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은 편에 앉은 하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저도 모르게 꽉 쥐었다.‘빌어먹을!’ 그저 골탕 먹이려던 것뿐인데 다른 남자의 손이 여름에게 닿은 것을 보자 그 손모가지를 확 비틀어버리고 싶었다.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동안 내가 너무 오냐오냐했지. 오늘은 철저하게 교훈을 주겠어. 그러고 나면 좀 고분고분해 지겠지.’“맘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무표정하게 말했다.“건배하시죠.”여름은 너무 절망한 나머지 하준의 눈에 불타오르는 질투가 보이지 않았다.‘난 오늘 여기서 끝이구나.’“한 잔 하세요.”“그러면 재미가 없지. 러브샷은 한 번 해야 할 거 아냐?”왕 대표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여름은 억지로 러브샷을 주고 받았다. 여름은 술을 못 하지는 않지만, 여러 날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어 왔던지라 술 몇 잔에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저녁 접대 자리가 오래 갈 줄 알았는데 8시가 채 되지 않아 하준이 재킷을 걸치면서 빙긋 웃었다.“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하더니 나가버렸다.여름은 정신을 차리고 멀어져 가는 하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그 순간, 가슴 속에 남아있던 작은 불씨마저 꺼져 버렸다. 깊은 심연으로 꺼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한때 그 사람을 사랑했던 마음이 있기나 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좋아. 오늘 밤 귀한 선물을 즐겨봐야겠어.”왕 대표는 여름을 껴안았다. 품엔 안긴 여름은 마치 영혼 없는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였다.어떻게 위층으로 올라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룸 안에 들어서자 왕 대표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몸이 달아서 당장이라도 덮칠 기세였다. 여름은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잠시만요. 먼저 샤워 좀 하고요.”“이렇게 향기로운데 뭘 씻어?”왕 대표가 실실거리며 말했다.“그래도 좀 깨끗하게 씻고 싶어요. 좋은 밤 보내야죠.”여름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주 말도 예쁘게 잘하고. 좋아. 기다리지.”왕 대표가 여름의
“그래, 난 악마지. 선택할 기회를 주겠습니다.”하준은 낮고 냉랭하게 웃고는 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여름은 쓴웃음을 지었다. 최하준이 원하는 대로 상황이 돌아가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역시 저런 인간보다야 차라리 최하준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이런 사람과 함께 있고 싶지는 않아요.”여름은 자신도 모르게 뒤에서 하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동시에 수치심이 온몸을 휘감았다.하준이 차가운 눈으로 여름을 돌아보더니 여름의 손을 치웠다.“내 집으로 갑시다.”여름은 조용히 하준을 따랐다.하준의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앉아 있는 최하준은 은은한 조명 아래서 완벽한 실루엣을 보여주었다.“자, 내가 아직도 가르쳐줘야 합니까?”하준은 눈을 치켜 뜨고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띠었다.여름은 얼굴을 붉히며 다가가 떨리는 입술로 키스했다.깊은 밤, 여름이 잠에 들자 하준이 사진을 찍어 곧장 양유진에게 전송했다.******다음 날,여름이 깨어보니 하준이 옆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편안한 파자마 차림이었다.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마주보기가 민망했다.조심스럽게 몸을 뒤척이자 하준이 여름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에게 향했다. 하준은 핸드폰을 내려 놓고 허리를 숙여 여름의 새까만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양유진과 함께 있을 때도 이렇게 수줍어 합니까?”“……”여름의 얼굴에서 다시 핏기가 가셨다.여름은 하진을 똑바로 바라봤다.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다.“양 대표 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하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난 못 믿겠는데.”툭 말을 뱉고서 드레스룸으로 걸음을 옮겼다.여름은 베개로 저 도도한 인간의 머리를 확 짓눌러버리고 싶었다.‘말도 저따위로 할 게 뭐야.’잠시 후, 하준이 말끔히 옷을 차려입고 나왔다. 우아하고 젠틀한 모습으로 변신한 모습을 보고 간밤에 함께 했던 남자가 맞는지 순간 착각이 들었다.“내 아침 식사는, 아직입니까?”하준은 태연하게 아침 식사를 주문했다.
