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준은 편견으로 가득찬 송영식을 보니 찬물이라도 부어서 정신을 차리게 해주고 싶었다.그러나 아마도 예전의 자신처럼 그래도 별 소용이 없지 싶은 생각도 들었다.누구의 말도 귀에 안 들어오는 마가 낀 상태였다.“자자, 기분도 좀 그런데 술이나 마시자.”이주혁이 송영식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송영식은 줄기차게 받아 먹더니 곧 취해서 소파에서 곯아 떨어졌다. 이주혁은 느릿하게 한숨을 쉬었다.“난 왜 지안이가 영식이를 위해주는 것 같지가 않고 오슬란을 잃으면 그냥 영식이를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나도 그렇게 생각해.”하준이 이상하다는 듯 주혁을 쳐다봤다.“전에는 너도 지안이를 철석같이 믿었었잖아?”“걔가 너무 그런 척을 잘 한 거지. 걔는 3년 전에 이미 변해있었는데 우리가 잘 몰랐던 것 같아.”이주혁이 하준을 흘끗 쳐다봤다.“어제 발표회에 넌 안 갔었지? 굉장했어. 임윤서랑 지안이가 똑같이 빨간 드레스를 입고 왔거든. 그래서 영식이가 임윤서를 끌고 가서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대.예전 같았으면 영식이가 그런 짓 할 애냐? 그날 하필이면 임윤서 드레스 발이 지안이보다 훨씬 좋아보였거든.”하준은 깜짝 놀랐다. 자기가 아는 영식이라면 이유 없이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게다가 송영식은 둔한 타입이라 누가 언질을 준 게 안라면 드레스 컬러가 어쩌고 하는 것은 눈치채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그렇게 생각해 보면 백지안이 그 점을 신경 썼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좋아하는 백지안이니 그녀의 기분이 어땠는지는 송영식이 신경썼을 것이다.“주혁아, 난… 걔랑 결혼 안 해서 정말 너무 다행이다.”하준이 한탄했다.“곽철규 일은 정말 지안이가 말한 게 전부였을까?”이주혁의 시선이 묘하게 변했다. 예전 같았으면 아마도 절대 아니라고 말했을 테지만 지금은….“모르지.”하준이 힘없이 피식 웃었다.“나도 영식이 비웃을 자격은 없어. 나도 전에는 완전히 지금의 영식이 같았잖아.”“나도 남 얘기할 상황은 아니었지.
第942章여름이 그대로 차를 가지고 들어가니 검은 세단이 자기 전용 주차공간에 세워져 있었다.차에 기댄 하준은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바지에 깔끔하게 들어가 있지 않은 모양을 보니 그간 좀 말라서인지 옷이 살짝 남아 있었다.“뭐 하러 왔어요? 이미 우리 사이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얘기했던 것 같은데?”여름이 문을 탕 닫으며 짜증스럽게 말했다.하준은 심장이 찌릿했다.이렇게 싸늘하게 자신을 대할 것이 두려워서 그간 한 번도 회사로 찾아온 적은 없었다.“할 얘기가 좀 있어서. 당신 친구 임윤서 씨 얘기인데….”“뭔데?”여름이 움찔했다.“여기서 말할까, 아니면 사무실로 올라갈까?”하준이 한 발짝 다가섰다.“…좋아.”여름이 미간을 찌푸렸다. 윤서와 관련된 이야기라니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사무실로 올라가자 여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말해보시지.”하준이 두리번거렸다.“손님 접대를 이렇게 하나? 커피도 없어?”“커피 마시러 왔으면 나가서 오른쪽으로 돌아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여름이 팔짱을 꼈다.“난 바쁜 사람이야. 한가하게 커피 같은 거 마시고 있을 시간 없어.”“거참 매정하네.”여름을 만나기 위해서 임윤서라는 핑계를 팔아야 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 너무나 씁쓸했다.“이사는 왜 했어?”“저는 임윤서 씨 이야기를 하려고 들어오시라고 했는데요.”여름이 싸늘하게 다시 말을 본론으로 돌렸다.“내가 그렇게 보기 싫어?”하준이 그윽한 눈으로 여름을 바라봤다.“당연한 거 아닌가? 보기만 해도 혐오스러운데.”여름은 눈가의 혐오를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명확하게 이야기 하지 않았나? 당신은 항상 이런 식이야. 자기가 괜찮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는 항상 날 깔보면서 사람을 죽도로 괴롭히지. 그런데 자기가 틀렸다는 걸 아는 순간 바로 찾아와서 용서하라고 요구하고.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젠 피곤해. 짜증난다고.”하준은 여름의 팩폭에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누구도 이렇게 대놓고 하준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여름은 경악했다.