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힘겹게 발버둥 치던 행동을 멈추고 눈가가 빨개진 채 그를 바라보았다.“나한테 뭘 원하는데요?”이준혁은 말하지 않았다.“다 구하고 말해줄게.”“내가 줄 수 없는 걸 원할 건가요?” 윤혜인이 묻자 이준혁은 나지막이 놀리듯 말했다.“너를 나한테 주겠다고 했으면서 아직도 줄 수 없는 게 있어?”“...”윤혜인은 이 남자가 사람을 화나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속을 알 수 없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한구운보다 이준혁을 믿는 쪽을 선택했다.“그럼 소원이는 언제 나와요?”“내일 아침.” 이준혁이 기한을 제시했다.“지금은 안 돼요?” 초조했던 윤혜인은 단 한 순간도 소원이 그곳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다.이준혁은 피식 웃었다.“이 시간에 나보고 감옥을 털라고?”윤혜인은 할 말이 없었다. 하긴, 거긴 다른 곳과 달라서 늦은 시간에 일을 처리할 수가 없었다.소원의 문제가 해결되자 그녀는 마침내 마음을 놓았다.이준혁은 그녀를 끌어당겨 침대에 앉혔다.“오늘 밤은 여기서 자.”“오늘 밤에요?”윤혜인은 코트를 여미며 경계하듯 말했다. “대체 조건이 몇 개예요? 난 하나만 들어줄 거예요.”자신을 경계하는 그녀의 모습에 남자의 눈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역시나 악마의 본성이 또 슬슬 드러난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가려고?”이준혁의 혀끝이 어금니에 닿으며 기가 막혀 웃음이 났다.“걱정 마, 너랑 같이 안 자. 그 정도로 여자가 간절하진 않아.”그의 불쾌감을 감지한 윤혜인은 반박하지 않았다.알 수 없는 거래가 그녀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기에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어쨌든 그녀는 그의 조건 중 하나만 들어줄 것이고, 그가 선택했으면 그걸로 끝이었다....구치소.소원은 두 명의 여성 죄수에게 붙잡혀 정체불명의 액체를 주입받았다.얼굴 전체가 공포에 휩싸인 그녀는 대체 왜 이러는지 물어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악... 아아악...”하지만 입을 열어도 갈라지는 소리가 들릴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자신의
그녀의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고, 눈앞에 하얀빛이 번쩍이며 여자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죽는 거 아니야?”“됐어, 어차피 죽을 거니까 그냥 손가락이나 자르자!”소원은 자신의 손이 여자에게 잡힌 채 바닥에 눌리고 여자가 칼날 같은 것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긋는 게 느껴졌다.칼날이 단숨에 뼈를 자르고 피가 솟구쳤다.새빨간 피가 소원의 시야를 덮쳤다. 열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다 합해도 마음만큼 아프지 않았다.아파, 너무 아프다...그녀의 마음도 칼로 이리저리 잘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육경한이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않고 산 채로 고문해 죽게 할 정도로 잔인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그래서 그때 앞으로 치러야 할 대가를 기대하라고 말했던 거였나.정말 뼈에 사무치는 교훈이다.육경한, 참 지독하다.핏기 어린 눈동자로 눈물을 흘리는 소원은 뼛속까지 사무치는 증오에 죽더라도 남자를 저주하며 원한을 품고 눈을 감겠다고 다짐했다.손을 자르던 여자는 경험이 부족하고 미숙한지 한 번에 잘리지 않을 걸 예상하지 못한 듯 자세를 바꾸고 다시 시도했다.소원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어 여자의 팔을 세게 물어뜯었다. 피와 살이 뜯겨나가도 꿋꿋이 악물었다.“아악!!!”여자는 당황하여 비명을 질렀지만 일행이었던 여자가 입을 가렸다.“소리 지르지 마, 사람들 오면 어쩌려고 그래!”단발머리의 여자는 애써 참으며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덜덜 떨며 말했다.“내 살, 내 살, 발리 이 미친년 좀 떼어내!”또 다른 여자는 소원을 최대한 세게 잡아당겼지만 소원이 끌려가지 않자 손을 들어 뒤통수를 내리쳤다.세게 맞은 소원은 순간 입에 힘이 풀렸지만 물어뜯긴 짧은 머리 여자의 팔에서 살덩어리가 뜯겨 나가며 피와 살이 밖으로 뒤집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그녀는 손바닥으로 소원의 뺨을 세게 때렸다.“이년이 감히 날 물어?”소원의 몸은 이미 약해져 있었던 터라 강한 타격과 함께 벽에 부딪혀 쓰러지면서 순식간에 짙은 통증이 온몸을 휩쓸었다.위에서도
