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하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싫어.”송영식이 간절한 눈을 하고 이를 악물었다.“하준아, 의사가 지안이 목숨을 살려는 두었지만 희망이 없다면 지안이는 앞으로 어떻게 되겠어? 어렸을 때 지안이가 정신병원에서 널 격려해 주지 않았더라면, 넌 이미 삶을 포기했을지도 모르잖아? 지안이는 너 때문에 의학을 공부했어. 3년 전 지안이가 아니었다면 넌 미쳤을지도 몰라. 넌 쟤한테 일말의 연민도 없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가 있냐?”하준의 태양혈이 불뚝불뚝 튀었다. 하준은 병실에서 걸어 나갔다.송영식이 하준의 다리를 잡았다.“하준아. 제발 부탁한다. 들어주기 전까지 난 이렇게 꿇어앉아 있을 거야.”“영식아, 네가 내 친구라면 이렇게 사람을 압박하면 안 되지.”하준은 송영식의 손을 뿌리치고 그대로 걸어 나갔다.“영식아, 일어나자.”이주혁이 한숨을 쉬었다.“네가 지안이를 기쁘게 해주려는 마음은 이해가 간다만 그렇다고 지안이의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 만들어서는 안 되지. 하준이는 안 그래도 지안이에게 죄책감과 목숨을 빚지고 있어서 마음이 무거울 텐데.”그러더니 이주혁도 병실에서 나갔다.복도에 서 있던 하준이 입을 열었다.“난 가끔 3년 전에 지안이가 날 구해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너무 스트레스받지 마. 사실 네가 잘못한 것도 없지, 뭐.”이주혁이 하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전에 지안이랑 결혼하려고 했을 때도 그렇게 마음이 내켜서 하려고 한 일은 아니었잖아.”“알아주니 고맙다.”하준은 씁쓸하게 웃었다.하준은 휴대 전화를 꺼내 여름에게서 온 톡이 없는지 확인해 보았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전화도 한 통 없었다.하준은 인사를 남기려다가 백지안이 결연하게 머리를 들이박던 모습을 떠올리고 마음이 너무나 피곤해져서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말았다.----해 질 녘.전성이 소식을 가져왔다. 전성은 송영식과 이주혁을 보더니 우물쭈물 망설였다.“그냥 말하지. 다들 내 친구니까.”하준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이
사진을 받아든 하준의 몸이 찬물을 뒤집어쓴 듯 부르르 떨렸다.너무나 놀라웠다.아무리 해도 놈을 여름이 사주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이래도 강여름을 믿어?”송여식이 사진을 빼앗아 들고 하준의 눈앞에서 흔들었다.“보이냐? 완전히 똑같잖아. 이래도 모르겠어? 이건 강여름의 계략이라고, 네가 당한 거야!진작부터 지안이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는 널 오천으로 꾀어내서 지안이를 납치한 거지. 우리가 일찍 발견했기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었더라면 지안이는 놈에게 완전히 당했을 거야. 강여름… 어떻게 그렇게 악랄할 수가 있지.”하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주혁을 바라볼 뿐이었다.“네 생각은 어때?”이주혁은 심경이 복잡했다.“내 생각에는 영식이 말이 아주 일리가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강여름에게는 동기도 있고, 납치범도 강여름의 사람이고. 전에도 강여름이 너에게 접근하는 건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내가 경고한 적도 있었잖아.”“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못 믿겠냐? 너는 차마 어떻게 하지 못할 것 같으니 지안이 복수는 내가 하겠어. 내가 경찰서에 끌고 갈 거야.”송영식이 병실에서 뛰어나갔다.하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따라 나갔다.그러나 송영식이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내려갔기 때문에 하준은 할 수 없이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야 했다.----이때 아무리 해도 육민관을 찾을 수 없었던 여름은 A국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양우형, 속히 귀국 요망. 육민관에게 사고 발생”문자를 보내고 여름은 차를 몰아 성운빌로 돌아갔다.마음속 불안은 점점 더 커져갔다.2년을 알고 지냈지만 육민관은 연락이 닿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귀국해서 처음으로 완전한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육민관은 여름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오른팔이었던 것이다.차를 막 주차 시키던 참이었다.웬 자가 미친 듯 여름의 차에 달려들어 충돌했다. 여름은 피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받혀버렸다. 에어백이 튀어나와 보호해 주긴 했지만 온몸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이
