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사실 벨레스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호의를 거절할 수가 없어 그냥 갔다.오후 5시가 되어서야 두 사람은 회사에서 돌아왔다. 집은 이미 화려하게 조명이 밝혀져 있었고 정원은 귀한 식물과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청소도 안팎으로 깔끔하게 마친 상태였다.위자영은 일하는 사람들에게 ‘여기도요.’, ‘저기도요,’ 하며 청소를 지시하고 있었다.서유인은 또 올 시즌 가장 비싼 트위드 재킷에 아래는 치마를 받쳐입고 어깨에는 숄을 걸치고 있었다. 긴 머리도 매우 신경 써서 스타일링했다. 앞머리는 웨이브를 주고 뒤쪽은 머리를 땋아서 그야말로 공주 같았다.“여보, 오늘 여름이 데리고 회사 갔었다면서요?”위자영이 올라와 속이 뻔히 보이는 질문을 했다.“내가 내 딸 데리고 회사 견학도 못 하나?”서경주가 얼굴을 찡그렸다.“그럴 리가요.”위자영이 짜증을 꾹 참고 웃으며 말했다.“오늘 너 입으라고 명품으로 많이 사 왔다. 동성에서는 못 사는 브랜드일 거야. 올라가 입어보렴. 좀 이따 네 제부 될 사람도 올 텐데 너무 대충 입고 있으면 안 되지.”“가보렴.”그제야 아내를 보는 서경주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여름은 올라가 옷장 문을 열어보고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명품 좋아하시네. 다 몇 년 전 재고 아냐? 컬러도 너무 노티 나고. 이런 걸 입고 나갔다간 웃음거리만 되겠네.’하지만 상관없었다. 여름은 자신의 외모에 자신 있었다.20분 후, 여름이 내려갔다.노티 나는 촌뜨기 꼴로 내려올 걸 기대하던 두 모녀는 순간 넋이 나갔다. 여름은 위자영이 사 온 긴 회색 패딩을 입고 있었다. 워낙 루즈한 핏이라 보통 사람이 입었다면 거적때기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름은 지퍼를 연 채 안에 아이보리색 스웨터를 받쳐 입고 아래는 흰색 캐주얼 바지를 입고 있었다.얼굴엔 완전히 민낯에 붉은 립스틱만 살짝 발랐을 뿐인데 열일곱 소녀마냥 맑고 청순해서 너무나 예뻤다.잔뜩 치장한 채 옆에 서 있는 유인이 되레 촌스러워 보였다.여름은 눈웃음을 치며 일부러 이렇게 말
여름은 얼굴빛이 점점 파랗게 질렸다.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욱신거리는 통증이 시작되었다. 가능한 한 평생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하준 씨, 여기에요!”서유인이 얼른 뛰어가 하준의 팔에 착 감겼다. 누가 보면 영락없는 열애 중인 커플의 모습이었다.“아!”하준은 보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뭐야? 어제 춤 한 번 췄다고 애인 행세를 할 셈인가?’ 살짝 짜증이 나려고 하는데 서경주와 위자영이 부랴부랴 다가왔다.“어서 오게”서경주가 온화한 목소리로 인사하고 하준에게 악수를 청했다.“안녕하십니까? 댁에서 뵙는 것은 처음이네요.”서경주에게 하준은 깍듯이 예의를 차리고 대했다. 다른 사람들에게처럼 거만하거나 체면을 깎아 내리는 태도가 아니었다.“무슨 소리예요. 최 회장이 이렇게 와주니 우리가 영광이죠.”위자영이 주름이 생길 지경으로 활짝 웃으며 끼어들었다.서경주는 한껏 오버하는 아내가 민망했지만 애써 침착하게 예의를 갖췄다.“안으로 들어와요. 날이 춥지요?”부부가 하준을 위해 길을 터주면서 여름은 얼떨결에 하준과 마주하게 되었다.둘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눈빛이 순식간에 엉키고 있었다. 그 강렬한 눈빛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계속 시선을 마주칠 용기가 나질 않아 여름은 애써 눈길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여름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하준도 여름을 보고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마주칠 줄이야. 짙은 눈동자가 순간 움찔했다. 하준의 두 눈에는 폭풍우 같은 거센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그러나 하준이 워낙 잘 숨기는 바람에 그 눈빛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지만, 시선은 시종일관 여름을 향했다.서유인은 그 모습에 속이 뒤집혔다. 질투심에 얼른 하준의 팔을 잡아당겨 애교를 떨었다.“하준 씨, 뭘 봐요? 여기는 얼마 전에 우리 아빠가 밖에서 데리고 온 언니에요.”말 속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이제야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강여름이 강신희의 딸인 것은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
