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힘겹게 발버둥 치던 행동을 멈추고 눈가가 빨개진 채 그를 바라보았다.“나한테 뭘 원하는데요?”이준혁은 말하지 않았다.“다 구하고 말해줄게.”“내가 줄 수 없는 걸 원할 건가요?” 윤혜인이 묻자 이준혁은 나지막이 놀리듯 말했다.“너를 나한테 주겠다고 했으면서 아직도 줄 수 없는 게 있어?”“...”윤혜인은 이 남자가 사람을 화나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속을 알 수 없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한구운보다 이준혁을 믿는 쪽을 선택했다.“그럼 소원이는 언제 나와요?”“내일 아침.” 이준혁이 기한을 제시했다.“지금은 안 돼요?” 초조했던 윤혜인은 단 한 순간도 소원이 그곳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다.이준혁은 피식 웃었다.“이 시간에 나보고 감옥을 털라고?”윤혜인은 할 말이 없었다. 하긴, 거긴 다른 곳과 달라서 늦은 시간에 일을 처리할 수가 없었다.소원의 문제가 해결되자 그녀는 마침내 마음을 놓았다.이준혁은 그녀를 끌어당겨 침대에 앉혔다.“오늘 밤은 여기서 자.”“오늘 밤에요?”윤혜인은 코트를 여미며 경계하듯 말했다. “대체 조건이 몇 개예요? 난 하나만 들어줄 거예요.”자신을 경계하는 그녀의 모습에 남자의 눈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역시나 악마의 본성이 또 슬슬 드러난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가려고?”이준혁의 혀끝이 어금니에 닿으며 기가 막혀 웃음이 났다.“걱정 마, 너랑 같이 안 자. 그 정도로 여자가 간절하진 않아.”그의 불쾌감을 감지한 윤혜인은 반박하지 않았다.알 수 없는 거래가 그녀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기에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어쨌든 그녀는 그의 조건 중 하나만 들어줄 것이고, 그가 선택했으면 그걸로 끝이었다....구치소.소원은 두 명의 여성 죄수에게 붙잡혀 정체불명의 액체를 주입받았다.얼굴 전체가 공포에 휩싸인 그녀는 대체 왜 이러는지 물어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악... 아아악...”하지만 입을 열어도 갈라지는 소리가 들릴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자신의
그녀의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고, 눈앞에 하얀빛이 번쩍이며 여자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죽는 거 아니야?”“됐어, 어차피 죽을 거니까 그냥 손가락이나 자르자!”소원은 자신의 손이 여자에게 잡힌 채 바닥에 눌리고 여자가 칼날 같은 것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긋는 게 느껴졌다.칼날이 단숨에 뼈를 자르고 피가 솟구쳤다.새빨간 피가 소원의 시야를 덮쳤다. 열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다 합해도 마음만큼 아프지 않았다.아파, 너무 아프다...그녀의 마음도 칼로 이리저리 잘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육경한이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않고 산 채로 고문해 죽게 할 정도로 잔인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그래서 그때 앞으로 치러야 할 대가를 기대하라고 말했던 거였나.정말 뼈에 사무치는 교훈이다.육경한, 참 지독하다.핏기 어린 눈동자로 눈물을 흘리는 소원은 뼛속까지 사무치는 증오에 죽더라도 남자를 저주하며 원한을 품고 눈을 감겠다고 다짐했다.손을 자르던 여자는 경험이 부족하고 미숙한지 한 번에 잘리지 않을 걸 예상하지 못한 듯 자세를 바꾸고 다시 시도했다.소원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어 여자의 팔을 세게 물어뜯었다. 피와 살이 뜯겨나가도 꿋꿋이 악물었다.“아악!!!”여자는 당황하여 비명을 질렀지만 일행이었던 여자가 입을 가렸다.“소리 지르지 마, 사람들 오면 어쩌려고 그래!”단발머리의 여자는 애써 참으며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덜덜 떨며 말했다.“내 살, 내 살, 발리 이 미친년 좀 떼어내!”또 다른 여자는 소원을 최대한 세게 잡아당겼지만 소원이 끌려가지 않자 손을 들어 뒤통수를 내리쳤다.세게 맞은 소원은 순간 입에 힘이 풀렸지만 물어뜯긴 짧은 머리 여자의 팔에서 살덩어리가 뜯겨 나가며 피와 살이 밖으로 뒤집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그녀는 손바닥으로 소원의 뺨을 세게 때렸다.“이년이 감히 날 물어?”소원의 몸은 이미 약해져 있었던 터라 강한 타격과 함께 벽에 부딪혀 쓰러지면서 순식간에 짙은 통증이 온몸을 휩쓸었다.위에서도
구급차에 실리고 나서야 소원은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그녀는 자신의 아랫배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아가야, 결국 떠난 거니...’목구멍에서는 피가 한가득 쏟아져 나왔고 손은 하도 꽉 쥐고 있는 탓에 손가락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났다.‘육경한... 육경한... 호랑이도 제 새끼는 잡아먹지 않아! 근데 사람인 네가 친자식을 죽여?!’한편 병원.육경한은 아직 진아연과 함께 있었다.자세한 검진 결과 진아연은 별다른 이상이 없었고 다행히 포크가 빗겨나가 동맥을 건드리지 않았다고 했다.당시 목에서 흐르던 피는 진아연이 놀라 손으로 막다가 퍼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하지만 트라우마가 생긴 진아연은 눈을 뜨면 소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며 매우 두려워해서 병원에 더 머물러야 했다.