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준은 할말을 마치고 재킷을 입고 사무실을 나가려고 했다.“그 애를 죽게 하려고 그런 데로 보낸 거 아니냐? FTT에서 널 견제할 사람이 없어지니까!”최란이 날카롭게 따져 물었다.하준은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편한 대로 생각하시죠.”“널 낳은 게 너무 후회된다. 임신한 걸 알았을 때 널 지웠어야 하는데.”최란의 목소리가 뒤에서 쩌렁쩌렁 들렸다.하준은 엘리베이터를 탔다.상혁은 조심스럽게 상사의 얼굴을 관찰했다.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무표정 그 자체였다. 하지만 상혁은 지금 폭풍전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최란 부회장을 만날 때마다 늘 크게 다투는 것으로 끝이 났다. 두 사람은 악연 중에 악연임이 틀림없다.상혁은 한숨을 쉬었다. 최란은 줄곧 아들 둘 중 하나만 편애했다. 운전기사가 차를 몰고 오자 하준은 운전석 문을 열고 기사를 내리게 했다. 그러고는 무섭게 엑셀을 밟으며 차를 몰고 떠나버렸다.서울에서는 갈 곳이 없었다.결국 뉴빌가든으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널찍한 대저택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고요했다.하준은 곧장 여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몇 번 울리고 수신 거절이 되면서 전화가 끊어졌다. 계속해서 두 번이나 통화를 시도했지만 모두 거절되었다.“이런 식이라 이거지.”핸드폰을 들여다 보는 하준의 눈은 시뻘겋게 불을 뿜고 있었다.******호텔.여름은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았다.하준의 비열한 성격으로 또 뭔가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긴 했다. 그래서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한참을 기다리다 아무 소식이 없자 룸서비스로 저녁을 시켰다.저녁 일곱 시, 저녁을 먹으려는데 방문이 갑자기 ‘삐걱’ 열리더니 누군가가 발로 문을 차며 들어왔다.하준이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문을 쾅 닫았다.“어… 어떻게 들어왔어요?”여름이 놀라서 펄쩍 뛰었다.“이 호텔은 우리 회사에서 투자한 곳입니다.”하준이 손에 들고 있던 카드 키를 옆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어젯밤에 잘 가르쳐
여름은 생애 최악의 순간으로 잘못 들어섰다는 느낌이 들었다.******새벽 두 시.포악질을 하던 하준이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고는 흠칫 놀랐다.여름이 고통에 웅크리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다.“강여름 씨!”하준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여름은 미동도 없었다.하준은 너무 놀라 부랴부랴 침대 위의 여름을 시트로 감싸 병원으로 옮겼다.깊은 밤, 병원 복도.하준은 창가에 서서 담뱃불을 붙이려고 했지만 손이 떨려서 한참이나 불을 붙이지 못했다.“내가 해줄게.”이주혁이 흰 가운을 입고 하준에게 다가와 담뱃불을 붙여 주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친구를 쳐다보았다.“감정 컨트롤이 안 되는 걸 보니 재발한 거 아닌가 싶다. 담배 피는 것도 늘었고.”“오늘 어머니를 만났거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렸어.”하준은 너무나 혼란스러웠다.“강여름은 상태가 어때?”“산부인과에서 그러는데….”말을 멈춘 주혁이 하준을 잠시 바라보았다.“대체 얼마나 심하게 한 거야? 닥터 류 말로는 첫 경험이라는데, 최소 이삼 일 정도는 쉬어야 한단다.”“뭐라고?”하준이 휙 주혁에게 시선을 돌렸다.“류 닥이 그러더라. 류 닥 너도 알지? 임상 경험도 풍부하고.”주혁이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폭탄처럼 머릿속에서 터지는 느낌이었다. 귀에서 이명이 웅웅거렸다.‘강여름과 양유진 사이가 깨끗했다는 말이야?그럼, 그동안 나 혼자 오해한 거였어?’“저… 정말로 양유진과 아무 일도 없었다고?”하준은 머릿속이 텅 비어서 아무것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양유진과 하룻밤을 보낸 게 아니었어?양유진의 약혼녀였잖아.’“류 닥이 뭐 하러 거짓말을 하겠어?”하준의 입술이 뻣뻣하게 말라갔다. 여름은 정말 감옥에 갇힌 양유진을 구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였던 것이다.‘완전히 내 오해였어.’이제와 여름에게 퍼부었던 말들이 생각나 가슴이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다. 후회되었다. 너무 괴로워서 두 주먹
