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이준혁이 반드시 아름이를 찾을 방법이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곧 이준혁이 연락한 사람들이 필요한 도구를 가져왔다.그 도구는 수많은 천등이었고 각 천등에는 굵은 붓글씨로 글귀가 적혀 있었다.“아름아, 너는 가장 멋진 아이야...”“아름아, 엄마가 운동장에서 기다리고 있어...”“아름아, 모두가 너를 조용히 사랑하고 있어...”“아름아, 삼촌 아름이랑 놀이공원에 같이 가고 싶어...”수많은 격려의 말들이 적혀 있어 보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이후 유치원 선생님들과 모인 사람들이 천등을 하늘로 띄우기 시작했다.마치 수많은 예쁜 등불이 동시에 떠오르는 것처럼, 하늘이 따뜻한 불빛으로 가득 찼고 이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환히 밝혀주었다.윤혜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그 작은 빛들이 모두 그녀의 눈에 들어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더욱 빛나게 했다.이준혁은 반쯤 앉아 그녀의 등을 가볍게 받치며 하늘을 보지 않고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주변은 소란스러웠지만,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 그들 둘만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이 순간은 너무나도 소중했다.그때, 갑자기 멀리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고개를 돌린 윤혜인의 시야에 그 작은 몸이 잔뜩 더러워진 채로 달려오는 아름이의 모습이 보였다.그녀는 즉시 일어나 아름이를 안았다.“아름아!”아름이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으며 윤혜인은 눈물을 흘렸다.“아름아, 엄마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그 작은 얼굴까지 더러워진 채로 아름이도 역시 울기 시작했다.아이는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미안한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미안해요. 아름이가 숨어버려서...”윤혜인은 눈물을 참으며 아름이를 더욱 꽉 안았다.아름이는 아직 세 살 반이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미안해하며 사과할 줄도 알았다.윤혜인은 눈물을 닦으며 아름이를 바라보고 진지하게 물었다.“그 나쁜 아주머니가 뭐라고 했는지 엄마한테 말해줄래?”그녀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아름이가 또다시
윤혜인은 아름이의 통통한 작은 손을 잡고 가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아빠가 없다는 것이 아름이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가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 가시가 아름이의 마음속에서 이렇게나 자라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퍽!”그때, 아름이가 윤혜인의 손을 뿌리치며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엄마는 거짓말쟁이예요!”통통한 입술에 눈물이 가득 맺히며 아름이는 울기 시작했다.“엄마는 재윤 아빠가 아름이 아빠라고 늘 말하지만, 난 한번도 재윤 아빠를 꿈에서 본 적이 없어요! 내 아빠라면서 왜 내 꿈에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아름이가 아빠를 간절히 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윤혜인은 당황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감정이 점점 격해지더니 아름이는 갑자기 그 작은 다리로 어딘가 도망치기 시작했다.“아름아!”윤혜인은 아픔에 찬 목소리로 뒤쫓으려 했지만, 이준혁이 그녀를 막아섰다.“내가 해볼게.”그렇게 윤혜인은 이준혁이 한걸음에 아름이를 따라잡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는 허리를 숙여 아름이의 작은 다리를 잡고 아이를 품에 안았다.처음에는 아름이가 계속 발버둥 치며 저항했지만, 이준혁이 무언가를 말하자 아이가 갑자기 얌전해졌다.멀지 않은 곳에서 이준혁은 아름이를 내려놓고 몸을 낮추어 아이와 눈을 맞추며 대화했다.“아름아, 삼촌 말 들어볼래?”아름이는 고개를 돌려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안 들을래요! 나 삼촌 싫어요!”“그럼 삼촌이 왜 싫은지 말해줄래?”그러자 아름이는 눈을 살짝 훔쳐보며 조금 부끄러워했다.“삼촌, 다른 사람이 삼촌을 아빠라고 부르는 게 싫어요?”아름이는 윤혜인이 그를 아빠라 부르는 것은 이준혁에게 불편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까 마주치고도 애써 모른 척했던 것이었다.이준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응, 만약 모르는 아이가 삼촌을 아빠라고 부르면 삼촌은 불편할 거야...”“흑흑흑...”이준혁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아름이는 다시 슬프게 울기
