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워. 여름이는 내가 20년 동안이나 돌보지 못했던 내 딸이야. 여긴 내 집이니 여름이가 지내고 싶은 만큼 지낼 수 있어. 불만 있으면 당신이 유인이를 데리고 나가던지.”서경주가 인정사정 없이 응대했다.위자영이 붉으락 푸르락 했다. “좋아요. 만약 유인이 혼사가 잘못 되기라도 하면 쟤는 내가 가만히 안 둬요.”무서운 얼굴로 한참 여름을 노려보더니 휙 나가버렸다.“저는 최 회장을 잡은 적 없습니다.”여름이 진지하게 말했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경주마저도 저들이 하는 말을 믿는다면 친아버지에 대한 실망이 클 것 같았다.서경주가 한숨을 푹 쉬었다.“난 너를 믿는다. 최 회장이 내가 불륜으로 널 낳은 줄 아는 모양이구나. 그런 걸 아주 싫어하거든.”여름이 애매한 표정을 짓자 서경주가 찬찬히 이야기 해주었다.“최하준 회장도 알고 보면 가엽단 말이지. 그 사람 어머니인 최란은 어려서부터 애지중지 자란데다 아주 똑똑했거든. 그래서 그 집안 사업을 물려받을 수 있었던 거야. 당시에 내로라하는 남자들은 모두 최란에게 어찌 해보려고 혈안이 되었었지.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한병후에게 걸려들어서 덜컥 임신을 했지 뭐냐. 임신한 마당에 결혼할 수 밖에.”여름은 깜짝 놀랐다. ‘어쩐지 하준에게 약을 써서 뭐라도 해보려고 했을 때 심하게 난리다 싶었어. 본인이 그렇게 해서 태어났기 때문이었어?’서경주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태생부터 최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자기 자식인데도 최하준을 아주 싫어했단다.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 이혼하고서는 대학시절 옛 사랑이었던 남자와 결혼해서 최양하를 낳았어.”“그 사람… 불쌍한 어린 시절을 보냈겠어요.”여름은 작게 중얼거렸다. 마음이 너무나 복잡하고 가련한 생각이 들었다.“그랬겠지. 이혼하고 나서 한병후는 매일 술에 쩔어 살았고, 최란은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서 최양하는 끔찍이도 아꼈지. 다만 하준이 눈에는 최양하와 새 아버지가 눈에 거슬렸겠지. 그들이 자기 가정을 파탄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래서 너를 저렇게 싫
“내가 벨레스에 들어가서 후계자라도 될까 봐 겁나나 봐?”여름이 담담하게 미소지었다.“무슨 소리. 너 같은 것에게 후계자라니.”서유인이 웃긴다는 듯 하준을 돌아봤다.“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거 봐요. 난 저런 가방끈도 짧고 개뿔도 모르는 애는 취급도 안 하는데.”하준은 슬쩍 곁눈질했다. 강여름을 몰랐으면 서유인의 말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강여름은 최고의 해외 명문 대학 석사 출신인 데다 인테리어와 건축 분야에서 숱한 수상 경력이 있는 인재 중의 인재다. 서유인처럼 돈 뿌려가며 유학한 여느 재벌집 자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서유인은 여름과 비교하면 자신이 몰지각하고 무식해 보인다는 사실을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여름은 그저 평범한 패딩을 걸친 것뿐인데도 빛나 보였다. 서유인과 강여름 두 사람은 외모로는 닮은 구석이 있었지만 분명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내 눈이 어떻게 됐었나 보네. 두 사람이 닮았다고 생각했다니.’“그래, 어떻게 내가 너와 비교될 수나 있겠니?”여름이 나지막이 웃으며 미소를 짓는 모습은 마치 새하얀 백합과 같았다.“주제파악은 확실히 하고 있구나!”서유인이 거들먹거리며 호기롭게 대꾸했다.“그만 들어갑시다.”하준은 슬쩍 민망함을 느끼며 집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쪼르르 서유인도 따라 들어갔다.여름은 그제야 차를 탈 수 있었다.******식탁에는 음식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서유인은 맛있어 보이는 반찬을 집어 살포시 하준의 앞접시 위에 놓아주었다. 하준은 그런 서유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점점 더 거슬렸다. 결국 식사는 하지도 않고 일어섰다.“오늘 아침엔 입맛이 없네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하준 씨…”무슨 영문인지 서유인은 얼떨떨했다.“내가 뭘 잘못했나요?”“어떨 것 같습니까? 나올 필요 없습니다.”비꼬는 듯 애매한 한 마디를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서유인은 하준의 뒷모습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릴 뿐이었다.“도대체 무슨 일이니?”위자영이 급히 달려왔다.“엄마, 나도 모르
