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자가 다시 신신당부했다.“아 참, 여울이가 4살이란다. 선물 살 때 나이에 맞춰서 고르거라. 그리고 말해둘 게 있는데 내가 쌍둥이들에게 주려고 만들었던 유아실을 일단 여울이에게 내줬단다. 어쨌든 너는 당장 급하지 않잖니?”그러더니 장춘자는 전화를 끊었다.하준은 수화기를 들고 한동안 꼼짝도 않았다.‘4살이라고…?그때 강여름의 아이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그 나이겠구나.’이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백지안이었다.“준, 오늘 야근이야? 우리 같이 웨딩 사진 고르러 가기로 했잖아?”“오늘은 시간이 없네. 퇴근하고 본가에 좀 가야 해서 집에 못 가.”하준이 답했다.백지안은 입술을 깨물었다.“아직도 우리 오빠가 강여름 네 집 부순 일로 화났어? 준, 나는 정말 몰랐어. 전에 쓸데 없는 짓 하지 말라고 얘기를 했었는데도 내 말은 듣지를 않아. 미안해. 이런 오빠를 둬서 네 명예에 먹칠이나 하고….”“지안아, 지나간 얘기는 하지 말자. 어쨌든 앞으로는 백윤택이랑 거리를 좀 둬. 도저히 방법이 없는 인간이야.”하준이 말을 끊었다.꽃노래도 한두 번이라는데 백윤택이 저지르는 짓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그래,”백지안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답했다.“오늘은 정말 본가에 일이 있어.”하준은 통화를 끝내고 상혁에게 어린애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라고 했다.상혁은 하준의 집에 4살 짜리 아이가 있다는 말을 듣더니 온몸이 굳어서 가만히 있었다.“뭘 멍하니 있어? 빨리 안 가?”하준이 상혁을 노려봤다.상혁은 사무실에서 나와 조용한 곳을 찾아 바로 여름에게 전화를 걸었다.“강 대표님, 회장님 댁에 있다는 그 여자애가….”“맞아요. 여울이에요,”여름은 할 수 없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상혁은 울상이 되었다.3년 전 여름의 ‘유산’은 최양하와 상혁이 손을 잡고 벌인 쇼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당시 하준이 여름을 밀쳤을 때 하혈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쌍둥이를 지키지 못할 뻔했으나 다행히도 쌍둥이의 생명력이 강해서 살아남았다.그러나 상혁은 하
상혁이 눈을 끔뻑거렸다.“FTT에서 제일 작은 공주님이 생겨서 노마님께서 무척 기뻐하신다던데요. 곧 아이들이 많아질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좀 샀습니다.”하준은 콧방귀를 뀌었다.“그렇다고 내 딸도 아닌데.”“……”‘그게… 회장님 딸이거든요.’----하준은 성큼성큼 집으로 들어갔다.막 들어서는데 양갈래 머리를 항 여자애가 이쪽으로 막 뛰어오고 있었다.뛰어오며 소리쳤다.“나옹이가 도망갔어! 내가 잡아야지!”“뛰지 마라.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최란의 목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여울이는 그대로 하준의 다리에 부딪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이 녀석, 걸어 다닐 때는 조심해야지.”하준은 허리를 숙이고 손을 뻗어 여름을 안아 올렸다.여울이 고개를 들어보니 하준의 얼굴이 보였다. 귀족적인 이목구비에 또렷한 쌍꺼풀이었다.‘어? 본 적 있는데? 며칠 전에 하늘이가 찾아서 보여준 얼굴이다.’막상 실물을 보니 사진이 영 실물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 지금까지 본 아저씨들 중에 제일 잘생겼는데?’여울은 그 사람이 아빠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아빠는 늘씬해서 아무렇지 않게 입은 블랙 셔츠와 브라운 팬츠도 완벽하게 어울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따.여울은 눈이 반짝였다.‘아빠는 나쁜 사람이지만 참 잘생겼다. 마음에 드는 걸.’하준도 고개 숙여 여자애를 바라보았다. 발그레한 볼이 아직 아기 티가 났다. 인형처럼 귀여운 아이였다.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친근감과 애정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마의 드레싱을 보니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그런 감정이 느껴지다니 너무 이상했다. 하준은 아이를 좋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아마도 애가 나랑 많이 닮아서 그런가 보지?양하가 낳은 애가 왜 이렇게 나랑 닮았을까?’“여울아, 괜찮지?”이때 최란이 뛰어왔다.하준을 보고 다시 여울을 보더니 나무랐다.“네 이모가 닮았다 닮았다 할 때만 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제 보니 아주 그냥 쏙 빼닮았네.”“저는 괜찮아요. 이 아저씨가
