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물쩍 넘어가지 말고 대답하세요.”최하준의 모습을 보고 대답을 재촉했다. 당황하는 표정을 보니 속이 쓰리고 시큰거린다. 왠지 모를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일단 참고 입만 삐죽 내밀었다.“대답 안 하면 떡만두국 안 줄 거예요.”“한 번 해봤습니다.”여름이 이렇게 질투심이 많은지 몰랐다. 당황스럽다.“전 여친에게 미련이 아직 남아 있나 보네. 얘길 꺼내기 무섭게 얼굴빛이 달라지고.”여름이 쉬지 않고 쏘아댔다. 좋았던 분위기에 얼음물을 확 끼얹은 느낌이랄까.최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너무 놀라 여름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아, 미안해요.”“과거사는 서로 들추지 맙시다. 강여름 씨도 한선우와 사귀었잖습니까?”최하준이 침울하게 주의를 주었다.일순간 서로 말이 없어지고 침묵이 공간을 지배했다. 여름은 그저 얌전히 불 세기를 높여 떡만두국을 끓였다.최하준은 말없이 카드를 다시 여름의 주머니에 넣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파 좀 썰어달라니까 그냥 갔네? 이 바보!’저녁 식사 후, 여름은 계약서를 내놓으라고 계속 칭얼거렸고 최하준은 하는 수 없이 계약서를 꺼내왔다.“계약서는 찢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사적으로 양유진과 한선우 같은 이성과 접촉하지 말아요. 밤에는 반드시 정해진 시간 내에 돌아와야 합니다. 너무 늦게 귀가하지 마십시오.”최하준이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갔다.“그리고 날 떠나는 것도 불허합니다.”“네, 네, 알겠다고요. 이렇게 매력이 철철 넘치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 어떻게 떠날 수 있겠어요. 드디어 우리 사이에는 남녀간에 신뢰가 생긴 거랍니다.”여름이 최하준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그에게 키스를 퍼부었다.대담한 키스에 기분이 좋아진 최하준이 계약서를 건네주었다.여름은 계약서 조항을 불에 천천히 태워버렸다. 그동안 가슴을 짓눌렀던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마침내 사라진 기분이랄까.저녁 내내 여름은 최하준 앞에서 재잘재잘 활기에 넘쳤다.여름이 전보다 훨씬 더 생기가 넘치는 것을 본 최하준은 계약서
“야! 미쳤어?”강여경이 팔짝 뛰면서 소리를 빽 질렀다. 다시 여름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차윤이 순식간에 오른손으로 강여경의 손목을 꺾었다. 그 상태로 꺾은 손목을 잡고 강여경의 뒤로 가면서 왼손으로 뒤에서 목을 뒤로 당겼다. 강여경은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졌다. 차윤은 순식간에 바로 뒤로 물러나 얌전히 자세를 취했다.강여경은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더는 어떤 행동도 하지 못 했다. 여름이 가늘게 눈을 뜨고 미소를 지었다.“한 번만 더 내 앞에서 그 예쁜 입 놀렸다가는, 아예 말을 못 하게 될 줄 알아.”차가운 경고를 하고 난 후 입꼬리를 올리며 도도하게 떠났다.강여경은 얼얼한 팔을 매만지며 증오에 가득 찬 눈으로 여름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강여름, 조금만 기다려. 내가 널 반드시 죽여버릴 테니.******오후 3시.17층.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조 이사가 맨 앞자리에 앉았고 그 뒤로 화신의 중역이 주르르 앉아 있었다.