최하준 같은 자존심 강한 사람이 그런 보상방식을 생각했다는 것이 좀 의외였다.최하준의 눈에 육민관은 그저 일개 보디가드인데 자신의 손가락으로 보상을 하겠다니, 예전의 인간성으로 미루어 봤을 때는 거의 불가능한 생각이었다.여름이 아무 말 없는 것을 보고 하준의 눈에 결심이 떠올랐다.“날 용서해주기만 한다면 그렇게라도 보상하고 싶어.”하준은 자신의 손을 내밀며 눈을 크게 뜨고 열정적으로 여름을 바라보았다.‘그냥 손가락 하나인데 뭐. 없어도 여름이를 안아 주고 입 맞추는 데는 아무 이상이 없어.손가락을 잃는 고통쯤은 여름이가 날 미워하고 날 피하는 데서 오는 고통하고는 비교도 안 되지.’여름은 하준의 손을 흘끗 보았다. 예전에는 하준의 손가락이 그렇게 길고 예쁜지 몰랐었다.“됐어.”여름은 얼굴을 돌리더니 담담히 말을 이었다.“그래 봐야 민관이 손에 붙일 수 있는 것도 아닌데.”하준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심지어 눈은 반짝이기까지 했다.“자기야, 날 위해서 생각해 주는 거야?”“뭐래?”여름은 즉시 응수했다.“용서할 생각도 없고, 재결합할 생각도 없어. 아직도잘 모르시나 본데, 난 당신이랑 있는 시간이 고통스러웠어. 난 당신하고 살면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고. 난 당신 같은 사람이랑 다시 합칠 생각은 조금 도 없어.”그러더니 일어섰다.하준은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더니 무의식적으로 여름의 팔을 잡았다.“어디 가게?”“당신이 안 가겠다니까 내가 나가려고.”여름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응했다.하준의 목젖이 떨렸다. 여름을 잡은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가만히 여름을 들여다 보았다. 죄책감으로 가득하던 눈에 깊은 어두움이 드리워졌다. “아직 잘 모르나 본데 나랑 얽힌 이상 날 떠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웃기시네.”여름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하준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하준은 웃었다. 미워해도 좋고 화를 내도 좋으니 여름의 얼굴만 볼 수 있다면 그저 좋았다.길고 긴 인생에서 다른 것은 천천히
“맞아요.”여름이 나지막이 탄식했다.“어쨌든 지금은 최하준이 더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으니 강 대 강으로 부딪혀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어요.”양유진이 여름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곧 최하준이 모든 힘을 잃게 될 거라고 말해서 안심시키고 싶었다. 여름은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여름 씨, 저기…우리 혼인신고부터 합시다. 법적으로 부부가 되고 나면 최하준도 어쩌지 못할 겁니다.”“혼인신고요?”여름은 깜짝 놀랐다.막 청혼에 답한 참인데 이렇게 빨리 혼인신고라니,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지라 잠시 멍해졌다.“그래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랐나 보네요.”양유진이 미안한 듯 말했다.“어쩔 수 없었어요. 다시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거든요. 혼인신고를 하면서 결혼식도 동시에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결혼식은 동성에서 합시다. 난 누구처럼 혼인신고만 하고 제대로 된 식은 올려주지 않는 짓은 하지 않을 거예요.”“고마워요.”여름은 유진의 말을 들으니 의심이 풀리면서 불안도 날아갔다.이제 와서 더 망설일 이유도 없는 듯했다.더구나 양유진은 여름을 오래도록 기다려왔다. 이제 더는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좋아요. 그렇게 해요.”여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잘 됐네요. 바로 동성에서 예식 준비를 하도록 할게요. 너무 이목을 끌면 안 되니까 예식을 너무 성대하게 치르지는 못하겠지만 꼭 예쁘게 해줄게요. 그리고 양가 부모님들도 모시고. 아, 나중에 여울이랑 하늘이에게 화동을 부탁하죠.”흥이 오른 듯 양유진이 열심히 말했다.“좋아요.”여름이 머뭇거리며 끄덕였다.“하지만 유진 씨 부모님께서 제게 아이들이 있다는 걸 아시게 되면….”“벌써 다 아세요. 그래도 어쩔 수 없죠. 내가 여름 씨를 너무 좋아하니까요. 여름 씨 말고는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거든요. 그러니 부모님은 어쩔 수가 없죠.”양유진이 여름의 배를 흘끗 보고 말을 이었다.“쌍둥이를 낳는 사람이니 또 쌍둥이가
