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아는 초대도 받지 않고 소원의 병실에 들어와 자연스럽게 침대 옆에 앉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씨, 또 입원하셨네요. 몸은 괜찮으세요?”소원은 그녀가 진심으로 걱정해서 온 게 아님을 알고 있었는지라 무표정하게 대답했다.“괜찮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여기까지 오신 이유가 뭘까요?”“당연히 소원 씨를 보러 왔죠...”소원은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을 찾아왔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그녀와 말싸움을 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소원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우리 사이가 그런 관계는 아닌 것 같은데요. 할 말 있으면 솔직하게 하세요.”“소원 씨, 왜 저한테 그렇게 적대적이에요?”그러자 방민아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제가 뭘 잘못했나요?”소원은 헛웃음을 지었다.‘연기를 참 잘하네.’그날 법원 밖에서 방민아가 했던 말들을 그녀는 하나도 잊지 않았다.방민아는 유진이를 이용해 자신을 협박하려 했고 이것은 소원의 한계를 건드리는 일이었다.소원은 엄마로서, 자신의 아이를 건드리려는 사람에게는 목숨을 걸고라도 맞설 것이었다.“제가 왜 이렇게 나오는지는 민아 씨가 더 잘 알 텐데요.”소원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정말 모르겠는데요? 설명 좀 해보세요.”하지만 방민아는 여전히 능청스럽게 말했다.피곤했던 소원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딱히 할 말도 없고 민아 씨도 이미 저를 봤으니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네요. 저랑 할 얘기도 없는 것 같은데.”소원의 단호한 태도에 방민아의 얼굴빛이 변했다.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는 소원을 바라보았다.부상 때문에 누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름다움은 여전했고 그 약간의 나약함이 오히려 소원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어쩐지 남자들이 그녀를 잊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심지어 육경한처럼 냉정한 사람도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말이다.방민아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나더러 그냥 가라고요? 난 소원 씨가 아이 소식을 듣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이 말에 소원은 갑자
“헛소리하지 마세요!”소원은 화가 치밀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유진이는 체질이 약하기는 해도 아주머니의 정성 어린 보살핌 덕에 아픈 일이 드물었다.그런데 육경한에게 데려간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열이 났고 게다가 방민아 같은 여자가 아이를 돌보게까지 했다.‘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한 건지 모르겠네. 자신을 사랑해주는 여자가 다른 여자가 낳아준 그 사람의 자식을 진심으로 잘 돌봐줄 리가 없잖아. 육경한이 미친 게 틀림없어. 어떻게 방민아가 유진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거지?’소원은 연달아 떠오르는 의문들에 답답함이 몰려왔지만 스스로를 다잡고 차분히 물었다.“민아 씨, 돌려 말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요. 대체 무슨 속셈이에요?”“이렇게 나오신다면야...”방민아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며 나직하게 말했다.“듣자 하니 소원 씨가 예전에 경한 씨를 따라다니며 술자리에서 접대도 하고 꽤 능숙했다고 하던데요?”소원은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아니에요. 그런 적 없어요.”“훗, 재미없네요. 얘기할 생각이 없다면 전 이만 가볼게요.”곧 방민아는 손가방을 들고 일어서려 했다.소원은 다급히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가지 마요. 잠시만요... 생각해볼게요.”소원은 머릿속을 뒤지듯 기억을 더듬었다.그러다 문득 딱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던 게 떠올랐다.육경한이 어느 날 갑자기 돌아와서는 그녀에게 요란한 옷을 입히고 KB 클럽에 가서 여러 대표들과 술자리를 가지게 한 일 말이다.그것은 단 한 번 발생한 일이었고 그마저도 ‘접대’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모욕하려는 목적이었다.지금도 그때의 치욕적인 기억이 떠오르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소원은 꿀꺽 침을 삼키며 말했다.“그런 일이 한 번 있었어요. KB 클럽에서. 하지만 그게 다예요. 그리고 저는 접대를 하러 간 게 아니었어요.”이를 듣고 난 방민아는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육
