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FTT에서는 중역회의가 열리고 있었다.최양하는 고개를 숙이고 휴대 전화를 보고 있다가 입꼬리를 올리며 보다가 ‘오호!’하는 소리를 말았다.조용했던 회의실에 최양하의 목소리가 퍼지자 회의실은 완전 침묵에 빠졌다. 모두가 최양하를 쳐다보았다.하준이 의자에 깊숙이 기대면서 손에 들고 있던 펜을 툭 던졌다.“최 전무는 뭘 보느라고 그렇게 몰입했는지 다같이 한 번 들어 볼까?”최양하가 코를 문질렀다.“정말 듣고 싶으실까요?”중역들은 숨도 쉬지 못했다.‘최 전무가 지금 들이 받는 건가? 회장님의 화난 목소리가 안 들리나?’“회사 홈페이지 보고 있는데 지금 폭발 중이네요.”최양하가 씩 웃었다.“회장님하고 관련된 일로요.”누군가가 웃었다.“회장님과 백지안 씨의 결혼을 축하하나 보네요.”“요즘 회사로 축전이 많이 오고 있죠. 아무래도 경제계의 대 스타시다 보니까, 아하하!”하준은 내내 무표정으로 있었다. 중역들의 말에는 동의했지만 그런 문제에는 관심이 딱히 없었다.“그래서, 그 일이 지금 회사 미팅 중에 휴대 전화 가지고 놀 일이라는 건가?”“아니죠. 다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지금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건, 전처 쪽 일인데요.”최양하가 어깨를 으쓱했다.“아직 모르시나 본데, 서경주 회장이 강여름을 후계자로 정했습니다. 네티즌들이 강여름의 신분을 두고 갑론을박하고 있어요. 그리고 숨겨져 있던 강여름의 신분을 들추고 있는데, 이게 글쎄! 알고 보니 헤이즐의 수석 디자인 이사라지 뭡니까? 헤이즐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했어요.”“헤이즐이라고?”중역들이 놀랐다.“정말입니까? 전세계 최고의 건축 기업 아닙니까? 그쪽 디자이너들은 전세계 일류라고 하던데. 수석 디자인 이사라면 완전 초특급 인재 아닙니까!”“정말이라니까요. 못 믿겠으면 직접들 가서 보십시오.”최양하가 의미심장하게 하준을 흘끗 쳐다보았다.“회장님, 다 알면서도 우리한테는 말씀 안 하셨던 겁니까?”“……”‘어쩐지 헤이즐 같은 곳에서 선뜻 강여름과 협력을 한다 싶
여름은 초청장을 들고 빙글빙글 돌렸다.“이런 파티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담?”“정재계 명사들이 모두 모이는 파티입니다. 대표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그 시아라는 가수의 무대도 준비되어 있다고 하더군요.”여름이 안 갈까 봐 엄 실장이 부추기기 시작했다.“별일 없으시면 가서 좀 괴롭혀 주시지 그러십니까?”“……”잠시 후 여름이 웃었다.“엄 실장, 아주 사람 긁을 줄 아네요? 시아는 이주혁의 여자친구인데 나한테 무슨 일이 날까 봐 걱정은 안 되나요?”엄 실장이 웃었다.“대표님이 이제 서경주 회장의 후계자이자 헤이즐의 수석 디자인 이사라는 점이 밝혀진데다 화진의 주가가 몇 배로 뛰어서 다들 대표님과 안면을 트고 싶어 합니다. 주민 그룹이 아무리 세도 이제는 대표님에게 댈 수가 없습니다.”“그도 그러네요. 마침 이주혁에게 받을 빚도 있으니까.”여름이 초청장을 탁 하고 닫았다.‘흥, 지난 번에 우리 아버지를 그렇게 모욕적으로 병원에서 내쫓았겠다? 이제 그 빚을 어떻게 받는지 두고 보시지.’----밤.컨벤션 센터의 입구.슈퍼카들이 줄줄이 들어왔다.검은 고급 세단에서 내린 여름이 길게 깔린 레드카펫 위로 걸었다.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어 여름의 곡선을 우아하게 드러냈다. 거기에 여름의 미모와 브라운 컬이 찰랑이면서 완전히 동화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단정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웠다.모든 좋은 형용사를 모두 강여름에게 사용해도 모자랄 판이었다.오늘 파티를 위해 정성들여 차려 입은 온 재계의 미녀들이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여름이 들어오고 얼마 안 돼서 시아가 차에서 내려 이주혁과 걸어 들어 왔지만 시선을 모두 강여름에게 빼앗겨 시아를 눈 여겨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시아는 강여름이 원망스러워서 어쩔 줄 몰았다. 소진그룹도 국내에서 손꼽는 그룹이라 원래는 오늘밤 파티에 참석해 한껏 뽐낼 생각이었다. 입고 있는 드레스도 이주혁에게 한참을 졸라서 일류 디자이너에게 맞춘 것이었는데 이목이 온통 강여름에게 집중되어