구급차에 실리고 나서야 소원은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그녀는 자신의 아랫배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아가야, 결국 떠난 거니...’목구멍에서는 피가 한가득 쏟아져 나왔고 손은 하도 꽉 쥐고 있는 탓에 손가락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났다.‘육경한... 육경한... 호랑이도 제 새끼는 잡아먹지 않아! 근데 사람인 네가 친자식을 죽여?!’한편 병원.육경한은 아직 진아연과 함께 있었다.자세한 검진 결과 진아연은 별다른 이상이 없었고 다행히 포크가 빗겨나가 동맥을 건드리지 않았다고 했다.당시 목에서 흐르던 피는 진아연이 놀라 손으로 막다가 퍼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하지만 트라우마가 생긴 진아연은 눈을 뜨면 소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며 매우 두려워해서 병원에 더 머물러야 했다.육경한은 병실을 나와 복도에서 숨을 돌리고 있었다.막 담배 한 대를 꺼내려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소종에게서 온 전화였다.“대표님, 말씀하신 대로 소원 씨를 데리러 갔는데 이 대표님께서 먼저 외부 치료 허가를 맡아주셨다고 합니다.”‘준혁이가 소원이를 위해 외부 치료 허가를 맡아줬다고?’몇 초간 곰곰이 생각한 후에야 육경한은 그 원인을 알아챘다.‘윤혜인이 준혁이한테 부탁한 거겠네.’어젯밤 이준혁이 전화를 걸어왔었지만 진아연이 악몽을 꾸는 바람에 육경한은 다시 연락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었다.아마 어제의 연락도 그 일 때문이었을 것이다.‘어차피 오래 가둘 생각도 없었는데 뭐... 준혁이 덕에 번거로워지지 않아서 좋네.’“알겠어, 후속 처리만 잘해.”“이미 처리했고, 사건도 철회했습니다.”“그래.”뒤이어 소종이 머뭇거리더니 말했다.“하지만 소원 씨가 안에서 크게 다친 것 같습니다...”이때, 육경한의 옆으로 의사가 응급 베드를 밀고 급히 지나갔다.“잠시 길 좀 비켜주세요, 죄송합니다.”육경한은 물러서며 응급 베드를 힐끗 보더니 소종에게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지?”“소원 씨가 안에서 다치셨다고요.”그리고 한참 동안 소종은 아
한참 후, 육경한은 이를 악물고 힘겹게 말했다.“너 자꾸 죽겠다는 말하지 마! 누구 겁주려는 거야?!”그때, 의사가 다급하게 말했다.“환자는 아직도 출혈 중입니다. 선생님께서 이러시면 환자의 생명에 위협이 갈 수 있어요!”의사의 눈에 육경한은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소원은 성대가 손상되며 ‘쓱 쓱’하는 끔찍한 쇳소리만 내었는데 육경한은 대화가 된다는 듯이 굴고 있으니 말이다.의사의 말에 육경한은 그제야 응급 베드를 놓아주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 급히 따라갔다.응급실 문 앞.육경한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그가 소원을 그곳으로 보낸 이유는 단지 그녀의 자유를 제한하고 손대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손을 댄 것을 반성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건지 육경한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게다가 소원이 말한, 자신의 아이를 그가 직접 죽였다는 말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지도 너무나 궁금했다.관자놀이가 저릿저릿한 통증을 느끼며 육경한은 벽에 기대어 소종에게 전화를 걸었다.“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빠짐없이 조사해. 세세한 부분 하나라도 절대 놓쳐서는 안 돼!”그렇게 여덟 시간의 긴급 수술 동안, 육경한은 한 번도 움직이지 않고 수술실 밖을 지켰다. 마치 나무 조각상처럼 말이다.수술대 위에 있는 소원의 얼굴은 이미 생기가 없었고 가끔은 호흡마저 멈추었다.수술을 집도한 사람은 병원의 최고 전문가였고 조수는 병원의 유명한 신예인 서현재였다.서현재는 나이가 많지 않아 수술 집도의 자격은 없었지만 약물치료 연구에서는 비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그는 주로 암 치료 약물 개발과 생명 연장을 연구했다.수술대 앞에서, 집도의는 거의 다 망가진 소원의 위를 보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 늦었군...”평소 침착하고 냉정한 서현재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고 목소리도 미세하게 떨렸다. “교수님, 제발 살려주세요.”집도의는 평소 본인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자신이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현재는 진단서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간호사는 서현재의 당당한 뒷모습을 보며 뒤늦게 깨달았다.‘서 선생님 아까 그 남자라고 한 거 맞지?!’평소에 서현재는 차갑긴 해도 환자 가족을 그렇게 부르진 않았기 때문이다.수술실을 나서자마자 서현재는 근심 가득한 남자를 보았다.“의사 선생님, 어떻게 됐어요?”육경한이 급하게 달려와 물었다. 다 묻고 나서야 이 의사가 어딘가 낯이 익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서현재는 공무적인 말투로 말했다.“태아는 유산되었습니다. 지금 환자의 몸 상태는 매우 허약하고요, 몸에는 학대당한 흔적이 있고 손톱도 몇 개 빠졌습니다...”몇 마디만으로도 육경한의 심장은 마치 비틀린 듯 아파왔다.서현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환자는 심각한 위궤양을 앓고 있으며 이틀에서 사흘 동안 따뜻한 음식을 한 입도 먹지 못했어요. 또 위에서 흙 성분도 검출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방치하면 위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거예요.”