전에도 사람들은 곽아름이 그녀와 닮았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이 남자와 비겨보니 턱, 코, 귀가 남자보다 작을 뿐 거의 판박이였다. 윤혜인을 꼭 빼닮은 눈도 눈동자가 남자와 신기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윤혜인은 이런 생각에 놀라고 말았다.곽아름은 켕기는 게 있는 듯한 눈빛으로 윤혜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엄마, 미안해요.”윤혜인은 이준혁처럼 도도한 사람이 아이와 잘 지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윤혜인이 곽아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엄마가 봐준다.”배남준이 주훈을 도와 손찌검을 한 사람들을 경찰서로 데려갔기에 곽경천은 윤혜인이 돌아올 수 있게 차를 보냈다. 기사는 나이가 많지 않은 여자였다. 짧은 단발이 세련되면서도 일을 잘한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아가씨, 여은입니다. 도련님께서 보내셨어요. 앞으로 제가 아가씨의 안전을 책임질 거예요.”곽경천은 윤혜인이 다닐 때 보디가드를 대동하는 것을 꺼린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니 더는 시름 놓고 있을 수 없어 여자 보디가드를 붙인 것이었다.윤혜인은 이준혁과 인사하고 차에 타려 했다. 그때 곽아름이 윤혜인의 손을 뿌리치더니 잽싸게 이준혁의 다리를 부둥켜안으며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엄마, 나는 삼촌 대디랑 집에 갈 거야.”삼촌 대디?윤혜인은 이런 지칭에 눈까풀이 뛰었다.“아름아!”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엄숙하게 말했다.“착하지. 우린 우리 차 타고 가자.”“싫어요!”곽아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이준혁의 다리를 안고 위로 기어올랐다.이에 이준혁이 한 손으로 곽아름을 안아 올렸고 곽아름은 순간 이준혁의 팔에 올라앉았다. 순간 곽아름이 까르르 웃었다.“아름아!”윤혜인이 다급하게 불렀다. 잠깐 들었던 이상한 생각 때문에 두 사람이 그렇게 친해진 게 별로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곽아름은 이준혁의 목을 부둥켜안고 애교를 부렸다.“엄마, 우리 삼촌 대디 차 타고 집에 가요. 삼촌 대디 차는 지붕으로 별도 보여요. 아름이도 보고 싶어요.”이준혁은 곽아름을 위해 특별히
“아름아, 아빠는...”이준혁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고쳤다.“삼촌 대디도 너 사랑해. 그것도 많이 많이.”두 사람은 미련 가득한 표정으로 서로 애정을 토해내고 있었다.윤혜인은 이 광경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복잡해지면서 살짝 질투가 나기도 했다. 어렵게 키워낸 아이가 며칠만에 낯선 남자에게 호감을 보이니 말이다.정신과 의사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곽아름이 가끔 자폐 증상을 보이는 건 애정 결핍의 표현이라고 말이다. 곽아름에게 좋아하는 아빠를 찾아주면 모든 문제가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다.보통 남자라면 윤혜인도 진지하게 고민해 봤을 것이다. 하지만 곽아름이 호감을 보이는 사람은 건드리면 안 되는 전남편이었다.“아름아, 착하지. 엄마 말 잘 들으면 엄마 허락받고 삼촌 대디랑 주말에 놀이공원 보내줄 수도 있어.”이준혁이 앞으로 다가와 윤혜인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이에 곽아름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물었다.“엄마, 진짜 그래도 돼요?”윤혜인은 바짝 쳐든 곽아름의 얼굴을 보고 거절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지를 두는 걸 잊지 않았다.“엄마가 주말에 바쁜지 안 바쁜지 보고. 아름아, 일단 홍 아줌마랑 들어가 있어. 엄마는 삼촌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곽아름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삼촌 대디, 그럼 굿나잇.”곽아름이 들어가자 윤혜인이 이렇게 말했다.“오늘 일은 고마워요.”“아니야. 고마울 거 없어.”윤혜인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그리고 어제 있었던 일도 사과할게요.”경찰의 말에 의하면 연규성이 그녀를 먼저 구하긴 했지만 이준혁이 힘을 보태서야 그녀를 안전하게 호텔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고 했다.늦게 전해진 감사 인사에 이준혁의 목젖이 움직이더니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사실 나도 하고 싶었어.”그도 남자였는지라 윤혜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충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윤혜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의심했다. 곽아름이 없으니 이준혁도 딱히 말을 조심하지는
