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얼굴빛이 점점 파랗게 질렸다.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욱신거리는 통증이 시작되었다. 가능한 한 평생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하준 씨, 여기에요!”서유인이 얼른 뛰어가 하준의 팔에 착 감겼다. 누가 보면 영락없는 열애 중인 커플의 모습이었다.“아!”하준은 보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뭐야? 어제 춤 한 번 췄다고 애인 행세를 할 셈인가?’ 살짝 짜증이 나려고 하는데 서경주와 위자영이 부랴부랴 다가왔다.“어서 오게”서경주가 온화한 목소리로 인사하고 하준에게 악수를 청했다.“안녕하십니까? 댁에서 뵙는 것은 처음이네요.”서경주에게 하준은 깍듯이 예의를 차리고 대했다. 다른 사람들에게처럼 거만하거나 체면을 깎아 내리는 태도가 아니었다.“무슨 소리예요. 최 회장이 이렇게 와주니 우리가 영광이죠.”위자영이 주름이 생길 지경으로 활짝 웃으며 끼어들었다.서경주는 한껏 오버하는 아내가 민망했지만 애써 침착하게 예의를 갖췄다.“안으로 들어와요. 날이 춥지요?”부부가 하준을 위해 길을 터주면서 여름은 얼떨결에 하준과 마주하게 되었다.둘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눈빛이 순식간에 엉키고 있었다. 그 강렬한 눈빛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계속 시선을 마주칠 용기가 나질 않아 여름은 애써 눈길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여름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하준도 여름을 보고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마주칠 줄이야. 짙은 눈동자가 순간 움찔했다. 하준의 두 눈에는 폭풍우 같은 거센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그러나 하준이 워낙 잘 숨기는 바람에 그 눈빛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지만, 시선은 시종일관 여름을 향했다.서유인은 그 모습에 속이 뒤집혔다. 질투심에 얼른 하준의 팔을 잡아당겨 애교를 떨었다.“하준 씨, 뭘 봐요? 여기는 얼마 전에 우리 아빠가 밖에서 데리고 온 언니에요.”말 속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이제야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강여름이 강신희의 딸인 것은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
하준이 매끈한 입술을 살짝 비틀며 나지막이 웃었다.“제가 별로 반갑지 않으신 것 같군요. 그러면 이만 가보겠습니다.”하준이 돌아가려고 하자 모두들 당황하여 술렁거렸다. 서유인은 필사적으로 팔에 매달려서 소리를 높였다.“아빠, 얼른 사과하세요.”서경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대로 하준이 이곳을 나간다면 서경주가 최하준에게 큰 무례를 범했다는 소문은 금새 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벨레스의 입지가 사라지는 건 보나마나 뻔 한 일이었다.“여, 여름아, 사과 드리겠니?”서경주가 어쩔 수 없이 쓴 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여름은 분노에 파르르 떨었다. 두 주먹만 꼭 쥘 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한없이 매력적으로 보이던 그 얼굴이 오늘은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어떻게 이런 인간을 사랑했을까?’여름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답은 하나였다. 져 줄 수밖에 없었다.“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이쪽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해서 실수가 있었습니다.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하준이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뻔뻔스럽게 잘도 둘러대는군.’“우리 들어가요, 네?”서유인이 분위기를 바꾸려고 화제를 돌렸다. 하준이 더는 여름과 엮이지 않기를 바랬다.옆에는 시종일관 서유인이 껌처럼 딱 붙어 있었다. 하준은 그런 서유인을 떼어버리고 싶었지만 여름의 넋 나간 얼굴을 보고는 그냥 좀 참기로 했다. 하준이 소파에 앉자 서유인은 하준의 어깨에 더욱 더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보고 있는 여름은 매우 불편했다. 하준의 옆은 한때 자신의 자리였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자리가 되어 있었다.‘이 남자는 정말 날 사랑하긴 한 걸까? 나에 대한 마음이 정말 하나도 남아있지 않나?’“어머! 그냥 몸만 오면 되는데 어쩜 이렇게 귀한 선물까지 가져왔어요?”위자영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돌아보니 기사가 엄청난 양의 선물을 집안으로 나르고 있었다. 하나하나 모두 시중에서 보기 드문 물건에다 굉장히 값나가는 것들이었다.선물들을 보고 하준은 하마터면