육경한은 병실을 나와 복도에서 숨을 돌리고 있었다.막 담배 한 대를 꺼내려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소종에게서 온 전화였다.“대표님, 말씀하신 대로 소원 씨를 데리러 갔는데 이 대표님께서 먼저 외부 치료 허가를 맡아주셨다고 합니다.”‘준혁이가 소원이를 위해 외부 치료 허가를 맡아줬다고?’몇 초간 곰곰이 생각한 후에야 육경한은 그 원인을 알아챘다.‘윤혜인이 준혁이한테 부탁한 거겠네.’어젯밤 이준혁이 전화를 걸어왔었지만 진아연이 악몽을 꾸는 바람에 육경한은 다시 연락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었다.아마 어제의 연락도 그 일 때문이었을 것이다.‘어차피 오래 가둘 생각도 없었는데 뭐... 준혁이 덕에 번거로워지지 않아서 좋네.’“알겠어, 후속 처리만 잘해.”“이미 처리했고, 사건도 철회했습니다.”“그래.”뒤이어 소종이 머뭇거리더니 말했다.“하지만 소원 씨가 안에서 크게 다친 것 같습니다...”이때, 육경한의 옆으로 의사가 응급 베드를 밀고 급히 지나갔다.“잠시 길 좀 비켜주세요, 죄송합니다.”육경한은 물러서며 응급 베드를 힐끗 보더니 소종에게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지?”“소원 씨가 안에서 다치셨다고요.”그리고 한참 동안 소종은 아
한참 후, 육경한은 이를 악물고 힘겹게 말했다.“너 자꾸 죽겠다는 말하지 마! 누구 겁주려는 거야?!”그때, 의사가 다급하게 말했다.“환자는 아직도 출혈 중입니다. 선생님께서 이러시면 환자의 생명에 위협이 갈 수 있어요!”의사의 눈에 육경한은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소원은 성대가 손상되며 ‘쓱 쓱’하는 끔찍한 쇳소리만 내었는데 육경한은 대화가 된다는 듯이 굴고 있으니 말이다.의사의 말에 육경한은 그제야 응급 베드를 놓아주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 급히 따라갔다.응급실 문 앞.육경한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그가 소원을 그곳으로 보낸 이유는 단지 그녀의 자유를 제한하고 손대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손을 댄 것을 반성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건지 육경한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게다가 소원이 말한, 자신의 아이를 그가 직접 죽였다는 말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지도 너무나 궁금했다.관자놀이가 저릿저릿한 통증을 느끼며 육경한은 벽에 기대어 소종에게 전화를 걸었다.“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빠짐없이 조사해. 세세한 부분 하나라도 절대 놓쳐서는 안 돼!”그렇게 여덟 시간의 긴급 수술 동안, 육경한은 한 번도 움직이지 않고 수술실 밖을 지켰다. 마치 나무 조각상처럼 말이다.수술대 위에 있는 소원의 얼굴은 이미 생기가 없었고 가끔은 호흡마저 멈추었다.수술을 집도한 사람은 병원의 최고 전문가였고 조수는 병원의 유명한 신예인 서현재였다.서현재는 나이가 많지 않아 수술 집도의 자격은 없었지만 약물치료 연구에서는 비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그는 주로 암 치료 약물 개발과 생명 연장을 연구했다.수술대 앞에서, 집도의는 거의 다 망가진 소원의 위를 보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 늦었군...”평소 침착하고 냉정한 서현재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고 목소리도 미세하게 떨렸다. “교수님, 제발 살려주세요.”집도의는 평소 본인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자신이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현재는 진단서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간호사는 서현재의 당당한 뒷모습을 보며 뒤늦게 깨달았다.‘서 선생님 아까 그 남자라고 한 거 맞지?!’평소에 서현재는 차갑긴 해도 환자 가족을 그렇게 부르진 않았기 때문이다.수술실을 나서자마자 서현재는 근심 가득한 남자를 보았다.“의사 선생님, 어떻게 됐어요?”육경한이 급하게 달려와 물었다. 다 묻고 나서야 이 의사가 어딘가 낯이 익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서현재는 공무적인 말투로 말했다.“태아는 유산되었습니다. 지금 환자의 몸 상태는 매우 허약하고요, 몸에는 학대당한 흔적이 있고 손톱도 몇 개 빠졌습니다...”몇 마디만으로도 육경한의 심장은 마치 비틀린 듯 아파왔다.서현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환자는 심각한 위궤양을 앓고 있으며 이틀에서 사흘 동안 따뜻한 음식을 한 입도 먹지 못했어요. 또 위에서 흙 성분도 검출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방치하면 위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거예요.”어떤 이유로든 소원은 이를 알리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서현재는 육경한에게 경고를 주고 싶었다. 소원의 위는 더 이상 학대를 견딜 수 없었으니 말이다.그가 방법을 강구해 소원의 부모님을 보내기 전에, 그녀는 반드시 육경한과 다시 얽히게 될 것이었다.때문에 서현재는 가능한 한 육경한이 아직 조금의 양심이라도 있기를 바랐다.마지막으로, 서현재는 정사각형의 용기 하나를 꺼내 육경한에게 건넸다.“이건 환자가 수술 전에 부탁한 겁니다.”어두운 색의 상자를 보며 육경한의 마음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떠올랐다.이내 상자를 받아 들긴 했지만 차마 열어보지 못한 채 그가 물었다.“뭐가 들어있습니까?”서현재는 차분하게 말했다.“태아의 생물학적 샘플입니다.”