“민아 씨는 육경한이 이런 짓을 눈감아줄 거라고 생각해요?”소원은 단호하게 물었다.아무리 그래도 육경한은 아이의 아버지였다.그가 자기 친자식의 목숨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리 없다고 믿고 싶었다.설령 유진이가 그에게 단지 협박을 위한 도구일지라도, 유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소원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걸 육경한도 알고 있을 것이다.“하하하하...”방민아는 소원의 말을 듣고는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소원 씨, 정말 순진하시네요. 유진이는 병약하잖아요. 열이 나거나 음식 하나만 잘못 먹어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애를 제가 굳이 손까지 대야겠어요?”방민아는 소원의 순진함을 산산조각내고 싶다는 듯 미소를 띤 채 속삭이듯 말했다.“경한 씨가 그런 거로 저랑 싸울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그녀의 말은 명백했다.자신은 유진이를 해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아이를 직접 돌보지 않더라도, 유진이가 육경한의 곁에 있는 한 기회는 충분했다.게다가 방민아의 말처럼 유진이는 정말로 사소한 자극에도 버티기 힘든 아이였다.크게 손대지 않아도 작은 계략 하나면 충분히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소원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위험을 상상하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듣자 하니 그 아이 이식을 기다리고 있다면서요? 만약... 그냥 만약에요, 이식받기 전에 죽게 된다면 정말 안타깝겠네요.”방민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아직 어린애라 세상을 즐길 기회도 없었을 텐데 그렇게 가버리면 정말 아쉽지 않을까요?”“감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소원은 손에 힘을 주며 분노로 몸을 떨었다.“유진이한테 무슨 일 생기기만 해봐. 내가 너희 모두를 죽여버릴 거야.”소원은 ‘너희’라고 말했다.육경한이 아이를 방민아 같은 여자에게 맡긴 순간, 그는 이미 아버지로서의 자격을 잃은 것이다.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에게 기대할 건 없었다.만약 유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소원은 어떤 수를 써서
소원은 육경한을 잘 알고 있었다.그가 방민아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사업가로서 육경한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이익과 평판이었다.방씨 가문은 미우 그룹이 가장 어려운 시절에 도움을 준 적이 있었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육경한은 방민아와 결혼해야 했다.그렇게 해야만 상업계에서 그의 입지를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결국 아무도 ‘이용하고 버리는 사람’이나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법이다.방민아와의 결혼은 육경한에게 필연적인 선택이었다.미우 그룹의 서울에서의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한 중요한 한 수였던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육경한은 유진이를 위해 방민아를 꾸짖을 리 없었다.육경한에게 있어서 그건 ‘손해 보는 거래’일 뿐이었다.그렇다. 모든 게 결국 거래였다.육경한의 머릿속에서 세상 모든 일은 하나의 거래로 계산되었다.“소원 씨, 이렇게 좋은 기회인데 바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어요? 시간을 끌수록 소원 씨 아이만 더 힘들어질 텐데요.”방민아의 이 말 한마디는 소원의 모든 선택지를 막아버렸다.아이, 그것이 소원의 가장 약한 부분이었다.그녀는 아이를 외면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었다.“알겠어요. 할게요.”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소원은 거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그 앞에 놓인 길은 단 하나, 바로 타협이었다.그러자 방민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역시 소원 씨가 뭘 좀 아시네요. 오늘 밤 바로 그곳으로 가세요. 제가 아는 분을 배정해뒀으니 꼭 잘 대접해야 해요. 손님을 실망시키면 안 돼요, 알겠죠?”소원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그 사람이 누군데요?”방민아는 피식 콧방귀를 뀌었다.“굳이 묻지 않아도 돼요. 가보면 알게 될 거니까.”그녀의 비정상적인 웃음에 소원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어떤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좋은 사람이 아닐 거라는 것은 분명했다.그럼에도 소원은 어쩔 수 없었다.아이를 위해서 그녀는 방민아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민아 씨 말대로 할게요. 하지만
