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가.” 이준혁이 말했다.윤혜인은 다리가 저릴 때까지 쪼그려 앉아서 돌아가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에 걱정이 앞섰다.그때 갑자기 검은색 벤틀리가 다시 돌아왔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면서 남자의 잘생긴 얼굴이 어둠 속에 나타났다.“타.”윤혜인은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고 차에 타려고 했지만, 너무 오래 쪼그리고 앉아 있다 보니 두 다리가 감당하지 못해 문 가장자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윽...”그녀는 입술을 앙다물고 끙끙거리며 비틀거리다가 남자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고, 그녀의 손은 그의 양복 바짓단을 움켜쥐고 있었다.그런 자세에 윤혜인의 어쩔 줄 모르는 얼굴까지 곁들이자 불쌍하면서도 꽤 유혹적이었다.시선을 내린 이준혁의 눈동자가 한층 짙어졌다.차 안의 분위기가 얼어붙었고 윤혜인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서둘러 일어나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얌전히 앉았다.차는 어두운 밤을 달렸다.이준혁은 지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손으로 이마를 짚고 눈을 감았다.윤혜인은 마음속으로 초조했지만, 그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도 좋지 않아 참을 수밖에 없었다.마침내 차가 멈춘 곳은 윤혜인의 집 앞이었다.이준혁은 눈을 감은 채 주훈에게 지시했다.“올려보내.”주훈이 대답했지만 윤혜인은 다급해졌다. 고작 집에 데려다 달라고 지금까지 기다린 게 아니었다.“준혁 씨!”윤혜인이 이름을 부르자 남자는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른하게 바라봤다.오늘 밤 여러 번이나 거절을 당한 윤혜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올라가서 차 한잔…”방 안.이준혁은 눈을 감은 채 셔츠 소맷자락을 살짝 접어 근육질의 팔을 드러냈고, 두 다리를 거만하게 꼰 채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어 있었다.윤혜인은 차 대신 부엌에서 얼큰한 해장국을 끓였다.요리를 마친 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나지막이 말했다.“해장국 좀 먹어요.”소파 옆에는 의자가 없었기에 윤혜인은 그냥 서 있었고, 재킷을 벗자 흰 니트에 청바지 차림의 그녀는 허리선이 두드러져 훌륭한 몸매가 돋보였다.노출이 있
윤혜인 역시 얼굴이 창백해지며 주먹을 불끈 쥐었고 온몸이 분노로 덜덜 떨렸다.속에 쌓인 게 많았던 이준혁은 거침없이 날카로운 말을 뱉었다.하지만 가벼운 떨림을 억누르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보는 순간, 그는 마음 한구석에서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속으로 이성을 잃은 자신에게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더 이상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신경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그녀를 안고 싶은 두 손이 주체하지 못하고 또다시 그녀를 아프게 했다.그 생각에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지만 윤혜인이 그의 손길을 피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고집스럽게 말했다.“준혁 씨, 난 당신이랑 안 자요.”그는 곧 결혼할 텐데 아무리 자존심을 버렸다고 해도 내연녀가 될 수는 없었다.들어 올린 이준혁의 손이 허공에 멈칫하며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또 괜한 죄책감을 느꼈지!쾅!남자가 문을 세게 닫았고 주위에는 침묵이 흘렀다.소원의 현재 상황에 대한 걱정과 떨림이 윤혜인을 괴롭혔다.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그녀는 마침내 감정이 통제 불능이 되어 눈물이 흘러내렸다.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밤을 지새운 윤혜인은 다음 날 쉬는 시간에 맞춰 서둘러 병원에 있는 소진용과 전미영을 보러 갔다.마침내 한 가지 소식이 들려왔다.육경한의 약혼녀가 다쳐 병원에 입원한 걸 보아 소원의 구속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육경한의 약혼녀가 어디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오후, 윤혜인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울 때 한구운의 전화가 걸려 왔다.윤혜인은 전화를 받았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마침내 한구운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혜인아, 잘 지내?”윤혜인은 차갑게 말했다.“네, 병원비는 이미 계좌로 입금했어요.”한구운은 잠시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혜인아, 내가 돈이 필요한 게 아니란 걸 알잖아.”윤혜인은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속였다는 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고 그라는 사람에 대한 의구심이 들어 차갑게 말했
