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아는 초대도 받지 않고 소원의 병실에 들어와 자연스럽게 침대 옆에 앉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씨, 또 입원하셨네요. 몸은 괜찮으세요?”소원은 그녀가 진심으로 걱정해서 온 게 아님을 알고 있었는지라 무표정하게 대답했다.“괜찮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여기까지 오신 이유가 뭘까요?”“당연히 소원 씨를 보러 왔죠...”소원은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을 찾아왔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그녀와 말싸움을 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소원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우리 사이가 그런 관계는 아닌 것 같은데요. 할 말 있으면 솔직하게 하세요.”“소원 씨, 왜 저한테 그렇게 적대적이에요?”그러자 방민아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제가 뭘 잘못했나요?”소원은 헛웃음을 지었다.‘연기를 참 잘하네.’그날 법원 밖에서 방민아가 했던 말들을 그녀는 하나도 잊지 않았다.방민아는 유진이를 이용해 자신을 협박하려 했고 이것은 소원의 한계를 건드리는 일이었다.소원은 엄마로서, 자신의 아이를 건드리려는 사람에게는 목숨을 걸고라도 맞설 것이었다.“제가 왜 이렇게 나오는지는 민아 씨가 더 잘 알 텐데요.”소원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정말 모르겠는데요? 설명 좀 해보세요.”하지만 방민아는 여전히 능청스럽게 말했다.피곤했던 소원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딱히 할 말도 없고 민아 씨도 이미 저를 봤으니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네요. 저랑 할 얘기도 없는 것 같은데.”소원의 단호한 태도에 방민아의 얼굴빛이 변했다.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는 소원을 바라보았다.부상 때문에 누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름다움은 여전했고 그 약간의 나약함이 오히려 소원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어쩐지 남자들이 그녀를 잊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심지어 육경한처럼 냉정한 사람도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말이다.방민아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나더러 그냥 가라고요? 난 소원 씨가 아이 소식을 듣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이 말에 소원은 갑자
“헛소리하지 마세요!”소원은 화가 치밀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유진이는 체질이 약하기는 해도 아주머니의 정성 어린 보살핌 덕에 아픈 일이 드물었다.그런데 육경한에게 데려간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열이 났고 게다가 방민아 같은 여자가 아이를 돌보게까지 했다.‘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한 건지 모르겠네. 자신을 사랑해주는 여자가 다른 여자가 낳아준 그 사람의 자식을 진심으로 잘 돌봐줄 리가 없잖아. 육경한이 미친 게 틀림없어. 어떻게 방민아가 유진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거지?’소원은 연달아 떠오르는 의문들에 답답함이 몰려왔지만 스스로를 다잡고 차분히 물었다.“민아 씨, 돌려 말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요. 대체 무슨 속셈이에요?”“이렇게 나오신다면야...”방민아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며 나직하게 말했다.“듣자 하니 소원 씨가 예전에 경한 씨를 따라다니며 술자리에서 접대도 하고 꽤 능숙했다고 하던데요?”소원은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아니에요. 그런 적 없어요.”“훗, 재미없네요. 얘기할 생각이 없다면 전 이만 가볼게요.”곧 방민아는 손가방을 들고 일어서려 했다.소원은 다급히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가지 마요. 잠시만요... 생각해볼게요.”소원은 머릿속을 뒤지듯 기억을 더듬었다.그러다 문득 딱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던 게 떠올랐다.육경한이 어느 날 갑자기 돌아와서는 그녀에게 요란한 옷을 입히고 KB 클럽에 가서 여러 대표들과 술자리를 가지게 한 일 말이다.그것은 단 한 번 발생한 일이었고 그마저도 ‘접대’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모욕하려는 목적이었다.지금도 그때의 치욕적인 기억이 떠오르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소원은 꿀꺽 침을 삼키며 말했다.“그런 일이 한 번 있었어요. KB 클럽에서. 하지만 그게 다예요. 그리고 저는 접대를 하러 간 게 아니었어요.”이를 듣고 난 방민아는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육
