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FTT가 너무 갑작스럽게 무너졌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노린 것처럼.“그러면… 이제 FTT의 위세가 예전 같지는 않겠네요.”저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그렇게 물었다.“네. 이제 FTT 그룹 전체의 가치가 우리 회사보다도 낮습니다.”양유진이 말을 이었다.“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어요. 최하준이 배상을 하지 않는다면 FTT의 명예는 땅바닥에 떨어질 테고 앞으로 누구도 FTT와 손잡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그렇다고 그 많은 금액을 다 배상하자면 자금이 동나겠죠. 그러면 앞으로 개발할 여력도 없을 테니 새 제품을 내놓지 않는다면 시장에서 도태될 테고요.”이제야 상황을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어쨌든 최하준이 걸어갈 길은 이제 절망의 길 한 줄기 뿐이었다.그 높던 위세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앞으로는 최하준이 우리를 협박할 수 없을 겁니다.”양유진이 갑자기 손을 뻗어 여름을 품에 안았다.“내 아내를 빼앗아 갔던 문제에 대해서는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습니다.”여름이 고개를 들었다. 양유진의 눈에 어린 증오심을 보고 흠칫했다.“유진 씨….”“복수를 안 했으면 하는 건 아니겠지요?”양유진이 고개를 숙여 복잡한 눈으로 여름을 바라보았다.“결혼식장에서 모두가 뻔히 보는 가운데 아내를 빼앗겼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름 씨도 섬에 갇혀서 고생을 엄청 했을 텐데, 이제 빚 갚을 때가 되었죠.”여름의 속눈썹이 살짝 아래로 내리깔렸다. 양유진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누가 그렇지 않겠는가?여름도 어제까지만 해도 최하준을 죽도록 증오했다. 하준이 모든 것을 잃었으면 좋겠다고 저주했었다.그런 막상 그런 순간이 오자 이게 기분이 좋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아무래도… 사실은… 그렇게 하준에게 보수하고 싶은 마음은 아닌지도 모른다.‘내가 왜 이럴까?이제는 최하준의 괴롭힘에 익숙해졌나? 내가 M성향이었을까?’여름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당황스러웠다.“그래서 어떻게 하
양유진의 말은 폭탄처럼 한 마디 한 마디가 여름이 머리를 때려왔다.‘그래.최하준은 범죄를 저질렀고 내가 원했던 일이 아니지.사람은 범죄를 저지르면 처벌받는 게 당연한 거야.그런데 왜 이렇게 모순적인 기분이 드는 거지?최하준이 감옥에 가고, FTT가 망해도 나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잖아.’“경찰에게 그런 이야기를 진술한다는 게 내키지 않는다는 건 알아요. 나도 이렇게 괴로운걸요.”양유진이 괴로운 듯 말했다.“하지만 장차 우리 둘이 함께 이겨 나가면 돼요. 나 양유진은 평생 당신을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을 겁니다.”양유진의 말을 들으니 여름은 더욱더 죄책감이 느껴졌다.양유진이 잘해줄수록 여름은 더 큰 돌덩어리가 심장을 내리누르는 것만 같았다.******5시간 뒤.헬기는 서경주의 집 잔디밭에 내렸다. 서경주와 하늘이가 기다리고 있었다.특히나 이렇게 오래도록 여름과 연락이 안 된 적이 없었던 하늘이는 마구 달려와 그대로 여름의 품 안에 안겼다.“엄마….”하늘은 있는 힘껏 여름을 껴안았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보고 싶었어요.”“하늘아, 엄마 걱정 많이 했지?”여름이 마음 아픈 듯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엄마는 괜찮아. 이제 돌아왔어. 앞으로 다시는 하늘이를 떠나는 일은 없을 거야.”“아빠가 너무 미워요.”하늘이 고개를 들었다. 두 눈에 미움이 그득했다.하늘은 하준이 엄마를 기절시켜 자신의 세계에서 데리고 나가던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하늘은 어른들이 뒤에서 여름이 최하준에게 납치되어 갔으니 양유진이 이혼을 요구할 것이라며 수군대는 이야기까지 들었었다.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그저 엄마가 소박한 행복을 느끼며 살기를 바랐을 뿐인데 모든 것을 아빠가 망쳐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여름은 아들 눈 속의 미움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하늘아….”여름의 입이 달싹거렸다. 자신은 하준을 증오하지만 그래도 아들이 자기 친아버지를 미워하지는 않기를 바랐다. 