윤서는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떨어져 나가니 좋아서 잔치라도 했는지도 모르지.”“생각하지도 마. 여기서 더 멋진 사람 만나면 되지, 안 그래? 저 봐, 저기 들어온 남자, 널 보고 있더라.”윤서가 둘러보았다. 마침 다부진 남자의 뒤태가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딱 봐도 명품 블랙 가죽 재킷을 입고 모델 뺨치는 긴 다리를 뽐내고 있었다. 일행인듯한 두 사람은 그 사람의 존재감 덕분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뭐 그저 그렇네.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대박 멋지네, 뭘. 최하준하고 맞먹어.”여름이 윤서에게 살짝 찡긋했다.“그럼 진짜 존잘이네.”윤서가 깔깔거렸다. ******위층 VIP객실.오슬란 노정배 사장이 조심스럽게 송영식에게 술을 따르고 있었다. 얼굴 표정을 살피며 노정배가 말했다.“회장님, 방금 입구에서 본 베이지색 스웨터 입은 친구가 바로 우리 회사가 이번에 스카우트한 화장품 수석연구원 임윤서 씨입니다.” “응, 우리 회사 직원이었어?”송영식은 짓궂은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맞은편에 앉아있던 건 친구인가?”“그렇죠.”송영식은 손에 든 술잔을 빙글 돌렸다.“이따 뭐 할지 정했어. 거 임윤서랑 친구 좀 데려와.”노정배는 난감해졌다.“저, 임윤서 씨는 업계에서도 찾기 힘든 인재입니다.”“아, 임윤서를 뭘 어쩌려는 게 아니야. 그 친구라는 여자가 내 친구를 건드렸거든.”송영식이 조용히 말했다.“부디 조심하십시오.”******저녁 8시 반.여름과 윤서는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화를 보러 가려고 일어설 때 윤서는 노정배의 전화를 받았다.“화장품 레시피 자료를 보고 싶으시다고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날 두고 가겠다고?”여름이 얼굴을 찌푸렸다.“어떡해, 그럼. 사장님이 그러시는데 회장님이 오늘 회사 시찰 중이래. 오늘 저녁에 신제품 준비 중인 노화방지 화장품에 관해서 물어보실 거라고, 지금 바로 튀어와서 직접 보고를 하란다.”윤서가 골치 아픈 듯 툴툴거렸다.“송영식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다가 서유인과 마주쳤다.“늦은 시간에 어딜 가? 뭐, 남자라도 만나러 가?”짜증이 확 났다.“친구가 취했대서 데리러 간다.”여름은 더 대꾸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친구가 걱정될 뿐이다. 차를 몰고 강변으로 갔다.호화로운 대형 유람선이 정박해 있었다.그중 가장 규모가 큰 유람선 위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이십 명 가까이 되는 남녀가 섞여서 자유롭게 떠들고 있었다. 어떤 여성들은 비키니만 입고 왔다 갔다 활보하고 있었다. 분위기에 압도당한 여름은 그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찾아 들고 윤서에게 전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발신을 누르기도 전에 뒤에서 웬 남자가 튀어나와 핸드폰을 빼앗더니 여름을 잡아 위로 끌고 갔다.여름은 사력을 다해 반항을 해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당했구나. 근데 도대체 누구지? 여기는 아는 사람도 없고 누구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데, 혹시 위자영인가?’위층에 다다르자 큰 소파에 블랙 가죽 재킷을 입은 미남자가 앉아있었다. 쌍꺼풀 없이 시원한 눈매에서는 빛이 나고 있었고 입술은 웃고 있었다. 바로 아까 레스토랑에서 본 그 남자였다!“어? 당신?!”여름이 놀라서 펄쩍 뛰었다. “누구시죠? 제가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나한테야 딱히 잘못한 것 없지. 내 친구에게 잘못해서 그렇지..”송영식이 부드럽게 말하며 일어섰다. 허리춤에 두 손을 얹고 있는 얼굴에는 차가운 기운이 넘쳤다.“꽤 반반하게 생겼네. 어쩐지 하준이가 넘어갔다 했더니.”“최하준 씨 친구예요?”여름은 이제야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울컥 화가 치밀었다.“나랑 최하준 씨 일이잖아요. 왜 내 친구를 끌어들이죠? 내 친구는 어디 있어요? 당신 회사 직원 아닙니까?”“많고 많은 게 직원인데 하나쯤 없어도 그만이지.”씨익 웃는 송영식의 미소는 근사했지만 어쩐지 소름끼치게 무서웠다.“임윤서 씨를 만나고 말고는 당신 하는 거에 달렸지.”“뭘 하면 되는데요