어떤 이유로든 소원은 이를 알리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서현재는 육경한에게 경고를 주고 싶었다. 소원의 위는 더 이상 학대를 견딜 수 없었으니 말이다.그가 방법을 강구해 소원의 부모님을 보내기 전에, 그녀는 반드시 육경한과 다시 얽히게 될 것이었다.때문에 서현재는 가능한 한 육경한이 아직 조금의 양심이라도 있기를 바랐다.마지막으로, 서현재는 정사각형의 용기 하나를 꺼내 육경한에게 건넸다.“이건 환자가 수술 전에 부탁한 겁니다.”어두운 색의 상자를 보며 육경한의 마음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떠올랐다.이내 상자를 받아 들긴 했지만 차마 열어보지 못한 채 그가 물었다.“뭐가 들어있습니까?”서현재는 차분하게 말했다.“태아의 생물학적 샘플입니다.”육경한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소원이 이렇게 굳이 부탁했다는 것은 배 속의 아이가 육경한의 아이였음을 백 퍼센트 확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내 아이... 내 아이라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거지?!’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윤혜인은 더 이해할 수 없었다.‘계약 결혼을 원하는 거면 왜 하필 나를 고른 거야? 딱 하루만 부부로 지낼 수 있다 해도 자기를 원하는 여자가 서울엔 수없이 많을 텐데.’그러자 이내 이준혁이 그녀를 보며 담담하게 설명했다“할아버지의 건강이 날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어. 의사 말로는 두 달도 남지 않았대.”“쿵!”윤혜인은 머릿속에서 마치 무언가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그녀가 이씨 집안에서 유일하게 믿고 기댈 수 있었던 사람은 바로 할아버지 이태수였다.‘어떻게 이렇게 갑자기...’가슴이 미어지는 듯했고 목소리도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그럼 계속 연기해도 되는데...”“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아.”이준혁은 냉정하게 거절했고 놀란 윤혜인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이런 상황에서까지 나는 할아버지를 속이고 싶지 않아.”언뜻 들으면 일리 있는 말 같았지만 윤혜인은 곧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왠지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들어서 말이다.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물었다.“하지만...”그러나 이준혁은 성가시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자만할 필요 없어. 너랑 재혼하는 건 단순히 할아버지를 위해서야. 물론...”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무심하게 다시 말했다.“강요하는 건 아니야. 재혼할지 아니면 여기서 바로 나랑 할지, 둘 중 하나 정해.”윤혜인은 얼굴이 붉어졌다. 선택지가 이 두 개라면 그녀는 어느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태수를 위해서라면, 석 달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래서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우리 이거 비공개죠? 아주머니도 우리가 재혼한 걸 알지 못하게 하고 싶어요. 그리고 석 달이 지나면 꼭 저랑 이혼할 거죠?”그러자 이준혁은 차가운 표정으로 “응.”하고 짧게 대답했다.윤혜인은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는 듯했다.“좋아요. 그럼 우리 혼인신고서랑 이혼합의서에 둘 다 서명해요. 어차피 석 달은 금방이니까 나중에 다시 서명할 필
할아버지를 뵙고 난 후, 윤혜인은 저녁에 있는 강의를 들으러 가야 했다.이준혁은 그녀를 수업 장소까지 데려다주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니 차 문을 잠그고 윤혜인을 못 내리게 하는 것이었다.“왜 이래요?”이준혁은 진지하게 말했다.“너 지금은 기혼자야. 한구운이랑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부부인 동안에는 절대 만나지 마, 알겠어?”“알겠어요.”윤혜인은 깊게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어차피 원래부터 한구운과 더는 엮이지 않기로 결심한 상태였으니 말이다.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대답하자 이준혁은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며 안심이 되었다.하지만 그런데도 비꼬는 듯한 말투는 여전했다.“대답이 왜 이렇게 빨라? 그 자식이 상처받을까 두렵지 않아?”윤혜인은 어리둥절했지만 지난번 오해를 생각하며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그 사람이랑은 원래부터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어요.”다른 일들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됐든 한구운이 윤혜인을 구해준 것만은 사실이니 말이다. 