그곳으로 보내고도 사람까지 매수해 소원을 괴롭히다니.윤혜인은 다급하게 말했다.“선배, 어떡해요, 빨리 소원이 구해 주세요.”오랜만에 듣는 선배라는 호칭에 한구운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도와줄 수는 있지만 조건이 있어.”말하며 먹잇감을 노리는 늑대의 눈빛과도 같은 남자의 눈동자에 윤혜인은 낯선 기분이 들었다.“무슨 조건이요?”한구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윤혜인에게 다가가 앉았다.낯선 분위기에 윤혜인은 팔의 솜털이 바짝 섰고 급히 몸을 뒤로 젖혔지만 한구운은 그녀를 강하게 끌어당겼다.그의 긴 손가락이 윤혜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내 여자 친구가 되어줘, 너의 모든 게 내 것이 되는 거.”손 아래 닿는 피부는 백자처럼 섬세하고 부드러웠고, 꽃잎 같은 입술은 촉촉하고 도톰했다.한구운의 목울대가 일렁거렸다. 처음으로 여자에게 거센 충동을 느끼며 통제 불능의 반응을 보였다.그는 짙은 눈빛으로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당겨 얇은 입술을 갖다 댔다.윤혜인은 깜짝 놀랐다.너무 갑작스러워서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더군다나 이곳은 투명한 창문이 있는 사무실인데 어떻게 감히 여기서 자신을 범한단 말인가!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얼굴을 돌리고 손을 뻗어 남자의 입술을 막은 채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하지만 남자는 쉽게 놓아주지 않았고 거센 불에 휩싸인 듯 달아올라 당장이라도 여자를 품고 싶은 욕망에 불타고 있었다.그는 손바닥에 힘을 주어 그녀를 소파로 밀어붙였고 그의 건장한 몸으로 그녀를 덮쳤다.윤혜인은 두 손이 남자에게 잡혀 소파 팔걸이에 포박당한 채 짓눌렸다.당황한 그녀는 눈앞에 있는 남자가 그토록 낯설게 느껴졌다.“한구운 씨, 이건 범죄에요. 빨리 이거 놔줘요!”한구운이 한 손으로 안경을 벗자 다정했던 눈빛은 사라지고 서슬 퍼런 냉기만 남아 있었다.그가 음침하게 말했다. “혜인아, 넌 원래 내 것이었어.” 윤혜인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고, 무섭도록 강한 남
한구운은 손끝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부드럽게 말했다.“너인 줄 알았으면 진작 널 가졌을 거야. 넌 내게 정말 소중한 존재야, 알지?”심연의 지옥 같은 과거에서 오직 그 소녀만이 그가 여전히 사람이고,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느끼게 해주었다.눈물이 멈추지 않는 윤혜인은 도무지 한구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녀는 밖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곧바로 소리를 질렀다.“도와줘요! 살려주세... 읍...”한구운의 손바닥이 그녀의 입술을 덮치며 나지막이 웃었다.“듣지도 않을 거고, 듣는다 해도 들어오지도 않을 거야, 모르겠어?”윤혜인은 점점 더 절망에 빠졌다.한구운은 진작 이럴 속셈이었다. 이 모든 게 함정이었다.남자의 길고 가느다란 검지가 그녀의 입술을 눌렀다.“얌전히 나한테 맡겨. 내가 그 자식보다 더 잘해줄게.”남녀 사이의 관계를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윤혜인이 그녀라는 걸 알게 된 후 특별히 영상을 보면서 공부했다.그는 그녀를 배려하면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남자가 다시 덮쳐오자 윤혜인은 당황한 나머지 서둘러 말했다.“한구운 씨, 나 좋아해요?”한구운은 두 눈에 불같은 욕망을 감추지 않았다.“아주 많이 좋아해. 너의 모든 걸 원해.”윤혜인은 어렴풋이 한구운의 고집스러운 집착을 느끼고 그와 이성적인 대화를 시도했다.“날 좋아한다면 강요할 게 아니라 더더욱 나를 존중해줘야죠.”한구운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렸을 때부터 내가 좋아했던 건 늘 버려졌어. 그래서 깨달았지, 좋아하면 가져야 한다는 걸.”“그게 아니죠. 당신이 날 소유하면 난 당신을 미워할 거예요.”한구운은 잠시 멈칫했다.“네가 날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그 말을 놓치지 않고 윤혜인은 말을 이어갔다.“난 당신이 싫어요. 나한테 손대면 당신을 죽도록 미워하겠죠!”“이준혁 좋아하나?”한구운의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희미한 조롱이 섞여 있었다.“내가 그놈보다 못해?”윤혜인은 눈을 감고 고
알코올 솜을 들고 상처 부위를 닦는 비서의 손길은 부드러웠고 눈빛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그녀는 대표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하여 그녀는 더 꼼꼼하게 움직였고 눈앞에 슬쩍 드러나는 남자의 허벅지를 일부러 쓰다듬기까지 했다.한구운은 경험이 없어도 바보가 아니었다.그는 손가락으로 여자의 턱을 들어 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나랑 자고 싶어?”비서는 남자의 정교하고 섬세한 얼굴을 바라보았고, 광대에 살짝 묻은 피는 그의 날카로운 관능미를 더했다.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낮게 중얼거렸다.“대표님께서 필요하시면 저도 모실 수 있어요.”한구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얇은 입술에 미소를 머금은 채 길고 차가운 손가락이 여자의 턱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더니 가느다란 입을 갖다 대고 두어 번 문질렀다.여자는 순식간에 물처럼 녹아내리며 참지 못하고 신음 소리를 뱉었다.“흣...”그녀는 대담하게 남자의 한 손을 잡아 볼륨감 있는 자신의 가슴에 올려놓으며 말했다.“대표님, 안아주세요...”“허!” 한구운은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갑자기 손에 힘을 주어 여자의 목을 꽉 움켜쥐었다.갑자기 들이닥친 숨 막힐 듯한 질식에 비서는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며 두 손을 거칠게 휘둘렀다.