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무척 놀랐다. 사실 지금까지 최양하라는 사람에게 그다지 호감이 없었다. 그러나 최양하와 자신은 어딘지 비슷한 처지에 있다는 동병상련을 느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그나마 최양하 씨 형편은 저보다는 낫잖아요. 부모님들이 결혼도 하셨고.”“그렇네요. 하지만 늘 형님과 저를 비교하는 시선들이 쫓아오죠. 전 항상 형님 그늘 아래에 있어요.”최양하는 어깨를 으쓱했다.“가요. 같이 들어가 보시죠.”“…감사합니다.”여름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그를 쫓아 나섰다.여름에게는 직원 수만 명의 생계가 걸려있었다. 여름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처지였다.******사흘 후.최하준은 국제회의를 마치고 귀국했다.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하자 상혁이 곧바로 회사 상황을 브리핑했다.보고를 들으며 승용차로 이동했다. “화신이 개발하려는 부지와 관련된 서류 작성을 모두 끝냈습니다.”상혁이 말했다.하준이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한 손으로 훌훌 당겨서 느슨하게 풀었다. “우리 쪽에서 누가 화신을 도와준 거야?”“최양하 상무입니다.”“…….”순간 주변 공기가 무거워졌다.상혁은 하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감지했다. “이 자식이 또 무슨 수작이야?”“뭘 좀 알아낸 거 아닐까요?”상혁이 의심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어쩐지 요즘 그 녀석이 너무 한가해 보인다 했어. 푸르크쪽 프로젝트는 계속 진전이 없고 말이야. 이 자식을 그쪽으로 보내야겠어.”최하준이 어떤 주저함도 없이 담담하게 지시를 내렸다.상혁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푸르크 쪽에 상무님을 투입시키는 사안은 신중히 처리하셔야 합니다. 정치적으로도 불안하고, 여사님이 언짢아 하시지 않겠습니까?”“그게 대수야?”하준이 대수롭지 않은 듯 가볍게 웃어넘겼다.“화신에 아무 일 없을 줄 알고 안심하고 있겠지? 강여름은 너무 물러.”상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폭풍전야의 기운을 느꼈다. 요즘 최하준이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았나
“난…”이 때, 양유진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양유진은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바로 가지.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나 봅니다. 오늘 밤엔 데려다 주지 못할 것 같네요."양유진은 서둘러 인사를 하고 회사로 갔다.여름은 그대로 서 있었다. 양유진이 이렇게 당황해서 서두르는 건 처음 보는 일이다.호텔로 돌아와 TV를 켜니 진영그룹에서 생산한 약품에 문제가 생겼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양유진이 구속 수감되었다는 보도도 잇따라 속보로 전해졌다.여름은 너무 놀라 곧장 변호사를 데리고 양유진이 구속 수감 중인 곳으로 달려갔지만 보석으로 풀려나긴 어려운 상태였다.동성에서 이렇게 갇혀 있었던 지난 기억이 문득 소환되었다. 불쌍하게도 이번엔 양유진이 예전 자신의 처지가 되어 있었다.변호사가 일러주었다.“양유진 대표가 누구에게 밉보인 게 있나 봅니다. 사실 이번 건은 보석으로 풀려날 만 한데, 경찰 측에서 놓아주질 않는군요. 이렇게 되면 방법이 없어요. 진영그룹을 지휘할 수장이 없으면 공장은 멈출 겁니다. 양 대표가 이대로 수감되면 일주일 안에 진영그룹은 도산합니다.”여름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최하준. 대체 언제쯤이나 되어야 그 인간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화신 상황이 좀 나아지려나 했더니 최양하에게, 이번엔 양유진에게 손을 뻗치고 있었다.누군가를 이렇게 증오해보긴 처음이었다.‘정말 끈질긴 악연이네.아무리 후회를 해도, 도망치려고 해도 최하준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마음만 먹으면 결코 모두 얻어 내고야 마는 사람이었다.‘양유진이 다시 나온다 하더라도 무슨 염치로 그 사람 얼굴을 봐...’그날 밤 여름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샐 수 밖에 없었다.양유진 집안에서 쉴 새 없이 전화가 걸려와 핸드폰이 폭발할 지경이었다.양유진의 어머니는 울면서 말했다.“우리 유진이 꼭 꺼내줘야 한다. 네 아버지가 힘 좀 써주실 수 있잖아? 이대로 갔다가 우리 집은 끝이야. 유진이는 신장도 하나 뿐인데 감옥에서는
