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 역시 얼굴이 창백해지며 주먹을 불끈 쥐었고 온몸이 분노로 덜덜 떨렸다.속에 쌓인 게 많았던 이준혁은 거침없이 날카로운 말을 뱉었다.하지만 가벼운 떨림을 억누르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보는 순간, 그는 마음 한구석에서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속으로 이성을 잃은 자신에게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더 이상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신경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그녀를 안고 싶은 두 손이 주체하지 못하고 또다시 그녀를 아프게 했다.그 생각에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지만 윤혜인이 그의 손길을 피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고집스럽게 말했다.“준혁 씨, 난 당신이랑 안 자요.”그는 곧 결혼할 텐데 아무리 자존심을 버렸다고 해도 내연녀가 될 수는 없었다.들어 올린 이준혁의 손이 허공에 멈칫하며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또 괜한 죄책감을 느꼈지!쾅!남자가 문을 세게 닫았고 주위에는 침묵이 흘렀다.소원의 현재 상황에 대한 걱정과 떨림이 윤혜인을 괴롭혔다.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그녀는 마침내 감정이 통제 불능이 되어 눈물이 흘러내렸다.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밤을 지새운 윤혜인은 다음 날 쉬는 시간에 맞춰 서둘러 병원에 있는 소진용과 전미영을 보러 갔다.마침내 한 가지 소식이 들려왔다.육경한의 약혼녀가 다쳐 병원에 입원한 걸 보아 소원의 구속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육경한의 약혼녀가 어디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오후, 윤혜인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울 때 한구운의 전화가 걸려 왔다.윤혜인은 전화를 받았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마침내 한구운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혜인아, 잘 지내?”윤혜인은 차갑게 말했다.“네, 병원비는 이미 계좌로 입금했어요.”한구운은 잠시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혜인아, 내가 돈이 필요한 게 아니란 걸 알잖아.”윤혜인은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속였다는 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고 그라는 사람에 대한 의구심이 들어 차갑게 말했
그곳으로 보내고도 사람까지 매수해 소원을 괴롭히다니.윤혜인은 다급하게 말했다.“선배, 어떡해요, 빨리 소원이 구해 주세요.”오랜만에 듣는 선배라는 호칭에 한구운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도와줄 수는 있지만 조건이 있어.”말하며 먹잇감을 노리는 늑대의 눈빛과도 같은 남자의 눈동자에 윤혜인은 낯선 기분이 들었다.“무슨 조건이요?”한구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윤혜인에게 다가가 앉았다.낯선 분위기에 윤혜인은 팔의 솜털이 바짝 섰고 급히 몸을 뒤로 젖혔지만 한구운은 그녀를 강하게 끌어당겼다.그의 긴 손가락이 윤혜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내 여자 친구가 되어줘, 너의 모든 게 내 것이 되는 거.”손 아래 닿는 피부는 백자처럼 섬세하고 부드러웠고, 꽃잎 같은 입술은 촉촉하고 도톰했다.한구운의 목울대가 일렁거렸다. 처음으로 여자에게 거센 충동을 느끼며 통제 불능의 반응을 보였다.그는 짙은 눈빛으로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당겨 얇은 입술을 갖다 댔다.윤혜인은 깜짝 놀랐다.너무 갑작스러워서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더군다나 이곳은 투명한 창문이 있는 사무실인데 어떻게 감히 여기서 자신을 범한단 말인가!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얼굴을 돌리고 손을 뻗어 남자의 입술을 막은 채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하지만 남자는 쉽게 놓아주지 않았고 거센 불에 휩싸인 듯 달아올라 당장이라도 여자를 품고 싶은 욕망에 불타고 있었다.그는 손바닥에 힘을 주어 그녀를 소파로 밀어붙였고 그의 건장한 몸으로 그녀를 덮쳤다.윤혜인은 두 손이 남자에게 잡혀 소파 팔걸이에 포박당한 채 짓눌렸다.당황한 그녀는 눈앞에 있는 남자가 그토록 낯설게 느껴졌다.“한구운 씨, 이건 범죄에요. 빨리 이거 놔줘요!”한구운이 한 손으로 안경을 벗자 다정했던 눈빛은 사라지고 서슬 퍼런 냉기만 남아 있었다.그가 음침하게 말했다. “혜인아, 넌 원래 내 것이었어.” 윤혜인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고, 무섭도록 강한 남
