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쌀쌀맞게 대하기는 했지만, 강여경이 놓은 덫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여름과 헤어질 생각은 해본 적 없다. 다만 그 껄끄러운 감정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정말 날 사랑한다면 다시는 양유진에게 가지 말아요. 마지막으로 하는 말입니다.”하준이 더 할 말이 있는 듯한 눈으로 여름을 쳐다보며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여름은 흠칫했다. 오늘 그가 너무 밉고 화가 났지만, 여전히 하준은 사랑하고 있었다.“그러는 당신은요? 날 사랑하나요?”‘사랑한다면, 취했을 때 다른 여자 이름을 부른 건 다 뭐야?’“난 당신을 사랑할 수도, 언제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하준은 무표정하게 대답한 후 돌아서 나갔다.여름은 망연자실한 채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언제든 거둘 수 있는 사랑이라니, 그렇게까지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야?’******서재.하준은 와인잔을 들고 창 앞에 서서 마당에 쌓인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여름이 더 이상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랐다.그렇다. 여름을 사랑하지만, 양유진과 이렇게 계속 얽힌다면 이 사랑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양유진이 여름의 목숨을 구한 것은 사업상으로 좀 지원해주면 될 일이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보답이랍시고 다른 남자 곁에 있는 꼴은 볼 수 없었다.하준은 짜증스럽게 와인을 꿀꺽 삼켜버렸다.뒤에서 조용히 서 있던 상혁이 말했다.“그 사진 건은 강여름 씨에게 말씀하지 그러십니까?”“뭐 하러? 강여름이 믿겠어? 내가 생명의 은인에게서 자기를 떼어내려는 수작인 줄 알겠지.”하준이 차갑게 웃었다.상혁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양유진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 신장까지 희생했으니 자신이 여름이어도 마음이 움직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깊은 밤.샤워를 마치고 나온 여름은 침대에 멍하니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휴대 전화를 집어 윤서에게 톡을 보냈다. 자신 대신 양유진 간호를 부탁할 생각이었다.윤서: 어머! 너 지키려다 콩팥까지 떼냈어? 넌 어때? 그냥
여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전에는 전화를 검사하거나 하지는 않았었는데 이제 마지막 남은 프라이버시까지 침해하려 하고 있었다.“선 넘지 말아요.”“무슨 선을 넘었다는 겁니까? 당신이 다른 놈하고 시시덕거리고 있을지 누가 압니까?”하준은 상대의 핸드폰을 검사하거나 하는 걸 옳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입꼬리가 귀에 닿을 정도로 웃고 있는 여름을 보니 어쩐지 심사가 뒤틀려 확인하고 싶어졌다.여름은 두 사람 사이의 믿음이 이렇게까지 깨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방금 톡 내용을 보여주면 또 오해할 것 같아 솔직히 얘기했다.“윤서랑 얘기 중이었어요. 걔 남자친구 일로요. 그리고… 윤서더러 나 대신 양 대표 문병 좀 가 달라고 했어요, 나는 못 가니까. 친구가 가는 것도… 안 될까요?” 여름은 눈을 똑바로 뜨고 하준을 바라보았다. 육안으로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그의 얼굴이 차갑게 변하는 걸 보고 마음속에 피로감이 몰려왔다.“내 침대에 누워서도 지금 다른 남자 걱정입니까?”하준은 여름의 핸드폰을 집어 벽에 던져 버렸다.핸드폰 깨지는 소리에 놀란 여름은 귀를 막았다.하준은 여름의 손을 잡아챘다. 여름을 침대에 꽉 눌러두고 거칠게 키스하기 시작했다.“어때? 누구랑 키스하는 쪽이 더 좋아? 나야, 양유진이야?” 하준의 입술은 폭풍우가 몰아치듯 여름을 덮쳤다. 너무 아파 힘껏 밀어내려고 했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서재에서 와인까지 비우고 온 하준은 욕망에 불타올랐다. 여름과 양유진의 키스 장면을 생각하자 더 그녀를 자신이 가지고 싶었다. 점점 더 거칠게 키스를 퍼부었다.“그만! 아파요.”여름이 너무 아파 몸을 피했다.“왜 피하지? 양유진이 아니라서?” 하준은 이미 질투에 이성을 잃었다. 하준은 힘껏 여름의 잠옷을 찢었다.“그날 잊을 수 없는 밤을 만들어 준 모양이지? 그래서 오늘 다시 만나니 헤어지기 싫었나?”여름은 너무 놀랐다. 그의 손을 꽉 잡고 고개를 흔들었다.“이러지 마. 나 오늘 너무 무서웠다고요. 지금은….”“나랑은