서유인과 하준 옆에서 손 아프게 과일이나 까고 있으려니 울컥했다.‘어쩌다가 난 이런 사람을 사랑했을까? 서유인이랑 수준이 딱 맞는 천박한 인간이었어…’ 불편한 자리가 계속되고 시간은 어느새 식사시간이 되었다. 여름이 대놓고 말했다.“저는 여기에서 같이 식사할 자격이 없으니 주방에서 따로 식사하겠습니다.”이번에는 허락도 들을 것 없다는 듯이 곧장 자리를 벗어났다.하준의 얼굴빛이 금새 굳어버렸다. “주제 파악은 잘하네, 시키니까 얌전히 과일도 까고.”서유인은 거만한 말투로 고개를 까딱했다.서경주는 남몰래 이를 꽉 깨물었다. 할 말도 없었다.저녁 식사는 위자영이 하루종일 공을 들여 준비시킨 음식들이었는데, 하준은 두 세 젓가락 맛을 보더니 입맛이 없는지 수저를 놓았다.강여름과 헤어지고 나서는 한 끼도 제대로 먹은 적이 없었다. 속이 늘 헛헛했다.“음식이 입에 안 맞나 보네요.”위자영이 눈치를 보며 소심하게 물어보았다.“방금 과일을 너무 많이 먹었나 봅니다. 어서 드십시오. 저는 손 좀 씻고 오겠습니다.”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화장실로 가는 길에 주방을 지나야 했다. 하준은 마치 자석에 끌리듯 주방 안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주방 한켠에는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는 여름이 눈에 들어왔다.‘내가 다른 여자랑 있는 걸 보고도 밥이 넘어가?’괜히 심술이 나서 저도 모르게 성큼성큼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여름 앞에 멈춰 서서 차갑게 조롱하기 시작했다.“동성에는 여기처럼 맛있는 음식이 없었나 봅니다. 누가 보면 굶은 사람인 줄 알겠습니다?”“…….”갑자기 툭 던지는 악의로 가득찬 말에 여름은 입에 든 음식을 삼킬 수가 없었다.“처!음 먹어봐요, 처!음. 재료도 특!이하고, 참! 맛있네요”여름이 말을 하자 입 안에 씹고 있던 음식이 그의 얼굴에 '파바박 튀었다. 다분히 고의적이었다.“아니, 이게 대체! ” 하준은 화가 나서 얼굴은 벌게지고 목은 완전히 잠겨버렸다. 매끈한 얼굴, 완벽한 수트에는 여름의 입에서 튄
여름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하준을 노려보았다. 눈에는 음흉한 웃음기가 가득했고 오히려 신이 난 표정이었다.이를 꽉 깨물고 울분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유감스럽게도 분명 우리 엄마랑 아빠가 더 일찍 만나셨으니까 몇 달이라도 내가 너보다 언니야. 손윗사람에게 말 조심해. 그리고 난 저 사람 잡은 적 없어.”“야, 그럼 하준 씨가 널 모함한다는 거야?”서유인이 화를 내며 독설을 내뱉었다.“최하준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너는 감히 눈도 못 마주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너같은 게 언감생심 말이나 붙여볼 수 있는 줄 알아? 어떻게든 팔자 한 번 고쳐보겠다고 주제 파악 못하는 것들 내가 많이 봐서 알지.”하준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하는 말들을 듣다 보니 짜증이 확 밀려왔다.서유인에게는 처음부터 관심 따윈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교양없는 모습을 보니 재벌가 규수같지가 않았다. “무슨 일로 여기 이러고 있는 건가?”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리자 서경주와 위자영이 부리나케 달려왔다.“마침 잘 오셨어요. 강여름이 하준 씨한테 꼬리 치다가 딱 걸렸지 뭐예요.”서유인이 주저하지 않고 부모에게 일러바쳤다.“게다가 엄마가 굴러온 돌이라는데요?”위자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남편 서경주가 자신과 결혼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위자영만은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질까 늘 노심초사 해 왔다.“강여름, 네가 이젠 선을 넘는구나. 여기 들어올 때부터 잘 대해줬더니 뭐? 지금 걸치고 있는 것도 모두 내가 명품으로 사다 준 것들인데, 은혜를 원수로 갚아? 이 배은망덕한 것!”“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서경주는 죽을 맛이었다.“오해는 무슨 오해예요? 하준 씨가 직접 말 한 건데요.”서유인이 발을 탕탕 굴렀다.“약혼자도 있으면서 남의 남자까지 넘보고! 뻔뻔한 거 봐.”“약혼자가 있습니까?”하준이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 눈빛은 그를 잘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서늘함이었다.“네.