육경한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소원이 이렇게 굳이 부탁했다는 것은 배 속의 아이가 육경한의 아이였음을 백 퍼센트 확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내 아이... 내 아이라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거지?!’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윤혜인은 더 이해할 수 없었다.‘계약 결혼을 원하는 거면 왜 하필 나를 고른 거야? 딱 하루만 부부로 지낼 수 있다 해도 자기를 원하는 여자가 서울엔 수없이 많을 텐데.’그러자 이내 이준혁이 그녀를 보며 담담하게 설명했다“할아버지의 건강이 날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어. 의사 말로는 두 달도 남지 않았대.”“쿵!”윤혜인은 머릿속에서 마치 무언가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그녀가 이씨 집안에서 유일하게 믿고 기댈 수 있었던 사람은 바로 할아버지 이태수였다.‘어떻게 이렇게 갑자기...’가슴이 미어지는 듯했고 목소리도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그럼 계속 연기해도 되는데...”“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아.”이준혁은 냉정하게 거절했고 놀란 윤혜인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이런 상황에서까지 나는 할아버지를 속이고 싶지 않아.”언뜻 들으면 일리 있는 말 같았지만 윤혜인은 곧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왠지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들어서 말이다.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물었다.“하지만...”그러나 이준혁은 성가시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자만할 필요 없어. 너랑 재혼하는 건 단순히 할아버지를 위해서야. 물론...”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무심하게 다시 말했다.“강요하는 건 아니야. 재혼할지 아니면 여기서 바로 나랑 할지, 둘 중 하나 정해.”윤혜인은 얼굴이 붉어졌다. 선택지가 이 두 개라면 그녀는 어느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태수를 위해서라면, 석 달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래서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우리 이거 비공개죠? 아주머니도 우리가 재혼한 걸 알지 못하게 하고 싶어요. 그리고 석 달이 지나면 꼭 저랑 이혼할 거죠?”그러자 이준혁은 차가운 표정으로 “응.”하고 짧게 대답했다.윤혜인은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는 듯했다.“좋아요. 그럼 우리 혼인신고서랑 이혼합의서에 둘 다 서명해요. 어차피 석 달은 금방이니까 나중에 다시 서명할 필
할아버지를 뵙고 난 후, 윤혜인은 저녁에 있는 강의를 들으러 가야 했다.이준혁은 그녀를 수업 장소까지 데려다주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니 차 문을 잠그고 윤혜인을 못 내리게 하는 것이었다.“왜 이래요?”이준혁은 진지하게 말했다.“너 지금은 기혼자야. 한구운이랑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부부인 동안에는 절대 만나지 마, 알겠어?”“알겠어요.”윤혜인은 깊게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어차피 원래부터 한구운과 더는 엮이지 않기로 결심한 상태였으니 말이다.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대답하자 이준혁은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며 안심이 되었다.하지만 그런데도 비꼬는 듯한 말투는 여전했다.“대답이 왜 이렇게 빨라? 그 자식이 상처받을까 두렵지 않아?”윤혜인은 어리둥절했지만 지난번 오해를 생각하며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그 사람이랑은 원래부터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어요.”다른 일들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됐든 한구운이 윤혜인을 구해준 것만은 사실이니 말이다. 그녀는 한구운의 좋고 나쁨은 그저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싶었다.이윽고 윤혜인이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이준혁이 덥석 그녀의 손을 잡고는 거칠게 물었다.“아무 사이 아니었다는 게 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예요.”그가 하도 손을 꽉 잡고 있어서 불편했는지라 윤혜인은 이내 이준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하지만 그는 놓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그럼 두 사람 같이...”말을 하다가 그는 갑자기 질문을 멈췄다. 그녀의 대답을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을까 봐 두려워서 말이다.결벽이 있는 이준혁이었지만 만약 상대가 눈앞에 있는 윤혜인이라면 그 결벽증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지금처럼, 그는 그녀를 속여서 자신의 곁에 묶어두고 있었다. 다른 남자가 윤혜인을 차지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윤혜인은 그가 여전히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말했다.“이만 내려야 해요. 강의 늦겠어요.”“뭐가 그렇게 급해.”이준혁은 지그시 응시하다가 순간
