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 별장을 떠난 뒤 송영식은 답답한 마음에 이주혁을 불러냈다.그런데 막상 가보니 최하준이 있었다. 굳은 얼굴에 위 아래로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마치 저승사자 같았다.“넌 왜 왔어?”송영식은 이제 최하준이 너무나 눈에 거슬렸다.느릿하게 미간을 찌푸리면서 하준이 송영식을 쳐다봤다. 이주혁이 얼른 끼어들었다.“너한테 무슨 일이 났다니까 걱정 돼서 왔지. 우리가 어려서부터 같이 컸는데 이제 와서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럴 일이냐?”“그게 보통 사람이냐? 지안이라고!”송영식이 쏘아붙였다.“최하준, 결국 지안이가 지금 저렇게 비참하게 된 것은 다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었으면 우리 집에서 그렇게 반대하지도 않았을 거야. 지안이가 얼마나 착한 애인지 알아? 내가 잘못을 했는데도 걔는 내가 잘 되기만 바라는 애라고.”“그래?”이주혁이 안경을 추어올리며 하준과 시선을 나누었다.“걔가 뭐라고 하는데?”하준이 궁금한 듯물 었다.송영식은 답답한 마음으로 식구들에게 당한 협박을 털어놓았다.“그런데도 지안이는 날 탁하기는커녕 내 회사만 걱정하더라. 내가 남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바라지 않는대. 날 위해서 우리 식구들에게 잘 보이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거야. 정말 마음씨가 얼마나 착하냐. 그런 애를 아껴줄 줄을 모르다니, 최하준, 이제는 후회가 되지? 흥,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 없어.”“……”하준의 눈썹이 꿈틀했다. 예전 같았으면 하준도 송영식과 비슷한 생각을 하며 함께 감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백지안에 대한 감정을 접은 상태라 차분하게 생각을 해보니 아무래도 송영식이 완전 멍청이로 보였다.송영식에게 아무 것도 없어지면 백지안이 아니라 누구라도 송영식과 결혼하고 싶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그러나 백지안은 그런 송영식이 마음에 안 들면서도 말할 때는 마치 송영식을 위해주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백지안의 무서운 점이었다.이제 송영식을 보고 있자니 예전의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전에는 백지안의 됨
하준은 편견으로 가득찬 송영식을 보니 찬물이라도 부어서 정신을 차리게 해주고 싶었다.그러나 아마도 예전의 자신처럼 그래도 별 소용이 없지 싶은 생각도 들었다.누구의 말도 귀에 안 들어오는 마가 낀 상태였다.“자자, 기분도 좀 그런데 술이나 마시자.”이주혁이 송영식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송영식은 줄기차게 받아 먹더니 곧 취해서 소파에서 곯아 떨어졌다. 이주혁은 느릿하게 한숨을 쉬었다.“난 왜 지안이가 영식이를 위해주는 것 같지가 않고 오슬란을 잃으면 그냥 영식이를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나도 그렇게 생각해.”하준이 이상하다는 듯 주혁을 쳐다봤다.“전에는 너도 지안이를 철석같이 믿었었잖아?”“걔가 너무 그런 척을 잘 한 거지. 걔는 3년 전에 이미 변해있었는데 우리가 잘 몰랐던 것 같아.”이주혁이 하준을 흘끗 쳐다봤다.“어제 발표회에 넌 안 갔었지? 굉장했어. 임윤서랑 지안이가 똑같이 빨간 드레스를 입고 왔거든. 그래서 영식이가 임윤서를 끌고 가서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대.예전 같았으면 영식이가 그런 짓 할 애냐? 그날 하필이면 임윤서 드레스 발이 지안이보다 훨씬 좋아보였거든.”하준은 깜짝 놀랐다. 자기가 아는 영식이라면 이유 없이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게다가 송영식은 둔한 타입이라 누가 언질을 준 게 안라면 드레스 컬러가 어쩌고 하는 것은 눈치채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그렇게 생각해 보면 백지안이 그 점을 신경 썼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좋아하는 백지안이니 그녀의 기분이 어땠는지는 송영식이 신경썼을 것이다.“주혁아, 난… 걔랑 결혼 안 해서 정말 너무 다행이다.”하준이 한탄했다.“곽철규 일은 정말 지안이가 말한 게 전부였을까?”이주혁의 시선이 묘하게 변했다. 예전 같았으면 아마도 절대 아니라고 말했을 테지만 지금은….“모르지.”하준이 힘없이 피식 웃었다.“나도 영식이 비웃을 자격은 없어. 나도 전에는 완전히 지금의 영식이 같았잖아.”“나도 남 얘기할 상황은 아니었지.