한구운은 손끝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부드럽게 말했다.“너인 줄 알았으면 진작 널 가졌을 거야. 넌 내게 정말 소중한 존재야, 알지?”심연의 지옥 같은 과거에서 오직 그 소녀만이 그가 여전히 사람이고,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느끼게 해주었다.눈물이 멈추지 않는 윤혜인은 도무지 한구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녀는 밖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곧바로 소리를 질렀다.“도와줘요! 살려주세... 읍...”한구운의 손바닥이 그녀의 입술을 덮치며 나지막이 웃었다.“듣지도 않을 거고, 듣는다 해도 들어오지도 않을 거야, 모르겠어?”윤혜인은 점점 더 절망에 빠졌다.한구운은 진작 이럴 속셈이었다. 이 모든 게 함정이었다.남자의 길고 가느다란 검지가 그녀의 입술을 눌렀다.“얌전히 나한테 맡겨. 내가 그 자식보다 더 잘해줄게.”남녀 사이의 관계를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윤혜인이 그녀라는 걸 알게 된 후 특별히 영상을 보면서 공부했다.그는 그녀를 배려하면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남자가 다시 덮쳐오자 윤혜인은 당황한 나머지 서둘러 말했다.“한구운 씨, 나 좋아해요?”한구운은 두 눈에 불같은 욕망을 감추지 않았다.“아주 많이 좋아해. 너의 모든 걸 원해.”윤혜인은 어렴풋이 한구운의 고집스러운 집착을 느끼고 그와 이성적인 대화를 시도했다.“날 좋아한다면 강요할 게 아니라 더더욱 나를 존중해줘야죠.”한구운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렸을 때부터 내가 좋아했던 건 늘 버려졌어. 그래서 깨달았지, 좋아하면 가져야 한다는 걸.”“그게 아니죠. 당신이 날 소유하면 난 당신을 미워할 거예요.”한구운은 잠시 멈칫했다.“네가 날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그 말을 놓치지 않고 윤혜인은 말을 이어갔다.“난 당신이 싫어요. 나한테 손대면 당신을 죽도록 미워하겠죠!”“이준혁 좋아하나?”한구운의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희미한 조롱이 섞여 있었다.“내가 그놈보다 못해?”윤혜인은 눈을 감고 고
알코올 솜을 들고 상처 부위를 닦는 비서의 손길은 부드러웠고 눈빛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그녀는 대표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하여 그녀는 더 꼼꼼하게 움직였고 눈앞에 슬쩍 드러나는 남자의 허벅지를 일부러 쓰다듬기까지 했다.한구운은 경험이 없어도 바보가 아니었다.그는 손가락으로 여자의 턱을 들어 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나랑 자고 싶어?”비서는 남자의 정교하고 섬세한 얼굴을 바라보았고, 광대에 살짝 묻은 피는 그의 날카로운 관능미를 더했다.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낮게 중얼거렸다.“대표님께서 필요하시면 저도 모실 수 있어요.”한구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얇은 입술에 미소를 머금은 채 길고 차가운 손가락이 여자의 턱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더니 가느다란 입을 갖다 대고 두어 번 문질렀다.여자는 순식간에 물처럼 녹아내리며 참지 못하고 신음 소리를 뱉었다.“흣...”그녀는 대담하게 남자의 한 손을 잡아 볼륨감 있는 자신의 가슴에 올려놓으며 말했다.“대표님, 안아주세요...”“허!” 한구운은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갑자기 손에 힘을 주어 여자의 목을 꽉 움켜쥐었다.갑자기 들이닥친 숨 막힐 듯한 질식에 비서는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며 두 손을 거칠게 휘둘렀다.하지만 남자의 손은 점점 더 꽉 조여왔고, 비서의 눈은 하얗게 뒤집혀 목에서는 꺽꺽거리는 절망적인 소리가 나왔다.죽지 직전의 순간이었다.비서의 온몸이 한구운에 의해 세게 밀려났다.쿵-뒤통수가 책상 모서리에 부딪히면서 순식간에 피가 흥건했다!남자는 지옥에서 가장 무서운 불구덩이에서 나온 듯 섬뜩하기 그지없었다.“똑똑히 봐, 네 주제를!”...한구운에게서 벗어난 윤혜인은 걱정이 가득했다.그 미친 한구운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소원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게다가 두 사람의 생명이었다.육경한, 이 나쁜 놈!한구운에게 절대 굴복하지 않을 테니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윤혜인은 줄곧 집에서 기다렸다.밤 10시가 돼도 이준혁은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하는 수 없이 주훈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고, 주훈은 이준혁이 스카이 별장에 갔으니 볼일 있으면 그곳에 찾아가라고 했다.스카이 별장, 이혼 후 한 번도 오지 않았던 곳이다.시간이 1분 1초 흐르고 윤혜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스카이 별장으로 찾아가기로 했다.집을 나서기 전 일부러 샤워를 하고 옷장을 열어 입을 옷을 고르는데 구석에 하얀 레이스 치마가 눈에 들어왔다.이혼 사실을 알게 된 후 소원이 제2의 인생을 찾으라며 선물한 옷이었다.한 번도 입지 않았던 건 가려야 할 곳을 전혀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옷에 들인 천이 합쳐봐야 그의 두 손바닥 정도 되었으니까.