소원은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퇴원을 고집했다.결국 의사는 어쩔 수 없이 퇴원을 허락했고 소원은 퇴원 수속을 마친 뒤 계좌를 확인하다가 거기에 꽤 많은 돈이 입금된 것을 발견했다.아마도 소종이 대신 납부한 병원비일 것이다.하여 소원은 미우 그룹의 회사 계좌를 찾아 병원비를 곧바로 송금했다.그 돈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육경한에게 빚지고 싶지 않았다.지금은 그와 조금의 연관조차 맺고 싶지 않았고 오직 유진이의 양육권을 되찾을 방법만 생각하고 있었다.아침에 알아본 바로는 병원에 안지철의 진료 기록이 없었고 근처 다른 병원에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안지철은 행방불명 상태였다. 아마 이미 죽었을 가능성도 컸다.유시연 쪽으로 연락이 닿을 가능성도 없었다.이미 발각된 이상, 소종은 모든 흔적을 깔끔하게 정리했을 테니 말이다.소원은 소종의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한 번 손을 대면 단 하나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사람이었다.반년 동안 추적해왔던 일이 이제야 결실을 맺으려는 찰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절망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슬퍼할 시간조차 없었다.아직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소원은 병실로 돌아가 짐을 정리하려 했다.2층 복도 멀리서, 서현재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듯 서 있었다.그는 아래층에서 무심코 지나가는 소원의 모습을 보았다.희미한 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또 그 여자네?’왠지 모르게 익숙한 감정이 다시금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다.소원의 모습은 생기라고는 없는 듯했다.생각에 잠긴 채 그녀는 마치 허공을 떠도는 것처럼 걸어가고 있었다.알 수 없는 연민에 가슴이 저릿한 서현재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심장이 자꾸 통제되지가 않아...’“현재 씨!”밝은 목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서현재가 멍하니 있는 걸 보고 육연주가 다가오며 물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그러자 서현재는 소원의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육연주는 서현재가 자신의 외삼촌과 관계가 있는 그 비밀스러운 여자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신경 쓰고 있다 하기엔 과장일 수도 있었지만 서현재는 늘 차가운 성격이었기에 그 여자의 말에 직접적으로 반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육연주의 불안감을 키우기에 충분했다.두 사람의 눈빛 교환 하나하나가 육연주에게 불길한 예감을 들게 했다.왜냐하면 서현재는 그녀에게 한 번도 그런 눈빛을 보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사실 육연주는 서현재가 자신을 제대로 쳐다본 적조차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 생각에 점점 더 불안해지던 육연주는 그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현재 씨, 지금 아이 가지면 결혼식 때는 티도 안 날 거예요.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 아닐까요?”서현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지 않았다.육연주의 스킨십이 달갑지 않은 듯 보였고 옷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불편함을 느낄 정도였다.가끔 서현재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와 육연주가 ‘연인 사이였다’는 이야기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그게 사실이라면 육연주의 스킨십에 이토록 거부감이 들 리가 없기 때문이다.옷깃조차 스치지 않길 바라는 자신을 보며 의문이 들곤 했다.아이를 갖는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하여 서현재는 단순히 무심하게 대답했다.“다음에 얘기해요.”하지만 육연주는 그 말이 회피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오히려 희망을 품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럼 오늘 밤 제가 집에 갈까요? 우리...”그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서현재는 발걸음을 떼며 육연주의 손길을 자연스럽게 뿌리치고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곤란해요.”이 정도 표현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부드러운 거절이었다.서진태는 항상 그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다.“네가 하고 싶은 말을 그냥 내뱉는 건 안 된다. 연주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고 항상 체면을 세워줘야 해.”그러나 육연주와의 관계는 서현재에게 끝없는 인내심을 요구했다.그녀는 항상 자신이 특별 대
조금 전 육연주가 뱉은 말은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한 것일 뿐이었다.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녀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서현재를 좋아하고 있었기에 그가 정말로 파혼이라도 언급할까 봐 두려움이 몰려왔다.그러나 서현재는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제 신분이 연주 씨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억지로 자신을 괴롭힐 필요 없어요. 연주 씨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찾으면 되잖아요.”“현재 씨!”육연주는 그의 말이 진심일 줄은 몰랐다.‘어떻게 나더러 다른 사람을 찾으라고 할 수 있어?!’