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알고 보니 그녀는 이전에 이 남자가 허리를 구부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착각한 것이 아니었다.그것은 그가 정말 아파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이었다.“주 비서님, 준혁 씨가 원지민 씨와 결혼한 것은 에단 찰스 쪽 사람들을 유인해 저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인가요?”“제 추측일 뿐이에요.”주훈은 바른대로 말했다.어쨌든 이준혁은 그의 계획을 알려주지 않았으니 주훈도 모를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이미 매우 명확해졌다. 오늘 대표님의 행동과 이후 손님들의 철수 계획을 보면 알 수 있었다.대표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심으로 결혼식을 올린 게 아니라 미끼만 던졌을 뿐이었다.“혜인 씨는 모르시겠지만 혜인 씨도 지금 에단의 사냥 명단에 있어요. 대표님이 이렇게까지 하려는 이유는 모두 혜인 씨를 위해서일 거예요.”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순간 그녀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전에 그녀는 이준혁의 의도를 의심한 적 있었다.가장 원하지 않던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지만 결국 피해갈 수 없었다.주훈은 말했다.“뒷걱정을 없애 드리기 위해서였어요. 대표님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한 것은 대표님이 없으면 혜인 씨가 업신여김을 받을지 두려워서였을 거예요.”주훈은 이준혁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니 당연히 공감할 것이다.대표님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윤혜인한테는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다니 그는 얼마나 억울했을가.그가 대신 억울해할 정도였다.지금 이 순간에 주훈은 이 남자에게 어떤 벌을 받을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만약 그가 돌아올 수 있다면 어떤 벌이든, 설령 그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눈이 멀게 해도 전부 달갑게 받을 것이다.대표님처럼 좋은 사람이라면 차마 그도 같이 목숨을 던지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대표님은 좋은 결과를 얻으셔야 한다.윤혜인의 핸드폰을 든 손은 그대로 굳어버렸다.어떻게...어떻게 이럴 수가!그녀는 분명히 믿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이준혁이라고 외쳤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아직 그녀와 연락할 수 없었다.이준혁의 휴대전화에도 위성 전화가 있었지만 에단 찰스 쪽의 교란기는 매우 선진적이어서 위성 전화마저 차단했다.다행히 이 교란기는 거리 제한이 있어 윤혜인과 연결됐다.윤혜인은 도지훈이 이미 밖에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놓였다.이때 휴대전화는 이미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바뀌었고 상대방은 자신을 소개했다.“윤혜인 씨, 안녕하세요. 일을 맡게 된 담당자예요. 저를 지휘관이라고 부르면 돼요.”“지휘관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하나요?”지휘관은 윤혜인의 총명함을 높이 평가하기에 말을 꺼냈다.“지금 안에 몇 명이 있는지, 다이너마이트 모델이 어떤 건지 알아야 해요. 이 임무는 매우 어렵지만 이곳은 글로벌 항구로 주변 주민과 직원이 너무 많아 당분간 대피할 수 없을 것이에요. 따라서 외부인이 사용한 다이너마이트가 어떤 모델로 제작됐는지 알아야 해요.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 파장이 어느 정도인지 추산할 수 있어야 더욱 효과적인 대피 작전을 할 수 있어요.”휴대전화에서 다시 소리가 끊기는 것을 보고 지휘관도 이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았다.만약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 다이너마이트가 미리 폭파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녀에게 이런 일을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그래도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어야 했다.지휘관은 말했다.“싫으면 거절하셔도 돼요. 저희가 알려준 장소로 가시면 저희 쪽에서 반드시 구출해 드릴게요...”지휘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혜인은 의연하게 대답했다.“받아들일게요.”그녀는 이 글로벌 항구가 금융 항구이고 인구가 밀집되어 있어 대피가 확실히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다이너마이트의 수량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무고한 민간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반드시 임무를 완수할게요.”“고마워요. 에단 찰스는 수년간 여러 일을 저지른 국제 범죄자예요. 이번에는 우리가 반드시 막고 체포할 거예요.”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저는 한국의 첩보원들을 믿어요.”“지금 CCTV를 보
