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민관이 한탄했다.“누님, 백지안이 얼마나 많은 남자들을 만나고 다녔는데.. 제가 남자라면 그런 여자 못 참습니다. 최하준은 그런데도 백지안을 받아주다니 정말 비위 하나는 존경합니다. 어쨌거나 백지안도 참 대단하긴 하죠. 우하준 좌철규라니….”“됐어. 그만 떠들어라.”여름이 미간을 찌푸렸다.“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쇼. 쓰레기 같은 놈 아닙니까?”여름이 괴로워 하는 줄 알고 육민관이 한 마디했다.“뭐래? 듣자니 토 나와서 그런다. 어제 그 쓰레기 같은 놈이랑 뽀뽀를 했다니까. 넌 가서 사후 피임약이나 좀 구해 와라.”여름이 현금을 내밀었다.육민관은 눈을 끔뻑이더니 슬금슬금 옆으로 자리를 피했다.“뭐야?”여름이 물었다.“아니, 누님. 곽철규 사생활 문란한 거 아시잖아요. 병이 있을 수도 있는데 백지안이랑 곽철규, 최하준이랑 백지안, 누님과 최하준….”육민관이 복잡한 얼굴이 됐다.“조심하시라고요.”“……”여름은 욕지기가 올라왔다. 서경주가 기다리고 있지만 않았다면 당장 병원으로 달려가 검사를 하고 싶었다.“일 끝나면 바로 병원으로 가자. 검사해 봐야겠다.”----40분 뒤.차는 벨레스 별장에 도착했다.여름이 들어갔을 때 비서 감유한이 서경주에게 회사 사정을 보고하고 있었다.“최근 저희 회사 브랜드 평판이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추신 쪽에서는 벨레스와 여러 가지 협력 프로젝트를 종료했고요. 이사들이 걱정하면서 서경주와 서유인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서경주가 비웃었다.서유인 부녀가 벨레스로 돌아올 면목이 있나? 사람들 웃음거리만 될 뿐이야.”“이사진은 해외 파트를 서유인 부녀에게 떼어주고 배후 책임자로 두면 마음이 편하겠다는 겁니다. 벨레스도 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갈 수 있고요."“자네 생각은 어떤데?”서경주가 감유한을 보고 물었다.감유한이 난처한 듯 웃었다.“왜 저에게 물어보십니까? 저는 일개 비서일 뿐인 걸요.”“그런가요? 아무리 봐도 그냥 단순한 비서 같진 않은데….”여름이 다가왔다. 싸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감유한은 침착한 척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제가 회장님을 수행한지 십 년이 넘도록 언제나 충성을 다했는데요.”“그러네요, 10년이군요”여름이 끄덕였다.“그 10년 동안 비서 월급이 350만원에 연말이면 아버지께서 보너스로 2천 만원씩은 따로 챙겨 주셨죠. 거기에 집과 차까지 제공해 주시고. 애들 둘은 최고의 학부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시고. 그랬는데 그걸 이렇게 갚으시는군요. 부인하고 싶으면 하세요. 하지만 감유한 씨가 독을 넣는 장면은 집안 곳곳에 숨겨뒀던 CCTV에 선명하게 다 잡혔거든요. 모르셨나 본데 온데 감유한 씨 모르게 CCTV를 설치해 놨었어요.”그렇게 말하면서 여름이 거실 장식장에서 소형 카메라를 하나 꺼냈다.감유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다시 기회를 드리죠. 누가 시켰습니까?”여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아… 아무도 시킨 사람 없습니다. 제가 한 짓입니다.”감유한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아무래도 보수가 적다는 생각이 들어서 회장님께 원한을 품었습니다.”“내가 월급이며 보너스에 이것저것 그렇게 챙겨줬는데 그게 적다니.”서경주는 가슴을 부여잡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아버지,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원래 말 타면 마구 잡히고 싶다고, 사람 마음이 다 그런 거 잖아요.”여름이 육민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데려가, 알아서 처리해.”“뭐, 뭘 하시려는 겁니까?”팔을 잡은 육민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감유한은 사색이 되었다.육민관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어느 침실로 끌고 들어갔다.곧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듣기만 해도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비명소리에 서경주가 놀라서 물었다.“얘, 저게….”“어떤 사람은 아무리 잘 해줘도 소용 없어요. 따끔하게 교훈을 주지 않으면 안 돼요.”여름이 웃으며 서경주를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아니, 나중에 경찰서에 데려가야 하지 않니? 나중에 혹시….”“걱정하지 마세요. 들킬 일 없어요.”여름이 답했다.