‘하지만… 얘는 최양하의 딸이라고. 어려서부터 그렇게나 꼴도 보기 싫던… 최양하의 딸인데.내 아이가 살아있었다면 아마도 이렇게 귀여웠겠지?’하준은 지갑에서 블랙 카드를 꺼내 여울에게 주었다.“자, 큰 아빠 선물이다.”최란은 깜짝 놀라서 눈이 튀어나올 뻔 했다.‘하준이가 양하의 딸에게 이렇게까지 우호적일 줄이야? 하준이는 워낙 쌀쌀맞은 성격인데 여울이에게만 특별하네?’“이게 뭐예요? 증조 할아버지도 하나 줬는데. 하나 있으니까 됐어요.”여울은 블랙카드를 하준에게 돌려주었다.“더는 필요 없어요.”하준은 그런 여울이 마음에 들었다.‘엄마에게서 교육을 잘 받았군.’“괜찮아. 증조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고, 이건 네가 주는 거니까 다른 거야.”“받아두렴. 네 큰아빠는 아주 부자란다. 잃어버리만 말거라.”최란이 말했다.여울은 고개를 갸웃하고 잠깐 생각했다.‘뭐, 이건 받아서 하늘이에게 줄까?하늘이도 있는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아니까 하나 더 받아서 하늘이에게 줘도 되겠지.그리고 아빠 거니까 내가 안 가져가면 그 나쁜 이모만 좋은 거잖아?’“알겠어요.”한껏 달콤하게 대답하며 여울은 하준의 손을 잡았다.“나옹이 찾으러 같이 가요.”최란은 하준이 안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막아주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하준은 넙죽 대답하더니 여울을 어깨에 태우고 나갔다.최민이 바나나를 하나 까면서 다가왔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부녀인 줄 알겠네.”“그러게나 말이다.”----밤. 파티가 끝나고 나니 늦은 밤이었다.하준은 본가에 남아서 자기로 했다.3년 동안 하준은 본가에 거의 오지 않았었다. 그 건물에는 여름과 함께했던 추억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밤이 되어 하준은 침대에 누웠다. 아무래도 밤새 잃은 아이들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똑똑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일어나 문을 열어보니 여울이 귀여운 곰돌이 잠옷을 입고 불쌍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큰아빠, 같이 자도 돼요?”“왜 아빠랑 자
“……”하준은 아무 말이 없었다.‘여울이가 말하는 건 비밀 금고겠지. 3년 전 이 방을 썼을 때 강여름이 비밀 번호를 설정했었지.강여름이 떠나면서 다른 것들은 다 가져갔는데 이 비밀 금고만은 두고 갔지만 아무도 비밀 번호를 몰라서 열지 못했는데.’예전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었기 때문에 열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오늘 이 꼬맹이가 무심코 누른 번호에 열린 것이었따.“이건… 목걸이구나.”하준은 목이 잠겨서 답했다.“큰아빠 거예요?”여울이 궁금한 듯 물었다.“나도 잘 모르겠다.”하준도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하지만 짐작 가는 사람은 있네. 돌려줘야겠다.”“알았어요.”여울은 목걸이를 하준의 손에 떨어트리더니 세수하러 갔다.----아침 먹을 때가 되자 최양하가 후다닥 다가와 여울을 잡더니 속삭였다.“이 녀석아, 네가 이렇게 네 아빠한테 붙어 있는 걸 알았다가는 엄마가 엄청 화낼 걸.”“아빠! 쉿! 말하지 말아요.”최양하는 울고 싶었다.“어이구, 그래도 아직 사람들 앞에서 날 아빠로 부르는 건 안 잊었구나. 어제 만나고부터는 아주 네 눈에는 네 아빠밖에 안 보이는 것 같더니. 밤에도 자다 말고 난 버리고 아빠한테 가고… 이 녀석아 사기를 칠 거면 좀 더 조심해야지.”“삼촌, 그런 게 아니에요. 이것도 작전이라고요.”여울이 입을 비죽거리더니 천진하게 말을 이었다.“이제부터 내가 그 나쁜 이모를 혼내 줄 거예요.”“……”최양하는 골치가 아팠다.“제발 그냥 얌전히 있어. 네 엄마가 이제 곧 너랑 하늘이를 같은 유치원에 보내준대.”“잘 됐네요. 남는 블랙카드 하나 하늘이 줘야 하는데.”여울이 진지하게 말했따.“……”‘이 꼬마 녀석을 상대하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겠어.’----곧 식구들이 하나 둘 내려와 식사를 시작했다.최정은 하준의 오른손 옆에 빌로드 보석함이 놓인 것을 보았다. 저도 모르게 슥 열어보더니 깜짝 놀랐다.“이거 이잖아?”하준이 눈썹을 치켜 세우고 물었다.