하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이토록 참담한 적이 없었다.‘결국 내가 저지른 죗값을 받는군.무슨 짓을 한 거야!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여름은 매력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다.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그렇게도 사랑스럽고 똑똑했던 여름이 그리웠다.“나 좀 봐요. 이불 속에만 있지 말고. 차라리 마음껏 화내요.” 하준이 손을 뻗어 이불을 걷어내려고 하자, 여름은 자기 손가락을 꽉 문 채 눈물 범벅이었다.“먹을 것을 좀 보내겠습니다. 밤새 아무 것도 못 먹었잖아요.”하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나갔다. 얼마 후, 간호사가 들어왔다.여름은 하준이 나간 것을 확인하고서야 공포심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온몸 여기저기가 아직도 욱신거리고 아팠다. 입맛도 없어서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다음날 눈을 떠 보니 날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하준이 창가에 서서 작은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오늘 출근 못하니까 회의 취소해.”“오늘 회의는 부회장님이 참석하시는…”“취소하라면 최소해.”전화를 끊고서 여름의 두 눈과 마주쳤다.여름은 두려워하며 시선을 피했다. 하준이 침대 옆으로 다가와 가만히 바라보다가 따뜻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남자를 처음 겪었다고 의사가 말해주더군요. 그간 오해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고 약속하겠습니다. 날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여름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쩐지 부드럽게 말한다 싶었다. 하마터면 양심 있는 인간인 줄 착각할 뻔했잖아.의사한테 듣고서야 믿다니, 우리 사이에 그 정도로 신뢰가 없었다는 의미겠지.’“네.”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이 FTT의 최하준 회장인데 누가 감히 용서를 하고 말고 하겠어. 누구든 까라면 까는 거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하준이 조금 실망스러운 듯이 말했다.“욕이라도 해요.”“…….”‘욕을 하라고? 어젯밤에 내가 뺨 한 번 때렸다가 죽을 뻔했는데?’여름은 마음 속으로 말을 삼켰다.하준은 쓴
“내가 하겠습니다.”하준은 재킷을 벗고 소매를 걷어올렸다.여름은 지금껏 하준이 이렇게 주방에서 뭘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과연 먹을 수 있는 게 나올까?’하준은 정말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 하지만 휴대폰을 켜 영상을 틀어 놓고 뭔가 하려고 열심이었다. 귀찮아서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한 시간이나 지나 드디어 뭔가를 만들어 내왔다. 생선구이에 삼계탕, 맛김치까지 애써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하준의 손등에 시선이 꽂혔다. 기름이 튀어서 빨갛게 달아올라 당장 약을 바르지 않으면 물집이 잡힐 것 같았다.여름의 입술이 달싹였다. 말을 하려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해도 싸지.’여름은 마음을 굳게 먹기로 다짐했다. “먹어봐요.”하준이 삼계탕을 앞으로 밀어주었다.삼계탕 안에는 닭이 난도질 당해서 그야말로 둥둥 떠 있었다. ‘칼질하는 방법은 아직 배우지 않은 모양이지?’그래도 재료는 다 넣었는지 맛은 어지간했다. 맛김치를 먹고서는 차마 맛에 대해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하준도 맛을 보았다. 정말 먹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할 수 없이 생선구이를 권했다.“생선 한 번 먹어봐요.”“…….”불평 한마디 없이 여름은 하준이 해준 요리를 열심히 먹었다.하준도 맛을 보았다. 처음 집어 먹을 땐 몰랐는데 먹다 보니 비린내가 나고 생선 특유의 감칠맛도 전혀 없었다. 하준은 당황해서 김치와 생선구이를 모두 음식물처리기에 넣어버렸다.“먹지 말아요. 도저히 못 먹겠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습니까?”짜증스런 말투가 점점 높아지자 여름은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하준이 화를 내는 것 같아 두 눈에는 불안과 공포가 엄습해왔다.그 모습을 보니 하준은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다. 