“민아 씨는 육경한이 이런 짓을 눈감아줄 거라고 생각해요?”소원은 단호하게 물었다.아무리 그래도 육경한은 아이의 아버지였다.그가 자기 친자식의 목숨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리 없다고 믿고 싶었다.설령 유진이가 그에게 단지 협박을 위한 도구일지라도, 유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소원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걸 육경한도 알고 있을 것이다.“하하하하...”방민아는 소원의 말을 듣고는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소원 씨, 정말 순진하시네요. 유진이는 병약하잖아요. 열이 나거나 음식 하나만 잘못 먹어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애를 제가 굳이 손까지 대야겠어요?”방민아는 소원의 순진함을 산산조각내고 싶다는 듯 미소를 띤 채 속삭이듯 말했다.“경한 씨가 그런 거로 저랑 싸울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그녀의 말은 명백했다.자신은 유진이를 해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아이를 직접 돌보지 않더라도, 유진이가 육경한의 곁에 있는 한 기회는 충분했다.게다가 방민아의 말처럼 유진이는 정말로 사소한 자극에도 버티기 힘든 아이였다.크게 손대지 않아도 작은 계략 하나면 충분히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소원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위험을 상상하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듣자 하니 그 아이 이식을 기다리고 있다면서요? 만약... 그냥 만약에요, 이식받기 전에 죽게 된다면 정말 안타깝겠네요.”방민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아직 어린애라 세상을 즐길 기회도 없었을 텐데 그렇게 가버리면 정말 아쉽지 않을까요?”“감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소원은 손에 힘을 주며 분노로 몸을 떨었다.“유진이한테 무슨 일 생기기만 해봐. 내가 너희 모두를 죽여버릴 거야.”소원은 ‘너희’라고 말했다.육경한이 아이를 방민아 같은 여자에게 맡긴 순간, 그는 이미 아버지로서의 자격을 잃은 것이다.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에게 기대할 건 없었다.만약 유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소원은 어떤 수를 써서
소원은 육경한을 잘 알고 있었다.그가 방민아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사업가로서 육경한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이익과 평판이었다.방씨 가문은 미우 그룹이 가장 어려운 시절에 도움을 준 적이 있었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육경한은 방민아와 결혼해야 했다.그렇게 해야만 상업계에서 그의 입지를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결국 아무도 ‘이용하고 버리는 사람’이나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법이다.방민아와의 결혼은 육경한에게 필연적인 선택이었다.미우 그룹의 서울에서의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한 중요한 한 수였던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육경한은 유진이를 위해 방민아를 꾸짖을 리 없었다.육경한에게 있어서 그건 ‘손해 보는 거래’일 뿐이었다.그렇다. 모든 게 결국 거래였다.육경한의 머릿속에서 세상 모든 일은 하나의 거래로 계산되었다.“소원 씨, 이렇게 좋은 기회인데 바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어요? 시간을 끌수록 소원 씨 아이만 더 힘들어질 텐데요.”방민아의 이 말 한마디는 소원의 모든 선택지를 막아버렸다.아이, 그것이 소원의 가장 약한 부분이었다.그녀는 아이를 외면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었다.“알겠어요. 할게요.”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소원은 거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그 앞에 놓인 길은 단 하나, 바로 타협이었다.그러자 방민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역시 소원 씨가 뭘 좀 아시네요. 오늘 밤 바로 그곳으로 가세요. 제가 아는 분을 배정해뒀으니 꼭 잘 대접해야 해요. 손님을 실망시키면 안 돼요, 알겠죠?”소원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그 사람이 누군데요?”방민아는 피식 콧방귀를 뀌었다.“굳이 묻지 않아도 돼요. 가보면 알게 될 거니까.”그녀의 비정상적인 웃음에 소원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어떤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좋은 사람이 아닐 거라는 것은 분명했다.그럼에도 소원은 어쩔 수 없었다.아이를 위해서 그녀는 방민아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민아 씨 말대로 할게요. 하지만
소원은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퇴원을 고집했다.결국 의사는 어쩔 수 없이 퇴원을 허락했고 소원은 퇴원 수속을 마친 뒤 계좌를 확인하다가 거기에 꽤 많은 돈이 입금된 것을 발견했다.아마도 소종이 대신 납부한 병원비일 것이다.하여 소원은 미우 그룹의 회사 계좌를 찾아 병원비를 곧바로 송금했다.그 돈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육경한에게 빚지고 싶지 않았다.지금은 그와 조금의 연관조차 맺고 싶지 않았고 오직 유진이의 양육권을 되찾을 방법만 생각하고 있었다.아침에 알아본 바로는 병원에 안지철의 진료 기록이 없었고 근처 다른 병원에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안지철은 행방불명 상태였다. 아마 이미 죽었을 가능성도 컸다.유시연 쪽으로 연락이 닿을 가능성도 없었다.이미 발각된 이상, 소종은 모든 흔적을 깔끔하게 정리했을 테니 말이다.소원은 소종의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한 번 손을 대면 단 하나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사람이었다.