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재잘재잘 말을 하던 여자의 입술을 깨물고 놓아줬다.“스읍-”윤혜인은 입술을 매만졌다.상처가 나지는 않았지만, 살짝 부어있었다.빨갛게 부풀어 오른 입술은 더 유혹적이었다.“뭐... 뭐 하시는 거예요?”술기운이 많이 오른 윤혜인의 말투는 화를 낸다기보다는 애교를 부리는 것에 가까웠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두 손을 남자의 허리에 두다 보니 더 애교스럽게 들렸다.그녀가 다시 물었다.“어떻게 병원에서 나왔어요? 의사가 나가도 된대요?”눈을 가늘게 뜬 이준혁이 답했다.“날 혼자 병원에 두고, 다른 사람이랑 밥 먹고 술을 마시니 잘 넘어갔어?”“다른 사람이 아니라 동료예요!”윤혜인이 반박했다.이준혁이 그녀의 앙증맞은 코끝을 꼬집으며 새침하게 말했다.“내가 안 왔으면, 아까 그 사람이랑 바로 갔겠어?”“설마요...”윤혜인이 살짝 트림했다. 그녀의 숨 속에서 과일의 달콤함과 있는 듯 없는듯한 우유향도 같이 풍겨왔다. 달큼한 향이었다.윤혜인은 놀라서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뼛속까지 교양이 있는 그녀다 보니 다른 사람 앞에서 트림하는 것은 교양 없고 부끄럽게 느껴졌다.“죄, 죄송합니다.”손가락 사이로 부끄러운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준혁은 매우 즐거운 듯 몸까지 들썩이며 웃었다.‘어떻게 사람이 술을 조금 마셨다고 이렇게까지 귀여워지지? 너무 몽글하고 달큼하잖아.’이준혁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웃음기가 묻은 말투로 답했다.“괜찮아, 너무 좋아. 하지만 앞으로 내가 없는 곳에서는 술 마시지 마.”이준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유머러스하게 그녀에게 경고했다.이렇게 사랑스러운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싫었다.윤혜인은 입을 삐쭉이며 불만스럽게 답했다.“너무 제멋대로잖아요. 어떻게 제가 아는 사람이랑 이렇게 똑같죠?”이준혁은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말랑한 입술을 쓰다듬으며 허스키하게 물었다.“네가 아는 누구?”“닮았어요. 근데, 그 사람도 나쁜 사람이에요.”윤혜인이 불평을 내뱉었다.술기운 때문에 윤혜인
갑자기 장난스러운 마음이 든 이준혁은 그녀의 빨갛게 부풀어 오른 입술을 놓아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더 해줘?”그윽한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입에서 갑자기 힘이 빠진 윤혜인의 얼굴을 빨갛게 달아오르며 숨을 헐떡였다. 그녀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싫어요...”윤혜인이 하고 싶은 말은 가지 말라는 뜻이었지만, 어지러워진 머릿속과 몸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남자는 그윽한 눈동자로 괴롭히며 물었다.“싫다고?”“괴롭히지 마요....”윤혜인은 눈가가 빨개지며 곧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그저 눈앞에 있는 나쁜 사람이, 지금과 같은 순간에 더 이상 키스를 안 해주는 게 원망스러웠다.‘나쁜 놈...’그 순간, 이준혁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과 치열을 다소 강압스럽게 벌리며 아까보다 더 진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찌릿찌릿한 느낌이 다시 올라왔다.뒤통수는 짓눌려 있지만, 남자의 옷가지는 정갈했고, 표정도 한없이 평온했다. 하지만 몸만은 들끓고 있었다.이준혁의 혀가 그녀의 입속을 파고들며 힘차게 휘저었다. 그녀의 혀뿌리마저 삼켜버릴 듯 격한 키스를 하며 그녀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그의 키스로 인해 윤혜인은 온몸에 힘이 풀리고 혀끝은 아려왔다.호흡과 목소리가 남자에게 삼켜졌다.입속은 전부 그의 기운이었다. 그녀는 입을 약간 벌리고 그의 품에서 나른하게 몸을 떨었다.몸은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와 숨을 나누는 이 순간이 좋았다.주객전도하여 그녀도 이준혁을 따라 배워 혀를 내밀며 그의 입속을 탐험했다.수줍고 탐험적인 입맞춤은 남자의 눈동자를 더 깊게 만들었다. 마치 한 마리의 굶주린 짐승 같았다. 그는 멈춰서서 손가락으로 윤혜인의 입술을 어루만지며 더 이상 허스키해질 수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차에서 해도 돼?”윤혜인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너무 좋았던 순간이었는데, 갑작스럽게 멈춰 선 이준혁으로 인해 그녀는 마치 장난감을 뺏긴 어린아이처럼 괴로워했다.약간은 거친 이준혁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로 다가갈 때, 윤혜인은 대답 없이
