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현재가 날 모른다면 얼마나 좋을까...’앞쪽에서 택시 기사가 도착했음을 알리자 소원은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하고 서현재와 관련된 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었다.하나씩 차근차근 풀어가다 보면 결국 모든 의문점이 드러나리라.택시에서 내린 소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선미가 살고 있는 곳은 고급스럽지 않은 낡은 아파트 단지였다. 건물은 오래된 데다 주변 환경도 지저분하고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다.영숙이 준 주소를 따라 1층에 있는 선미의 집을 찾은 소원은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다시 영숙에게 전화를 걸었다.“언니, 선미 출근한 거예요?”“아니야. 그 애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사흘째 안 나왔어.”영숙이 물었다.“거기 아무도 없니?”소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네, 조금 전부터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도 없어요.”“저 죽일 놈의 계집애 혹시 도망친 거 아냐?”영숙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아직 나한테 1억 6000만 원 갚지 않았거든.”과거 선미가 저지른 사고로 생긴 빚의 일부는 방민기를 잘 구슬려 덜어냈다.방민기는 몸이 불편해도 마음은 따뜻했고 선미가 그의 취향을 잘 맞춰준 덕분에 어느 정도 돈을 벌 수 있었다.하지만 선미가 도망치지 못한 이유는 그녀의 여권과 신분증이 모두 영숙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더욱이 선미의 성형미가 값비싼 대가를 지불할 만큼의 가치는 없었기에 그녀를 위해 헌신하려는 남자도 없었다.소원은 말했다.“그럼 제가 더 알아볼게요.”그녀는 선미의 직장 전화로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고 집 안에서도 전화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그때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아주머니 한 분이 계단으로 올라오다가 소원이 문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아가씨, 여기 사는 여자 찾으시는 거예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아줌마, 혹시 아세요?”“알죠. 여기 집도 내가 세 준 거니까요
소원은 진아연의 방 한가운데 책상 위에 놓인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그 사진은 다름 아닌 자신의 사진이었다.게다가 사진 위에는 자신을 저주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이로써 소원은 선미가 진아연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그게 아니면 두 사람은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고 원한도 없는데 왜 소원을 저주했겠는가?밖에서 집주인 아주머니는 계속 분노 섞인 목소리로 불평하던 중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아! 귀신이다! 아아아악!”소원은 놀라서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비명 소리가 난 곳은 화장실이었다.화장실로 다가간 소원은 욕조 안에 누워 있는 선미를 발견했다.바닥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고 선미의 손목에는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수도꼭지에서는 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렸고 욕조의 물은 그녀의 입술 바로 아래까지 차 있었다.만약 조금만 늦었다면 물이 코까지 차올라 익사할 뻔한 상황이었다.그 끔찍한 장면은 누구라도 충격과 공포를 느낄 만큼 끔찍했다.하지만 소원은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하며 경찰과 구급차를 불렀다.그리고 집주인 아주머니를 부축해 집 밖으로 나왔다.집 안은 발을 딛을 공간조차 없었기 때문에 소원은 아주머니를 계단에 앉혔다.아주머니가 숨을 고를 수 있도록 셔츠의 단추를 풀어준 뒤,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소원은 진아연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대어 숨을 확인했다.미약하나마 숨은 쉬고 있었다.이 상황을 보며 소원은 진아연 스스로 이런 일을 벌였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대체 누구의 원한을 샀길래 이렇게 잔인한 방식으로 목숨을 위협받아야 하는 걸까?’소원은 진아연을 미워했지만 이렇게 고통스럽게 한 사람을 다룬다고 해서 자신이 행복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악인이 법에 의해 처벌받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여겼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과 구급차가 현장에 도착했다.경찰은 현장을 조사했고 진아연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소원과 집주인 아주머니는 경찰차를 타고 함께 경찰서로 가서 진술을 했다.한편, 미우 그룹.