하준이 매끈한 입술을 살짝 비틀며 나지막이 웃었다.“제가 별로 반갑지 않으신 것 같군요. 그러면 이만 가보겠습니다.”하준이 돌아가려고 하자 모두들 당황하여 술렁거렸다. 서유인은 필사적으로 팔에 매달려서 소리를 높였다.“아빠, 얼른 사과하세요.”서경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대로 하준이 이곳을 나간다면 서경주가 최하준에게 큰 무례를 범했다는 소문은 금새 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벨레스의 입지가 사라지는 건 보나마나 뻔 한 일이었다.“여, 여름아, 사과 드리겠니?”서경주가 어쩔 수 없이 쓴 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여름은 분노에 파르르 떨었다. 두 주먹만 꼭 쥘 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한없이 매력적으로 보이던 그 얼굴이 오늘은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어떻게 이런 인간을 사랑했을까?’여름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답은 하나였다. 져 줄 수밖에 없었다.“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이쪽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해서 실수가 있었습니다.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하준이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뻔뻔스럽게 잘도 둘러대는군.’“우리 들어가요, 네?”서유인이 분위기를 바꾸려고 화제를 돌렸다. 하준이 더는 여름과 엮이지 않기를 바랬다.옆에는 시종일관 서유인이 껌처럼 딱 붙어 있었다. 하준은 그런 서유인을 떼어버리고 싶었지만 여름의 넋 나간 얼굴을 보고는 그냥 좀 참기로 했다. 하준이 소파에 앉자 서유인은 하준의 어깨에 더욱 더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보고 있는 여름은 매우 불편했다. 하준의 옆은 한때 자신의 자리였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자리가 되어 있었다.‘이 남자는 정말 날 사랑하긴 한 걸까? 나에 대한 마음이 정말 하나도 남아있지 않나?’“어머! 그냥 몸만 오면 되는데 어쩜 이렇게 귀한 선물까지 가져왔어요?”위자영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돌아보니 기사가 엄청난 양의 선물을 집안으로 나르고 있었다. 하나하나 모두 시중에서 보기 드문 물건에다 굉장히 값나가는 것들이었다.선물들을 보고 하준은 하마터면
서유인과 하준 옆에서 손 아프게 과일이나 까고 있으려니 울컥했다.‘어쩌다가 난 이런 사람을 사랑했을까? 서유인이랑 수준이 딱 맞는 천박한 인간이었어…’ 불편한 자리가 계속되고 시간은 어느새 식사시간이 되었다. 여름이 대놓고 말했다.“저는 여기에서 같이 식사할 자격이 없으니 주방에서 따로 식사하겠습니다.”이번에는 허락도 들을 것 없다는 듯이 곧장 자리를 벗어났다.하준의 얼굴빛이 금새 굳어버렸다. “주제 파악은 잘하네, 시키니까 얌전히 과일도 까고.”서유인은 거만한 말투로 고개를 까딱했다.서경주는 남몰래 이를 꽉 깨물었다. 할 말도 없었다.저녁 식사는 위자영이 하루종일 공을 들여 준비시킨 음식들이었는데, 하준은 두 세 젓가락 맛을 보더니 입맛이 없는지 수저를 놓았다.강여름과 헤어지고 나서는 한 끼도 제대로 먹은 적이 없었다. 속이 늘 헛헛했다.“음식이 입에 안 맞나 보네요.”위자영이 눈치를 보며 소심하게 물어보았다.“방금 과일을 너무 많이 먹었나 봅니다. 어서 드십시오. 저는 손 좀 씻고 오겠습니다.”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화장실로 가는 길에 주방을 지나야 했다. 하준은 마치 자석에 끌리듯 주방 안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주방 한켠에는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는 여름이 눈에 들어왔다.‘내가 다른 여자랑 있는 걸 보고도 밥이 넘어가?’괜히 심술이 나서 저도 모르게 성큼성큼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여름 앞에 멈춰 서서 차갑게 조롱하기 시작했다.“동성에는 여기처럼 맛있는 음식이 없었나 봅니다. 누가 보면 굶은 사람인 줄 알겠습니다?”“…….”갑자기 툭 던지는 악의로 가득찬 말에 여름은 입에 든 음식을 삼킬 수가 없었다.“처!음 먹어봐요, 처!음. 재료도 특!이하고, 참! 맛있네요”여름이 말을 하자 입 안에 씹고 있던 음식이 그의 얼굴에 '파바박 튀었다. 다분히 고의적이었다.“아니, 이게 대체! ” 하준은 화가 나서 얼굴은 벌게지고 목은 완전히 잠겨버렸다. 매끈한 얼굴, 완벽한 수트에는 여름의 입에서 튄