놀란 윤혜인은 얼굴을 이준혁의 목에 파묻었다.문밖에는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늦은 시간,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VIP 손님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몰래 VIP 엘리베이터를 누른 것이었다.손님을 확인한 아주머니는 거듭 사과했다.이준혁은 흐릿해진 눈동자로 별다른 말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방금 남자가 안고 있던 여자의 목이 빨갛고 불편해 보이는 환자 같다는 생각에 걱정스러웠지만, 다행하게도 혼나지 않아 가슴을 내리 쓸었다.그때, 환자 같은 윤혜인의 얼굴은 매우 붉었다. 술기운도 놀라움으로 인해 반쯤 깬 상태였다.그 상태로 그녀는 조금 전 뭘 했든지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의 자세만으로도 자극적이어서 더 이상 생각을 이어 나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이준혁에 의해 병실로 옮겨지면 윤혜인은 자는척해서 지금 상황을 모면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이준혁은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착하지, 얼른 씻어.”그녀는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대로 자도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역시, 기척이 없네.’그녀가 몰래 기뻐하고 있을 때, 이준혁이 다시 소파로 돌아와 그녀를 안아 따스한 물로 세심하게 씻겨주었다.몸의 전율로 인하여 더 이상 자는척하기 어려웠다.그녀는 비몽사몽 눈을 뜨며 물기 어린 고양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야릇한 분위기 속에서 남자의 시선이 잠시 윤혜인에게로 향했다. 이준혁은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답했다.“힘들잖아. 내가 해줄게.”윤혜인이 고개를 저으며 빨개진 얼굴로 곧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답했다.“아니에요, 안 힘들어요.”윤혜인은 지금 그저 이준혁이 빨리 나갔으면 했다. 하루 종일 모내기에 끌려간 것처럼 허리가 시큰거린다고 인정할 리가 없었다.이준혁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히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안 힘들어?”윤혜인이 극구 부인했다.“안 힘들어요! 정말 안 힘들어요.”젖은 머리카락과 사랑 받은 후처럼 붉게 묽은 윤혜인의 이쁜 얼굴은 마치 소리 없이 초대처럼 유혹적이었다.“그래?
병원 옆의 커피숍.문현미의 안색이 창백해 보이는 것이 좋지 않아 보였다.자리에 앉은 후, 문현미가 담담히 웃어 보였다.“혜인 씨, 요 며칠 우리 준혁이 잘 보살펴줘서 고마워요. 의사가 얘기하길 잘 회복되고 있대요.”“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문현미는 윤혜인이 올려둔 보온컵을 보더니 물었다.“이건 준혁이 주려고 가지고 온 건가요?”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문현미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복잡미묘한 심정으로 말했다.“혜인 씨가 고생이 많네요.”윤혜인이 손을 거두고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아줌마, 하실 말씀 있으시면 그냥 하세요.”문현미가 멋쩍게 웃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혜인 씨, 이혼할 때, 한 푼도 챙기지 않았다면서요?”’“네, 제 것이 아닌 건 갖지 않으려고요.”문현미의 손이 멈칫했다. 망설이다가 가방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혜인 씨, 제가 정말 좋아해요. 좋은 아가씨인 거 알아요. 이건 제가 주는 보상이에요. 어찌 됐든 이건 받아줘요. 그리고...”문현미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뒤에 있었다.“그리고 이혼한 이상, 앞으로 각자 생활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오가지 말고, 가능할까요?”윤혜인이 눈을 깔고 보니, 십억,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그녀가 웃으며 답했다.“아주머니, 준혁 씨가 다 나으면 안 그래도 똑바로 얘기하려고 했어요.”사리에 밝은 윤혜인 때문에 문현미는 오히려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문현미는 진심으로 윤혜인이 좋았다. 하지만, 목숨이 걸린 문제에서 본인의 자녀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그날, 이천수가 병원에서 나온 후, 그녀에게 한 말은 못처럼 가슴에 박혀있었다.“당신 아들은 언젠가 그 여자 손에 죽을 거야.”그 말로 인해 그녀는 걱정이 태산이 되어 며칠 밤을 악몽에 시달렸다.가능하다면, 그 누구도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었다.문현미는 복잡한 심경으로 해명했다.“준혁이는 책임이 막중한 애예요.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면 안 돼요, 무슨 뜻인지 이해하죠?”“아주머니,