여름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송영식은 일부러 이 말을 언급해서 백만 원이 채워지지 않게 할 속셈인 것이다. 그러면 언제까지 춤을 춰야 할지 모를 노릇이다.예상대로 다들 모두 웃으며 말했다.“오래 보려면 팁을 주지 말아야지.”“그렇네, 천천히 구경하자고.”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봉을 잡고 서서히 댄스는 시작됐다. 사실 여름은 춤을 꽤 췄다. 여름은 잘 알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추면 다들 미쳐버릴 거야.’그러나 그녀가 아직 모르는 게 있었다. 자신의 볼륨 있는 몸매와 그 얼굴이면, 바니 코스튬을 입고 그 자리에서 살짝 흔들고 손만 들어도 남자들을 미치게 만들 수 있었다.송영식이 흥에 취해 녹화한 동영상을 하준에게 전송했다.-하준아, 보고 있냐? 너 내신 내가 혼쭐을 내주는 중이지.******하준의 집.잠자리에 들려고 하던 하준은 동영상을 클릭했다. 번개가 뇌를 통과하는 느낌이었다.빨간 바니 코스튬을 입은 여자는 주요부위를 가린 손바닥만한 천쪼가리를 제외하면 온 몸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새하얀 피부가 눈처럼 빛나는데 작은 얼굴은 어디서 많이 보던 미인이었다. 잘록한 허리는 리듬을 타고 있었고 미끈한 한쪽 다리가 봉을 감고 있었다.그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생각을 하니 울컥 화가 치밀었다.하준은 미친 듯이 송영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중이었다.‘이 자식이!’저 많은 사람들에게 여름의 이런 꼴을 보여줬다는 사실을 생각만해도 송영식을 찢어버리고 싶었다.하준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정확히 3분 후 전용 헬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야심한 밤에 서명산에 사는 재벌가들은 집집마다 시끄러워졌다.“최 회장네 헬기 아냐? 이 밤에 어딜 가는 거지?”“촌각을 다투는 일이 있는 거겠지. 최 회장이 헬기를 타는 일은 별로 없거든.”*****유람선 위.다들 한껏 흥에 겨웠다. 그 중 하나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위스키 잔을 들고 비틀거리며 여름에게 다가갔다. 우락부락한 손을 가녀린 어깨에 댔
“어쭈! 술 쫌 하는데.”환호성이 들렸다. 또 다른 사람이 와서는 십만 원을 걸면서 술을 마시라고 했다.여름은 한 잔 두 잔 독주를 털어 넣었다. 위장은 타는 듯이 아파왔다. 아홉 명이 준 아홉 잔을 다 마시자 마지막 남은 사람은 송영식이었다.여름은 비틀비틀 그에게 걸어갔다. 그 앞에 서자 송영식의 얼굴은 두 개 세 개로 겹쳐 보였다. 블랙 가죽 재킷만 보이고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제 끝나 가네. 마지막 한 잔, 십만 원, 오케이?”송영식은 앞에 서 있는 여름을 노려보았다. 위스키 아홉 잔을 연속으로 원샷했다. 남자들도 이 정도면 드러눕는다. 분명 취했을 텐데도 여전히 두 눈의 초점은 또렷했고 등을 곧게 편 채 꼿꼿하게 서 있었다. 도도하기 그지 없었다.송영식은 낮게 웃었다.“내가 왜 네 소원을 들어주나? 너 같은 것에게는 십 원짜리 한 장도 아까워.돈이 필요하면 다른 데 가 봐.”여름은 몸도 마음도 모두 으스러질 것 같았다. 지금까지 누구도 이렇게 혐오스러운 적이 없었다.‘최하준을 사랑한 것이 이렇게도 큰 잘못이었구나. ‘뼈아픈 후회가 밀려왔다.최하준이나 친구들이나 모두 똑같이 뼛속까지 악마였다.여름은 머리를 굴렸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자신에게 몸이 달았으니 다가가서 십만 원 가져오는 것은 문제도 없겠다 싶었다.그 순간, 갑자기 요트 문이 ‘쾅’하고 발에 차여 열리는 것 같더니 한 사람이 성큼 성큼 다가왔다. 여름은 이미 너무 취해서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본능적으로 비틀비틀 앞으로 걸어갔다.“저기, 위스키 한 잔 원샷하는데 십만 원, 어때요?”하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한동안 여름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름이 입고 있는 옷은 차마 옷이라고 하기엔 너무 옷감을 아낀 것 같았다. 뽀얀 우유빛 피부가 하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적당히 볼륨이 있는 선이 고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얼굴은 복숭아처럼 핑크빛이 돌아 오히려 생기있어 보였고 입술은 붉게 피어올랐다. 이런 여름을 보고 키스를