第942章여름이 그대로 차를 가지고 들어가니 검은 세단이 자기 전용 주차공간에 세워져 있었다.차에 기댄 하준은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바지에 깔끔하게 들어가 있지 않은 모양을 보니 그간 좀 말라서인지 옷이 살짝 남아 있었다.“뭐 하러 왔어요? 이미 우리 사이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얘기했던 것 같은데?”여름이 문을 탕 닫으며 짜증스럽게 말했다.하준은 심장이 찌릿했다.이렇게 싸늘하게 자신을 대할 것이 두려워서 그간 한 번도 회사로 찾아온 적은 없었다.“할 얘기가 좀 있어서. 당신 친구 임윤서 씨 얘기인데….”“뭔데?”여름이 움찔했다.“여기서 말할까, 아니면 사무실로 올라갈까?”하준이 한 발짝 다가섰다.“…좋아.”여름이 미간을 찌푸렸다. 윤서와 관련된 이야기라니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사무실로 올라가자 여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말해보시지.”하준이 두리번거렸다.“손님 접대를 이렇게 하나? 커피도 없어?”“커피 마시러 왔으면 나가서 오른쪽으로 돌아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여름이 팔짱을 꼈다.“난 바쁜 사람이야. 한가하게 커피 같은 거 마시고 있을 시간 없어.”“거참 매정하네.”여름을 만나기 위해서 임윤서라는 핑계를 팔아야 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 너무나 씁쓸했다.“이사는 왜 했어?”“저는 임윤서 씨 이야기를 하려고 들어오시라고 했는데요.”여름이 싸늘하게 다시 말을 본론으로 돌렸다.“내가 그렇게 보기 싫어?”하준이 그윽한 눈으로 여름을 바라봤다.“당연한 거 아닌가? 보기만 해도 혐오스러운데.”여름은 눈가의 혐오를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명확하게 이야기 하지 않았나? 당신은 항상 이런 식이야. 자기가 괜찮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는 항상 날 깔보면서 사람을 죽도로 괴롭히지. 그런데 자기가 틀렸다는 걸 아는 순간 바로 찾아와서 용서하라고 요구하고.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젠 피곤해. 짜증난다고.”하준은 여름의 팩폭에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누구도 이렇게 대놓고 하준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여름은 경악했다.최하준 같은 자존심 강한 사람이 그런 보상방식을 생각했다는 것이 좀 의외였다.최하준의 눈에 육민관은 그저 일개 보디가드인데 자신의 손가락으로 보상을 하겠다니, 예전의 인간성으로 미루어 봤을 때는 거의 불가능한 생각이었다.여름이 아무 말 없는 것을 보고 하준의 눈에 결심이 떠올랐다.“날 용서해주기만 한다면 그렇게라도 보상하고 싶어.”하준은 자신의 손을 내밀며 눈을 크게 뜨고 열정적으로 여름을 바라보았다.‘그냥 손가락 하나인데 뭐. 없어도 여름이를 안아 주고 입 맞추는 데는 아무 이상이 없어.손가락을 잃는 고통쯤은 여름이가 날 미워하고 날 피하는 데서 오는 고통하고는 비교도 안 되지.’여름은 하준의 손을 흘끗 보았다. 예전에는 하준의 손가락이 그렇게 길고 예쁜지 몰랐었다.“됐어.”여름은 얼굴을 돌리더니 담담히 말을 이었다.“그래 봐야 민관이 손에 붙일 수 있는 것도 아닌데.”하준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심지어 눈은 반짝이기까지 했다.“자기야, 날 위해서 생각해 주는 거야?”“뭐래?”여름은 즉시 응수했다.“용서할 생각도 없고, 재결합할 생각도 없어. 아직도잘 모르시나 본데, 난 당신이랑 있는 시간이 고통스러웠어. 난 당신하고 살면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고. 난 당신 같은 사람이랑 다시 합칠 생각은 조금 도 없어.”그러더니 일어섰다.하준은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더니 무의식적으로 여름의 팔을 잡았다.“어디 가게?”“당신이 안 가겠다니까 내가 나가려고.”여름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응했다.하준의 목젖이 떨렸다. 여름을 잡은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가만히 여름을 들여다 보았다. 죄책감으로 가득하던 눈에 깊은 어두움이 드리워졌다. “아직 잘 모르나 본데 나랑 얽힌 이상 날 떠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웃기시네.”여름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하준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하준은 웃었다. 미워해도 좋고 화를 내도 좋으니 여름의 얼굴만 볼 수 있다면 그저 좋았다.길고 긴 인생에서 다른 것은 천천히