감유한은 확 쭈굴해졌다.“위자영이 당신의 공금횡령 증거를 잡고 있다지만 감유한 씨는 벨레스의 공금을 횡령했죠. 만약 벨레스에서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면 그 증거는 무효예요.”여름은 허리를 숙여 쪼그리고 앉아 말을 건넸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카리스마 있는 말투에 두려움이 일었다.“그렇지만 우리에게 협력하지 않겠다면 당신을 바로 경찰서로 보내서 당시 공금횡령 사건 및 차명 계좌도 털어볼 수도 있겠죠. 살인 미수에 공금횡령까지 더해지면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되는 거예요. 하지만 누군가의 교사로 독을 넣었고, 아직 사망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끽 해야 몇 년 살면 나오겠죠. 아이들과 부인을 생각하셔야지.”감유한의 동공이 심하게 떨렸다.여름은 위협에 박차를 가했다.“잘 들어보세요. 아내 분 이제 서른 초반인데 당신이 너무 오래 감옥에서 썩게 된다면 당신 돈 싹 들고 새로 결혼하지 않겠어요? 이후에 애들도 못 보게 될 텐데, 그간 했던 일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 버리는 거 아닌가요?”“좋습니다. 제가 증거를 잡아 보겠습니다.”감유한이 이 사이로 말을 뱉었다.“좋아요. 일주일 시간을 드리죠. 혹여나 배신하게 되면 난 어떻게든 알아낼 방법이 있고, 그때는 지금처럼 부드럽게 대해드리지는 않을 거예요. 아시겠죠?”감유한이 여름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그 작고 예쁜 얼굴이 지금은 완전히 서늘하고 무시무시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절대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일주일이면 반드시 증거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감유한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따. 일이 끝나자 여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경주와 저녁을 먹으러 갔다.“여름아, 그런 방법은 어디서 배워 온 거니?”서경주가 복잡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그 동안 대체 외국에서 뭘 하고 지냈길래….”“그냥 이런저런 친구들을 좀 많이 만났어요. 그리고 이것저것 여러 가지 기술을 좀 배웠죠.”여름은 가볍게 말했다.딸이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아 하자 서경주도 더는 묻지 않았다.“여름아, 화신 그룹 일은 아주 잘 해
“닥쳐.”하준은 그간 꽤 품위있는 이미지를 지키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마구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여름이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매일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마흔을 못 채우고 열 받아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아까 당신이 날 이 지경으로 만들었잖아!”“그랬구나.”여름은 의미 심장하게 특정 부위를 쳐다보던 ‘참 쓸모 없는 인간 같으니…’ 시선으로 하준을 쳐다보았다.“산만한 덩치를 해가지고 살짝 부딪히기만 했는데 그렇게 약하다니….”하준은 울컥했다.“그게 어딜 봐서 살짝 부딪힌 거야. 하마터면 우리 집에 대가 끊길 뻔했다고!”여름의 가지런한 눈썹이 가운데로 몰렸다.“걱정하지 마. 대가 끊기면 내가 당신을 잘 책임져 줄게.”하준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내가 언제 당신한테 날 책임져 달라고 했나? 당신 같은 악녀는 같이 있기도 싫다고.”여름은 눈을 깜짝이며 순진한 얼굴을 했다.“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 책임지겠다는 건 평생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말이 아닌데. 내 말은… 백지안에게 돈 많고 잘 생기고 능력 있는 남자를 찾아줘서 남은 반 평생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말이지. 당신이 애를 못 낳게 되면 백지안이 제일 걱정될 거 아냐?”“……”하준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더니 하얗게 질려버렸다.곁에 있던 상혁은 그 말을 듣고는 여름 앞에 완전히 여름 앞에 무릎을 꿇을 뻔했다.‘와, 죽인다. 내가 회장님을 이렇게 오래 모셨지만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화 내시는 건 처음 본다.’“왜? 내 말이 틀렸나?”하준의 표정을 보고 여름은 겁을 먹은 듯 뒤로 몇 걸음 주춤주춤 물러섰다.“아, 맞다. 내가 그걸 깜빡 했네. 백지안은 당신을 엄청나게 사랑하니까 거길 못쓰게 되었어도 별로 개의치 않겠구나.”“입 닥치지 못 해!”하준은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많은 사람이 오가던 병원 로비에서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했다.“따라와!”하준은 무거운 계단 문을 밀어 여름을 끌고 갔다.“뭐 하는 거야?