그 당부를 들은 윤혜인 눈시울이 붉어지며 다시 촉촉해졌다.그녀는 분명히 그 당시 진실을 더욱 파헤칠 수 있었는데 물러서려고 했던 자신을 원망했다.왜 조금만 더 버틸 수 없었는지.만약 그녀가 한 발짝만 더 버텼다면 이 남자가 겪는 고충을 알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에 그렇게 많은 '만약'은 없었다.윤혜인은 눈물을 닦고 답장을 쓰려는데 문득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렸다.그녀는 즉시 경계하기 시작했다. 임신 후부터 그녀의 청각은 특히 예민해졌다.그녀는 주훈이 건물 안의 사람들이 모두 대피했다고 말한 것을 기억했다.남은 건 그저 원지민과 이준혁, 그리고 에단 찰스의 사람들뿐이었다.이 발걸음은 마치 영국의 앵클부츠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그것은 에단 찰스의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윤혜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이곳저곳을 둘러본 뒤 베란다로 나오니 옆방 베란다의 창문이 닫혀 있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두 방 사이의 거리는 네다섯 뽐 정도로 어른이라면 누구나 기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한시도 늦출 수 없어 윤혜인은 기어올랐지만 자신의 짐이 남아 있다는 생각에 다시 뒤돌아 모든 것을 트렁크에 넣었다.그리고 무거운 캐리어를 베란다로 밀고 나가 반대편으로 던졌다.그녀는 물건이 많지 않아 순조롭게 던졌다.다행히 베란다에 담요가 깔려 있어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윤혜인이 맞은 켠 방으로 기어들어 오자 발소리가 벌써 눈앞에 다가온 느낌이었다.그리고 소리가 울렸다.우당탕.소리와 함께 그녀가 방금 있던 문이 누군가에 의해 걷어차여 열렸다.윤혜인은 살금살금 여행 가방을 감추고 다시 자기가 숨을 곳이 있는지 사방을 살폈다.하지만 호텔 방은 모두 개방형으로 꾸며져 있어 숨을 곳이 전혀 없었다.그때 옆방에 있던 에단 찰스가 방에 누가 있는지 찾고 있었다.그는 방금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어서 원지민이 그를 속이는 줄 알았다.하지만 그는 바로 구겨진 침대 시트를 보고 눈치챘다. 이런 7성급 호텔의 방은 사람이 살지 않았다면 침대 시트에 약간의 주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에단 찰스는 멈칫했다.옷장에 어디 사람이 있는가.가지런히 개어 놓은 이불과 베개 두 개뿐이었다.“shit!”에단 찰스가 욕을 해버렸다.그는 가지런한 이불을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려 끄집어내어 땅바닥에 내려놓고 짓밟았다.밟으면서 계속 욕했다.“shit! shit! shit!”한바탕의 분노가 폭발한 후에야 그는 무전기를 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거기 있는 여자를 잘 봐. 내가 돌아가서 입을 베어버리겠어.”이 말을 마친 남자는 다시 한번 옷장 문을 세게 내리쳤다.쾅 하고 문이 바닥에 쓰러지면서 큰 소리가 났다.아무도 없을 때 그의 어두운 면은 더 이상 억압되지 않았고 남들의 앞에서 보였던 모든 우아함도 뒷전으로 밀렸다.에단 찰스는 거의 도적 떼가 방안을 어지럽힌 것처럼 망친 뒤 거울 앞으로 다가가 옷과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그리고 거울을 보며 이를 드러내 그 만의 트레이드마크 미소를 짓고 나서야 비로소 기분 좋게 방을 나왔다.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윤혜인은 옷장을 뚫고 나왔다.옆 방 8020호가 아니라 원래 있던 8019호 옷장에서 나왔다.다행히 그녀는 에단 찰스가 거의 들어올 때 머리를 굴려 베란다 창문으로 다시 올라왔다.8019호까지 다시 온 뒤 베란다 창문을 옷걸이로 걸어 잠갔다.그래서 에단 찰스는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부서진 문과 고요한 복도를 바라보던 그녀는 주위가 텅 빈 탓에 이상한 공포감을 느꼈다.방금 그녀가 옷장에 숨어서 옆 방의 벽을 부수고 뚫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호텔 방이 아무리 방음이 잘 되어도 에단 찰스가 이렇게 집을 허물듯 부수는 소리는 들리기 마련이다.다행히 그는 8019호에 다시 와서 이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틀림없이 발견되었을 것이다.윤혜인은 숨을 고르고 기운을 북돋아 주고 밖으로 나갔다.입구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1초 망설였다.그리고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 파이프에 엎드려 짧게 두드렸다.맞은편에서 못 들었을까 봐 그녀는 재빠르게 세 번을