하지만 남자의 손은 점점 더 꽉 조여왔고, 비서의 눈은 하얗게 뒤집혀 목에서는 꺽꺽거리는 절망적인 소리가 나왔다.죽지 직전의 순간이었다.비서의 온몸이 한구운에 의해 세게 밀려났다.쿵-뒤통수가 책상 모서리에 부딪히면서 순식간에 피가 흥건했다!남자는 지옥에서 가장 무서운 불구덩이에서 나온 듯 섬뜩하기 그지없었다.“똑똑히 봐, 네 주제를!”...한구운에게서 벗어난 윤혜인은 걱정이 가득했다.그 미친 한구운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소원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게다가 두 사람의 생명이었다.육경한, 이 나쁜 놈!한구운에게 절대 굴복하지 않을 테니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윤혜인은 줄곧 집에서 기다렸다.밤 10시가 돼도 이준혁은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하는 수 없이 주훈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고, 주훈은 이준혁이 스카이 별장에 갔으니 볼일 있으면 그곳에 찾아가라고 했다.스카이 별장, 이혼 후 한 번도 오지 않았던 곳이다.시간이 1분 1초 흐르고 윤혜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스카이 별장으로 찾아가기로 했다.집을 나서기 전 일부러 샤워를 하고 옷장을 열어 입을 옷을 고르는데 구석에 하얀 레이스 치마가 눈에 들어왔다.이혼 사실을 알게 된 후 소원이 제2의 인생을 찾으라며 선물한 옷이었다.한 번도 입지 않았던 건 가려야 할 곳을 전혀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옷에 들인 천이 합쳐봐야 그의 두 손바닥 정도 되었으니까.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손을 뻗어 안에 챙겨입었다.스카이 별장에 도착하고 경비원이 자신을 들여보내지 않을까 걱정했다. 어쨌든 지금 자신은 이곳 사람이 아니었으니까.뜻밖에도 경비원은 윤혜인을 보자마자 반갑게 맞이하더니 여전히 사모님이라고 부르며 안으로 안내했다.심지어 그는 이런 말까지 했다.“사모님께서 오시면 바로 들여보내라는 명령을 들었으니 마음 놓고 들어가세요.”윤혜은 그 말을 듣고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안으로 가니 여전히 익숙한 얼굴 인식 잠금장치가 대문에 설치되어 있었다.윤혜인이 얼굴을 들이대자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이혼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 이준혁이 아직도 시스템에서 자신의 얼굴을 지우지 않은 게 믿기지 않았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많은 사업을 맡았으니 너무 바빠서 미처 지우지 못한 것 같았다.그리고 어차피 재혼하면 이씨 집안 재력으로 스카이 별장을 신혼집으로 쓰지 않고 새집을 마련할 게 뻔했다.익숙하게 계단을 오르는데 어디에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고, 침실만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왔다.윤혜인이 가서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문틈 사이로 이준혁의 실루엣이 보였는데, 그는 막 모임이 끝난 듯 정장 차림으로 발코니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오늘 밤 달빛이 너무 옅은
특히나 자신의 살결이 그대로 남자 앞에 드러난 순간이라 더더욱 그랬다.이준혁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녀가 이토록 과감한 옷을 입을 줄 몰랐던 터라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윤혜인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스스로도 참 창피하고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남자를 꼬시기 위해 이런 옷을 입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이준혁은 타협할 여지도 없이 그녀를 돕지 않겠다고 매정하게 말했다.눈시울이 붉어진 그녀는 코트를 여미고 단추도 미처 채우지 않은 채 자리를 뜨려고 돌아섰다.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그녀를 낚아채 세게 잡아당겨 장식장에 밀어붙였다.남자가 거칠게 그녀의 코트를 벗기자 감춰져 있던 매혹적인 살결이 허공에 드러나며 그의 짙고 어두운 눈동자에 비쳤다.윤혜인은 등 뒤에 아릿한 통증을 느끼며 서둘러 몸을 가리려 했지만 손이 꽉 잡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준혁 씨, 놔줘요.”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의 눈은 붉어지고 목이 메었다.이준혁의 눈동자에는 욕망과 분노가 뒤섞인 채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놓으라고? 이렇게 입고 또 어떤 남자한테 부탁하려고!”결국엔 그녀를 방탕하고 파렴치한 여자라고 비하하는 말이었다.윤혜인은 분노에 몸이 덜덜 떨리며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미쳤어요? 이거 놔요!”이준혁은 그녀의 턱을 꽉 움켜쥐고 얼굴을 들어 올리며 조롱했다.“왜, 한구운한테 부탁했는데 도와주지 않았어? 그놈이랑 몇 번이나 했어?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 잘하지도 않을 것 같은데, 나만큼 잘해? 대답해 봐.”미친 질투심에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다른 남자 품에 안긴 그녀라…다른 남자가 이 모습을 보고 만졌다고 생각하니 속에서 열불이 치밀었다. 타오르는 불길이 이성마저 날려버려 눈앞에 있는 여자를 혼내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윤혜인은 분노에 몸을 떨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날 미행했어요?”이준혁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여자의 눈동자를 가늘게 뜬 눈으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안 그러면 네가 잘난 네 친구