“여기 있어요.”임옥희가 자신이 만든 아침 식사를 들고 왔다.하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강여름 씨, 내 아침을 안 했습니까?”“내가 만든 밥 안 먹겠다고 했잖아요.”여름은 담담하게 응대했다. 하준은 늘 그랬다. 의심할 때면 여름이 만든 아침밥에 화풀이해놓고, 또 내놓으라는 식이었다. ‘피곤하지도 않나?’“당장 하십시오.”하준의 얼굴이 완전히 어두워졌다.“안 해요. 내가 하인도 아니고.”여름은 죽을 다 비우고 일어났다.“회사 갔다 올게요.”하준은 고개를 돌려 현관 입구에 서 있던 차윤에게 말했다.“잘 지켜봐. 병원에 가려고 하거든 바로 데려와.”“내가 당신 노예에요?”여름은 너무 화가 났다.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이런 식으로 자신을 억압하려 하다니.“최하준 씨, 적당히 하죠.”“날 건드렸을 때는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반항은 받아주지 않겠습니다.”담담한 말투였지만 사람 환장할 소리였다.여름은 핸드백을 챙겨 나갔다. 차윤이 따라나섰다.출근길, 여름이 아무리 속도를 내도 차윤은 쉽게 따라붙고는 했다.주차장에 도착해 여름이 내리자 차윤도 얼른 뒤에서 따라 내렸다.“따라오지 말아요. 병원 안 가요.”여름은 차윤 앞으로 가 솔직히 말했다. 이 경호원에게는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전 그분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최하준 씨가 고용한 거죠? 얼마 받나요? 내가 두 배 줄게요.”여름이 가방에서 카드를 꺼냈다.차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얼마를 주셔도 소용없습니다. 저는 그 댁에서 특별히 훈련받았습니다. 고용주를 위해서만 일합니다.”여름은 흠칫했다. ‘FTT에 차윤 같은 사람이 더 있다는 건가?’FTT는 상상 이상으로 미스테리했다.“하준 씨하고는 알고 지낸 지 오래됐죠? 혹시 ‘지안’이라고 알아요?”늘 차분하던 차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찰라였지만 여름은 분명히 봤다.“하준 씨가 그러던데, 전 여친이라고. 두 사람이 아주 깊은 사이었나 봐요?”“이미 지난 일입니다. 그분 마음속엔 이제 강여름
“지금 회의가 있어서 5시 반은 되어야 끝날 것 같아. 이따가 나는 바로 갈게. 너희 부모님께 죄송하다고 좀 전해줘.”윤상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 하지만 절대 늦으면 안 돼. 우리 아빠 약속 안 지키는 거 제일 싫어하신단 말이야.”“걱정 마, 내 평생이 걸린 큰일인데 늦으면 안 되지. 어머님 아버님 드릴 선물도 벌써 준비해 놨어. 얼른 날짜 잡고 우리 윤서 데려와야지.”윤상원이 웃으며 말했다.윤서는 스윗한 말투에 기분이 좋아졌다.전화를 끊고 윤서는 부모님을 픽업해 컨피티움으로 향했다.도착하니 딱 5시 반이었다. 윤서가 음식을 주문하고 얼마 안 되어 오빠 임준서도 도착했다.6시가 되도록 상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윤서의 아버지는 조금씩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아직도 안 오는 거냐, 어른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다니, 원.”어머니가 말했다.“연말이라 일이 많을 거 아녜요, 조금 기다려봐요.”윤서는 윤상원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아마 오는 길이라 못 받나 봐요, 곧 도착할 거예요.”하지만 다시 30분이 지나도록 상원은 오지 않았고 윤서의 아버지는 더 화를 참을 수 없었다.“첫 대면 자리에서조차 바람을 맞히고 전화 한 통 없다니, 내가 보기엔 그 녀석 진심이 아닌 것 같구나. 난 이 결혼 허락 못 한다.”이번에 어머니도 아무 말 없었고 임준서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당장 헤어져라. 세상에 남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가족들에게 질책을 들으며 윤서는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눈물을 꾹 참고는 있었지만 너무나 실망스럽고 괴로웠다.자신을 수도 없이 바람맞혔던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을 처음 뵙는 날 약속을 어기다니!‘정말 날 사랑하긴 하는 걸까?’어머니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윤서야, 평생 너한테만 마음 쏟아주는 사람을 만나야지. 괜찮아. 아직 어리니 서두르지 말고 결정하자꾸나. 밥 먹자, 다 식겠다.”다들 입맛이 없어 모래알을 씹는 기분이었다.윤상원은 끝까지 전화 한 통화 없었다.식