다들 입이 떡 벌어져서 아무 말 못하고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최하준이다. 여색을 멀리하기로 소문난 최하준이 이곳에 등장한 것이다.“최… 최 회장, 어떻게 왔습니까?”“누가 이렇게 취하게 만들었어?”하준이 유람선 위에 뻘쭘하게 서 있는 모든 남자들의 얼굴을 하나씩 돌아가며 노려보았다. 다들 벌벌 떨며 그저 송영식을 바라보며 눈으로 애원했다.“아까 은근히 우리더러 같이 하라고 했잖아.”“그랬지.”송영식은 왼손을 들어 안심하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고는 하준의 곁으로 가서 거들먹거리며 낮은 소리로 웃었다.“내가 너 대신 화풀이 좀 해줬다. 강여름이 뭔데 널 속이고 널 가지고 논거야? 이제는 여기까지 쫓아오고. 내가 네 체면 살려주려고 오늘 좀 밟아줬지.”송영식이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하준의 주먹이 그대로 날아갔다. 송영식은 얼떨결에 얼굴을 맞고는 입술이 찢어져 피가 철철 흘렀다.“하준아….”갑작스런 공격에 송영식은 영문을 몰라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지켜보던 다른 사람들은 하나 둘씩 꽁무니를 빼고 유람선 밖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서울에서 최고가는 재벌가의 후계자 둘이 몸싸움이 붙었다. 이런 전무후무한 대박 사건에 감히 누가 끼어들 수 있겠는가.“아무도 못 나가!”하준이 눈짓을 하자 경호원 몇 명이 유람선 입구를 막고 섰다.“하준아, 우리가 알고 그랬겠냐? 전혀 몰랐다고.”한 사람이 두려움을 애써 누르고 비위를 맞추며 말했다.하준이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유람선 안에 있는 얼굴들을 재빨리 스캔했다. 다들 잘 나가기로 소문난 재벌 2세들인데 하나같이 여자랑 놀기 좋아하는 놈들이었다. ‘내가 여기 도착하기 전에 저 놈들 저속한 눈빛으로 얼마나 본 거야! 설마 얼빠진 놈이 더러운 손으로 더듬은 건 아니겠지?’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하준은 저들의 눈을 파버릴 수도 없고 돌아버릴 지경이었다.“쟤들은 내가 불러서 온 거야. 할 말 있으면 나한테 해.”송영식은 그제야 상황파악이 되었는지 그들을 감싸며 말했다.차가운 눈동자가 송영
하준은 일순간 얼음이 되었다. 여름의 부드러운 어깨를 짜증스럽게 잡았다. 잔뜩 잠긴 소리로 무겁게 물었다.“지금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양유진? 만약 양유진이라고 하며 밖으로 바로 던져버릴 참이었다.“쭈운…, 쭌….”여름이 들릴락말락 한 소리로 쥐어짜듯 말했다.여름은 배가 아플 때 하준이 늘 배를 문질러 주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강여름, 취한 거 아니지?”여름의 작은 얼굴을 주물주물 꼬집어 보았다. ‘설마 날 가지고 노는 건 아니겠지?’“아파… 하지 마요.”여름은 여전히 술에 취해 한쪽 다리를 들어 툭 찼다.하준은 코피를 쏟을 뻔했다. ‘이 자식은 무슨 생각으로 이따위 천쪼가리를 입힌 거야?’그런 여름을 보고만 있자니 고문이 따로 없었다.“강여름 씨, 내가 얌전히 마사지나 해 줄 것 같습니까? 꿈 깨라고.”하준이 여름의 볼을 세게 잡아당겼다.“으응, 아야… 쭌….”여름은 입술을 깨물면서 아이 같은 표정으로 몽롱한 눈을 떴다. 하준의 목젖이 심하게 움직였다. 여름을 바라보던 하준은 낮은 신음을 내뱉더니 이불로 얼른 덮어주고 고개를 돌려버렸다.하준은 자신도 모르게 주방에 들어갔다. 핸드폰을 꺼내 숙취 해소에 좋은 음식이 무엇인지 검색해 보았다. 한참동안 고심한 끝에 마침내 토마토주스가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그러나 이 집은 몇 달 동안 하준도 오지 않았던 곳이어서 냉장고에는 먹을만한 것이 없었다. 상혁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토마토 좀 사와.”“……”집에 돌아가 막 잠을 자려던 상혁이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회장님, 오밤중에 토마토는 뭐 하시겠요? 강여름 씨라도 주시려고요?”“어, 강여름 먹여야 돼. 먹고 죽지만 않으면 되겠지. 빨리, 20분 내로 가져와.”하준의 전화는 끊어졌다.“……”상혁은 상사의 기막힌 지시에 할 말이 없었다.‘이 야밤에 어딜 가서 토마토를 사와?’무슨 일이든 가능하게 하는 유능한 수행 비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토마토 하나 때문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결국, 상혁은 근처 마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