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힘겹게 발버둥 치던 행동을 멈추고 눈가가 빨개진 채 그를 바라보았다.“나한테 뭘 원하는데요?”이준혁은 말하지 않았다.“다 구하고 말해줄게.”“내가 줄 수 없는 걸 원할 건가요?” 윤혜인이 묻자 이준혁은 나지막이 놀리듯 말했다.“너를 나한테 주겠다고 했으면서 아직도 줄 수 없는 게 있어?”“...”윤혜인은 이 남자가 사람을 화나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속을 알 수 없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한구운보다 이준혁을 믿는 쪽을 선택했다.“그럼 소원이는 언제 나와요?”“내일 아침.” 이준혁이 기한을 제시했다.“지금은 안 돼요?” 초조했던 윤혜인은 단 한 순간도 소원이 그곳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다.이준혁은 피식 웃었다.“이 시간에 나보고 감옥을 털라고?”윤혜인은 할 말이 없었다. 하긴, 거긴 다른 곳과 달라서 늦은 시간에 일을 처리할 수가 없었다.소원의 문제가 해결되자 그녀는 마침내 마음을 놓았다.이준혁은 그녀를 끌어당겨 침대에 앉혔다.“오늘 밤은 여기서 자.”“오늘 밤에요?”윤혜인은 코트를 여미며 경계하듯 말했다. “대체 조건이 몇 개예요? 난 하나만 들어줄 거예요.”자신을 경계하는 그녀의 모습에 남자의 눈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역시나 악마의 본성이 또 슬슬 드러난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가려고?”이준혁의 혀끝이 어금니에 닿으며 기가 막혀 웃음이 났다.“걱정 마, 너랑 같이 안 자. 그 정도로 여자가 간절하진 않아.”그의 불쾌감을 감지한 윤혜인은 반박하지 않았다.알 수 없는 거래가 그녀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기에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어쨌든 그녀는 그의 조건 중 하나만 들어줄 것이고, 그가 선택했으면 그걸로 끝이었다....구치소.소원은 두 명의 여성 죄수에게 붙잡혀 정체불명의 액체를 주입받았다.얼굴 전체가 공포에 휩싸인 그녀는 대체 왜 이러는지 물어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악... 아아악...”하지만 입을 열어도 갈라지는 소리가 들릴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자신의
그녀의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고, 눈앞에 하얀빛이 번쩍이며 여자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죽는 거 아니야?”“됐어, 어차피 죽을 거니까 그냥 손가락이나 자르자!”소원은 자신의 손이 여자에게 잡힌 채 바닥에 눌리고 여자가 칼날 같은 것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긋는 게 느껴졌다.칼날이 단숨에 뼈를 자르고 피가 솟구쳤다.새빨간 피가 소원의 시야를 덮쳤다. 열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다 합해도 마음만큼 아프지 않았다.아파, 너무 아프다...그녀의 마음도 칼로 이리저리 잘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육경한이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않고 산 채로 고문해 죽게 할 정도로 잔인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그래서 그때 앞으로 치러야 할 대가를 기대하라고 말했던 거였나.정말 뼈에 사무치는 교훈이다.육경한, 참 지독하다.핏기 어린 눈동자로 눈물을 흘리는 소원은 뼛속까지 사무치는 증오에 죽더라도 남자를 저주하며 원한을 품고 눈을 감겠다고 다짐했다.손을 자르던 여자는 경험이 부족하고 미숙한지 한 번에 잘리지 않을 걸 예상하지 못한 듯 자세를 바꾸고 다시 시도했다.소원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어 여자의 팔을 세게 물어뜯었다. 피와 살이 뜯겨나가도 꿋꿋이 악물었다.“아악!!!”여자는 당황하여 비명을 질렀지만 일행이었던 여자가 입을 가렸다.“소리 지르지 마, 사람들 오면 어쩌려고 그래!”단발머리의 여자는 애써 참으며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덜덜 떨며 말했다.“내 살, 내 살, 발리 이 미친년 좀 떼어내!”또 다른 여자는 소원을 최대한 세게 잡아당겼지만 소원이 끌려가지 않자 손을 들어 뒤통수를 내리쳤다.세게 맞은 소원은 순간 입에 힘이 풀렸지만 물어뜯긴 짧은 머리 여자의 팔에서 살덩어리가 뜯겨 나가며 피와 살이 밖으로 뒤집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그녀는 손바닥으로 소원의 뺨을 세게 때렸다.“이년이 감히 날 물어?”소원의 몸은 이미 약해져 있었던 터라 강한 타격과 함께 벽에 부딪혀 쓰러지면서 순식간에 짙은 통증이 온몸을 휩쓸었다.위에서도