‘이, 이럴수가.’이것은 분명 최하준 짓이다. 새벽에 몰래 이런 걸 찍어서 일부러 양유진에게 전송했음이 틀림없다.여름은 어젯밤 기억이 떠오르며 수치심에 몸둘 바를 몰랐다. 얼른 삭제 버튼을 누르고는 깨끗이 지워졌는지 확인했다.“바로 병원으로 가주세요.”급히 기사에게 말했다.병원에 도착하자 의사들은 급히 상태를 확인하더니 산소호흡기를 끼워주었다.“보호자 분이시니 알려드립니다. 환자분은 신장 하나로만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외부자극이나 스트레스에 민감합니다. 식사조절도 잘 하셔야지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의사가 강조했다.“저희가 임시로 환자분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긴 해도 근본적인 해결은 못합니다.”“감사합니다.”여름은 인사를 했다.입원실에 누운 양유진은 가슴을 움켜쥐고 기침을 계속 했다. 여름은 따뜻한 물을 잔에 따라 그의 입가에 대주었다.양유진은 굳은 얼굴로 물잔을 받아들며 물었다.“당신을 협박했나요?”복잡하고도 침통한 눈빛이 우울해 보였다.“미안해요.”여름은 양유진을 볼 면목이 없었다. 숨고만 싶었다.“유진 씨가 갇혀있는 며칠 간 몸이 감당하기 힘들었을 거에요. 회사도 상황이 안 좋을 거고요.”양유진은 물잔을 바닥에 던져 깨뜨려버렸다. 세상 부드러웠던 얼굴이 분노에 벌겋게 달아올랐다.“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길래 사람을 이 따위로…!”양유진이 이렇게나 화를 내는 것은 처음 보았다. 깨진 유리잔을 보고 한동안 어쩔 줄 몰랐다.“이러지 말아요.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어요.”양유진은 여름의 손을 꽉 잡고 심호흡을 몇 번 했다. 이내 호흡이 잦아들었다.“알고 있어요. 모두 날 위해서였다는 걸. 난 괜찮습니다. 당신 탓 아니에요.”양유진은 여름을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여름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입은 그렇게 말하지만 마음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라도 이런 상황은 받아들이기 힘들 터였다.“이제 그만 해요.”여름은 사뭇 씁쓸한 표정이었다.“난 이제 당신 옆에 있을 자격이 없어요. 그리고 우리가 같이 있
양유진은 점점 멀어져가는 여름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눈에 싸늘한 냉기가 가득했다.이내 주먹을 꽉 쥐었다.분노는 사그라들지 않고 회사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참다 못한 양유진이 사무실 집기들을 모두 집어 던져 부숴버렸다.‘띠리링’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모르는 번호였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짜증스럽게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약혼녀가 다른 남자랑 잤으니 많이 힘드시겠습니다.”핸드폰 건너편에서 낮은 음성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 누구야?”양유진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당신 신장이 멀쩡하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일부러 강여름 씨를 속여서 묶어두려고 한 거죠? 강여름 씨 태생을 진작에 알면서 벨레스 집안을 등에 업고 출세 한번 해보려고…”“닥쳐!”양유진이 더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까발려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섬찟했다.“내가 당신 복수를 도울 수 있다면… 조금 구미가 당깁니까?”낮은 목소리가 계속되었다.“거기다 진영그룹을 최정상에 올려주고 당신이 아끼는 여자가 다시 돌아오도록 해 준다면? 어떻습니까? 해 볼만 하지 않습니까? 내가 하라는 데로 하기만 하면 되는데 말입니다.”“뭘 어쩌겠다는 거요?”양유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당신은 알 필요 없습니다.”양유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그렇게 하지.”‘놈을 짓밟고 올라가 최하준 그 놈에게 오늘의 치욕을 되갚아 주겠어.'핸드폰이 꺼지자, 온화하고 점잖았던 양유진의 얼굴은 점점 흉악하고 악랄하게 일그러졌다.******오후 다섯 시.FTT 임원 하나가 하준의 사무실에서 해외 지사 상황에 대해 열띤 보고를 하고 있었다.상혁이 노크를 하고 들어와 미묘한 표정으로 소식을 알렸다.“부회장님이 오셨습니다. 위로 올라가서 뵙는 게 좋겠습니다.”‘부회장? 어머니?’같이 있던 임원도 흠칫 놀랐다. 최란은 남편과 함께 해외에 오랫동안 나가 있었다
