가족 하나 없다니. 저 정도 외모면 엄청나게 잘생겼는데 결혼을 못 하는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왜 대를 남길 생각을 못 했을까?간호사는 차트를 소종에게 건네주며 당부했다.“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옆에 사람이 없으면 안 돼요. 일단 사인하고 친척이나 꼭 와야 되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다 알리세요.”심부전은 급성질환이었기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간호사도 혹시나 남은 사람들이 후회를 안고 살아갈까 봐 귀띔한 것이었다.수술실 문이 닫혔다. 소종은 손에 든 차트를 보고 심장이 벌렁거렸다.간호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꼭 와야 되는 사람이라...소종이 얼른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입력했다....문 빌리지.샤워를 마친 소원이 아무렇게나 가운을 걸치고는 맨발로 러그를 밟고 창가로 향했다. 창가엔 갓 개봉한 와인이 놓여 있었다.소원은 와인을 잔에 조금 따랐다. 빨갛게 번지는 와인과 야경이 어우러져 황홀하기 그지없었다.이 도시는 여전히 참 번화했다. 그녀의 거지 같은 삶과는 달리 너무 아름다웠다.소원은 와인을 한 모금 맛보더니 이내 한잔을 다 비웠다. 미각이 잃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시면 취기가 올라왔다.소원은 편한 환경에 있으면서 의식이 흐릿한 걸 좋아했다. 운이 좋으면 부모님이 아직 살아있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그러면 화목했던 장면들이 떠올라 이 거지 같은
소원이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소 비서님, 육경한이 이 정도로 말 잘 듣는 사람인 거 알았으면 절대 꿇리지 않았을 거예요.”소종은 소원이 웃는 게 기괴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나긋한 말투로 말했다.“소원 씨, 저는 소원 씨를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냥 대표님 상황이 너무 안 좋은데 가족도 없고 서류에 사인할 사람도 없어서 그래요. 그리고 대표님이 지금 이 순간 누구를 제일 보고 싶어 하는지도 잘 알아요.”소원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소 비서님, 소 비서님이야말로 내 말뜻을 오해했어요. 내 말은...”소원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이 정도로 말 잘 듣는 줄 알았으면 바로 가서 죽으라고 했죠. 지옥에 가도 시원찮은데 죽으면 오히려 좋죠.”소종은 소원이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 정도로 육경한을 증오할 줄은 몰랐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소 비서님, 동생이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용서하라는 말이 나오는지? 무시한다고 매정한 건지?”소종은 반박할 수 없었다.소원의 말이 맞았다. 서로 입장이 다를 뿐이다. 육경한의 입장에서 생각하니까 그런 육경한이 마음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만약 친한 사람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용서는 개뿔 아마 당장이라도 가서 죽여버리고 싶을 것이다.소원은 듣고 싶지 않은 얘기가 자꾸 들려서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하여 귀찮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다음부터 내가 듣고 싶지 않아 하는 말은 하지 마세요. 내가 제일 듣고 싶은 말이라면 아마 육경한이 죽었다는 소식일 거예요.”뚝하는 소리와 함께 소원이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었다.세상이 왜 이 모양일까?육경한, 그녀에게 온갖 상처란 상처는 다 주고 한이 그룹을 파산하게 만들고 아버지를 핍박해 투신하게 하는 바람에 엄마까지 우울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렇게 육경한은 소원의 자존심을 짓밟았다.오해라는 한마디로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큰 상처를 줄 수는 없다. 그런
소원이 힘겨운 듯 이마를 짚으며 대답했다.“그래.”대답하는 목소리는 전보다 확연히 더 무거워졌다.서현재가 잠깐 침묵하더니 물었다.“누나, 유진이 목소리 듣고 싶지 않아요?”소원은 목구멍에 뭐가 걸린 듯 말이 나오지 않았고 가슴도 잔잔하게 아팠다.한참 지나서야 소원이 매정하고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아니.”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소원의 텅 빈 눈동자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원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모든 위장이 순간 무너지고 말았다.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소원은 유진을 사랑하면서도 증오했다.소원은 어깨를 들썩이며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채 힘없이 울기만 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안았지만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었다....임세희와 이진영이 서로 물고 뜯는 영상이 유출되자 아니나 다를까 며칠간 검색어를 독점했다. 안에 든 내용이 너무 화끈했기 때문이다.이진영이 만났던 남자들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죄다 유부남이었다. 그중에는 도덕의 한계를 벗어난 인물도 들어있어 팬들은 역겨움을 금치 못했다.이진영의 팬덤은 뿔뿔이 흩어졌고 팬카페는 문을 닫게 되었다. 이진영 본인도 모든 광고에서 내려지고 말았다.이진영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 말고도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내야만 했다. 전에 벌어놓은 돈을 다 쏟아붓는다 해도 모자랐다.이어진 소식은 경찰이 이진영의 남편, 시누 엔터의 장 대표를 성추행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했다는 것이었다.그렇게 사건은 대반전을 이루었다.전에 곽아름이 다니는 유치원을 공격하던 광팬들도 경찰에 연행되었고 다른 팬들도 진심으로 반성하며 인터넷에 사과문을 올렸다.이런 행보에 윤혜인과 그녀의 작업실 ‘달밤’도 검색어에 올랐다.여러 큰 회사에서 협력 의향을 보였기에 업무량이 급증해 윤혜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보냈다.DS와 장기적으로 협력하던 고객들도 목표를 한국 본연의 미에 방점을 둔 ‘달밤’을 타깃으로 돌렸다.임세희는 DS 디자인 작업실의 이사로서 큰 잘못을 저지르다 보니 회사에 대한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