몇분만에 이준혁이 구미호의 꼬리를 드러낼 줄은 몰랐다.“괜찮아. 천천히 생각해 봐.”이준혁이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리며 확신에 찬 눈빛을 몰래 감췄다.아마도 전에 제일 극혐하던 짓을 할지도 모른다. 내연남 같은 거 말이다.살살 타일러도 안 되면 억지로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아무튼 이준혁에게 포기란 없다....윤혜인은 아침에 곽경천이 L 국에서 보내온 자료를 받았다. 마지막 페이지에 장 대표의 부인 이진영에 관한 자료도 있었다.자료를 확인한 윤혜인은 생각을 정리하고 나갈 준비를 했다. 나가기 전에 컨실러로 다크서클을 조금 가렸다. 가리면 가릴수록 속에서 화가 들끓었다.흑심을 품은 이준혁이 그날 일을 녹음한 것도 모자라 카피해서 보내준 것이다. 어젯밤 녹음을 다 들은 윤혜인은 너무 쪽팔려서 잠이 오지 않았다. 나체 사진으로 협박당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웠다.차에 올라서 보니 운전기사는 여전히 여은이었다. 여은은 어제 받은 정보를 윤혜인에게 전했다.“아가씨, 어제 받은 내부 정보인데 이진영 그 여자가 10시에 기자회견을 다시 소집해 아가씨를 폭로하겠다고 했답니다.”“괜찮아요. 시간 충분해요.”윤혜인은 이 인간쓰레기를 꼭 혼내주리라 다짐했다. 이때 전화가 울렸다. 주훈이 보내준 내용은 더 놀라웠다.[대표님께서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주훈이 이렇게 덧붙였다.[네, 대신 고맙다고 전해주세요.]주훈이 답장했다.[말로만 하는 감사 인사는 받지 않겠다고 하십니다.]“...”[그럼 감사는 생략할게요.]윤혜인이 이를 악물고 이렇게 보냈다. 점점 막무가내로 나오는 이준혁에게 져주고 싶지 않았다.장진영이 기자회견을 한다는 장소에 도착한 윤혜인이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려보니 빨간 입술에 선글라스를 끼고 웨이브 머리를 한 여자가 보였다. 다름 아닌 소원이었다.윤혜인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소원아?”소원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누가 감히 내 친구를 건드리는지 두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둘은 전
소원은 섹시한 블랙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여전히 말랐지만 몸매는 여전히 쭉쭉빵빵했다. 육경한은 그런 소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사실 육경한은 소원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숨 쉬기도 힘들만큼 마음이 아팠다. 이 고통은 5년 전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의 시체를 끌어안고 울던 그때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시간이었다.소원은 어디서 이름 없는 시체를 구해 그를 희롱한 것이었다.그날 소원을 우연히 마주치고 바로 시체에서 DNA를 채취해 조회했지만 맞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 길 가던 노숙자와 마주친 것 같았다. 하지만 육경한은 이런 장난에 바보처럼 놀아나고 말았다.육경한은 그런 소원을 사악하고 매정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가 당한 걸 생각하면 목 졸라 죽여도 시원치 않았다. 하지만 왠지 자꾸만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에 전해지는 고통도 파도처럼 계속 밀려들기만 할뿐 끝나지 않았다. 총을 맞는다 해도 이 정도로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소원은 육경한과 마주친 것에 크게 놀라지 않은 듯 보였다. 그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이렇게 물었다.“육경한, 이거 좀 놓지?”태연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는 걸로 봐서 소원은 육경한에게 전혀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덤덤한 말투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이 같았다.하지 말아야 할 장난을 한 건 분명 소원인데 왜 그녀는 이렇게 태연하고 침착할 수 있는 거지? 도대체 왜?육경한은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입 밖으로 내뱉었다.“소원. 나 갖고 노니까 재밌었니?”소원이 입을 열기도 전에 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다.“저기요. 소원이 놓아달라는 거 못 들으셨어요?”육경한은 윤혜인의 말을 아예 듣지 못한 듯 여전히 손목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윤혜인이 손을 내밀어 육경한을 뜯어말리며 화냈다.“이거 놔요!”육경한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윤혜인을 밀쳐내려 했지만 가늘고 약한 팔에 단단히 잡
주훈은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경매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가 어디 있는지 이준혁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냥 조금 더 에돌아가는 수고를 무릅쓰고 윤혜인과 더 있고 싶어서 그런 것이었다.하지만 눈치 없는 김성훈이 찬란하게 웃으며 말했다.“앞으로 너희들이랑 좀 작작 다녀야겠어. 아니면 나까지 윤혜인 씨한테 홀대당하겠는걸?”이준혁이 고개를 돌려 김성훈을 힐끔 쳐다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넌 솔로 기간이 너무 오래된 것 같아.”“...”김성훈은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 이런 팩폭을 들어야 하는 걸까? 솔로가 뭔 죄인가?이준혁이 이내 이렇게 덧붙였다.“너랑 잘 어울릴만한 돈 많은 여자 알고 있는데.”김성훈은 입이 귀에 걸릴 정도였다.