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손을 뻗어 안에 챙겨입었다.스카이 별장에 도착하고 경비원이 자신을 들여보내지 않을까 걱정했다. 어쨌든 지금 자신은 이곳 사람이 아니었으니까.뜻밖에도 경비원은 윤혜인을 보자마자 반갑게 맞이하더니 여전히 사모님이라고 부르며 안으로 안내했다.심지어 그는 이런 말까지 했다.“사모님께서 오시면 바로 들여보내라는 명령을 들었으니 마음 놓고 들어가세요.”윤혜은 그 말을 듣고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안으로 가니 여전히 익숙한 얼굴 인식 잠금장치가 대문에 설치되어 있었다.윤혜인이 얼굴을 들이대자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이혼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 이준혁이 아직도 시스템에서 자신의 얼굴을 지우지 않은 게 믿기지 않았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많은 사업을 맡았으니 너무 바빠서 미처 지우지 못한 것 같았다.그리고 어차피 재혼하면 이씨 집안 재력으로 스카이 별장을 신혼집으로 쓰지 않고 새집을 마련할 게 뻔했다.익숙하게 계단을 오르는데 어디에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고, 침실만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왔다.윤혜인이 가서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문틈 사이로 이준혁의 실루엣이 보였는데, 그는 막 모임이 끝난 듯 정장 차림으로 발코니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오늘 밤 달빛이 너무 옅은
특히나 자신의 살결이 그대로 남자 앞에 드러난 순간이라 더더욱 그랬다.이준혁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녀가 이토록 과감한 옷을 입을 줄 몰랐던 터라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윤혜인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스스로도 참 창피하고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남자를 꼬시기 위해 이런 옷을 입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이준혁은 타협할 여지도 없이 그녀를 돕지 않겠다고 매정하게 말했다.눈시울이 붉어진 그녀는 코트를 여미고 단추도 미처 채우지 않은 채 자리를 뜨려고 돌아섰다.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그녀를 낚아채 세게 잡아당겨 장식장에 밀어붙였다.남자가 거칠게 그녀의 코트를 벗기자 감춰져 있던 매혹적인 살결이 허공에 드러나며 그의 짙고 어두운 눈동자에 비쳤다.윤혜인은 등 뒤에 아릿한 통증을 느끼며 서둘러 몸을 가리려 했지만 손이 꽉 잡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준혁 씨, 놔줘요.”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의 눈은 붉어지고 목이 메었다.이준혁의 눈동자에는 욕망과 분노가 뒤섞인 채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놓으라고? 이렇게 입고 또 어떤 남자한테 부탁하려고!”결국엔 그녀를 방탕하고 파렴치한 여자라고 비하하는 말이었다.윤혜인은 분노에 몸이 덜덜 떨리며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미쳤어요? 이거 놔요!”이준혁은 그녀의 턱을 꽉 움켜쥐고 얼굴을 들어 올리며 조롱했다.“왜, 한구운한테 부탁했는데 도와주지 않았어? 그놈이랑 몇 번이나 했어?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 잘하지도 않을 것 같은데, 나만큼 잘해? 대답해 봐.”미친 질투심에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다른 남자 품에 안긴 그녀라…다른 남자가 이 모습을 보고 만졌다고 생각하니 속에서 열불이 치밀었다. 타오르는 불길이 이성마저 날려버려 눈앞에 있는 여자를 혼내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윤혜인은 분노에 몸을 떨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날 미행했어요?”이준혁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여자의 눈동자를 가늘게 뜬 눈으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안 그러면 네가 잘난 네 친구