“우리 얘기 좀 해요.”여름의 까만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하준을 바라보았다. 하준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무심히 찔러 넣고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것도 두려울 것 없다는 표정으로 낯선 사람 대하듯 여름에게 눈길을 돌렸다.수행하던 보디가드는 여름을 처음 봤다. 하준의 관심을 끌려는 스토커라고 생각한 보디가드는 여름을 무참히 쓰러뜨렸다.하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긴 다리를 들어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여름은 아픔을 참고 다시 그를 쫓았다.“전에 제안했던 것 말이에요. 할게요, 내가. 다만 양 대표와 회사는 그냥 놔두는 조건으로요.”하준이 우뚝 멈췄다. 마침내 돌아보았다. 입가에는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한 냉소가 걸려있었다. “내가 제안한 사항이 있었습니까? 전혀 모르겠는데?”여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하준에게 잠자리를 하겠다고 자기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야 말할 것도 없지만,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도 차마 그런 말은 꺼낼 수는 없다.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날 밤 하준은 제안을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여름에게 선택할 기회를 준다고 했었다.여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눈을 아래로 살며시 내리 깔면서 살짝 쉰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일전에는 내가 상황 파악을 잘 못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그래서요…?”하준이 돌아서서 몇 계단을 내려오더니 여름 앞에 멈춰 섰다. 한껏 조롱하는 눈빛이었다.“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몇 마디 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당신이랑 잠자리를 가질 것 같습니까?”정제되지 않은 적나라한 표현에 여름은 난감한 나머지 얼굴이 새빨개졌다. 너무 창피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울락말락 하니까 예쁜데? 마음에 들어.”하준이 가볍게 여름의 턱을 쓸었다.“좋아. 기회를 주지. 따라와요.”그러더니 휙 돌아서서 들어갔다.뭘 하려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게 양유진을 구할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은 알았다. 여름은 하준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
맞은 편에 앉은 하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저도 모르게 꽉 쥐었다.‘빌어먹을!’ 그저 골탕 먹이려던 것뿐인데 다른 남자의 손이 여름에게 닿은 것을 보자 그 손모가지를 확 비틀어버리고 싶었다.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동안 내가 너무 오냐오냐했지. 오늘은 철저하게 교훈을 주겠어. 그러고 나면 좀 고분고분해 지겠지.’“맘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무표정하게 말했다.“건배하시죠.”여름은 너무 절망한 나머지 하준의 눈에 불타오르는 질투가 보이지 않았다.‘난 오늘 여기서 끝이구나.’“한 잔 하세요.”“그러면 재미가 없지. 러브샷은 한 번 해야 할 거 아냐?”왕 대표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여름은 억지로 러브샷을 주고 받았다. 여름은 술을 못 하지는 않지만, 여러 날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어 왔던지라 술 몇 잔에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저녁 접대 자리가 오래 갈 줄 알았는데 8시가 채 되지 않아 하준이 재킷을 걸치면서 빙긋 웃었다.“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하더니 나가버렸다.여름은 정신을 차리고 멀어져 가는 하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그 순간, 가슴 속에 남아있던 작은 불씨마저 꺼져 버렸다. 깊은 심연으로 꺼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한때 그 사람을 사랑했던 마음이 있기나 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좋아. 오늘 밤 귀한 선물을 즐겨봐야겠어.”왕 대표는 여름을 껴안았다. 품엔 안긴 여름은 마치 영혼 없는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였다.어떻게 위층으로 올라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룸 안에 들어서자 왕 대표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몸이 달아서 당장이라도 덮칠 기세였다. 여름은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잠시만요. 먼저 샤워 좀 하고요.”“이렇게 향기로운데 뭘 씻어?”왕 대표가 실실거리며 말했다.“그래도 좀 깨끗하게 씻고 싶어요. 좋은 밤 보내야죠.”여름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주 말도 예쁘게 잘하고. 좋아. 기다리지.”왕 대표가 여름의