자신과 하준의 일로 아이들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설마… 최하준의 아이를 가진 건 아니지?”윤서가 갑자기 잔뜩 긴장해서 물었다.“아니야.”여름이 황당한 듯 답했다. 휴대 전화를 들고 발코니 쪽으로 걸어갔다.“하긴 했니?”윤서가 추궁을 이어 나갔다.“……”여름은 적잖이 당황했다.“진쯔 이를래? 다른 얘기나 흐자(진짜 이럴래? 다른 얘기나 하자).”“난 그런 애기가 재미있던데, 뭔가 찌릿찌릿하잖아?”윤서가 헤헤거렸다.“찌릿찌릿 같은 소리 하네.”여름이 참지 못하고 받아 쳤다.“아주 한 달 내내 밤낮으로 내 양심이 고통받았거든.”“뭘 그렇게 양심에 가책을 받아? 너도 어쩔 수 없었던 거잖아?”윤서가 위로했다.“네가 작정을 하고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닌데.”“그 입 다물어라.”‘바람’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거슬렸다.“알겠어.”윤서가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이제 앞으로 최하준이 널 어쩌지는 못할 거야.”여름은 입술을 축이며 복잡한 심경으로 물었다.“FTT 상황이 진짜로 그렇게 심각해?”“심각하지. 그런데 송영식 말로는 최하준이 계약했던 업체에 배상을 해줘야 한대. 배상을 안 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나 보더라. 다들 글로벌 그룹이라 소송할 비용 정도는 다들 있대.그렇다고 다 배상하자면 FTT 자금이 바닥날 거고. 뭐, 이제 최하준은 끝장이야. 어쩔 수 없지. 최양하가 배신을 해버려서.”“최양하가 배신했다고?”여름은 갑자기 머리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몰랐어?”윤서가 말을 이었다.“나도 오슬란 중역한테 들은 얘기긴 한데, 랜들에서 새로 출시한 신제품이 FTT 신제품을 베낀 거래. 완전 똑같다더라. 게다가 FTT 실험실에 내부 스파이가 있어서 모든 자료를 싹 다 지웠대. 그래서 랜들에서 표절했다고 말할 증거도 없다고 하더라고.아, 그리고 절묘하게도 랜들에서 신제품 아시아 사용권을 모두 추신에게 줬다지 뭐야?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추신이 일약 우리나라 최고의 그룹이 되어 버린 거야. 솔직히 추신이랑 랜들에서 손잡고 FTT 물 먹인 거지, 뭐.”여름은 완전히 깜짝 놀
여름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섬에서 나오게 된 것만 해도 큰일이었는데 너무 놀라운 뉴스가 마구 쏟아져 들어오니 다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그 집 어르신이 연세가 높으시긴 해도 여름도 만나본 적이 있지만 건강은 상당히 좋으신 편이셨다.최윤형은 예전에 동성에서 여름과 안 좋은 기억이 있기는 해도 화장실에서 발가벗겨진 이후로는 화해를 해서 그리 관계가 나쁘지 않았었다.심지어 처음 하준의 본가에 갔었을 때 최윤형이 도와주기도 했었는데 그런 큰일을 당하다니 충격적이었다.“그 집에서 경찰에 신고 안 했어?”여름이 그렇게 묻고 말았다.“신고는 무슨, 최윤형이 추익현이 와이프를 희롱하려고 했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 자기에 별장으로 잡아간 거라던데. 최하준이 도착했을 때는 너무 늦었대. 추익현이 돈뭉치를 던져주면서 치료비에 쓰라고 했대. 고소해도 그냥 돈이나 몇 푼 보상하고 끝나게 될 거라던데?뭐, 그런데 추신아고 FTT고 그까짓 돈이 문제겠니? 그러고 나서 유진 씨가 최하준이 납치했다고 경찰에 신고해서 최하준도 잡혀 들어간 거잖아. 최하준이 이제 자기 몸 하나도 어떻게 하지 못해서 이주혁이랑 송영식이 뒤에서 엄청 애쓴 끝에 겨우 보석으로 꺼냈대.”여름은 한참을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한 끝에야 겨우 입을 뗐다.“추신 정말 너무 하네. FTT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추신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건데.”“사람 욕심이라는 게 그렇게 한도 끝도 없는 거더라. 추동현은 그렇게 꽁꽁 자기 신분을 숨기고 있다가 드러내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이제 이용 가치가 떨어진 조강치저를 버리는 거더라. 아주 안중에도 없어.”임윤서가 한탄했다.“나도 최하준이 꼴 보기 싫어서 지금 그런 꼴이 된 게 고소하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무슨 일을 하려면 앞에서 정정당당하게 해야지 그렇게 뒤통수를 치고 그러는 거 좀 아니지 싶더라.”“나도 그렇게 생각해.”여름은 완전히 동감이었다.통화를 끝내자 여름은 바로 최양하에게 전화를 걸었다.한참을 울리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
