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없어요.” 소원이 손을 흔들었다.이 시간에 육경한은 분명 병원에 있거나 일하고 있을 텐데 전화해도 무슨 말을 하겠나.그가 이미 마음속으로 확정 지은 일이면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식사를 마친 후 잠시 유진과 놀아주다가 병원으로 향했다.아침에 그녀는 서현재로부터 무사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들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현재 일행이 돌아왔고 육경한은 약속대로 서현재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종합검진을 위해 병원에 간 서현재는 소원에게도 언젠가 종합검진을 받으라고 말했다.그 약의 성분을 알 수 없어 혹시나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병원에 도착한 소원은 먼저 검진받으러 갔지만 결과는 며칠이 지나야 나온다고 하니 소종을 보러 갔다.병동 입구에 도착하자 문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소원을 알아보고 정중하게 말했다.“사모님, 소 비서님 보러 오셨나요?”“네.” 소원이 물었다.“소 비서님은 쉬고 계세요?”“일어났어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경호원이 그렇게 말하고 문을 열려고 하자 소원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니요. 나 혼자 들어갈게요.”소원은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소종이 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막 가려는데 갑자기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깜짝 놀란 소원이 문을 확 열고 들어갔더니 온몸이 바닥에 쓰러진 채 무언가를 집으려고 몸부림치는 소종의 모습이 보였다.예리한 눈썰미로 소종이 집어 든 것이 단검이라는 걸 알아차렸고 그는 망설임 없이 칼로 목을 그었다.그가 죽으려고 한다!소원이 달려들어 칼을 빼앗으려 했지만 소종의 힘도 만만치 않았다. 비록 팔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몇 년의 무공이 남아 있었고 여자인 소원은 힘으로 그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두 사람의 몸싸움 과정에서 칼날이 소원의 손에 깊은 상처를 내고 피가 솟구치듯 흘러내렸다.소종이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젠장, 죽고 싶어요?”소원의 머릿속에는 소종이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뭐라 해도 절대
경호원이 소종을 놓아주려던 찰나에 그가 던진 찻잔이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경호원은 그가 자신을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워서 다시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모두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차갑고 깊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 손 놔!”육경한이 걸어 들어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경호원들은 소종을 힐끗 보고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았다.“형님, 저 좀 내버려두세요.” 소종은 조금 전처럼 미쳐 날뛰지 않았고 눈빛도 차츰 차분해졌지만 아직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난 살고 싶지 않아요. 정말 살고 싶지 않아요.” 산속에서부터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는 육경한이 그를 버리지도, 죽게 내버려두지도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그러나 이제 완전히 깨어나 불구가 된 몸을 보니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죽으려는 생각을 했지만 칼도 제대로 잡을 수 없다는 게 그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수년 동안 그는 국내외에 많은 적을 만들었는데 힘없이 적에게 잡혀 고문당해 죽느니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단번에 끝내면 남에게 모욕을 당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그는 체념한 모습으로 말했다.“형님, 저를 보내주세요. 평생 저를 지켜줄 수는 없잖아요.”소종의 뜻은 분명했다. 잠시는 가능해도 평생 챙길 수는 없는 노릇이며 이번에 죽지 못하면 또 시도하겠다는 말이다.언제든 죽을 기회는 있다.소종이 정말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하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한쪽 팔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장애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거다.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팔이 없어도 목숨은 온전하지 않나?살아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하지만 이 세상 저마다의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오랫동안 무력을 사용했던 소종에게 팔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잃는 것과 같았고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육경한은 자리에 서서 엉망이 된 소
