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소리!”윤서의 말을 듣고 있자니 송영식은 약간 불안해졌다.“난 팩트만 말한 건데.”그러더니 임윤서는 택시를 불렀다.“데려다 주지도 못하게 하나?”송영식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 나왔다.“아유, 고귀하신 분께 감히 그런 일을 시킬 수 있나요? 가다가 고속도로 한 가운데서 내리라 그러면 어떡해?”임윤서는 그대로 택시를 타고 떠나 버렸다.송영식은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왜 일이 자기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쿠베라의 주식 1/10정도면 상당히 매력적인 조건이니 임윤서가 꽤 질척거릴 줄 알았던 것이다.‘아, 잠깐. 사후 피임약을 먹으라고 한다는 걸 완전히 까먹고 있었잖아?’50분 뒤 임윤서는 택시에서 내리다가 아파트 단지 앞에 서 있는 송영식을 발견했다.“또 무슨 짓을 하시려고?”임윤서는 또 멍청이를 보게 되어 기분이 과히 좋지 않았다.“이거 먹으라고.”송영식이 사후피임약을 건넸다. “내 아이를 가지게 할 수는 없지.”임윤서는 찬물을 뒤집어 쓴 것 같았다.‘난 왜 이렇게 재수가 없다냐? 강상원에 이어서 송영식 같은 걸 만나고.’“걱정하지 마셔. 그날 바로 먹었으니까. 아주 일찍도 챙기시네.”윤서는 화를 내며 다가갔다.“당신 회사 발표회에서 누군가가 술에 탄 약을 먹었으니 난 피해자라고. 내가 오슬란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발표회도 안 했을 거고, 발표회가 아니면 그런 약을 먹을 일도 없었을 테니 내 첫경험을 당신 같은 사람과 나누지도 않았겠지. 당신이 날 안 좋아할 수는 있다지만 사람이 양심은 있어야지.”송영식은 윤서의 분노에 놀라서 흠칫 흠칫 뒤로 물러섰다.“다 당신 생각해서 그런 거지. 내가 당신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내 아이를 가지면 곤란할 거 아냐? 어쨌거나 애를 앞세워서 날 어쩌려고 하지는 말라고.”“걱정 붙들어 매셔. 이런 형편없는 유전자 받을 생각도 없으니까. 어쨌거나 당신 회사 발표회에서 당한 거니까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정도는 밝혀줬으면 하는데.”윤서가 송영식을 압박했다.송영식은 그게
第948章밤.비즈니스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하준은 어둠이 내린 발코니에서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어두운 눈으로 얇은 커튼 뒤의 화려한 파티를 바라보고 있었다.연회의 주최자가 오래도록 협력해온 업체가 아니었다면 오지도 않았을 터였다.이런 자리에 하준은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여름이랑 그 난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여름이가 이런 자리에 함께했을 텐데. 그러면 이런 자리도 그렇게 지루하진 않았을 텐데.’술을 마셨기 때문인지 하준의 뇌세포는 온통 날뛰고 있었다.‘보고 싶어. 여름이를 꼭 껴안고 키스하고 싶어.’이때 커튼 뒤에서 웬 남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 아까 스타우드 드레스샵 전화번호는 왜 물어봤어?”“진영의 양유진 때문에.”남자가 설명했다.“지난 번에 우리 결혼식에 왔을 때 당신이 입었던 드레스가 예쁘다고 전화번호를 알려달라잖아.”“남자가 드레스 샵 전화번호는 왜 물어봐? 여자 친구에게 드레스를 맞춰 주려나? 여자 친구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아니 근데, 스타우드는 웨딩드레스만 만든다고 얘기는 했어?”“했지. 결혼하냐고 물어봤더니 대답을 안 하더라고. 그런데 집안 사람이 동성에서 누굴 소개해 줬는데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그럼 정말 결혼하나 보네. 나중에 그 결혼식은 꼭 참석해.”“말은 했었는데 결혼식을 하게 되면 동성에서 할 거라면서 마음만 감사하게 받겠다잖아.”“……”‘양윤진이라고!’하준의 눈이 어두워졌다.누군가가 언급하지만 않았으면 거의 잊었을 이름이었다.‘그렇게 죽자 사자 여름을 따라다니면서 호시탐탐 노리더니 결혼을 한다고?하긴, 3년이나 지났는데 내내 여름이만 기다리고 있었을 리는 없지. 게다가 양유진은 나이도 들었으니 결혼하는 것도 이상할 거 없지.’그러나 묘하게도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하준은 짜증스럽게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여름이랑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9시. 조금 일찍 자리를 뜨려는데 마침 맞은 편에서 양유진이 걸어오고 있었다. 양유진은 기분이 좋은지 환한 웃음을 짓