반년 동안 추적해왔던 일이 이제야 결실을 맺으려는 찰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절망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슬퍼할 시간조차 없었다.아직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소원은 병실로 돌아가 짐을 정리하려 했다.2층 복도 멀리서, 서현재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듯 서 있었다.그는 아래층에서 무심코 지나가는 소원의 모습을 보았다.희미한 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또 그 여자네?’왠지 모르게 익숙한 감정이 다시금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다.소원의 모습은 생기라고는 없는 듯했다.생각에 잠긴 채 그녀는 마치 허공을 떠도는 것처럼 걸어가고 있었다.알 수 없는 연민에 가슴이 저릿한 서현재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심장이 자꾸 통제되지가 않아...’“현재 씨!”밝은 목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서현재가 멍하니 있는 걸 보고 육연주가 다가오며 물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그러자 서현재는 소원의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육연주는 서현재가 자신의 외삼촌과 관계가 있는 그 비밀스러운 여자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신경 쓰고 있다 하기엔 과장일 수도 있었지만 서현재는 늘 차가운 성격이었기에 그 여자의 말에 직접적으로 반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육연주의 불안감을 키우기에 충분했다.두 사람의 눈빛 교환 하나하나가 육연주에게 불길한 예감을 들게 했다.왜냐하면 서현재는 그녀에게 한 번도 그런 눈빛을 보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사실 육연주는 서현재가 자신을 제대로 쳐다본 적조차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 생각에 점점 더 불안해지던 육연주는 그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현재 씨, 지금 아이 가지면 결혼식 때는 티도 안 날 거예요.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 아닐까요?”서현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지 않았다.육연주의 스킨십이 달갑지 않은 듯 보였고 옷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불편함을 느낄 정도였다.가끔 서현재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와 육연주가 ‘연인 사이였다’는 이야기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그게 사실이라면 육연주의 스킨십에 이토록 거부감이 들 리가 없기 때문이다.옷깃조차 스치지 않길 바라는 자신을 보며 의문이 들곤 했다.아이를 갖는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하여 서현재는 단순히 무심하게 대답했다.“다음에 얘기해요.”하지만 육연주는 그 말이 회피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오히려 희망을 품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럼 오늘 밤 제가 집에 갈까요? 우리...”그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서현재는 발걸음을 떼며 육연주의 손길을 자연스럽게 뿌리치고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곤란해요.”이 정도 표현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부드러운 거절이었다.서진태는 항상 그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다.“네가 하고 싶은 말을 그냥 내뱉는 건 안 된다. 연주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고 항상 체면을 세워줘야 해.”그러나 육연주와의 관계는 서현재에게 끝없는 인내심을 요구했다.그녀는 항상 자신이 특별 대
조금 전 육연주가 뱉은 말은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한 것일 뿐이었다.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녀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서현재를 좋아하고 있었기에 그가 정말로 파혼이라도 언급할까 봐 두려움이 몰려왔다.그러나 서현재는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제 신분이 연주 씨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억지로 자신을 괴롭힐 필요 없어요. 연주 씨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찾으면 되잖아요.”“현재 씨!”육연주는 그의 말이 진심일 줄은 몰랐다.‘어떻게 나더러 다른 사람을 찾으라고 할 수 있어?!’분노가 차오르니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그러다 육연주는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아, 가슴이 아파요...”이 말은 스스로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기 위함이었다.이미 결혼 이야기가 대외로 알려졌는데 지금 와서 상대를 바꾸는 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무엇보다 그녀는 정말로 서현재와 결혼하고 싶었다.