그녀는 한구운의 좋고 나쁨은 그저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싶었다.이윽고 윤혜인이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이준혁이 덥석 그녀의 손을 잡고는 거칠게 물었다.“아무 사이 아니었다는 게 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예요.”그가 하도 손을 꽉 잡고 있어서 불편했는지라 윤혜인은 이내 이준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하지만 그는 놓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그럼 두 사람 같이...”말을 하다가 그는 갑자기 질문을 멈췄다. 그녀의 대답을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을까 봐 두려워서 말이다.결벽이 있는 이준혁이었지만 만약 상대가 눈앞에 있는 윤혜인이라면 그 결벽증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지금처럼, 그는 그녀를 속여서 자신의 곁에 묶어두고 있었다. 다른 남자가 윤혜인을 차지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윤혜인은 그가 여전히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말했다.“이만 내려야 해요. 강의 늦겠어요.”“뭐가 그렇게 급해.”이준혁은 지그시 응시하다가 순간
찰나의 순간, 육경한의 차가운 눈빛은 진아연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그가 그녀에게 이렇게 무섭게 대하는 일은 드물었다.지난번 크루즈선에서도 소원 때문에 육경한은 망설임 없이 진아연을 내던져 바닥에 쓰러지게 했었다.진아연은 육경한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가 더 이상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경한 씨... 설마 이젠 날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진아연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고 억지로 울음을 참는 모습은 참으로 불쌍해 보였다.소원이 아직도 깨어나지 않아 기분이 좋지 않았던 육경한은 목소리에도 짜증이 섞여 있었다.“그럴 일 없어.”“하지만 방금 나한테 화냈잖아요!”진아연은 콧물을 훌쩍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조금 전 경한 씨 행동 때문에 나 진짜 화났어요!”그녀는 육경한이 자신의 제멋대로인 모습을 좋아하고 연약한 모습 따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진아연은 적절하게 연약함과 제멋대로인 성격을 섞어가며 육경한에게 접근했다.아니나 다를까 육경한의 말투가 약간 부드러워졌다.“알겠어. 너도 아직 다 나은 건 아니니까 먼저 가서 쉬어.”그 말에 화가 난 진아연은 이를 악물었다.이건 그녀를 달래는 걸까? 아니, 이건 그녀를 내쫓는 것이었다.진아연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경한 씨, 소원 씨가 나를 다치게 한 일을 그냥 넘길 작정이에요? 그 여자 정말 날 죽이려고 했다고요! 난 아직도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려요!”하지만 육경한은 담담하게 말했다.“소원이는 이미 벌을 받았어.”그러자 진아연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벌을 받았다고?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고작 아이 하나 잃은 거로 이렇게 마음 아파하는 거야? 설마... 그 아이가 경한 씨 아이였나?’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빌어먹을 년, 빌어먹을 년, 빌어먹을 년!’육경한은 진아연이 고개를 숙인 채 매우 슬퍼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네가 억울해하는 거 알아. 내일 소
남자는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만약 제가 당신에게 기회를 준다면요?”“무슨 기회요?”진아연은 자신이 누구와 거래하는지 잊지 않고 전전긍긍하며 물었다.남자의 두 눈은 마치 별을 숨긴듯 하였다. 그는 반혹적인 어조로 말했다.“육경한을 죽일 기회를 줄게요. 만약 그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면 저는 당신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고 평안히 출국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어요. 진아연 씨, 어떻게 생각해요?”“정말이에요?”진아연은 그의 말을 정말 믿기 어려웠다.제트를 마주할 떄 진아련은 항상 착각에 빠졌다. 사실은 육경한을 죽이는 것보다 제트를 마주하는게 더 어려웠다. 이 두 문제를 함께 놓으면 비교가 될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아주 신비하기에 누구도 그의 배경과 내력을 알 수 없어 그와 상대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경한의 약점은 아주 많다. 소원이와 그녀 뱃속에 있는 아이, 그리고 망할 놈 유진이... 