윤혜인은 힘겹게 발버둥 치던 행동을 멈추고 눈가가 빨개진 채 그를 바라보았다.“나한테 뭘 원하는데요?”이준혁은 말하지 않았다.“다 구하고 말해줄게.”“내가 줄 수 없는 걸 원할 건가요?” 윤혜인이 묻자 이준혁은 나지막이 놀리듯 말했다.“너를 나한테 주겠다고 했으면서 아직도 줄 수 없는 게 있어?”“...”윤혜인은 이 남자가 사람을 화나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속을 알 수 없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한구운보다 이준혁을 믿는 쪽을 선택했다.“그럼 소원이는 언제 나와요?”“내일 아침.” 이준혁이 기한을 제시했다.“지금은 안 돼요?” 초조했던 윤혜인은 단 한 순간도 소원이 그곳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다.이준혁은 피식 웃었다.“이 시간에 나보고 감옥을 털라고?”윤혜인은 할 말이 없었다. 하긴, 거긴 다른 곳과 달라서 늦은 시간에 일을 처리할 수가 없었다.소원의 문제가 해결되자 그녀는 마침내 마음을 놓았다.이준혁은 그녀를 끌어당겨 침대에 앉혔다.“오늘 밤은 여기서 자.”“오늘 밤에요?”윤혜인은 코트를 여미며 경계하듯 말했다. “대체 조건이 몇 개예요? 난 하나만 들어줄 거예요.”자신을 경계하는 그녀의 모습에 남자의 눈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역시나 악마의 본성이 또 슬슬 드러난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가려고?”이준혁의 혀끝이 어금니에 닿으며 기가 막혀 웃음이 났다.“걱정 마, 너랑 같이 안 자. 그 정도로 여자가 간절하진 않아.”그의 불쾌감을 감지한 윤혜인은 반박하지 않았다.알 수 없는 거래가 그녀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기에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어쨌든 그녀는 그의 조건 중 하나만 들어줄 것이고, 그가 선택했으면 그걸로 끝이었다....구치소.소원은 두 명의 여성 죄수에게 붙잡혀 정체불명의 액체를 주입받았다.얼굴 전체가 공포에 휩싸인 그녀는 대체 왜 이러는지 물어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악... 아아악...”하지만 입을 열어도 갈라지는 소리가 들릴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자신의
그녀의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고, 눈앞에 하얀빛이 번쩍이며 여자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죽는 거 아니야?”“됐어, 어차피 죽을 거니까 그냥 손가락이나 자르자!”소원은 자신의 손이 여자에게 잡힌 채 바닥에 눌리고 여자가 칼날 같은 것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긋는 게 느껴졌다.칼날이 단숨에 뼈를 자르고 피가 솟구쳤다.새빨간 피가 소원의 시야를 덮쳤다. 열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다 합해도 마음만큼 아프지 않았다.아파, 너무 아프다...그녀의 마음도 칼로 이리저리 잘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육경한이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않고 산 채로 고문해 죽게 할 정도로 잔인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그래서 그때 앞으로 치러야 할 대가를 기대하라고 말했던 거였나.정말 뼈에 사무치는 교훈이다.육경한, 참 지독하다.핏기 어린 눈동자로 눈물을 흘리는 소원은 뼛속까지 사무치는 증오에 죽더라도 남자를 저주하며 원한을 품고 눈을 감겠다고 다짐했다.손을 자르던 여자는 경험이 부족하고 미숙한지 한 번에 잘리지 않을 걸 예상하지 못한 듯 자세를 바꾸고 다시 시도했다.소원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어 여자의 팔을 세게 물어뜯었다. 피와 살이 뜯겨나가도 꿋꿋이 악물었다.“아악!!!”여자는 당황하여 비명을 질렀지만 일행이었던 여자가 입을 가렸다.“소리 지르지 마, 사람들 오면 어쩌려고 그래!”단발머리의 여자는 애써 참으며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덜덜 떨며 말했다.“내 살, 내 살, 발리 이 미친년 좀 떼어내!”또 다른 여자는 소원을 최대한 세게 잡아당겼지만 소원이 끌려가지 않자 손을 들어 뒤통수를 내리쳤다.세게 맞은 소원은 순간 입에 힘이 풀렸지만 물어뜯긴 짧은 머리 여자의 팔에서 살덩어리가 뜯겨 나가며 피와 살이 밖으로 뒤집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그녀는 손바닥으로 소원의 뺨을 세게 때렸다.“이년이 감히 날 물어?”소원의 몸은 이미 약해져 있었던 터라 강한 타격과 함께 벽에 부딪혀 쓰러지면서 순식간에 짙은 통증이 온몸을 휩쓸었다.위에서도
남자는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만약 제가 당신에게 기회를 준다면요?”“무슨 기회요?”진아연은 자신이 누구와 거래하는지 잊지 않고 전전긍긍하며 물었다.남자의 두 눈은 마치 별을 숨긴듯 하였다. 그는 반혹적인 어조로 말했다.“육경한을 죽일 기회를 줄게요. 만약 그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면 저는 당신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고 평안히 출국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어요. 진아연 씨, 어떻게 생각해요?”“정말이에요?”진아연은 그의 말을 정말 믿기 어려웠다.제트를 마주할 떄 진아련은 항상 착각에 빠졌다. 사실은 육경한을 죽이는 것보다 제트를 마주하는게 더 어려웠다. 이 두 문제를 함께 놓으면 비교가 될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아주 신비하기에 누구도 그의 배경과 내력을 알 수 없어 그와 상대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경한의 약점은 아주 많다. 소원이와 그녀 뱃속에 있는 아이, 그리고 망할 놈 유진이... 