찰나의 순간, 육경한의 차가운 눈빛은 진아연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그가 그녀에게 이렇게 무섭게 대하는 일은 드물었다.지난번 크루즈선에서도 소원 때문에 육경한은 망설임 없이 진아연을 내던져 바닥에 쓰러지게 했었다.진아연은 육경한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가 더 이상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경한 씨... 설마 이젠 날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진아연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고 억지로 울음을 참는 모습은 참으로 불쌍해 보였다.소원이 아직도 깨어나지 않아 기분이 좋지 않았던 육경한은 목소리에도 짜증이 섞여 있었다.“그럴 일 없어.”“하지만 방금 나한테 화냈잖아요!”진아연은 콧물을 훌쩍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조금 전 경한 씨 행동 때문에 나 진짜 화났어요!”그녀는 육경한이 자신의 제멋대로인 모습을 좋아하고 연약한 모습 따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진아연은 적절하게 연약함과 제멋대로인 성격을 섞어가며 육경한에게 접근했다.아니나 다를까 육경한의 말투가 약간 부드러워졌다.“알겠어. 너도 아직 다 나은 건 아니니까 먼저 가서 쉬어.”그 말에 화가 난 진아연은 이를 악물었다.이건 그녀를 달래는 걸까? 아니, 이건 그녀를 내쫓는 것이었다.진아연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경한 씨, 소원 씨가 나를 다치게 한 일을 그냥 넘길 작정이에요? 그 여자 정말 날 죽이려고 했다고요! 난 아직도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려요!”하지만 육경한은 담담하게 말했다.“소원이는 이미 벌을 받았어.”그러자 진아연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벌을 받았다고?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고작 아이 하나 잃은 거로 이렇게 마음 아파하는 거야? 설마... 그 아이가 경한 씨 아이였나?’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빌어먹을 년, 빌어먹을 년, 빌어먹을 년!’육경한은 진아연이 고개를 숙인 채 매우 슬퍼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네가 억울해하는 거 알아. 내일 소
윤혜인이 문 앞으로 다가가 힘껏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화들짝 놀란 도우미가 얼른 달려와 윤혜인을 막았다.“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만하세요.”도우미가 윤혜인을 안더니 힘껏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윤혜인은 문을 두드릴 수 없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엄마. 엄마. 엄마.”윤혜인이 큰 소리로 외치자 바깥에서 들리던 웅얼거리는 소리가 달라졌다.쿵.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쿵. 쿵. 쿵.휠체어로 문을 힘껏 부수는 소리와 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사모님.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돼요.”윤혜인이 더 높은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 엄마.”방 안에 있던 도우미가 윤혜인의 입술을 틀어막자 윤혜인이 팔다리를 마구 버둥대며 웅얼웅얼 소리를 냈다.문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망가졌다. 문이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쌩하고 들어왔다. 윤아름은 큰 꽃병 하나를 이고 들어와 윤혜인의 입을 막고 있는 도우미를 내리쳤다. 도우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윤아름이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윤혜인을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윤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다시 안아보는 거라 윤혜인도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도우미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다른 도우미를 보고 윤아름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긴 윤아름은 아까 정신이 살짝 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원진우가 윤아름을 다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기에 과분하게 말렸다가 윤아름이 다치는 날에는 도우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이때 소식을 들은 원진우가 다급하게 걸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녀를 보게 되었다. 원진우는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윤혜인은 정상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멍하던 예전과 비기면 정서라는 게 생겼다. 윤혜인이 확실히 윤아름을 치유