구급차에 실리고 나서야 소원은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그녀는 자신의 아랫배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아가야, 결국 떠난 거니...’목구멍에서는 피가 한가득 쏟아져 나왔고 손은 하도 꽉 쥐고 있는 탓에 손가락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났다.‘육경한... 육경한... 호랑이도 제 새끼는 잡아먹지 않아! 근데 사람인 네가 친자식을 죽여?!’한편 병원.육경한은 아직 진아연과 함께 있었다.자세한 검진 결과 진아연은 별다른 이상이 없었고 다행히 포크가 빗겨나가 동맥을 건드리지 않았다고 했다.당시 목에서 흐르던 피는 진아연이 놀라 손으로 막다가 퍼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하지만 트라우마가 생긴 진아연은 눈을 뜨면 소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며 매우 두려워해서 병원에 더 머물러야 했다.육경한은 병실을 나와 복도에서 숨을 돌리고 있었다.막 담배 한 대를 꺼내려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소종에게서 온 전화였다.“대표님, 말씀하신 대로 소원 씨를 데리러 갔는데 이 대표님께서 먼저 외부 치료 허가를 맡아주셨다고 합니다.”‘준혁이가 소원이를 위해 외부 치료 허가를 맡아줬다고?’몇 초간 곰곰이 생각한 후에야 육경한은 그 원인을 알아챘다.‘윤혜인이 준혁이한테 부탁한 거겠네.’어젯밤 이준혁이 전화를 걸어왔었지만 진아연이 악몽을 꾸는 바람에 육경한은 다시 연락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었다.아마 어제의 연락도 그 일 때문이었을 것이다.‘어차피 오래 가둘 생각도 없었는데 뭐... 준혁이 덕에 번거로워지지 않아서 좋네.’“알겠어, 후속 처리만 잘해.”“이미 처리했고, 사건도 철회했습니다.”“그래.”뒤이어 소종이 머뭇거리더니 말했다.“하지만 소원 씨가 안에서 크게 다친 것 같습니다...”이때, 육경한의 옆으로 의사가 응급 베드를 밀고 급히 지나갔다.“잠시 길 좀 비켜주세요, 죄송합니다.”육경한은 물러서며 응급 베드를 힐끗 보더니 소종에게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지?”“소원 씨가 안에서 다치셨다고요.”그리고 한참 동안 소종은 아
한참 후, 육경한은 이를 악물고 힘겹게 말했다.“너 자꾸 죽겠다는 말하지 마! 누구 겁주려는 거야?!”그때, 의사가 다급하게 말했다.“환자는 아직도 출혈 중입니다. 선생님께서 이러시면 환자의 생명에 위협이 갈 수 있어요!”의사의 눈에 육경한은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소원은 성대가 손상되며 ‘쓱 쓱’하는 끔찍한 쇳소리만 내었는데 육경한은 대화가 된다는 듯이 굴고 있으니 말이다.의사의 말에 육경한은 그제야 응급 베드를 놓아주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 급히 따라갔다.응급실 문 앞.육경한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그가 소원을 그곳으로 보낸 이유는 단지 그녀의 자유를 제한하고 손대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손을 댄 것을 반성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건지 육경한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게다가 소원이 말한, 자신의 아이를 그가 직접 죽였다는 말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지도 너무나 궁금했다.관자놀이가 저릿저릿한 통증을 느끼며 육경한은 벽에 기대어 소종에게 전화를 걸었다.“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빠짐없이 조사해. 세세한 부분 하나라도 절대 놓쳐서는 안 돼!”그렇게 여덟 시간의 긴급 수술 동안, 육경한은 한 번도 움직이지 않고 수술실 밖을 지켰다. 마치 나무 조각상처럼 말이다.수술대 위에 있는 소원의 얼굴은 이미 생기가 없었고 가끔은 호흡마저 멈추었다.수술을 집도한 사람은 병원의 최고 전문가였고 조수는 병원의 유명한 신예인 서현재였다.서현재는 나이가 많지 않아 수술 집도의 자격은 없었지만 약물치료 연구에서는 비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그는 주로 암 치료 약물 개발과 생명 연장을 연구했다.수술대 앞에서, 집도의는 거의 다 망가진 소원의 위를 보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 늦었군...”평소 침착하고 냉정한 서현재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고 목소리도 미세하게 떨렸다. “교수님, 제발 살려주세요.”집도의는 평소 본인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자신이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현재는 진단서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간호사는 서현재의 당당한 뒷모습을 보며 뒤늦게 깨달았다.‘서 선생님 아까 그 남자라고 한 거 맞지?!’평소에 서현재는 차갑긴 해도 환자 가족을 그렇게 부르진 않았기 때문이다.수술실을 나서자마자 서현재는 근심 가득한 남자를 보았다.“의사 선생님, 어떻게 됐어요?”육경한이 급하게 달려와 물었다. 다 묻고 나서야 이 의사가 어딘가 낯이 익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서현재는 공무적인 말투로 말했다.“태아는 유산되었습니다. 지금 환자의 몸 상태는 매우 허약하고요, 몸에는 학대당한 흔적이 있고 손톱도 몇 개 빠졌습니다...”몇 마디만으로도 육경한의 심장은 마치 비틀린 듯 아파왔다.서현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환자는 심각한 위궤양을 앓고 있으며 이틀에서 사흘 동안 따뜻한 음식을 한 입도 먹지 못했어요. 또 위에서 흙 성분도 검출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방치하면 위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거예요.”어떤 이유로든 소원은 이를 알리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서현재는 육경한에게 경고를 주고 싶었다. 소원의 위는 더 이상 학대를 견딜 수 없었으니 말이다.