“걱정하지 마. 나 아직 짱짱해. 소개팅해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우씨 가문 셋째 딸, 우희 말이야.”“이런!”김성훈이 괴성을 질렀다.“어떻게 우희를 소개해 줄 생각해? 그런 드센 여자를 소개해 준다는 건 나보고 죽으라는 거 아니야?”우희는 사랑에 죽고 사는 사랑에 미친 여자로 소문나 있었다. 우희가 전에 쫓아다니던 남자는 그 공세를 이기지 못해 이민을 선택했고 다시는 서울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제일 중요한 건 우희가 아주 어릴 때 김성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김성훈이 외국으로 가고 나서야 목표를 바꿨다.김성훈이 귀국한 지도 꽤 오래됐지만 우희는 그를 떠올리지 못한 듯싶었다. 우희가 쫓아다니던 그 시간은 마치 악몽처럼 생각날 때마다 김성훈을 괴롭게 했다.“나한테 우희를 소개해 주면 나도 윤혜인 씨한테 다른 도련님 소개해 줘야지. 요즘 서울 재벌 3세들이 그렇게 우수하다던데. 야망이 큰데 연하라 풋풋하니 데리고 놀기 딱 좋지...”이준혁이 차갑게 웃으며 대뜸 이렇게 불렀다.“우희야.”김성훈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이름 부른다고 내가 무서워할 줄 알고? 나 김성훈, 이 세상에 무서울 게 하나 없...”“준혁 오빠!상큼한 목소리가 김
“나는...”육경한이 말끝을 맺기도 전에 소원이 비아냥댔다.“내가 왜 죽지 않고 살았나 했더니 다 너 때문이네. 죽은 것도 억울한데 내 명예까지 실추되는 게 억울했나 봐.”육경한의 잘생겼지만 차가운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왜? 할 말 없어?”소원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할 말 없으면 비켜. 기억해. 이건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가 될 거야. 다음은 없어.”소원이 이렇게 말하더니 몸을 돌렸다. 하지만 육경한이 큰 손바닥으로 소원을 벽에 바짝 밀었다.육경한은 어두운 눈동자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마치 앞에 선 소원까지 활활 태우려는 것 같았다.그는 소원을 부서트리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맞다고 하면?”이런 말을 하는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5년간 힘든 시간을 보내며 차갑던 마음도 그녀라면 무서울 정도로 뜨거워지는 사람으로 변했다.아득하고 절망적인 나날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눈앞에 보이는 이 사람을, 살아서 움직이는 이 사람을 놓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시뻘겋게 충혈된 육경한의 눈은 피가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캐물었다.“소원아, 나 진짜 너 사랑해. 너 없으면 못 살 정도로 말이야. 이제 어떡할 거야?”이렇게 말한 육경한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소원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 표정에서 육경한은 역겨움과 매정함을 읽어냈다.정확하게 읽었다. 소원은 그런 육경한에게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그저 죽도록 싫을 뿐이다. 이 감정을 육경한이 정확하게 보고 알아채고 깨닫길 바랐다. 소원에게 육경한은 그저 쓰레기일 뿐이라는 걸 말이다.“육경한, 너 정말 역겹다.”하지만 이 말은 육경한에게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육경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소원아, 그런 말로는 나 못 밀어내.”이제 더는 5년 전에 뭐만 하면 발끈하던 육경한이 아니었다.“네가 싫어하는
“언니, 정말 너무 예쁘다. 연예인이에요?”여자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했다.소원은 살짝 난감했다. 얼굴에 아직 상처가 있었지만 벙거지 모자와 마스크에 가려져 두눈만 보였다. 그래도 눈이 예쁘고 아우라가 남달랐기에 살짝만 꾸미자 연예인이 몰래 산부인과에 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나 연예인 아니야. 그저 일반인이야.”소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딱 봐도 일반인이 아닌데. 남편이 너무 잘생겼잖아요. 대박. 나 현실에서 이렇게 잘생긴 남자 본 건 처음이에요.”칭찬을 아끼지 않는 여자를 보며 얼음 같던 남자의 얼굴이 사르르 녹았다. 육경한은 보기 드물게 여자에게 먼저 인사했다.“안녕.”잘생겼다고 칭찬해서가 아니라 남편이라는 말이 너무 듣기 좋았기 때문이다. 여자가 잘생긴 남자를 보며 어쩔 바를 몰라 얼굴을 빨개지자 여자의 남편이 바로 질투했다.“작작 해. 외모지상주의야. 침 나오겠다.”하지만 청년은 여자를 욕하는 게 아니라 그저 비아냥댈 뿐이었다. 여자는 남자의 귀띔에 정신을 차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내가 잘생긴 남자만 보면 얼굴 빨개지는 거 알잖아.”여자가 고개를 돌려 소원에게 웃었다.“언니, 화내지 마요. 그저 남편이 너무 잘생겨서 그랬을 뿐이지 다른 뜻은 없어요.”여자의 남편도 따라서 해명했다.“맞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와이프가 외모지상주의인데 가끔 티브이에 잘생긴 남자가 나오면 침도 흘리고 그래요. 오랜만에 옆에서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보니까 감정 조절을 잘못했네요.”“아니요. 화 안 났어요. 게다가 이 사람은 내 남편이 아니에요.”그러니 소원이 화날 것도 없었다. 소원은 원래도 다른 사람이 육경한을 보든지 말든지 상관없었지만 이 말에 분위기가 딱딱해지고 말았다.여기에 줄까지 섰으면서 남편인지 아닌지 다투는 건 별로 의미가 없었다. 아무튼 이따가 다 남편이 될 것이니 말이다. 다만 소원이 강조하자 어딘가 살짝 이상했다.육경한의 안색이 굳어졌지만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설명할 리도 없었다.“여자가 웃으며 말했