“그래, 난 악마지. 선택할 기회를 주겠습니다.”하준은 낮고 냉랭하게 웃고는 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여름은 쓴웃음을 지었다. 최하준이 원하는 대로 상황이 돌아가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역시 저런 인간보다야 차라리 최하준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이런 사람과 함께 있고 싶지는 않아요.”여름은 자신도 모르게 뒤에서 하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동시에 수치심이 온몸을 휘감았다.하준이 차가운 눈으로 여름을 돌아보더니 여름의 손을 치웠다.“내 집으로 갑시다.”여름은 조용히 하준을 따랐다.하준의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앉아 있는 최하준은 은은한 조명 아래서 완벽한 실루엣을 보여주었다.“자, 내가 아직도 가르쳐줘야 합니까?”하준은 눈을 치켜 뜨고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띠었다.여름은 얼굴을 붉히며 다가가 떨리는 입술로 키스했다.깊은 밤, 여름이 잠에 들자 하준이 사진을 찍어 곧장 양유진에게 전송했다.******다음 날,여름이 깨어보니 하준이 옆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편안한 파자마 차림이었다.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마주보기가 민망했다.조심스럽게 몸을 뒤척이자 하준이 여름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에게 향했다. 하준은 핸드폰을 내려 놓고 허리를 숙여 여름의 새까만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양유진과 함께 있을 때도 이렇게 수줍어 합니까?”“……”여름의 얼굴에서 다시 핏기가 가셨다.여름은 하진을 똑바로 바라봤다.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다.“양 대표 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하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난 못 믿겠는데.”툭 말을 뱉고서 드레스룸으로 걸음을 옮겼다.여름은 베개로 저 도도한 인간의 머리를 확 짓눌러버리고 싶었다.‘말도 저따위로 할 게 뭐야.’잠시 후, 하준이 말끔히 옷을 차려입고 나왔다. 우아하고 젠틀한 모습으로 변신한 모습을 보고 간밤에 함께 했던 남자가 맞는지 순간 착각이 들었다.“내 아침 식사는, 아직입니까?”하준은 태연하게 아침 식사를 주문했다.
‘이, 이럴수가.’이것은 분명 최하준 짓이다. 새벽에 몰래 이런 걸 찍어서 일부러 양유진에게 전송했음이 틀림없다.여름은 어젯밤 기억이 떠오르며 수치심에 몸둘 바를 몰랐다. 얼른 삭제 버튼을 누르고는 깨끗이 지워졌는지 확인했다.“바로 병원으로 가주세요.”급히 기사에게 말했다.병원에 도착하자 의사들은 급히 상태를 확인하더니 산소호흡기를 끼워주었다.“보호자 분이시니 알려드립니다. 환자분은 신장 하나로만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외부자극이나 스트레스에 민감합니다. 식사조절도 잘 하셔야지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의사가 강조했다.“저희가 임시로 환자분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긴 해도 근본적인 해결은 못합니다.”“감사합니다.”여름은 인사를 했다.입원실에 누운 양유진은 가슴을 움켜쥐고 기침을 계속 했다. 여름은 따뜻한 물을 잔에 따라 그의 입가에 대주었다.양유진은 굳은 얼굴로 물잔을 받아들며 물었다.“당신을 협박했나요?”복잡하고도 침통한 눈빛이 우울해 보였다.“미안해요.”여름은 양유진을 볼 면목이 없었다. 숨고만 싶었다.“유진 씨가 갇혀있는 며칠 간 몸이 감당하기 힘들었을 거에요. 회사도 상황이 안 좋을 거고요.”양유진은 물잔을 바닥에 던져 깨뜨려버렸다. 세상 부드러웠던 얼굴이 분노에 벌겋게 달아올랐다.“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길래 사람을 이 따위로…!”양유진이 이렇게나 화를 내는 것은 처음 보았다. 깨진 유리잔을 보고 한동안 어쩔 줄 몰랐다.“이러지 말아요.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어요.”양유진은 여름의 손을 꽉 잡고 심호흡을 몇 번 했다. 이내 호흡이 잦아들었다.“알고 있어요. 모두 날 위해서였다는 걸. 난 괜찮습니다. 당신 탓 아니에요.”양유진은 여름을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여름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입은 그렇게 말하지만 마음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라도 이런 상황은 받아들이기 힘들 터였다.“이제 그만 해요.”여름은 사뭇 씁쓸한 표정이었다.“난 이제 당신 옆에 있을 자격이 없어요. 그리고 우리가 같이 있