오 부사장이 말했다.“강여름 대표이사가 새로 부임했는데, 첫 주간 미팅에 모시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그까짓 게 뭐라고.”조 이사가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애송이가 뭘 알아? 됐어. 회의 진행해. 강 상무, 신규 분양 인테리어를 맡아줄 업체는 정했나?”강여경은 어깨의 통증을 참으며 말했다.“아직 미결정 상태입니다. 인테리어 회사들이 제출한 견적이 너무 높게 책정되어 있어서, 자체 시공팀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디자인 기획안을 가져왔으니 다들 한 번 보시지요.”두툼한 설계도면과 기획안을 보란 듯이 펼쳤다.회의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 눈이 휘둥그래졌다.“이번 기획안은 굉장히 창의적이구먼. 고급스러우면서도 품격이 넘치는데.”“이게 모두 강 상무가 직접 설계한 기획안인가? 정말 대단하군!”“지난번에 분양한 인테리어보다 훨씬 낫군요.”“……”강여경은 겸손한 척하며 말을 아꼈다.“견적서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제 계산으로는 외부 인테리어 업체에 하청을 주는 것보다 30% 이상 비용을 절감할
“계속합시다. 조금 전까지 논의했던 안건은 뭐죠?”여름이 조 이사의 반응을 무시하며 담담한 얼굴로 회의장 안을 둘러보았다.“방금 인테리어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강여경 상무가 디자인 기획안을 제출했는데 저희 모두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오 부사장이 머뭇거리며 디자인 도안을 펼쳤다.강여경은 심장이 툭 떨어졌다. 강여름이 회의에 참석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여름은 분명 그 기획안을 알아볼 것이다.호텔에서의 그날, 여름이 가져왔던 그 기획안 그대로였다. 하지만 강여경이 훔쳤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면 중역의 비웃음을 살 것인데...여름은 디자인 도면들을 뚫어지게 들어다보더니 차윤에게 귓속말로 몇 마디 지시했다.차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밖으로 나갔고 여름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흠… 기획안 정말 훌륭하군요. 출력 시간이 오늘 새벽 1시인데, 강 상무는 낮에 출근한 걸 보니 철야 했나 보군요.”“그렇습니다. 강 상무가 며칠 밤을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일했다고 합니다.”“노고가 많았습니다.”회의실이 강여경을 칭찬하는 목소리로 가득 찼다. 강여경은 어깨가 으쓱해졌다. ‘일부러 늦은 시간에 출력했는데 먹혔군.’“제가 작업한 디자인 기획안 어떠신가요?”“디자인이 훌륭합니다. 그런데 아주 공교롭군요. 내가 보름 전에 이것과 똑같은 기획안을 잃어버렸거든요.”여름의 발언에 갑자기 장내 분위기가 싸하게 변해버렸다.회의 참석자들은 조용해졌다. 강여경은 질새라 억울한 척 연기를 했다.“내가 디자인을 베꼈단 말씀이신가요?”“강 상무 재능을 질투하는 건 아니겠죠?”조영호 이사가 비꼬듯이 말했다.“다들 아시겠지만 여기 두 자매분 사이가 안 좋으십니다. 두 분 사적인 관계를 회사로 끌고 들어와 괜한 힘겨루기를 하시면 곤란합니다.”잠시 모두 숨을 죽이고 여름의 표정을 살피며 눈치를 보았다. 명색이 대표이사인데 그릇이 너무 작은 거 아닌가. 회의장이 점점 술렁거렸다.“여러분들이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합니다.”여름이 짧게 한숨을 지었다.