여름은 웃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이거 아주 재미있겠는걸.3년 만에 아는 얼굴들이 이렇게 모두 한자리에 모이다니….’양유진은 여유롭게 여름에게 잔을 들어 보였다. 여름은 곧 양유진이 보낸 톡을 받았다.-오늘 당신의 목적을 아니까 방해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조용히 당신을 지켜보고 있겠습니다.여름의 마음이 따뜻해졌다.하얀 슈트를 입은 최양하는 우아하게 다가오더니 와인을 한 잔 건넸다.“원래 안 오려다가 강여름 씨 온다는 말을 듣고 바로 왔죠. 오늘 아주 성대하네요.”“그러네요. 전 마음에 들어요.”여름이 와인 한 모금을 홀짝 마시더니 매혹적인 웃음을 띠었다.최양하의 눈이 반짝이더니 유감스럽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최하준과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내가 데려왔을 텐데. 지금 내가 강여름 씨를 따라다니면 가족에게 욕 먹겠죠. 형제가 한 여자를 두고 다투는 꼴은 못 볼 테니.”“날 안 따라다녀서 다행이네요. 제 스트레스가 극심할 뻔했잖아요?”“왜죠?”“지금 제 추종자가 너무 많아서요.”여름이 끊임없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남자들을 둘러보았다.“보세요, 저 많은 남자들이 호시탐탐 말 붙일 기회만 노리고 있다니까요.”“어쩔 수 없죠. 이렇게 예쁘고 실력있고, 배경 좋은 사람응ㄹ 누가 싫어하겠어요?”최양하가 여름에게 손을 뻗었다.“저랑 한 곡 추시겠어요? 오늘 밤 제일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체면 한 번 세워 주시죠?”“좋아요.”여름이 최양하의 큰 손바닥에 자기 손을 올려놓았다.두 사람은 함께 무도회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동화 속 주인공 같은 두 사람의 등장으로 연회장은 순식간에 부러움과 찬탄으로 가득했다. 막상 두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춤을 즐겼다.“오늘 뭐 하러 왔습니까? 한 번 깽판 놓으러 온 거예요?”여름이 최양하를 흘겨 보았다.“소진그룹 파티인데 깽판 같은 걸 치면 쓰나요? 노래나 한 곡 부르러 왔어요.”“노래를 한다고요?”최양하가 작게 기침을 했다.“오늘 시아 무대가
심장에 한기가 들며 절로 하준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갔던지 백지안이 ‘쓰읍~’하는 소리와 함께 나지막이 말했다.“준, 아파….”“아, 미안.”하준이 미안한 얼굴로 얼른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댄스홀 한가운데서 떼지 못하고 있었다.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원래는 백지안과 하준의 결혼 이슈가 가장 주목을 받을 때였으나 여름이 불쑥 튀어나와 이슈몰이를 할 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는 사람들이 백지안과 여름을 비교하니 백지안이 아무리 물 들어온 김에 노를 저어 봤자 여름처럼 이슈의 중심이 되지는 못했다.이제 겨우 하준의 옆 자리를 꿰어 찼는데 여름이 튀어나서 모든 언론의 카메라를 다 가져가 버린 것이다.더 짜증나는 일은 지금 하준의 눈에서 보이는 질투의 시선이었다.“준, 어머님 저쪽에 계시네? 우리 가서 인사드릴까?”백지안이 부드럽게 주의를 환기시켰다.“그래.”가족이라고는 해도 공공장소에서 드러나 보이는 예의를 차리지 않을 수 없었따.두 사람은 함께 최란에게 다가갔다. 최란은 어느 아이 지긋한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지인이 놀리듯 말했다.“자네 며느리랑 아들 왔네.”“어머님, 안녕하세요?”백지안이 두 어른을 향해 인사했다.“아이고, 예의 바르기도….”지인은 최란의 식구가 다가오자 다른 사람과 할 이야기가 있다며 자리를 피해주었다.최란은 덤덤하게 백지안을 흘긋 보았을 뿐이다. 최근 본가에 갔을 때 두 노인네가 툭하면 잃어버린 강여름 뱃속에 있던 쌍둥이를 자꾸 언급하니 백지안이 그다지 마음에 안 들었다.백지안만 아니었으면 진작 할머니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예전에는 그렇게 강여름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혼을 해서 아내도 있고 아이도 있는 남자에게 들러붙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끼어들어와 아내는 유산까지 시키는 백지안의 못된 짓거리를 보고나니 그렇게 윤리적인 인간이라는 생각도 안 들었다. 백지안은 자신을 본체만체하는 최란을 보니 위축이 되었다.하준은 그런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다.“지안이가 어