윤혜인은 힘겹게 발버둥 치던 행동을 멈추고 눈가가 빨개진 채 그를 바라보았다.“나한테 뭘 원하는데요?”이준혁은 말하지 않았다.“다 구하고 말해줄게.”“내가 줄 수 없는 걸 원할 건가요?” 윤혜인이 묻자 이준혁은 나지막이 놀리듯 말했다.“너를 나한테 주겠다고 했으면서 아직도 줄 수 없는 게 있어?”“...”윤혜인은 이 남자가 사람을 화나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속을 알 수 없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한구운보다 이준혁을 믿는 쪽을 선택했다.“그럼 소원이는 언제 나와요?”“내일 아침.” 이준혁이 기한을 제시했다.“지금은 안 돼요?” 초조했던 윤혜인은 단 한 순간도 소원이 그곳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다.이준혁은 피식 웃었다.“이 시간에 나보고 감옥을 털라고?”윤혜인은 할 말이 없었다. 하긴, 거긴 다른 곳과 달라서 늦은 시간에 일을 처리할 수가 없었다.소원의 문제가 해결되자 그녀는 마침내 마음을 놓았다.이준혁은 그녀를 끌어당겨 침대에 앉혔다.“오늘 밤은 여기서 자.”“오늘 밤에요?”윤혜인은 코트를 여미며 경계하듯 말했다. “대체 조건이 몇 개예요? 난 하나만 들어줄 거예요.”자신을 경계하는 그녀의 모습에 남자의 눈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역시나 악마의 본성이 또 슬슬 드러난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가려고?”이준혁의 혀끝이 어금니에 닿으며 기가 막혀 웃음이 났다.“걱정 마, 너랑 같이 안 자. 그 정도로 여자가 간절하진 않아.”그의 불쾌감을 감지한 윤혜인은 반박하지 않았다.알 수 없는 거래가 그녀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기에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어쨌든 그녀는 그의 조건 중 하나만 들어줄 것이고, 그가 선택했으면 그걸로 끝이었다....구치소.소원은 두 명의 여성 죄수에게 붙잡혀 정체불명의 액체를 주입받았다.얼굴 전체가 공포에 휩싸인 그녀는 대체 왜 이러는지 물어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악... 아아악...”하지만 입을 열어도 갈라지는 소리가 들릴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윤혜인이 문 앞으로 다가가 힘껏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화들짝 놀란 도우미가 얼른 달려와 윤혜인을 막았다.“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만하세요.”도우미가 윤혜인을 안더니 힘껏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윤혜인은 문을 두드릴 수 없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엄마. 엄마. 엄마.”윤혜인이 큰 소리로 외치자 바깥에서 들리던 웅얼거리는 소리가 달라졌다.쿵.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쿵. 쿵. 쿵.휠체어로 문을 힘껏 부수는 소리와 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사모님.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돼요.”윤혜인이 더 높은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 엄마.”방 안에 있던 도우미가 윤혜인의 입술을 틀어막자 윤혜인이 팔다리를 마구 버둥대며 웅얼웅얼 소리를 냈다.문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망가졌다. 문이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쌩하고 들어왔다. 윤아름은 큰 꽃병 하나를 이고 들어와 윤혜인의 입을 막고 있는 도우미를 내리쳤다. 도우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윤아름이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윤혜인을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윤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다시 안아보는 거라 윤혜인도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도우미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다른 도우미를 보고 윤아름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긴 윤아름은 아까 정신이 살짝 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원진우가 윤아름을 다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기에 과분하게 말렸다가 윤아름이 다치는 날에는 도우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이때 소식을 들은 원진우가 다급하게 걸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녀를 보게 되었다. 원진우는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윤혜인은 정상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멍하던 예전과 비기면 정서라는 게 생겼다. 윤혜인이 확실히 윤아름을 치유