심지어 하나하나의 나쁜 계획은 이미 진아연의 마음속에서 형태를 갖추게 되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제트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물론 정말이에요, 당신이 성공하면 저는 말한 대로 다시는 따지지 않을 것이에요. ”말하는 사이에 남자는 뒤에 쫓아오는 세 대의 차를 가볍게 따돌렸다.이 제트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사람마냥 무섭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진아연의 마음속에 있는 제트는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 그녀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어 놀라지 않았다.진아연은 눈앞의 남자를 보면서 자신의 충성심을 알려 주었다.“제트 씨, 안심해요, 저는 반드시 임무를 완수할 거니까. 당신은 저를 죽이지만 않으면 됩니다.”“음, 기대가 되네요.”“...”뒤따라오던 세 대의 차가 앞차를 잃어버린 후, 경비원들은 실시간 정보를 병실의 VIP 라운지에 전달했다.유진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남자는 황수진보고 유진이의 휴식에 방해 안 되는 대기실에 오라고 했다.지금 육경한의 안색은 매우 안 좋았다.경호원들이 전송해 오는 화면
남자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잡히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또 오다니 정말 바보 중의 바보예요!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곳 경비원은 다른 동네 분들과 다를 줄은, 이곳 경비원은 정말 최고급 경호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여자가 원망하자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진아연, 당신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멍청한 사람인 것 같아요. ”진아연은 순간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반응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가 라는 생각에 그녀는 그를 경계하면서 물어봤다.“누구세요? “남자는 침묵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 가리려고 마스크를 썼지만, 눈빛에 드러나는 냉랭함은 숨길 수 없었다. 진아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나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당신이 바로 제트 씨이세요? ”남자는 그녀를 상대하지도 않고 부인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다 설명했다. 진아연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바지에 실수까지 할 뻔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늑대 무리에서 도망쳐 나와 호랑이 굴에 들어갈 줄을... "제트 씨... 아주 죄송해요, 제가 일부러 여기에 나타난 건 아니예요. 지금 당장 꺼질게요. ”놀라움은 하여금 진아연의 이성을 잃게 만들어 고속도로에서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 생각까지 하였다.제트와 비교했을 때, 지금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경비원들이 구세주라고 생각되었다. 진아연은 제트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필경 지난번에 그의 손에서 죽을 뻔했으니까... 진아연의 손이 차 문손잡이에 닿았을 때, 차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진아연은 절망 속에서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비는 자세를 취했다. “죄송해요... 제트 씨... 저 진짜 멀리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저를 놓아주세요. ”안장이 좁아서 진아연은 무릎을 꿇을 수 없어 두 손을 끊임없이 비비며 아주 작은 희망을 찾고 있었다.남자는 역시 수단과 방법을 숨기고 있었다. 뒤차의 추격을 피하는 동시에
여자가 작은 골목에 들어섰을 때, 경비원이 말했다. “아가씨, 길을 잘못 들었어요. 13동은 저쪽에 있어요.”여자는 할 수 없이 돌아섰는데 경비원이 다시 말했다. “아가씨, 친구 보러 처음 오셨어요?”여자는 이곳의 경비원이 왜 범인을 검문하는 것처럼 자신을 물어보는지 이해 안 가 속으로 욕했다.여자는 대충 대답했다.“네네, 처음 왔어요.”13동 문 앞에 오자 경비원이 직접 603의 초인종을 눌렀고 방울 소리가 울리자, 안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경비원은 여자보고 말하라고 고개를 돌렸다.“...”정말 어쩔 수 없어 여자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이고, 배가 너무 아파요.”여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경비원은 즉시 구급차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경비원이 구급차를 부르는 사이에 여자는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도망쳤다.“거기서요!”