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명보트 위의 사람들은 일단 소원부터 구하고 온몸이 피범벅이 되어버린 육경한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짧은 찰나에 벌어진 많은 일들에 충격받은 소원은 벙찐 채 가만히 구조 대원들의 손에 이끌려 보트에 올랐다.지금 소원이 기억하는 거라고는 육경한이 자기를 밀쳤다는 사실 밖에 없었다.소원은 넋을 놓은 채 보트를 타고 뭍에 올랐고 경호원은 바로 육경한을 구급차에 실어 병원으로 이송했으며 소원 또한 다른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보내졌다.물에 너무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있었던 탓인지 소원은 온몸에 한기가 감돌았고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한편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육경한을 보며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구르던 진아연은 상대적으로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보이는 소원을 보자마자 그녀를 향해 소리 질렀다."경한 씨 잘못되기라도 하면 내가 너 가만 안 놔둬!"침대에 실려 들어가던 소원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어 진아연의 손목을 잡고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진아연, 마지막 한 발 누가 썼어? 네가...""너 나 죽이려고 했지?"진아연의 눈을 보며 말하는 소원에 진아연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그냥 경한 씨 살리려고 그 피라냐 쏘려고 했던 것뿐이야. 경한 씨한테 무슨 일 생기면 다 네 탓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육경한한테 무슨 일 생기면 내가 죽어도 난 만족해."육경한이 죽고 소원도 그 뒤를 따라 죽는다면 목숨으로 저를 살려준 값은 톡톡히 치른 것이니 빚을 진 셈은 아니었다.지나야 하는 소음과 상대가 되지 않자 발을 구르며 소리 질렀다."너 지금 경한 씨 저주했어? 경한 씨 일어나면 다 이럴 거야!"소원은 진아연의 팔을 쳐 내며 차갑게 웃었다."진아연, 너는 죽을 때까지 육경한 그늘 밑에서 살길 바랄게.""너 무슨 뜻이야 그게!"소원은 침대에 누워 피곤한 듯 두 눈을 감으며 진아연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무슨 뜻이냐고?"육경한이 지옥에 가면 그 뒤를 이을 건 너라는 말이지.소원이 마지막 말을 뱉
말을 하며 이준혁은 윤혜인의 손을 잡아 왔다.하지만 부자지간의 다툼에 끼고 싶지 않았던 윤혜인이 그 손을 빼내고 벗어나려 하자 이준혁은 더욱더 손을 꽉 잡아 오며 윤혜인을 가지 못하게 막았다.둘의 손이 맞붙어 있는 것을 본 이천수는 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제 말에 사사건건 토를 대는 불효자식이 얼굴 빼고는 볼 것도 없는 여자 하나 때문에 무려 정씨 집안을 건드렸던 것이다."할 말 있으면 빨리해요. 나 쉬고 싶어요."이천수는 애써 터져 나오는 화를 참으며 말했다."고 이사는 왜 잘랐어?""직무유기하고 다른 회사와 결탁한 증거가 발견돼서 잘랐어요.""필요 없는 정보만 팔아넘겼다잖아! 그게 뭐 얼마나 큰일이라고, 회사에 영향도 끼치지 않은 일로 사람을 잘라? 회사에 어디 이러는 게 한둘이야?!"이준혁은 이천수를 똑바로 쳐다보며 차갑게 대꾸했다."아버지가 말씀하신 사람들, 제가 다 찾아낼 겁니다.""네가 누구 앞이라고 감히 그런 말을 지껄여! 그 사람들 다 우리 회사 창립멤버야, 퇴직할 나이도 얼마 안 남았는데 내버려 둬 그냥."이천수는 눈을 부릅뜨며 한마디 더 보탰다."그리고 고 이사도 그래. 사람 해고할 때 네가 언제 내 의견 물어본 적 있어? 아주 이젠 내가 안중에도 없지!"