양유진은 점점 멀어져가는 여름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눈에 싸늘한 냉기가 가득했다.이내 주먹을 꽉 쥐었다.분노는 사그라들지 않고 회사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참다 못한 양유진이 사무실 집기들을 모두 집어 던져 부숴버렸다.‘띠리링’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모르는 번호였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짜증스럽게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약혼녀가 다른 남자랑 잤으니 많이 힘드시겠습니다.”핸드폰 건너편에서 낮은 음성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 누구야?”양유진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당신 신장이 멀쩡하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일부러 강여름 씨를 속여서 묶어두려고 한 거죠? 강여름 씨 태생을 진작에 알면서 벨레스 집안을 등에 업고 출세 한번 해보려고…”“닥쳐!”양유진이 더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까발려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섬찟했다.“내가 당신 복수를 도울 수 있다면… 조금 구미가 당깁니까?”낮은 목소리가 계속되었다.“거기다 진영그룹을 최정상에 올려주고 당신이 아끼는 여자가 다시 돌아오도록 해 준다면? 어떻습니까? 해 볼만 하지 않습니까? 내가 하라는 데로 하기만 하면 되는데 말입니다.”“뭘 어쩌겠다는 거요?”양유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당신은 알 필요 없습니다.”양유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그렇게 하지.”‘놈을 짓밟고 올라가 최하준 그 놈에게 오늘의 치욕을 되갚아 주겠어.'핸드폰이 꺼지자, 온화하고 점잖았던 양유진의 얼굴은 점점 흉악하고 악랄하게 일그러졌다.******오후 다섯 시.FTT 임원 하나가 하준의 사무실에서 해외 지사 상황에 대해 열띤 보고를 하고 있었다.상혁이 노크를 하고 들어와 미묘한 표정으로 소식을 알렸다.“부회장님이 오셨습니다. 위로 올라가서 뵙는 게 좋겠습니다.”‘부회장? 어머니?’같이 있던 임원도 흠칫 놀랐다. 최란은 남편과 함께 해외에 오랫동안 나가 있었다
하준은 할말을 마치고 재킷을 입고 사무실을 나가려고 했다.“그 애를 죽게 하려고 그런 데로 보낸 거 아니냐? FTT에서 널 견제할 사람이 없어지니까!”최란이 날카롭게 따져 물었다.하준은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편한 대로 생각하시죠.”“널 낳은 게 너무 후회된다. 임신한 걸 알았을 때 널 지웠어야 하는데.”최란의 목소리가 뒤에서 쩌렁쩌렁 들렸다.하준은 엘리베이터를 탔다.상혁은 조심스럽게 상사의 얼굴을 관찰했다.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무표정 그 자체였다. 하지만 상혁은 지금 폭풍전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최란 부회장을 만날 때마다 늘 크게 다투는 것으로 끝이 났다. 두 사람은 악연 중에 악연임이 틀림없다.상혁은 한숨을 쉬었다. 최란은 줄곧 아들 둘 중 하나만 편애했다. 운전기사가 차를 몰고 오자 하준은 운전석 문을 열고 기사를 내리게 했다. 그러고는 무섭게 엑셀을 밟으며 차를 몰고 떠나버렸다.서울에서는 갈 곳이 없었다.결국 뉴빌가든으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널찍한 대저택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고요했다.하준은 곧장 여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몇 번 울리고 수신 거절이 되면서 전화가 끊어졌다. 계속해서 두 번이나 통화를 시도했지만 모두 거절되었다.“이런 식이라 이거지.”핸드폰을 들여다 보는 하준의 눈은 시뻘겋게 불을 뿜고 있었다.******호텔.여름은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았다.하준의 비열한 성격으로 또 뭔가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긴 했다. 그래서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한참을 기다리다 아무 소식이 없자 룸서비스로 저녁을 시켰다.저녁 일곱 시, 저녁을 먹으려는데 방문이 갑자기 ‘삐걱’ 열리더니 누군가가 발로 문을 차며 들어왔다.하준이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문을 쾅 닫았다.“어… 어떻게 들어왔어요?”여름이 놀라서 펄쩍 뛰었다.“이 호텔은 우리 회사에서 투자한 곳입니다.”하준이 손에 들고 있던 카드 키를 옆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어젯밤에 잘 가르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