“맞아요.”여름이 나지막이 탄식했다.“어쨌든 지금은 최하준이 더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으니 강 대 강으로 부딪혀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어요.”양유진이 여름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곧 최하준이 모든 힘을 잃게 될 거라고 말해서 안심시키고 싶었다. 여름은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여름 씨, 저기…우리 혼인신고부터 합시다. 법적으로 부부가 되고 나면 최하준도 어쩌지 못할 겁니다.”“혼인신고요?”여름은 깜짝 놀랐다.막 청혼에 답한 참인데 이렇게 빨리 혼인신고라니,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지라 잠시 멍해졌다.“그래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랐나 보네요.”양유진이 미안한 듯 말했다.“어쩔 수 없었어요. 다시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거든요. 혼인신고를 하면서 결혼식도 동시에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결혼식은 동성에서 합시다. 난 누구처럼 혼인신고만 하고 제대로 된 식은 올려주지 않는 짓은 하지 않을 거예요.”“고마워요.”여름은 유진의 말을 들으니 의심이 풀리면서 불안도 날아갔다.이제 와서 더 망설일 이유도 없는 듯했다.더구나 양유진은 여름을 오래도록 기다려왔다. 이제 더는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좋아요. 그렇게 해요.”여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잘 됐네요. 바로 동성에서 예식 준비를 하도록 할게요. 너무 이목을 끌면 안 되니까 예식을 너무 성대하게 치르지는 못하겠지만 꼭 예쁘게 해줄게요. 그리고 양가 부모님들도 모시고. 아, 나중에 여울이랑 하늘이에게 화동을 부탁하죠.”흥이 오른 듯 양유진이 열심히 말했다.“좋아요.”여름이 머뭇거리며 끄덕였다.“하지만 유진 씨 부모님께서 제게 아이들이 있다는 걸 아시게 되면….”“벌써 다 아세요. 그래도 어쩔 수 없죠. 내가 여름 씨를 너무 좋아하니까요. 여름 씨 말고는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거든요. 그러니 부모님은 어쩔 수가 없죠.”양유진이 여름의 배를 흘끗 보고 말을 이었다.“쌍둥이를 낳는 사람이니 또 쌍둥이가
“길이 막히는 건지 네가 꾸물거리는 건지는 네가 가장 잘 알겠지.”송근영이 차갑게 말했다.“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되나 본데, 내가 오슬란을 상대하게 만들고, 윤서 네가 우리에게 불쾌한 얼굴 하게 만들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그러더니 송근영은 전화를 끊었다.룸으로 돌아오니 이제 아무도 송영식이 언제 오는지 묻는 사람이 없었다.10분이 지나자 송영식이 헐떡거리며 뛰어들어왔다.3km를 미친 듯이 뛰어 온지라 한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송윤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임 회장, 보셨습니까? 우리 애가 이렇게 진심이라니까요. 서두르느라고 있는 힘껏 뛰어온 모양입니다.”임용준은 송영식을 흘끗 쳐다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마뜩 찮은 모양이었다.송영식은 화려한 꽃무늬 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다.‘얼굴은 얄상하니 예쁘게 생겼다만 사내 녀석이 예쁘게 생긴 걸 어디에 써먹겠어?전에 윤상원이도 그랬지. 얼굴은 깨끗하고 반반하게 생겨서 품행은 엉망이었어. 우리 윤서에게는 왜 항상 저런 것들만 꼬이나, 그래.뭐 그래도 윤서가 진짜로 저 녀석이랑 결혼할 생각으 없는 것 같아 다행이지.’“영식아, 이쪽은 윤서네 부모님이시다.”송윤구가 소개했다.“인사드려야지.”“안녕하십니까?”송영식은 할 수 없이 인사를 하고는 앉았다.송신홍이 의자를 빼주었다.“형, 형수님 옆 에 앉아.”‘형수라….’송영식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윤서도 듣기에 불편했다.“그냥 이름으로 부르세요.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것 같은데.”“그러면 쓰나요? 예의는 차려야죠. 저보다 나이가 어리셔도 저보다 촌수가 위시니까 형수님이라고 불러야죠.”송신홍이 싱글거렸다.“형수, 우리 톡 친구 추가할까요?”윤서는 송영식보다 친화력이 있는 게 마음에 들어 휴대 전화를 내밀어 송신홍을 추가했다. 전유미가 바로 빙그레 웃었다.“얘, 나도 추가해주렴. 앞으로 자주 연락하자꾸나. 부모님이 동성에 계시니 앞으로 우리 집을 너희 집처럼 생각하고 오너라.”“네.”임윤서와 송영식의 식구들이 톡