소원은 소종의 불똥이 그녀에게까지 튈 줄은 몰랐다. 하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소종의 눈에 그녀가 육경한을 먼저 구하지 않은 건 잘못으로 보일 수 있었다.소종이 그녀를 비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터무니없는 질책이지만 그들의 눈에는 그녀나 서현재의 목숨은 아무렇게나 버려도 될 정도로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육경한의 표정이 살벌해지며 입술을 다물자 소종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전 이 팔 따위 상관없어요. 형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명예로운 일이죠. 절 구해준 날부터 제 목숨은 형님의 것이라고 말했지만 형님께 마음도 없는 여자 때문에 형님이 희생할 필요는 없어요.”소종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육경한의 마음에 꽂히는 날카로운 칼과 같았다. 똑똑한 그가 소원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리가 있을까.그러나 한번 잃었다가 다시 찾은 사람이라 눈앞에 깊은 심연이 놓여 있어도 되돌아갈 수가 없었고 그는 지금 도박꾼처럼 백만 분의 1인 가능성에 베팅하고 있었다.“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결정해. 이 팔은 내가 빚진 걸로 해. 네가 뭘 원하든 다 들어줄게.”소종은 화를 낼 힘도 없는지 암울한 표정으로 말했다.“형님, 저 여자는 건드리지 않겠지만 서현재는 팔 하나를 내놔야 해요.”소종의 표정을 보니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아 소원이 정신을 차리고 매섭게 쏘아붙였다.“따지고 싶으면 나한테 따지면 되지 서현재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요?”이 모든 사건에서 제일 억울한 건 서현재였다. 그때 그녀가 육경한을 살렸으면 서현재는 지금 온전한 시신조차 없이 나무에 깔려 흙더미가 되었을 거다.나무가 무너진 것은 재난이었고 육경한 일행이 그들을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그런 참사를 겪지 않아도 됐을 거다.마지막에 쏜 화살 때문에 그들이 알아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해도 육경한이 그들을 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이제 소종이 그녀 때문에 팔을 잃은 것이라 탓해도 인정하겠지만 그 책임을 서현재에게 돌리는 건 다소 억지였다.그녀가 사람을
소종의 말은 독사처럼 치명적인 곳을 제대로 공격했다.“소 비서님!” 소원은 소종이 이처럼 도발할 줄은 몰랐다.“그만해!” 육경한이 갑자기 입을 열더니 피가 흐르는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며 경호원에게 말했다.“데려가서 치료해.”소원은 할 말이 남았지만 육경한은 경호원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라며 명령했다.문이 닫히고 소종은 조금 전 막무가내로 몰아붙인 것과 달리 단번에 화가 사그라들었다.“네 뜻은 잘 알아.”육경한은 창밖을 내다보며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전 그냥 형님이 제대로 알았으면...”“알아. 나도 똑똑히 보고 있어. 그런데...”육경한은 쓴웃음을 지었다.“난 못 하겠어.”“형님, 여자는 마음만 먹으면 만나는데 왜 꼭 그 여자한테 매달리는 거예요?”소종은 무척 이해되지 않았다..매달려도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어야 할 텐데, 저런 양심 없는 여자는 그럴 가치가 전혀 없었다.“소종, 넌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본 적 있어?” 육경한이 갑자기 물었다.“아니요.”사실이었다. 소종은 사랑에 마음을 돌린 적도 없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난 적도 없었다.눈이 높은 건 아니지만 천성적으로 거친 그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은 그의 돈을 바라거나 다른 목적이 있을 뿐, 그라는 사람 자체를 좋아하진 않았다.예전에도 없었는데 지금은 장애인까지 됐으니 더 그럴 일이 없을 거다.하지만 그는 이런 상황에서 결혼해 아이를 낳는 건 원하지도 않았다. 적이 그렇게 많은데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일 필요가 없고 아이가 생기면 약점이 되는 데 그건 원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혈혈단신으로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게 제일 편하고 자유로웠다.육경한이 깊은 눈빛으로 말했다.“만나면 알게 될 거야. 호랑이가 있다는 걸 알고도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뛰어드는걸. 앞에 큰길이 있는데도 굳이 진흙탕으로 발을 내딛는걸. 넌 이번 생에 생사를 함께할 형제고 그 여자는 내가 평생 놓지 못할 사람이야.”육경한은 한 마디로 자신의 태도를 분명하게 밝혔다.소종은 자신이 어