원진우는 연속 몇 시간이나 윤혜인을 관찰했다. 관찰한 시간이 오래면 오랠수록 원진우는 윤혜인이 자는 모습이 자신과 쏙 빼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낯선 곳에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언제든 경계 태세에 들어가는 것도 말이다.“일어났으면 뭐 좀 먹어요. 도우미에게 이쪽으로 가져다주라고 할게요.”원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분하고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만약 윤혜인에게 예전 경력이 없었다면 원진우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잔혹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뒤로 잘 숨긴 것 같았다.윤혜인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가는 원망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다. 정서도 도라는 게 있어 일정한 포인트까지 닿으면 되지 아니면 원진우가 오히려 경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진우는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 그저 윤혜인이 보면 볼수록 귀엽다고 생각했다.“혜인 씨, 이름은 엄마가 지어준 거예요?”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혜인의 몸에는 금패가 하나 있는데 위에 윤혜인의 이름이 적힌 금패였다. 양아버지가 길다가 그녀를 줍고 주변과 경찰서에 윤혜인이라는 아이가 실종됐는지 물었지만 윤혜인이라는 아이를 잊어버린 적은 없다고 했다. 전에 조사가 어려웠던 건 윤혜인이 원진우의 의해 먼곳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기술이 좋지 않아 실종자를 찾는 것도 힘든 일이긴 했다. 게다가 양아버지는 인자한 사람이었기에 윤혜인의 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고만 말할 뿐 이기적이게 그녀의 모든 걸 묵살하지는 않았다. 원래 이름을 쓰겠다고 한 것도 어느 날 친부모님을 만나면 그들이 자기를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듣기 좋네요.”원진우가 말했다. 윤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원진우가 뭔가 말하려다가 방향을 잃었다.“일찍 쉬어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방에서 빠져나갔다. 도우미가 아침을 가져다줬는데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윤혜인은 그 요리와 밥을 이미 보며 원진우가 아직 독을 타지는 않았을 거라는
윤혜인은 다시 눈을 감으며 잠을 자야 체력을 보존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오빠가 사람을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자신을 타일러도 윤혜인의 잠자리는 여전히 뒤숭숭했고 악몽만 연거푸 꿨다. 엄마가 여기 있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도 여기 있다는 생각에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겨우 동이 틀 때까지 버틴 윤혜인이 눈을 뜨자 침대맡에 놓인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원진우였다. 윤혜인은 순간 얼굴을 굳히더니 혹시나 하지 말아야 할 잠꼬대를 하면서 마음에 담아뒀던 말을 전부 쏟아낸 게 아닌지 걱정했다.“깼어요?”원진우는 그런 윤혜인을 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윤혜인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매우 덤덤했다.“네.”“어제 잠을 설치는 것 같던데요?”원진우가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차갑디차가운 눈동자에 담긴 의미가 뭔지는 알아내기 힘들었다.윤혜인은 혹시나 실수한 건 아닌지 의심되어 심장이 철렁했다. 얼른 머리를 굴린 윤혜인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렇게 말했다.“네. 잠을 잘 자지 못한 건 맞아요. 어제 겪었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무섭거든요. 나는 정말 거기서 죽는 줄 알았어요.”윤혜인이 솔직하게 말하자 원진우의 눈빛도 살짝 풀렸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요?”원진우가 물었다.“네. 너무 무서워요. 나를 세 번이나 죽이려고 했는데 어떻게 안 무섭겠어요?”윤혜인은 두려움을 전혀 위장하지 않았다. 원진우와 말할 때도 몸을 살짝 움츠리며 뒤로 빼고는 경계 태세를 취했다. 이에 원진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평소 곽진명과는 어떻게 지내는데요?”윤혜인은 원진우가 무슨 뜻으로 묻는지 몰라 잠깐 넋을 잃었다.“곽진명과도 이렇게 지내요?”원진우가 물었다. 윤혜인은 그제야 원진우가 자기를 윤혜인의 아버지로 대입해 곽진명과 비교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곽진명을 떠올리자 윤혜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아빠는 내게 무척이나 잘해줬어요. 그래서 한 번도 무섭다고