이준혁은 전화를 걸어, 윤혜인에게 어디까지 왔는지 묻고 싶었다.하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미간을 좁힌 이준혁이 다시 그녀에게 전화하려고 할 때, 병실 문이 열렸다.문현미가 손에 정갈한 도시락을 든 채 들어왔다.“준혁아, 엄마가 야식 사 왔어. 네가 제일 좋아하는 그 집이야.”이준혁은 입맛이 없어, 그저 담담히 답했다.“거기 두세요.”“빨리 나으려면 잘 먹어야지.”문현미가 직접 죽을 떠서 그에게 건넸다.문현미의 손에 걸려있는 팔찌를 본 이준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어머니, 이 팔찌가 왜 어머니한테 있어요?”문현미가 멈칫하더니 말했다.“오늘 혜인이가 돌려주더라고. 내가 필요 없다고 했는데, 이혼한 이상 남의 물건을 가지고 싶지 않다고 하더구나.”순간, 이준혁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문현미가 조심스레 그릇을 내려놓으며 달랬다.“혜인이는 이미 다 내려놓고 본인만의 생활을 해나가려고 마음을 굳힌 거 같더구나. 너도 좀 배워. 이선그룹의 중책은 네가 맡아야 하는데, 지금의 시장은 우리만 성장하게 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다음에 새로 며느리를 맞이한다면, 우선 배경 먼저 봐야지. 사람이야 뭐, 단정하기만 하면 돼.”지금의 문현미는 정략결혼을 전적으로 동의했다. 감정 없이, 아이만 낳고 두 가문 사이의 이익을 공고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날, 이준혁이 ICU에 누워있던 장면만 생각하면 문현미의 심장은 빨리 뛰며 어지러움과 이명마저 느껴졌다. 엄마의 눈에는, 아이의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나쁜 사람이 되더라도 그랬다.문현미가 이어 말문을 띄웠다.“정씨 집안의 그 아가씨가 너랑 어울릴 것 같았는데, 네가 싫어하니 급할 거 없이 천천히 찾아보자꾸나.”이준혁은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 아침 윤혜인이 이곳에서 나가던 순간들을 되짚어 보았다. ‘아무런 특이 사항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되었을까?’그녀가 답이 없는 이유는 수업하느라 바빠서라고 생각했다. 저녁이면 죽을 들고 병문안을 올 거
이준혁이 뱉은 말 한마디는 마치 끓는 기름 솥에 물을 부은 것처럼 정신 사납게 윤혜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윤혜인은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었다. 이준혁이 전의 반지를 꺼내며 해명했다.“이 반지는 할머니가 나한테 남겨준 거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평생 서로를 사랑하셨어. 당시에 너한테 이 반지가 나한테는 어떤 의미인지 잘 해석 못 해준 것 같아.”이어 그는 큰 캐럿의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내 두 반지 모두 윤혜인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이 반지는 제작한 거야. 오랜 시간을 거쳐 드디어 받았지. 우리 재결합하자.”강경한 그의 말은 윤혜인이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틀어막았다. 마치 뭔가 다급하게 만류하려는 모양새였다.윤혜인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다 울음기를 겨우 삼켜냈다. 모든 게 너무 늦었다.그녀는 이제 더 이상 그와 함께할 용기도, 자신도 없었다.모든 사람이 축복해 주지 않는 사랑은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을 것이었다.윤혜인은 반지를 빼서 이준혁에게 돌려주며 차갑게 말했다.“준혁 씨, 저는 명확하게 표현한 줄 알았어요.”이준혁이 차가워진 표정으로 반지를 건네받지 않으며 물었다.“무슨 뜻이야?”“어제는 그저 사고예요.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아요.”이준혁이 입술을 달싹이기를 반복하며 말을 이었다.“사고? 어제 네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잊었어? 얼마나 나를 원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거야? 사고... 다섯 번이나 사랑을 나눠놓고 사고라고?”그의 말로 인해 윤혜인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입술을 짓이긴 그녀가 답했다.“취했었잖아요.”그녀는 마음을 먹은 듯 작정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어제 준혁 씨가 아니더라도, 다른 남자였어도 그랬을 거예요. 저도 성인이에요, 성적인 욕구가 있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않나요?”그녀의 말에 상처받은 이준혁이 냉소를 지으며 큰 몸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성욕이 생길 때, 내 이름을 불렀어. 그런데 네 말을 믿으라고?”이준혁으로 인해 불편해진 윤혜인