분노가 차오르니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그러다 육연주는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아, 가슴이 아파요...”이 말은 스스로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기 위함이었다.이미 결혼 이야기가 대외로 알려졌는데 지금 와서 상대를 바꾸는 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무엇보다 그녀는 정말로 서현재와 결혼하고 싶었다.육연주는 서현재를 좋아했다.아니, 그에게 집착하고 있었다.서현재가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해줬다면 그녀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진 않았을 것이다.‘현재 씨가 날 조금만 더 이해하고 한 발만 더 다가왔더라면...’하지만 서현재는 늘 차가웠다.그리고 서현재는 육연주의 연기를 더 이상 참아주지 않았다.“이 결혼,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그의 말은 단호했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육연주는 충격을 받았다.‘날 달래기는커녕 파혼하자고?!’“현재 씨, 현재 씨 예전엔 이렇지 않았어요. 날 정말 사랑했잖아요...”육연주는 눈물을 머금고 애처롭게 말했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그녀와 서현재 사이에는 ‘예전’이라 불릴 만한 진짜 추억은 존재하지 않았다.모두 육연주와 그의 외삼촌 육경한, 그리고 가족들이 꾸며낸 이야기였을 뿐이지.당시 육연주는 눈물을 흘리며 육경한에게 하소연을 했고 육경한은 그녀에게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그 말을 믿지 않았던 그녀는 몇 주 뒤, 서현재의 할아버지인 서진태
서현재는 물건에 부딪쳤을 때만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대로 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육연주는 뒤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내키지 않는지 가방을 주워 들고는 핸드폰을 꺼내 서진태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했다.“할아버지, 현재가 저 괴롭혀요. 저랑 파혼하겠다고 막 그러고 있어요.”육연주가 울먹거리며 일러바쳤다.서진태가 한참 말려서야 육연주는 눈물을 그쳤다.“알겠어요. 할아버지. 저도 그냥 갑자기 울분이 터져서 그래요. 현재 씨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어차피 결혼할 텐데요.”서진태가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우리 연주 어쩌면 이렇게 착할까. 걱정하지 마. 정해놓은 결혼식 날짜는 변하지 않아. 네가 우리 서씨 가문 며느리라는 것도 변하지 않을 거야.”서진태가 육연주를 열심히 달래는 건 육경한과의 거래뿐만이 아니라 육씨 가문과 서씨 가문이 손을 잡으면 막대한 이익이 같이 따라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 결혼에 절대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된다....서현재가 차에 오르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서현재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핸드폰을 꺼버렸다.코너를 돌자 핸드백을 든 소원이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현재는 신분도 그렇고 육연주와 약혼한 사이라 파혼하기 전까지는 다른 여자에게 크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냥 가버리려 했지만 소원이 기둥에 기댄 채 막연한 표정으로 서 있는 걸 보고는 마음이 약해져 앞에 차를 세웠다.서현재가 차창을 내리고 소원을 바라보며 물었다.“소원 씨, 어디 가요?”소원은 여기서 서현재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잠깐 멈칫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이제 들어가려고요.”소원은 자세히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말하면 서현재가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서현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바래다줄게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이미 차 불렀어요.”서현재는 지도를 힐끔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지금 퇴근 시간이라 차가 많이 막혀요. 차를 불렀다 해도 그렇게
두 아가씨는 혀를 삐쭉 내밀더니 더는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영숙은 담배를 절반쯤 태우고는 콧방귀를 뀌었다.“오늘 채워야 할 금액은 채우고 떠드는 거야?”두 아가씨는 영숙의 말에 입을 앙다물며 얌전하게 말했다.“이만 내려가 볼게요.”영숙은 대꾸하지 않았다. 두 아가씨가 물러가고 영숙은 조세진이 있는 룸 앞으로 다가가 서서는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속이 탔는지 담배가 다 타들어 가는 것도 모른 채 데이고 말았다. 사실 영숙도 많이 긴장한 것 같았다.그렇게 문 앞에서 한참 듣던 영숙은 안에서 더 큰 소리가 들리지 않자 자리를 떠났다....조세진에게 내동댕이쳐진 소원은 갈비가 부서진 것처럼 너무 아파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조세진의 더러운 입술이 곧 소원에게 닿으려는데 소원이 얼른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애초에 왜 육경한에게 당했는지 잊은 거 아니죠?”