“시끄러워. 여름이는 내가 20년 동안이나 돌보지 못했던 내 딸이야. 여긴 내 집이니 여름이가 지내고 싶은 만큼 지낼 수 있어. 불만 있으면 당신이 유인이를 데리고 나가던지.”서경주가 인정사정 없이 응대했다.위자영이 붉으락 푸르락 했다. “좋아요. 만약 유인이 혼사가 잘못 되기라도 하면 쟤는 내가 가만히 안 둬요.”무서운 얼굴로 한참 여름을 노려보더니 휙 나가버렸다.“저는 최 회장을 잡은 적 없습니다.”여름이 진지하게 말했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경주마저도 저들이 하는 말을 믿는다면 친아버지에 대한 실망이 클 것 같았다.서경주가 한숨을 푹 쉬었다.“난 너를 믿는다. 최 회장이 내가 불륜으로 널 낳은 줄 아는 모양이구나. 그런 걸 아주 싫어하거든.”여름이 애매한 표정을 짓자 서경주가 찬찬히 이야기 해주었다.“최하준 회장도 알고 보면 가엽단 말이지. 그 사람 어머니인 최란은 어려서부터 애지중지 자란데다 아주 똑똑했거든. 그래서 그 집안 사업을 물려받을 수 있었던 거야. 당시에 내로라하는 남자들은 모두 최란에게 어찌 해보려고 혈안이 되었었지.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한병후에게 걸려들어서 덜컥 임신을 했지 뭐냐. 임신한 마당에 결혼할 수 밖에.”여름은 깜짝 놀랐다. ‘어쩐지 하준에게 약을 써서 뭐라도 해보려고 했을 때 심하게 난리다 싶었어. 본인이 그렇게 해서 태어났기 때문이었어?’서경주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태생부터 최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자기 자식인데도 최하준을 아주 싫어했단다.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 이혼하고서는 대학시절 옛 사랑이었던 남자와 결혼해서 최양하를 낳았어.”“그 사람… 불쌍한 어린 시절을 보냈겠어요.”여름은 작게 중얼거렸다. 마음이 너무나 복잡하고 가련한 생각이 들었다.“그랬겠지. 이혼하고 나서 한병후는 매일 술에 쩔어 살았고, 최란은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서 최양하는 끔찍이도 아꼈지. 다만 하준이 눈에는 최양하와 새 아버지가 눈에 거슬렸겠지. 그들이 자기 가정을 파탄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래서 너를 저렇게 싫
“내가 벨레스에 들어가서 후계자라도 될까 봐 겁나나 봐?”여름이 담담하게 미소지었다.“무슨 소리. 너 같은 것에게 후계자라니.”서유인이 웃긴다는 듯 하준을 돌아봤다.“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거 봐요. 난 저런 가방끈도 짧고 개뿔도 모르는 애는 취급도 안 하는데.”하준은 슬쩍 곁눈질했다. 강여름을 몰랐으면 서유인의 말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강여름은 최고의 해외 명문 대학 석사 출신인 데다 인테리어와 건축 분야에서 숱한 수상 경력이 있는 인재 중의 인재다. 서유인처럼 돈 뿌려가며 유학한 여느 재벌집 자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서유인은 여름과 비교하면 자신이 몰지각하고 무식해 보인다는 사실을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여름은 그저 평범한 패딩을 걸친 것뿐인데도 빛나 보였다. 서유인과 강여름 두 사람은 외모로는 닮은 구석이 있었지만 분명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내 눈이 어떻게 됐었나 보네. 두 사람이 닮았다고 생각했다니.’“그래, 어떻게 내가 너와 비교될 수나 있겠니?”여름이 나지막이 웃으며 미소를 짓는 모습은 마치 새하얀 백합과 같았다.“주제파악은 확실히 하고 있구나!”서유인이 거들먹거리며 호기롭게 대꾸했다.“그만 들어갑시다.”하준은 슬쩍 민망함을 느끼며 집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쪼르르 서유인도 따라 들어갔다.여름은 그제야 차를 탈 수 있었다.******식탁에는 음식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서유인은 맛있어 보이는 반찬을 집어 살포시 하준의 앞접시 위에 놓아주었다. 하준은 그런 서유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점점 더 거슬렸다. 결국 식사는 하지도 않고 일어섰다.“오늘 아침엔 입맛이 없네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하준 씨…”무슨 영문인지 서유인은 얼떨떨했다.“내가 뭘 잘못했나요?”“어떨 것 같습니까? 나올 필요 없습니다.”비꼬는 듯 애매한 한 마디를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서유인은 하준의 뒷모습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릴 뿐이었다.“도대체 무슨 일이니?”위자영이 급히 달려왔다.“엄마, 나도 모르