원진우가 눈길을 돌리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묵묵히 다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총명한 여자라는 걸 알아챘으니 윤혜인이 한 말과 보이는 행동을 믿으면 함정에 빠지는 거나 다름없다고 말이다. 원진우는 윤아름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윤아름의 어깨를 잡고 힘껏 흔들었다.“아름아,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윤아름의 동공은 여전히 풀려 있었고 원진우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원진우는 윤아름의 어깨를 점점 더 억세게 부여잡더니 이를 악물고 캐물었다.“말해. 말하라고. 있어, 없어?”“...”윤아름은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흥흥거릴 뿐이었다. 진우희가 그렇게 된 걸 본 다음부터 줄곧 이 상태였다.원진우는 윤아름의 멘탈이 이렇게 약할 줄은 몰랐다. 양자를 총으로 쐈다는 소식부터 먼저 알려주고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진우희의 시신까지 보여줬다. 지하실에 갇혀 있으면서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윤아름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미쳐버리고 말았다. 다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곽경천도 그녀를 구하려다 총에 맞았고 진우희도 그녀를 도우려다 원진우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이 모든 건 다 그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고 그 뒤에 아무리 다시 이어주려 해도 이어지지 않았다. 무의식적인 흥얼거림과 가끔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은 윤아름을 모두가 알아주던 미녀에서 바보로 전락하게 했다. 하지만 미인은 미인인지라 치매에 바보가 되어도 예쁘기만 했다.윤아름은 초점 없는 동공으로 무의식적으로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때 미약하게나마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윤아름의 눈동자가 다시 초점을 되찾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넘어졌다. 원진우가 부축하려 했지만 윤아름이 그 손을 탁 쳐내더니 미친 듯이 모니터가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 화면으로 보이는 윤혜인은 어느새 몸을 웅크리고 있
그 누구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이를 본다면 차분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윤아름처럼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윤아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원진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는 정말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윤혜인의 쓸모도 이제 끝났기에 원진우는 윤혜인의 손에 올렸던 발을 뗐고는 입을 열었다.“온도 영하 80도로 내려.”“!”윤혜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윤혜인을 산채로 냉동시켜 저번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겠다는 뜻이었다. 원진우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윤혜인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원진우가 문밖으로 나서는 날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어떻게 해야만 살 수 있을까...’윤혜인은 죽기 싫었다. 살아서 엄마를 구하고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얼굴을 떠올리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원진우!”윤혜인이 성까지 붙여서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원진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윤혜인을 돌아봤다. 윤혜인은 혀끝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서 느껴져서야 윤혜인은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윤혜인의 목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내가 누구 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혜인을 보는 원진우의 눈빛에서 보기 드물게 두려움이 묻어났다. 비록 몇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윤혜인이 그 눈빛을 캐치하고는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이야말로 윤혜인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삼촌, 그렇게 총명하신 분이 이미 눈치채고 계신 거 아니에요? 경천 오빠랑 나랑 친 남매가 아닌 건 알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왜 직접 낳지 않고 남자아이를 입양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혹시 지금 내 딸이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머리는 썼는데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아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