심지어 하나하나의 나쁜 계획은 이미 진아연의 마음속에서 형태를 갖추게 되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제트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물론 정말이에요, 당신이 성공하면 저는 말한 대로 다시는 따지지 않을 것이에요. ”말하는 사이에 남자는 뒤에 쫓아오는 세 대의 차를 가볍게 따돌렸다.이 제트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사람마냥 무섭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진아연의 마음속에 있는 제트는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 그녀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어 놀라지 않았다.진아연은 눈앞의 남자를 보면서 자신의 충성심을 알려 주었다.“제트 씨, 안심해요, 저는 반드시 임무를 완수할 거니까. 당신은 저를 죽이지만 않으면 됩니다.”“음, 기대가 되네요.”“...”뒤따라오던 세 대의 차가 앞차를 잃어버린 후, 경비원들은 실시간 정보를 병실의 VIP 라운지에 전달했다.유진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남자는 황수진보고 유진이의 휴식에 방해 안 되는 대기실에 오라고 했다.지금 육경한의 안색은 매우 안 좋았다.경호원들이 전송해 오는 화면
남자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잡히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또 오다니 정말 바보 중의 바보예요!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곳 경비원은 다른 동네 분들과 다를 줄은, 이곳 경비원은 정말 최고급 경호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여자가 원망하자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진아연, 당신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멍청한 사람인 것 같아요. ”진아연은 순간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반응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가 라는 생각에 그녀는 그를 경계하면서 물어봤다.“누구세요? “남자는 침묵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 가리려고 마스크를 썼지만, 눈빛에 드러나는 냉랭함은 숨길 수 없었다. 진아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나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당신이 바로 제트 씨이세요? ”남자는 그녀를 상대하지도 않고 부인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다 설명했다. 진아연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바지에 실수까지 할 뻔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늑대 무리에서 도망쳐 나와 호랑이 굴에 들어갈 줄을... "제트 씨... 아주 죄송해요, 제가 일부러 여기에 나타난 건 아니예요. 지금 당장 꺼질게요. ”놀라움은 하여금 진아연의 이성을 잃게 만들어 고속도로에서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 생각까지 하였다.제트와 비교했을 때, 지금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경비원들이 구세주라고 생각되었다. 진아연은 제트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필경 지난번에 그의 손에서 죽을 뻔했으니까... 진아연의 손이 차 문손잡이에 닿았을 때, 차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진아연은 절망 속에서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비는 자세를 취했다. “죄송해요... 제트 씨... 저 진짜 멀리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저를 놓아주세요. ”안장이 좁아서 진아연은 무릎을 꿇을 수 없어 두 손을 끊임없이 비비며 아주 작은 희망을 찾고 있었다.남자는 역시 수단과 방법을 숨기고 있었다. 뒤차의 추격을 피하는 동시에
여자가 작은 골목에 들어섰을 때, 경비원이 말했다. “아가씨, 길을 잘못 들었어요. 13동은 저쪽에 있어요.”여자는 할 수 없이 돌아섰는데 경비원이 다시 말했다. “아가씨, 친구 보러 처음 오셨어요?”여자는 이곳의 경비원이 왜 범인을 검문하는 것처럼 자신을 물어보는지 이해 안 가 속으로 욕했다.여자는 대충 대답했다.“네네, 처음 왔어요.”13동 문 앞에 오자 경비원이 직접 603의 초인종을 눌렀고 방울 소리가 울리자, 안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경비원은 여자보고 말하라고 고개를 돌렸다.“...”정말 어쩔 수 없어 여자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이고, 배가 너무 아파요.”여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경비원은 즉시 구급차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경비원이 구급차를 부르는 사이에 여자는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도망쳤다.“거기서요!”