출근시간이 지나서 다행이었다. 출근시간이었더라면 온 회사 직원들이 다들 서서 구경이 날만한 미모였다.“여긴 또 왜 왔어요?”여름이 힐을 또각거리며 다가갔다. 하얀 손가락으로 하준의 차를 가리켰다.“최하준 회장님, 여기는 주차위치가 아닌데요.”최하준이 여름을 내려다 봤다. 오늘은 메이크업도 하지 않고 왔지만 여름의 미모는 여전했다. 오히려 깨끗한 피부와 청순함이 드러났다.하준은 갑자기 확 더운 느낌이 들어 셔츠 단추를 하나 풀었다. “저기… 이거 당신 건데.”하준이 차에서 빌로드로 싸인 보석함을 내밀었다. 열어보니 Heart of Queen이 붉은 빛을 반짝였다.여름은 깜짝 놀랐다.Heart of Queen은 하준이 동성에서 거금을 들여 여름에게 선물한 두 사람의 사랑의 증표였다.여름은 조심스럽게 가지고 있었지만 3년 전 마음을 접고 떠나면서 잊고 있었던 것이다.“예전에는 내 거였지만 이제는 아니지.”여름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눈에 드러날 복잡한 감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따.“무슨 뜻이야?”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그건 전에 당신이 나에게 주었던 선물이에요. 잊어버렸나 보네.”여름이 담담히 말했다.하준의 눈이 어두워졌다.“아마도 예전에 죽어라 생떼를 써서 나에게 사달라고 한 모양이지.”여름이 ‘하!’하고 웃었다.“마음대로 생각하셔. 어쨌든 이혼했으니 백지안에게 주시던지.”그러더니 하준을 피해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려고 했다.하준은 본능적으로 여름의 손목을 잡더니 보석함을 여름에게 쥐여주었다.“당신이 찼던 거라 지안이가 안 받을 거야. 가져가.”여름은 고개를 숙여 그 보석함을 보았다. 자조적인 웃음이 스쳤다.‘아, 백지안이 안 받을 테니 내가 다시 가져가라?’“그러시던지.”여름은 그대로 받아서 걸어갔다.그러더니 쓰레기통에 그대로 던져 넣었다.하준의 눈이 커지더니 차갑게 외쳤다.“귀한 걸 왜 그렇게 던져?”“나더러 가져가라고 했으니까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거 아닌가?”여름은 그대로 개인 전용
백지안은 철렁했던 심장이 다시 쿵했따.‘아니, 어딜 봐서 내가 겨우 직원으로 보여?’“아니, 큰아빠랑 결혼할 사람이야.”하준이 설명했다.“안녕하세요?”여울은 바로 달달하게 인사했따.“응.”백지안은 환하게 웃었다.“준, 애를 이렇게 좋아하는지 몰랐네. 우리도 얼른 하나 만들어야겠어.”“그러게.”하준은 담담히 대답했다.“아마 나랑 엄청 닮아서 더 그런 것 같아.”“우리 아이는 너랑 더 닮았을 거야.”백지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가렸다.여울은 실망한 듯 고개를 떨구고 하준의 소매를 만졌다.“큰아빠, 나중에 아가가 생기면 이제 여울이는 안 예뻐해요?”꼬맹이의 실망이 담긴 까만 눈이 하얗게 질린 얼굴과 선연히 비교되었다.하준은 심장이 뜨끔했다. 낮은 소리로 꼬맹이를 달랬다.“그럴 리가 있나? 우리 아기가 생겨도 여울이는 좋아할 거야.”“고마워요.”여울이 하준의 볼에 뽀뽀를 쪽했다.백지안은 얼굴이 굳어졌다. 겨우 서너 살 밖에 안 된 아이인데도 무의식적으로 여울에게 반감이 들었다.게다가 하준이 여울에게 보여주는 다정함은 평소의 모습과는 영 본적이 없었다.“저기, 우리 오늘….”“이거 큰아빠 밥이에요?”갑자기 여울이 물었다.“그래.”하준은 기대에 찬 여울의 눈을 보며 눈썹을 찡긋했다.“배고프구나? 먹을래?”“네, 네!”여울은 숟가락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입 먹더니 곧 인상을 찡그렸다.“힝, 맛이 없다. 우리 엄마는 맛있는 것만 해줬는데.”백지안은 하마터면 유지하던 포커 페이스가 무너질 뻔했다.‘뭐야? 내가 한 밥을 먹으면서 맛 없다니?’하준은 그런 백지안의 표정은 눈치 채지 못했다. 어쨌든 속으로는 여울의 말에 매우 동의했기 때문이다.“엄마가 해준 건 맛이 있었어?”“응. 엄마가 한 보쌈이랑 아보카도 샐러드랑 감자채볶음 그런 거 다 맛있었는데.”하준은 어쩐지 갑자기 여름이 해주었던 아보카도 샐러드가 생각났다. 딱 한번 먹어본 게 다였지만 그 맛은 아직도 기억이 났다.하준은 여울도 여름의 아보