“길이 막히는 건지 네가 꾸물거리는 건지는 네가 가장 잘 알겠지.”송근영이 차갑게 말했다.“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되나 본데, 내가 오슬란을 상대하게 만들고, 윤서 네가 우리에게 불쾌한 얼굴 하게 만들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그러더니 송근영은 전화를 끊었다.룸으로 돌아오니 이제 아무도 송영식이 언제 오는지 묻는 사람이 없었다.10분이 지나자 송영식이 헐떡거리며 뛰어들어왔다.3km를 미친 듯이 뛰어 온지라 한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송윤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임 회장, 보셨습니까? 우리 애가 이렇게 진심이라니까요. 서두르느라고 있는 힘껏 뛰어온 모양입니다.”임용준은 송영식을 흘끗 쳐다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마뜩 찮은 모양이었다.송영식은 화려한 꽃무늬 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다.‘얼굴은 얄상하니 예쁘게 생겼다만 사내 녀석이 예쁘게 생긴 걸 어디에 써먹겠어?전에 윤상원이도 그랬지. 얼굴은 깨끗하고 반반하게 생겨서 품행은 엉망이었어. 우리 윤서에게는 왜 항상 저런 것들만 꼬이나, 그래.뭐 그래도 윤서가 진짜로 저 녀석이랑 결혼할 생각으 없는 것 같아 다행이지.’“영식아, 이쪽은 윤서네 부모님이시다.”송윤구가 소개했다.“인사드려야지.”“안녕하십니까?”송영식은 할 수 없이 인사를 하고는 앉았다.송신홍이 의자를 빼주었다.“형, 형수님 옆 에 앉아.”‘형수라….’송영식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윤서도 듣기에 불편했다.“그냥 이름으로 부르세요.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것 같은데.”“그러면 쓰나요? 예의는 차려야죠. 저보다 나이가 어리셔도 저보다 촌수가 위시니까 형수님이라고 불러야죠.”송신홍이 싱글거렸다.“형수, 우리 톡 친구 추가할까요?”윤서는 송영식보다 친화력이 있는 게 마음에 들어 휴대 전화를 내밀어 송신홍을 추가했다. 전유미가 바로 빙그레 웃었다.“얘, 나도 추가해주렴. 앞으로 자주 연락하자꾸나. 부모님이 동성에 계시니 앞으로 우리 집을 너희 집처럼 생각하고 오너라.”“네.”임윤서와 송영식의 식구들이 톡
“네.”송영식이 얌전히 답했다.송영식이 차를 가지러 간 동안 임용준이 한탄했다.“송영식이 성격이 좀 이상한 거 빼고는 저 집 식구들이 사람은 다들 좋구나. 그렇게 거들먹거리는 사람도 없고.”“맞아요. 진짜 그렇다니까.”임윤서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박희수도 안타까워했다.“난 그 동생 쪽이 마음에 들더라. 네 상대가 걔였으면 얼마나 좋겠니?”----곧 송영식이 차를 가지고 왔다.송영식은 윤서의 부모님과 거의 말을 섞지 않았다. 공항으로 가는 내내 윤서만 자기 부모님들과 조잘조잘 떠들 따름이었다.옆에서 들어보니 윤서네 식구들이 얼마나 윤서를 아끼는 지를 알 수 있었다. 집안 분위기도 좋아서 쿠베라 집안이라고 하면 어떻게든 친분이라도 맺으려고 드는 다른 집안과는 사뭇 달랐다.윤서의 부모님이 비행기를 타고 나자 윤서와 송영식만 남게 되었다.송영식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일단은 뭐 어쩔 수 없으니 약혼을 하기는 했지만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아, 아까 그 목걸이는 돌려주지.”“……”윤서는 경악하고 말았다. ‘송영식이 쓰레기인 건 익히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빨리 달라니까.”송영식이 윤서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역시 지안이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건 나중에 지안이에게 줘야 하는 거니까.”‘자기 어머니가 얼마나 자기 때문에 골치가 아플지는 알까?’“안 내놓으려는 건 아니겠지?”송영식이 윤서를 노려봤다.“그 루비 목걸이는 나처럼 고귀한 물건이니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이 목걸이는 값진 것이겠지.”임윤서가 일부러 목걸이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하지만 당신은? 웃기시네. 집안에서 뭐 발언권이 있기를 하나, 쿠베라의 후계자이기를 하나? 심지어 오스란도 내가 들어가지 않았으면 망하기 일보직전 아니었던가?”“뭐라고?”송영식은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졌다.‘내가 얼마나 능력자인데 날 이렇게 우습게 생각하다니…’“인간이 이래가지고 뭔