경비원은 일반인보다 더 빠르게 반응해 무전기에 대고 빨리 저 검은 옷 입은 여자를 잡으라는 말을 했다.여자는 자신의 눈앞에서 점점 닫혀 가는 문을 보며 당황해 어리둥절했다.“닫지 말아요.”안에서 경비원이 소리를 듣고 여자 쪽으로 돌진해 왔다. 그들은 마치 여기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듯 일반 경비원보다 속도가 더욱 빨랐다.바로 얼마 전 육씨 그룹이 이곳의 부동산을 사서 전문적인 경호원으로 바꾸어 수상한 인물을 주시하여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모두 붙잡아 파출소로 보냈다. 여자는 온몸에 힘이 빠진 채 어디로 도망갈지 몰랐다. “저 여자 잡아요.”전에 여자와 얘기하던 경비원이 소리쳤다. 여자가 잡힐 것만 같았는데 갑자기...펑!큰 소리가 나 그곳을 보자 검은색의 지프차 한 대가 돌진해 들어와 난간에 부딪혀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대중들은 모두 이 갑작스러운 변고에 어리둥절하여 반응하지 못했지만, 지프차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자, 경비원들은 모두 재빨리 몸을 피했다.유독 여자만 제자리에서 자신한테 향해 오는 것을 멍하니 보며 어찌할 바
소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유진이를 보러 갈래”“필요 없어”육경한은 단호히 거절하다 멈칫했다. 그러다 소원이 자신이 아이를 못 본다고 오해 할가봐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보고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일도 다 병원에 가지고 갈 거니까. 넌 휴식이 필요해. 알았어? “유진이 병으로 쓰러진 후 소원은 며칠 동안 거의 밤새 자지 못해 눈 밑에는 이미 짙은 다크써클이 생겼지만 그녀는 억지로 버티는 중이었다.소원은 유진이 자신을 찾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육경한은 무슨 일이든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직접 휴대폰 음성 메시지를 소원이에게 들려주었다.“아빠, 엄마 보고 잠자고 있으래요.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저는 삼촌이라고 부를 거예요. ”“엄마보고 많이 휴식하고 있으래요. 그렇지 않으면 뱃속의 아기가 천천히 자랄 거예요. 저는 아기를 빨리 만나고 싶어요. 아기한테 오빠가 지금 힘이 세니까 아기를 업을 수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요. ”캐톡에서 유진이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협박한 것을 보니 두 사람의 사이가 아주 좋은 것 같았다. 유진이의 소리는 듣기에도 정신이 맑고 괜찮아 보였다.소원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생각해 보니 자기가 쉬지 않은 것을 아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자신의 건강에 대한 책임은 즉 유진에게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기에 소원이는 말 듣고 차에서 내려서 휴식을 취하러 갔다.네 명의 경호원은 육경한의 분부에 따라 두 명은 아파트 입구에 두 명은 계단 입구를 엄중히 지켜 사수의 파리 한 마리조차 날아 들어갈 수 없었다.육경한의 차가 떠나자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여인이 사방을 둘러보며 나타났다.그녀는 벙거지 모자를 쓰고 얼굴을 절반 이상 가린 채 마스크를 쓰고 수상한 모습으로 나타나 동네 경비원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저기요, 당신은 어느 건물로 가나요? 여기에서 뭘 하고 있습니까? “여인은 경비원한테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요... 사람을 찾고
주석훈이 웃으며 말했다.“허허. 몰랐죠? 저 평소엔 되게 허당이에요.”“변호사님 은근히 유머가 넘친다니까요.”주석훈은 언변에 능했기에 단 몇 마디에 간호사가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저기는 왜 저런 거래요? 아까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막더라고요.”주석훈이 물었다.“아, 저기요.”간호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어떤 여자애 한 명 들어왔는데 가족이 살해당했다나 뭐라나. 실어증에 걸려서 한마디도 못 했는데 평소 믿고 따르던 언니가 와서 입을 열었다고 들었어요.”주석훈이 물었다.“여자애요? 많이 놀랐나 보네요.”“그러게요.”간호사가 대답했다.“가족이 칼 맞고 죽었는데 누가 견딜 수 있겠어요.”“억울한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범인만 잡아도 다행 아니겠어요?”주석훈이 말했다.“어려울 것 같던데요?”간호사가 말했다.“뭐 유용한 단서가 안 나왔나 보더라고요. 아빠가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같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봤대요. 진술한 상황이 경찰이 알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경찰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내쉬더라고요.”