“인정하는 거지?”송영식이 싸늘하게 웃었다.“선택지를 두 가지 주겠다. 하나는 감옥에 가는 거고, 하나는 우리 애들 손에 실컷 두들겨 맞는 거야. 둘 중 하나를 고르면 끝내주겠다.”여름은 피식 웃었다.“쿠베라 후계자도 못된 인간 따위가 쿠베라의 고수들을 데려왔을 리 없지. 자신 있으면 다 같이 덤벼 봐. 어디 실력 한번 보자.”송영식은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때 하준이 도착했다.하준의 차가 두 사람 코앞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멈춰서더니 하준이 내렸다.몸에 걸친 셔츠는 어제와 같은 것이었지만 어제의 다정함은 온데간데없이 살기 등등한 얼굴이었다.송영식은 하준을 보더니 냉랭하게 웃었다.“마침 잘 왔다. 강여름이 이미 다 인정했어. 자기가 했다고. 이번에는 이 못된 인간에게 제대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해. 이번에는 저지른 잘못에 응당의 처벌을 받아야지.”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내가 언제 백지안을 납치했다고 인정했어?”“납치범이 네 수하라고 인정했는데 네게 벌인 짓이 아니면 그놈이 저 혼자서 가서 납치를 했다는 거야?”송영식이 딱 집어서 말했다.여름은 인상을 썼다.‘민관이는 내 사람이니까 내 명령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사람을 납치하거나 할 애가 아니야. 누군가에게 모함을 당한 게 틀림없어.하지만 민관이는 내내 내가 꽁꽁 감춰두고 있어서 아주 가까운 몇몇 사람만 그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며칠 전 호프집에서 찍힌 사진 때문에 누군가가 눈치챈 것일까?그게 대체 누구지?니아 만에 갔다는 그 젊은 남자도 백지안을 배후에서 돕는 한 패가 아닐까?혹은… 이것도 백지안의 새로운 계획일지도 모르지. 백지안의 목표는 나와 최하준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고 내 오른팔인 민관이를 제거하는 것이었을 지도 몰라.배후에 있는 인물이 누군진 몰라도 너무나 악랄해.’귀국 후 여름은 처음으로 한기를 느꼈다.‘내가 백지안을 너무 얕잡아봤어.지금까지 백지안의 배후에 있는 인간이 누군지 땅짐도 못 하고 있잖아.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민관이를 구출하는 거야. 민관
하준은 아무 말이 없었다. 송영식의 말에 동의하는 것이 틀림없었다.하준의 눈이 서서히 싸늘해지는 것을 보며 여름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하루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사람에게 흔들렸었다니.그 수많은 일을 겪고도 난 아직도 남의 말을 너무 잘 믿는단 말이야.저 사람은 내가 필요할 때는 입으로 어떤 말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한 마디만 물어볼게. 어떻게 해야 민관이를 풀어줄 거야?”여름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놓아줘?”송영식이 우습다는 듯 말했다.“꿈 깨시지. 지안이를 그렇게 괴롭힌 인간은 죽도록 고통을 당해 봐야 해. 겨우 보디가드에게 그렇게 촉을 곤두세우다니 둘이 무슨 관계인데 그러지?”“말 함부로 하지 마시지.”여름의 분노에 찬 경고가 끝나가 하준의 차가운 눈동자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여름은 속으로 송영식을 오천만 번 저주했다.“풀어달라? 가능하지.”하준이 매서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죽으면 풀어줄 수 있어.”“나랑 민관이는 결백해. 아무 말이나 내뱉는 송영식의 말은 믿고 당신과 한 베개를 베고 누웠던 내 말은 못 믿겠다는 거구나. 알겠어.”여름은 눈을 내리깔아 속눈썹으로 눈에 어린 살기를 감추었다.하준은 그 모습을 보니 심장을 칼로 에는 듯 아팠다.‘날 겨우 그런 놈으로 보는 건가? 어째서 육민관을 구하지 못해서 저렇게 목을 매는 거야?’“강여름, 너무나 실망스럽군. 난 당신이 그렇게 못된 인간인지 몰랐어.”그런 소리는 송영식에게 수도 없이 들었지만 여름은 신경도 써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하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여름은 어쩔 수 없이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내가 못됐다고?3년 전에도, 3년이 지나도, 여전히 눈이 멀었군.아직도 백지안의 가면 뒤 얼굴이 안 보인단 말이야?’“지금 웃음이 나와?”송영식이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너무 웃겨서.”강여름은 눈가의 눈물을 닦더니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거기 서!”송영식이 바로 손으로 여름을