”말 다 했어?”윤상원이 버럭 화냈다.“아니지?”윤서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윤상원, 나 장난 아니야. 다시는 나 찾지 마. 우리 이제 정식으로 헤어지자.”“너 정말, 정도껏 해!”“끝났다고. 그 눈에는 평생 신아영 밖에 안 보일 거야. 그래, 차 사고 났으니 가볼 수 있지. 하지만 우리 가족을 까마득히 잊은 채 전화 한 통화 없는 건 아니지. 오늘이 우리한테 얼마나 중요한 날이었는지 신경조차 안 쓴 거야. 이제 기대 안 해. 다시는 볼 일 없었으면 좋겠네.”윤서는 그렇게 전화를 끊고는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그리고 다 울고 나서, 윤상원과 신아영의 연락처를 모두 삭제해버렸다.그 두 사람 때문에 너무나 고통받고 지쳐 있었다.‘앞으로 다시는 기대나 희망 같은 거 가질 일 없을 거고 아파할 일도 없을 거야.’윤서는 불러내 함께 술 마시며 넋두리할 상대가 간절했다.원래는 여름에게 전화할 생각이었으나 자유롭지 못한 여름의 처지가 떠올라 그냥 혼자 차를 몰아 바(Bar)로 갔다.******동성의 바는 모두 거리 한 곳에 몰려 있다.있는 집 자제들이 가는 곳도 딱 몇 군데 정해져 있다.11시, 지훈과 하준 두 사람이 위층 룸에서 내려오고 있었다.저녁을 먹었는데도 하준은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지훈이 어쩔 수 없이 함께 술친구가 되어 주었지만 하준은 그리 많이 마시지 않았다. 아마 자신이 술에 취한 모습이 싫어서 그랬을 것이다.“하준아, 이번에 서울 가서 설 보내냐? 만약 안 가면 우리 할아버지께서 같이 오라고 하시는데.”지훈이 내려가며 말했다. 아래쪽을 슬쩍 곁눈질하던 눈에 바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하얀 피부의 여인이 들어왔다. 옅은 노란색 니트를 입고 긴 웨이브 머리를 어깨 위로 늘어뜨린 여인은 이목구비가 매우 서구적이었다.그런데 윤서는 완전히 취해있고 옆에는 남자 둘이 지분거리고 있었다. “윤서 씨 아냐? 왜 혼자 술 마시고 있지?”윤서와 몇 번 함께 자리한 적이 있는 지훈은 윤서를 괜찮게 생각하고 있
“평생 차여라!”지훈이 짜증 내며 말했다.“임윤서 씨, 잘 봐요. 나 이지훈인데요?”“이지훈이 누구야….”임윤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처음 듣는 이름인데. 당신 나한테 반해서 납치하는 고야?”지훈은 어이가 없어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최하준은 알죠? 당신 베프의 남친.”윤서가 몽롱한 상태로 앞을 바라보다가 눈을 번쩍 떴다.“어머~ 외삼촌이시구나. 외삼촌, 안녕하세요!”하준이 미간을 문질렀다. ‘어허, 또 취해서 아무렇게나 부르네.’지훈이 ‘풉’하고 웃었다. “착각했나 보네요. 저 녀석이 왜 외삼촌입니까?”“아닌데요? 외삼촌 맞잖아요, 히힛!”윤서가 손을 내저었다.“맞다니까! 한선우 그 쓰레기 외삼촌. 내가… 여름이랑 바에 있을 때… 내가 딱! 찍어줬는데에~”하준이 미간이 움찔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날 뭘로 찍었다는 겁니까?”“꼬시라고. 우리 여룸이가 외숙모가 되면 한선우가 완전 약 오를 거 아녜요? 한주그룹 서열도 완전 꼬이고, 흐흐~”윤서는 완전히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아, 아니다. 그쪽은 외삼촌 아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봐서… 여름이를 그렇게 만들었어, 흐엉.”최하준의 눈빛이 점점 더 서늘해졌다. 지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 느낌이었다. “어째서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겁니까?”하준이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윤서 씨 외삼촌이랑 닮았을 리도 없는데?”“에이, 난 외삼촌 없어요.”윤서가 헤롱헤롱하다가 잠시 후 웅얼웅얼 말했다.“외삼촌, 우리 여룸이한테 잘해줘여어. 화내지 말요. 내가 약 쓰라고 했어요. 진짜 걔가 그런 거 아니에요.”윤서는 계속 중얼거리다가 차 문에 기대어 정신없이 잠들었다.운전하는 상혁도, 뒤에 있는 지훈도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 물이 있으면 죄다 얼어붙을 듯 분위기는 싸늘했다.5분쯤 뒤, 하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차 세워.”“하준아.”지훈은 좀 걱정이 됐다.“너무 늦었다.”“혼자 좀 생각할 게 있어. 넌 윤서 씨 데려다