육경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의 통창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그의 키가 큰 체구와 균형 잡힌 몸은 우뚝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서른 살이라는 남자의 가장 좋은 시기에 성숙함과 재력, 자신감까지 더해져 그의 매력은 한층 빛났다.그는 알고 있었다.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에게 또 하나의 배은망덕하다는 낙인이 찍힐 거라는 것을.하지만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왜냐하면 방씨 가문을 등지는 또 다른 한쪽에는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남자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응접실에 들어섰다.그의 곧은 자세와 당당한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응접실 안에서 방현수는 마치 하룻밤 사이에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그는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육 대표, 요즘은 당신 얼굴 보기가 이렇게나 힘들어졌네.”육경한은 그에게 다가가며 예의 바른 태도로 대답했다.“무슨 말씀을요. 대표님께서 찾아오시니 미우 그룹으로서는 정말 영광입니다. 시간이 되실 때 언제든 들러주시면 좋겠습니다.”방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천천히 말했다.“내가 여기 앉아 있는다고 해서 방씨 가문을 더 이상 건드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나? 우리 방씨 가문에는 고작 두 사람밖에 남지 않았는데... 둘 다 감옥에 들어갔어. 이봐, 육 대표. 도대체 내가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겠나?”육경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그 말씀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전 방씨 가문을 직접적으로 해칠 이유도, 의도도 없습니다.”하지만 방현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높였다.“그 여자가 한 짓이나 네가 한 짓이나 뭐가 다르단 말이야? 자네의 묵인이 없었다면 그 여자가 감히 그런 일을 벌일 수 있었겠어? 자네는 그냥 작게라도 손을 써서 그 여자가 아무것도 못 하게 막아야 했어.”육경한은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여자가 그 영상을 경찰에 넘길 거라고는 정말 몰랐습니다.”이 말은 완
육경한의 얼굴이 단번에 싸늘해졌다.방현수의 말은 듣는 사람을 우롱하는 태도로 육경한을 바보로 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오랜 시간 수많은 풍파를 겪으며 단단히 단련된 육경한은 누구보다도 상황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그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제가 대표님을 존경하는 건 사실입니다. 대표님은 저희보다 먼저 사업을 시작하셨고 경험도 풍부하시죠.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당시 대표님께서도 충분히 이익과 손실을 따져본 후 결정을 내리신 거 아닙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죠. 그때 대표님께서 그 프로젝트를 받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제 죄책감을 조금 더 이용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프로젝트를 수락하신 순간, 저희 관계는 돈과 물건이 모두 깨끗이 정리된 상태가 된 겁니다. 방씨 가문이 그동안 가져간 이익은 투자 대비 몇 배, 아니 몇십 배나 됩니다. 지금 와서 이 일을 다시 꺼내 드시는 건 저로서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계속해서 이 문제를 거론하신다면 저도 공공의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할 겁니다. 상관없거든요. 대표님 생각은 어떠신가요?”육경한의 긴 발언은 방현수를 완전히 말문 막히게 만들었다.그는 육경한이 평소 강단 있고 냉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침착한 목소리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모습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하지만 방현수도 노련한 사람이었다.잠시 침묵을 지키다 이내 그는 표정을 비틀며 말을 꺼냈다.“육경한, 자네 말은 내가 잘못했다는 뜻인가? 내가 늙은 몸으로 직접 찾아왔는데 이렇게 매몰차게 나온다니... 나더러 죽으라는 건가?”목소리가 떨리는 채로 방현수는 지팡이를 바닥에 힘껏 내려쳤다.그가 마지막으로 꺼내 든 카드는 바로 죽음을 빌미로 하는 협박이었다.그는 자신의 나이를 무기로 삼아 상대방이 양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려고 했다.방씨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비난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방현수는 한숨을 쉬며 속으로 생각했다.‘민기는 어찌 됐