조영호의 얼굴빛이 일순간 흐려졌다.“내 능력이 의심되면 어디 재주껏 나를 쳐내보시던가.”조영호가 여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럴만한 깜냥이 안 될걸? 대표이사 자리는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그렇게는 못하지요. 조 이사는 회사 이윤 창출에 지대한 공헌을 했는데 당연히 믿죠.”여름이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그런 의미로, 오늘 회의는 조 이사에게 맡기겠습니다.”여름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회의장을 나갔다.조영호는 멀어져가는 여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자신에게는 피해가 오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름이 나가자마자 조영호의 아내가 갑자기 회의장으로 들이닥쳤다. 한바탕 소란을 피우며 남편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갈겼다.“조영호! 이 자식! 나 몰래 밖에서 바람을 피워?!!네가 나랑 결혼하지 않았으면 화신그룹에 들어올 수나 있었을 것 같아?!이날 이때껏 뒷바라지 다 했더니 이제 마누라가 늙었다고 이렇게 배신을 때려? 네가 사람이냐? 너 나랑 오늘 죽자!”“…….”******회의실에서의 파문은 삽시간에 회사 안팎으로 퍼졌다.여름에게 보고를 하던 노선경이 박장대소했다.“대표님께서 조 이사 얼굴을 봤어야 하는데요... 완전히 똥 됐습니다. 화가 나서 와이프를 한 대 쳤는데, 그걸 보고 류 이사가 학을 뗐습니다.”“이제 이건 시작일 뿐이야.”여름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이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지훈 씨, 회사 계열사 중에 언론사가 있죠? 번거롭겠지만 화신그룹 조영호 이사가 바람 피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해 주실 수 있을까요?“하하, 문제없어요. 제수씨가 나서기 어렵다면…”이지훈이 통화를 하는데 갑자기 싸한 느낌을 받았다. 최하준이 떨떠름한 얼굴로 다가와 있는 걸 보고는 난감해졌다.“제수씨, 왜 하준이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아요?”“쭌이요? 그 사람은 이런 일 이해 못해요. 게다가 조영호는 아주 교활해서 우리 쭌을 귀찮게 할까 봐 걱정이 돼요.”“…….”이해 못한다고? 이런 일을?
“강여름이 좋다면 다 좋은거지. 아참, 강여경은 수감 중이겠군. 잘 대접해 줘라. 수감생활이 불편하지 않게. 하하.”냉랭했던 최하준이 순식간에 여유가 생겼다. 한때 강여름이 감옥에서 똑같은 고통을 겪었었지. 이제는 되돌려줄 차례다.******다음날, 화신의 조영호가 바람을 피워 회사가 발칵 뒤집힌 사건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조영호는 화가 났지만 자신의 명성이 땅에 떨어진 걸 어쩌겠는가.내연녀와 공적인 장소에서 다정한 포즈로 찍힌 사진이 온라인에 가득 돌았고, 와이프 폭행영상까지 모두 유포되었다.온라인에는 매일 수만 건의 댓글이 올라와 조영호에게 욕을 퍼부었다.대표이사의 집무실. 조영호는 분기탱천하여 쳐들어왔다. 그리고는 여름에게 손가락질하며 욕을 퍼부었다.“너 뭐 하자는 짓이야! 회의장 동영상 네가 다 뿌렸지?!”“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여름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 짐짓 애석한 얼굴로 말했다.“이런 분이신 줄 정말 몰랐네요. 크게 실망했습니다. 회사 이미지에 먹칠 해도 유분수지.”“네가 뭔데 뻔뻔하게 입을 놀려! 이게 진짜! 내가 모를 줄 알아? 다 네가 꾸민 짓이잖아. 감히 날 건드렸겠다!”조영호가 성큼성큼 다가가 여름을 발로 차려고 했다. 이때 차윤이 번개처럼 나서 그의 팔을 꺾더니 책상 위에 눌러버렸다. “이게, 이거 못 놔?”조영호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고함을 질렀다.여름이 내선번호를 눌러 경비원들을 불렀다.“이분 밖으로 모셔요. 조 이사는 심리적으로 불안한 것 같으니 업무는 우선 오 부사장이 맡죠.”“강여름. 두고 보자! 네가 감히 날 어떻게 해보시겠다? 꿈도 꾸지 마!”조영호가 끌려나간 후 오봉규 부사장이 황급히 대표실로 올라왔다.젊고 능력있는 상사를 보니 문득 경외감마저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회사 중역은 강여름을 무시했다. 그러나 불과 하루만에 반전 드라마가 펼쳐졌다. 조영호의 평판은 시궁창에 떨어졌다.증거는 없지만 강여름이 손을 썼다는 것은 다들 알았다.“오 부사장은 능력도 있고 수