이준혁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제 사람 건드실 때, 아버지는 저와 상의하셨어요?""내가 누굴 건드렸는데!"이준혁은 치가 떨린다는 듯 이천수에게 눈길로 주지 않으며 말했다."나가요, 우리 방해 말고."이준혁은 일부러 우리라는 단어를 좀 더 강조했다.그제야 이천수도 이준혁이 말하는 '내 사람' 이 윤혜인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생각 못 할 만도 한 것이 윤혜인은 한 번도 이천수 마음에 든 적이 없는 보잘것없는 이준혁의 전처였다.이 모든 게 윤혜인 때문이었다는 것을 한 번 더 상기시키는 이준혁에 이천수는 더욱더 화가 났다.여자 하나에 눈이 팔려서 감히 제가 회사에 심어둔 제 눈을 도려내다니, 그리고 몇 년 동안 조용히 감시할 때는
이천수는 이준혁에게 손가락질하며 역정을 냈다."네가 날 아버지로 생각한 적이 있긴 하니? 내가 한 모든 일은 다 널 위해서였어. 근데 넌 여자 하나에 눈이 멀어서 지금 아버지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회사에서 내치겠다고?""여자의 눈이 먼 걸 아셨으면 저 그만 건드리세요."이준혁은 차가운 표정으로 한 자 한 자 끊어 말하며 이천수를 향해 경고했다."다시 한번 말씀드리는데 내 사람 건드리지 마세요. 그리고 막말도 하지 말고요. 그런 말 들을 사람 아닙니다. 다시 한번 더 제 경고 무시하시면 아버지 측근들 내보내는 것 정도로 끝나진 않을 거예요."이준혁이 지금 하고 있는 건 제 속내를 완전히 드러낸 협박이었다.제가 그동안 쌓아왔던 명망과 체면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지자 이천수는 분노에 차 뒤틀린 듯 아파 오는 심장을 잡으며 말했다."이 불효자식! 네가 저딴 년 하나 때문에 회사 창립 멤버를 감옥에 보내면 내일에는 아주 나도 보내버리겠구나!"이준혁은 여전히 감정 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이라도 제 말에 협조하시면 여생은 편히 보내실 수 있게 할게요."이준혁이 한 말은 이천수가 계속 이준혁과 그의 사람들을 건드린다면 아무리 아버지라 해도 당장 감옥에 보내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이래서 자식 키워봤자 소용없다는 거야!"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이천수는 난간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그때 이준혁이 밖에 서 있는 비서를 향해 소리쳤다."주훈!""이사장님 배웅해드려, 그리고 문밖에 경호원 두 명 더 둬. 아무나 들어오게 하지 말라고."이천수를 앞에 두고 하는 아무나 들여보내지 말라는 말은 꼭 이천수를 겨냥하는 말 같아 이천수는 가슴이 답답해나며 이준혁을 한 번 흘겨보고는 주훈의 손에 이끌려 병실을 나섰다.이천수가 나가고 둘만 남은 병실에서 윤혜인은 살짝 부어오른 이준혁의 턱을 보며 그를 소파로 끌어당겨 앉히고는 말했다."기다려요."그리고는 냉장고에서 얼음팩과 거즈를 꺼내 들어 이준혁에게로 다가갔다.소파가 작은 사이
윤혜인의 턱을 매만지며 다가오는 이준혁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평소 확고한 저만의 패션 스타일을 추구하는 이준혁은 몸이 조금 호전된 다음에는 더 이상 환자복을 입지 않고 자신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유별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윤혜인은 이준혁의 셔츠 입은 모습을 가장 좋아했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도드라진 가슴 근육이 셔츠를 뚫고 언뜻언뜻 보이는 그 모습이 섹시해서랄까. 뭔가 퇴폐적인 이준혁만의 느낌이 있었다.그렇게 셔츠를 입고 있는 이준혁이 지금 윤혜인 위에서 그녀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다. 키스하려는 걸까...