육연주는 서현재를 좋아했다.아니, 그에게 집착하고 있었다.서현재가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해줬다면 그녀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진 않았을 것이다.‘현재 씨가 날 조금만 더 이해하고 한 발만 더 다가왔더라면...’하지만 서현재는 늘 차가웠다.그리고 서현재는 육연주의 연기를 더 이상 참아주지 않았다.“이 결혼,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그의 말은 단호했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육연주는 충격을 받았다.‘날 달래기는커녕 파혼하자고?!’“현재 씨, 현재 씨 예전엔 이렇지 않았어요. 날 정말 사랑했잖아요...”육연주는 눈물을 머금고 애처롭게 말했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그녀와 서현재 사이에는 ‘예전’이라 불릴 만한 진짜 추억은 존재하지 않았다.모두 육연주와 그의 외삼촌 육경한, 그리고 가족들이 꾸며낸 이야기였을 뿐이지.당시 육연주는 눈물을 흘리며 육경한에게 하소연을 했고 육경한은 그녀에게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그 말을 믿지 않았던 그녀는 몇 주 뒤, 서현재의 할아버지인 서진태
서현재는 물건에 부딪쳤을 때만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대로 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육연주는 뒤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내키지 않는지 가방을 주워 들고는 핸드폰을 꺼내 서진태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했다.“할아버지, 현재가 저 괴롭혀요. 저랑 파혼하겠다고 막 그러고 있어요.”육연주가 울먹거리며 일러바쳤다.서진태가 한참 말려서야 육연주는 눈물을 그쳤다.“알겠어요. 할아버지. 저도 그냥 갑자기 울분이 터져서 그래요. 현재 씨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어차피 결혼할 텐데요.”서진태가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우리 연주 어쩌면 이렇게 착할까. 걱정하지 마. 정해놓은 결혼식 날짜는 변하지 않아. 네가 우리 서씨 가문 며느리라는 것도 변하지 않을 거야.”서진태가 육연주를 열심히 달래는 건 육경한과의 거래뿐만이 아니라 육씨 가문과 서씨 가문이 손을 잡으면 막대한 이익이 같이 따라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 결혼에 절대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된다....서현재가 차에 오르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서현재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핸드폰을 꺼버렸다.코너를 돌자 핸드백을 든 소원이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현재는 신분도 그렇고 육연주와 약혼한 사이라 파혼하기 전까지는 다른 여자에게 크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냥 가버리려 했지만 소원이 기둥에 기댄 채 막연한 표정으로 서 있는 걸 보고는 마음이 약해져 앞에 차를 세웠다.서현재가 차창을 내리고 소원을 바라보며 물었다.“소원 씨, 어디 가요?”소원은 여기서 서현재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잠깐 멈칫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이제 들어가려고요.”소원은 자세히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말하면 서현재가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서현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바래다줄게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이미 차 불렀어요.”서현재는 지도를 힐끔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지금 퇴근 시간이라 차가 많이 막혀요. 차를 불렀다 해도 그렇게
“유진아, 네가 한 일들이 정말 많고 대단했어. 알아?”소원이 유진이를 다독였다.하지만 아들과 이렇게 가까이 이야기해본 적이 많지 않은 소원은 혹여나 말실수를 하거나 자신의 말이 유진이에게 너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됐다.다행히 유진이는 매우 똑똑했는지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저 알아요. 제가 틀린 건 없었고 앞으로도 나쁜 사람들 혼내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소원은 아들의 영리함이 대견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다음에는 더 조심하자. 제일 중요한 건 우리 안전을 지키는 거야. 나쁜 사람들을 잡는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자, 알겠지?”“네, 알겠어요, 엄마.”유진이는 말을 이었다.“엄마, 다음에 외할머니 뵈러 갈 때는 우리 같이 가요.”소원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너 외할머니 뵈러 갔었니?”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빠...”그러나 두 글자를 말한 후, 유진이는 소원이 기분 나빠할까 봐 얼른 말을 고쳤다.“그... 아저씨가 데려갔어요. 그 아저씨가 여기가 엄마의 엄마, 제 외할머니라고 알려줬어요.”소원의 마음은 복잡했다.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겠는 기분이 밀려왔다.육경한이 아들을 데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갔다니 뜻밖이었다.