‘이건 협박이잖아. 전부 육경한이 이미 써먹고 남긴 수작일 뿐이지.’그는 사람과 협박을 주고받으며 말싸움으로 시간을 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실질적인 상업 전쟁을 선호했고 필요하다면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말 몇 마디로 강한 척하며 겁을 주는 방식은 방현수의 스타일이 아니었다.역시나 방현수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했다.“그게 무슨 뜻이지?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도 모자라 내 자식들까지 망하게 하겠다는 건가?”‘돌봐주긴 뭘!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육경한 이 녀석, 결국 내 자식과 손주들을 협박하는 거나 다름없잖아? 성대하게 열어주겠다고? 파렴치한 놈, 칼로 사람의 가슴에 직접 찔러 넣는 것처럼 아픈 곳만 골라 찌르다니!’분노한 방현수는 가슴이 터질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이놈의 자식, 내가 못할 줄 알아? 내 나이에 이 늙은 뼈다귀가 뭘 더 아끼겠어? 네가 그 여자 때문에 친척이고 뭐고 다 끊겠다면 난 자네 미우 그룹 대문 앞에서 죽어버리겠어! 정말 나한테 망신 주고 성대한 잔치를 벌일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정말 모든 사람들 눈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하지만 육경한은 오히려 더욱 차분해지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번 해보시죠. 다만 그 뒤로는 대표님의 사생자들조차 돌볼 수 없게 될까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방현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제가 알기로만 해도 서울에 세 명, 아르틴국과 리셀국에도 각각 있고 유학 중인 손주들도 세 명이 있더군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 결혼하고 자식 낳는 걸 지켜보지도 못하고 떠나실 건가요?”그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아마 대표님께선 크게 후회하실 겁니다.”육경한이 자신의 속내를 샅샅이 조사해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방현수는 말을 잃었다.심지어 사생자들이 어디에 있는지까지 세세히 알고 있었다니, 육경한은 진작부터 이런 상황을 기다렸던 게 분명했다.“육경한! 자네 정말 그 미친 여자를 위해 우리 방씨 가문을 적으로 돌릴 거야?”방현수는 분노에
경호원들은 방현수를 봐주지 않았다. 그의 고성이 사무실 문밖으로 쫓겨났고 아무리 소리쳐도 문 안으로는 들리지 않았다.그러나 방현수는 멈추지 않고 쉰 목소리로 계속 외쳤다.“육경한! 우리 민아한테 이렇게 할 수는 없어! 민아가 얼마나 자네를 좋아했는데, 저 여자가 우리 민아를 이렇게 망가뜨렸어! 자네가 민아한테 이럴 수는 없다고!”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결국 경호원들에게 부축받아 떠나야 했다. 하지만 복도 끝에서조차 희미하게 그의 외침이 들려왔다.경호원들은 그의 입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잘못하다가는 큰일이 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일이 더 커질 우려가 있었다.대표 사무실이 있는 층에서는 직원들이 하나둘씩 수군대기 시작했다.“방 대표님 보니까 진짜 안쓰럽네. 육 대표님 너무 냉정하신 거 아니야?”“조용히 해.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육 대표님 귀에 들어가면 큰일 난다고!”“뭐 어때, 자기가 한 행동인데 누가 뭐라 하면 안 돼? 난 차라리 이런 냉정한 사람 밑에서 일 안 한다. 잘리면 잘리는 거지.”“그러게. 방씨 가문이 예전에 위기에 처했을 때도 육 대표님이랑 미우 그룹을 버리지 않았잖아. 특히 민아 씨, 육 대표님한테 정말 헌신적이었는데 이렇게 끝나다니 진짜 불쌍하다.”“육 대표님 정말 과거는 전혀 생각도 안 하시는 분이네. 요즘 밖에서 우리 회사 소문 장난 아니야. 회사 대표는 냉혈한이라느니 직원들도 뭐 그리 좋은 사람들 아니라고 하더라.”직원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외부의 시선을 반영한 것이었다. 방씨 가문이 그동안 받았던 혜택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그 와중에 다른 의견도 있었다.“근데 그 민아 씨도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니잖아? 내가 전에 본 영상에서는 육 대표님 친척인 그 명문가 딸 육연주랑 같이 여자 하나 때리는 장면 있던데.”“근데 민아 씨는 스트레스 받아서 그렇게 했다고 하던데? 그 여자가 자기한테 남자 뺏어갔다나 뭐라나.”“누가 알겠어. 우리는 내막을 잘 모르니까 괜
직원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누구도 일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할 용기는 없었다.결국 미우 그룹의 복지와 대우는 업계에서 최상위급이었고 요즘같이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이런 직장을 떠나 다시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평소 같았으면 소종은 이미 마음이 흔들리는 이들을 정리했을 테지만 지금은 방씨 가문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라 시간이 없었다.그는 육경한의 사무실로 들어갔다.남자는 여전히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표정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진지했고 그 모습은 단정하고 매력적이었다.“대표님, 방 대표님을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태도로 봐선 쉽게 물러나진 않을 것 같아요. 게다가 밖에 퍼진 소문들은 전부 방씨 가문에서 흘린 겁니다.”소종이 말했다.“알고 있어.”육경한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여전히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소종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고는 참다못해 물었다.“이대로 소문을 내버려 두실 겁니까?”