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한 기분에 휩싸여 있는 중에 휴대 전화에 갑자기 송우재의 번호가 떴다.송영식은 놀란 나머지 휴대 전화를 놓칠 뻔했다. 이제는 식구들에게 전화가 오면 염라대왕이 목숨을 받으러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전화가 멈추더니 곧 계속해서 다시 울렸다.받는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할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마라, 이 녀석아! 내가 한 말을 콧등 방귀로도 안 듣다니! 네 녀석을 내보내는 게 아니었어!”송우재는 혈압이 마구 올랐다.“풀어주자 마자 가서 청혼을 해! 당장 들어오거라!”“할아버지, 지안이는 정말 불쌍한 애예요. 이럴 때일수록 제가 나서서 보호해 줘야 해요. 왜 그렇게 다들 눈에 색안경을 끼고 지안이를 보시는 거예요.”송영식이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강여름은 남이잖아요. 걔가 하는 말을 다 믿어주시면서 왜 친손자인 제가 하는 말은 안 들으세요. 지안이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도 제가 모르게어요?”“시끄럽다, 이 멍청한 녀석!”송우재는 불같이 화를 냈다.“어디 백지안이를 데려오기만 해 봐. 평생 우리 집안에서는 쫓겨날 줄 알아라!”“죄송합니다. 하지만 지안이랑 결혼은 꼭 해야겠어요.”송영식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송우재는 버럭버럭 화를 내며 전화기를 집어 던져버렸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혈압이 올라 쓰러질 지경이었다.“아버지, 좀 진정하세요.”송윤구가 급히 와서 진정을 시키려고 했다.“너도 저리 가라! 대체 아들 녀석을 어찌 키운 게야? 이건 뭐 날 열 받게 하려고 작정을 한 게 아니냐!”송우재가 성질을 부렸다.송윤구가 한숨을 쉬었다.‘영식이가 어렸을 때는 장손이 태어났다며 금이야, 옥이야 그렇게 물고 빨고 하시더니 그건 아 잊으셨나 보네.’“가서 근영이나 데려오너라.”곧 송근영이 왔다.송우재가 말했다.“임무를 하나 주겠다. 무슨 수를 쓰던 영식이가 백지안이를 우리 집에 들여오지 못하도록 해라.”“……”송근영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 말을 듣고 자신인대체 기쁜 건지 슬픈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최하준을 놓치고 나서 바로 내년에 대통령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집안의 송영식을 잡았으니 부러움을 살만도 했다.“송영식이 그렇게 목을 멘다 싶었더니 예쁘긴 예쁘네.”“누가 아니래. 드레스 입은 걸 보니 몸매도 아주 모델이네.”“……”소곤소곤 들려오는 부러움의 말을 듣자니 백지안은 저도 모르게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최하준이 없으면 어때?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존재라고.’시아도 은근히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백지안이 하준에게 차였을 때 슬쩍 무시하는 마음이 들었었는데….‘쟤는 진짜 보통이 아니네. 하긴 그러니 강여름을 그렇게 바짝 누를 수 있었겠지?’이주혁만이 미간을 찌푸리며 지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백지안이 들어올 때 아주 찰나이긴 했지만 백지안의 눈에서 의기양양한 빛이 스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순식간에 사라지긴 했지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십수 년 동안 하준이를 사랑했고, 실연을 당했을 때는 자살소동을 벌일 정도였는데 며칠도 지나지 않아서 영식이랑 이렇게 좋아진다고?’불현듯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우리는 진짜 지안이를 잘 모르는지도 몰라.지금의 지안이는 예전의 지안이가 아닌 거야.그런데…”꿀이 뚝뚝 떨어질 듯한 눈을 하고 벙실벙실 웃고 있는 송영식을 보니 그저 한숨이 나왔다.‘뭐, 영식이만 좋으면 된 건가. 마침내 소원을 이뤘잖아.’“지안아…”송영식은 벌떡 일어나 가서 백지안의 손을 잡았다.“아유, 이러지 마. 사람들 보잖아. 난 너무 부끄러워서.”백지안이 민망한 듯했다. 특히나 이주혁과 눈이 마주치자 더욱 그런 눈치였다.“주혁이도 왔었구나….”백지안은 뭔가 말을 하려다 마는 것처럼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하준이는 안 불렀어.”송영식이 백지안의 마음을 읽은 듯 얼른 답했다.“그러면 되나….”백지안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네 친구잖아. 주혁이는 부르면서 준은 안 부르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하준이가 너에게 그렇게 큰 상처를 주었는데도 넌 우리를 위해서 생각해