“최하준, 이거 못 놔?”여름은 있는 힘껏 하준의 등을 때렸다. 그러나 하준은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는 듯 그대로 여름을 들고 주차장으로 가 차문을 열고 여름을 던져 넣었다.“뭐 하려고?”여름은 일어나 빠져 나가려고 했다. 하준이 한 손으로 여름의 어깨를 짓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셔츠 단추를 풀렀다.여름은 넋이 나가서 멍하니 있었다.“미쳤어. 당신에게는 백지안이 있잖아? 왜 자꾸 이러는 거야?”그러나 이미 정신이 나간 하준에게는 여름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내가 병이 있어서 더럽다고 생각했다 이거잖아? 보기만 해도 혐오스럽지? 내가 더 싫어지게 해주지."“……”----밤 11시.성운빌 주차장, 검은 세단이 들어와 섰다.하준은 뒷좌석을 돌아봤다. 여름은 창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웨이브가 어깨 양쪽으로 굽실굽실 늘어뜨려져 있었다. 하준이 실내등을 켜자 여름은 실눈을 떴다. 누런 등이 여름의 얼굴을 비추었다. 누구라도 두근거리게 만들 얼굴이었다.하준의 큰 쟈켓으로 가려진 가녀린 몸은 더욱 사랑스러웠다.하준은 저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었다.어제는 약에 취해서 찾아왔다지만 오늘은 멀쩡한 정신이었다. 화가 나서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는 것이 어쩌다 보니 또 이성을 잃고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다.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는 어떻게 모든 것이 그렇게나 자연스럽게 흘러가서… 푹 빠져들게 만드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분명 오후에는 지안에게 상처 준 일로 죄책감에 시달리고 그렇게나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강여름과 얽히지 말아야겠다고 맹세까지 했었다.그러나 하준은 또 다시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이게 다 내가 강여름에게 중독되었기 때문이야.’하준은 짜증스럽게 담배를 꺼내 물려다가 뒤에 찬 여름을 생각하고 다시 내려 놓았다.5분을 기다렸는데 여름은 깰 기색이 안 보이자 하준은 내려서 뒷좌석으로 가 여름을 안아 올렸다.오후에 들쳐멜 떼는 몰랐는데 이제 보이 엄청나게 가벼웠다. 하준이 안아 올리자 불만스럽다는 듯 살짝 부어 오른 입술이
하준은 나가자 마자 휴대 전화를 켰다. 받지 않은 전화가 몇 통 있었다.위챗을 열어보니 하준이 30분 전 지안에게 보낸 톡이 마지막이었다. -저녁에 급한 일로 출장 가서 못 올 것 같아. 먼저 자.하준은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고 있다가 이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자냐? 나오. 한잔하자.”“싫어. 어제 야간 수술해서 지금 너무 피곤해.”이주혁이 무정하게 거절했다.“그럼 내가 네 집으로 갈게.하준이 짜증스럽게 말했다.“……”결국 하준이 도착해서 보니 이주혁은 완전히 골아 떨어져서 자고 있었다.이주혁을 그대로 침대에서 잡아 끌어내렸다.“일어나. 한잔해.”봉두난발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모를 발산하는 이주혁이 이 사이로 뱉었다.“왜 또 이러냐? 어젯밤에 안 들어갔으면 반성을 해야지 오늘은 또 왜 나한테 와서 이래? 어라? 이거 무슨 냄새야?”이주혁은 확 어이가 없어졌다.“여자 냄새… 이거 강여름 냄새잖아?”“네가 강여름에게서 나는 냄새를 어떻게 알아?”하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오늘 아침에 걔네 집 문 열고 들어가는데 딱 이 냄새 나던걸. 하도 좋아서 기억이 난다.”이주혁이 말을 마치자 하준이 눈으로 싸늘한 경고를 날리고 있었다.“잊어버리시지.”이주혁은 할 말을 잃었다.“대체 어쩌려고 이래? 아침에 얘기 잘 했잖아? 왜 또….”“옷 입어.”하준이 이주혁에게 옷을 던지더니 돌아서 걸어나갔다.이주혁은 한숨을 쉬었지만 결국 나가 보았다. 하준이 10년 된 샤또 라피트 로칠드를 따고 있었다.“야, 그거 내가 얼마나 아끼는 건데, 내려 놔!”그러나 하준은 전혀 개의치 않고 뻥하고 따버렸다.이주혁이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았다.“아 이 자식아, 왜 영식이한테 안 가고, 여기 와서 이래.”“내가 영식이한테 강여름이랑 이틀 연속 잤다고 하면 완전히 나랑 절교할 걸.”이주혁에게 한잔을 따라주었다.“내가 굳이 걔랑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겠냐?”“……”이주혁이 마른 세수를 하더니 하준이 다 마셔버릴까 싶어 얼른 와인을 꿀꺽꿀꺽