그가 방법을 강구해 소원의 부모님을 보내기 전에, 그녀는 반드시 육경한과 다시 얽히게 될 것이었다.때문에 서현재는 가능한 한 육경한이 아직 조금의 양심이라도 있기를 바랐다.마지막으로, 서현재는 정사각형의 용기 하나를 꺼내 육경한에게 건넸다.“이건 환자가 수술 전에 부탁한 겁니다.”어두운 색의 상자를 보며 육경한의 마음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떠올랐다.이내 상자를 받아 들긴 했지만 차마 열어보지 못한 채 그가 물었다.“뭐가 들어있습니까?”서현재는 차분하게 말했다.“태아의 생물학적 샘플입니다.”육경한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소원이 이렇게 굳이 부탁했다는 것은 배 속의 아이가 육경한의 아이였음을 백 퍼센트 확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내 아이... 내 아이라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거지?!’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윤혜인은 더 이해할 수 없었다.‘계약 결혼을 원하는 거면 왜 하필 나를 고른 거야? 딱 하루만 부부로 지낼 수 있다 해도 자기를 원하는 여자가 서울엔 수없이 많을 텐데.’그러자 이내 이준혁이 그녀를 보며 담담하게 설명했다“할아버지의 건강이 날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어. 의사 말로는 두 달도 남지 않았대.”“쿵!”윤혜인은 머릿속에서 마치 무언가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그녀가 이씨 집안에서 유일하게 믿고 기댈 수 있었던 사람은 바로 할아버지 이태수였다.‘어떻게 이렇게 갑자기...’가슴이 미어지는 듯했고 목소리도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그럼 계속 연기해도 되는데...”“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아.”이준혁은 냉정하게 거절했고 놀란 윤혜인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이런 상황에서까지 나는 할아버지를 속이고 싶지 않아.”언뜻 들으면 일리 있는 말 같았지만 윤혜인은 곧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왠지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들어서 말이다.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물었다.“하지만...”그러나 이준혁은 성가시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자만할 필요 없어. 너랑 재혼하는 건 단순히 할아버지를 위해서야. 물론...”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무심하게 다시 말했다.“강요하는 건 아니야. 재혼할지 아니면 여기서 바로 나랑 할지, 둘 중 하나 정해.”윤혜인은 얼굴이 붉어졌다. 선택지가 이 두 개라면 그녀는 어느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태수를 위해서라면, 석 달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래서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우리 이거 비공개죠? 아주머니도 우리가 재혼한 걸 알지 못하게 하고 싶어요. 그리고 석 달이 지나면 꼭 저랑 이혼할 거죠?”그러자 이준혁은 차가운 표정으로 “응.”하고 짧게 대답했다.윤혜인은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는 듯했다.“좋아요. 그럼 우리 혼인신고서랑 이혼합의서에 둘 다 서명해요. 어차피 석 달은 금방이니까 나중에 다시 서명할 필
할아버지를 뵙고 난 후, 윤혜인은 저녁에 있는 강의를 들으러 가야 했다.이준혁은 그녀를 수업 장소까지 데려다주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니 차 문을 잠그고 윤혜인을 못 내리게 하는 것이었다.“왜 이래요?”이준혁은 진지하게 말했다.“너 지금은 기혼자야. 한구운이랑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부부인 동안에는 절대 만나지 마, 알겠어?”“알겠어요.”윤혜인은 깊게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어차피 원래부터 한구운과 더는 엮이지 않기로 결심한 상태였으니 말이다.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대답하자 이준혁은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며 안심이 되었다.하지만 그런데도 비꼬는 듯한 말투는 여전했다.“대답이 왜 이렇게 빨라? 그 자식이 상처받을까 두렵지 않아?”윤혜인은 어리둥절했지만 지난번 오해를 생각하며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그 사람이랑은 원래부터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어요.”다른 일들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됐든 한구운이 윤혜인을 구해준 것만은 사실이니 말이다. 그녀는 한구운의 좋고 나쁨은 그저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싶었다.이윽고 윤혜인이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이준혁이 덥석 그녀의 손을 잡고는 거칠게 물었다.“아무 사이 아니었다는 게 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예요.”