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서인천이 차에 있다니, 두 사람이 며칠 전 자신과 여름이 차에서 했던 일을 벌이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갑자기 심장을 꼭꼭 찔리는 느낌이었다.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 전화를 꺼내서 전화를 걸었다.10분도 되지 않아서 경찰이 출동하더니 서인천의 차창을 똑똑 두드렸다.“무슨 일이시죠?”서인천이 창을 내렸다.경찰은 안에 남녀가 있는 것을 확인하더니 난감한 듯 답했다.“차 안에서 부적절한 거래가 이루어 지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와서요.”남녀가 차 안에서 할만한 부적절한 거래가 뭐가 있겠는가?서인천과 여름은 동시에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여름이 팔짱을 꼈다.“우리가 뭐 옷매무새라도 흩어졌나요?”“죄송합니다.”경찰은 속으로 신고자를 욕했다.경찰이 떠나자 서인천은 다시 방금 전 나누던 이야기 주제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 때 살수차가 다가와 지나갔다. 아직 차창을 올리지 않았던 탓에 서인천은 홀딱 젖어버렸다.바로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어머나, 어쩌나…. 얼른 돌아가서 옷 갈아입으셔야겠네요.”여름이 웃음을 꾹 참으며 말했다.“그래야겠네요. 제가 여기 차를 세워둔 게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렸는가 봅니다.”서인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서인천도 나름 눈치는 있는 사람인지라 오늘 여름에게 관심 있는 남자들이 많았던 점을 떠올리고 분명 자신만이 여름을 바라다 줄 기회를 가진 것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냈다.“아뇨. 오늘 제가 누구누구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에요. 좀 있으면 저도 찾아오지 싶네요.”여름은 티슈를 건네고 차에서 내려 단지로 들어갔다.막 엘리베이터의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데 큰 손이 와서 버튼을 가렸다.곧 익숙한 사람의 시원스러운 냄새가 뒤에서 덮쳐왔다.여름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한껏 담담하게 말했다.“그 난리를 치고도 아직도 할 말이 남았어?”“난리?”정수리에서 비아냥이 섞인 하준의 목소리가 울렸다. 자신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한 말투였다.여름은 돌아서서 고개를
“왜 안 돼?”하준은 갑자기 여름의 어깨를 와락 움켜잡더니 벽에 밀어 붙였다. 눈에서는 불길이 이글이글 타올랐다.“당신이 매력적인 여자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전에는 내가 당신을 충분히 알지 못했던 것 같아.”그러면서 탐욕스럽게 여름의 붉은 입술을 탐닉하려고 했다.그러나 여름은 얼굴을 홱 돌리면서 하준의 입술을 피했다.하준의 입술은 여름의 뺨에 닿았다. 여름의 몸에서 은은히 풍겨나는 향기를 들이마시며 하준은 미련이 남는 듯 몸을 뗐다.“지난 주에 어떻게 당신 수하들을 시켜서 날 구속했는지, 어떻게 날 압박해서 사인하게 만들었는지, 얼마나 나에게 냉정하게 굴었었던지 다 잊어버렸나 봐?”여름은 슬픈 눈을 하고 하준을 바라보았다.“그날 당신이 차에서 날 안아 내렸을 때 잠들어 있지 않았어. 꿈을 꾸는 것만 같아서 깨고 싶지 않았지. 어쩌면 우리가 다시 함께 하게 될 실낱 같은 가능성이 있지 않나 생각했어. 하지만 다음날 당신은 사람들을 데리고 내 집에 쳐들어와 이혼을 요구했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눈곱만큼도 남겨주지 않고 말이야.”여름은 마지막 말을 할 때 살짝 울먹였지만 여전히 강한 척하고 버텼다.하준의 몸이 굳어졌다. 무슨 끈으로 몸이 묶인 듯 꼼짝할 수 없었다.“당신….”여름은 하준을 와락 밀쳤다.“그러더니 백지안과 시험관 아기를 하겠다고 나타나더군. 백지안과 살기로 결심했다면 대체 왜 잘 붙어있지 못하고 번번이 여기 와서 나에게 상처 주는 거야? 나와 백지안 사이에서 당신은 언제나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내게 상처 주는 쪽을 택했다고. 날 원한다면서도 세 사람 사이에서 언제나 나만 양보하면서 화목한 당신들 세 식구, 네 식구 뒤에서 바라만 보라는 거야? 그런 상황에서 질투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어? 그렇다고 내가 백지안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를 줬다면 당장 내게 와서 날 하잖아.”그러더니 여름은 갑자기 주저앉아 실성한 듯 울었다.그런 여름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했다.