지난번 일로 이미 집안의 명예를 한번 더럽히기는 했지만 그건 그래도 사생활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송영식이 사적으로 사람을 처벌하고 감금한다면 내년 대선에서 삼촌에게 크게 누가 될 일이었다.“날 잡아가고 싶다면 증거를 가져오시라고.”여름은 냉랭하게 말하더니 돌아서서 가버렸다. “기다려! 내게는 가도 좋은지 물어보지도 않았잖아?”하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섰다.“내가 가도 좋다고 했던가?“그래서, 날 잡아가시게?”여름이 하준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하준은 본적도 없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심장이 욱씬했다. 갑자기 뭐라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지금 여름을 잡으면 두 사람 사이의 틈은 분명 더욱 깊어질 것이라는 점을 잘 알았다. ‘하지만 여름이가 그렇게 잔인무도한 짓을 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낼 수 있을까?’“하준아, 대체 뭘 망설이고 있어?”송영식이 외쳤다.“지안이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사실을 잊었어? 절망한 나머지 자살하려던 모습을 잊었냐고?”여름은 깜짝 놀랐다.‘백지안이 자살을 시도했구나. 이번에는 아주 독한 수를 썼는걸.’“나랑 지룡으로 같이 가자.”하준의 눈에 위엄이 서리더니 거칠게 손을 뻗어 여름의 손을 잡아채려고 했다.그러나 손이 닿기도 전에 여름이 가스총을 꺼내 하준을 겨누었다.하준은 멈칫했다. 눈에는 물음표가 가득했다. 여름이 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건지, 자신을 겨누었다는 사실에 놀란 건지도 파악이 잘 안됐다.“난 당신이랑 같이 돌아가지 않아. 강제로 잡아가겠다면 쏘는 수밖에 없어.”여름의 눈은 이상스러우리만치 침착했다. 강제로 끌고 가려고 한다면 진짜로 발사를 할 것으로 보였다.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이 가득한 하준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나에게 총을 쏘겠다는 건가, 지금?”“그러면 내가 순한 양처럼 끌려가야 한다는 거야?”여름의 표정은 사뭇 냉랭했다.“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끌려가서 문초를 당하고 싶지는 않다고. 다 나를 스스로
주차장.엘리베이터가 올라가자 하준은 주먹으로 세게 벽을 내리쳤다.주먹을 타고 피가 흘렀지만 하준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주먹보다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여름이가… 나에게 총을 겨누다니….’깊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총을 겨누어진 것보다 더 마음 아픈 일이 있을까?‘하아….여름이가 날 사랑하기는 했을까? 어떻게 그렇게 야멸차게 변할 수가 있지?’“지금 이 꼴을 보고도 모르겠어? 강여름은 애진작에 변했어. 총까지 들고 다니잖아?”송영식이 분노에 차서 외쳤다.“내가 보기에는 너에게 숨기는 게 많은 것 같다. 너랑 사귀는 것도 다 거짓인지도 몰라. 널 사랑하는 게 아니라 순전히 너와 지안이에게 복수하려고 그러는 건지도 모른다고. 아직도 이해가 안 돼?”“시끄러워.”하준의 싸늘한 시선이 송영식을 향했다.“내가 말한 건 사실이라고. 정신 차려. 누가 정말 널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알아야지.”송영식은 그렇게 말하더니 혀를 차며 차 문을 열었다.“난 이렇게는 못 넘어가. 오늘은 도망쳤을지 몰라도 절대로 못 놔줘. 일단 나는 지금 잡아놓은 그 납치범 자식 족치러 간다.”----하준과 영식이 떠나고 얼마 뒤.임윤서가 급히 달려왔다.“민관이가 정말 최하준에게 잡혔어?”“응.”막 샤워를 마친 여름이 옷을 깨끗하게 갈아입고 나왔다.밤새 잠을 자지 못해서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했다.“얘기를 들어보니 현장에서 민관이가 백지안을 마구 때리고 있었대. 백지안은 그 자리에서 더는 살기 싫다면서 자살을 시도했다나 봐.”“백지안이 꾸민 짓이 분명해. 민관이가 어디 백지안 같은 인간을 건드린 애니? 젠장.”임윤서는 홧김에 욕을 퍼부었다.여름은 골치가 아픈 듯 미간을 문질렀다.“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어쨌든 민관이를 계속 지룡에 둘 수는 없어.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어쩌려고?”임윤서가 물었다.“…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여름은 약간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민관이는 꼭 한번 만나야겠어. 진상을 제대로 파악해야 결백을 밝히지.”“