윤혜인은 떨리는 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어지는 건 키스가 아닌 이준혁의 웃음소리였다."눈은 왜 감아?""..."윤혜인이 머쓱하게 눈을 뜨니 이준혁은 그녀의 볼을 만지며 진지하게 말했다."너한테 사과하려고 그런 거야.""사... 사과라뇨?""미안해, 너 아프게 해서."이준혁은 특유의 깊은 눈동자로 윤혜인을 쳐다보며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 제 아버지인 이천수의 행동에 대해 대신하는 사과였다. 이천수가 이준혁의 명령에 끌려나가는 모습을 보고 통쾌하긴 했지만 이천수에게 모욕을 당할 땐 윤혜인도 당연히 서러웠다. 그런데 이준혁이 저를 대신해서 화를 내주고 또 지금 이렇게 사과까지 해주니 윤혜인은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 같았다.이준혁은 다시 윤혜인의 얼굴을 들어 올리고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하려던 사과 다 했으니까 이제 우리 하던 거 마저 할까?""하던 거라뇨? 뭘 했는데요 우리가?"이준혁은 다리로 윤혜인을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네가 눈감고 하려고 했던 거."윤혜인은 이준혁이 저에게 키스하려는 줄 알고 눈을 감았던 건 맞지만 그게 이미 오해로 밝혀진 마당에 이준혁이 또 이렇게 언급하니 어딘가 낯부끄러워 입술을 삐죽이며 둘러댔다."그냥 눈이 아파서 그런 거예요. 의미 부여하지 마요!"말을 하며 윤혜인은 이준혁의 무릎 위에서 내려오려 했다."
자신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는 윤혜인은 주량을 넘기지 않게 천천히 마셨지만 모든 일이 잘 풀리고 동료들도 계속 자신을 챙겨줘서 그런지 오늘따라 유달리 기분이 좋았다. 마치 하늘이 저를 돕는 것 마냥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다.물론 그 남자도...그렇게 좋은 분위기에 취한 윤혜인은 저도 모르게 주량을 넘길 때까지 마셔버렸고 회식이 끝나고 한 동료가 취한 윤혜인을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했다.하지만 윤혜인이 바로 거절하자 동료들은 윤혜인의 등을 떠밀며 같이 가라고 부추겼다.그 손길에 취한 윤혜인이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해 넘어질 뻔한 걸 데려다주겠다던 동료가 잡아주었고 윤혜인은 애써 정신을 차리려 하며 한발 물러서서 감사 인사를 했다."고마워요."윤혜인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손을 내밀었던 동료가 얼굴이 빨개져서 우물쭈물하자 옆에 있던 동료 선생님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허 쌤, 이래서 연애하겠어요? 좀 더 적극적으로 해야죠!"다들 부추기자 그 동료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윤 쌤, 지금 이거 우리 첫 대환데, 저 윤 쌤이랑 친해지고 싶어요."윤혜인이 회사에 들어온 날부터 허윤재 눈에는 윤혜인만 보였다.윤혜인은 그가 태어나서 본 사람들 중에 가장 예쁜 사람이었다. 허윤재에게 윤혜인은 봄날에 핀 꽃이었고 여름날에 내리는 단비였으며 가을에 흩날리는 낙엽이었고 겨울에 떨어지는 눈꽃이었다. 윤혜인의 어떤 모습이든지 허윤재 눈에는 다 한 폭의 그림 마냥 아름다워 보였다.그리고 일할 때는 누구보다 열정적인 그녀의 모습이 허윤재에게는 제일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그제야 윤혜인은 고개를 들어 저에게 말을 거는 눈앞의 회사 동료를 올려다봤다. 잘생긴 얼굴에 살짝 튀어나온 이빨까지 한눈에 봐도 청량 미가 넘치는 얼굴이었다.오다가다 스친 적은 있었겠지만 윤혜인에게 큰 인상을 남기진 않았었다.하지만 윤혜인은 예의 바르게 손을 내밀며 대답했다."당연하죠, 친해져요 우리."그에 너무나도 감격한 허윤재가 한참 동안 손을 떨며 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