윤서는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떨어져 나가니 좋아서 잔치라도 했는지도 모르지.”“생각하지도 마. 여기서 더 멋진 사람 만나면 되지, 안 그래? 저 봐, 저기 들어온 남자, 널 보고 있더라.”윤서가 둘러보았다. 마침 다부진 남자의 뒤태가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딱 봐도 명품 블랙 가죽 재킷을 입고 모델 뺨치는 긴 다리를 뽐내고 있었다. 일행인듯한 두 사람은 그 사람의 존재감 덕분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뭐 그저 그렇네.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대박 멋지네, 뭘. 최하준하고 맞먹어.”여름이 윤서에게 살짝 찡긋했다.“그럼 진짜 존잘이네.”윤서가 깔깔거렸다. ******위층 VIP객실.오슬란 노정배 사장이 조심스럽게 송영식에게 술을 따르고 있었다. 얼굴 표정을 살피며 노정배가 말했다.“회장님, 방금 입구에서 본 베이지색 스웨터 입은 친구가 바로 우리 회사가 이번에 스카우트한 화장품 수석연구원 임윤서 씨입니다.” “응, 우리 회사 직원이었어?”송영식은 짓궂은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맞은편에 앉아있던 건 친구인가?”“그렇죠.”송영식은 손에 든 술잔을 빙글 돌렸다.“이따 뭐 할지 정했어. 거 임윤서랑 친구 좀 데려와.”노정배는 난감해졌다.“저, 임윤서 씨는 업계에서도 찾기 힘든 인재입니다.”“아, 임윤서를 뭘 어쩌려는 게 아니야. 그 친구라는 여자가 내 친구를 건드렸거든.”송영식이 조용히 말했다.“부디 조심하십시오.”******저녁 8시 반.여름과 윤서는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화를 보러 가려고 일어설 때 윤서는 노정배의 전화를 받았다.“화장품 레시피 자료를 보고 싶으시다고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날 두고 가겠다고?”여름이 얼굴을 찌푸렸다.“어떡해, 그럼. 사장님이 그러시는데 회장님이 오늘 회사 시찰 중이래. 오늘 저녁에 신제품 준비 중인 노화방지 화장품에 관해서 물어보실 거라고, 지금 바로 튀어와서 직접 보고를 하란다.”윤서가 골치 아픈 듯 툴툴거렸다.“송영식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다가 서유인과 마주쳤다.“늦은 시간에 어딜 가? 뭐, 남자라도 만나러 가?”짜증이 확 났다.“친구가 취했대서 데리러 간다.”여름은 더 대꾸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친구가 걱정될 뿐이다. 차를 몰고 강변으로 갔다.호화로운 대형 유람선이 정박해 있었다.그중 가장 규모가 큰 유람선 위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이십 명 가까이 되는 남녀가 섞여서 자유롭게 떠들고 있었다. 어떤 여성들은 비키니만 입고 왔다 갔다 활보하고 있었다. 분위기에 압도당한 여름은 그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찾아 들고 윤서에게 전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발신을 누르기도 전에 뒤에서 웬 남자가 튀어나와 핸드폰을 빼앗더니 여름을 잡아 위로 끌고 갔다.여름은 사력을 다해 반항을 해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당했구나. 근데 도대체 누구지? 여기는 아는 사람도 없고 누구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데, 혹시 위자영인가?’위층에 다다르자 큰 소파에 블랙 가죽 재킷을 입은 미남자가 앉아있었다. 쌍꺼풀 없이 시원한 눈매에서는 빛이 나고 있었고 입술은 웃고 있었다. 바로 아까 레스토랑에서 본 그 남자였다!“어? 당신?!”여름이 놀라서 펄쩍 뛰었다. “누구시죠? 제가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나한테야 딱히 잘못한 것 없지. 내 친구에게 잘못해서 그렇지..”송영식이 부드럽게 말하며 일어섰다. 허리춤에 두 손을 얹고 있는 얼굴에는 차가운 기운이 넘쳤다.“꽤 반반하게 생겼네. 어쩐지 하준이가 넘어갔다 했더니.”“최하준 씨 친구예요?”여름은 이제야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울컥 화가 치밀었다.“나랑 최하준 씨 일이잖아요. 왜 내 친구를 끌어들이죠? 내 친구는 어디 있어요? 당신 회사 직원 아닙니까?”“많고 많은 게 직원인데 하나쯤 없어도 그만이지.”씨익 웃는 송영식의 미소는 근사했지만 어쩐지 소름끼치게 무서웠다.“임윤서 씨를 만나고 말고는 당신 하는 거에 달렸지.”“뭘 하면 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