별장 2층 창틀에 하늘이 풀쩍 뛰어 오르더니 밖을 살폈다.“엄마, 아빠가 또 대문 앞을 지키고 있어요.”며칠 동안 하준의 차는 매일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여름이 출근을 한 다음에야 그 자리를 떠나곤 했다.이제 여름은 그냥 그러려니 했다.“그냥 내버려 두고 우리 하늘이는 가서 자자.”여름은 하늘이를 안아 내리면서 커튼을 확 쳤다. 혹시라도 하준이 하늘이를 발견할까 봐 두려웠다.“엄마, 저러다가 엄마랑 유진이 아저씨가 결혼하는 거 알게 되면 어떡해요?”하늘이 걱정스럽게 물었다.“괜찮아. 회사에는 출장 간다고 말해 놨거든. 그리고 며칠 걸리지도 않을 거고.”여름이 하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혹시… 엄마가 결혼하는 거 신경 쓰이니?”“아뇨. 난 드디어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기뻐요.”하늘이 진지하게 말했다.“유진이 아저씨는 나랑 여울이한테도 잘 해주니까요. 만약에 아저씨가 엄마한테 나쁘게 하면 내가 혼내줄 거야. 나 이제 태권도도 아주 잘 해요 하늘이가 커서 엄청 힘이 세지면 이제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할 거예요.”“착하구나.”여름은 하늘의 이마에 입을 쪽 맞추었다.----다음날. 여름은 차를 타고 별장에서 나왔다.대문에서 나오더니 마치 하준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 그대로 차를 몰고 가버렸다.하준은 여름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마음이 괴로웠다.전에는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다가와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이제는 얼굴 볼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어쨌거나 여름이 출근을 했으니 하준도 계속 거기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밤이 되자 하준은 다시 벨레스 별장으로 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장춘자가 본가로 오라고 전화했다.본가에 도착했을 때는 6시였다. 여울이가 장춘자, 최대범과 식사 중이었다.집에 들어오는 하준의 모습을 보고 여울은 마음이 아파서 숟가락을 물었다.아직 어리긴 해도 아빠가 얼마나 말랐는지가 눈에 보였다. 바짝 깎던 머리도 좀 길어져 날카롭고 수려하던 모습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저녁
“…그래.”결국 하준은 허락했다.밤에 보모가 여울을 씻기자 하준이 데리고 가서 잤다.요즘 안 그래도 통 잠을 자지 못했는데 역시나 오늘도 잠이 오지 않았다.그런데 여울이도 뒤척이며 잠들지 못하는 게 아닌가.“저기요….”“어, 왜?”하준이 부드럽게 물었다.여울은 마음이 아팠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친아빠지만 엄마가 유진 아저씨와 결혼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유진이 아저씨도 좋지만 아빠가 너무 불쌍해.’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빠가 미웠지만 마음이 착한 여울은 결국 마음이 약해지고 말했던 것이다.“큰아빠, 다음 주에 아빠가…나랑 며칠 놀아준대요.”결국 여울은 참지 못하고 아빠에게 살짝 언질을 주기로 결심했다.“좋겠네. 맞아. 여울이랑 놀아주라고 큰아빠가 며칠 휴가를 줬지.”하준이 별 생각 없이 말했다.이를 어쩌나 싶었지만 여울은 조금 더 해보기로 했다“아빠 친구가 결혼한대요. 그래서 결혼식에 데려간대요. 사실은 놀러 가는 게 아니에요.”“응, 결혼식 가면 맛있는 것도 많이 먹겠구나.”하준이 낮은 소리로 읊조렸다.“……”여울은 한숨을 쉬었다.‘뭐, 난 최선을 다했어.’너무 확실하게 말을 하면 엄마와 하늘이가 화낼 게 뻔했다. 그리고 유진이 아저씨에게 미안할 짓을 하기도 싫었다.‘아빠, 이 다음부터는 아빠 몫이에요. 아빠가 눈치 ㄴ채지 못하면 어쩔 수 없어.’----이후로 며칠 동안 하준은 벨레스 별장과 회사만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했다.눈깜짝할 사이에 일주일이 흘렀다.오후가 되자 제대로 쉬지 못해서 그런지 머리가 지끈거렸다.비서가 오후 3시에 줌 회의가 있다고 말했을 때 짜증이 나서 화를 냈다.“왜 자꾸 날 찾아? 그런 일은 부회장에게 하라고 하면 되잖아?”“저, 회장님. 부회장님은 휴가를 내셨는데요.”하준은 흠칫했다. 갑자기 며칠 전에 여울이가 양하랑 같이 결혼식에 가기로 했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아, 알겠어.”다음날 저녁, 하준은 또 벨레스 별장으로 차를