윤혜인이 분노에 찬 눈으로 이준혁을 노려봤다.“무슨 헛소리예요! 어젯밤에는 분명 서로가 원해서 한 거잖아요!”이준혁도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목에는 여전히 어제 남겨둔 흔적이 있었다. 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서로가 원해서 한 거면, 더 해도 되잖아?”윤혜인이 눈을 피하며 답했다.“안 돼요. 더 이상 안 할 거예요. 이제 더 얽히면 안 돼요.”이준혁은 그녀가 피하지 못하게 턱을 잡으며 눈을 맞췄다.“혜인아, 속이려고 하지 마. 어제 그 반응은 거짓이 아니야. 너도 여전히 나 사랑하잖아, 안 그래?”“준혁 씨, 당신이 밤 일을 잘해서 그래요. 그런 쾌락은 고급스러운 장난감을 사도 얻을 수 있어요.”윤혜인은 어두워진 이준혁의 표정을 모른척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다는 거 진심이에요. 이러는 거 정말 별로예요. 깔끔하게 물러나 줘요.”문현미의 말에 동의한 이상, 윤혜인은 약속을 지켜 이준혁이 단념하게 할 생각이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의 오만함이 절대로 다른 사람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걸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윤혜인은 손톱을 손바닥 깊숙이 박으며 가슴에 맺힌 통증을 덮으려 했다.“준혁 씨, 이 세상에 여자가 저만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이상 집착하지 마요. 없어 보여요.”남자의 얼굴은 순식간에 흉악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 속에 감춘 상처도 무시할 수 없었다.그는 그녀를 응시하며 또박또박 물었다.“이게 네 진심이야?”윤혜인은 잠시 멈칫하다 입을 열었다.“네, 진심이에요. 앞으로는 저희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요. 더 이상 연락하지 마요.”“모르는 사람?”그녀의 대답이 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었다.윤혜인의 얼굴은 평온한 상태로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몸 아래 감춰둔 손바닥은 이미 검붉게 변해있었다.쉬운 일인 줄 알았는데, 내뱉고 나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누군가가 그녀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는 것 같았다. 너무 아팠다.이준혁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떠났다
진아연은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여러 은행에서 이미 인정했어. 한이그룹은 대출을 갚을 능력이 없다고, 그래서 강제 조치를 취할 거라고 말이야. 소씨 집안은 끝났어!”청천벽력과 같았다!소원은 얼굴에 핏기가 싹 사라졌고 온몸이 떨렸다.‘우리 소씨 집안이... 정말 망했다고?! 부모님은 어떻게 하지? 직원들은? 빌린 돈은 어떻게 갚지?!’진아연은 소원의 표정을 보면서도 만족하지 못해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냥 단순히 망하기만 한 게 아니야. 당신 아버지는 피고인이 될 거고, 돈을 갚지 못하면 감옥에 가야 할걸?”소원의 머릿속은 ‘윙’하는 소리로 가득 차 숨쉬기조차 힘들어졌다.진아연은 웃는 듯 아닌 듯한 얼굴로 소원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사악하기 그지없었다.“소원 씨, 성원그룹과 회진그룹의 계약 건 문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아? 게다가 이 두 회사뿐만이 아니라 동원그룹과 호성그룹에서 거절당했잖아. 안 그래?”소원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진아연을 바라보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뜻이야?!”육경한이 없으니 진아연의 가식적인 온화함은 즉시 사라졌다.그녀는 피식하고 웃더니 말했다.“경한 씨가 이 계약 건들은 당신이 술자리에서 목숨 걸고 따온 거라던데, 참 고생 많았겠더라. 혹시 처음부터 이 계약 건들은 경한 씨가 당신에게 주려고 준비한 것이라 생각해본 적 없어?”소원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그녀는 덜덜 입술을 떨며 물었다.“무슨 소리야? 제대로 말해봐!”“잘 생각해봐. 왜 이 문제들이 일찍 터지지도, 늦게 터지지도 않고 하필 내 생일 날 터졌을까.”진아연은 친절하게 상기시켜 주었다.“아직도 모르겠어?”진아연의 생일날 한이그룹의 제품들이 집단으로 문제가 생겼다.소원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몸은 만 개의 화살을 맞은 듯 모든 “상처”가 터지며 피가 흐르는 듯했다.“당신들이... 미리 계획한 거였어?!”소원의 목소리는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이 계약 건
빨간 집은 밀림 깊숙한 곳에 지어져 있었는데 이 거대한 구덩이의 중심 같았다. 울창한 수풀 속에 우뚝 세워진 빨간 집은 유난히 섬뜩해 보였다.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간 소원은 안에서 들려오는 흐느끼는 소리에 소름이 쫙 돋았다. 울음소리는 짧고 급박했는데 끊이지 않고 계속 들려왔다.무슨 상황인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소원은 눈을 질끈 감고 빨간 집에 난 유일한 창문으로 고개를 들어 안을 들여다보는데 정체를 확인한 순간 소원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긴 백발을 늘어트린 노파가 한 여자의 목을 물고 흡족한 표정으로 피를 빨아먹고 있었다. 아까 들었던 흐느끼는 소리는 피를 빨아 먹힌 사람이 내는 신음이었다.소원의 착각인지는 모르지만 여자가 피를 빨아들일 때마다 얼굴에 졌던 주름이 펴지고 젊어지는 것 같았지만 단번에 젊은이가 되는 건 아니었다.아무튼 너무 이상했다.