경비원은 일반인보다 더 빠르게 반응해 무전기에 대고 빨리 저 검은 옷 입은 여자를 잡으라는 말을 했다.여자는 자신의 눈앞에서 점점 닫혀 가는 문을 보며 당황해 어리둥절했다.“닫지 말아요.”안에서 경비원이 소리를 듣고 여자 쪽으로 돌진해 왔다. 그들은 마치 여기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듯 일반 경비원보다 속도가 더욱 빨랐다.바로 얼마 전 육씨 그룹이 이곳의 부동산을 사서 전문적인 경호원으로 바꾸어 수상한 인물을 주시하여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모두 붙잡아 파출소로 보냈다. 여자는 온몸에 힘이 빠진 채 어디로 도망갈지 몰랐다. “저 여자 잡아요.”전에 여자와 얘기하던 경비원이 소리쳤다. 여자가 잡힐 것만 같았는데 갑자기...펑!큰 소리가 나 그곳을 보자 검은색의 지프차 한 대가 돌진해 들어와 난간에 부딪혀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대중들은 모두 이 갑작스러운 변고에 어리둥절하여 반응하지 못했지만, 지프차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자, 경비원들은 모두 재빨리 몸을 피했다.유독 여자만 제자리에서 자신한테 향해 오는 것을 멍하니 보며 어찌할 바
소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유진이를 보러 갈래”“필요 없어”육경한은 단호히 거절하다 멈칫했다. 그러다 소원이 자신이 아이를 못 본다고 오해 할가봐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보고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일도 다 병원에 가지고 갈 거니까. 넌 휴식이 필요해. 알았어? “유진이 병으로 쓰러진 후 소원은 며칠 동안 거의 밤새 자지 못해 눈 밑에는 이미 짙은 다크써클이 생겼지만 그녀는 억지로 버티는 중이었다.소원은 유진이 자신을 찾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육경한은 무슨 일이든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직접 휴대폰 음성 메시지를 소원이에게 들려주었다.“아빠, 엄마 보고 잠자고 있으래요.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저는 삼촌이라고 부를 거예요. ”“엄마보고 많이 휴식하고 있으래요. 그렇지 않으면 뱃속의 아기가 천천히 자랄 거예요. 저는 아기를 빨리 만나고 싶어요. 아기한테 오빠가 지금 힘이 세니까 아기를 업을 수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요. ”캐톡에서 유진이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협박한 것을 보니 두 사람의 사이가 아주 좋은 것 같았다. 유진이의 소리는 듣기에도 정신이 맑고 괜찮아 보였다.소원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생각해 보니 자기가 쉬지 않은 것을 아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자신의 건강에 대한 책임은 즉 유진에게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기에 소원이는 말 듣고 차에서 내려서 휴식을 취하러 갔다.네 명의 경호원은 육경한의 분부에 따라 두 명은 아파트 입구에 두 명은 계단 입구를 엄중히 지켜 사수의 파리 한 마리조차 날아 들어갈 수 없었다.육경한의 차가 떠나자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여인이 사방을 둘러보며 나타났다.그녀는 벙거지 모자를 쓰고 얼굴을 절반 이상 가린 채 마스크를 쓰고 수상한 모습으로 나타나 동네 경비원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저기요, 당신은 어느 건물로 가나요? 여기에서 뭘 하고 있습니까? “여인은 경비원한테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요... 사람을 찾고
주석훈이 웃으며 말했다.“허허. 몰랐죠? 저 평소엔 되게 허당이에요.”“변호사님 은근히 유머가 넘친다니까요.”주석훈은 언변에 능했기에 단 몇 마디에 간호사가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저기는 왜 저런 거래요? 아까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막더라고요.”주석훈이 물었다.“아, 저기요.”간호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어떤 여자애 한 명 들어왔는데 가족이 살해당했다나 뭐라나. 실어증에 걸려서 한마디도 못 했는데 평소 믿고 따르던 언니가 와서 입을 열었다고 들었어요.”주석훈이 물었다.“여자애요? 많이 놀랐나 보네요.”“그러게요.”간호사가 대답했다.“가족이 칼 맞고 죽었는데 누가 견딜 수 있겠어요.”“억울한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범인만 잡아도 다행 아니겠어요?”주석훈이 말했다.“어려울 것 같던데요?”간호사가 말했다.“뭐 유용한 단서가 안 나왔나 보더라고요. 아빠가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같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봤대요. 진술한 상황이 경찰이 알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경찰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내쉬더라고요.”