육경한은 생각에 잠겼다.“죽이지 마.”소종은 깜짝 놀랐다.“형님, 그 자식까지 지켜줄 거예요?”“약속했어.” 육경한이 말하자 소종은 이를 악물었다.“죽이지만 않을게요.”사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서현재를 죽이고 싶었다. 사지만 발달하고 생각은 단순했던 그는 서현재가 죽으면 그 여자가 착해져서 형님을 더 이상 화나게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두 사람을 갈라놓는 건 서현재 한 명이 아니라는 걸 잊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서현재보다 더 심각한 일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많은 오해도 섞여 있지만 오해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마음에 균열을 자아내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육경한은 묵인했다. 그 또한 서현재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뿐 그가 전혀 다 치지 않게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소종이 없었으면 팔을 잃은 사람은 그가 됐을 텐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었다.독한 그 여자와는 팔 하나로도 눈물 한 방울을 바꾸지 못할 거다.육경한은 냉정하게 말했다.“나도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약속만 했어.”소종은 금방 알아들었고 육경한의 의미심장한 말에 다시 살아갈 희망까지 타올랐다.“형님, 걱정하지 마세요. 빨리 나을 거예요.”그래서 서현재 그 자식을 혼내줄 거다.형님을 위해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다면 아직 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육경한은 소종의 눈에서 타오르는 야망을 보며 옳은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종에게 서현재를 상대하게 시키면 그는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할 것이다.이 순간 그는 소종의 이기심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사람이 죽든 살든 상관이 없다는걸.살게 내버려두어도 반드시 고통을 동반한 삶이 지속되길....소원은 진료실에서 상처를 치료했고 상처를 감싼 뒤 간호사가 나가자 그녀도 나가려는데 육경한이 들어왔다.그의 깊은 시선이 만두처럼 감싸진 소원의 손으로 향하며 이렇게 물었다.“더 불편한 데는 없는지 이참에 검사해 봐.”“아니, 방금 다 검사했어.”
육경한은 그날 산에서부터 지금까지 억눌러왔던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내 생각은 안 해? 서현재 편을 들 때마다 네가 나한테는 얼마나 함부로 대하는지 생각 안 해봤냐고.”침대 머리맡에 밀쳐진 채 그에게 잡힌 턱에 고통이 밀려왔다.“육경한, 이것 좀 놓고... 얘기해...”하지만 육경한은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서현재를 언급할 때마다 온몸에 화가 솟구치며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 남자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육경한...”소원이 몸부림치며 해명했다.“그날 당신 경호원이 서현재를 갑자기 밀쳐서 내가 어쩔 수 없이 밀어낸 거야. 약을 먹어서 온몸에 힘이 없는 사람이 죽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맹세코 당신이 죽길 바란 건 아니야. 그 순간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이야. 적어도 당신은 그 사람보다 몸이 멀쩡하니까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소원의 해명을 듣고 육경한의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들었지만 오랫동안 그녀에게 냉대받고, 몇 번이고 상처받은 마음이 한 번에 치유될 수는 없었다.육경한이 조롱하듯 말했다.“그 자식 때문에 나한테 거짓말까지 해?”“거짓말 아니야...”소원이 반박했다.“아니라고?” 육경한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내가 죽길 바라지 않았다지만 진아연이 준 미션은 수행하지 않았어?”소원은 당황했다.다 알고 있었구나.진아연과의 거래에 대해서 그는 이미 알고 있었고 진아연이 얼굴을 바꾸고 아직 살아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속으로 삭이며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소원은 소름이 돋았다. 상대는 여전히 모든 걸 손에 쥐고 들여다보는 육경한이었다.“아니야. 그 약을 당신에게 먹이지 않았어. 진아연이 준 약은 내가 침실 세 번째 서랍에 넣어뒀어. 가서 확인해 봐.”소원은 처음부터 육경한에게 약을 먹일 생각은 없었지만 순전히 진아연이라는 사람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진아연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 너무 잘 알고 있었다.진아연의 배후에 있는
소원은 얼굴에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사이에 있었던 많은 일과 두 가문의 원한이 아마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오해라도 과거의 상처는 사실이잖아.”그녀는 육경한이 조금이라도 변했다고 해서 과거의 고통을 잊을 수는 없었다. 자기 자신이 더욱 비참해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그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육경한, 내가 쉽게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정말로 우리 두 사람을 위한 거라면 날 그만 보내주고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해. 지금처럼 나를 네 곁에 가두려 하지 말고.”소원이 아주 직설적으로 말했다.“널 이대로 놓아달라고?”육경한의 표정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기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그다음엔? 네가 내 아들을 데리고 다른 남자랑 같이 떠나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그만해. 난 결혼할 마음 없어.”소원이 정중한 태도로 약속했다.