소원이 전미영을 찾아갔을 때마다 그와 마주친 적이 없었던 걸 보면 일부러 시간을 피해서 간 모양이었다.‘참 계산적이네.’유진이가 말했다.“외할머니는 말을 못 하시지만 저한테 웃어주셨어요. 제가 외할머니한테 말도 많이 걸었는데 계속 웃으면서 들어주셨거든요.”소원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응. 우리 유진이 정말 기특하다. 외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렸구나. 다음에는 같이 가자.”잠시 후, 유진이가 갑자기 물었다.“엄마, 저 언제 삼촌 볼 수 있어요? 저 삼촌이 너무 보고 싶어요.”서현재는 유진이의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함께하며 큰 위안과 즐거움을 준 사람이었다.유진이는 아직 어리지만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은 잊지 않았다. 오랫동안 못 본
시선을 축 늘어트린 육경한의 눈동자에 소원의 목에 올라온 닭살이 보였다. 입고 온 옷이 얇았는데 병원에서 에어컨을 너무 세게 튼 것이다.소원은 아주머니가 너무 걱정되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줘도 딱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줬다는 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전문가 회진은 3시간이나 지속되었고 토론으로 얻은 방안은 투석, 즉 피를 바꾸는 것이었다. 치료 과정이 꽤 오래 걸릴뿐더러 아주머니가 언제 깨어날지도 미지수였고 치료한다 해도 아주머니의 몸은 예전처럼 돌아가기 어려웠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생활 능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에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순간 방민아에 대한 원망도 극에 달했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방민아만 생각하면 정말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육경한에게 말했다.“난 아주머니 이렇게 만든 사람 절대 용서 못 해.”육경한은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난 절대 끼어들지 않을게.”“약속 못 지킬까 봐 그러지.”적어도 지금은 육경한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소원은 말을 가려서 했다. 유진을 지키려면, 서현재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내려면 일단 몸을 사려야 했다. 서진태는 소원이 봤던 사람 중에 제일 악독한 사람이었기에 서현재도 잘 지낼 리가 없었다.지금 상황을 해결하려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육경한밖에 없었다.육경한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더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유진이 내 아들이기도 해.”소원이 대꾸했다.“알면 됐어.”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니 소원도 일단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육경한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방민아의 상황은 절대 좋아질 수 없었다.간호조무사가 일단 두 사람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일단 여독을 말끔히 배출하고 투석을 시작해야 했기에 두 사람이 여기 남아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
사실 그게 더 무서웠다. 육경한이 소원을 위해 한걸음 크게 물러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사람은 영원히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방민아는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로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기 전에 절대 소원과 유진을 건드리지 않고 몸을 사렸을 텐데 말이다. 그랬다면 지금 행복하게 육경한과 결혼하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방민아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지금 당장 이혼해요. 이혼만 해준다면 돈은 원하는 만큼 두둑이 챙겨주고 아이랑 떠날 수 있게 해줄게요. 어때요?”소원이 콧방귀를 뀌었다.“방민아 씨, 진심이에요? 설마...”소원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원하는 걸 얻고 나서 우리가 다시 눈엣가시라고 생각해 우리를 다시 찾아내거나 함정을 팔 수도 있잖아요.”방민아는 그녀의 생각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소원이 너무 싫었다. 소원과 유진은 정말 방민아가 잊으려 해도 자꾸만 거슬리는 눈엣가와도 같아 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 두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육경한의 마음을 영원히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절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기에 방민아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절대 그럴 일 없어요. 약속한 거니까 변하지 않아요.”소원이 웃으며 말했다.“방민아 씨,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한 승낙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어요. 내가 방민아 씨를 믿을 일은 더더욱 없고요.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 최선을 다해 지킬 거예요. 돈도 많고 신분도 있는 방민아 씨가 이번에도 무사히 나올지 모르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해요.”“아악. 내가 당신 죽여버릴 거야.”방민아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사람처럼 소원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젊은 경찰이 방민아를 제압하더니 날카롭게 경고했다.“방민아 씨, 난동 그만 부리고 업무에 협조해 주세요. 첫 번째 경고에요.”무슨 일이 있으면 방씨 가문에서 대신 해결해 줬기에 방민아는 이런 상황에 놓인 적이 단