“내가 이미 준비해 뒀어.”육경한이 말했다.이내 그는 신분증을 꺼내 들었고 소원이 그것을 낚아채서 펼쳐 보았다.그 안에는 소원의 신분증 사본은 물론 그녀 어머니의 주민등록증 사본도 포함되어 있었다.육경한은 정말로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사람이었다.‘엄마 주민등록증 사본 복원해 놓을 줄이야...’이쯤 되니 소원은 이해할 수 없었다.이 정도로 능력이 있다면 굳이 소원이 나설 필요도 없이 육경한은 두 사람의 혼인신고를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왜 꼭 같이 구청까지 와야 했지? 서로를 사랑하는 연인도 아닌데... 이런 곳에 와서 애정을 가장하는 게 정말 불편하지도 않나?’소원은 냉랭하게 말했다.“이 정도는 뭐든 할 수 있으면서... 여기 오는 건 쓸데없는 일이었잖아.”“쓸데없는 일이 아니지.”육경한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이 일은 직접 해야 의미가 있잖아.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싶지 않아.”그의 말에 소원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그녀에게 이렇게 정상적으로 말을 걸고 날카롭게 대립하지 않는 육경한은 너무 낯설었다.게다가 그의 말투에는 어딘가 소원을 달래려는 뉘앙스까지 숨어 있었다.소원은 곧바로 경계심을 느끼며 구청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한 발짝이라도 더 떨어지려 애썼다.육경한은 이런 그녀의 작은 몸짓을 눈치챘지만 화를 내기는커녕 입가에 미소를 띠며 소원의 그런 모습마저 귀엽게 느껴졌다.이른 아침이라 구청은 막 문을 연 상태였다.소원은 육경한이 분명 미리 사람을 준비시켜 VIP 통로라도 열어놓았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야 그녀도 혼인신고를 빨리 끝내고 떠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하지만 남자는 태연하게 뒤에서 걸어오며 손에 들린 번호표를 보여주었다.23번.소원은 말문이 막혔다.직접 하겠다던 육경한의 말이 허언은 아니었던 것이다.그는 정말로 줄을 서서 기다리려 하고 있었다.문이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23쌍의 커플이 앞서 대기하고 있었다.소원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오늘 무슨 특별한 날이라도 되나
그 감정은 마치 황량한 사막에서 자라난 초록빛 잔디처럼 거칠고 끈질기게 뻗어 나갔다.그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내면을 억지로 찢어놓으며 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소원은 곧 그 감정을 냉정하게 끊어냈다.애초에 있어서는 안 될 감정이었다.소원과 육경한 사이에는 이미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더는 이런 부질없는 감정이 그녀를 흔들거나 방해해서는 안 되었다.오랜 침묵이 이어지면서 남자의 모든 희망은 서서히 사라졌다.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역겹다고 해도 평생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소원, 그 말 받아줄게.”소원은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육경한이 다시 말했다.“오늘 차에서 내리는 순간 난 서씨 가문을 상대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거야. 너 그 남자 놓지 못한다며?”그의 눈빛에는 진한 증오가 담겨 있었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얼음처럼 차가웠다.“내가 그 사람 없애버릴 거야.”“뭐라고?”화들짝 놀란 소원은 고개를 돌리며 손에 힘을 주었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손등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나한테는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육경한은 무표정하게 말했다.“그리고 너도 알잖아. 네가 어제 한 일은 이미 방씨 가문에 알려졌을 거야. 내 보호 없이는 방민아나 방민기 중 누구도 널 가만두지 않을걸.”그의 말은 소원의 속을 꿰뚫고 있었다.정확히 그녀가 약해질 수밖에 없는 부분을 찌르고 있는 것이었다.“지금 나와의 거래를 포기한다면 너뿐만 아니라 네 주변 사람들까지 위험해질 거야. 네 친구 영숙이라는 사람도 포함해서 말이야.”육경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소원이 차에서 내리는 순간, 방민아는 분명히 그녀를 죽도록 미워하게 될 것이다.그리고 영숙은 그녀의 분노를 가장 먼저 받을 대상이 될 것이다.소원은 단순히 자신만이 아닌 그녀를 도와준 영숙의 안전도 무시할 수 없었다.육경한은 고개를 숙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소원, 선택해야 해. 뭘 선택해야 할지 잘 알고 있을 거야.”소원은 침묵했다.그들의 내면이