원진우는 연속 몇 시간이나 윤혜인을 관찰했다. 관찰한 시간이 오래면 오랠수록 원진우는 윤혜인이 자는 모습이 자신과 쏙 빼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낯선 곳에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언제든 경계 태세에 들어가는 것도 말이다.“일어났으면 뭐 좀 먹어요. 도우미에게 이쪽으로 가져다주라고 할게요.”원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분하고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만약 윤혜인에게 예전 경력이 없었다면 원진우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잔혹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뒤로 잘 숨긴 것 같았다.윤혜인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가는 원망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다. 정서도 도라는 게 있어 일정한 포인트까지 닿으면 되지 아니면 원진우가 오히려 경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진우는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 그저 윤혜인이 보면 볼수록 귀엽다고 생각했다.“혜인 씨, 이름은 엄마가 지어준 거예요?”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혜인의 몸에는 금패가 하나 있는데 위에 윤혜인의 이름이 적힌 금패였다. 양아버지가 길다가 그녀를 줍고 주변과 경찰서에 윤혜인이라는 아이가 실종됐는지 물었지만 윤혜인이라는 아이를 잊어버린 적은 없다고 했다. 전에 조사가 어려웠던 건 윤혜인이 원진우의 의해 먼곳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기술이 좋지 않아 실종자를 찾는 것도 힘든 일이긴 했다. 게다가 양아버지는 인자한 사람이었기에 윤혜인의 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고만 말할 뿐 이기적이게 그녀의 모든 걸 묵살하지는 않았다. 원래 이름을 쓰겠다고 한 것도 어느 날 친부모님을 만나면 그들이 자기를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듣기 좋네요.”원진우가 말했다. 윤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원진우가 뭔가 말하려다가 방향을 잃었다.“일찍 쉬어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방에서 빠져나갔다. 도우미가 아침을 가져다줬는데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윤혜인은 그 요리와 밥을 이미 보며 원진우가 아직 독을 타지는 않았을 거라는
윤혜인은 다시 눈을 감으며 잠을 자야 체력을 보존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오빠가 사람을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자신을 타일러도 윤혜인의 잠자리는 여전히 뒤숭숭했고 악몽만 연거푸 꿨다. 엄마가 여기 있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도 여기 있다는 생각에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겨우 동이 틀 때까지 버틴 윤혜인이 눈을 뜨자 침대맡에 놓인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원진우였다. 윤혜인은 순간 얼굴을 굳히더니 혹시나 하지 말아야 할 잠꼬대를 하면서 마음에 담아뒀던 말을 전부 쏟아낸 게 아닌지 걱정했다.“깼어요?”원진우는 그런 윤혜인을 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윤혜인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매우 덤덤했다.“네.”“어제 잠을 설치는 것 같던데요?”원진우가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차갑디차가운 눈동자에 담긴 의미가 뭔지는 알아내기 힘들었다.윤혜인은 혹시나 실수한 건 아닌지 의심되어 심장이 철렁했다. 얼른 머리를 굴린 윤혜인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렇게 말했다.“네. 잠을 잘 자지 못한 건 맞아요. 어제 겪었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무섭거든요. 나는 정말 거기서 죽는 줄 알았어요.”윤혜인이 솔직하게 말하자 원진우의 눈빛도 살짝 풀렸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요?”원진우가 물었다.“네. 너무 무서워요. 나를 세 번이나 죽이려고 했는데 어떻게 안 무섭겠어요?”윤혜인은 두려움을 전혀 위장하지 않았다. 원진우와 말할 때도 몸을 살짝 움츠리며 뒤로 빼고는 경계 태세를 취했다. 이에 원진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평소 곽진명과는 어떻게 지내는데요?”윤혜인은 원진우가 무슨 뜻으로 묻는지 몰라 잠깐 넋을 잃었다.“곽진명과도 이렇게 지내요?”원진우가 물었다. 윤혜인은 그제야 원진우가 자기를 윤혜인의 아버지로 대입해 곽진명과 비교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곽진명을 떠올리자 윤혜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아빠는 내게 무척이나 잘해줬어요. 그래서 한 번도 무섭다고