남자는 재잘재잘 말을 하던 여자의 입술을 깨물고 놓아줬다.“스읍-”윤혜인은 입술을 매만졌다.상처가 나지는 않았지만, 살짝 부어있었다.빨갛게 부풀어 오른 입술은 더 유혹적이었다.“뭐... 뭐 하시는 거예요?”술기운이 많이 오른 윤혜인의 말투는 화를 낸다기보다는 애교를 부리는 것에 가까웠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두 손을 남자의 허리에 두다 보니 더 애교스럽게 들렸다.그녀가 다시 물었다.“어떻게 병원에서 나왔어요? 의사가 나가도 된대요?”눈을 가늘게 뜬 이준혁이 답했다.“날 혼자 병원에 두고, 다른 사람이랑 밥 먹고 술을 마시니 잘 넘어갔어?”“다른 사람이 아니라 동료예요!”윤혜인이 반박했다.이준혁이 그녀의 앙증맞은 코끝을 꼬집으며 새침하게 말했다.“내가 안 왔으면, 아까 그 사람이랑 바로 갔겠어?”“설마요...”윤혜인이 살짝 트림했다. 그녀의 숨 속에서 과일의 달콤함과 있는 듯 없는듯한 우유향도 같이 풍겨왔다. 달큼한 향이었다.윤혜인은 놀라서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뼛속까지 교양이 있는 그녀다 보니 다른 사람 앞에서 트림하는 것은 교양 없고 부끄럽게 느껴졌다.“죄, 죄송합니다.”손가락 사이로 부끄러운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준혁은 매우 즐거운 듯 몸까지 들썩이며 웃었다.‘어떻게 사람이 술을 조금 마셨다고 이렇게까지 귀여워지지? 너무 몽글하고 달큼하잖아.’이준혁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웃음기가 묻은 말투로 답했다.“괜찮아, 너무 좋아. 하지만 앞으로 내가 없는 곳에서는 술 마시지 마.”이준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유머러스하게 그녀에게 경고했다.이렇게 사랑스러운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싫었다.윤혜인은 입을 삐쭉이며 불만스럽게 답했다.“너무 제멋대로잖아요. 어떻게 제가 아는 사람이랑 이렇게 똑같죠?”이준혁은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말랑한 입술을 쓰다듬으며 허스키하게 물었다.“네가 아는 누구?”“닮았어요. 근데, 그 사람도 나쁜 사람이에요.”윤혜인이 불평을 내뱉었다.술기운 때문에 윤혜인
갑자기 장난스러운 마음이 든 이준혁은 그녀의 빨갛게 부풀어 오른 입술을 놓아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더 해줘?”그윽한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입에서 갑자기 힘이 빠진 윤혜인의 얼굴을 빨갛게 달아오르며 숨을 헐떡였다. 그녀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싫어요...”윤혜인이 하고 싶은 말은 가지 말라는 뜻이었지만, 어지러워진 머릿속과 몸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남자는 그윽한 눈동자로 괴롭히며 물었다.“싫다고?”“괴롭히지 마요....”윤혜인은 눈가가 빨개지며 곧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그저 눈앞에 있는 나쁜 사람이, 지금과 같은 순간에 더 이상 키스를 안 해주는 게 원망스러웠다.‘나쁜 놈...’그 순간, 이준혁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과 치열을 다소 강압스럽게 벌리며 아까보다 더 진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찌릿찌릿한 느낌이 다시 올라왔다.뒤통수는 짓눌려 있지만, 남자의 옷가지는 정갈했고, 표정도 한없이 평온했다. 하지만 몸만은 들끓고 있었다.이준혁의 혀가 그녀의 입속을 파고들며 힘차게 휘저었다. 그녀의 혀뿌리마저 삼켜버릴 듯 격한 키스를 하며 그녀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그의 키스로 인해 윤혜인은 온몸에 힘이 풀리고 혀끝은 아려왔다.