소원은 입을 감싸쥔 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피를 빨아먹힌 여자가 숨이 끊어지는 걸 보며 소원도 마음을 졸였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백발의 여자 옆으로 수백 마리의 빨간 뱀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백발의 여자를 보호하려는 듯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아마 소원이 백발의 여자를 덮치기도 전에 저 뱀들에 의해 잠식당하고 갉아먹히고 말 것이다.그때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족장님, 이제 더 마시면 안 됩니다.”백발의 여자를 잡은 건 아까 본 빨간 옷을 입은 무녀였다. 무녀가 입을 열자마자 족장이라고 불리는 백발의 여자가 무녀를 저만치 날려버렸다.“풉.”빨간 옷을 입은 무녀가 피를 왈칵 토해내자 족장 옆을 지키던 뱀들은 마치 고기를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기어와 무녀가 토해낸 피를 핥아먹었다.촘촘하게 모인 뱀들이 ‘미식’을 즐기고 있는데 그 장면은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너무 역겨웠다.빨간 옷을 입은 무녀가 가슴을 움켜쥐더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족장님, 용서해 주세요. 요즘 공물을 찾기가 어려워 공급이 끊길 수도 있으니 아무래도
소원이 어젯밤 찾아낸 뾰족한 대나무로 손을 묶었던 케이블 타이를 끊어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타이가 천천히 느슨해지 시작했고 어젯밤 한참 만지작거린 덕분에 끝내 끊어내는 데 성공했다.자리에서 일어난 소원은 몸이 너무 거뿐했다. 분명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배고프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위에서 뿜어져 나온 열량이 여러 장기로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듯 온몸이 따듯해지며 편안해졌다.그 알약이 만병통치약이라 몸에 좋다던 무녀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설마 그 알약이 너덜너덜한 내 몸을 치유해 주고 있는 건가?’소원은 믿기지 않았다. 전에 의사가 수술 후 운 좋게 5년이라는 위험 기간을 넘기면 10년, 많게는 20년까지도 살 수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아무튼 오래 살지는 못한다는 말이었지만 10년, 20년이면 유진이 독립해서 장가를 들 나이가 될 테니 그때가 되면 아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소원도 몸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미련이 남으면 하루라도 더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 옆을 지키고 싶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일단 생각을 접어둔 소원은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문이 있는 방향을 찾아 살짝 열어봤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는 소원을 감시할 사람은 남기지 않았지만 문도 잠그지 않을 만큼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다.문틈으로 내다보니 밖은 빗장만 걸려있을 뿐 자물쇠가 걸린 건 아니었기에 빗장만 들어 올리면 되지만 그 과정에 소리가 날 게 뻔했고 그러면 뱀이 잠에서 깰 수도 있다.비록 겉으로는 미동이 없어 공격성이 없어 보이지만 쉽게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기에 있는 물건들은 하나같이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고 그 무녀도 너무 신비로웠다. 아까 소원의 할머니보다 나이가 많다고 말하는데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걸 봐서는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라면 이상한 요술이나 마법 같은 걸 부릴지도 모른다.상대의 실력을 알기 전에는 소원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안전하게 도망갈 수 있는
“나한테 먹인 거 뭐야?”소원이 세 번째 질문을 던지자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말했다.“그거 만병통치약이라 천금을 줘도 못 사.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는 약을 먹은 거라고. 당신이 쓸모가 없다면 꿈도 못 꿀 약이라는 거지.”그 알약은 무녀가 기르는 뱀이 조금씩 뱉어낸 단백을 10년간 천천히 우려내야 얻을 수 있었고 수만 마리의 뱀을 써도 고작 한 알이 나올까 말까 했다.그렇게 소중한 알약을 세 알 먹은 소원은 몸이 말끔하게 나아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무리 몸에 칼을 대고 수술해도 소원의 몸은 정상인보다 훨씬 건강했다.소원은 무녀가 하는 말을 듣고 좋아하기는커녕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내가 큰 쓸모가 있나 봐. 그렇게 소중한 알약을 다 먹이고.”소원이 말했다.“그렇지.”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당신이 뭐라고 그 약을 먹어?”