번쩍! 갑자기 등이 켜졌다.곧이어 여름이 덮고 있던 이불이 걷히고. 싸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일어나십시오.”“대체 또 뭘 하려는 거예요?”여름은 피곤한 듯 일어나 앉아 올려다보았다가 얼어붙고 말았다. 하준의 눈은 완전히 핏발이 서고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워 보였다.하준은 여름의 청순한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여름과 만났던 날의 장면, 여름이 했던 말, 세세한 표정, 모두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대답해요. 그때 바에서 왜 나를 유혹했던 겁니까?”“그건 갑자기 왜요?”여름이 눈을 피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다.그러나 하준은 피하게 내버려 두지 않고 바로 여름의 턱을 잡고는 차가운 눈으로 똑바로 바라봤다.“날 한선우의 외삼촌이라고 착각했던 겁니까?”‘치지직’ 머릿속에 번개가 치고 있었다.“…….”여름은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하준은 계속 여름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름의 얼굴색이 점점 하얗게 변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당황하고 놀란 눈동자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하준의 마음도 점차 차가워지고 있었다.그동안 정말 바보처럼 여름이 자신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믿고 있었다. 이제껏 둘 사이의 밀당에서 자신이 우위라고 믿었는데 사실 저쪽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었던 것이다.사랑은 모두 거짓이다. 달콤함도 모두 거짓이다. 이 세상에 좋은 건 다 거짓이다.‘이렇게 가식적인 여자에게 마음이 흔들렸었다니.’“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여름은 망연자실한 채 어쩔 바를 몰랐다.“당신 그 변명도 이제 역겹습니다.”하준은 여름을 떨쳐내고는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듯 티슈로 손을 박박 닦았다.여름은 이런 그의 행동에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좋아요, 인정할게요. 처음엔 그랬어요. 하지만 나중엔….”“나중에 한선우 약혼식장에서 양유진을 보고 착각했다는 걸 알았겠지. 그래서 바로 이혼하자고 했고, 아닙니까?”돌아오는 길에 하준은 모든 걸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아마도, 우리 사이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겠지.’애초에 지저분한 목적으로 그에게 접근했었고, 나중에는 감옥에서 나오기 위해 거짓말에 거짓말이 더해졌다.이제 그 거짓이 다 드러났고 두 사람 사이의 감정도 거품처럼 그대로 터져버렸다.******밤새 잠을 못 잔 여름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하준의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아마 이것은 여름이 그를 위해 준비하는 마지막 아침이 될 것이다.“아유,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겨우 6시 반인데.”임옥희가 하품하며 주방으로 들어오다가 여름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흠칫 놀랐다.“어젯밤에 잠 못 잤어요? 얼굴이 너무 안 좋네요.”“이모님, 어젯밤에 식단을 적어봤어요.”여름이 노트를 건넸다.“하준 씨가 좋아하는 음식들이에요.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이라 이제 이모님께서 수고 좀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어머, 무슨 뜻이에요?”임옥희가 깜짝 놀랐다. 최근에 두 사람이 싸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부부싸움 칼로 물베기지’ 하고 있었다.“아이고, 도로 가져가요. 선생님은 여름 씨가 한 것만 좋아하지 내가 한 건 건드리지도 않는다고요.”“앞으로… 앞으로라는 게 없을 거예요, 이제.”여름이 힘없이 웃었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더 머물 수 있다는 기대는 할 수 없었다.‘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해도 믿지 않겠지. 자기 배경 때문이라고 생각할 테니까.’더군다나 두 사람 사이는 이미 신뢰가 깨져 있었다. 계속 함께한다고 행복해질 리도 없었다.“아이고, 그런 소리 말아요, 부정 타게.”임옥희는 끝까지 거부하더니 나가버렸다.여름은 하는 수 없이 조리대 위에 두었다. 아주머니가 볼 거라 믿었다.오늘 아침은 공을 많이 들였다. 손수 만든 겉절이에 미역국, 명란 계란말이, 조기구이….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하고 처음 준비했던 메뉴와 비슷했다.8시가 되자 하준이 위층에서 내려왔다. 검은 팬츠에 검은 터틀넥 니트를 받쳐입고 있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아무 옷이나 걸쳐 입어도 워낙 핏이 좋다 보니 모델처럼 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