조세진이 멈칫하더니 되물었다.“무슨 말이야?”소원이 이 틈을 타서 한숨 돌리더니 이렇게 말했다.“그 땅끝에 있는 마을까지 내려간 거 육경한 때문이라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조세진은 육경한의 이름을 듣자마자 성욕마저 줄어드는 것 같았다.‘그 재수 없는 자식 얘기는 왜 꺼내는 거야?’소원이 이렇게 말했다.“육경한이 조 대표님을 그 땅끝에 있는 마을까지 내려보낸 건 내게 보여주기 위해서예요. 조 대표님을 내쫓는 것으로 내게 잘 보이려고 한 거죠.”조세진은 그때 수영장에서 당했던 것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올라 바로 욕설을 퍼부었다.“다 네년 때문이잖아.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서울에서 쫓겨날 일은 없었어.”조세진이 소원의 옷을 벗기며 계속 중얼거렸다.“이제 육경한 곁에는 방민아가 있잖아. 이제 더는 너를 도와줄 리 없으니까 빠져나갈 생각하지 마.”촤락.소원이 챙겨입었던 유니폼이 조세진에 의해 볼품없이 찢어지고 말았다. 소원은 얼른 손으로 찢어진 천 쪼가리를 움켜쥐고 조세진에게 따귀를 날렸다.조세진은 갑자기 날아든 따귀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소원의 머리
조세진은 소원의 턱을 꽉 잡더니 테이블에 내팽개치며 이렇게 말했다.“젠장. 개가 뭔지 몰라? 내가 가르쳐줘?”옆에서 시중을 들던 아가씨들이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짜증이 치밀어오른 조세진이 언성을 높였다.“꺼져.”시중을 들던 아가씨들이 지체할 엄두가 나지 않아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문을 닫고 안에서 있었던 일을 영숙에게 알려줬다.영숙이 이를 듣더니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자 옆에 있던 아가씨가 얼른 불을 붙여줬다. 영숙은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이렇게 말했다.“고작 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면 쓸모없다는 소리 아니겠어? 그러면 괴롭힘을 받아도 싸지.”순간 두 아가씨는 더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들은 영숙이 원칙적인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말만 잘 들으면 위험이 닥쳐도 직접 나서서 도와줬지만 반항하는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았고 오히려 이런 식으로 혼쭐을 내줬다.선미가 제일 좋은 시범 케이스였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남자는 건드리지 말라고 영숙이 그렇게 말했는데 들으려 하지 않고 육 대표에게 들러붙었다가 육 대표에게 폭행을 당했을뿐더러 업소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영숙은 그 손실을 다 선미에게 돌렸고 선미도 미친 듯이 일해서 갚았지만 아직도 몇억은 더 갚아야 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라 스폰해줄 사람만 잘 만나도 금방 갚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요새 예쁜 아가씨도 많고 경쟁도 심해 선미처럼 얼굴을 뜯어고친 여자는 잘 먹히지 않을 때가 많았다.그 뒤로 영숙은 방 대표와 붙어먹었지만 방 대표는 종잡을 수 없는 데다 여자 사람 친구도 많았다. 선미가 그쪽으로 기술이 좋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절대 방 대표의 눈에 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돈을 들여 소원의 배상을 대신 해주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하지만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다들 영숙의 말이라면 어명처럼 받들었다. 영숙은 이 바닥에 오래 있어서 눈치를 잘 살폈고 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미리 짚어주기도 했다.아가씨들은 영숙이 고개를
양옆에는 아가씨 한 명씩 서서 술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술 먹는 방식이 눈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로 기괴했다.소원은 담배 연기에 눈이 매워 앞에 앉은 남자가 누군지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늙은 남자는 소원을 보자마자 혀를 끌끌 차더니 옆에서 시중을 들던 여자를 밀어내며 헤벌쭉 웃었다.“오랜만이네요.”익숙한 목소리에 얼굴을 확인한 소원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전에 소원을 추행했던 조세진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보낸 사람이 조세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조세진은 소원을 뼈저리게 미워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었다.역시 방민아는 아는 게 많았고 수단도 어마어마했다.“거기 서서 뭐 해? 오지 않고.”조세진이 재촉했다.소원이 앞으로 걸어가자 조세진은 소원이 앞에 단 명찰을 보고는 비웃었다.“아, 체리? 이름 하나는 잘 어울리네.”체리처럼 매혹적인 소원을 조세진은 진작에 노리고 있었다. 전에 소원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방민아가 준 선물이 소원일 줄은 몰랐던 조세진은 쾌재를 부르며 소파에 드러눕더니 손가락으로 옆에서 술 시중을 들던 여자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봤지? 보고 똑같이 시중들면 돼.”소원은 역겨움을 꾹꾹 참아내며 거절했다.“같이 술 먹는 건 되는데요, 이렇게 먹는다면 나도 어쩔 수 없네요.”휙.조세진이 술잔을 뿌리자 소원이 피했지만 술이 그대로 소원의 얼굴을 적셨다.“네까짓 게 뭐라고 거절이야? 그 명찰 달았으면 무릎이라도 꿇고 시중을 들어야지.”조세진이 불같이 화를 내더니 옆에 있는 두 여자를 발로 툭툭 차며 말했다.“얘들처럼 무릎 꿇으라고. 알아들어?”“아니요.”소원이 얼굴에 쏟아진 샴페인을 닦아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퍽.조세진이 소원을 발로 걷어차 바닥에 쓰러트리며 욕설을 퍼부었다.“내가 그 땅끝에 있는 마을에서 너를 발견하지만 않았어도 너는 지금쯤 꿈 같은 생활을 누리고 있었겠지?”소원은 입에서 단내가 느껴졌지만 이 말을 듣자마자 매서운 눈