상혁은 여름이 정말이지 사람을 잘도 속여 넘기는구나 싶어 혀를 내둘렀다.그러나 하준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여름이 환장하겠구나 싶기도 한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알아보겠습니다.”어쩔 수 없이 석주 쪽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러나 여름이 어느 호텔에 묵었는지 기록이 없었다.‘그쪽이 자기 집을 따로 가지고 계신 건가?’다시 공항 쪽에 전화를 넣어봤다. 역시나 여름이 석주로 간 비행 기록도 없었다. 그런데 여름과 윤서가 동성으로 간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갑자기 머리가 띵했다.‘대체 갑자기 동성은 왜 가신 걸까? 그러면서 외부에는 석주로 출장을 가신다고 말씀해 놓으시고. 우리 회장님에게 숨겨야 할 사정이 있는 건가?’상당히 그럴싸한 생각이었다.막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하준이 전화를 걸었다.“비행기 표는 샀나?”“아직입니다. 저…석주에 강 대표님의 숙박 기록이 나오질 않습니다. 아마도 개인 부동산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상혁은 순식간에 판단을 내렸다. 여름이 하준에게서 뭔가를 숨기려고 한다면 역시나 어울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안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화신 쪽에서 하는 말로는 이삼일이면 출장에서 돌아오신다고 하니까요. 아마도 내일이면 돌아오시지 않을까요?”“그러면 같이 돌아올 거야. 됐어. 전 당주에게 찾아보라고 하지.”하준은 전화를 끊더니 바로 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상혁보다는 지룡 쪽의 발이 더 넓은 편이니까.30분쯤 지나서 전성에게서 소식이 왔다.“회장님, 항편을 조사해 보니 강 대표님은 석주로 출장 가신 게 아니라 임윤서 씨와 동성으로 가셨습니다.”“동성을 왜 가지?”하준의 눈이 무거워졌다.“그런데 김 실장은 석주로 갔다고 하던데.”“회사 내부적으로는 석주로 출장 간다고 말씀하셨더군요. 그런데 실상은 그쪽으로 가시지 않은 겁니다.”전성이 말했다.“동성의 호텔에도 숙박하신 기록은 없습니다만 그쪽 출신이시니 옛날 집에 다시 들어가던지 했겠지요.”생각할수록 이상했다. ‘왜 윤
여름이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고 생각하자 하준은 완전히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보이지 않는 힘이 심장을 꽉 움켜쥐는 것처럼 너무나 아팠다.여름에 대한 감정이 상상 이상으로 강렬했던 것이다.모든 것을 깡그리 태워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여름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가는 길에 죽어라 여름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러나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한편 FTT 사무실.상혁은 하준이 급히 헬기를 부른 것을 알고 한참을 망설인 끝에 여름의 개인 휴대 전화로 연락했다.“김 실장님, 무슨 일이에요?”여름의 목소리가 들리자 상혁은 한숨이 나왔다.“강 대표님, 대체 몰래 동성에 가서 뭘 하시는 겁니까? 지금 회장님이 완전히 당황하셨어요. 지금 헬기까지 불러서 움직이려고 합니다.”“털썩!”옆에 있던 윤서가 손에 든 웨딩슈즈를 떨어트렸다.“저 오늘 결혼해요.”여름이 조그맣게 말했다.“네?”상혁은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아니, 누… 누구랑 결혼을 하십니까? 일언반구 없으셨잖아요?”꿈이 아닌가 싶어서 얼굴을 세게 꼬집어 보았다.“유진 씨랑요.”여름이 미소를 띠고 답했다.“나, 유진 씨, 최하준은 오랜 세월 서로 얽혀있었어요. 지난번 일로 유진 씨가 내게 제일 잘해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 마음을 소중히 여기고 싶어요. 하지만 최하준이 알까 봐 조용히 결혼식을 올리려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래도 최하준이 뭔가를 알아버린 것 같군요. 모른다고 여기 와서 조금만 알아보면 금방 들켜버리겠군요.”“……”이 빅뉴스에 대체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강 대표님, 정말이지… 그 큰일을 조용히도 벌이셨군요.”상혁이 쓴웃음을 지었다.“회장님께서 아시면 난리가 날 겁니다.”‘심지어 뭔가 아주 극단적인 일을 벌이시겠지.’앞으로 공포의 최하준을 상대할 생각을 하니 벌써 등줄기가 서늘한 것이 사표라도 던지고 싶었다.‘크흡….’“아무래도 회장님이 무조건 최고속도로 동성으로 향하실 것 같으니 2시간 반이