‘강여름하고 임윤서는 무슨 운명이 정해준 천적이냐고! 어째서 어딜 가도 나타나서 이렇게 방해를 하는 거야?’이 와중에 완전히 임윤서에게 고정된 백윤택이 시선에서는 탐욕을 숨길 수가 없었다.“오늘은 내가 꼭 쟤를 내 여자로 만들어야겠어.”백윤택은 백지안의 귀에 속삭였다.“임윤서는 어떻게 보면 볼수록 예뻐지냐? 오늘은 어떻게든 해봐야겠다.”“그래, 응원할게. 마침 기자들도 많이 와 있으니 이 기회를 이용해서 아주 오빠 여자라고 공개적으로 알려버려. 조심하고.”백지안은 심호흡을 했다. 이 분을 풀고 싶었다. 나중에 임윤서가 백윤태과 결혼하게 되면 괴롭힐 기회는 두고두고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래그래.”백윤택은 간사하게 끄덕였다.무대에서 윤서는 사람들에게 신제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안녕하십니까? 저는 신제품 책임자이자 조제사인 임윤서입니다….”송영식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윤서를 바라보았다. 윤서에게 제품 소개를 맡겨도 될지 조금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것이다.그런데 그 많은 기자들 앞에서도 윤서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말을 잘 하는데다 시원스러운 이목구비가 시선을 끌어 주목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어 만족스러웠다.여러 가지로 임윤서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임윤서를 오슬란에 데려온 건 아무리 봐도 잘 한 결정이야.’“영식아…”이때 백지안이 송영식의 팔을 잡으며 억지 웃음을 지었다.“오늘 윤서 씨랑 똑 같은 레드 드레스를 입게 될 줄 몰랐네? 진작 알았으면 다른 걸 입고 올 걸.”송영식은 흠칫했다. 백윤태이 옆에서 덧붙였다.“하필이면 지안이가 레드 드레스를 입고 와서 사람들이 둘을 놓고 비교하잖아. 뭐 임윤서가 우리 지안이보다 낫다느니 하면서….”“오빠….”백지안이 백윤택을 흘겨보았다.“뭐 빨간 드레스가 나만 입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럴 수 있지.”“일부러 저런 거야. 전에 강여름도 똑같은 짓을 했었잖아. 강여름이랑 친해서 그런가 하는 짓도 아주 똑같아요. 그런데 이제 최 회장이랑도 헤어졌는데
“드레스 마련해 놨으니까 가서 좀 갈아 입어요.”송영식은 턱으로 소파에 놓인 검은 드레스를 가리켰다.“제 드레스는 멀쩡한데 왜 갈아 입어야 하죠?”윤서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당신 드레스가 우리 지안이랑 너무 똑같잖아.”송영식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지안이는 내 약혼녀니까 이제 회장 사모님인데 직원이랑 비슷한 옷을 입어서야 되겠어?”“……”윤서는 경악한 나머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뭐래! 아예 내가 같은 여자여서도 안 된다고 하지 그러셔?”송영식은 윤서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거참 지위가 있는 사람이 말이야 입이 그렇게 거칠어서야.”“아니, R&D 총감으로 모셔올 때는 굽신굽신하고 데려와 좋고는 이제 와서 뭐? 입이 거칠어?”윤서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디자인도 다른데 왜 백지안이 레드 드레스를 입으면 나도 레드 드레스는 입지도 못하는데요? 자기가 뭐나 되는 줄 아시나 봐? 참나 지금 그 집은 온 집안이 내년에 대통령 선거 준비한다고 다들 어디 가서 눈에 띄는 짓 안하려고 다들 모을 낮추는데 어디서 이런 자손이 나와서 집안을 흐리고 다니나 몰라?”그러더니 윤서는 돌아서 나가려고 했다.송영식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일부러 지안이랑 똑같은 색으로 입은 걸 누가 모를 줄 알고? 오늘 밤에 지안이보다 돋보여서 사람들 앞에서 지안이를 우습게 만들 생각이었잖아? 안 그래도 불쌍한 애를 진짜 너무 괴롭히네. 강여름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이제 그만 좀 하지 그래?”윤서는 아주 크게 심호흡을 했다.“머리가 어떻게 되신 거 아니에요? 상상력이 그렇게 풍부하면 화장품 회사 CEO가 아니라 작가가 되지 그러셨어요? 내가 백지안 코디야, 뭐야? 그 인간이 뭘 입을지 내가 어떻게 알아?”“당신처럼 음모가 많은 사람은 당연히 남들은 모르는 무슨 방법이 있겠지.”송영식이 냉랭하게 뱉었다.“아, 몰라! 어쨌든 난 죽기 전에는 옷 안 갈아입어요.”윤서는 그대로 걸어 나갔다.“댁이랑 계속 얘기하다가는 바보 옮을 것 같으니까 먼저 갈게