“그럼 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육경한은 눈을 살짝 들어 올렸고 소종은 답답한 듯 말했다.“하지만 그들이 퍼뜨린 말들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이대로 두면 회사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큽니다. 직원들조차 집중을 못 하고 일에 소홀해지고 있어요.”“그게 더 좋지 않나.”육경한은 담담히 말했다.소종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뭐라고요?”육경한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깨끗하고 길쭉한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냉정히 말했다.“이 기회를 이용해서 내부 팀을 정리할 수 있잖아. 방씨 가문과 관련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정리하라는 거야.”소종은 순간 모든 걸 이해했다.그동안 두 가문이 협력하며 방씨 가문과 연결된 사람이 그룹 내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일부는 방씨 가문으로부터 뇌물을 받거나 이익을 공유하며 내부에서 세력을 구축했을 수도 있었다.이번 기회에 그런 사람들을 모두 걸러내겠다는 것이었다.“그럼 방씨 가문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소종이 물었다.“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 이미 기회를 줬어. 하지만
이 말에 육경한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 없이 소종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소종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그래도 오랜 시간 육경한을 보좌하면서 익힌 대로 뭐든 직설적으로 말하는 스타일이라 마음에 걸린 말은 모두 털어놓았다.“대표님, 어쨌든 전 사모님이 서현재 도련님과 대화하는 걸 봤습니다. 둘이 약속해서 만난 건 아닌 것 같지만 사모님께서 꽤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더군요.”소종은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대표님, 사모님께 그렇게 잘해주는데 사모님은 그걸 조금도 몰라주는 것 같아요. 서 도련님하고는 아직도 뭔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것 같고 정말...”“그냥 우연히 만난 거겠지. 별일 아니야.”육경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소종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소종은 육경한이 소원을 그렇게까지 옹호하는 모습에 놀랐다. 심지어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하니 말이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나지막이 말했다.“그런 것 같습니다. 둘 사이에 특별히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행동은 없었어요. 다만 제 생각엔 사모님이 대표님과 결혼했으면 서현재 도련님과는 거리를 두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특히 서현재는 다른 남자들과는 성격이 달랐다.그는 과거에 소원을 데리고 도망친 적이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애매한 감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소원이 육경한과 결혼한 것도 어쩔 수 없이 강요당한 결과였지 자발적인 선택은 아니었다.소종은 이런 상황이 결국 다시 불씨가 될까 걱정했다.“게다가 대표님, 제가 보기엔 서현재 도련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소종은 말을 이어갔다.“사람을 보는 눈빛이 너무 차갑고 깊어요. 누구를 봐도 같은 표정이고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습니다. 처음엔 사모님과 무슨 갈등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굴더군요. 마치 나무 인형 같았습니다.”“서씨 가문에서 전에 서현재 도련님이 기억을 잃었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하지만 기억을 잃어도
주석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은 미열이 나는 것뿐이에요.”소원은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일단 미열이 있다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주석훈은 소원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말했잖아요. 생사는 운명에 달려 있다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거예요. 소원 씨와는 상관이 없어요. 다 내 운명이니까 자책하지 마세요.”주석훈이 이렇게 말할수록 소원은 더욱 미안해져 조용히 한마디 했다.“주 변호사님, 그렇게 위로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제 책임이 크다는 거 알아요. 내가 갑자기 아프지만 않았어도 주 변호사님이 저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없었겠죠. 그러면 그 취객에게 물리지도 않았을 것이고요. 이미 일어난 일, 우리 같이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도해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주 변호사님에게 큰 빚을 졌으니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반드시 도울게요.”주석훈이 말했다.“내가 어떻게 말해도 소원 씨는 본인 책임이라고 생각하겠군요. 