턱에서 전해진 고통에 윤혜인은 호흡이 가빠졌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엄마 좀 만나게 해줘요... 딱 한 번만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든 다 좋아요...”“꿈도 꾸지 마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바닥으로 내팽개치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원진우가 여신으로 받드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니, 이런 오점은 반드시 지워야 했다.윤혜인은 턱이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여전히 울면서 애원했다.“딱 한 번만요. 한 번만 엄마를 만나게 해줘요. 제발 부탁이에요... 죽어도 눈은 감고 죽어야죠...”원진우는 윤혜인이 죽음을 앞두고 자기 걱정보다는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혜인 씨는 만나고 싶어도 아름이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죠.”이 말에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거짓말하지 마요. 엄마가 왜 나를 만나려 하지 않겠어요?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당신이 납치하면서 나를 버리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고요.”“명을 재촉하는 꼴이라니.”원진우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그렇다면 만족시켜 줄게요.”원진우가 손뼉을 치자 대문 하나가 열렸다. 불빛이 들어와서야 윤혜인은 지금 있는 곳이 냉동창고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원진우는 전혀 추위를 타지 않았다. 특수 제작한 옷을 입고 있어 냉동창고에 있어도 추위를 막을 수 있었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하지만 반사 때문에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다. 원진우가 그쪽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받아와 가까이 밀고 와서야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윤혜인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릴 적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여자가 자장가를 부르며 아이를 달래는 장면, 여자가 어린 윤혜인의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도 여자의 얼굴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윤혜인과 자매라고 해도 믿을 사람이 적지 않을
“당신...”윤혜인이 이를 악물었다.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이 말을 빼고는 다른 말이 나가지 않았다.“급해할 거 없어요. 천천히 해요.”원진우가 오히려 웃으며 윤혜인을 다독였다. 윤혜인은 손에 칼만 있었다면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칼이 있다고 해도 절대 이 남자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경계가 삼엄한 배씨 정원에서 윤혜인을 납치했다는 건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었다. 윤혜인은 속으로 원망해도 흥분해도 쓸데없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이런 남자를 상대하려면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며 기회를 찾아야 했다. 윤혜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것으로 최대한 차분해지려 애썼다.“왜 나를 죽이려는 거예요?”윤혜인이 물었다. 이 문제가 약간은 바보 같아 보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진우가 윤혜인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라면 아마도 윤혜인이 윤아름의 아이여서일 것이다. 그리고 윤혜인이 관찰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총명한 사람을 싫어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멍청한 척, 무서운 척하며 상대의 경계심을 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윤혜인도 원진우가 어떻게 윤혜인이 어릴 때 찾아온 건지 알고 싶었다.원진우는 순진해 보이는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점이 생기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죠. 윤혜인 씨의 존재가 딱 그 오점이거든요.”“...”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 원진우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 윤혜인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릴 때는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그때는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원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양아버지가 혜인 씨를 그렇게 보호할 줄은 몰랐는데. 명이 질기네요.”원진우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웃음이 점점 음침해졌다.“춥디추운 그날 밤에도 죽지 않고 살았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놔도 안 죽고 살아있으니...”윤혜인이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당신이었어요...?”저 정도면 답을 준 거나 마