“뭐래? 진짜 바보예요? 그걸 안 붙이면 어떻게 나가?”윤서가 이를 악 물었다.“누굴 더러 바보래? 한번만 더 욕해 봐라, 내가 이걸 아주 그냥 밖으로 던져 버릴 거야.”송영식은 아까부터 은근히 말을 막하는 윤서에게 화가 났다.“…제가 잘못했네요. 제발 그걸 저에게 좀 건네 주시겠어요?”윤서가 웃음을 장착했다.“안 주워주시면 이대로 뛰어 나가서 회장님이 날 덮쳤다고 말하고 다니겠습니다. 밖에 기자도 많던데, 아, 백지안도 있지?”“졌다, 졌어.”송영식은 윤서의 협박에 어떨 수 없이 집어서 윤서에게 건네주었다.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송영식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우스웠다.‘아니, 그저 니플 패치 하나 주워주는 걸로 저렇게 부끄러워할 일이냐고?’“뭐야,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셔? 영 여자 경험도 없는 사람처럼?”“누, 누가 경험이 없대?”송영식은 일부러 크게 말하긴 했지만 좀 주눅이 들었다. 서른이나 먹은 남자가 경험이 전혀 없다고 말하려니 뭔가 부끄러웠다.“경험이 있긴 있으시구나? 누구? 백지안에게 가서 말 해줘야지. 그래도 유경험자시라고.”임윤서가 빙글빙글 웃으며 약을 올렸다.“거 말 많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조용히 있지 그래.”영식이 어두워진 얼굴로 경고했다.“궁금해서 좀 물어본 걸 가지고. 설마, 여자 몸 본 것도 내가 처음 아닌…”임윤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영식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나가 버렸다.그러고 대뜸 문을 쾅 닫고 나가는 골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우스웠다.‘부끄러워서 화내는 거 봐.아니지, 설마 그렇게 순수하려고? 그러면 백지안 같은 인간에게는 정말 너무 아깝잖아.’----연회장.송영식은 와인잔을 들고 훌쩍 마셨다.‘젠장!’윤서 때문에 열이 받아서 그런지, 처음 여자 알몸을 봐서 그런지 열기가 몸의 특정 부위로 몰리는 기분이었다.‘이 나이가 되도록 경험도 없다니 어째 생각할수록 창피하잖아.’“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아?”백지안이 다정하게 물었다.“임윤서 때문이지.”송영식이
윤서는 사뭇 두려움에 찬 목소리를 옆 사람 들으라는 듯 높였다.“아까 갈아입으라고 마련해 주신 블랙 드레스는 사이즈가 작아서 입을 수가 없더라고요. 백지안 님, 다음부터는 무슨 색 드레스를 입으실 건지 미리 좀 알려주세요. 또 같은 옷을 입어서 괜히 대표님한테 한 소리 듣기는 싫거든요.”주변 사람들이 부정적인 시선으로 백지안을 쳐다보며 수근거리기 시작했다.“말도 안 돼. 빨간 색은 저만 입어야 하나?”“그러니까 말이야. 솔직히 임 총감이 자기보다 예뻐 보이니까 갈아입으라는 게 말이나 돼? 저런 사람인지 몰랐는데 실망이야.”“송 대표도 그래. 임 총감은 이번 신제품 조제사이자 오슬란의 공신인데 백지안이랑 같은 색 옷을 입었다고 뭐라고 하다니 제가 무슨 제왕인가?”“……”송영식과 백지안은 부끄러워서 목까지 빨개졌다. 송영식은 윤서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방 대표도 괜히 말을 보탰나 싶어서 좌불안석이 되었다.방 대표가 얼른 화제를 신제품으로 옮겼지만 어떤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가는 법이다. 드레스와 관련된 일은 온 발표회장 내로 퍼졌다.다들 경멸하는 시선으로 백지안을 보기 시작했다.백지안은 임윤서가 너무나 얄미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백윤택을 불러 속삭였다.“오늘 밤에 무슨 수를 쓰던 임윤서를 꼭 괴롭히도록 해.”“걱정하지 마. 임윤서가 마시는 술에 이미 사람을 시켜서 뭘 좀 넣었거든.”백윤택이 사악한 웃음을 드러냈다.“밤에 내가 침대에서 아주 실컷 괴롭혀 줄게.”“좋은 소식 기다릴게.”백지안은 만족스럽게 웃었다.----이때 이주혁이 송영식에게 다가왔다.“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그래. 멀리 안 나갈게.”송영식이 주혁의 어깨를 두드렸다.이주혁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영식을 잠깐 들여다 보았다.“저기, 그냥 드레스잖아.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냐?”송영식은 절친의 말에 매우 민망한 얼굴이 됐다.“아니, 그런 게 아니고….”“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대선이 코 앞인데 집안에 자꾸 누를 끼치면 안 되잖아. 난