곧 FTT 식당의 주방장이 불려와서 여울이가 좋아할만한 음식을 했다.그러나 여울은 몇 입 먹다 말았다.“싫어. 엄마가 한 게 좋아. 엄마가 한 건 다 맛있는데. 깨도 많이 뿌려주고. 하지만 여울이도 이제 엄마가 한 밥은 못 먹는 거 다 알아요.”그렇게 말하는 여울의 볼을 타고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하지만 애써 참는지 우는 소리는 내지 않았다.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애가 슬픔을 꾹 참으며 우는 것을 보니 하준은 더욱 마음이 아팠다.“우리 아빠한테 가보자.”하준은 이제 정말이지 더는 어쩔 방법이 없었다.“알았어요. 아빠한테 여름이 이모한테 가자고 해야지. 여름이 이모가 한 보쌈은 엄마가 한 것처럼 맛있거든요.”“강여름?”하준은 흠칫했다.“강여름을 말하는 거야?”‘이놈의 자식이 애까지 데리고 강여름을 찾아갔었어? 이런 뻔뻔한 자식을 봤나?’“몰라요. 어쨌든 여름이 이모는 이뻐. 내가 본 이모 중에 제일 예뻐요. 그리고 나한테도 엄청 잘 해줘요. 여름이 이모가 우리 새엄마 하면 안 돼요?”여울이 천진한 눈을 들어 물었다..“……”하준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어졌다.‘강여름이 최양하의 아내가 되어 여울이 새엄마가 된다고?’생각만으로도 심장 깊은 곳에서 미친 듯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걔들은 안 돼!”“왜 안 돼요? 난 여름이 이모가 해준 거 먹고 싶은데.”여울이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하준은 여울을 잠시 쳐다보다가 안아 올렸다.“큰아빠랑 여름이 이모한테 가서 맛있는 거 해달라고 하자.”“좋아요!”여울은 뛸 듯이 기뻐했다.----11시 반.하준은 다시 화신그룹으로 갔다.이번에는 아침에 여름에게 잔소리를 들은 경비가 하준의 차를 들여 보내주지 않았다.할 수 없이 밖에 차를 세워두고 여울을 안고 들어갔다.프론트에서 직원들이 하준이 자신과 똑 닮은 여자애를 안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완전히 깜짝 놀랐다. 다들 모여서 수근거리기 시작했다.“세상에, 최 회장 딸이야?”“보면 몰라? 딸 맞네.”“그런데 어디서 저렇게 큰 애
“아, 알겠습니다.”하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팀장들은 숨도 못 쉬고 허둥지둥 자리를 빠져나갔다.사무실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여울은 여름의 목을 끌어안았다.“엄마가 해준 밥이 먹고 싶어서요. 전에 아빠랑 이모네 가서 밥 먹었는데 엄마가 해준 밥이랑 똑같았다고 했더니 큰아빠가 데리고 왔어요.”그러더니 여울은 여름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엄마가 왜 갑자기 이모가 됐어? 최하준만 없었으면 엉덩이 맴매감인데….아니, 그나저나 이게 다 무슨 일이야?어쨌든 일단은 맞춰주는 수밖에 없겠군.’여름이 아무 말이 없자 하준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애 하는 말 안 들려? 애기가 당신이 해준 밥이 먹고 싶다잖아.”“아니, 근데 왜 둘이 같이 있는데요?”여름은 마른 세수를 하며 진정하고 정신을 차렸다.“얘는 양하 씨 딸 아니야?”“양하한테 애가 있는 걸 알고 있었군.”하준의 말투에는 저도 모르게 원망스러운 감정이 실려있었다. 하준은 여름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보다 최양하가 딸이 있다는 사실을 여름에게 말할 정도로 둘 사이가 가깝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나도 얼마 전에 알았어요.”여름은 하준은 신경도 쓰지 않고 여울에게 다가가 안아 올렸다.“우리 여울이 뭐 먹고 싶어요?”“갈비, 보쌈, 조기구기…”“……”‘정말 누구누굴 닮아서 이놈의 식탐은 정말이지….’“그래, 그러면 우리 마트부터 갈까?”딸이 먹고 싶다니 여름은 열일을 제치고 여울을 데리고 나섰다. 내내 하준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무시당한 하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따라 나섰다.“어디서 할 건데?”“당연히 집에 가야지. 여긴 주방도 없으니까. 그리고 마트부터 가야 돼.”여름은 포기한 듯 하준을 돌아봤다.“당신은 가 봐요. 저녁에 내가 양하 씨한테 연락해서 애기 데려가라고 할 게.”“됐어. 내가 데리고 나왔으니까 내가 데려가면 되지.”하준은 벨트에 손을 대고 멋드러진 포즈로 여름 옆에 섰다.세 사람이 위풍당당하게 복도를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