소원은 출동한 경찰이 나이가 젊고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어 남자인 줄 알았는데 목소리가 얇은 걸 봐서는 여자였다. 그래도 방민아의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경찰 번호는 3210921, 아가씨,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경찰서로 연행하고 있으니 협조 바랍니다.”방민아가 코웃음 쳤다.“적법하면 체포영장 내놔요. 신고한다고 다 잡아가지 말고.”“그건 조사에 협조하면 다 밝혀질 일이에요.”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방민아의 손을 뜯어내려는데 손이 닿기도 전에 방민아가 막무가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건드리지 마요. 집행하는 척하면서 성추행하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젊은 경찰은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출동하면서 막무가내로 체포에 불응하는 사람을 많이 보기도 했고 경찰이 서비스 업종도 아니었기에 범죄자의 체면을 봐주거나 범죄자가 하자는 대로 해줄 리가 없었다.젊은 경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저기요, 아줌마, 자중하세요. 이 장면은 보디캠으로 전부 기록하고 있어요. 게다가 전 여자고요. 제 옷을 잡고 놓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방민아 씨입니다. 전 그저 제 옷을 잡은 손을 떼어내려 했을 뿐이고요.”아줌마라는 호칭에 방민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서울에서 내놓으라 하는 가문의 여식으로 살아온 방민아를 보는 사람마다 아가씨로 존칭했는데 이 경찰은 난동 좀 부린 거 가지고 바로 아줌마라고 불렀다. 아줌마는 방민아 같은 나이에 쓰일만한 호칭이 아니라 40에서 50대는 되는 여자들을 부르는 말인데 말이다.“아줌마라니. 예의라는 게 없어요? 죽고 싶어요?”방민아가 발악하자 젊은 경찰은 구겨진 제복을 툭툭 털며 말했다.“내 말 틀렸나요? 방민아 씨 말대로라며 나도 아줌마한테 성추행당했다고 할 수 있잖아요.”약이 잔뜩 올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방민아를 보며 소원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방민아 씨, 경찰이 무슨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방씨 가문 도우미인 줄 알아요?”방민아는 이런 상황을 만든 소원을 보며 걷잡을 수
육경한이 가자 유진은 소원을 데리고 시터가 남긴 약 찌꺼기를 찾으러 갔지만 주방은 말끔히 청소한 상태였고 시터가 쓰던 방에서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소원은 시터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에 보디가드를 찾아가서야 시터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몇 마디 묻지도 못했는데 쓰러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다 마침 경찰서에서 사람이 나온 걸 보고 방민아와 같이 경찰에게 넘겼다고 말했다.‘정녕 그 약이 뭔지 알아낼 방법이 없는 걸까?’그때 유진이 말했다.“엄마, 약 봉투를 찍은 적이 있는데 그 봉투로 무슨 약인지 알 수도 있지 않을까요?”소원은 너무 기쁜 나머지 유진을 안고 뽀뽀했다.“유진이 정말 너무 대단한데? 큰 도움이 됐어.”유진이 고개를 숙이며 수줍어했다. 유진은 차갑던 예전과 달리 많이 밝아진 것 같은 소원이 너무 좋아 손을 꼭 잡은 채 용기 내어 물었다.“엄마, 혹시 유진이가 미운 건 아니죠? 유진이가 나쁜 이모 말 들은 건 나쁜 이모의 약점을 잡기 위해서예요.”소원이 유진의 볼을 어루만지며 웃었다.“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 똑똑한 유진이가 알아서 자기를 지켜냈으니 엄마는 너무 뿌듯한걸?”소원이 자기를 미워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소원은 유진의 호루라기에서 뺀 메모리칩을 핸드폰에 꽂아 넣었다. 용량이 생각보다 컸고 유진도 많은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시간까지 표기되어 있었는데 이것으로 아주머니가 시터의 박해를 받았다는 건 충분히 입증할 수 있지만 방민아가 이 일에 가담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영상이 아니라 사진이었기에 오디오가 없어 방민아가 시터와 서 있는 것만으로 이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고 우길 수는 없었다. 제일 안전한 방법은 시터가 직접 방민아가 사주한 일이라고 인정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으로써는 시터의 마음을 돌리기 매우 어려워 보였다.일단 급선무가 아주머니를 구하는 것이었기에 일단 다른 건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뒤로 넘기던 소원은 원하는 사진을 발견하고 핸드폰으로 육경한에게 보내줬다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