원진우가 눈길을 돌리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묵묵히 다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총명한 여자라는 걸 알아챘으니 윤혜인이 한 말과 보이는 행동을 믿으면 함정에 빠지는 거나 다름없다고 말이다. 원진우는 윤아름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윤아름의 어깨를 잡고 힘껏 흔들었다.“아름아,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윤아름의 동공은 여전히 풀려 있었고 원진우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원진우는 윤아름의 어깨를 점점 더 억세게 부여잡더니 이를 악물고 캐물었다.“말해. 말하라고. 있어, 없어?”“...”윤아름은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흥흥거릴 뿐이었다. 진우희가 그렇게 된 걸 본 다음부터 줄곧 이 상태였다.원진우는 윤아름의 멘탈이 이렇게 약할 줄은 몰랐다. 양자를 총으로 쐈다는 소식부터 먼저 알려주고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진우희의 시신까지 보여줬다. 지하실에 갇혀 있으면서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윤아름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미쳐버리고 말았다. 다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곽경천도 그녀를 구하려다 총에 맞았고 진우희도 그녀를 도우려다 원진우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이 모든 건 다 그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고 그 뒤에 아무리 다시 이어주려 해도 이어지지 않았다. 무의식적인 흥얼거림과 가끔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은 윤아름을 모두가 알아주던 미녀에서 바보로 전락하게 했다. 하지만 미인은 미인인지라 치매에 바보가 되어도 예쁘기만 했다.윤아름은 초점 없는 동공으로 무의식적으로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때 미약하게나마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윤아름의 눈동자가 다시 초점을 되찾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넘어졌다. 원진우가 부축하려 했지만 윤아름이 그 손을 탁 쳐내더니 미친 듯이 모니터가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 화면으로 보이는 윤혜인은 어느새 몸을 웅크리고 있
그 누구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이를 본다면 차분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윤아름처럼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윤아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원진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는 정말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윤혜인의 쓸모도 이제 끝났기에 원진우는 윤혜인의 손에 올렸던 발을 뗐고는 입을 열었다.“온도 영하 80도로 내려.”“!”윤혜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윤혜인을 산채로 냉동시켜 저번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겠다는 뜻이었다. 원진우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윤혜인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원진우가 문밖으로 나서는 날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어떻게 해야만 살 수 있을까...’윤혜인은 죽기 싫었다. 살아서 엄마를 구하고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얼굴을 떠올리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원진우!”윤혜인이 성까지 붙여서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원진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윤혜인을 돌아봤다. 윤혜인은 혀끝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서 느껴져서야 윤혜인은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윤혜인의 목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내가 누구 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혜인을 보는 원진우의 눈빛에서 보기 드물게 두려움이 묻어났다. 비록 몇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윤혜인이 그 눈빛을 캐치하고는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이야말로 윤혜인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삼촌, 그렇게 총명하신 분이 이미 눈치채고 계신 거 아니에요? 경천 오빠랑 나랑 친 남매가 아닌 건 알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왜 직접 낳지 않고 남자아이를 입양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혹시 지금 내 딸이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머리는 썼는데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아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