그가 하도 손을 꽉 잡고 있어서 불편했는지라 윤혜인은 이내 이준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하지만 그는 놓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그럼 두 사람 같이...”말을 하다가 그는 갑자기 질문을 멈췄다. 그녀의 대답을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을까 봐 두려워서 말이다.결벽이 있는 이준혁이었지만 만약 상대가 눈앞에 있는 윤혜인이라면 그 결벽증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지금처럼, 그는 그녀를 속여서 자신의 곁에 묶어두고 있었다. 다른 남자가 윤혜인을 차지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윤혜인은 그가 여전히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말했다.“이만 내려야 해요. 강의 늦겠어요.”“뭐가 그렇게 급해.”이준혁은 지그시 응시하다가 순간
찰나의 순간, 육경한의 차가운 눈빛은 진아연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그가 그녀에게 이렇게 무섭게 대하는 일은 드물었다.지난번 크루즈선에서도 소원 때문에 육경한은 망설임 없이 진아연을 내던져 바닥에 쓰러지게 했었다.진아연은 육경한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가 더 이상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경한 씨... 설마 이젠 날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진아연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고 억지로 울음을 참는 모습은 참으로 불쌍해 보였다.소원이 아직도 깨어나지 않아 기분이 좋지 않았던 육경한은 목소리에도 짜증이 섞여 있었다.“그럴 일 없어.”“하지만 방금 나한테 화냈잖아요!”진아연은 콧물을 훌쩍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조금 전 경한 씨 행동 때문에 나 진짜 화났어요!”그녀는 육경한이 자신의 제멋대로인 모습을 좋아하고 연약한 모습 따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진아연은 적절하게 연약함과 제멋대로인 성격을 섞어가며 육경한에게 접근했다.아니나 다를까 육경한의 말투가 약간 부드러워졌다.“알겠어. 너도 아직 다 나은 건 아니니까 먼저 가서 쉬어.”그 말에 화가 난 진아연은 이를 악물었다.이건 그녀를 달래는 걸까? 아니, 이건 그녀를 내쫓는 것이었다.진아연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경한 씨, 소원 씨가 나를 다치게 한 일을 그냥 넘길 작정이에요? 그 여자 정말 날 죽이려고 했다고요! 난 아직도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려요!”하지만 육경한은 담담하게 말했다.“소원이는 이미 벌을 받았어.”그러자 진아연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벌을 받았다고?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고작 아이 하나 잃은 거로 이렇게 마음 아파하는 거야? 설마... 그 아이가 경한 씨 아이였나?’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빌어먹을 년, 빌어먹을 년, 빌어먹을 년!’육경한은 진아연이 고개를 숙인 채 매우 슬퍼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네가 억울해하는 거 알아. 내일 소
“됐어. 민아 너는 얼른 가. 좋은 시간 방해하지 말고.”방민기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단추를 마구 풀어제끼기 시작했다.방민아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정신이 몽롱해서도 억지로 버티는 여자를 보며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그래.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재밌게 놀아.”방민아는 이 말만 남기고 문을 닫고 나갔다. 옷을 입었을 땐 몰랐는데 윗옷을 벗으니 가려졌던 뽀얀 속살과 볼록한 배가 드러났다. 딱 봐도 운동한 적이 별로 없는, 향락에만 빠져있는 몸 같았다.방민기가 앞으로 다가가 소원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흐트러졌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음침하게 웃었다.“우리 예쁜이, 재밌는 놀이 좀 해볼까?”소원은 머리가 윙 했고 의식이 끊겼다 이어지는 게 너무 흐리멍덩해서 방민기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보지 못한 채 허약한 목소리로 물었다.“뭐, 뭐 하는 거예요?”소원은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챘고 유진을 죽여버리겠다던 그 여자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아니, 절대 안 되지. 누구든 유진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야.’바닥에서 깨진 유리 조각을 주어 손에 꽉 움켜쥔 소원은 피와 고통으로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했다. 방민기가 쓰레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방민기는 약을 탄 음료수를 소원의 턱을 잡고 억지로 먹이더니 이렇게 말했다.“마셔. 이거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조금 있다 재밌는 구경 좀 시켜줘.”방민기도 직접 즐기고 싶었지만 마음과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이 여자를 가지고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도 아무 반응이 없는데 놀려고 해도 놀 수가 없었다.소원이 얌전하게 협조할 리가 없었기에 일단 얌전해지게 하려면 ‘뽕’을 먹일 수밖에 없었다. 손을 든 소원이 음료수를 엎지르려는데 이를 눈치챈 방민기가 소원의 손을 잡고 뒤로 꺾는 바람에 손에 힘이 풀려 잡고 있던 유리 조각마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방민기가 대수롭지 않