최양하는 불콰한 얼굴로 웃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눈물까지 흘렸다.“우리 집? 우리 집이 어디야? 나한테 우리 집이 어디 있어”‘본가에서는 돌아오지 말라고 했고, 추신에는 아버지의 아들과 아내가 따로 있고.난 이제 어딜 가도 낄 수가 없어.’“일단 여기서 나가서 호텔을 좀 잡아주죠.”양유진이 최양하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 최양하는 뒷좌석에 먹은 것을 다 토해냈다. 차가 토사물 냄새로 가득했다.양유진의 차가 엉망이 되자 민망해진 여름은 얼른 창문을 열었다.“유진 씨, 정말 미안해요….”“당신은 내 아내예요. 사과할 것 없어요.”양유진이 나무라듯 여름을 흘끗 쳐다봤다.“솔직히 양하 씨는 전에 나랑 같이 여름 씨를 구해준 적이 있기 때문에 내가 많이 좋게 봤어요.”의아해진 여름이 물었다.“윤서에게 FTT 일을 좀 들었는데 유진 씨는 양하 씨가….”“어떤 일은 한 쪽 말만 들어서는 모르는 거예요. 최양하가 자료를 빼돌렸는지 아닌지는 최양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함께 지내봐야 판단할 수 있는 거죠.”양유진이 말을 끊더니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어쨌든 지금 여울이의 명목상 아버지인데, 이러나저러나 우리가 최양하를 본체만체할 수는 없죠.”여름은 매우 감동했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도 양유진은 여전히 현명해서 여울이 일까지도 마음에 담아주고 있었던 것이다.여름은 정말 양유진과의 결혼 생활을 잘 이끌어 보고 싶었다. 그런데 결혼식 날… 되돌이킬 수 없는 많은 일이 벌어져 버렸다.최양하를 어느 5성급 호텔에 눕혀놓고 여름은 양유진과 바로 나왔다.내일 오전에 양유진이 깨어나면 다시 찾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최양하와 여울이의 앞으로 거취도 논의해볼 생각이었다. 여울이가 너무 보고 싶기도 했다.양유진이 다시 차를 몰아 서경주의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9시가 넘어 있었다.서경주가 바로 부엌으로 들어가 두 사람이 먹을 분량을 데워 나왔다. 식사가 끝나자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자네도 오늘 여기서 묵고 가지 그러나?”여름은 움찔했다
양유진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물을 마시며 동공에 어리는 어둠을 감추었다.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양유진의 온화한 눈에는 아픔이 담겨 있었다.“여름 씨, 한 가지만 물어보죠. 여름 씨가 원해서 관계가 이루어졌나요?”“당연히 그건 아니죠.”여름이 단호히 답했다.“그러면 됐습니다.”양유진은 여름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전에 그런 질문을 본 적이 있어요. 아내가 납치되었다면 아내가 목숨을 걸고 반항하기를 원하는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고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가? 저는요, 두 번째를 골랐습니다. 아내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어요.”“유진 씨….”여름의 심장이 떨렸다.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난 반드시 상대의 첫 경험을 원하지는 않아요. 당신과 결혼할 때부터 그 점은 잘 알고 있었어요.”양유진이 말을 이었다.“결혼 당일에 최하준에게 끌려간 것으로 당신을 탓해서 뭐 해요? 다 내가 무능해서 벌어진 일인걸. 가족을 위해 경찰에 신고도 못 했잖아요. 그동안 내가 얼마나 전전긍긍했다고요. 당신이 돌아와서 내 무능을 탓할까 봐 두려웠어요.”“아니에요.”여름이 고개를 저었다.“그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나였어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최하준이 너무 비열했던 거예요.”“네. 너무 비열했죠. 당신을 강제로라도 취하면 구출해 내더라도 내가 당신을 싫어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나 양유진을 잘못 봤어요.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모든 것을 압도합니다. 당신이 돌아왔으니 그걸로 족합니다.”양유진의 눈에 고통이 넘쳤다.“왜 당신과 함께하기가 이렇게 어려운가요? 그 숱한 좌절을 겪으며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마침내 청혼을 받아주었는데 또 일이 벌어지고…. 정말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면 앞으로 제게 잘해주세요.”들을수록 감동적이었다.돌아오는 길에 양유진과 헤어져야겠다고 결심했는데 양유진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흔들렸다.양유진이 이렇게 깊은 마음을 보여주었는데 한사코 헤어지겠다고 한다면 도리어 상처를 주는 셈이었다. 게다가 최하준이 바라는