지휘관은 부하들에게 그들의 은신처를 하나하나 조사하라고 명령하고 있었다.한 번에 공격하여 에단 찰스가 어디든 도망가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윤혜인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층의 맨 끝으로 가기 위해 잠복하면서 달려갔다.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신발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양말만 신은 채 뛰었다.지도를 따라 가장자리에 도착하자 윤혜인은 소화전 뒤편에서 작은 폭탄을 찾았다.윤혜인은 현실에서 실제 다이너마이트를 처음 보았다.생각보다 많이 달랐다.이 폭발 장치는 아주 초라하게 만들어져서 TV에서처럼 첨단적인 느낌이 들지 않았다.세 개의 다른 색상으로 만든 전기 알루미늄 와이어가 묶인 플라스틱 밀봉 상자의 형태였다.딱 봐도 후반에 더 작업하여 만든 것이었다.그렇지 않으면 한국의 총과 탄약에 대한 규제로는 에단 찰스가 다이너마이트를 직접 반입할 수 없었다.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다이너마이트의 사진 디테일을 모두 찍어 보냈다.그리고 몇 명이 있는지도 다 알려줬다.뒤에 몇 군데도 윤혜인은 조심스럽게 잠복해서 다이너마이트를 하나씩 모두 찍었다.다행히 에단 찰스는 감시카메라가 첩보원에 의해 해킹당할까 봐 감시카메라를 모두 부쉈다. 덕분에 윤혜인은 들키지 않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임무를 마친 후 윤혜인은 상대방의 회답을 기다렸다.곧바로 답장이 왔다.[B2F 주차장으로 가시면 돼요. 그곳에는 작은 문이 있어서 거기서 나올 수 있어요. 우리는 출구에서 혜인 씨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신중하고 조심해야 해요.]윤혜인은 머뭇거렸다.[그럼 이 다이너마이트들은 어떻게 처리해요?]에단 찰스가 지금 이렇게 날뛰는 이유는 다이너마이트 작동 버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다이너마이트라는 위협을 제거하고 첩보원 중 엘리트들을 지하로 침투시키면 승산은 훨씬 더 커질 수 있을 것이다.[그건 혜인 씨가 관여할 일이 아니에요.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안전하게 나오시면 돼요.]윤혜인은 으스스한 빌딩을 둘러보더니 지휘관님의 말도 맞다고
이때 휴대전화의 위성 신호는 이미 박약해졌다.딱 한 칸만 남았는데 드문드문 신호가 아예 없어지기도 했다.윤혜인은 지휘관과 다시 통화를 시도했지만 몇 차례나 신호음을 듣지도 못하고 나와버렸다.윤혜인은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가 마침내 신호가 되는 창가 옆을 찾았다.그러자 주훈의 전화가 걸려 왔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조급했다.“혜인 씨, 서두르지 마세요. 이쪽에서 아직 다른 출구를 찾고 있어요.”그는 줄곧 첩보원 부대에 있었다. 그리고 윤혜인이 금방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일한 출구가 나쁜 놈들에 의해 폭파될 줄은 몰랐다.이는 주훈이 윤혜인과 이준혁의 운명을 걱정하며 초조하게 만들었다.위험지대에 있는 윤혜인이 오히려 주훈보다 더 차분했다.그녀는 입을 열었다.“지휘관님에게 전화를 넘겨주세요. 제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혜인 씨, 무슨 일인가요?”윤혜인은 물었다.“자체 제작한 원격조종 다이너마이트는 원격조종을 담당하는 선만 빼도 터지지 않는 걸로 기억하는데. 맞나요?”윤혜인은 이런 걸 몰랐는데 어느 한번 아버지의 서재에서 비슷한 책을 본 적이 있었다.아버지는 군인을 좋아하여 평소 이런 책들을 즐겨 읽고 윤혜인에게 지식을 전수해 주기도 했다.그래서 그녀는 실제로 다이너마이트를 본 적은 없지만 다른 사람보다 서면으로 더 많이 접하고 이해했다.지휘관은 설명해 주었다.“이론적으로 원격 조종 다이너마이트는 특수성 때문에 그 안에 원격 조종을 담당하는 선을 한번 끊어버리면 원격 조종 다이너마이트는 더 이상 작동할 수 없어요.”“그렇다면 제가 방금 찍어 드린 영상 속에서 전문가들은 어떤 게 그 선인지 알 수 있을거예요.”“...”지휘관은 그녀의 의도를 알았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윤혜인은 말을 이었다.“지휘관님, 제가 가서 선을 다 잘라내고 지휘관님의 사람들을 창문으로 들어오게 하세요. 건물 전체에 인질이 저를 포함해서 3명밖에 없어요. 저들에게 들켰다고 하더라도 손에는 2명의 인질만 잡고 있기에 쉽게 죽일 수 없을 거예