턱에서 전해진 고통에 윤혜인은 호흡이 가빠졌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엄마 좀 만나게 해줘요... 딱 한 번만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든 다 좋아요...”“꿈도 꾸지 마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바닥으로 내팽개치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원진우가 여신으로 받드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니, 이런 오점은 반드시 지워야 했다.윤혜인은 턱이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여전히 울면서 애원했다.“딱 한 번만요. 한 번만 엄마를 만나게 해줘요. 제발 부탁이에요... 죽어도 눈은 감고 죽어야죠...”원진우는 윤혜인이 죽음을 앞두고 자기 걱정보다는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혜인 씨는 만나고 싶어도 아름이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죠.”이 말에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거짓말하지 마요. 엄마가 왜 나를 만나려 하지 않겠어요?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당신이 납치하면서 나를 버리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고요.”“명을 재촉하는 꼴이라니.”원진우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그렇다면 만족시켜 줄게요.”원진우가 손뼉을 치자 대문 하나가 열렸다. 불빛이 들어와서야 윤혜인은 지금 있는 곳이 냉동창고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원진우는 전혀 추위를 타지 않았다. 특수 제작한 옷을 입고 있어 냉동창고에 있어도 추위를 막을 수 있었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하지만 반사 때문에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다. 원진우가 그쪽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받아와 가까이 밀고 와서야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윤혜인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릴 적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여자가 자장가를 부르며 아이를 달래는 장면, 여자가 어린 윤혜인의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도 여자의 얼굴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윤혜인과 자매라고 해도 믿을 사람이 적지 않을
“당신...”윤혜인이 이를 악물었다.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이 말을 빼고는 다른 말이 나가지 않았다.“급해할 거 없어요. 천천히 해요.”원진우가 오히려 웃으며 윤혜인을 다독였다. 윤혜인은 손에 칼만 있었다면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칼이 있다고 해도 절대 이 남자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경계가 삼엄한 배씨 정원에서 윤혜인을 납치했다는 건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었다. 윤혜인은 속으로 원망해도 흥분해도 쓸데없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이런 남자를 상대하려면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며 기회를 찾아야 했다. 윤혜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것으로 최대한 차분해지려 애썼다.“왜 나를 죽이려는 거예요?”윤혜인이 물었다. 이 문제가 약간은 바보 같아 보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진우가 윤혜인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라면 아마도 윤혜인이 윤아름의 아이여서일 것이다. 그리고 윤혜인이 관찰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총명한 사람을 싫어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멍청한 척, 무서운 척하며 상대의 경계심을 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윤혜인도 원진우가 어떻게 윤혜인이 어릴 때 찾아온 건지 알고 싶었다.원진우는 순진해 보이는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점이 생기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죠. 윤혜인 씨의 존재가 딱 그 오점이거든요.”“...”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 원진우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 윤혜인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릴 때는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그때는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원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양아버지가 혜인 씨를 그렇게 보호할 줄은 몰랐는데. 명이 질기네요.”원진우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웃음이 점점 음침해졌다.“춥디추운 그날 밤에도 죽지 않고 살았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놔도 안 죽고 살아있으니...”윤혜인이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당신이었어요...?”저 정도면 답을 준 거나 마