호흡과 목소리가 남자에게 삼켜졌다.입속은 전부 그의 기운이었다. 그녀는 입을 약간 벌리고 그의 품에서 나른하게 몸을 떨었다.몸은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와 숨을 나누는 이 순간이 좋았다.주객전도하여 그녀도 이준혁을 따라 배워 혀를 내밀며 그의 입속을 탐험했다.수줍고 탐험적인 입맞춤은 남자의 눈동자를 더 깊게 만들었다. 마치 한 마리의 굶주린 짐승 같았다. 그는 멈춰서서 손가락으로 윤혜인의 입술을 어루만지며 더 이상 허스키해질 수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차에서 해도 돼?”윤혜인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너무 좋았던 순간이었는데, 갑작스럽게 멈춰 선 이준혁으로 인해 그녀는 마치 장난감을 뺏긴 어린아이처럼 괴로워했다.약간은 거친 이준혁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로 다가갈 때, 윤혜인은 대답 없이
놀란 윤혜인은 얼굴을 이준혁의 목에 파묻었다.문밖에는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늦은 시간,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VIP 손님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몰래 VIP 엘리베이터를 누른 것이었다.손님을 확인한 아주머니는 거듭 사과했다.이준혁은 흐릿해진 눈동자로 별다른 말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방금 남자가 안고 있던 여자의 목이 빨갛고 불편해 보이는 환자 같다는 생각에 걱정스러웠지만, 다행하게도 혼나지 않아 가슴을 내리 쓸었다.그때, 환자 같은 윤혜인의 얼굴은 매우 붉었다. 술기운도 놀라움으로 인해 반쯤 깬 상태였다.그 상태로 그녀는 조금 전 뭘 했든지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의 자세만으로도 자극적이어서 더 이상 생각을 이어 나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이준혁에 의해 병실로 옮겨지면 윤혜인은 자는척해서 지금 상황을 모면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이준혁은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착하지, 얼른 씻어.”그녀는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대로 자도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역시, 기척이 없네.’그녀가 몰래 기뻐하고 있을 때, 이준혁이 다시 소파로 돌아와 그녀를 안아 따스한 물로 세심하게 씻겨주었다.몸의 전율로 인하여 더 이상 자는척하기 어려웠다.그녀는 비몽사몽 눈을 뜨며 물기 어린 고양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야릇한 분위기 속에서 남자의 시선이 잠시 윤혜인에게로 향했다. 이준혁은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답했다.“힘들잖아. 내가 해줄게.”윤혜인이 고개를 저으며 빨개진 얼굴로 곧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답했다.“아니에요, 안 힘들어요.”윤혜인은 지금 그저 이준혁이 빨리 나갔으면 했다. 하루 종일 모내기에 끌려간 것처럼 허리가 시큰거린다고 인정할 리가 없었다.이준혁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히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안 힘들어?”윤혜인이 극구 부인했다.“안 힘들어요! 정말 안 힘들어요.”젖은 머리카락과 사랑 받은 후처럼 붉게 묽은 윤혜인의 이쁜 얼굴은 마치 소리 없이 초대처럼 유혹적이었다.“그래?