백윤택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임윤서는 너무 더워서 깼다.온 몸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비틀비틀 일어났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한참을 생각해 보다가 몽롱한 채로 걸어 나오다가 누군가와 탁 부딪혔다.윤서는 원하던 것을 만난 듯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저기요, 어? 임윤서 씨 아닌가…?”비서는 긴장한 눈빛으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송근영을 쳐다보았다.“아무래도 누가 약을 탄 모양이구나.”송근영은 임윤서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고는 말했다.비서는 흠칫했다.“오슬란 신제품 발표회에서 감히 오늘 잠 주인공인 개발팀 총감에게 손을 대다니 누가 이렇게 대담할까요?”“일단 내 방으로 데려갈 테니까 자네는 여기서 누가 와서 임윤서를 찾는지 잘 지켜 봐. 그 놈이 임윤서에게 약을 탄 놈일 테니까.”송근영은 그렇게 당부하고는 윤서를 부축해 방으로 데려갔다.방에 들어가자 임윤서는 이제 견디지 못하고 침대에서 마구 구르며 난동을 부렸다.송근영은 골치가 아팠다. 할 수 없이 욕조에 찬물을 받아 윤서를 집어넣었다.그러고 욕실에서 나오는데 비서가 돌아왔다.“방금 백윤택이 아까 그 자리에서 사람을 찾았습니다. 소방통로 쪽으로 가더니 위 아래로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당황한 기색이더라고요”“백윤택이라….”송근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백지안의 오빠인 백윤택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그 집안의 속 썩이는 인간이지. 이제 영식이 뒷배를 믿고 날뛰려는 게로구나.이제 작은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시면 동생 시댁을 등에 업고 더 지랄을 하겠지.할아버지 말씀이 맞아. 무슨 수를 쓰던 백지안이 우리 집 안에 들어오게 두면 안 되겠어.’“저, 임 총감이 굉장히 괴로운 것 같은데요.”비서가 윤서의 신음소리를 듣고 귀까지 빨개져서 말했다.송근영은 비서를 흘끗 쳐다보았다.“가서 영식이가 어디 있는지 찾아 봐요.”----연회장에서 접대 술을 계속 받아 마시고 오늘 기분도 좋아서 송영식은 이미 거나하게 취해있었다.백지안이 송영식을 부축해 엘
“당연하….”송영식이 휘 둘러보더니 갑자기 말소리가 줄어들었다. 아무래도 자기 방이 아닌 것 같았다.“자기 방도 아니면서!”윤서는 화가 나서 눈이 벌게졌다.“이 변태가! 백지안을 사랑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나에게 손을 대? 어디 사람이 없어서 나한테 이래? 백지안한테나 갈 것이지!”“내가 손을 댔다고?”송영식은 울컥했다.“돈과 지위를 노리고 내가 취한 틈을 노리고 들어온 거잖아?”미칠 지경이었다. 어렵사리 백지안에게 청혼을 해서 겨우 성공했다 싶었더니 지금까지 지켜왔던 동정을 하룻밤 만에 윤서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다.“돌았나, 진짜? 이 몸은 당신 같은 인간이랑 자는데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거든! 게다가… 난 첫경험이란 말이야!”윤서는 거의 울 지경이었다.“누굴 바보로 아나? 당신 같은 사람이 아직까지 경험이 없다고? 내가 분명 다른 남자랑 만나는 것도 봤….”송영식은 말을 맺기도 전에 하얀 시트 위에 선명한 붉은 꽃무늬를 보고 목이 턱 막혔다.임윤서가 정말 첫 경험이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너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나, 난 몰라. 모르는 일이야.”“이 쓰레기가, 진짜! 죽어라!”윤서는 베개를 집어 던졌다.이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기자들이 고개를 들이밀었다.너무나 익숙한 장면이었다. 왜 자꾸 이런 일만 생기는 지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송 대표님, 백지안 씨랑 사귀는 거 아니었습니까? 어째서 오 총감과 함께 계시는 거죠?”“바람입니까?”“임윤서 씨, 송 대표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눈도 못 뜨게 마구 플래시가 터졌다.윤서는 이불을 두르고 욕실로 뛰어들었다.‘이건 내가 전에 송영식에게 썼던 작전이잖아? 내가 당할 줄이야. 그런데 당해보니 정말 환장하겠네.난 뭘 그렇게 잘못해서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다행히도 호텔 경비 팀에서 와서 곧 현장을 정리하고 두 사람에게 옷을 가져다 주었다.임윤서가 옷을 입고 나오자, 송영식은 어두운 얼굴로 호텔 매니저에게 신경질을 냈다.“기자들이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