간호사가 이렇게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건 안지영의 간호를 책임진 간호사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더 물으려는데 다른 간호사가 들어왔다.“어? 이 간호사 있었네? 저쪽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빨리 가봐.”이 간호사가 말했다.“알겠어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치료를 받은 주석훈이 이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이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괜찮다고 말했다.주석훈이 멀리 가고 나서야 다른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이 간호사, 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저 병실에서 나온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저 별말 안 했어요. 다들 아는 내용 얘기해준 거예요.”이 상황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인정하면 바보나 다름없었다.“그래. 앞으로 조심해. 자칫하다간 징계 먹을 수도 있어.”나이 많은 간호사가 귀띔했다.“알아요.”이 간호사가 얼른 대답했다.“아
소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잘됐다. 정말 너무 잘됐어요. 이번엔 하느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셨네요.”소원이 주석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제가 신세를 졌으니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요.”감염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확률이 반반이라 주석훈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주석훈의 마음이 그만큼 단단하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 멘탈이 무너졌을 것이다.소원은 다시 한번 주석훈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별거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주석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가 여기 있다는 건 유진도 여기 입원해 있는 건가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여기 없어요. 아는 동생 좀 보려고 여기 온 거예요.”“동생이요?”주석훈이 물었다.“소원 씨에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까요?”뜬금없는 초대였지만 원래도 열정적인 주석훈이 말하니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소원이 별다른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만나고 나오는 길에요. 전에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 지금쯤 이미 쉬려고 누웠을 거예요.”“아.”주석훈이 말했다.“그러면 데려다줄까요?”“아니요. 아니요.”소원이 얼른 대답했다.“데려다줄 사람이 있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경한이 다가왔다. 까만 트렌치코트가 육경한의 키를 더 커 보이게 했는데 강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소원에게로 걸어왔다.“가자.”육경한은 옆에 선 주석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육경한과 구면인 주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육경한은 작은 변호사 따윈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난감해진 소원이 분위기를 만회하려고 이렇게 말했다.“나오다가 마침 주 변호사님을 만났어.”육경한이 그제야 옆에 선 주석훈을 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주석훈은 전혀 난감해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피고가 잘 지내고 있으니 뿌
제일 의심 가는 사람은 진아연이었다. 안상철은 여자관계가 간단한 편이었고 오랫동안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않고 싱글을 유지하면서 모든 심혈을 딸과 어른을 모시는 데 썼다.박혜순도 안상철을 여러 번 타일렀지만 그럴 때마다 안상철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싱글인 안상철이 이렇게 격렬하게 다툴 수 있는 사람은 진아연일 가능성이 컸다.경찰 조사가 끝나고 안지영도 검사를 받고 쉬어야 했기에 강민혜는 소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서야 소원은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소원은 진아연의 힘으로 안상철을 죽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방도 아닌 60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안상철은 180은 되는 큰 키를 가졌기에 큰 부상을 입어 몸이 허약해 툭하면 쓰러지는 진아연을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진아연은 얼마 전에 손목을 그으면서 피를 많이 흘렸던 터라 짧은 시간 내에 회복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진아연 말고도 다른 사람이 개입했다는 의미였다.