이 말에 소원은 무녀가 그녀의 몸을 이용하려고 이렇게 공을 들인다는 걸 알게 되었다.‘근데 내 몸을 이용해서 뭘 하려는 거지...’소원은 처음에 나타났던 그 늙은 여자를 떠올렸다.‘설마 아까 그 늙은 여자와 관련된 건가?’소원이 빨간 옷을 입은 여자를 보며 말했다.“나이가 많지는 않은 것 같은데 왜 이런 극악무도한 짓을 하는 거야?”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웃음을 터트렸다.“틀렸어. 내 나이는 어쩌면 당신 할머니보다 더 많을걸?”소원은 흠칫 몰라며 이 말의 진위를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여자는 외모가 아름다울뿐더러 피부도 탱글탱글해 아무리 봐도 노인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빨간 옷을 입은 여자는 이 화제를 이어갈 생각이 없었는지 그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되물었다.“어떤 걸 말하는 거야?”“서현재.”소원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서현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서현재.”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매혹적으로 웃었다.“그건 내가 그런 거 아니지. 서씨 가문 어르신이 시킨 거야. 서현재 목숨으로 외국에 있는 아들이 잘 먹고 잘살 수 있게 해주려나 보던데. 서
몸통이 빨갛고 긴 뱀이 소원을 향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는데 총기를 가진 눈이 얼핏 보면 사람의 눈처럼 매서웠다. 뱀은 당장이라도 소원을 물어버릴 것처럼 표독한 눈빛으로 소원을 노려보고 있었다.매우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감지한 소원은 뱀이 덮치려 하자 얼른 원래 있던 자리로 기어갔다.아니나 다를까 소원이 원래 자리로 돌아오자 빨간 뱀도 빳빳이 들었던 머리를 살짝 내리며 공격성이 낮아졌다.총기가 있는 뱀이라 주인을 대신해 소원을 감시하는 것 같았다. 그제야 소원은 빨간 머리 여자가 여기에 아무도 남기지 않은 원인을 알 것 같았다. 이 뱀이 그 여자에겐 제일 좋은 조수였다.소원은 그 자리에 누운 채 최대한 몸을 풀면서 체력을 보존해 여기서 나갈 대책을 마련하려 했다.무슨 원인인지 모르지만 그 여자가 준 알약을 먹은 후로 몸이 더할 나위 없이 가뿐해졌고 특히 위가 너무 편안했다.수술하면서 위를 절반 넘게 잘라버렸기에 차갑거나 뜨거운 음식을 조금만 먹어도 불편했는데 그 알약은 마치 위에 핫팩이라도 넣은 듯이 위가 너무 따듯했다. 그 알약이 뭔지는 모르지만 일단 나쁜 쪽은 아닌 것 같았다.아까 그 여자가 몸보신을 해준다고 했는데 몸조리하는 데 쓰이는 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몸보신이 끝나면 뭐 하려는 거지... 아까 한 사람 더 데려왔다고 했는데 혹시 현재인가?’고민에 잠겨 앉아 있다 보니 하루 종일 밥을 먹지 않았는데도 배고프지 않았다.이튿날이 되자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다시 나타났다. 여자는 소원이 깬 걸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만병통치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약을 먹였으니 소원이 깨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지금은 얼굴이 발그스름한 게 윤기가 잘잘 흘렀고 정신도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여자가 또 알약을 꺼내더니 아무 설명도 없이 소원의 입을 열어 알약을 넣고는 삼킨 게 맞는지 확인까지 했다. 할 일을 마친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소원이 불러세웠다.“당신 누구야? 나한테 뭘 먹인 거야?”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걸음을 멈추더니
육경한은 바닥에서 주어 귀걸이를 유심히 살폈다. 그 귀걸이는 육경한에게 소원이 남겨준 메시지나 다름없었다.귀걸이를 손에 꼭 움켜쥔 육경한은 차로 돌아와 소종에게 지시했다.“지금부터 긴장 늦추지 말고 소원의 행방을 찾아내.”소종이 멈칫하더니 물었다.“소원 씨 무슨 일 있어요?”“납치된 것 같아.”육경한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아마도 소원을 여기로 유인한 것 같은데 도대체 누구지?’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육경한은 차를 회사로 돌려 소종과 함께 단서를 찾으려 했다....오랫동안 잠에 취해 있던 소원이 눈을 떠보니 앞이 깜깜한 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을 묶은 끈을 어떻게든 풀어보려는데 케이블 타이라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풀리지 않았다.그때 들려오는 지저분한 걸음 소리에 소원이 바짝 긴장하며 눈을 감고 자는 척하는데 누군가 몸을 흔드는 게 느껴졌고 포댓자루가 벗겨지며 아까와는 다른 공기가 느껴졌다.“저 여자야?”노인네의 창백한 목소리가 들렸다.“네. 족장님. 피가 달콤한 게 적합할 것 같습니다.”그 말에 대답하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그래. 언제 시작할 거야?”족장이 물었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대답했다.