사실 자신이 늘 여름에게 불공평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새벽 1시, 시아의 소속사에서는 긴급 회의를 소집하고 대외적으로 입장문을 발표했다.-어느 새 연예계에 발을 들인지 5년입니다. 처음에 발표했던 ‘꿈꾸던 천국’으로 저는 전국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사실 그간 저는 마음 속에 늘 한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을 품고 살았습니다. 예전 저의 좋은 친구 강여름입니다. ‘꿈꾸던 천국’ 앨범은 여름이가 저를 위해 만들어 준 곡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정말 살면서 이렇게 좋은 친구를 만나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여름이가 어렸을 때는 이름이 드러나길 바라지 않았지만 이제는 대중에게 이름이 많이 알려진 상태입니다. 저는 이제 더는 여름이의 재능을 감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이 그 앨범으로 받았던 상을 여름이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사실 이 상은 여름이가 받아야 마땅한 것이니까요. 여름아, 고마워. 사랑해!입장문 끝에는 여름과 시아가 학교에서 찍었던 사진 몇 장이 첨부되었다. 사진 속 두 사람은 찬란하게 웃고 있었다.네티즌 여론이 폭발했다.-강여름하고 시아가 친구였구나. 세상에 예쁜 애 옆에 예쁜 애라니… 완전 그사세-예쁘기만 한가, 시아를 위해서 곡을 써줬다잖아요. 마음마저 너무 예쁘다.-강여름의 음악적 재능에 감탄하는 사람 없음? 대체 강여름은 못 하는 게 뭐임? 정말 개존경!-시아 착하다. 자기 친구의 재능을 이렇게 드러내 주다니-강여름 같은 친구 있으면 나라도 자랑함“……”여름은 일어나서 댓글을 읽더니 웃었다.‘가요계 여왕의 소속사답네. 대처가 꽤나 빠르군.’여름은 전혀 서두르는 기색 없이 휴대 전화를 들어 이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지훈 형, 부탁드렸던 일은 어떻게 됐어요?”“그럼. 내가 누군데! 이제는 내가 동성에서 최고라고. 내가 눈알만 살짝 부라려도 JJ그룹이 꼼짝도 못 해. 진가은 정도는 내 앞에서 설설….”“그거 넘겨주실 수 있나요?”여름이 이지훈의 장광설을 끊으며 물었다.“그럼. 역시 네가 똑똑하다. 시아는 예전에 자기가 강여은과 진가은에게 갖가지 약점을 흘리도 다녔다
-아직 정확한 사정 모르는 분 있는 것 같은데 원래 시아는 ‘꿈꾸던 천국’의 원곡자가 강여름이라는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어. 이제는 강여름이 영향력있는 사람이 된 데다 증거까지 있다니까 빼박이라 인정한 거 뿐이지.-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 아는 사람한테 들었는데 어젯밤에 소진그룹 파티에서 시아가 피아노를 치면서 한 곡조 불렀고, 바로 강여름이 올라와서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러서 시아의 코를 납작하게 해줬대. 그리고 강여름이 ‘꿈꾸던 천국’ 창작 노트가 있다는 말을 했다네. 노트에 18곡이 있었는데 그 중에 8곡을 준거라고. 그런데 이제 다시는 다른 사람한테 곡 안 써줄 거래. 어쨌든 증거가 있으니까 시아가 빼박 진실을 공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시아 개실망. 내가 몇 년을 덕질했는데 내 사랑 물어내라.-오늘부터 나는 탈덕.----별장.시아는 댓글을 보고 화가 나서 온갖 물건을 다 집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여름이 자신과 진가은의 통화 녹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도 못했다.‘진가은 이 나쁜 년.내가 몇 년 동안 쌓아올린 청순 이미지는 이제 다 무너졌어!’매니저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일이 터지고 나서 매니저의 휴대 전화가 끊임없이 울려댔다.모두다 홍보 모델 계약을 해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일전에 진행하던 영화도 몇 편 있었는데 영화사에서도 속속 배역을 교체하겠다고 연락이 왔다.“영희 씨, 저도 정말 어쩔 수가 없어요. 온라인에서 여론이 시아에게 너무 불리해요. 이번에 이미지 완전 망한 것 같아. 우리는 그 이미지를 지고 갈 수가 없어요.”“그래도 우리가 이주혁 님 얼굴 봐서 계약 해지만 하는 거예요, 정영희 씨. 사실 시아 이미지 무너지면서 우리 브랜드에 타격이 너무 심해서 이주혁 님만 아니었으면 손해배상 청구해야 할 지경이야. 계약 해지 정도로 끝내는 것만 해도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도리는 다 한 거예요.”“……”“이 바보야, 지금 이 상황에서 뭔 성질을 부리고 앉아있어? 빨리 이주혁 씨에게 연락해 봐.”