멀쩡히 살아움직이는 사람을 60번이나 찔렀다는 건 웬만한 정신상태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이코패스가 잡히지 않고 사회에 섞여 들어간다면 악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강민혜의 생각도 소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진아연이 입원했을 때 강민혜도 만나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진아연은 절대 안상철을 쓰러트릴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검 결과를 보면 약물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안상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진아연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진아연 같은 몸집이라면 3, 4명이 더 와도 절대 안상철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그래도 일단 진아연을 잡는 게 우선이었다. 진아연을 잡아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진아연이 어디로 숨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소원은 의문만 가득 품은 채 병원 밖으로 나가다가 주석훈과 마주쳤다.“소원 씨, 여기서 마주치네요.”주석훈이 소원을 향해 헤벌쭉 웃자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어요.”소원은 안지영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어줬다.“내가 바이올린 계속하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 돈을 다시 찾으러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안지영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상철이 소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려줄 때 진아연이 그 돈을 줬는지 말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안상철의 말대로라면 진아연이 돈을 주려다가 결국 주지 않았으니 그 돈이 없어야 맞았지만 실제로 안상철은 그때 돈을 받은 것이다. 하긴 안상철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보수 없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딸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해도 외국으로 나가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확실치도 않은 약속을 쉽게 믿지 못했을 테고 일단은 확실한 무언가, 즉 돈을 줘야만 안상철이 소진용을 찾아갈 결심을 내렸을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결국 이 일을 소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소원은 안상철이 그 돈을 찾으러 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고 그 돈은 결국 경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결국 안상철의 탐욕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소원이 안지영을 위로했다.“아니에요. 그게 왜 지영 씨 탓이에요. 나쁜 사람이 몹쓸 짓을 저지른 건데. 지영 씨도 아버지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잖아요. 지영 씨, 일단 그날 있었던 일을 경찰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요. 최대한 자세하게 빠트린 것 없이 말해야 경찰도 빨리 범인을 찾을 수 있고 삼촌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예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안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너무 무서울 뿐이었는데 소원이 곁에 있으니 무서움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소원을 믿고 의지해왔는데 최근에는 소원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안지영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두려움을 가시기 위해 소원에게 옆에 앉아 있어 달라고 제안했고 강민혜도 안지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술하는 내내 소원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했다.안지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