하준은 할말을 마치고 재킷을 입고 사무실을 나가려고 했다.“그 애를 죽게 하려고 그런 데로 보낸 거 아니냐? FTT에서 널 견제할 사람이 없어지니까!”최란이 날카롭게 따져 물었다.하준은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편한 대로 생각하시죠.”“널 낳은 게 너무 후회된다. 임신한 걸 알았을 때 널 지웠어야 하는데.”최란의 목소리가 뒤에서 쩌렁쩌렁 들렸다.하준은 엘리베이터를 탔다.상혁은 조심스럽게 상사의 얼굴을 관찰했다.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무표정 그 자체였다. 하지만 상혁은 지금 폭풍전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최란 부회장을 만날 때마다 늘 크게 다투는 것으로 끝이 났다. 두 사람은 악연 중에 악연임이 틀림없다.상혁은 한숨을 쉬었다. 최란은 줄곧 아들 둘 중 하나만 편애했다. 운전기사가 차를 몰고 오자 하준은 운전석 문을 열고 기사를 내리게 했다. 그러고는 무섭게 엑셀을 밟으며 차를 몰고 떠나버렸다.서울에서는 갈 곳이 없었다.결국 뉴빌가든으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널찍한 대저택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고요했다.하준은 곧장 여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몇 번 울리고 수신 거절이 되면서 전화가 끊어졌다. 계속해서 두 번이나 통화를 시도했지만 모두 거절되었다.“이런 식이라 이거지.”핸드폰을 들여다 보는 하준의 눈은 시뻘겋게 불을 뿜고 있었다.******호텔.여름은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았다.하준의 비열한 성격으로 또 뭔가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긴 했다. 그래서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한참을 기다리다 아무 소식이 없자 룸서비스로 저녁을 시켰다.저녁 일곱 시, 저녁을 먹으려는데 방문이 갑자기 ‘삐걱’ 열리더니 누군가가 발로 문을 차며 들어왔다.하준이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문을 쾅 닫았다.“어… 어떻게 들어왔어요?”여름이 놀라서 펄쩍 뛰었다.“이 호텔은 우리 회사에서 투자한 곳입니다.”하준이 손에 들고 있던 카드 키를 옆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어젯밤에 잘 가르쳐
여름은 생애 최악의 순간으로 잘못 들어섰다는 느낌이 들었다.******새벽 두 시.포악질을 하던 하준이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고는 흠칫 놀랐다.여름이 고통에 웅크리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다.“강여름 씨!”하준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여름은 미동도 없었다.하준은 너무 놀라 부랴부랴 침대 위의 여름을 시트로 감싸 병원으로 옮겼다.깊은 밤, 병원 복도.하준은 창가에 서서 담뱃불을 붙이려고 했지만 손이 떨려서 한참이나 불을 붙이지 못했다.“내가 해줄게.”이주혁이 흰 가운을 입고 하준에게 다가와 담뱃불을 붙여 주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친구를 쳐다보았다.“감정 컨트롤이 안 되는 걸 보니 재발한 거 아닌가 싶다. 담배 피는 것도 늘었고.”“오늘 어머니를 만났거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렸어.”하준은 너무나 혼란스러웠다.“강여름은 상태가 어때?”“산부인과에서 그러는데….”말을 멈춘 주혁이 하준을 잠시 바라보았다.“대체 얼마나 심하게 한 거야? 닥터 류 말로는 첫 경험이라는데, 최소 이삼 일 정도는 쉬어야 한단다.”“뭐라고?”하준이 휙 주혁에게 시선을 돌렸다.“류 닥이 그러더라. 류 닥 너도 알지? 임상 경험도 풍부하고.”주혁이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폭탄처럼 머릿속에서 터지는 느낌이었다. 귀에서 이명이 웅웅거렸다.‘강여름과 양유진 사이가 깨끗했다는 말이야?그럼, 그동안 나 혼자 오해한 거였어?’“저… 정말로 양유진과 아무 일도 없었다고?”하준은 머릿속이 텅 비어서 아무것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양유진과 하룻밤을 보낸 게 아니었어?양유진의 약혼녀였잖아.’“류 닥이 뭐 하러 거짓말을 하겠어?”하준의 입술이 뻣뻣하게 말라갔다. 여름은 정말 감옥에 갇힌 양유진을 구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였던 것이다.‘완전히 내 오해였어.’이제와 여름에게 퍼부었던 말들이 생각나 가슴이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다. 후회되었다. 너무 괴로워서 두 주먹