“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의식이 끝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요 며칠 독벌레를 넣어 다린 약으로 몸보신 좀 하게 놔뒀다가 따로 시간을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그래. 그렇게 하지.”족장이 말했다.그렇게 대화가 끝나는가 싶었는데 족장이 다시 물었다.“왜 외간 남자는 이리로 데려온 거야? 잊었어? 여기는 그 어떤 정보든 새 나가서는 안 되는 거?”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털썩’ 무릎을 꿇더니 이렇게 말했다.“족장님, 서씨 가문에서 이 사람 좀 데려가서 숨 좀 붙여놓으라고 해서요. 다음 달 말까지는 무사해야 한다고 했는데 독벌레의 잠식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렇게 오래까지 버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족장님께 보고도 드리지 않고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어떤 벌이라도 달갑게 받겠습니다.”족장
빨간 옷을 입은 무녀는 한 폐공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더니 주변을 경계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소원이 모자를 쓰고 잔뜩 긴장한 채로 조심스럽게 대문 쪽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공장은 텅 비어 있었고 방금 들어간 무녀도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수건으로 소원의 입과 코를 막았다.이상한 향기와 함께 소원은 발버둥 칠 겨를도 없이 정신을 잃었다.바닥에 쓰러진 소원을 보고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더니 그릇을 살피듯 소원의 얼굴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살폈다.그렇게 한참 살피던 무녀가 옆에 선 남자에게 말했다.“그래. 이 여자로 하지.”무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탈탈 털었다.“담아서 옮겨.”체격 좋은 남자가 소원을 포댓자루에 담더니 병아리 잡듯 잡아서 차에 던져넣고는 차 문을 닫고 출발했다.무녀는 밖에 세워진 차를 가리키며 다른 남자에게 지시했다.“조용한 곳 찾아서 태워버려.”남자가 즉각 움직이더니 차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무녀가 소원을 실은 차를 따라가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무녀는 상대와 대화를 나누더니 방향을 틀었다....저녁.별장으로 돌아온 육경한은 불이 환히 켜진 걸 보고 도우미에게 물었다.“사모님은 밥 먹었어요?”도우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대표님 모르세요? 사모님 어머니 보러 간다고 했는데.”“어머니요?”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네. 사모님이 그러셨어요. 아직 돌아오시진 않았고요.”도우미가 대답했다.시간을 확인해 보니 이미 저녁 8시 반이었다. 요양원은 이곳에서 멀지 않았기에 이 시간에는 돌아와야 맞았다. 소원이 걱정된 육경한은 올라가서 유진을 한번 보고는 차를 끌고 요양원으로 향했다.요양원에 도착해 전미영이 있는 병실로 가보니 전미영은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간병인이 육경한을 발견하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했다.“대표님.”육경한은 쓸데없는 말을 생략하고 바로 이렇게 물었다.“소원은 병원
소종이 뜸을 들이더니 병원 보고서를 꺼냈다.“이것도 한번 보세요. 병원 진단서인데 진아연의 상처가 일반적인 상처가 아니라 인위적인 상처일 수도 있다고 나와 있어요. 하지만 진아연이 자살이라고 잡아떼는 바람에 다른 사람도 달리 방법이 없었죠.”육경한이 진단서를 훑어보더니 말했다.“진아연이 쓸모가 없어지니까 버림을 받은 거야. 쓸모없는 사람을 왜 살려둬.”“지금으로써는 그렇게 봐야 할 것 같아요.”소종이 말했다.“계속 지켜봐. 배후가 누군지 반드시 알아내야 해.”육경한이 명령했다. 잠재적 위험 요소라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려는데 육경한이 소종을 불러세웠다.“서현재는 조사해 봤어?”“서씨 가문 도련님이요? 확실히 이상하긴 했어요. 조사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조사해 보니까 정말 놀랍더라고요.”소종이 말했다.“서씨 가문 어르신이 무녀를 하나 데려왔는데 독벌레 주술을 내리는 바람에 그렇게 됐대요. 사람도 못 알아보고 생각도, 행동도 극단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하던데요.”육경한이 입술을 앙다문 채 잠깐 고민했다.“변호사한테 서현재랑 연주의 결혼을 해결할 방법이 있는지 알아봐. 더 이어갈 필요 없을 것 같아.”딱 봐도 서현재는 서씨 가문, 그리고 서진태에 의해 버려졌지만 사악한 서진태의 성격에 마지막까지 서현재를 이용해 먹으려 할 것이다. 육경한이 알아버린 이상 한시라도 빨리 육연주를 그 소용돌이에서 빼내야 했다.“지금 바로 지시하겠습니다.”소종이 고개를 끄덕였다.“아, 그리고.”소종이 잠깐 망설였다.“연주 아가씨 어머님이 회사로 찾아왔는데 제가 대표님 회사에 안 계신다고 해서 다시 돌아갔습니다.”“그래, 알았어.”육경한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래도 육연주를 단단히 혼내주려는 것 같았다.소종은 육연주가 혼나도 싸다고 생각했다. 요물 같은 소원이 밉긴 하지만 제멋대로 날뛰는 육연주도 나을 건 없다고 생각했다. 육경한이 육연주의 뒤처리를 해준 것만 해도 한두 번이 아니니 차라리 이번 기회에 육연주의 성질머리