간호사가 이렇게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건 안지영의 간호를 책임진 간호사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더 물으려는데 다른 간호사가 들어왔다.“어? 이 간호사 있었네? 저쪽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빨리 가봐.”이 간호사가 말했다.“알겠어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치료를 받은 주석훈이 이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이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괜찮다고 말했다.주석훈이 멀리 가고 나서야 다른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이 간호사, 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저 병실에서 나온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저 별말 안 했어요. 다들 아는 내용 얘기해준 거예요.”이 상황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인정하면 바보나 다름없었다.“그래. 앞으로 조심해. 자칫하다간 징계 먹을 수도 있어.”나이 많은 간호사가 귀띔했다.“알아요.”이 간호사가 얼른 대답했다.“아
소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잘됐다. 정말 너무 잘됐어요. 이번엔 하느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셨네요.”소원이 주석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제가 신세를 졌으니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요.”감염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확률이 반반이라 주석훈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주석훈의 마음이 그만큼 단단하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 멘탈이 무너졌을 것이다.소원은 다시 한번 주석훈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별거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주석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가 여기 있다는 건 유진도 여기 입원해 있는 건가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여기 없어요. 아는 동생 좀 보려고 여기 온 거예요.”“동생이요?”주석훈이 물었다.“소원 씨에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까요?”뜬금없는 초대였지만 원래도 열정적인 주석훈이 말하니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소원이 별다른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만나고 나오는 길에요. 전에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 지금쯤 이미 쉬려고 누웠을 거예요.”“아.”주석훈이 말했다.“그러면 데려다줄까요?”“아니요. 아니요.”소원이 얼른 대답했다.“데려다줄 사람이 있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경한이 다가왔다. 까만 트렌치코트가 육경한의 키를 더 커 보이게 했는데 강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소원에게로 걸어왔다.“가자.”육경한은 옆에 선 주석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육경한과 구면인 주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육경한은 작은 변호사 따윈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난감해진 소원이 분위기를 만회하려고 이렇게 말했다.“나오다가 마침 주 변호사님을 만났어.”육경한이 그제야 옆에 선 주석훈을 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주석훈은 전혀 난감해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피고가 잘 지내고 있으니 뿌
제일 의심 가는 사람은 진아연이었다. 안상철은 여자관계가 간단한 편이었고 오랫동안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않고 싱글을 유지하면서 모든 심혈을 딸과 어른을 모시는 데 썼다.박혜순도 안상철을 여러 번 타일렀지만 그럴 때마다 안상철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싱글인 안상철이 이렇게 격렬하게 다툴 수 있는 사람은 진아연일 가능성이 컸다.경찰 조사가 끝나고 안지영도 검사를 받고 쉬어야 했기에 강민혜는 소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서야 소원은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소원은 진아연의 힘으로 안상철을 죽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방도 아닌 60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안상철은 180은 되는 큰 키를 가졌기에 큰 부상을 입어 몸이 허약해 툭하면 쓰러지는 진아연을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진아연은 얼마 전에 손목을 그으면서 피를 많이 흘렸던 터라 짧은 시간 내에 회복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진아연 말고도 다른 사람이 개입했다는 의미였다.