감정을 숨기려고 했지만 입을 떼자마자 이미 목이 메었다.곽진명은 순식간에 윤혜인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나지막하고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혜인아, 무슨 일이야?”윤혜인은 재빨리 감정을 감추며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아니에요, 아빠. 방금 물 마시다가 사레 들렸어요.”“그래? 그럼 지금 그쪽에 도착한 거야?”곽진명이 물었다. 그는 비행기 경유에 대해서는 몰랐기 때문에 아직 윤혜인이 출장 중인 줄 알았다.“네, 아빠, 도착했어요.”멀리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자 감정이 북받쳐 오를 것 같아 윤혜인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아빠, 아빠가 아시는 분 중에 폭탄 해체하실 줄 아는 군인 한 분 계시죠?”윤혜인은 아버지가 해외에서 굉장히 친하게 지내던 군인이 있었고 그가 폭탄 해체 전문가였다는 걸 기억했다.그 군인은 해외에서 오랜 경험을 쌓으며 폭발물 처리 업무를 맡았었다.“아, 스미스 말이야? 왜, 그 사람한테 뭐 물어보려고?”“네.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제 친구 중에 감독인 강미연이라는 친구 있잖아요. 기억하시죠? 그 친구가 지금 영화 촬영 중인데 폭약 관련된 정보를 좀 알아봐야 해서요. 스미스 아저씨 연락처 좀 주실 수 있나요?”곽진명은 딸의 말을 신뢰했기에 대답했다.“아, 그럼. 내가 스미스한테 연락해서 너가 물어보면 다 알려주라고 할게.”“네, 고마워요, 아빠.”윤혜인은 또다시 목이 메였다.“바보 같은 녀석, 아빠한테 뭘 고맙다고 그래. 일할 때도 몸조심하고 건강도 잘 챙겨라. 아름이는 나랑 네 홍 아줌마가 잘 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네, 아빠도 건강 조심하시고요...”“알았다. 돌아오기 전에 네 오빠한테 미리 말해. 공항에 마중 나갈 거야.”“네, 아빠. 그럼 끊을게요.”전화를 끊자마자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윤혜인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랐다.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녀와 이준혁의 생존 확률은 각각 60%와 10%에 불과하다. 또 다른 가능성은 둘 다 폭약과 함께 목숨을 잃는 것이다.어느
손바닥에는 이미 땀이 잔뜩 차서 가위조차 제대로 쥐기 힘들었다.마침내 그녀는 노란 선을 향해 가위를 겨눴다. 눈을 꼭 감고 마음을 다잡으며 자르려던 순간, 갑작스럽게 뒤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뭐 하는 거야!”그리고 곧 이어서 들린 소리.“쾅!”맑은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나타나 가위를 그녀 손에서 낚아채 땅에 떨어뜨렸다.윤혜인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평소와 달리 단정하고 지적인 얼굴에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윤혜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내가 아니면 누가 있을 줄 알았어?”한구운이 불친절한 어조로 비아냥거렸다.윤혜인이 대답을 하지 않자 한구운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말해봐. 나 말고 누가 널 구해줄 수 있는데?”사실 그는 결혼식장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화가 나서 일찍 자리를 떠났었다. 그런데 차가 도중에 이르렀을 때 부하들이 여러 가지 수상한 상황을 보고했다.먼저 이천수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는 예상했던 일이었다.이준혁의 정체가 드러난 이상 이천수의 체포는 필연적이었다.이씨 집안의 자산을 탐하려 했던 데다 주진희까지 살해했으니 그 어떤 죄목도 피할 수 없었다.한구운은 이천수가 저지른 자잘한 실수들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천수가 자신을 대신해 다 뒤집어쓸 테니 말이다.최악의 경우 자신이 망한다 해도 이천수가 해외에 만들어놓은 광대한 사업체가 있으니 갈 곳이 없는 건 아니었다.이천수가 어떤 처벌을 받을지는 전혀 관심 없었다. 그는 쓸모없는 무능한 놈일 뿐 더 이상 신경 쓸 가치가 없었다.변호사나 하나 구해서 나머지는 알아서 하도록 놔두면 될 일이었다.하지만 이준혁이 모든 손님들을 대피시키고 호텔을 비웠다는 보고를 듣자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최근 일들을 떠올려보니 이준혁이 단순히 이천수와 한구운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 이상의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곧바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