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여름의 작은 몸을 비췄다.여름은 몸을 살짝 돌린 채 입꼬리에 온화한 미소를 띠었다. 말투가 사뭇 부드러웠다.“그럼. 데리러 갈게.”여름이 얼마나 환하게 웃는지 눈이 부셨다. 통화가 끝나자 엄 실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연애 하세요?”여름은 흠칫하더니 기분 좋게 눈썹을 치켜올렸다.“곧 하겠죠.”“……”‘대표님을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뜻인가?’------저녁 9시.손님이 탄 비행기가 착륙했다.10여 분을 기다리니 윤서가 귀염둥이 둘을 데리고 빠져 나왔다.쉬크한 펑크풍 의상을 입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어찌나 귀엽게 생겼는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돌아볼 지경이었다.여울이는 트렁크 위에 앉아 있었다. 얼굴에는 마스크를 쓰고 양갈래로 땋은 머리를 달랑거리고 있어 너무나 귀여웠다.둥이가 여름을 발견하자 여울이는 트렁크에서 뛰어 내려 오도도도 달려갔다.“엄마, 엄마!”여울이는 여름의 품에 와락 안겼다. 고소한 젖냄새가 풍겼다.여름은 심장이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눈물까지 흘러나올 뻔 했다. 둥이가 태어나고 나서 이렇게 오래 헤어져 있었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엄마.”하늘은 비교적 절제된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눈가가 촉촉했다.“우리 아들, 이리 와!”여름이 양 팔을 벌려 좌우로 둥이를 안아 들였다.“역시나 엄마가 최고네. 이모는 아무래도 엄마를 대신할 수가 없구먼.”임윤서가 비죽거렸다.“내가 매일 얼마나 사탕을 사다 바쳤는데도 엄마를 보더니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네.”여울이가 몸을 배배 꼬았다.“이모도 겨론해서 동생 낳아줘요.”“난 싫네요.”임윤서가 답했다.여름이 일어나 웃었다.“고생 많았다. 오늘은 내가 거하게 쏠게.”“좋아. 가자!”임윤서가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뒤에서 놀라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서, 너니?”3년이 지났지만 그 목소리는 잊을 수가 없었다.돌아보니 강상원과 신아영이 출구에서 나오고 있었다. 3년 만에 강상원은 이전보다 훨씬 성숙한 모습이었다.
3년이 흘렀다.세월이 윤서의 얼굴에도 흔적을 남겼지만 훨씬 생기가 넘쳤다.강상원은 숨을 쉬는 법도 잊은 듯했다.옆에 있던 신아영이 놀라서 입을 열었다.“언니, 정말 윤서 언니네? 돌아왔구나? 우리가 얼마나 걱정을 했다고. 잘 지냈어?”강상원은 흠칫했다.강상원은 임윤서가 백윤택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백윤택이 임윤서의 집에 쳐들어가 폭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온통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다쳤던 임윤서의 사진이 온통 뉴스를 도배했던 3년 전을 떠올렸다.얼마 지나지 않아서 임윤서가 해외로 도피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순식간에 강상원의 눈에 혐오와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임윤서는 순식간에 변하는 강상원의 눈빛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귀국하자마자 아주 남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네? 아직도 지독하구나?”임윤서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러나 상처받은 얼굴로 입을 가렸다.“미안해.”“사과할 필요 없어.”강상원이 싸늘하게 뱉었다.“자기가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면 또 듣기는 싫은가 보지?”이윤서는 고개를 갸웃했다.‘저게 한때 내가 사랑했던 남자로구나. 백윤택의 거짓말로 도배된 뉴스만 믿고 날 믿어줄 생각은 전혀 없네.’여름이 결국 한 마디 했다.“윤서를 그렇게 오래 만났으면서도 윤서의 사람됨을 그렇게나 모르다니.”“너무 잘 아니까 하는 소리야. 예전에 네 회사에서 지나가던 아무 남자나 잡고 키스나 할 정도로 서울에 올라오더니 윤서가 방탕한 생활을 한다는 걸 내가 직접 봤거든.”강사원이 멸시하는 말투로 대답했다.“오빠, 이러지 마.”신아영이 끼어들었다.“윤서 언니가 오빠를 자극하려고 그랬던 거잖아. 백윤택은 영하 대표니까 언니는 대단한 사람을 하나 잡아서 오빠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던 거겠지. 그런데 그 결과가…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것뿐… . 그렇지만 언니, 다음부터는 남자 고를 때 성격도 좀 보세요.”임윤서는 눈알을 굴렸다.“그렇네. 내가 첫사랑을 할 때 사람 성격을 안 봤지 뭐야. 그 남자 옆에 소꿉친구라는 여자애가