방민아는 가벼운 말투로 비웃었다.“어쨌든 오빠는 경한 씨의 매형인데 그 사람이 이런 하찮은 여자 때문에 오빠를 곤란하게 하겠어?”방민기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네 말이 맞아. 내가 육 대표님의 매형이니 그분이 날 곤란하게 하면 네가 책임지고 해결해야겠지.”하지만 방민기는 방민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예전에도 소원 때문에 육경한이 사람을 보내 자신을 협박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로 인해 몸에 문제가 생겼던 방민기는 아무리 육경한 측에서 부정한다고 해도 분명히 그의 짓이라고 확신했다.다른 누가 그런 일을 벌였을 리 없었다.그저 소원을 두어 마디 농담 삼아 희롱했을 뿐인데 육경한이 미친 듯이 사람을 보내 협박한 것이다.만약 이번에 소원을 건드린다면 그 결과가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그 남자는 진짜 건드려선 안 돼. 이건 내가 겁이 많아서가 아니야.’방민기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육경한 같은 사람은 군중 속에서도 한눈에 돋보이는 사람이었다.그의 날카로운 눈빛은 마치 오랜 배고픔에 시달린 늑대처럼 사람을 단숨에 집어삼킬 것 같은 위협감을 주었다.방민아는 비웃으며 말했다.“오빠, 겁쟁이라더니 진짜로 겁먹었네. 이 여자가 뭔데? 경한 씨가 놀다 버린 여자잖아. 오빠가 진지하게 볼 가치가 있어?”그녀의 말은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육경한이 이 여자를 버렸다는 사실에 방민아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그저 소원에게 모든 분노를 쏟아내고 싶을 뿐이었다.그녀는 계속해서 생각했다.‘다 이 여자 때문이야. 이 여자가 없었다면 경한 씨가 아이에 대한 혐오감을 갖지 않았을 거야. 아니면 왜 아이를 싫어해서 정관수술까지 받겠어?’점점 이런 생각에 방민아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곧 방민기가 천천히 말했다.“민아야, 오늘 네가 한 말 기억해둘 거야.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아버지께 네 계획이라고 보고할 거야. 내 비서가 다 듣고 있으니까 발뺌하지 마.”방민아는 방민기의 지나친 신중함에 화가 치밀었다.“오빠, 왜 그
소원은 비록 초췌하고 기진맥진했지만 강한 의지로 벽에 기대며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방민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확신에 찬 웃음을 지었다.“보아하니 겁먹은 모양이구나? 아니, 겁먹었을 뿐 아니라 내가 네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믿고 있는 것 같아.”소원의 평온한 말투는 방민아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금씩 무너지던 심리적 방어벽을 드러내게 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방민아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소원은 그저 허세를 부리는 거라고, 자신을 겁주려는 것뿐이라고.그녀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경한 씨가 저런 여자를 받아들일 리 없어.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두고 결혼식에서 난동을 부린 여자를 원한다고? 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그런 수치를 감수할 리 없잖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방민아는 마음을 다잡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 속이려고 하지 마. 너 같은 게 그럴 힘이 어디 있겠어.”그러자 소원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내가 허세를 부리는지 아닌지,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내게 그 힘이 있는지 없는지도 네가 더 잘 알 거야.”방민아는 여전히 믿지 않았다.그녀의 눈에 육경한은 마치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사람이 소원 같은 여자에게 계속해서 모욕당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곧 방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원의 손을 힐 신은 발로 짓밟으며 꾹 눌렀다.소원은 손끝에 힘을 줄 수조차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소원, 내가 너를 위해 선물 하나 준비했는데, 알아?”고통에 찡그린 얼굴로 소원이 자신을 쳐다보자 방민아는 비웃으며 말했다.“내 오빠가 널 좀 갖고 놀고 싶다더라. 잘 해줘 봐. 오빠 기분만 잘 맞춰주면 네 아들 죽기 전에 한 번쯤 볼 수 있게 해줄게. 어때?”소원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방민아의 이복오빠, 방민기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도 알고 있었다.방민기는 몇 년 전 일이 터진 뒤로 몸이 망가져 본래의 기능을 잃었지만 그럴수록 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타인을 괴롭히는 쪽으로 빠져