여름은 이미 최양하와 한 곡을 마쳤다. 곧 훤칠하고 능력 있는 서리 제철 2세가 댄스 신청을 했다.손에 저도 모르게 꽉 힘이 들어갔다.최란은 한숨을 쉬었다.“사람 앞 일이라는 건 정말 모르는 거구나. 안 그러니? 오늘 여기서 사람들은 뒤에서 양하 이야기를 쑥덕거리지 않더라. 다들 네 얘길 하지. 어쩌자고 저런 애를 두고 백지안 같은 애를 만나냐고….걔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뭐니? 백윤택은 재벌가에서는 다들 무시하고, 네가 지탱해주는 게 아니면 아무도 영하와는 손잡고 싶어하지도 않아.”“그만 하시죠.”하준은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은데 그런 소리를 들으니 더욱 불편해졌다.“지안이가 제 병을 고쳐줬잖습니까? 어렸을 때 병원 입원했을 때도 지안이가 격려해주지 않았더라면 전 지금 이렇게 살아있지도 않아요.”“여름이도 널 잘 보살펴 주고 격려해주지 않았었니? 그때 여름이가 아니었으면 나야 말로 네 손에 죽을 뻔 했었다.”최란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그런 일이 있었습니까?”최란은 어이가 없었다.“백지안이가 치료해줬다는 네 상태가 지금 그 지경인 거니? 뭔 치료를 했길래 여름이가 네게 해줬던 좋은 일은 그렇게 싹 다 잊었다니?”최란의 입에서 나온 말에 하준은 정신이 멍해졌다. 저도 모르게 옛일을 다시 자세히 떠올려 보려고 했더니 갑자기 두통이 극심해졌다.하준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러다가 시선 끝에 저만치에 있는 추동현이 들어왔다. 추동현과 추성호가 신나게 떠드는 모습을 보다가 하준이 냉랭하게 말했다.“추동현 화백 보시죠. 입으로는 아니라면서 사실은 추신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지? 정말로 추 화백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최란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더니 안색이 나빠졌다.바로 추동현에게 다가갔다.“동현 씨, 이리 좀 와 보세요.”최란이 한참이나 기다리고 났을 때야 추동현이 느른하게 웃으며 다가왔다.“무슨 일 있어요?”최란이 추동현을 바라보았다. 점점 더 추동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추신하고 거리 두시라고 했잖아
“너 보고 싶어서 그러지. 최란이 너랑 비교가 되나?”추동현이 그 사람의 허리를 감더니 뜨겁게 키스했다.“아저씨, 나 사람 없는 데 봐 놨는데, 거기 가서 놀래요?”그쪽에서 애교를 떨며 말했다.“어디, 가볼까?”추동현이 여전히 허리에 팔을 감고 뒤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걸어가면서 내내 입을 맞추고 있었다.두 사람이 막 자리를 뜨자 여름이 휴대 전화를 들고 향나무 뒤에서 걸어 나왔다. 손에 든 휴대 전화는 아직까지 영상을 찍고 있었다.막 따라가려는데 손 하나가 불쑥 나와 여름의 휴대 전화를 낚아챘다.돌아보니 하준이 휴대 전화의 영상을 보고 있었다.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이런 걸 찍다니 부끄럽지도 않나?”잠시 후 하준은 불쾌함이 가득한 얼굴로 여름을 노려보았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 양아버지의 바람 현장을 발견하는 바람에 기분이 안 좋으리라고 생각했지 이런 문제를 들고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뭐가 부끄러운데? 아주 핫하고 좋던데. 쉰 넘은 분이 한창 젊은 아가씨 허리에 손도 척척 올리시고. 얼마나 대단해?”여름이 눈을 가늘게 떴다.“잊어버려.”하준은 괜히 울컥했다.“내가 삭제 버튼 하나 누르면 자료가 삭제되는 컴퓨터야?”여름은 다시 휴대 전화를 쏙 뺏더니 가려고 했다.하준이 와락 여름을 잡더니 날카로운 눈을 했다.“영상은 나한테 보내.”여름이 하준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달빛 아래 여름의 손이 하얗게 빛났다. 손목에는 다이아 팔찌를 차고 있었다. 심플하지만 눈처럼 하얀 피부를 더욱 고급스럽게 빛내 보였다.하준의 심장이 두근했다.“뭔데?”“저작권료는 주셔야지.”여름이 당연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추동현 화백이 누군데, FTT의 데릴사위, 추신의 맏아들인데 이런 영상의 가치가 얼마나 될까?”하준은 얼음처럼 차가운 논으로 여름을 쳐다봤다.“칼만 안 들었지 완전히 강도잖아?”“최하준 회장님, 저도 알 건 다 안다고요. 유명 연예인 추문 뉴스거리만 해도 수천만 원 짜리인데, 저작권료를 안 주시겠다면 그만 두시