여름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하준을 노려보았다. 눈에는 음흉한 웃음기가 가득했고 오히려 신이 난 표정이었다.이를 꽉 깨물고 울분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유감스럽게도 분명 우리 엄마랑 아빠가 더 일찍 만나셨으니까 몇 달이라도 내가 너보다 언니야. 손윗사람에게 말 조심해. 그리고 난 저 사람 잡은 적 없어.”“야, 그럼 하준 씨가 널 모함한다는 거야?”서유인이 화를 내며 독설을 내뱉었다.“최하준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너는 감히 눈도 못 마주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너같은 게 언감생심 말이나 붙여볼 수 있는 줄 알아? 어떻게든 팔자 한 번 고쳐보겠다고 주제 파악 못하는 것들 내가 많이 봐서 알지.”하준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하는 말들을 듣다 보니 짜증이 확 밀려왔다.서유인에게는 처음부터 관심 따윈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교양없는 모습을 보니 재벌가 규수같지가 않았다. “무슨 일로 여기 이러고 있는 건가?”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리자 서경주와 위자영이 부리나케 달려왔다.“마침 잘 오셨어요. 강여름이 하준 씨한테 꼬리 치다가 딱 걸렸지 뭐예요.”서유인이 주저하지 않고 부모에게 일러바쳤다.“게다가 엄마가 굴러온 돌이라는데요?”위자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남편 서경주가 자신과 결혼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위자영만은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질까 늘 노심초사 해 왔다.“강여름, 네가 이젠 선을 넘는구나. 여기 들어올 때부터 잘 대해줬더니 뭐? 지금 걸치고 있는 것도 모두 내가 명품으로 사다 준 것들인데, 은혜를 원수로 갚아? 이 배은망덕한 것!”“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서경주는 죽을 맛이었다.“오해는 무슨 오해예요? 하준 씨가 직접 말 한 건데요.”서유인이 발을 탕탕 굴렀다.“약혼자도 있으면서 남의 남자까지 넘보고! 뻔뻔한 거 봐.”“약혼자가 있습니까?”하준이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 눈빛은 그를 잘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서늘함이었다.“네.
“시끄러워. 여름이는 내가 20년 동안이나 돌보지 못했던 내 딸이야. 여긴 내 집이니 여름이가 지내고 싶은 만큼 지낼 수 있어. 불만 있으면 당신이 유인이를 데리고 나가던지.”서경주가 인정사정 없이 응대했다.위자영이 붉으락 푸르락 했다. “좋아요. 만약 유인이 혼사가 잘못 되기라도 하면 쟤는 내가 가만히 안 둬요.”무서운 얼굴로 한참 여름을 노려보더니 휙 나가버렸다.“저는 최 회장을 잡은 적 없습니다.”여름이 진지하게 말했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경주마저도 저들이 하는 말을 믿는다면 친아버지에 대한 실망이 클 것 같았다.서경주가 한숨을 푹 쉬었다.“난 너를 믿는다. 최 회장이 내가 불륜으로 널 낳은 줄 아는 모양이구나. 그런 걸 아주 싫어하거든.”여름이 애매한 표정을 짓자 서경주가 찬찬히 이야기 해주었다.“최하준 회장도 알고 보면 가엽단 말이지. 그 사람 어머니인 최란은 어려서부터 애지중지 자란데다 아주 똑똑했거든. 그래서 그 집안 사업을 물려받을 수 있었던 거야. 당시에 내로라하는 남자들은 모두 최란에게 어찌 해보려고 혈안이 되었었지.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한병후에게 걸려들어서 덜컥 임신을 했지 뭐냐. 임신한 마당에 결혼할 수 밖에.”여름은 깜짝 놀랐다. ‘어쩐지 하준에게 약을 써서 뭐라도 해보려고 했을 때 심하게 난리다 싶었어. 본인이 그렇게 해서 태어났기 때문이었어?’서경주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태생부터 최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자기 자식인데도 최하준을 아주 싫어했단다.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 이혼하고서는 대학시절 옛 사랑이었던 남자와 결혼해서 최양하를 낳았어.”“그 사람… 불쌍한 어린 시절을 보냈겠어요.”여름은 작게 중얼거렸다. 마음이 너무나 복잡하고 가련한 생각이 들었다.“그랬겠지. 이혼하고 나서 한병후는 매일 술에 쩔어 살았고, 최란은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서 최양하는 끔찍이도 아꼈지. 다만 하준이 눈에는 최양하와 새 아버지가 눈에 거슬렸겠지. 그들이 자기 가정을 파탄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래서 너를 저렇게 싫