하하, 그럼 진짜로 문제가 생기면 소원 씨에게 부탁할게요.”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마디 한 주석훈에 그나마 마음이 놓인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꼭이요!”이때 소원의 전화에 낯선 번호가 걸려왔다.문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지만 전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소원이 물었다.“여보세요, 누구세요?”“...”“계속 말하지 않으면 끊을게요.”소원이 장난 전화인 줄 알고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상대방이 말했다.“소원 언니...”소원은 깜짝 놀랐다.목소리만으로도 안지영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지난 며칠 동안 안지영의 집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강민혜가 말했다. 가족들이 집에만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그리고 안상철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아무래도 그들이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안상철이 눈치를 챈 것이다.소원이 아무리 초조해해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육경한은 감정을 억누르며 이 신비한 인물의 다음 액션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황진수가 계속 말했다.“하지만 최근에 그때 당시 한 청소부가 바닥에서 펜을 주웠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청소부는 그 펜이 예뻐서 손자에게 주기 위해 가져갔대요. 청소부를 찾아가 무슨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없는지 물었더니 그제야 말하더라고요.”황진수는 청소부에게서 가져온 펜을 꺼내며 말했다.“바로 이겁니다.”육경한이 사인펜을 손에 들고 살펴봤다. 무게도 어느 정도 무거운 것이 가치가 상당할 것 같았다.평소 육경한이 사용하는 사인펜과 비슷했다.평소 글을 잘 쓰지 않는 소종은 뭔가 쓸 일이 생기면 손에 잡히는 펜을 아무것이나 집어서 글을 썼다. 이런 고급스러운 사인펜을 소지할 리가 없었다.이 펜은 소종의 거친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황진수도 같은 생각이었다.“소종 비서는 이런 펜을 사용한 적이 없어요. 조사해 봤는데 이건 이탈리아 왕실 귀족들이 사용하는 사인펜이에요. 한 자루에 수천 달러가 넘죠. 일반 사람들은 펜의 브랜드를 신경 쓰지 않아요. 이 펜의 주인은 아마도 글쓰기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이 펜을 자주 사용하는 것 같아요. 사람 자체가 우아하고 점잖을 거예요. 물론 내면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런 척하겠죠.”황진수의 분석은 아주 일리가 있었다. 배후 인물이 누구인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귀족용 펜이라 서울에서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야. 이탈리아 쪽 주문 리스트를 받아서 서울에 있는 사람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 없는지 확인해 봐.”육경한이 말했다.이 사람은 배후에 계속 숨어 있었기에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정보라고는 이 펜뿐이었다.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적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어 밝은 곳에 있는 그들은 매우 수동적인 상황이 되었다.육경한은 속으로 반드시 이 사람을 빨리 잡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든 소원이 출산하기 전에 배후에 있는 조종자를 제거해야 했다.“그리고 진아연
오랫동안 약을 먹은 소원이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는 것은 약이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해줬다.게다가 무녀의 장수 효과도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평생 늙지 않는 그런 신비로움은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난 서현재를 믿지 않아. 내가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볼게. 그다음에 결정하자.”서현재를 믿지 않는다는 육경한의 말에 소원도 더 이상 그와 논쟁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아이를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다. 서현재를 믿지 않으니 본인이 믿는 사람을 찾겠다는 것은 이 일을 매우 신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줬기에 굳이 논쟁할 필요도 없었다.“알았어. 하지만 시간을 너무 오래 끌지는 마.”소원이 한마디 했을 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발신자를 보니 주석훈이었다.오기 전에 주석훈에게 병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던 그녀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자 주석훈이 걱정되어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통화버튼을 눌러 주석훈에게 곧 갈 것이라고 말한 소원이 전화를 끊었을 때 육경한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이만 가 봐야겠어.”육경한이 말했다.