그녀는 육경한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버리려 했던 물건이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그녀의 말에 육경한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내가 널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현재 두 사람 사이에는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다. 육경한은 소원이 아버지와 서현재의 일을 조사하려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자신의 곁에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유진이 때문에 참는 것도 이유였지만 그 무엇도 육경한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그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거짓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려 했지만 소원이 서현재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는 순간부터 더는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계속 현실을 회피하기만 한다면 결국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소원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육경한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바다처럼 깊고 어두웠다.“소원아, 앞으로 내 앞에서 그 남자 얘기 꺼내지 말고 그 남자랑 접촉하지도 마. 그렇지 않
...소원이 별장에 갇히게 된 당일 저녁 육경한이 돌아왔다.그는 침대 옆에 서서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차가운 기운이 방안을 감돌며 무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소원은 눈을 감고 잠을 자는척하며 마음속으로 그가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한참을 조용히 서 있던 육경한은 침대에 올라가 그녀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의 몸에서 바디워시의 상쾌한 박하 향이 풍겨왔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는 것이 마치 그냥 잠을 자러 온 것처럼 보였다.소원은 잠시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정리하고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았지만 피로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바람에 결국 잠이 들고 말았다.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 침대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그녀는 육경한이 언제 떠났는지 몰랐다. 소원은 잠시 어리둥절하며 마치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녀의 조사는 다시 중단된 상태였고 강민혜에게 새로운 소식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서현재가 서씨 가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는지 몸이 잘 회복되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육경한은 차 안에서 비서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그날 서현재를 호송한 경호원이 규정을 어겼어. 얼른 처리해.”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서현재을 호송하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경호원은 위기를 만났을 때 제 혼자 살려고 임무 대상을 버리고 줄행랑을 놓았는데 그는 신뢰할 수 없는 쓸모없는 사람이었다. 육경한은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이때 비서가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대표님, 방씨 가문 쪽에서 기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대표님을 배신자라고 비난하면서 소원 씨가 질투심 때문에 그의 딸을 모함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육경한은 방현수가 얼마나 교활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날이 올 것을 이미 예상하였다. 그 노인네는 나이가 많았지만 여전히 교묘한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방현수가 이렇게 나온다면 육경한도 가만히 있을
육경한의 여자 친구에게 이런 선물을 하는 건 배경 조사를 거쳐 소원이 그냥 평범한 여자 친구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이 미래에 헤어지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헛수고가 될 테니까.소원이 거절하려고 입을 열려던 찰나 육경한이 먼저 말을 했다.“비취 좋아해?”육경한이 소원에게 물었다.남자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즉시 칭찬을 퍼부었다.“아가씨, 저희 가게의 그 비취는 천 년에 한번 나올법한 아주 진귀한 것인데 고급스러운 제왕록이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져요. 이런 비취는 여성분들에게 정말 좋죠.”소원은 육경한이 분명 남자의 의도를 알고 있었고 그와 일을 함께할 마음으로 이 말을 꺼낸 것으로 생각했다.하지만 그녀는 이런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기에 거절하려 입을 열었다.“감사하지만 저는 액세서리를 착용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그녀의 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다 오늘 밤 소원은 반짝이는 아름다운 드레스 외에 어떤 보석도 착용하지 않았고 머리도 간단히 묶었으며 머리 액세서리도 없었다.