얼른 가서 여름을 안았다. 괴로운 듯 입을 열었다.“당신을 동성에서 봤던 모습으로 되돌려 놓고 싶은데…”여름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당신에게 맞추려고 노력했던 그거 말이에요?”‘동성에서는 그랬잖아? 최하준을 사로잡기 위해서 무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준의 핸드폰이 울렸다.핸드폰 액정에 보이는 발신자는 ‘할머니’ 였다.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무슨 일이세요?”“일 없으면 전화도 못하는 거냐? 오늘 하루 종일 뭐가 그리 바빠? 요즘 본가에 오지도 않고. 네 엄마가 왔으니 저녁에 와서 자고 가거라.”하준이 침실을 흘끗 보더니 단박에 거절했다.“그럴 시간이 없습니다.”“회의 참석할 시간도 없어, 유인이 만날 시간도 없어, 대체 뭘 하길래 그렇게 바쁜 게야?”장춘자가 화를 내며 물었다.“오늘 무조건 오너라. 다들 모여서 밥 한 끼 좀 제대로 먹자꾸나.”하준이 차갑에 대답했다.“모두 다 모여서 최양하를 복귀시키라고 압박하겠죠.”장춘자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얘, 할아버지랑 내가 간신히 네 엄마를 회사 경영에서 손 떼게 만든 건 알지? 너랑 양하 둘이 바로 붙어서 경쟁하라고. 양하가 네 상대가 못 되는 건 동네 개도 다 안다. 기껏 이러고 도와주고 있는데 걔를 왜 건드렸어? 네 엄마 회사로 돌아와 봐라. 또 양하 싸고 돌아서 쉽게 쉽게 해결 안 된다.”“…….”하준이 콧방귀를 뀌었다.“알겠습니다. 귀국시키죠.”“그래, 잘 생각했다.”흡족한 듯 장춘자가 덧붙였다.“그나저나 나는 언제쯤 너랑 밥 한 끼 하겠니?”“당분간은 시간이 없습니다.”장춘자가 따졌다.“할미랑 밥 먹을 시간도 없다니, 숨겨둔 여자 때문에 바쁜 게지? 날 바보로 아니? 여자 데려다 밤을 보냈다고 다 들었다.”‘서유인이 분명해. 문 따고 들어온 날 감 잡았겠지. 내 측근들은 입 열면 죽거든.’“제 나이가 몇인데 그럴 수도 있죠.”“유인이가 있는데 그러면 못쓰지.”“서유인에게는 관심 없습니다. 이만 들어가세요.”하준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다음 날 아침, 여름이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보니, 저택에 일하는 아주머니가 와 있었다. 전에 하준의 집에서 일했던 분이었다.이모님이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회장님이 여기 와서 강여름 씨를 돌보라고 했어요.”“고맙습니다.”여름은 어
최양하가 푸르크에서 실종되었다는 뉴스가 순식간에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모든 언론에서 최양하 실종 사건을 다뤘다.- 최양하 실종. 친형인 최하준 회장이 최양하 부회장을 위험지역인 푸르크에 파견했다고 한다. 푸르크는 현재 심각한 내전으로 여행 위험지역으로 분류되어 있다. 현재 최양하 부회장은 실종 후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최양하 실종. 푸르크는 오늘 아침에도 총탄이 빗발치고 연기가 자욱하다고 합니다.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어 최양하 부회장의 생존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보입니다.- 최양하 실종. FTT최하준 회장 무소불위의 권력 휘둘러 친동생 위험지역으로 내몰아.- 최양하 부회장님은 아주 좋은 분이셨어요. 지속적으로 빈곤지역에 구호품을 지원해 주셨고 학교 건립에 투자도 해 주셨죠. 최하준 회장이 정말 너무하군요.- 권력횡포가 심해서 감히 최하준 회장을 건드리면 회사를 나가야 한다고 봐야죠.- 하하, 최하준 회장 입김이면 뭐든 가능한 게 우리나라죠. 금기사항을 어겼다가는 바로 퇴사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최 회장은 신적인 존재니까.순식간에 관련기사와 인기 검색어에서 1순위가 되었다. 여름은 소식을 접하면서 점점 창백해졌다.‘최양하에게 무슨 일이 생기다니!’최양하가 여름을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최하준이 동생을 푸르크로 보내는 일은 없었을 거다. 결국 최양하를 이 지경에 몰아 넣은 것은 여름이었다.******FTT 본사최하준은 곧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사무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최란이 사정 없이 하준을 향해 손을 들었다.하준은 어머니의 손목을 잡았다. 최란은 광분하여 소리를 질러댔다. 분노에 어쩔 줄 몰라하며 벌건 눈으로 노려보았다.“양하가 잘못되기라도 했단 봐라, 넌 죽은 목숨이야!”소매 아래에 있던 하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옆에 있던 추동현이 황급히 최란의 어깨를 잡았다.“진정해요. 당장은 양하를 찾는 게 급선무지. 티켓을 구해보라고 했으니 내가 다녀올게.”“당신이요?”최란의 얼