“주석훈, 너무 가까이하지 마. 그다지 믿을 만한 사람 같지 않아.”육경한이 직감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사실 사람을 시켜 조사도 해봤지만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 이력이 훌륭했고 신상 정보도 매우 완벽했다.하지만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소원에게 접근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주석훈이 예전에 이선 그룹에서 일한 것도 확인해 봤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소원이 물었다.“왜 그러는데?”소원은 육경한이 무슨 증거를 찾았거나 의심스러울 만 한 단서라도 있는 줄 알았지만 육경한은 단답형으로 한마디 내뱉었다.“직감이 그래.”소원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육경한 씨, 모든 사람을 본인 생각으로만 판단하지 마.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 어디 있어.”소원의 말에 육경한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에 믿을
말투에는 서운함이 가득했다.어젯밤부터 오늘까지 그 일로 육경한은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오직 다른 남자에게 사줬던 이 죽을 맛보고 싶었다.육경한이 소심한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혹시라도 주석훈에게 태클을 걸까 봐 일부러 설명을 덧붙였다.“주석훈의 병문안을 간 것은 주석훈이 나를 돕다가 다쳤기 때문이야. 게다가 꽤 심각해. 나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데 어떻게 가보지 않을 수 있어?”“참 착하기도 하지.”육경한의 약간 비꼬는 듯한 말에 소원이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이 남자, 과연 그녀가 알고 있던 그 육경한이 맞나?너무 이상하게 변한 것이 아닌가?도도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니 말이다.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하지만 소원은 육경한의 감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착한데. 하지만 누구에게나 다 착한 것은 아니야. 사람을 가리거든.”너무나 명확한 말에 육경한이 침묵하다가 말했다.“저기 있는 생선 먹고 싶어.”소원은 순간 멈칫했지만 육경한이 환자인 것을 감안해 생선 배 부분의 가시 없는 살을 떼어 죽과 함께 먹여 주었다.생선 배 부분의 살을 소원에게 먼저 먹여 주는 것은 육경한의 옛날 습관이었다.육경한은 생선을 다 먹은 뒤 말했다.“배불러.”소원이 말했다.“좀 더 먹어. 그래야 빨리 회복하지. 그러면 황진수 씨도 배 아픈 척 안 해도 되고.”소원은 황진수가 배 아프다고 했던 것이 연기인 것을 알아차렸다.육경한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빈 생선 뼈를 보며 한마디 했다.“소원아, 나 후회해. 전에 너에게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하지 말걸... 많이 후회하고 있어.”소원은 순간 손이 멈칫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육경한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이가 또 생겨서인지 몰라도 왠지 그녀에게 남다른 감정이 생긴 것 같았다.두 사람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이준혁은 육경한의 행동과 일 처리 방식이 너무 극단
컵을 받아 물을 마신 육경한은 이내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컵을 내려놓자 소원이 말했다.“그럼 밥 먹어. 난 갈게.”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려 했다.문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육경한이 침대에서 떨어졌다.키가 188cm인 남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넘어져 있으니 매우 허약해 보였다.소원은 급히 가서 육경한을 부축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소원은 갑자기 허약해진 육경한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침대에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냐 말이다.이내 육경한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아파.”이 말을 들은 소원은 순간 육경한이 꾀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색을 보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상처 난 등이 촉촉한 것을 보니 아마도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황산에 의한 상처는 피가 아니라 고름이 나오기에 소원은 상처가 터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날 육경한이 망설임 없이 뛰어든 것을 생각하니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힘주지 마. 날 잡아. 조심하고.”소원의 팔에 기댄 육경한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오랜만에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육경한은 심장이 졸깃했다. 소원의 몸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 냄새는 마치 약처럼 아픔을 잊게 했다.육경한을 다시 침대에 눕힌 소원은 침대 높이를 조절해 그가 더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했다.모든 것을 마친 후 소원이 돌아서자 육경한은 그녀가 또 떠날까 봐 급히 말했다.“소원아, 나 배고파.”순간 소원은 조금 전 넘어진 것이 진짜로 고의는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조금 전 넘어지면서 손을 다쳐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간병인은 어디 갔어?”“간병인 없어. 평소에 황진수가 도와줘.”육경한의 말에 소원이 짜증 내며 한마디 했다.“왜 간병인을 안