아주 간단한 스타일이었지만 오히려 이런 꾸밈없는 모습이 그녀를 더욱 특별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남자는 소원이 이렇게 눈치 없이 행동할 줄은 몰랐기에 잠시 표정이 굳어졌다. 분명히 육경한은 그 비취를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소원이 거절하자 그는 불만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아가씨, 먼저 한번 보시는 게 어때요? 그래도 마음에 안 드시면 그때 다시 돌려주셔도 돼요.”육경한의 사람에게 전달만 할 수 있다면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와 엮일 수 있었기에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소원은 계속해서 거절했다.“죄송하지만 전 정말 보석을 착용하지 않아요.”더 설득해 보려던 남자가 뭐라 말하기 전에 육경한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이분이 좋아하지 않으면 억지로 가져올 필요도 없겠네요. 다른 사람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아마 누군가는 좋아할지도 모르겠네요.”남자의 표정이 많이 굳어졌다.‘다른 사람이 좋아할
육연주는 겉으로 대충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소원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머리가 나쁜 바보였기에 소원을 대처할 방법은 방민아에게 물어봐야 했다.이지애는 자신의 딸이 방민아에게 한번 당한 적이 있음에도 방민아를 다시 찾을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정말 방민아 때문에 죽지 않으면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다른 한편,육씨 가문 별장.소원은 육경한이 그날 밤 이후 며칠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을 줄 몰랐다. 날짜를 세어보니 열흘 정도 돌아오지 않았다.이건 정말 희한한 일이었다.비록 그녀도 육경한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오지 않아 마음이 불안했다. 그뿐만 아니라 외부의 소식을 전혀 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 불안했다.그녀는 별장에서 나갈 수 없었지만 유진이와는 만날 수 있었기에 두 사람은 집에서 매일 바둑을 두고 책을 읽으며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생활을 보냈다.사실 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언제까지 가둘 생각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매일 매일을 초조한 마음으로 보내고 있었다.이렇게 계속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으니 그녀는 반드시 외부와 연락할 방법을 찾아봐야 했다.그녀가 한창 고민에 빠져있을 때 육경한에게서 새로운 비서를 통해 소식이 전해졌다.“소원 씨, 대표님께서 준비를 마친 뒤 함께 나가서 식사하자고 하셨습니다.”비서는 은색 보석이 달린 피시테일 드레스를 소원에게 전해주었다. 소원은 이렇게 눈에 띄는 드레스를 입고 싶지 않았지만 비서가 고집스럽게 말했다.“대표님께서 만약 입지 않으시면 나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소원은 나갈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 때문에 눈 깜짝할 사이에 드레스를 갈아입었다.드레스는 허리를 돋보이게 하는 디자인이었기에 섹시하면서도 요염한 느낌을 주었고 소원의 외모와도 잘 어울렸다.육경한이 갑자기 그녀더러 꾸미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소원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식사 장소로 향했다.목적지에 도착한 그녀는 눈앞의 연회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육경한이 그녀를 사람 많은
육연주는 방민아와 거의 같은 시각에 풀려났다.이지애가 마중을 나와 있었는데 그녀는 육연주를 보자마자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연주야, 고생했어. 너무 많이 야윈 거 아니야? 걱정돼서 잠도 잘 못 잤어.”“엄마...”육연주는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그곳에서 보낸 보름 동안,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처음에 아가씨 행세를 했다가 같은 방 사람들에게 맞기까지 했다. 그들은 경험이 많았기에 CCTV에 찍히지 않는 곳만 골라서 그녀를 때렸고 겉으로 보면 큰 상처가 보이지 않았지만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거기서는 아무리 울부짖어도 소용이 없었고 소리를 지르며 원망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삼촌 너무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절 저런 곳에 가둬두고 구해주지 않을 수 있어요?”육연주는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지애는 더욱 속상해져서 그녀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네 삼촌 많이 변했어. 다 그 여자 때문이야. 게다가 너 나올 때쯤 되면 해외로 유학 보내겠다고 하더라고.”“뭐라고요?”육연주는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엄마, 전 해외로 가고 싶지 않아요!”여행을 가는 것과 유학을 하러 가는 건 완전히 달랐다. 