하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이토록 참담한 적이 없었다.‘결국 내가 저지른 죗값을 받는군.무슨 짓을 한 거야!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여름은 매력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다.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그렇게도 사랑스럽고 똑똑했던 여름이 그리웠다.“나 좀 봐요. 이불 속에만 있지 말고. 차라리 마음껏 화내요.” 하준이 손을 뻗어 이불을 걷어내려고 하자, 여름은 자기 손가락을 꽉 문 채 눈물 범벅이었다.“먹을 것을 좀 보내겠습니다. 밤새 아무 것도 못 먹었잖아요.”하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나갔다. 얼마 후, 간호사가 들어왔다.여름은 하준이 나간 것을 확인하고서야 공포심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온몸 여기저기가 아직도 욱신거리고 아팠다. 입맛도 없어서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다음날 눈을 떠 보니 날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하준이 창가에 서서 작은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오늘 출근 못하니까 회의 취소해.”“오늘 회의는 부회장님이 참석하시는…”“취소하라면 최소해.”전화를 끊고서 여름의 두 눈과 마주쳤다.여름은 두려워하며 시선을 피했다. 하준이 침대 옆으로 다가와 가만히 바라보다가 따뜻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남자를 처음 겪었다고 의사가 말해주더군요. 그간 오해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고 약속하겠습니다. 날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여름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쩐지 부드럽게 말한다 싶었다. 하마터면 양심 있는 인간인 줄 착각할 뻔했잖아.의사한테 듣고서야 믿다니, 우리 사이에 그 정도로 신뢰가 없었다는 의미겠지.’“네.”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이 FTT의 최하준 회장인데 누가 감히 용서를 하고 말고 하겠어. 누구든 까라면 까는 거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하준이 조금 실망스러운 듯이 말했다.“욕이라도 해요.”“…….”‘욕을 하라고? 어젯밤에 내가 뺨 한 번 때렸다가 죽을 뻔했는데?’여름은 마음 속으로 말을 삼켰다.하준은 쓴
“내가 하겠습니다.”하준은 재킷을 벗고 소매를 걷어올렸다.여름은 지금껏 하준이 이렇게 주방에서 뭘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과연 먹을 수 있는 게 나올까?’하준은 정말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 하지만 휴대폰을 켜 영상을 틀어 놓고 뭔가 하려고 열심이었다. 귀찮아서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한 시간이나 지나 드디어 뭔가를 만들어 내왔다. 생선구이에 삼계탕, 맛김치까지 애써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하준의 손등에 시선이 꽂혔다. 기름이 튀어서 빨갛게 달아올라 당장 약을 바르지 않으면 물집이 잡힐 것 같았다.여름의 입술이 달싹였다. 말을 하려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해도 싸지.’여름은 마음을 굳게 먹기로 다짐했다. “먹어봐요.”하준이 삼계탕을 앞으로 밀어주었다.삼계탕 안에는 닭이 난도질 당해서 그야말로 둥둥 떠 있었다. ‘칼질하는 방법은 아직 배우지 않은 모양이지?’그래도 재료는 다 넣었는지 맛은 어지간했다. 맛김치를 먹고서는 차마 맛에 대해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하준도 맛을 보았다. 정말 먹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할 수 없이 생선구이를 권했다.“생선 한 번 먹어봐요.”“…….”불평 한마디 없이 여름은 하준이 해준 요리를 열심히 먹었다.하준도 맛을 보았다. 처음 집어 먹을 땐 몰랐는데 먹다 보니 비린내가 나고 생선 특유의 감칠맛도 전혀 없었다. 하준은 당황해서 김치와 생선구이를 모두 음식물처리기에 넣어버렸다.“먹지 말아요. 도저히 못 먹겠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습니까?”짜증스런 말투가 점점 높아지자 여름은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하준이 화를 내는 것 같아 두 눈에는 불안과 공포가 엄습해왔다.그 모습을 보니 하준은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다. 얼른 가서 여름을 안았다. 괴로운 듯 입을 열었다.“당신을 동성에서 봤던 모습으로 되돌려 놓고 싶은데…”여름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당신에게 맞추려고 노력했던 그거 말이에요?”‘동성에서는 그랬잖아? 최하준을 사로잡기 위해서 무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