하준이 이맛살을 찌푸렸다.“오 씨냐니, 무슨 소리야?”“오지랖 씨냐고. 뭔 오지랖이 이렇게 넒어?”여름이 대꾸했다.하준은 화가 났다.“당신은 내 전처이고 양하는 내 동생이 아닌가? 그런데 둘이 같이 어울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당신은 안 부끄러운지 몰라도 나는 부끄럽다고.”“최양하 씨를 동생 취급하기는 하나? 회사에서도 형에게 함부로 당하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최양하 씨를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는데.”여름이 언짢은 듯 말을 이었다.“난 당신보다 더 제멋대로 하는 이기적인 인간은 본 적이 없어.”“그러니까 당신이 최양하를 그렇게 아낀다는 말이군.”하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말투에는 한기가 배어있었다.“내 목숨의 은인인데 최양하 씨를 위해서 한 마디쯤은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여름이 웃었다.“게다가 우리 둘 다 비혼 상태인데, 만나면 안 될 이유가 뭐 있어? 양하 씨는 인물도 훤하고 좋잖아.”“뭐라고?”하준이 여름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우리 집안에 그런 일은 용납할 수 없어.”“집안에서 용납을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집안에서 제대로 존중받지도 못하는데 나한테 오면 얼마나 좋아. 관리해야 할 회사 볼륨도 커져서 난 마침 손이 필요한 참이거든. 날 제수씨라고 불러야 할 지도 모른다고.”여름이 하준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던졌다.“인생은 원래 서프라이즈로 가득한 거잖아.”“……”하준의 옆 이마에서 아플 정도로 힘줄이 불뚝거렸다. 도저히 여름과는 대화가 안 될 것 같았다. 여름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심장에 과부하가 오는 느낌이었다.“강여름, 당신을 내가 부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둘이 사람 망신시키는 꼴은 못 봐.”“뭐, 나도 그냥 해본 소리야. 어쨌거나 날 따라다니는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최양하는 그냥 날 추종하는 남자들 무리의 하나일 뿐이라고. 난 아직 사람을 고르지도 않았어.”여름은 그 말을 남기더니 바람처럼 떠나버렸다.하준은 주먹으로 나무를 쳤다.‘이혼을 했는데도 왜 이렇게 난 강여름에게 휘둘리는
최양하가 씩 웃더니 은행 어플 화면을 보여주었다.“저녁에 서리그룹 아들이랑 가야 한다고 나랑 같이 야식 못 먹어 미안하다면서 돈을 이렇게 보내더라고.”“……”순간 하준은 바로 분기탱천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젠장, 나한테 받아간 돈을 바로 최양하에게 나누어 주다니.졸지에 내가 호구가 됐잖아?아, 그리고 뭐? 서인천이랑 데이트를 나간다고?’하준은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시아가 한 곡을 마치고 천천히 일어서더니 피아노 뒤에서 걸어 나와 허리 숙여 인사했다.연회장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시아는 뿌듯함에 으쓱한 기분이 되었다.‘이 사람들에게 그간 난 그냥 일개 연예인일 뿐이라 함께 섞이고 싶지 않은 존재였는지 몰라도 오늘 밤 드디어 모두에게 내가 얼마나 실력자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어!’이때 여름이 천천히 시아를 향해 걸어왔다.악기가 놓인 곳에 시아와 여름 두 사람뿐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우아한 강여름에게 떨어지자 시아의 얼굴에 걸려있던 미소가 가셨다.“여름아, 자리를 잘못 찾은 것 같은데, 여기는 무대야.”시아가 억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부드럽게 말했다.“잘못 온 거 아니야. 네 연주 끝난 거 아니니? 나도 주최측이랑 얘기했거든. 한 곡 쳐볼까 싶어서.”여름이 다이아가 박힌 드레스 자락을 펼치며 피아노 앞으로 가서 앉았다.시아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고개를 돌렸다.“오늘 파티 참석자들은 그냥 보통 사람들이 아니야. 유명한 대중음악 전문가인 강노명 선생님도 계시다고. 네가 함부로 나서서 장난처럼 피아노를 쳐볼 수 있는 데가 아니라고. 피아노는 집에 가서 너 혼자 치도록 해.”“내가 망신당할까 봐 걱정해 주는 거니?”여름이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확신은 할 수 없었다. 예전 기억에 의하면 음악 분야에서 여름의 천부적인 재능은 대단했었다. 둘이 함께 피아노 레슨을 받던 당시 여름은 뭘 쳐도 단숨에 배워서 선생님에게 늘 칭찬을 받고는 했었다.나중에는 여름이 시아를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