차에서 내리려던 소원이 동작이 순간 멈췄다.육경한의 차가운 목소리가 얇은 입술을 통해 들려왔다.“소원, 이 차에서 내린다면 우리의 거래는 끝나는 거야. 내가 말한 대로 기회 없다고 했으면 진짜로 없는 거라고.”그는 이미 그녀의 심리를 꿰뚫어 본 듯 냉담하게 덧붙였다.“억지로 하라는 건 아니야. 잘 생각해 봐.”움직일 수도 없이 소원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마치 돌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차에서 내린다는 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지만 육경한과 혼인신고서를 작성하겠다는 건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농담이었다.‘내가 어떻게 육경한이랑 결혼을 해?’그들은 원수였다.비록 유진이라는 아이가 둘 사이를 연결해주고 있다 해도, 비록 그들이 지금 유진이의 혈연관계로 묶여 있다 해도, 그들 사이에 깊이 새겨진 사랑과 증오의 복잡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소원은 자신이 평생 이 남자와 부부가 되는 건 불가능하며 그래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다.이 문제는 더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단 1초라도 더 고민하는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불경이었다.아버지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누구인지,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변명할 여지조차 없는 일이었다.갑자기 숨이 가빠지더니 소원은 문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은 채 말했다.“난 이미 충분히 생각했어. 당신이랑 결혼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육경한.”문이 열렸다.소원이 몸을 낮춰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등 뒤에서 남자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러니까 내 애인이 되어 내 침대에서 잘 수는 있지만 내 가족의 일원이 되는 건 못 받아들이겠다는 거야?”소원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이 남자는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생각을 간파한 것이었다.이 거래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다. 유진이와 서현재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타협이었다.지금 당장은 더 나은 방법이 없었고 유진이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물러서야만 했다.하지만 이 긴급한 위기가 지
그녀는 유진이에게도 항상 그렇게 가르쳐 왔다.무려 1분 동안 육경한은 그녀를 바라봤다.“옷은 조금 있다 가져올 테니 입고 내려와.”곧 이 한마디를 던지고 그는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그제야 소원은 한숨을 돌린 듯했다.다음 순간, 그녀는 힘이 풀려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명확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한 것도 아니었다. 육경한이 그렇게 말했다는 건 여지가 있다는 뜻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우미가 문을 두드리며 옷을 들고 들어왔다.옷은 몸에 딱 맞는 사이즈의 옷이었다.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도우미가 아침 식사를 식탁 위에 준비해 놓고 말했다.“대표님께서 아침을 다 드시고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소원은 육경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전날의 과로와 몸의 통증 때문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게다가 아침 식사의 고소한 냄새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이었다.결국 소원은 식탁에 앉아 아침을 천천히 다 먹었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자 남자가 거실 소파에 앉아 길게 다리를 꼰 채 신문을 읽고 있는게 보였다.앞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놓여 있었다.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육경한은 여전히 아침을 거르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었다.그 한 잔이면 완벽한 컨디션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소원이 내려오는 것을 보자 그는 신문을 내려놓고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번에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향했다.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소원은 일단 따라나섰다.남자는 이미 차에 올라 있었다. 뒷좌석 문이 열려 있었고 운전기사는 그녀가 탈 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닫아주었다.소원은 고개를 숙이고 차에 올라 육경한의 오른편에 앉았다.운전기사가 문을 닫고 출발하자 소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지금 어디 가는 거야?”육경한은 단 한 마디로 대답했다.“구청.”“...뭐라고?”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소원은 눈을 크게 뜨고는 다시 물었다.“육경한, 지금