이에 양아버지는 남자가 어린 윤혜인을 노린다는 걸 확신했다. 그 시절 화려한 옷을 입고 비싼 차를 끌고 다니는 남자를 유괴범이라 외친다면 믿을 사람도 없을뿐더러 성가신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작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러니 이 남자도 대담하게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양아버지는 남자가 느긋하게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자 얼른 어린 윤혜인을 안고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린 윤혜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지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아빠, 케이크... 케이크...”아이의 눈에 케이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어린 윤혜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망가진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양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양아버지가 숨을 헐떡이며 다독였다.“착하지. 아빠가 다시 사줄게.”어린 윤혜인은 너무 속상해 양아버지의 몸에 엎드린 채 양아버지의 등 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리를 내다봤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가 왜 갑자기 이렇게 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양아버지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이내 얌전하게 양아버지의 목을 감싸더니 어깨에 기대어 북받치는 서러움을 꾹꾹 눌렀다. 어린 윤혜인은 나이가 어렸기에 양아버지처럼 곧 들이닥칠 위험을 감지하지는 못했다. 차갑고 끈적한 구덩이에 빠져있는 어린 윤혜인은 빨간 벨벳 슈트를 입은 남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윤혜인은 너무 무서워 눈을 부릅뜬 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두려움과 울분이 목에 걸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남자는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추더니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다리를 들더니 양아버지의 얼굴에 던져버렸다.“허허.”남자가 음침하게 웃더니 제 딴에는 재밌다고 생각하는 말을 내뱉었다.“그러게 누가 그렇게 빨리 달리래? 그러니까 다리까지 나가떨어지는 거 아니야.”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밀려오
칠흑 같은 밤과 뼈저린 추위, 그리고 아까 맞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비까지, 모든 상황이 똑같이 맞아떨어졌다.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달리다가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작고 연약한 어린 윤혜인은 포물선을 그리다 옆에 있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의 몸과 얼굴은 흙이 잔뜩 묻었고 무성한 갈대에 가려져 시커먼 진흙과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양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데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향해 힘껏 고개를 저었다. 넘어져서 몸을 다친 양아버지는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윤혜인을 안았던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린 윤혜인은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구덩이에 빠져있는 걸 양아버지도 분명히 봤는데 양아버지가 왜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는지 말이다. 어린 윤혜인은 그렇게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빨간 스포츠카가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양아버지 뒤를 쫓았다. 앞에서 달리던 양아버지는 그렇게 차에 치여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의 다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그중 한쪽이 어린 윤혜인 앞에 떨어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다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양아버지의 얼굴도 어린 윤혜인을 향해 있었다.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어린 윤혜인은 초점을 잃고 퀭한 양아버지의 두 눈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정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윤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범퍼가 깨진 스포츠카에서 빨간 벨벳 슈틀 입은 남자가 내려왔다. 어린 윤혜인은 얼굴은 매혹적이고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보았다. 남자는 몸통이 절반 뜯어져 나간 양아버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