“헛소리!”윤서의 말을 듣고 있자니 송영식은 약간 불안해졌다.“난 팩트만 말한 건데.”그러더니 임윤서는 택시를 불렀다.“데려다 주지도 못하게 하나?”송영식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 나왔다.“아유, 고귀하신 분께 감히 그런 일을 시킬 수 있나요? 가다가 고속도로 한 가운데서 내리라 그러면 어떡해?”임윤서는 그대로 택시를 타고 떠나 버렸다.송영식은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왜 일이 자기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쿠베라의 주식 1/10정도면 상당히 매력적인 조건이니 임윤서가 꽤 질척거릴 줄 알았던 것이다.‘아, 잠깐. 사후 피임약을 먹으라고 한다는 걸 완전히 까먹고 있었잖아?’50분 뒤 임윤서는 택시에서 내리다가 아파트 단지 앞에 서 있는 송영식을 발견했다.“또 무슨 짓을 하시려고?”임윤서는 또 멍청이를 보게 되어 기분이 과히 좋지 않았다.“이거 먹으라고.”송영식이 사후피임약을 건넸다. “내 아이를 가지게 할 수는 없지.”임윤서는 찬물을 뒤집어 쓴 것 같았다.‘난 왜 이렇게 재수가 없다냐? 강상원에 이어서 송영식 같은 걸 만나고.’“걱정하지 마셔. 그날 바로 먹었으니까. 아주 일찍도 챙기시네.”윤서는 화를 내며 다가갔다.“당신 회사 발표회에서 누군가가 술에 탄 약을 먹었으니 난 피해자라고. 내가 오슬란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발표회도 안 했을 거고, 발표회가 아니면 그런 약을 먹을 일도 없었을 테니 내 첫경험을 당신 같은 사람과 나누지도 않았겠지. 당신이 날 안 좋아할 수는 있다지만 사람이 양심은 있어야지.”송영식은 윤서의 분노에 놀라서 흠칫 흠칫 뒤로 물러섰다.“다 당신 생각해서 그런 거지. 내가 당신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내 아이를 가지면 곤란할 거 아냐? 어쨌거나 애를 앞세워서 날 어쩌려고 하지는 말라고.”“걱정 붙들어 매셔. 이런 형편없는 유전자 받을 생각도 없으니까. 어쨌거나 당신 회사 발표회에서 당한 거니까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정도는 밝혀줬으면 하는데.”윤서가 송영식을 압박했다.송영식은 그게
第948章밤.비즈니스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하준은 어둠이 내린 발코니에서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어두운 눈으로 얇은 커튼 뒤의 화려한 파티를 바라보고 있었다.연회의 주최자가 오래도록 협력해온 업체가 아니었다면 오지도 않았을 터였다.이런 자리에 하준은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여름이랑 그 난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여름이가 이런 자리에 함께했을 텐데. 그러면 이런 자리도 그렇게 지루하진 않았을 텐데.’술을 마셨기 때문인지 하준의 뇌세포는 온통 날뛰고 있었다.‘보고 싶어. 여름이를 꼭 껴안고 키스하고 싶어.’이때 커튼 뒤에서 웬 남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 아까 스타우드 드레스샵 전화번호는 왜 물어봤어?”“진영의 양유진 때문에.”남자가 설명했다.“지난 번에 우리 결혼식에 왔을 때 당신이 입었던 드레스가 예쁘다고 전화번호를 알려달라잖아.”“남자가 드레스 샵 전화번호는 왜 물어봐? 여자 친구에게 드레스를 맞춰 주려나? 여자 친구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아니 근데, 스타우드는 웨딩드레스만 만든다고 얘기는 했어?”“했지. 결혼하냐고 물어봤더니 대답을 안 하더라고. 그런데 집안 사람이 동성에서 누굴 소개해 줬는데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그럼 정말 결혼하나 보네. 나중에 그 결혼식은 꼭 참석해.”“말은 했었는데 결혼식을 하게 되면 동성에서 할 거라면서 마음만 감사하게 받겠다잖아.”“……”‘양윤진이라고!’하준의 눈이 어두워졌다.누군가가 언급하지만 않았으면 거의 잊었을 이름이었다.‘그렇게 죽자 사자 여름을 따라다니면서 호시탐탐 노리더니 결혼을 한다고?하긴, 3년이나 지났는데 내내 여름이만 기다리고 있었을 리는 없지. 게다가 양유진은 나이도 들었으니 결혼하는 것도 이상할 거 없지.’그러나 묘하게도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하준은 짜증스럽게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여름이랑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9시. 조금 일찍 자리를 뜨려는데 마침 맞은 편에서 양유진이 걸어오고 있었다. 양유진은 기분이 좋은지 환한 웃음을 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