소원이 육경한이 든 컵을 앗아가더니 이렇게 말했다.“두유도 너무 많이 마시면 안 좋아.”이에 육경한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소원은 영문이 뭔지 몰랐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찐빵을 가리켰다.“찐빵도 좀 먹어. 갓 찐 거라 따듯할 거야.”“그래.”육경한이 찐빵을 가져다 입에 넣더니 천천히 음미했다. 유진은 소원이 챙겨준 식단을 말끔히 먹어 치우고 나서야 자리를 비웠다.소원은 입맛이 없어 별로 먹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난 다 먹었어.”그렇게 식탁엔 육경한 한 사람만 남았다.도우미가 정리하려고 와보니 식탁에 놓인 음식은 이미 다 먹어 치운 뒤였다. 육경한은 평소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었기에 아침은 커피 한 잔에 빵 한 조각, 스테이크 반 덩이면 끝이었는데 오늘은 정말 놀랄 정도로 많이 먹었다.역시 소원이 한 아침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에 도우미들은 기분이 좋아져 얼른 식탁을 정리했다.육경한은 출근 전 먼저 위층으로 올라가 소원이 유진에게 책을 읽어주는 걸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집을 나섰다.차에서 기다리던 소종은 육경한이 차에 오르자마자 얼른 가까이 다가갔다.“대표님, 그 여자가 준 음식 드신 거 아니죠?”소종은 육경한이 혹시나 소원에게 홀려 판단력이 흐려진 게 아닌지 걱정했다. 육경한이 말이 없자 소종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드셨어요?”육경한이 소종을 차갑게 쏘아봤다.“신경 꺼.”소종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대표님, 목숨이 아깝지 않으면 그냥 말씀하세요. 어차피 대표님도 오래 못 살 것 같은데 저도 빨리 나가서 죽게요.”육경한이 그런 소종을 힐끔 쏘아보더니 말했다.“무슨 헛소리야?”“제가 없는 말 했어요?”소종이 씩씩거리며 말했다.“그 여자가 독 탄 거 알면서도 드시는 걸 보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 아니에요?”“독을 탔다는 증거가 없잖아.”육경한이 차갑게 잘라버렸다.“증거가 없긴 왜 없어요. 제가 이 두 귀로 들었는데.”소종이 대뜸 화를 냈다.“그 요물 같은 여자가 대답했다니까요.”“말 가려서 해.”육경한이
그녀를 옆에 남기려면 그게 뭐든 마셔야만 했다.소종은 진아연이 준 약이 만성 독약이라고 했다. 만성 독약이라면 아직 그녀와 아이 곁을 지킬 시간이 많다는 건데 육경한은 그걸로 족했다....이튿날.날이 어슴푸레 밝자마자 잠에서 깬 육경한은 옆자리가 비어 있자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가 찾으며 도우미에게 물었다.“사모님 어디 갔어요?”도우미가 웃으며 말했다.“사모님 주방에서 아침 준비하고 있어요.”이를 들은 육경한이 살짝 넋을 잃었지만 도우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대표님, 참 좋으시겠어요. 사모님 음식 솜씨가 좋던데요?”소원이 너무 차가워 집안 분위기가 늘 우중충한 데다 유진까지 몸이 좋지 않고 말수가 적어 별장은 화기애애한 날이 거의 없었다. 하여 집에서 일하는 도우미들도 큰소리로 대화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소원이 직접 육경한에게 밥을 해주고 있으니 소원도 관계를 완화하려고 애쓴다는 의미 같았다. 도우미들은 대표님이 사모님을 사랑하니 이 장면을 보고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원래도 기분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였기에 도우미들도 별다른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고 그저 속으로 몰래 좋아한다고 생각했다.주방으로 들어간 육경한은 분주히 돌아치는 소원의 뒷모습을 보고 순간 꿈인 줄 알았다. 그 자리에 서서 소원이 준비하는 걸 보고 있는데 마침 뒤돌아선 소원이 그를 발견했다.소원은 얼굴이 발그스름하고 광이 도는 걸 봐서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육경한이 아직 잠옷을 입고 있자 부드럽게 말했다.“일단 씻어. 아침 먹자.”육경한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씻고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왔을 때 소원과 유진은 이미 식탁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메뉴는 예전처럼 가짓수가 많지 않았지만 보기만 해도 구미가 당겼다.두유, 찐빵, 호박죽과 만두까지, 직접 만든 아침이라 몸에 좋았다.유진은 두유와 찐빵은 좋아했지만 호박죽과 만두는 별로 당기지 않는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엄마, 나 두유 마시고 싶어요.”이에 육경한이 두유를 한잔 따라주려 했지만 소원이 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