주석훈이 웃으며 말했다.“허허. 몰랐죠? 저 평소엔 되게 허당이에요.”“변호사님 은근히 유머가 넘친다니까요.”주석훈은 언변에 능했기에 단 몇 마디에 간호사가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저기는 왜 저런 거래요? 아까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막더라고요.”주석훈이 물었다.“아, 저기요.”간호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어떤 여자애 한 명 들어왔는데 가족이 살해당했다나 뭐라나. 실어증에 걸려서 한마디도 못 했는데 평소 믿고 따르던 언니가 와서 입을 열었다고 들었어요.”주석훈이 물었다.“여자애요? 많이 놀랐나 보네요.”“그러게요.”간호사가 대답했다.“가족이 칼 맞고 죽었는데 누가 견딜 수 있겠어요.”“억울한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범인만 잡아도 다행 아니겠어요?”주석훈이 말했다.“어려울 것 같던데요?”간호사가 말했다.“뭐 유용한 단서가 안 나왔나 보더라고요. 아빠가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같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봤대요. 진술한 상황이 경찰이 알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경찰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내쉬더라고요.”간호사가 이렇게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건 안지영의 간호를 책임진 간호사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더 물으려는데 다른 간호사가 들어왔다.“어? 이 간호사 있었네? 저쪽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빨리 가봐.”이 간호사가 말했다.“알겠어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치료를 받은 주석훈이 이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이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괜찮다고 말했다.주석훈이 멀리 가고 나서야 다른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이 간호사, 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저 병실에서 나온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저 별말 안 했어요. 다들 아는 내용 얘기해준 거예요.”이 상황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인정하면 바보나 다름없었다.“그래. 앞으로 조심해. 자칫하다간 징계 먹을 수도 있어.”나이 많은 간호사가 귀띔했다.“알아요.”이 간호사가 얼른 대답했다.“아
소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잘됐다. 정말 너무 잘됐어요. 이번엔 하느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셨네요.”소원이 주석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제가 신세를 졌으니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요.”감염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확률이 반반이라 주석훈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주석훈의 마음이 그만큼 단단하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 멘탈이 무너졌을 것이다.소원은 다시 한번 주석훈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별거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주석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가 여기 있다는 건 유진도 여기 입원해 있는 건가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여기 없어요. 아는 동생 좀 보려고 여기 온 거예요.”“동생이요?”주석훈이 물었다.“소원 씨에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까요?”뜬금없는 초대였지만 원래도 열정적인 주석훈이 말하니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소원이 별다른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만나고 나오는 길에요. 전에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 지금쯤 이미 쉬려고 누웠을 거예요.”“아.”주석훈이 말했다.“그러면 데려다줄까요?”“아니요. 아니요.”소원이 얼른 대답했다.“데려다줄 사람이 있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경한이 다가왔다. 까만 트렌치코트가 육경한의 키를 더 커 보이게 했는데 강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소원에게로 걸어왔다.“가자.”육경한은 옆에 선 주석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육경한과 구면인 주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육경한은 작은 변호사 따윈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난감해진 소원이 분위기를 만회하려고 이렇게 말했다.“나오다가 마침 주 변호사님을 만났어.”육경한이 그제야 옆에 선 주석훈을 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주석훈은 전혀 난감해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피고가 잘 지내고 있으니 뿌
제일 의심 가는 사람은 진아연이었다. 안상철은 여자관계가 간단한 편이었고 오랫동안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않고 싱글을 유지하면서 모든 심혈을 딸과 어른을 모시는 데 썼다.박혜순도 안상철을 여러 번 타일렀지만 그럴 때마다 안상철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싱글인 안상철이 이렇게 격렬하게 다툴 수 있는 사람은 진아연일 가능성이 컸다.경찰 조사가 끝나고 안지영도 검사를 받고 쉬어야 했기에 강민혜는 소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서야 소원은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소원은 진아연의 힘으로 안상철을 죽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방도 아닌 60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안상철은 180은 되는 큰 키를 가졌기에 큰 부상을 입어 몸이 허약해 툭하면 쓰러지는 진아연을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진아연은 얼마 전에 손목을 그으면서 피를 많이 흘렸던 터라 짧은 시간 내에 회복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진아연 말고도 다른 사람이 개입했다는 의미였다.멀쩡히 살아움직이는 사람을 60번이나 찔렀다는 건 웬만한 정신상태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이코패스가 잡히지 않고 사회에 섞여 들어간다면 악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강민혜의 생각도 소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진아연이 입원했을 때 강민혜도 만나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진아연은 절대 안상철을 쓰러트릴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검 결과를 보면 약물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안상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진아연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진아연 같은 몸집이라면 3, 4명이 더 와도 절대 안상철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그래도 일단 진아연을 잡는 게 우선이었다. 