방민아의 눈빛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너무 오래 억눌린 감정이, 희망이 무너지고 절망으로 변하면서 그녀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방민아는 소리쳤다.“그런 사생아는 세상에 나와선 안 됐어! 가장 큰 잘못은 네 뱃속에서 태어난 거야!”이어 소원의 귀에 대고 하나하나 똑똑히 말했다.“소원, 모든 건 네 잘못이야!”이 순간 육연주는 이미 술에 취해 방민아의 또 다른 면모를 알아챌 여유조차 없었다.그녀의 눈엔 오직 소원만 보였고 그저 소원을 미친 듯이 괴롭히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방민아!”갑자기 소원이 머리에 씌워진 쓰레기봉투를 확 벗어던졌는데 눈은 피로 물든 듯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네가 모든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유진이 건들 생각도 하지 마!”거의 고함치듯 외쳤다.그 말을 듣고 놀란 방민아는 자기도 모르게 술병을 집어 들어 소원의 머리에 세게 내리쳤다.그 순간 소원의 이마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며 얼굴 위에 핏빛 꽃처럼 퍼졌다.핏자국과 함께 소원의 초췌한 모습은 더욱 처절하면서도 기묘하게 아름다워 보였다.방민아는 손에 든 술병을 천천히 소원의 얼굴에 대고 내렸다. 병 끝이 그녀의 얼굴을 이리저리 찌르며 고통을 가했다.소원은 얼굴이 분명 엉망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이미 오래전부터 지쳐 있던 소원은 더는 저항할 힘이 없었고 바닥에 무기력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이 모습을 본 방민아는 기고만장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소원, 네가 날 벌하겠다고? 대체 어떻게? 부모도 죽었고 권력도 없고 배경도 없잖아. 돈이 좀 있겠지. 하지만 네 돈이 우리 방씨, 육씨 가문의 재산보다 많을 것 같아? 네가 날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네.”소원은 천천히 말했다.“궁금해?”방민아는 코웃음을 쳤다.“흥미 없어. 너 같은 건 내 눈에 그냥 개미야. 잡아 죽이거나 살려두거나 그건 내 마음이지. 네가 감히 뭘 어쩌겠어?”그녀는 입꼬리를 비틀며 덧붙였다.“내가 경한 씨랑 결혼한 후엔 더 봐줄
육연주는 정말로 소원을 죽이고 싶어 했다.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은 채 소원은 머리에 씌워진 쓰레기봉투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았다.손바닥에 힘을 실어 머리 주변에 약간의 공간을 만들며 숨을 고르려고 애썼다.그 와중에 방민아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소원은 속으로 방민아가 나서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직접 나서서 분노를 폭발시키고 자신을 때릴 것을 기대했다.하지만 방민아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여유롭게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소원은 실망스러웠다. 방민아가 나서지 않는다면 오늘 이 모든 고통이 헛된 일이 되어버릴 터였다.다행히 소원은 방민아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두 가지 대비책을 준비했다. 바로 이 방에서 벌어진 일을 몰래 촬영하는 것이었다.방민아보다 소원은 이곳이 더 익숙했고 카메라를 눈에 띄지 않게 숨길 방법도 알고 있었다.방민아가 한 번이라도 직접 손을 댄다면 그걸 증거로 삼아 이 여자가 아이를 키울 자격이 없다는 걸 증명할 계획이었다.그러던 중 소원은 희미하게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를 들었다.방민아가 일어나 방을 나가 전화를 받으러 간 모양이었다.겨우 2분 정도가 지났을까, 그녀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날카로운 하이힐 소리가 바닥을 울리며 들려오는데 그 소리가 왠지 섬뜩하게 느껴졌다.방민아는 소원에게 다가오더니 발끝으로 그녀의 손을 세게 짓밟으며 말했다.“소원 씨, 왜 안 죽어요?”그녀의 목소리엔 증오가 가득 담겨 있었다.소원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조금 전까지도 여유롭게 보고만 있더니 왜 전화를 받은 뒤에 갑자기 이렇게 분노에 찬 모습이 된 거지?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거야?’사실 방민아는 병원에 있는 지인의 전화를 받았다. 그 내용은 육경한이 정관수술을 예약했다는 것이었다.정관수술이라는 말에 그녀는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다.‘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왜 정관수술을 하기로 결심한 거야? 그럼 난 이제 평생 경한 씨의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르잖아.’만약 아이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면 육경한이 곧 자신에