마음이 움직인 영숙이 이렇게 말했다.“그러면 네가 알아서 골라. 옷은 저쪽에 있어.”소원이 그쪽으로 걸어가 한참 찾았지만 입을 수 있는 옷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억지로 셔츠에 짧은 치마를 고르긴 했지만 여전히 유혹하려는 의도가 뻔한 옷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매혹적이면서도 그렇게 살이 드러나지는 않은 옷이었다.영숙이 옆에서 유심히 살피더니 말했다.“나이는 좀 많아 보이지만 싹수는 괜찮네.”같은 옷이지만 소원이 입으면 왠지 모르게 더 매혹적이었다. 영숙처럼 높은 안목을 가진 사람도 소원이 예쁘고 매혹적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비록 사장님들은 나이가 어린 아가씨를 좋아했지만 소원은 분위기가 아우라가 독보적이었다. 여우를 닮은 눈은 반달처럼 은은하면서도 깊었는데 한눈에 봐도 돈을 잘 벌어다 줄 상이었다.소원은 영숙이 그나마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언니, 여기 그냥 술만 마셔주면 되는 데 맞죠?”영숙이 잔뜩 긴장한 소원을 보며 웃었다.“당연하지. 우리 여기 건전한 영업장이야. 사장님들과 얘기 나누면서 술 마셔주고 기분 달래주면 돼.”“네, 알겠어요.”소원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말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신뢰 관계가 쌓이지 않은 터라 무슨 일이 터지면 소원이 알아서 해야 했다.영숙이 한마디 덧붙였다.“이제 예명도 지어야지. 전에 다니던 직원이 체리였는데 퇴사했어. 아니면 그냥 체리할래?”“네, 언니.”소원이 얌전하게 대답했다. 이제 뭐라고 불리든 상관없었다. 이곳에 왔으니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을 거라는 걸 소원도 알고 있었다.영숙은 그런 소원을 보며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했다. 오늘 소원을 찜한 사람은 그야말로 변태였다. 이렇게 가녀린 몸으로 버텨낼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얌전하게 있으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영숙이 귀띔했다.“절대 사장님들 화나게 하지 마. 정말 화나면 나도 너 못 도와줘.”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언니.”영숙은 소원이 알았다고 하자 더는 아무 말도 하
소원이 멈칫하자 서현재가 설명했다.“소원 씨 지금 몸 상태로는 술 마시면 안 될 것 같은데. 약속이 있더라도 조심해요.”서현재는 소원이 약속 때문에 온 거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소원은 고개를 저으며 숨기지 않았다.“약속 때문에 온 거 아니에요. 여기서 출근하고 있어요.”“...”서현재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원은 대화가 끝난 줄로 알고 인사를 건넨 뒤 자리를 뜨려고 했다.“소원 씨.”서현재가 소원을 불러세우자 소원이 걸음을 멈췄다.“혹시 요즘 돈이 부족한가요?”서현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자 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내 의지로 여기서 일하는 거예요. 고마워요.”소원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소원은 이렇게 말하면 서현재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길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기억을 잃은 바에는 철저히 잃는 게 좋다고 생각했고 소원의 일에 끼지 않는 게 서현재의 발전에 더 좋을 것 같아서 그랬다. 지금처럼 기억을 쭉 잃는 것도 어찌 보면 좋은 일이다. 이게 소원이 서현재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일지도 모른다.서현재는 멀어져가는 소원의 뒷모습을 보며 침묵에 빠졌다. 왜 여기로 출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원은 이런 곳에서 출근할 사람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소원이 여기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서현재도 과도하게 참여할 수는 없었기에 그저 소원의 삐쩍 마른 뒷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소원은 이제 종이 인형처럼 말라 있었지만 허리를 꼿꼿이 편 모습이 겨울에 피어난 매화와도 같았다. 그 누가 뭐라 하든 절대 꺾이지 않는 그런 매화꽃 말이다.덤덤하던 서현재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이 여자를 마주칠 때마다 텅 빈 가슴이 조금씩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느낌인지 명확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떨치려고 해도 떨쳐지지 않았다.서현재는 소원의 뒷모습이 금빛으로 빛나는 대문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차에 시동을 걸었다....안으로 들어가자 카운터 직원이 소원에게 누구를 찾아왔냐며 물었다. 소원이 이름을