“진짜 너 불쌍해 죽겠다. 어쩌다가 하필 초특급 금수저를 건드려가지고.”윤서가 한숨을 쉬었다“떼어내지도 못하고. 저는 멋대로 널 버려도 남에게 버려지는 꼴은 참지 못하는 그런 놈을….”그런 소리를 들으니 울컥하고 원망이 올라왔다.소중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길 줄도 모르는 최하준이 너무나 미웠다.----오전 11시.양유진의 친지가 속속 도착했다. 다들 신부를 보러 왔다.여름은 높은 웨딩슈즈를 신고 일어났다. 양유진의 누나이자 한선우의 어머니인 양수영이 마침 눈에 들어왔다. 한선우도 서도윤과 함께 들어왔다.생각해보니 몇 년 동안 한선우를 본 적도 없었다. 여름이 동성을 떠날 때 한선우는 한주그룹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서도윤과 사귀더니 아직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오랜만이야.”한선우가 복잡한 심경으로 여름을 바라보았다.3년 못 본 사이에 여름은 매우 아름답게 변해있었다. 특히나 눈부시게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화사한 솜씨로 메이크 업까지 한 여름은 여신처럼 아름다웠다.어릴 때는 여름과 결혼하는 꿈을 수도 없이 꾸었는데 그 여름이 자기 삼촌과 결혼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아내 분이셔? 아름다우시네.”여름은 빙그레 웃으며 서도윤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안녕하세요, 외숙모님.”서도윤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자기 남편이 내내 마음에 두고 잊지 못하던 전 여친인 강여름이 양유진과 결혼을 하게 되니 여름에게 딱히 호감이 있지 않았지만 이제 악감정도 녹아내렸다.‘외숙모님’소리에 여름은 흠칫했다.강여경에게 ‘외숙모’소리를 듣고 싶었던 자신이 생각났다.‘쳇, 강여경이 한선우와 헤어질 줄은 몰랐지.’“어머, 얘가 새색시구나? 예쁘다.”양유진의 친척이 갑자기 양수영을 둘러싸고 떠들기 시작했다.양수영은 경멸하는 듯한 시선으로 여름을 내려다봤다.“예쁘기야 예쁘지. 중고라서 그렇지.”친척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아니, 유진이가 왜 돌싱을 데려와? 유진이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사업가인데. 저런 애는 너무 기울지 않나?”“뭐, 어쩔
한선우가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이 흙색이 되었다. 그러나 예전의 일을 떠올리고는 괴로운 듯 말했다.“그때는…여경이에게 속은 줄 몰랐어. 아, 그 뒤로 여경이 소식은 좀 있어?”여경의 이름을 듣고 여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3년 전에 다른 사람 얼굴로 성형을 하고 나타났었는데 그 뒤로 실종상태야. 배후에 뭔가 대단한 사람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는데.”한선우는 듣더니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다시는 안 나타났으면 좋겠다.”“누가 아니래.”윤서가 한숨을 쉬었다.“백지안 하나 상대하기도 골치 아픈데 강여경까지 나타나면 완전 골 때리지.”여름이 얼굴을 찌푸렸다. 늘 강여경은 백지안보다도 교활한 데다 언젠가는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이거 내 연락처야. 이제… 친척이니까.”한선우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명함을 내밀었다.“전에는 내가 잘못해서 상처 줘서 미안해. 나중에 우리 삼촌이 괴롭히거나 우리 어머니가 뭐라고 하면 언제든 연락해. 내가 아무리 무능해도 영원히 네 ‘선우 오빠’니까. 그리고 나중에 나도 서울로 올라가게 될 거야.”여름은 깜짝 놀랐다.“한주그룹이 서울로 진출하는 거야?”“아니, 내가 한주그룹에서 떠나.”한선우가 고개를 저었다.“진영은 지금 점점 몸집이 커지고 있어서 이제 의약업계 최고의 기업이 되었으니까. 어머니가 이제 삼촌 밑에 들어가서 일 배우래.”“그렇구나. 열심히 해 봐.”여름이 명함을 받아 들었다.한선우가 자리를 뜨자 윤서가 눈을 찡긋거렸다.“그렇게 선우 오빠네 외숙모가 되고 싶어 하더니 이제 외숙모도 되고 오빠가 너네 신랑 부하직원으로 들어오네?”“됐어. 언제적 얘기니?”여름이 피식 웃었다.곧 예식이 시작되었다.결혼행진곡에 맞추어 서경주가 여름의 손을 잡고 걸어가 양유진에게 다가갔다. 뒤에서는 여울과 하늘이 꽃바구니에서 꽃을 꺼내 뿌리며 걸었다.예식장은 크지 않았지만 대단히 예쁘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장식된 꽃들도 하나 같이 해외에서 실어 온 것들이었다.흩날리는 달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