육연주는 다짜고짜 소원의 머리채를 붙잡아 탁자 위로 내리눌렀다.힘껏 눌러대며 외쳤다.“오늘 반드시 내가 그날 느낀 굴욕과 분노를 똑같이 느끼게 해줄 거야!”하지만 소원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이 정도의 고통쯤은 감내할 수 있었다.그녀는 그저 조용히 방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방민아 씨, 약속은 지키셔야죠. 우리가 한 대로 이행해주세요.”방민아는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물론이죠. 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니까요. 내가 한 말은 꼭 지킵니다.”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녀는 자기 이름이 거론될 일을 피하려고 애써 돌려서 말했다.소원은 방민아가 무슨 꾀를 부리든 상관하지 않았다. 약속만 지켜준다면 그걸로 충분했다.그렇지 않다면 육연주가 이렇게 자신을 괴롭히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었다.육연주는 샴페인과 맥주를 들고 소원의 머리 위로 들이부었다.그러고는 미친 듯이 웃으며 외쳤다.“술 좋아한다며? 아니어도 괜찮아. 내가 좋아하게 만들어 줄 테니 잘 마셔 봐!”알코올이 따갑게 소원의 머리와 얼굴을 적셨다.소원은 눈을 꼭 감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육연주는 더욱 흥분하며 소원의 뺨을 두 차례나 세게 때렸다. 그래도 모자랐는지 술병을 집어 들어 그녀의 머리를 내리치려고까지 했다.그 순간, 방민아가 육연주의 손목을 꽉 잡아 멈췄다.“연주야, 내가 뭐라고 했어? 겉으로 티 나는 상처는 안 된다고 했잖아. 그러면 너한테도 안 좋아.”그들의 관심은 소원의 안전이 아니라 자신들의 재벌가 자제 이미지가 더러워질까 하는 것이었다.그렇게 육연주는 힘없이 손을 풀었고 술병은 바닥으로 떨어져 몇 번 굴러갔다.방민아는 처음부터 이렇게 경고했다. 목숨을 앗아가선 안 되고 모욕하고 짓밟는 건 가능하지만 눈에 띄는 외상은 절대 안 된다고.처리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하지만 육연주는 분을 참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소원을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그날 결혼식에서 소원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꼴이 됐는지, 모든 사람들에
“네, 괜찮아질 거예요...”잠시 충전한 덕에 상태가 많이 나아진 소원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언니, 이제 가서 일 봐요. 저도 제 일하러 갈게요.”“응.”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 갈 길을 갔다.소원은 방민아가 말한 그 방으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민아가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고 옆에 육연주가 함께 앉아 있었다.소원은 무표정하게 다가가 물었다.“방민아 씨, 제가 뭘 하면 되죠?”방민아는 입술을 가리며 웃었다.“무슨 일이 있어서 그쪽을 부른 게 아니에요. 연주가 보고 싶다고 해서요.”소원은 육연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갑자기 육연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손을 들어 소원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며칠 못 봤더니 눈이 멀었나 봐? 나 못 봤어?”소원의 얼굴은 한쪽으로 젖혀졌고 귀가 웅웅거릴 정도로 아팠다.이 뺨 한 대를 때리기 위해 육연주는 며칠 동안이나 참아왔던 것이다.지난번 그녀가 결혼식에 난동을 부렸을 때 이미 목이라도 졸라 죽이고 싶었다. 당시 육경한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소원은 이미 서씨 가문 사람들에게 반쯤 죽도록 맞았을 것이다.그런데 육경한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소문에 따르면 그는 소원을 구하기 위해 북쪽으로 갔다고 했다. 북쪽 사람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다 아는 사실이었다.그들은 칼날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고 육연주와 같은 재벌 2세는 그들에게 단지 걸어 다니는 금고와 같았다.그런 사람들을 적으로 돌린 육경한이 앞으로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북쪽 사람들은 원한을 잊지 않고 반드시 갚는다고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결혼식 후, 육연주는 소원을 제대로 혼내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소원이 육경한의 사람들에게 데려가져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그녀는 부모도 두렵지 않고 세상 무엇도 겁내지 않았지만 육경한만큼은 무서웠다.육경한은 냉혹하게 행동할 때 진정으로 냉혹했으며 혈연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다행히 방민아가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괜찮아요. 사실 크게 다친 것도 없었고요.”