남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한 걸음 다가왔다.차갑고 섬뜩한 육경한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고도 속으로 긴장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만약 그가 화를 낸다면 지금 그의 집에 있는 상황에서 소원이 저항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지금 나 위협하고 있는 거야?”육경한이 입을 떼자마자 강렬한 압박감이 그녀를 덮쳤다.소원은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주며 평온한 눈빛으로 그의 시선을 마주한 채 대답했다.“위협이 아니야. 단지 거래지. 내가 현재를 지켜달라고 부탁하는 이유는 현재가 유진이의 생명의 은인이라서야. 그때 그 해변 절벽에서 현재가 없었다면 나는 이미 유진이와 함께 떨어져 죽었을 거야. 현재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와 유진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소원은 육경한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그를 자극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서현재에게도 불리했다.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유진이의 안전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육경한에게 서현재의 안전도 지켜달라고 하는 것이다.이건 육경한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녀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변화무쌍한 서울에서 뿌리 없는 두 사람이 스스로 살아남으려면 정말 쉽지 않았다.더군다나 그녀는 이미 수많은 적을 만들어 놓은 상태였으니 말이다.비록 그 적들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지만 소원은 어쩔 수 없이 맞서야만 했다.지난밤 만약 영숙의 말이 아니었다면 소원은 지금 이토록 빠르게 마음을 고치지 못했을 것이다.영숙이 말했다.“스스로 살아가는 게 고결하게 보일 거라는 착각은 하지 마. 오히려 스스로만 의지해서 초라하게 산다면 사람들의 조롱거리밖에 안 될 거야. 똑똑한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모든 기회를 붙잡는 법이지. 법을 어기지만 않으면 자신을 도울 수 있는 길은 옳은 길이야. 쓸데없는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쓸 필요 없어...”영숙의 위로에 소원은 많은 것을 깨달았다.그동안 수없이 부딪혀 왔던 벽들, 이제는 좀 더 똑똑하게 자신이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소원은 눈앞에 놓인 담백하고 향긋한 보양식을 보며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몸이 다쳤을 때는 보양식으로 보충할 수 있다지만 마음은 어떡해야 하지? 상처 입은 마음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비록 입맛은 없었지만 그녀는 억지로 음식을 삼켰다.건강한 몸이 필요했다.절식하며 저항하는 건 미성숙한 아이들이나 할 짓이었다.약해진 몸으로는 아무런 계획도 세울 수 없고 제대로 된 판단도 할 수 없었다.억지로 먹긴 했지만 그 양은 겨우 생명을 유지할 정도에 불과했다.정상적인 사람이 배부르게 먹을 양에는 한참 못 미쳤다.남은 음식을 도우미가 들고 나갈 때, 육경한은 그 모습을 흘낏 보며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연근을 좋아하니까 다음 끼니엔 연근 요리를 준비해.”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지만 도우미는 속으로 생각했다.‘연근 같은 사소한 취향까지 기억하다니... 이 여자는 정말 육 대표님께 특별한 존재임이 틀림없어.’다음 날 아침, 소원은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도우미에게 말했다.“육 대표님을 불러주세요.”그녀에게는 삼일이나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유진이의 안전은 단 한순간도 미룰 수 없는 문제였다.곧이어 육경한이 방 안에 들어서자 방 안의 분위기는 한순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소원이 입을 열었다.“조건 받아들일게.”이 결정에 육경한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사람은 약점이 있으면 잡히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소원의 약점은 언제나 그녀의 소중한 사람들이었다.그녀는 어머니를 포기할 수도, 아이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소원을 굴복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하지만 육경한은 그동안 그런 수를 쓰지 않았다.자신에게 아직 그 알량한 자신감이 남아 있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결국 육경한은 그 자신감이 얼마나 허망한지 깨달았고 소원은 그에게 남아 있는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하지만 나도 조건이 있어.”소원이 덧붙였다.육경한은 그녀가 조건을 제시하는 일에 대해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히려 조건을 내놓지 않는다면 그건 소원