연기가 제법인 황진수는 진짜로 배가 아픈 척했고 심지어 자신의 혀를 깨물어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며 이마에 땀까지 흘렸다.순간 멍해진 소원이 한마디 물었다.“왜 그래요? 의사를 부를까요?”황진수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아니요. 화장실 갔다 오면 될 것 같아요. 이것 좀...”그는 손에 들고 있던 죽을 높이 들었다. 혹시라도 소원이 받지 않을까 봐 일부러 그녀의 손에 쥐여 주기까지 했다.“소원 씨, 이것 좀 부탁드릴게요. 육 대표님에게 전해주세요. 의사가 염증이 생길 수 있으니 지금 차가운 걸 먹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황진수는 말을 마친 뒤 재빨리 사라졌다.죽을 들고 좌우를 둘러보던 소원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육경한이 있는 VIP층으로 향했다.문 앞에 도착한 소원은 죽을 경호원에게 넘겨주려고 했지만 육경한 병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사실 조금 전 황진수는 그녀와 육 대표를 만나게 하기 위해 경호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바로 철수하라고 했다.소원이 문을 두드리자 방안에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들어와.”소원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보고서를 보고 있는 육경한은 소원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는 황진수인 줄 알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그냥 거기에 둬.”테이블 위에 놓여진 손도 대지 않은 음식과 손에 든 죽을 번갈아 본 소원은 육경한이 갑자기 죽을 먹고 싶어서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다.다만 이 죽 가게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어제 샀던 죽 가게와 이름이 비슷한 것 같았다.하지만 별다른 생각 없이 손에 든 죽을 놓은 소원은 육경한이 여전히 그녀를 알아채지 못하자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육경한이 고개를 들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소원?”소원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황 비서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나더러 대신 갖다 주라고 했어.”육경한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나를 보러 온 줄 알았네.”약간 서운함이 담긴 말투에 소원은 이왕 온 김에 몇 마디 안부는 주고받아야
사생아가 많은 방현수는 여자아이인 방민아 하나쯤은 포기할 수 있었다.그리고 방민기는 이미 판결이 났고 방씨 가문이 아무리 인맥이 넓다고 해도 여론이 너무 떠들썩했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그 일 이후, 방현수의 정신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가장 기대하던 두 아이가 동시에 문제를 일으켰으니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방민아는 아마도 방현수의 비밀을 쥐고 있기 때문에 방현수가 돈과 힘을 들여 그녀를 빼내려고 하는 것이다.자신의 추측을 말한 황진수가 한마디 보탰다.“방민아 씨가 역시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방현수의 마음도 바꾸고요.”육경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방민아가 나오면 소원은 그녀의 첫 번째 타겟이 될 것이다. 여자들 사이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욱경한은 잘 알고 있었다.육경한이 황진수에게 말했다.“방씨 가문의 움직임을 주시해 봐. 그리고 방민아가 나오면 반드시 24시간 내내 감시하여 소원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황진수가 말했다.“알겠습니다.”육경한이 또 물었다.“진아연 쪽은 어때, 소식이 있어?”진아연이 또 도망쳤다. 지난번 병원에서 목숨을 건진 후 몸이 나아지자 간호사가 한눈을 판 사이 몰래 빠져나갔다.아마도 육경한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았다.그래서 육경한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까 걱정되어 기회를 잡아 도망친 것이다.하지만 소원의 아버지 일도 그녀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육경한은 그녀에게 확실히 물어봐야 했다.이때 황진수가 말했다.“아직 조사 중입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서울을 벗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 출입국 사무소에 다 물어봤지만 아직 다른 데로 갔다는 소식은 없습니다.”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긴장을 놓치면 안 돼. 진아연이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야.”황진수가 알겠다고 하자 육경한도 조금 지쳤는지 한마디 했다.“이만 나가 봐.”황진수는 집사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요리를 육경한이 한 입도 먹지 않은 것을 보고 한마디 말했다.“육 대표님, 입에 맞지 않아서 안