“아이고, 아주 뭘 그렇게 아는 게 많으셔? 내가 그렇게 문란하게 사는데 혼외자식 한 둘쯤 있는 건 아주 정상 아닌가?”임윤서가 조롱하듯 웃었다.강상원은 안색이 확 변했다.“정말 네 아이야?”“바보네.”하늘이 비웃었다.“여자 친구가 하는 말을 아무거나 다 믿고.”“이 자식, 한 마디만 더 해봐라!”꼬마에게 도발을 당하자 강상원이 바르르 떨었다.“애한테 손만 댔단 봐라.”임윤서가 강상원의 손목을 휘어잡았다.그 덩치에도 강상원은 임윤서에게 잡힌 팔이 너무나 아팠다.강상원이 임윤서를 노려보았다. 자신을 쳐다보는 임윤서의 눈에 멸시의 빛을 보고 강상원은 불현듯 이전에는 임윤서가 늘 사랑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갑자기 심장이 찌르듯 아팠다.“다음에 만나면 인사도 하지 마. 남들은 첫사랑이 아름답다지만 난 구역지만 나니까.”임윤서가 강상원의 손을 놓더니 여름과 함께 자리를 떴다.뒤에 남겨진 강상원은 내내 임윤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난 윤서가 미운데 왜 이렇게도 윤서를 마음 속에서 지울 수가 없는 걸까.’“오빠, 괜찮아?”신아영이 다급히 강상원의 손을 잡고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별 거 아냐.”강상원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뱉었다.신아영은 강상원의 그런 모습을 보니 화가 나서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차 안.여름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방금 우리 떠나올 때 강상원이 내내 너만 쳐다보고 있더라.”“그래서 뭐 어쨌다고?”임윤서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그때 사고가 나고 다들 뉴스만 보고 날 비난할 때 내 남자 친구가 문자 보냈더라. ‘자중하지 그래?’”여름이 푸흡하고 웃었다.“그게 웃기냐?”임윤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너나 나나 어쩌다가 그렇게 둘 다 쓰레기 같은 놈만 만나고 다녔어, 그래. 동병상련이네.”여름이 한탄했다.“아니지. 넌 둘이나 만났지만 난 하나거든. 다음에는 절대 그런 나쁜 놈 안 만날 거야.”임윤서가 한사코 부인했다.“그래. 넌 나보다는 나았
“맞아.”임윤서도 거들었다.“엄마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아빠는 더 무서운 사람이라고.”둥이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음 날.여름은 아침 일찍 일어나 둥이에게 진수성찬을 차려주었다.“얘들아, 오늘은 엄마가 휴가를 냈어. 너희들이랑 하루 놀려고.”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좋아!”여울은 신이 났다.“난 솜사탕 먹고 싶어!”“너희 소원을 다 들어주마!”이때 손님방에서 임윤서가 베이지 색 체크무늬 정장을 입고 나왔다.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옅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둥이들아! 이모 예쁘냐?”임윤서가 한 바퀴 빙글 돌았다.여울이 박수를 쳤다.“예뻐, 너무 예뻐요!”“말을 예쁘게 하는 어린이에게는 초콜릿을 주겠습니다!”임윤서가 초콜릿을 던져주었다.여름이 정색했다.“아시아 SE에서 열리는 포럼에 참석한다며? 미인대회 나가는 거야?”“오늘 행사는 전세계 뷰티계의 명품 브랜드들이 주목하는 행사라고. 오슬란의 송영식도 올 거라고.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날 내쫓았겠다? 흥! 그 인간의 후회막심한 눈을 볼 날을 내가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 줄 아냐?”임윤서가 도도하게 말했다.“알았다. 얼른 먹어. 먹고 얼른 가.”여름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한편, 송영식의 본가.일하는 사람들이 아침상을 차리자 비서가 스케쥴을 건넸다.“대표님, 오늘 오전 10시에는 아시아 SE 포럼에서 국제적인 조제사 유니 게런이 연설합니다. 가보시겠습니까? 그쪽에서 초청장을 보내왔습니다.”송영식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싸늘하게 뱉었다.“한 대표 자식이 나한테 자랑질을 하려는 건가?”“그런가 봅니다.”비서가 한탄했다.“하지만 게런 선생님은 참 희한하기도 하죠. 저희가 전에 그렇게 여러 번 초청을 했는데도 거절하시더니. 우리나라를 싫어하는 줄 알았더니 우리 라이벌인 아시아 SE의 초청은 받아들이다니. 브랜드 파워로 보나 규모로 보나 우리 오슬란이 아시아 SE보다는 훨씬 나은데 말입니다. 머리가 있는 사람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