서현재는 물건에 부딪쳤을 때만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대로 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육연주는 뒤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내키지 않는지 가방을 주워 들고는 핸드폰을 꺼내 서진태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했다.“할아버지, 현재가 저 괴롭혀요. 저랑 파혼하겠다고 막 그러고 있어요.”육연주가 울먹거리며 일러바쳤다.서진태가 한참 말려서야 육연주는 눈물을 그쳤다.“알겠어요. 할아버지. 저도 그냥 갑자기 울분이 터져서 그래요. 현재 씨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어차피 결혼할 텐데요.”서진태가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우리 연주 어쩌면 이렇게 착할까. 걱정하지 마. 정해놓은 결혼식 날짜는 변하지 않아. 네가 우리 서씨 가문 며느리라는 것도 변하지 않을 거야.”서진태가 육연주를 열심히 달래는 건 육경한과의 거래뿐만이 아니라 육씨 가문과 서씨 가문이 손을 잡으면 막대한 이익이 같이 따라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 결혼에 절대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된다....서현재가 차에 오르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서현재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핸드폰을 꺼버렸다.코너를 돌자 핸드백을 든 소원이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현재는 신분도 그렇고 육연주와 약혼한 사이라 파혼하기 전까지는 다른 여자에게 크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냥 가버리려 했지만 소원이 기둥에 기댄 채 막연한 표정으로 서 있는 걸 보고는 마음이 약해져 앞에 차를 세웠다.서현재가 차창을 내리고 소원을 바라보며 물었다.“소원 씨, 어디 가요?”소원은 여기서 서현재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잠깐 멈칫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이제 들어가려고요.”소원은 자세히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말하면 서현재가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서현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바래다줄게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이미 차 불렀어요.”서현재는 지도를 힐끔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지금 퇴근 시간이라 차가 많이 막혀요. 차를 불렀다 해도 그렇게
조금 전 육연주가 뱉은 말은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한 것일 뿐이었다.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녀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서현재를 좋아하고 있었기에 그가 정말로 파혼이라도 언급할까 봐 두려움이 몰려왔다.그러나 서현재는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제 신분이 연주 씨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억지로 자신을 괴롭힐 필요 없어요. 연주 씨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찾으면 되잖아요.”“현재 씨!”육연주는 그의 말이 진심일 줄은 몰랐다.‘어떻게 나더러 다른 사람을 찾으라고 할 수 있어?!’분노가 차오르니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그러다 육연주는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아, 가슴이 아파요...”이 말은 스스로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기 위함이었다.이미 결혼 이야기가 대외로 알려졌는데 지금 와서 상대를 바꾸는 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무엇보다 그녀는 정말로 서현재와 결혼하고 싶었다.육연주는 서현재를 좋아했다.아니, 그에게 집착하고 있었다.서현재가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해줬다면 그녀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진 않았을 것이다.‘현재 씨가 날 조금만 더 이해하고 한 발만 더 다가왔더라면...’하지만 서현재는 늘 차가웠다.그리고 서현재는 육연주의 연기를 더 이상 참아주지 않았다.“이 결혼,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그의 말은 단호했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육연주는 충격을 받았다.‘날 달래기는커녕 파혼하자고?!’“현재 씨, 현재 씨 예전엔 이렇지 않았어요. 날 정말 사랑했잖아요...”육연주는 눈물을 머금고 애처롭게 말했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그녀와 서현재 사이에는 ‘예전’이라 불릴 만한 진짜 추억은 존재하지 않았다.모두 육연주와 그의 외삼촌 육경한, 그리고 가족들이 꾸며낸 이야기였을 뿐이지.