육경한이 보내주는 유학이라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철저히 감시당할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자유라고는 조금도 없을 터였다.“엄마도 어쩔 수 없어. 네 삼촌도 내 말도 들으려 하지 않거든. 네 삼촌 눈에는 그 여우 같은 년이랑 사생아밖에 안 보이나 봐.”이지애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그녀는 끝까지 유진이가 육씨 가문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이지애는 소원을 싫어했기 때문에 그 여자의 아이도 미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항상 유진이를 사생아라고 부르며 경멸했다.육연주는 그 말을 듣고 더욱 불안해졌다.“엄마, 유학은 안 돼요. 저 해외 안 갈래요. 그건 저더러 죽으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요!”“너무 조급해하지 마. 엄마가 방법을 생각
기사는 방민아가 구치소에 구속되어 있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현재 방씨 가문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아가씨, 아직 모르실 겁니다만 방씨 가문의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겼어요. 그래서 차를 팔아서 그 프로젝트의 구멍을 메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장님께서는 몸이 매우 편찮으셔서 요즘 계속 병원에 계세요.”방민아는 자신이 구치소에 있을 때 방씨 가문에 이렇게 큰 재난이 닥쳤다는 소식에 많이 놀랐다. 사실 그녀는 구치소에서 나오면 소원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이제는 먼저 방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조사해 봐야 했다.방민아는 방현수를 만나러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병원에서 방현수를 만난 방민아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방현수는 예전보다 안색이 아주 나빠 있었고 얼굴에 주름도 많아져서 이전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방민아를 보자마자 방현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민아야, 우리 집은 육경한때문에 이젠 망했어...”방민아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어떻게 그럴 수가...”방현수는 방민아가 구치소에 갇혀 있을 동안 방씨 가문에 일어난 일을 전부 이야기한 뒤 한숨을 쉬며 말했다.“육경한이 너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구나. 정말로 감정이 없나 보네. 육경한은 우리 방씨 가문을 다 이용한 후 버린 거야. 나는 이제 나이도 많아서 방씨 가문을 지킬 수 없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구나. 내가 죽고 나면 조상님들 얼굴을 어떻게 보겠어...”방민아는 손에 힘을 주며 주먹을 쥐고 방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럴 리 없어요. 제가 육경한 뜻대로 되지 못하게 만들 거예요.”“그만두렴. 네가 무슨 방법이 있겠니? 그 사람은 너를 사랑하지 않잖아. 지금 육경한이 신경 쓰는 건 그 여자랑 병든 아들뿐이야.”방현수가 머리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웃기고 있네. 그는 병든 아이를 위해서 더는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정관 절제술을 하겠다니. 그 아이가 그에게 그렇게 중요하다고? 하지만 심장병은 기증자를 기다
...소원이 별장에 갇히게 된 당일 저녁 육경한이 돌아왔다.그는 침대 옆에 서서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차가운 기운이 방안을 감돌며 무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소원은 눈을 감고 잠을 자는척하며 마음속으로 그가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한참을 조용히 서 있던 육경한은 침대에 올라가 그녀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의 몸에서 바디워시의 상쾌한 박하 향이 풍겨왔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는 것이 마치 그냥 잠을 자러 온 것처럼 보였다.소원은 잠시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정리하고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았지만 피로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바람에 결국 잠이 들고 말았다.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 침대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그녀는 육경한이 언제 떠났는지 몰랐다. 소원은 잠시 어리둥절하며 마치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녀의 조사는 다시 중단된 상태였고 강민혜에게 새로운 소식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서현재가 서씨 가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는지 몸이 잘 회복되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육경한은 차 안에서 비서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그날 서현재를 호송한 경호원이 규정을 어겼어. 얼른 처리해.”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서현재을 호송하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경호원은 위기를 만났을 때 제 혼자 살려고 임무 대상을 버리고 줄행랑을 놓았는데 그는 신뢰할 수 없는 쓸모없는 사람이었다. 