진아연을 잡아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진아연이 어디로 숨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소원은 의문만 가득 품은 채 병원 밖으로 나가다가 주석훈과 마주쳤다.“소원 씨, 여기서 마주치네요.”주석훈이 소원을 향해 헤벌쭉 웃자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어요.”소원은 안지영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어줬다.“내가 바이올린 계속하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 돈을 다시 찾으러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안지영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상철이 소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려줄 때 진아연이 그 돈을 줬는지 말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안상철의 말대로라면 진아연이 돈을 주려다가 결국 주지 않았으니 그 돈이 없어야 맞았지만 실제로 안상철은 그때 돈을 받은 것이다. 하긴 안상철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보수 없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딸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해도 외국으로 나가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확실치도 않은 약속을 쉽게 믿지 못했을 테고 일단은 확실한 무언가, 즉 돈을 줘야만 안상철이 소진용을 찾아갈 결심을 내렸을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결국 이 일을 소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소원은 안상철이 그 돈을 찾으러 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고 그 돈은 결국 경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결국 안상철의 탐욕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소원이 안지영을 위로했다.“아니에요. 그게 왜 지영 씨 탓이에요. 나쁜 사람이 몹쓸 짓을 저지른 건데. 지영 씨도 아버지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잖아요. 지영 씨, 일단 그날 있었던 일을 경찰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요. 최대한 자세하게 빠트린 것 없이 말해야 경찰도 빨리 범인을 찾을 수 있고 삼촌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예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안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너무 무서울 뿐이었는데 소원이 곁에 있으니 무서움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소원을 믿고 의지해왔는데 최근에는 소원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안지영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두려움을 가시기 위해 소원에게 옆에 앉아 있어 달라고 제안했고 강민혜도 안지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술하는 내내 소원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했다.안지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
소원이 육경한을 불러세우더니 따라서 나오며 병실 문을 닫았다.“현재 일은 내가 오해했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원은 옳고 그름에 명확한 사람이었기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허심탄회한 모습은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태도였다.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티가 나지는 않았다.“도와준 거 아니야.”육경한은 연적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았다. 소원도 더는 이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본론으로 돌아왔다.“진아연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도 찾고 있어. 찾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줄래?”진아연이 잡혀들어가기 전에 물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만약 교활한 진아연을 그대로 들여보낸다면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게 뻔했고 베일에 싸인 배후의 지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직접 물어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응. 알겠어. 너는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찾고 있으니까.”진아연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기에 진아연을 찾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 배후는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수단도 만만치 않았다.소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일인데 무슨 일이 있든 직접 헤쳐나가고 싶었다.그때 소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민혜가 걸어온 전화였다.“소원 씨, 안상철이 죽었어요.”전화를 받자마자 강민혜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쿵.머릿속에서 뭔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삼촌이 왜?’소원의 계획대로라면 안상철은 지금쯤 안지영과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죽어버린 건지 의문이었다.‘지영 씨는...’소원이 얼른 물었다.“그러면 지영 씨는요? 딸은 어떻게 됐어요?”강민혜가 말했다.“딸은 안전한 상태지만 충격을 많이 받아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입을 열려 하지 않아서 경찰이 무슨 질문을 하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어... 어떻게 이런 일이...”소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안