게다가 내년 대통령 선거를 준비 중인 송연재까지 있었다.“서 회장, 이 시간이 우리 집에 웬일인가?”송우재가 허허 웃으며 물었다.“어르신, 드릴 말씀이 좀 있어서요.”서경주는 분개한 기색이 역력했다.“저도 이제는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딸애를 데리고 좀 찾아뵈었습니다. 송 회장, 거 아들 간수 좀 잘 하지 그래.”송태구가 움찔했다. 두 아들 중 누구를 말하는 것인 것 당황스러웠다.“왜 그런….”“송영식 씨가 오늘 오후에 사람들을 잔뜩 데리고 성운빌로 절 찾아와서 말썽을 부렸습니다.”여름이 단도직입적으로 휴대 전화를 열어 영상을 틀었다.“이건 주차장 CCTV 영상입니다. 제가 복사해 두었어요. 보시죠. 송영식 씨가 제 차를 들이받는 장면입니다.”송영식의 가족이 모두 모여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송영식이 여름의 차를 들이받더니 여름을 차에서 끌어내 멱살을 잡는 모습이 보였다. 게다가 뒤로는 송영식의 수하가 주르륵 늘어서 있었다.송우재, 송태구 등 식구들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지금 송씨 집안은 특수한 시기를 지나고 있으니 이런 영상이 퍼져나갔다가는 대통령 후보 경선에도 못 나갈 지경이었다.“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이야?”그래도 송태구가 제일 먼저 정신을 차렸다. “필시 무슨 원인이 있지 않겠는가?”“회장님은 그래도 이성적인 분이시지만 사정을 잘 모르실 테니 제가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제 백지안이 납치당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어쩐 일인지 현장에 있었던 제 보디가드가 잡혔습니다. 그랬더니 송영식 대표는 제가 했다고 생각한 겁니다.사실 저도 대체 어째서 제 보디가드가 현장에 있었는지조차도 모릅니다. 며칠 오천에 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돌아오자마자 송영식 대표가 제 차를 들이받고 자기 수하들에게 절 잡아가라고 명령을 하지 뭡니까?”순식간에 송태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본시 쿠베라는 대대손손 엄격한 규율로 자식들을 가르쳐 성실하고 반듯한 자손들을 키워왔는데 어쩌다가 이런 망나니 같은 자식이 태어났는지 모를 일이었다.여름은
“그렇습니다. 사실 하준 씨와 사귀는 동안에도 내내 마약 상습 복용자를 만나고 있었죠. 외국에 있을 때 알았다는 것 같습니다. 백지안은 매주 몇 번씩이나 그 남자를 찾아갔죠. 그 남자를 살해한 살인범은 아직 잡지 못했는데 경찰에서는 백지안을 의심했지만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했죠.”그 말을 들은 송영식의 가족들의 반응기 각기 다 달랐다.송영식이 은근히 백지안을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최근 백지안과 관련된 그다지 좋지 않은 이야기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다들 내막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던 것이다.“하신 말씀이 사실인가요?”송근영이 의아한 기색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이 일은 송영식 대표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백지안이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주변 남자들의 정신을 좀 쏙 빼놓아서 송 대표는 백지안을 아주 여신처럼 여기더라고요.“그렇게 말하는 여름의 말투에는 무력함이 역력했다.“남자들이 여자에게 홀려있을 때는 무슨 말을 해도 다 믿어주더라고요. 그런데도 최하준이 백지안과 결혼하지 않은 것만 봐도 제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방증이죠.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사람을 만난 연인과 관계를 지속할 사람은 많지 않죠.”송영식의 가족은 그 말을 듣고 모두 입을 다물었다. 사실 최하준은 며칠 뒤에 다시 식을 치르겠다고 하더니 이후로 결혼식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고 그 집 식구들에게 물어도 다들 말을 얼버무릴 뿐이었던 것이다.서경주는 딸이 할 말이 끝나가는 것을 보고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저희는 오늘 대충 이런 내막을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우리 두 가문이 알고 지낸 지도 오래되어 어르신이 인품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다들 송영식 군을 좀 잘 살펴주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불법적으로 우리 애를 끌고 가려고 했던 영상이 잘못된 마음을 먹은 사람 손에 들어가기라도 했다가는 내년에 대선에 크게 영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점잖은 송연재가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경주 형님, 그 영상 원본은….”“우리가 이미 단지 경비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