“네.”송영식이 얌전히 답했다.송영식이 차를 가지러 간 동안 임용준이 한탄했다.“송영식이 성격이 좀 이상한 거 빼고는 저 집 식구들이 사람은 다들 좋구나. 그렇게 거들먹거리는 사람도 없고.”“맞아요. 진짜 그렇다니까.”임윤서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박희수도 안타까워했다.“난 그 동생 쪽이 마음에 들더라. 네 상대가 걔였으면 얼마나 좋겠니?”----곧 송영식이 차를 가지고 왔다.송영식은 윤서의 부모님과 거의 말을 섞지 않았다. 공항으로 가는 내내 윤서만 자기 부모님들과 조잘조잘 떠들 따름이었다.옆에서 들어보니 윤서네 식구들이 얼마나 윤서를 아끼는 지를 알 수 있었다. 집안 분위기도 좋아서 쿠베라 집안이라고 하면 어떻게든 친분이라도 맺으려고 드는 다른 집안과는 사뭇 달랐다.윤서의 부모님이 비행기를 타고 나자 윤서와 송영식만 남게 되었다.송영식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일단은 뭐 어쩔 수 없으니 약혼을 하기는 했지만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아, 아까 그 목걸이는 돌려주지.”“……”윤서는 경악하고 말았다. ‘송영식이 쓰레기인 건 익히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빨리 달라니까.”송영식이 윤서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역시 지안이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건 나중에 지안이에게 줘야 하는 거니까.”‘자기 어머니가 얼마나 자기 때문에 골치가 아플지는 알까?’“안 내놓으려는 건 아니겠지?”송영식이 윤서를 노려봤다.“그 루비 목걸이는 나처럼 고귀한 물건이니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이 목걸이는 값진 것이겠지.”임윤서가 일부러 목걸이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하지만 당신은? 웃기시네. 집안에서 뭐 발언권이 있기를 하나, 쿠베라의 후계자이기를 하나? 심지어 오스란도 내가 들어가지 않았으면 망하기 일보직전 아니었던가?”“뭐라고?”송영식은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졌다.‘내가 얼마나 능력자인데 날 이렇게 우습게 생각하다니…’“인간이 이래가지고 뭔
“헛소리!”윤서의 말을 듣고 있자니 송영식은 약간 불안해졌다.“난 팩트만 말한 건데.”그러더니 임윤서는 택시를 불렀다.“데려다 주지도 못하게 하나?”송영식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 나왔다.“아유, 고귀하신 분께 감히 그런 일을 시킬 수 있나요? 가다가 고속도로 한 가운데서 내리라 그러면 어떡해?”임윤서는 그대로 택시를 타고 떠나 버렸다.송영식은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왜 일이 자기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쿠베라의 주식 1/10정도면 상당히 매력적인 조건이니 임윤서가 꽤 질척거릴 줄 알았던 것이다.‘아, 잠깐. 사후 피임약을 먹으라고 한다는 걸 완전히 까먹고 있었잖아?’50분 뒤 임윤서는 택시에서 내리다가 아파트 단지 앞에 서 있는 송영식을 발견했다.“또 무슨 짓을 하시려고?”임윤서는 또 멍청이를 보게 되어 기분이 과히 좋지 않았다.“이거 먹으라고.”송영식이 사후피임약을 건넸다. “내 아이를 가지게 할 수는 없지.”임윤서는 찬물을 뒤집어 쓴 것 같았다.‘난 왜 이렇게 재수가 없다냐? 강상원에 이어서 송영식 같은 걸 만나고.’“걱정하지 마셔. 그날 바로 먹었으니까. 아주 일찍도 챙기시네.”윤서는 화를 내며 다가갔다.“당신 회사 발표회에서 누군가가 술에 탄 약을 먹었으니 난 피해자라고. 내가 오슬란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발표회도 안 했을 거고, 발표회가 아니면 그런 약을 먹을 일도 없었을 테니 내 첫경험을 당신 같은 사람과 나누지도 않았겠지. 당신이 날 안 좋아할 수는 있다지만 사람이 양심은 있어야지.”송영식은 윤서의 분노에 놀라서 흠칫 흠칫 뒤로 물러섰다.“다 당신 생각해서 그런 거지. 내가 당신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내 아이를 가지면 곤란할 거 아냐? 어쨌거나 애를 앞세워서 날 어쩌려고 하지는 말라고.”“걱정 붙들어 매셔. 이런 형편없는 유전자 받을 생각도 없으니까. 어쨌거나 당신 회사 발표회에서 당한 거니까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정도는 밝혀줬으면 하는데.”윤서가 송영식을 압박했다.송영식은 그게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