그때 문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소원이었다.소원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육경한이 이 정도로 양보했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었다.“현재야...”“누나...”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네가 먼저 말해.”소원이 양보하자 서현재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누나, 그거 알아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한 건 다 안정된 삶을 되찾고 누나랑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지금은...”서현재가 뜸을 들이더니 씁쓸하게 말했다.“지금은 그저 누나가 잘 있기만 하면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요. 언제든 누나가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그 자리에 있을게요.”순간 서현재는 능력이든 다른 부분이든 육경한과 비길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앞으로 몇 년간 피타는 노력을 거쳐 원하던 자리까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육경한처럼 해탈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은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이기적이고 쪼잔해지고 질투에 휩싸이기 마련인데 유진도 아이를 받아들였으니 소원이 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건 시간 문제라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자꾸만 벼랑 끝으로 떨어졌지만 소원만 행복하다면 서현재로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소원은 그런 서현재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뱉은 건 결국 한마디였다.“현재 너는 나의 영원한 가족이야. 유진도 그렇고.”서로에게 위안이 되던 나날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서현재가 유진을 돌봐준 것도 소원은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든 앞으로든 서현재가 원하는 바를 이뤄줄 수가 없었기에 차라리 가족이라는 자리로 남는 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소원은 이미 서현재에게 다시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소원의 중점은 아이를 돌보는 것과 아버지가 만든 회사를 다시 일궈내는 것,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다.“누나, 나도 잊지 않을게요.”서현재는 이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병실로 돌아오는데 육경한이 침대맡에 앉아 깊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
서현재는 육경한이 그를 내쫓는다는 걸 알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아직 망하진 않았어요.”육경한은 그를 관심해 주는 게 아니라 그가 쫄딱 망해서 서울에서 더는 살 수 없기를 바랐지만 서현재도 유진의 아빠라는 말이 떠올라 톡 까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육경한도 유진의 아빠인 서현재가 너무 궁색해지는 건 싫었다.“서한 가문의 제일 큰 라이벌이 요즘 해성으로 실사하러 갔다고 들었는데.”육경한이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하자 서현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현재는 아직 모르는 소식이었다. 해성에서 새로 거론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때 라이벌 회사가 해성으로 간다는 같은 프로젝트를 노린다는 의미였다. 라이벌 회사라 같은 영업 범위였기에 경쟁하는 건 정상이지만 토론이 끝나가는 프로젝트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서현재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고마워요.”육경한이 콧방귀를 뀌었다.“약육강식인 세상에서는 승자가 왕이 되는 법이야. 능력이 부족한 건 다른 사람 탓해도 쓸모없어.”이 말은 서현재가 육경한이 했던 탄압을 복수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이었다. 육경한이 없었다면 서한 그룹이 흔들릴 때 다른 회사에서 서한 그룹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무너져가는 회사라도 떨어질 부스러기는 남아있었다. 게다가 서한 그룹은 완전히 가치를 잃은것도 아니었기에 기회를 노려 서한 그룹의 주문을 앗아간다면 체급을 늘이고 있는 회사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기회를 노리던 일부 회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 회사들에게 육경한과 경쟁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으니 말이다.물론 육경한의 실력도 서울을 제패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용하는 방식과 수단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에 매우 힘든 것들이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는 3시간 만에 한 상장 회사를 파산하게 만든 적도 있으니 육경한을 건드린다는 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서현재도 숨 돌릴 시간이 있
상황이 매우 긴급했기에 육경한은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으로 나와 곁을 지켰고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은 운이 좋으면 빨리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10년을 기다려도 힘들었다. 게다가 유진의 몸 상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소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진에게 그 알약을 먹이려고 했고 육경한도 동의했다. 소원도 잘 회복하고 있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건 약효가 정말 신기하다는 의미였다.약을 먹기 전에 소원과 육경한이 유진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유진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했고 오히려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꼭 나아서 더 좋은 유진이가 될게요.”유진은 그 알약을 먹은 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등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작기도 했고 체질이 약해서 감당 능력이 어른과는 비길 수 없었다.소원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고 서현재도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 유진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그 감정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기에 유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 육경한은 서현재를 보고도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서현재의 눈빛에서 유진에 대한 걱정을 보아내서 그런 것 같았다.서현재는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유진도 서현재를 좋아했기에 육경한은 유진이 깨어났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길 바랐다. 아버지가 된 후로 육경한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감정이라는 게 들어갔다.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제일 큰 변화였다.지금 이 세 사람에겐 같은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진의 건강이었다.세 사람이 이렇게 화목하게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은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 여기 있으니 병원의 모든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알약을 복용한 이튿날 밤, 유진이 잠에서 깼고 얼굴에 윤기가 감도는 게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검사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