그러나 사실 그녀의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육경한만큼 심하게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그녀도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로 심각한 일을 겪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숙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작은 선의의 거짓말을 한 것이다.영숙은 소원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래도 여기 왜 온 건지 말해봐. 지금 상태로는 아무리 봐도 좀 더 쉬어야 하는 거 같은데?”“오늘은 일이 있어서 왔어요. 제가 아는 단골 손님이 요청해서요.”소원이 답했다.“단골 손님?”영숙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누군데?”소원은 이곳에서 일한 지 오래되지 않았고 그녀의 손님은 대부분 영숙이 직접 배정해준 사람들이었다.때문에 소원이 말하는 ‘단골 손님’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영숙은 알 수 없었다.영숙의 걱정은 진심이었다.소원은 왜 영숙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영숙이 굳이 말하지 않는 걸 보면 이유가 있겠거니 했다.하지만 소원은 이번 일의 진실을 영숙에게 말할 수 없었다.방민아가 오늘 밤 일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밖에 흘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이를 어기면 아이를 만나게 해주지 않을 거라고 경고했었다.“괜찮아요, 언니. 정말 아는 손님이라니까요.”소원은 모호하게 대답하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그러자 영숙은 ‘그래’라고 짧게 대답하며 비웃듯 말했다.“넌 이제 네 멋대로 하는구나. 내가 상관할 수 없겠네.”소원은 피식 웃었다.“그럴 리가요. 언니가 저를 이 일로 이끌어주셨잖아요. 하루라도 스승이면 영원히 스승인데 제가 언제 영숙 언니 말 안 들은 적 있나요?”이 말을 듣고 영숙은 웃음을 터뜨렸다.“예전에 이렇게 말재간이 좋은 애인 줄 몰랐네.”“스승이니 뭐니 하지 마. 내 밑에 평생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조금 안정되면 얼른 나가.”사실 영숙은 방민아와 관련된 일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래서 그는 방민아가 나중에 유진이에게 잘못된 행동을 할까 봐 걱정하지 않았다.유진이에게 어떤 일이 생긴다면 방민아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런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은 그녀도 충분히 고려할 것이라 믿었다.“필요 없어. 임 교수님에게 빨리 수술 일정 잡아달라고 해줘.”육경한이 결혼을 위해 결단을 내린 건 아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속임수에 휘말려 또 다른 아이를 가지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그는 다른 사람이 낳지 않은 아이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소종이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육경한은 단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는 이미 그의 마음이 완전히 굳었다는 것을 의미했다.육경한이 결정한 일은 아무도 바꿀 수 없었다.다만 소종은 이런 상황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었다.재산이 그다지 많지 않은 소종조차도 대를 이을 아이를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고 성별을 떠나 건강한 아이 하나는 꼭 낳고 싶었다.어쩌면 대를 잇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자신이 세상을 살다 갔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하지만 육경한의 방식은 너무 위험해 보였다.그럼에도 소종은 당사자가 아니기에 그를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곧이어 전화를 걸기 위해 소종이 막 나가려다가 육경한이 불러 세웠다.“잠깐.”“무슨 일이세요?”육경한은 말했다.“이 소식을 민아 씨에게 알려.”소종은 잠시 멍해졌다.‘정관 수술 한다는 걸 예비 신부에게 알리라고? 이건 결혼하기 전에 도망가라고 부추기는 일 아닌가?’그러나 육경한의 목적은 방민아를 시험해보기 위함이었다.이전에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는 평생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 말했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방민아더러 함께하자고 했다.그러자 방민아는 주저 없이 동의했다.육경한이 방민아에게 난관 수술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은 건 이것이 신체에 손상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결혼을 약속한 상대라면 충분한 존중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스스로 수술을 받기로 한 것이었다.이번에 소종을 통해 이 소식을 흘린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