육경한은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이때 비서가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대표님, 방씨 가문 쪽에서 기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대표님을 배신자라고 비난하면서 소원 씨가 질투심 때문에 그의 딸을 모함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육경한은 방현수가 얼마나 교활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날이 올 것을 이미 예상하였다. 그 노인네는 나이가 많았지만 여전히 교묘한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방현수가 이렇게 나온다면 육경한도 가만히 있을
소원은 얼굴에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사이에 있었던 많은 일과 두 가문의 원한이 아마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오해라도 과거의 상처는 사실이잖아.”그녀는 육경한이 조금이라도 변했다고 해서 과거의 고통을 잊을 수는 없었다. 자기 자신이 더욱 비참해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그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육경한, 내가 쉽게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정말로 우리 두 사람을 위한 거라면 날 그만 보내주고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해. 지금처럼 나를 네 곁에 가두려 하지 말고.”소원이 아주 직설적으로 말했다.“널 이대로 놓아달라고?”육경한의 표정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기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그다음엔? 네가 내 아들을 데리고 다른 남자랑 같이 떠나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그만해. 난 결혼할 마음 없어.”소원이 정중한 태도로 약속했다.그녀는 육경한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버리려 했던 물건이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그녀의 말에 육경한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내가 널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현재 두 사람 사이에는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다. 육경한은 소원이 아버지와 서현재의 일을 조사하려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자신의 곁에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유진이 때문에 참는 것도 이유였지만 그 무엇도 육경한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그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거짓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려 했지만 소원이 서현재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는 순간부터 더는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계속 현실을 회피하기만 한다면 결국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소원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육경한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바다처럼 깊고 어두웠다.“소원아, 앞으로 내 앞에서 그 남자 얘기 꺼내지 말고 그 남자랑 접촉하지도 마. 그렇지 않
육경한은 그날 산에서부터 지금까지 억눌러왔던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내 생각은 안 해? 서현재 편을 들 때마다 네가 나한테는 얼마나 함부로 대하는지 생각 안 해봤냐고.”침대 머리맡에 밀쳐진 채 그에게 잡힌 턱에 고통이 밀려왔다.“육경한, 이것 좀 놓고... 얘기해...”하지만 육경한은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서현재를 언급할 때마다 온몸에 화가 솟구치며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 남자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육경한...”소원이 몸부림치며 해명했다.“그날 당신 경호원이 서현재를 갑자기 밀쳐서 내가 어쩔 수 없이 밀어낸 거야. 약을 먹어서 온몸에 힘이 없는 사람이 죽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맹세코 당신이 죽길 바란 건 아니야. 그 순간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이야. 적어도 당신은 그 사람보다 몸이 멀쩡하니까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소원의 해명을 듣고 육경한의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들었지만 오랫동안 그녀에게 냉대받고, 몇 번이고 상처받은 마음이 한 번에 치유될 수는 없었다.육경한이 조롱하듯 말했다.“그 자식 때문에 나한테 거짓말까지 해?”“거짓말 아니야...”소원이 반박했다.“아니라고?” 육경한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내가 죽길 바라지 않았다지만 진아연이 준 미션은 수행하지 않았어?”소원은 당황했다.다 알고 있었구나.진아연과의 거래에 대해서 그는 이미 알고 있었고 진아연이 얼굴을 바꾸고 아직 살아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속으로 삭이며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소원은 소름이 돋았다. 상대는 여전히 모든 걸 손에 쥐고 들여다보는 육경한이었다.“아니야. 그 약을 당신에게 먹이지 않았어. 진아연이 준 약은 내가 침실 세 번째 서랍에 넣어뒀어. 가서 확인해 봐.”소원은 처음부터 육경한에게 약을 먹일 생각은 없었지만 순전히 진아연이라는 사람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진아연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 너무 잘 알고 있었다.진아연의 배후에 있는