이주혁이 눈을 살짝 부릅떴다.“내가 사귄 여자 친구가 많아서 남들이 바람둥이라고는 해도 난 꼭 한 명 끝내고 그 다음 사람 사귀었다.”“좋은 생각 있으면 좀 말해 봐.”하준은 언제나 과단성 있게 결정을 내리는 타입이라 이런 일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이주혁이 담담히 말을 받았다.“나 곤란하게 만들지 마라. 어쨌든 지안이는 내게는 동생 같은 애야. 난 걔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솔직히 네가 계속 그렇게 지안이를 안을 수 없다면 그것도 골치 아픈 일 아니냐? 그렇다고 그 두 여자를 네가 다 끼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안이가 그렇게 오래 네 곁에 있느라 다른 사람은 만나지도 못하고 그 나이가 되었는데 참 이래저래 곤란하네.”하준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결국 술을 한잔 더 따라 주혁과 잔이나 부딪힐 뿐이었다.이주혁은 불쌍하게도 밤새 하준과 술을 마셔주었다.다음날. 하준은 정신을 못 차리고 뻗어서 12시까지 잠만 잤다.상혁이 옷을 가지고 왔을 때에야 겨우 일어나서 씻고 출근을 했다. 가다가 밖에 병원이 보이자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내려달라고 하더니 뛰어 들어가서 약을 하나 처방 받더니 약국에 들러 약을 가지고 나왔다.회사에 도착해 보니 얼마나 기다렸는지 지안이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는 정성스럽게 싼 보온도시락이 놓여있었따.“준, 나 1시간이나 기다렸어. 안 오는 줄 알았네.”지안은 하준을 보자마자 반가워서 웃으며 얼른 다가왔다. 밤새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은 게 보였다. 머리를 내려 슬쩍 가렸는데도 다 보였다.하준은 입안이 씁쓸했다. 어제는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고 시작한 것이 결국 또 강여름과 잠자리를 해버리다니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나쁜 짓이었다.“지안아, 이럴 필요 없어. 다쳤는데 집에서 좀 쉬지 그랬어?”“하지만 어제 네가 집에 안 와서 너무 보고 싶었다 말이야.”지안은 한껏 감정을 담아 하준을 바라보더니 가슴에 살풋 기댔다.고개 숙여 지안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어젯밤 그 가슴에 여름이 기대
그러나 같은 블랙 수트라도 하준이 입고 붉은 카펫 위에 서 있으니 더없이 기품 있어 보여 시선을 떼기 어려울 지경이었다.하준이 고개를 들어 그윽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두 눈이 마주친 순간 여름은 흠칫했다.이때 옆집 남자아이가 문을 열고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나오다가 갑자기 여름을 보더니 눈을 찡긋거리고 웃었다.“누나, 이제 와요? 남자친구가 여기서 1시간이나 기다렸는데. 아까 나 학교 끝나고 집에 올 때부터 저기 서 있더라고요.”“남친 아닌데.”여름이 민망한 듯 말했다.“에이~ 뭘 부끄러워 하세요? 지난 번에 뽀뽀하는 것도 다 봤는데~”남자아이는 헤헤거리더니 곧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문 밖으로 그 집 엄마가 아들에게 하는 소리가 다 흘러나왔다.“이 녀석아! 쓰레기 버리고 오랬더니 뭔 실없는 소리를 하고 앉아 있어?”“실없는 소리 아닌데? 어제 아침에 학교 갈 때도 그 형이랑 같이 엘리베이터 탔단 말이에요. 엄마랑 이모들이랑 만날 그래잖아. 결혼도 안 하면서 연애하면 나쁜 놈이라고.”하준은 민망함에 다크써클이 무릎까지 내려올 지경이었다.여름은 부끄러운 나머지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열쇠를 들고 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왜 또 왔어?”하준의 입술이 달싹이더니 저도 모르게 생각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왜? 반갑지도 않은가 봐?”말을 하고 나니 짜증이 또 밀려왔다.‘아니,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잖아.’여름은 하준을 한 번 흘겨 보더니 냉소를 지었다.“아주 여기 올 때마다 날 안을 수 있는 줄 아나 본데, 미안. 오늘은 피곤해서 못 놀아주겠어.”“오늘은 그런 거 아니야.”하준은 여름의 말에 화가 났다.“됐어, 괜히 사람 쓰레기 만들지 말라고”“만들다니? 원래부터 쓰레기거든!”여름이 씩씩거리며 노려보았다. 통통한 볼이 부어 오른 모습을 보니 화가 났는데도 어쩐지 귀여워 보였다.하준은 다시 심장이 간질거렸다.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았다.“그제는 당신도 알다시피 나도 피치 못해 왔었지만 어제는… 어제는 당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