전수현이 두려운 척 목소리를 낮췄다.“사람들이 그러는데 그렇게 오래 최하준이랑 같이 있었는데 그 사람 아이라도 가진 거 아니냐고 하더라고요.”양유진의 검은 눈에 핏빛 한기가 돌았다. 전수현의 턱을 움켜쥐었다. 우아하던 얼굴이 일그러졌다.“너도 내 마음을 가지고 놀겠다는 거야?”전수현이 깜짝 놀라서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대, 대표님. 저는 그냥 있는 사실만 말씀드린 거예요.”“사실이긴 하지. 그러나 내 앞에 와서 떠들면 그건 이야기가 달라.”양유진이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냈다.전수현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이성적이고 침착하던 양유진이 이렇게 악마 같은 눈을 할 줄은 몰랐다.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비서로서 전수현은 양유진이 추신과 얼마나 밀접하게 협력하는지 보아 왔다. 양유진이 추동현과 마찬가지로 얼마나 예측 불허의 인물인지는 전수현이 가장 잘 알았다.“얌전히 시키는 일이나 잘해. 괜히 나한테 수작 부릴 생각하지 말고.”양유진이 전수현의 볼을 톡톡 두들겼다. “분수를 알고 지내면 내 아이를 가지게 해줄지도 모르지. 사모님이 자리를 줄 수는 없어도 평생 줄 수 있는 건 모두 주겠다.”“… 고마워요.”전수현은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사실 사모님 자리 따위 그리 원하지도 않았다. 양유진 그리고 양유진의 권력만 있으면 족했다.“그럼 오늘 밤 잘 해봐.”그러더니 양유진은 전수현을 안고 위로 올라갔다.양유진은 침대에서 한껏 난폭함을 드러냈다. 낮에 섬에서 여름을 보았을 때 양유진은 완전히 질투에 집어삼켜졌었다. 그러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외부적으로 양유진은 성인군자의 이미지로 알려져 있으니까. 그러나 여기서는 거짓된 모습으로 꾸미지 않아도 된다. 양유진은 자신의 모습을 한껏 드러냈다.******일을 치르고 나자 전수현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침대 한구석에 박혀있었다. 오늘 밤의 양유진은 신혼 첫날 밤처럼 무서웠다. 완전히 화풀이 대상이 된 듯했다.그러나 샤워를 하고 나오는 양유진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매력에 숨이
전성은 담담히 최양하를 바라보았다.“가지 않으시겠다면 살아남기 힘드실 겁니다.”최양하는 힘없이 피식 웃었다.‘뭐, 형님이 대충 넘어갈 리가 없지. 다 알고 있었잖아?’사실 최양하도 형과 이야기를 해보고 싶기는 했다. 회사 기밀을 빼돌렸다는 누명을 쓰고 영원히 살고 싶지는 않았다.곧 전성이 최양하를 데리고 지룡의 사당으로 갔다. 사당에는 최 씨 가문 조상의 위패가 놓여 있었다.하준은 한 켠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담담한 표정이었다.“모셔왔습니다.”전성이 최양하의 뒷무릎에 발길질을 했다.전혀 방비하지 못했던 최양하는 무릎을 꿇게 되었다. 일어서려고 했지만 전성이 어깨를 꾹 눌렀다.최양하는 오기에 하준을 노려보았다.“난 잘못한 거 하나도 없습니다. 자료를 빼돌리지도 않았다고. 보십시오, 추신에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아버지와는 관계는 완전히 끊겼다고요.”“관계는 끊었다지만 말끝마다 그래도 아버지라고 하는구나. 추동현에게 다른 여자와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속았다고 생각해서 안 따라간 거 아니고?”최하준이 최양하의 면전으로 다가와 싸늘한 말투로 물었다.최양하가 울분에 차서 답했다.“그렇게 멋대로 추측하지 마시죠. 진작부터 혼외 자식이 있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솔직히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자식이 있다는 걸 알고 나서는 FTT를 배신할 마음 같은 건 철저히 접었습니다. 형님은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그 사람은 저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본가에 가도 아무도 절 사람 취급도 안 한다고요. 저도 그 사람이 우리 어머니를 배신한 데는 이가 갈립니다.”“널 신경도 안 쓴다면서 왜 경찰서 잡혀갔을 때는 그렇게 후다닥 달려와서 보석을 해주었을까?”하준이 조롱하듯 물었다.“아, 대놓고 네 성도 바꾸겠다던데? 이제부터는 추양하라고 부를 거라고.”“저와 식구들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그런 겁니다.”최양하가 소리 질렀다.“그렇게 음험한 사람이라고요.”“그 자가 얼마나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