육경한은 생각에 잠겼다.“죽이지 마.”소종은 깜짝 놀랐다.“형님, 그 자식까지 지켜줄 거예요?”“약속했어.” 육경한이 말하자 소종은 이를 악물었다.“죽이지만 않을게요.”사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서현재를 죽이고 싶었다. 사지만 발달하고 생각은 단순했던 그는 서현재가 죽으면 그 여자가 착해져서 형님을 더 이상 화나게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두 사람을 갈라놓는 건 서현재 한 명이 아니라는 걸 잊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서현재보다 더 심각한 일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많은 오해도 섞여 있지만 오해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마음에 균열을 자아내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육경한은 묵인했다. 그 또한 서현재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뿐 그가 전혀 다 치지 않게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소종이 없었으면 팔을 잃은 사람은 그가 됐을 텐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었다.독한 그 여자와는 팔 하나로도 눈물 한 방울을 바꾸지 못할 거다.육경한은 냉정하게 말했다.“나도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약속만 했어.”소종은 금방 알아들었고 육경한의 의미심장한 말에 다시 살아갈 희망까지 타올랐다.“형님, 걱정하지 마세요. 빨리 나을 거예요.”그래서 서현재 그 자식을 혼내줄 거다.형님을 위해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다면 아직 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육경한은 소종의 눈에서 타오르는 야망을 보며 옳은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종에게 서현재를 상대하게 시키면 그는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할 것이다.이 순간 그는 소종의 이기심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사람이 죽든 살든 상관이 없다는걸.살게 내버려두어도 반드시 고통을 동반한 삶이 지속되길....소원은 진료실에서 상처를 치료했고 상처를 감싼 뒤 간호사가 나가자 그녀도 나가려는데 육경한이 들어왔다.그의 깊은 시선이 만두처럼 감싸진 소원의 손으로 향하며 이렇게 물었다.“더 불편한 데는 없는지 이참에 검사해 봐.”“아니, 방금 다 검사했어.”
소종의 말은 독사처럼 치명적인 곳을 제대로 공격했다.“소 비서님!” 소원은 소종이 이처럼 도발할 줄은 몰랐다.“그만해!” 육경한이 갑자기 입을 열더니 피가 흐르는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며 경호원에게 말했다.“데려가서 치료해.”소원은 할 말이 남았지만 육경한은 경호원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라며 명령했다.문이 닫히고 소종은 조금 전 막무가내로 몰아붙인 것과 달리 단번에 화가 사그라들었다.“네 뜻은 잘 알아.”육경한은 창밖을 내다보며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전 그냥 형님이 제대로 알았으면...”“알아. 나도 똑똑히 보고 있어. 그런데...”육경한은 쓴웃음을 지었다.“난 못 하겠어.”“형님, 여자는 마음만 먹으면 만나는데 왜 꼭 그 여자한테 매달리는 거예요?”소종은 무척 이해되지 않았다..매달려도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어야 할 텐데, 저런 양심 없는 여자는 그럴 가치가 전혀 없었다.“소종, 넌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본 적 있어?” 육경한이 갑자기 물었다.“아니요.”사실이었다. 소종은 사랑에 마음을 돌린 적도 없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난 적도 없었다.눈이 높은 건 아니지만 천성적으로 거친 그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은 그의 돈을 바라거나 다른 목적이 있을 뿐, 그라는 사람 자체를 좋아하진 않았다.예전에도 없었는데 지금은 장애인까지 됐으니 더 그럴 일이 없을 거다.하지만 그는 이런 상황에서 결혼해 아이를 낳는 건 원하지도 않았다. 적이 그렇게 많은데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일 필요가 없고 아이가 생기면 약점이 되는 데 그건 원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혈혈단신으로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게 제일 편하고 자유로웠다.육경한이 깊은 눈빛으로 말했다.“만나면 알게 될 거야. 호랑이가 있다는 걸 알고도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뛰어드는걸. 앞에 큰길이 있는데도 굳이 진흙탕으로 발을 내딛는걸. 넌 이번 생에 생사를 함께할 형제고 그 여자는 내가 평생 놓지 못할 사람이야.”육경한은 한 마디로 자신의 태도를 분명하게 밝혔다.소종은 자신이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