병실 밖에 있던 황진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들었다.감정적 가치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이지애는 가스라이팅에 정말 능숙했다.육경한에게서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한다면 그녀가 과연 육경한을 걱정하는 척하며 그런 감정적 가치를 제공할 수 있었을까?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탐욕스러워지다니...솔직히 말해서 먼 친척이 가까운 이웃만 못 한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다.황진수가 소리 지르는 이지애를 끌어내어 경호원들에게 넘기자 이지애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감히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내가 육경한의 누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오늘 나를 무례하게 대한 일, 나중에 분명 후회할 때가 있을 거야.”황진수는 냉정하게 말했다.“여사님, 더 이상 자신을 육 대표의 누나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저 사촌 누나일 뿐인데 왜 항상 ‘사촌’이라는 말을 잊으시는 건가요? 밖에서 본인을 육 대표의 친누나라고 말하며 사기를 치다 보니 입에 붙어서 못 고치는 건가요?”황진수는 이지애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자신이 육경한의 누나라는 명목으로 많은 회사 대표들에게서 이익을 취했다. 또 육경한과도 자주 만났기에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를 진짜로 육 대표의 누나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 이지애는 결국 자업자득의 꼴이 되었다.이지애가 분노하며 말했다.“너 같은 놈은 평생 이 꼴로 살 거야. 개는 사람을 구분하지 못해. 잘 들어, 경한이는 마음이 진정되면 다시 나를 누나로 생각할 거야. 그때면 널 첫 번째로 해고할 테니 두고 봐!”“그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황진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 정말!”이제 육경한이 그녀의 뒤를 봐주지 않으니 황진수도 당당하게 억지를 부리는 이지애를 무시하며 바로 경호원들에게 말했다.“데려가세요. 앞으로 육 대표 주위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세요.”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이지애는 욕을 하면서 문을 잡고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찾아와 이지애를 보더니 통
하지만 쉽게 인정할 이지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도리어 육경한을 비난하며 말했다.“경한아, 우리 모녀를 돕지 않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나를 모함하면 안 되지. 나는 너희 집에 빚진 게 없어. 네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 그래서 그 여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여자를 위해 우리 연주를 희생시키면 안 돼. 너도 어릴 때부터 연주를 봐왔었잖니? 그런데 진짜로 감옥에 들어가 고통받는 것을 지켜볼 거야?”이지애는 말을 빙빙 돌리며 돈을 빌린 것을 일절 말하지 않았다. 다시 육경한의 탓을 하는 이지애는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사실 이 돈은 조사하려고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조사할 수 있어요. 그때 개업한 미용원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우리 엄마 돈으로 한 거잖아요. 누나, 내가 정말로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육경한의 말에 이지애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어 일부러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경한아, 그때 미용원을 연 것은 네 엄마의 뜻이었어. 나는 단지 네 엄마를 도운 것뿐이야. 나중에 네 엄마가 돌아가시고 너도 큰 충격을 받았잖아. 그때 미용원도 파산 직전이었어. 그때는 네가 이 난장판을 처리할 겨를이 없어서 내가 대신 맡은 거야. 나는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한 것인데 너는 어떻게 나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니?”이지애의 임기응변 능력은 진짜로 일반인들이 따라올 수 없는 것 같았다.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런 말에 속았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가지 일을 겪은 육경한은 이지애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사람은 역시 욕심에 눈이 먼 동물이었다.이지애의 현재 모습은 정말 탐욕스러웠다.하지만 이해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는 이지애는 육경한의 도움이 있어야만 육연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억울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경한아, 미용원을 돌려받고 싶으면 바로 줄게. 내가 여러 해 동안 운영해 왔지만 사실 다 네 엄마를 대신해서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