“내가 벨레스에 들어가서 후계자라도 될까 봐 겁나나 봐?”여름이 담담하게 미소지었다.“무슨 소리. 너 같은 것에게 후계자라니.”서유인이 웃긴다는 듯 하준을 돌아봤다.“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거 봐요. 난 저런 가방끈도 짧고 개뿔도 모르는 애는 취급도 안 하는데.”하준은 슬쩍 곁눈질했다. 강여름을 몰랐으면 서유인의 말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강여름은 최고의 해외 명문 대학 석사 출신인 데다 인테리어와 건축 분야에서 숱한 수상 경력이 있는 인재 중의 인재다. 서유인처럼 돈 뿌려가며 유학한 여느 재벌집 자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서유인은 여름과 비교하면 자신이 몰지각하고 무식해 보인다는 사실을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여름은 그저 평범한 패딩을 걸친 것뿐인데도 빛나 보였다. 서유인과 강여름 두 사람은 외모로는 닮은 구석이 있었지만 분명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내 눈이 어떻게 됐었나 보네. 두 사람이 닮았다고 생각했다니.’“그래, 어떻게 내가 너와 비교될 수나 있겠니?”여름이 나지막이 웃으며 미소를 짓는 모습은 마치 새하얀 백합과 같았다.“주제파악은 확실히 하고 있구나!”서유인이 거들먹거리며 호기롭게 대꾸했다.“그만 들어갑시다.”하준은 슬쩍 민망함을 느끼며 집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쪼르르 서유인도 따라 들어갔다.여름은 그제야 차를 탈 수 있었다.******식탁에는 음식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서유인은 맛있어 보이는 반찬을 집어 살포시 하준의 앞접시 위에 놓아주었다. 하준은 그런 서유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점점 더 거슬렸다. 결국 식사는 하지도 않고 일어섰다.“오늘 아침엔 입맛이 없네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하준 씨…”무슨 영문인지 서유인은 얼떨떨했다.“내가 뭘 잘못했나요?”“어떨 것 같습니까? 나올 필요 없습니다.”비꼬는 듯 애매한 한 마디를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서유인은 하준의 뒷모습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릴 뿐이었다.“도대체 무슨 일이니?”위자영이 급히 달려왔다.“엄마, 나도 모르
윤서는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떨어져 나가니 좋아서 잔치라도 했는지도 모르지.”“생각하지도 마. 여기서 더 멋진 사람 만나면 되지, 안 그래? 저 봐, 저기 들어온 남자, 널 보고 있더라.”윤서가 둘러보았다. 마침 다부진 남자의 뒤태가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딱 봐도 명품 블랙 가죽 재킷을 입고 모델 뺨치는 긴 다리를 뽐내고 있었다. 일행인듯한 두 사람은 그 사람의 존재감 덕분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뭐 그저 그렇네.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대박 멋지네, 뭘. 최하준하고 맞먹어.”여름이 윤서에게 살짝 찡긋했다.“그럼 진짜 존잘이네.”윤서가 깔깔거렸다. ******위층 VIP객실.오슬란 노정배 사장이 조심스럽게 송영식에게 술을 따르고 있었다. 얼굴 표정을 살피며 노정배가 말했다.“회장님, 방금 입구에서 본 베이지색 스웨터 입은 친구가 바로 우리 회사가 이번에 스카우트한 화장품 수석연구원 임윤서 씨입니다.” “응, 우리 회사 직원이었어?”송영식은 짓궂은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맞은편에 앉아있던 건 친구인가?”“그렇죠.”송영식은 손에 든 술잔을 빙글 돌렸다.“이따 뭐 할지 정했어. 거 임윤서랑 친구 좀 데려와.”노정배는 난감해졌다.“저, 임윤서 씨는 업계에서도 찾기 힘든 인재입니다.”“아, 임윤서를 뭘 어쩌려는 게 아니야. 그 친구라는 여자가 내 친구를 건드렸거든.”송영식이 조용히 말했다.“부디 조심하십시오.”******저녁 8시 반.여름과 윤서는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화를 보러 가려고 일어설 때 윤서는 노정배의 전화를 받았다.“화장품 레시피 자료를 보고 싶으시다고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날 두고 가겠다고?”여름이 얼굴을 찌푸렸다.“어떡해, 그럼. 사장님이 그러시는데 회장님이 오늘 회사 시찰 중이래. 오늘 저녁에 신제품 준비 중인 노화방지 화장품에 관해서 물어보실 거라고, 지금 바로 튀어와서 직접 보고를 하란다.”윤서가 골치 아픈 듯 툴툴거렸다.“송영식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