이에 양아버지는 남자가 어린 윤혜인을 노린다는 걸 확신했다. 그 시절 화려한 옷을 입고 비싼 차를 끌고 다니는 남자를 유괴범이라 외친다면 믿을 사람도 없을뿐더러 성가신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작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러니 이 남자도 대담하게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양아버지는 남자가 느긋하게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자 얼른 어린 윤혜인을 안고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린 윤혜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지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아빠, 케이크... 케이크...”아이의 눈에 케이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어린 윤혜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망가진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양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양아버지가 숨을 헐떡이며 다독였다.“착하지. 아빠가 다시 사줄게.”어린 윤혜인은 너무 속상해 양아버지의 몸에 엎드린 채 양아버지의 등 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리를 내다봤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가 왜 갑자기 이렇게 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양아버지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이내 얌전하게 양아버지의 목을 감싸더니 어깨에 기대어 북받치는 서러움을 꾹꾹 눌렀다. 어린 윤혜인은 나이가 어렸기에 양아버지처럼 곧 들이닥칠 위험을 감지하지는 못했다. 차갑고 끈적한 구덩이에 빠져있는 어린 윤혜인은 빨간 벨벳 슈트를 입은 남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윤혜인은 너무 무서워 눈을 부릅뜬 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두려움과 울분이 목에 걸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남자는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추더니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다리를 들더니 양아버지의 얼굴에 던져버렸다.“허허.”남자가 음침하게 웃더니 제 딴에는 재밌다고 생각하는 말을 내뱉었다.“그러게 누가 그렇게 빨리 달리래? 그러니까 다리까지 나가떨어지는 거 아니야.”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밀려오
칠흑 같은 밤과 뼈저린 추위, 그리고 아까 맞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비까지, 모든 상황이 똑같이 맞아떨어졌다.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달리다가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작고 연약한 어린 윤혜인은 포물선을 그리다 옆에 있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의 몸과 얼굴은 흙이 잔뜩 묻었고 무성한 갈대에 가려져 시커먼 진흙과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양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데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향해 힘껏 고개를 저었다. 넘어져서 몸을 다친 양아버지는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윤혜인을 안았던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린 윤혜인은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구덩이에 빠져있는 걸 양아버지도 분명히 봤는데 양아버지가 왜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는지 말이다. 어린 윤혜인은 그렇게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빨간 스포츠카가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양아버지 뒤를 쫓았다. 앞에서 달리던 양아버지는 그렇게 차에 치여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의 다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그중 한쪽이 어린 윤혜인 앞에 떨어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다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양아버지의 얼굴도 어린 윤혜인을 향해 있었다.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어린 윤혜인은 초점을 잃고 퀭한 양아버지의 두 눈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정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윤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범퍼가 깨진 스포츠카에서 빨간 벨벳 슈틀 입은 남자가 내려왔다. 어린 윤혜인은 얼굴은 매혹적이고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보았다. 남자는 몸통이 절반 뜯어져 나간 양아버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