일주일 후.여름은 윤서와 함께 병원에 실밥을 뽑으러 갔다.이주혁이 몸소 주차장까지 내려와 두 사람을 맞았다. 여름은 이주혁을 처음 봤다.키가 훤칠한데다 흰색 의사 가운을 입고 안경을 쓰고 있어서 지적인 카리스마가 돋보였다. 입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옆에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다만 입술이 너무 얇았다. 그런 사람은 보통 성격이 잔인하다고 하는데 의외였다.윤서가 감동했다.“카메라만 돌리면 영화 촬영장 되겠는데요? 너무 멋있게 생기셨어요.”“농담도 잘하십니다.”이주혁이 빙그레 웃었다.“가시죠. 주치의한테 진료 접수를 해 두었습니다. 이쪽입니다.”“번거롭게 해드리네요. 제가 혼자 가도 되는데요.”여름이 몸둘 바를 몰랐다. 지난 번에는 그런 일로 입원했었고 여름이 가는 곳이 산부인과여서 더 그랬다.이주혁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괜찮습니다. 하준이가 직접 전화해서 부탁한 거라서요.”여름은 어제 밤 걸려온 전화가 떠올랐다. 하준이 실밥을 뽑으러 가야 한다는 걸 기억하고 있다가 전화를 해 주었다.세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서 있는데 뒤에서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주혁 씨…”세 사람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여름의 동공이 커졌다. 서유인이었다. 서유인 옆에는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중년의 여성이 함께 있었다. 세련된 화장을 하고 삼십 대로 보이는 동안의 외모였다. 풍기는 분위기가 그야말로 기가 세 보였다. 서유인은 옆에서 졸졸 쫓아다니는 모양새였다.“어머님, 오랜만에 뵙네요.”이주혁이 아주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귀국하셨습니까?”“그래. 양하한테 사고가 나서, 외국에서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있어야지.”최란이 옆에 있는 여름과 윤서를 눈으로 훑었다. ‘스물 남짓 된 아가씨들이네. 주혁이 끼고 노는 가벼운 애들이겠지?’최란은 여름과 윤서를 눈 여겨 보지 않았다.서유인이 입을 막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너 왜 여기 있어? 강변 부지 개발을 성사시켰다더니 주혁 씨 덕분이었구나!”“ 이
“그럼, 그러실래요? 무슨 일 있으면 저한테 전화 주세요.”이주혁은 최란 일행과 함께 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 때, 최란의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울렸다.“뭐라고? 돌아왔어? 응, 그래, 그래. 공항으로 바로 갈게.”전화를 끊고 최란은 서유인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양하와 하준이가 공항에 도착했단다. 가자. 우리가 마중 나가야지. 진료는 다음 번에 받도록 하지.”“네, 어머님, 저도 하준 씨가 정말 보고 싶어요.”서유인이 기세등등하게 여름을 흘겨보았다. 최란과 서유인은 쌩하니 병원 밖으로 사라졌다.윤서가 슬쩍 긴장해서 여름을 바라보았다. 여름의 얼굴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 것 같았다.“가자, 엘리베이터 왔네.”“그럼 제가 두 분 모시겠습니다.”이주혁이 엘리베이터에 따라 들어가 주먹을 불끈 쥐고 가볍게 기침을 했다.“서유인이 뭣도 모르고 혼자 신나서 저러는데, 하준이 마음은 오로지 강여름 씨에게 있어요. 하준이는 우리가 제일 잘 알아요.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십시오.”“난 괜찮아요.”여름은 이주혁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최양하가 무사히 돌아왔다니 어깨에서 무거운 돌덩이가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병원 진료를 마치니 윤서는 여름이 쓸데없는 생각을 할까 걱정이었다. “우리 포장마차 갈래? 잘 하는 집 알아.”“좋아. 우리 서울에서 포장마차는 처음이지?”두 사람은 차를 몰고 포장마차로 향했다. 새우소금구이, 닭발, 양꼬치에 해물파전을 잔뜩 시켜서 먹고 있는데 하준의 전화가 울렸다.“지금 어딥니까?”“지금 해물파전 먹어요.”여름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또 한 소리 들을까 봐 겁이 났다. 하준은 이런 길거리 음식은 혐오하기 때문이다.하준이 잠시 조용해지더니 말했다.“위치 좀 찍어줘요. 그쪽으로 가겠습니다.”여름은 얼떨떨했다. ‘서유인이 그쪽으로 마중 나간다 하지 않았어? 어째서 귀국 하자마자 본가로 가지 않고 날 먼저 찾아 오는 거야?’“여기 길거리 포장마차에요. 여기 어수선해서 최하준 씨는 별로….”“잔소리 말고 빨리 위치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