당시 육연주는 눈물을 흘리며 육경한에게 하소연을 했고 육경한은 그녀에게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그 말을 믿지 않았던 그녀는 몇 주 뒤, 서현재의 할아버지인 서진태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육연주는 서현재가 자신의 외삼촌과 관계가 있는 그 비밀스러운 여자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신경 쓰고 있다 하기엔 과장일 수도 있었지만 서현재는 늘 차가운 성격이었기에 그 여자의 말에 직접적으로 반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육연주의 불안감을 키우기에 충분했다.두 사람의 눈빛 교환 하나하나가 육연주에게 불길한 예감을 들게 했다.왜냐하면 서현재는 그녀에게 한 번도 그런 눈빛을 보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사실 육연주는 서현재가 자신을 제대로 쳐다본 적조차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 생각에 점점 더 불안해지던 육연주는 그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현재 씨, 지금 아이 가지면 결혼식 때는 티도 안 날 거예요.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 아닐까요?”서현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지 않았다.육연주의 스킨십이 달갑지 않은 듯 보였고 옷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불편함을 느낄 정도였다.가끔 서현재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와 육연주가 ‘연인 사이였다’는 이야기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그게 사실이라면 육연주의 스킨십에 이토록 거부감이 들 리가 없기 때문이다.옷깃조차 스치지 않길 바라는 자신을 보며 의문이 들곤 했다.아이를 갖는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하여 서현재는 단순히 무심하게 대답했다.“다음에 얘기해요.”하지만 육연주는 그 말이 회피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오히려 희망을 품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럼 오늘 밤 제가 집에 갈까요? 우리...”그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서현재는 발걸음을 떼며 육연주의 손길을 자연스럽게 뿌리치고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곤란해요.”이 정도 표현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부드러운 거절이었다.서진태는 항상 그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다.“네가 하고 싶은 말을 그냥 내뱉는 건 안 된다. 연주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고 항상 체면을 세워줘야 해.”그러나 육연주와의 관계는 서현재에게 끝없는 인내심을 요구했다.그녀는 항상 자신이 특별 대
소원은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퇴원을 고집했다.결국 의사는 어쩔 수 없이 퇴원을 허락했고 소원은 퇴원 수속을 마친 뒤 계좌를 확인하다가 거기에 꽤 많은 돈이 입금된 것을 발견했다.아마도 소종이 대신 납부한 병원비일 것이다.하여 소원은 미우 그룹의 회사 계좌를 찾아 병원비를 곧바로 송금했다.그 돈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육경한에게 빚지고 싶지 않았다.지금은 그와 조금의 연관조차 맺고 싶지 않았고 오직 유진이의 양육권을 되찾을 방법만 생각하고 있었다.아침에 알아본 바로는 병원에 안지철의 진료 기록이 없었고 근처 다른 병원에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안지철은 행방불명 상태였다. 아마 이미 죽었을 가능성도 컸다.유시연 쪽으로 연락이 닿을 가능성도 없었다.이미 발각된 이상, 소종은 모든 흔적을 깔끔하게 정리했을 테니 말이다.소원은 소종의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한 번 손을 대면 단 하나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사람이었다.반년 동안 추적해왔던 일이 이제야 결실을 맺으려는 찰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절망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슬퍼할 시간조차 없었다.아직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소원은 병실로 돌아가 짐을 정리하려 했다.2층 복도 멀리서, 서현재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듯 서 있었다.그는 아래층에서 무심코 지나가는 소원의 모습을 보았다.희미한 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또 그 여자네?’왠지 모르게 익숙한 감정이 다시금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다.소원의 모습은 생기라고는 없는 듯했다.생각에 잠긴 채 그녀는 마치 허공을 떠도는 것처럼 걸어가고 있었다.알 수 없는 연민에 가슴이 저릿한 서현재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심장이 자꾸 통제되지가 않아...’“현재 씨!”밝은 목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서현재가 멍하니 있는 걸 보고 육연주가 다가오며 물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그러자 서현재는 소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