멀쩡히 살아움직이는 사람을 60번이나 찔렀다는 건 웬만한 정신상태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이코패스가 잡히지 않고 사회에 섞여 들어간다면 악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강민혜의 생각도 소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진아연이 입원했을 때 강민혜도 만나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진아연은 절대 안상철을 쓰러트릴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검 결과를 보면 약물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안상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진아연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진아연 같은 몸집이라면 3, 4명이 더 와도 절대 안상철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그래도 일단 진아연을 잡는 게 우선이었다. 진아연을 잡아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진아연이 어디로 숨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소원은 의문만 가득 품은 채 병원 밖으로 나가다가 주석훈과 마주쳤다.“소원 씨, 여기서 마주치네요.”주석훈이 소원을 향해 헤벌쭉 웃자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어요.”소원은 안지영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어줬다.“내가 바이올린 계속하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 돈을 다시 찾으러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안지영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상철이 소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려줄 때 진아연이 그 돈을 줬는지 말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안상철의 말대로라면 진아연이 돈을 주려다가 결국 주지 않았으니 그 돈이 없어야 맞았지만 실제로 안상철은 그때 돈을 받은 것이다. 하긴 안상철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보수 없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딸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해도 외국으로 나가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확실치도 않은 약속을 쉽게 믿지 못했을 테고 일단은 확실한 무언가, 즉 돈을 줘야만 안상철이 소진용을 찾아갈 결심을 내렸을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결국 이 일을 소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소원은 안상철이 그 돈을 찾으러 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고 그 돈은 결국 경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결국 안상철의 탐욕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소원이 안지영을 위로했다.“아니에요. 그게 왜 지영 씨 탓이에요. 나쁜 사람이 몹쓸 짓을 저지른 건데. 지영 씨도 아버지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잖아요. 지영 씨, 일단 그날 있었던 일을 경찰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요. 최대한 자세하게 빠트린 것 없이 말해야 경찰도 빨리 범인을 찾을 수 있고 삼촌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예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안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너무 무서울 뿐이었는데 소원이 곁에 있으니 무서움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소원을 믿고 의지해왔는데 최근에는 소원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안지영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두려움을 가시기 위해 소원에게 옆에 앉아 있어 달라고 제안했고 강민혜도 안지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술하는 내내 소원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했다.안지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