육경한은 눈앞의 여자를 산산조각 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와 욕망이 뒤섞였다.조금 전의 짧은 접촉만으로도 그의 온몸의 세포가 깨어난 듯했다.그녀를 지금 이 자리에서 눌러 제 몸 어디 한 부분에라도 붙여두고 싶었다.다시는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더는 다른 남자를 유혹하지 못하도록 말이다.특히 그녀가 술에 취해 무의식적으로 내뱉었던 ‘현재야’라는 말은 마치 날카로운 가시처럼 그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그는 지금 당장 서현재를 붙잡아 바다 깊숙이 가라앉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육경한, 양심에 손을 얹고 우리 모자에게 부끄럽지 않아? 왜 내가 당신에게 빌어야 하지? 유진이는 당신 아들 아니야?!”소원은 눈가가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격분하며 그를 노려보았다.눈앞의 이 남자가 자신을 위협하는 모습에 깊은 증오를 느꼈다.육경한은 차분히 말했다.“내가 두 사람에게 잘못한 건 인정해. 하지만 네가 나한테 그걸 만회할 기회를 준 적이 없었잖아.”그의 말은 소원에게는 터무니없게 들렸다.그렇지만 육경한은 개의치 않았다.소원을 곁에 둘 수만 있다면 비웃음을 사는 것쯤은 상관없었다.“네가 유진이의 엄마로 돌아와 내 곁에 머문다면 내가 필요한 권리를 줄 거야. 하지만 네가 유진이의 엄마가 아니라면 그 권리는 너와 아무 상관없어.”육경한의 말은 현실적이고도 냉정했다.교환을 원하는 것이었다.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고 그는 분명히 했다.곧 소원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육경한, 당신 왜 이래? 이건 사랑이 아니야! 우리 둘 사이엔 사랑 따윈 없어!”극도로 지친 소원은 무력감을 느꼈다.육경한은 이기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과는 항상 같았다.그를 이길 수 없었고 심지어 서현재조차 위험에 빠져 있었다.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눈빛이 어두워진 채 육경한은 그녀의 상처를 조심스레 손끝으로 쓰다듬었다.“이제 와서 사랑이니 뭐니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그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남자는 소원의 손가락을 단단히 얽으며 열 손가락을 맞물렸다.그리고 조금씩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그 키스는 어젯밤 일에 대한 대가야. 이제부터가 내가 내놓을 조건이야.”소원은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이번엔 또 뭘 하려는 거야!”“뭘 하겠어? 당연히...”눈을 가늘게 뜨더니 육경한은 고개를 숙였다.“널 가질 거야.”뒤이어 거칠고 압도적인 키스가 다시금 그녀에게 덮쳐왔다.이번 키스는 이전 것보다 훨씬 강렬하고 더 거침없었다.조금 전의 키스는 단순한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소원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남자의 가슴을 치며 몸부림쳤다.그녀의 손톱이 등과 목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남겼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남자는 소원을 침대 위로 강제로 밀어 눕히고 그녀의 다리를 가슴 위로 억누르며 반항할 여지를 완전히 차단했다.그의 뜨겁고 거친 키스는 소원의 입술에서 목덜미로 이어졌고 술에 취한 듯한 짙은 욕망이 가득했다.남자의 손은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타고 내려가며 탐욕스럽게 그녀를 더듬었다.서로 뒤엉킨 숨소리는 남자가 흥분했을 때만 내뱉는 거친 숨결이었다.정신이 아득해지며 소원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육경한이 이렇게 폭력적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분명 최근에는 자신과 거리를 두려는 태도를 보였던 그가 왜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눈빛에 진한 욕망의 빛이 서린 채 육경한은 거친 숨을 내쉬며 그녀를 잠시 놓아주었다.“아까 나한테 물었었지? 내가 원하는 게 뭐냐고.”그는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내 조건은 간단해. 널 내게 줘. 그러면 내가 유진이의 엄마로 만들어줄게.”소원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멍해졌다.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유진이의 엄마’라니. 유진이는 원래부터 그녀의 아이다.‘난 이미 유진이의 엄마잖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육경한은 소원이 자신의 말뜻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