불과 일주일 만에 오봉규는 발빠르게 화신의 중역부터 일반 직원들까지 인사 관계를 정리했다. 여름에 불복하는 중역은 요직에서 물러나 좌천되었다.강여경도 예외 없이 직위를 내려놓아야 했다.강여경은 수감 중이어서 바깥 상황이 완전히 뒤집힌 것을 모르고 있었다.유치장 안에서 매일 구타당하고 찬물에 홀딱 젖기도 하고 온몸이 성한 곳이 없다.일주일 이상 온갖 수모를 견디며 강태환은 엄청난 돈을 써서 겨우겨우 강여경을 감옥에서 꺼내올 수 있었다.강태환의 딸은 두 발로 걷지 못하고 들것에 실려 나왔다.코가 시퍼렇게 멍들고 얼굴이 퉁퉁 부어 있는 모습에 이정희는 딸을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다.“내 딸을… 어떻게 사람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누가 이런 거야? 내가 가만있지 않겠어!”“엄마, 아버지. 꼭 복수해주세요. 죽을 것 같아. 엉엉엉.”강여경은 아파서 머리를 들지도 못했다.옆에서 강여경의 참혹한 모습을 본 진현일은 이 상황에 오히려 진절머리가 났다. 보면 볼수록 구역질이 날 뿐이다.“불쌍한 것. 걱정하지 마라. 아비가 반드시 이 수모를 모두 갚아주마.”강태환이 미친듯이 노발대발했다. 진현일이 옆에서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는 걸 보고는 더 화가 치밀었다.“애가 아픈데 한 번 안아주지 그러나. 상태를 보니 빨리 병원으로 보내야 할 것 같네.”“네, 네.”진현일이 억지로 강여경의 곁으로 다가가 몸을 기울였다. 강여경은 수감되면서부터 계속 목욕을 하지 못해 악취가 진동했다. 구역질이 나는 걸 간신히 참았다.진현일은 후회가 되어 속이 쓰렸다. '진작에 이 집 사정을 알았더라면, 오늘 여기 이러고 있지 않았을 텐데....'******병원.강여경이 눈을 부라리며 의사에게 지시했다.“최고의 약으로 처방해주세요. 사흘 내에 회복이 되어야 한다고요. 회사로 가봐야 해요.”“죄송합니다만 그런 약은 없습니다.”의사가 단박에 잘라 말했다.“이 병원은 도대체 뭐야? 모두 모자란 것들뿐이군. 엄마, 병원 옮겨줘요. 빨리 회복해서 회사로 돌아가 강여름 찢
“되찾아 오는 거야 간단하죠.”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진현일이 끼어들었다.강태환과 가족들은 모두 그 말에 놀라서 진현일을 주시했다.“오빠, 빨리 말해봐. 우리 이제 한 식구잖아.”강여경이 급히 재촉했다.“강여름을 끌어 내리려면, 하루빨리 내가 너랑 결혼해야 해.”진현일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었다.“최윤형이 곧 동성에 온다는 소식이 있어. 그 사람의 환심을 살 수만 있다면, 화신의 간부들이나 중역들이 널 받아들여 줄 거야.”강여경과 가족들의 눈이 번쩍이기 시작했다.강태환은 상당히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그 집안은 누가 뭐래도 최고 재벌가지. 최윤형이 직계는 아니지만 그 사람을 통해서 FTT와 연을 맺을 수만 있다면 우리도 그 덕을 톡톡히 보게 될 거다. 다시 일어서는 건 문제없지. 그렇게 된다면야 강여름 정도는 무시해도 그만이다.”“맞습니다.”진현일이 고개를 끄덕였다.“최윤형의 비서가 먼 친척이니 때가 되면 제가 접대를 할 예정입니다. 그때 소개해 드릴 테니 적당한 선물을 준비해 주십시오. 최윤형은 골드바를 좋아하더라고요.”“오빠, 정말 고마워. 오빠를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내가 진정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빠뿐이야.”강여경이 감동하여 그를 바라보았다.진현일은 속이 울렁거렸지만 겨우 참았다.“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인 걸.”******화신.저녁 여섯 시 반.여름이 사무실 전등을 끄고 퇴근하려고 나오는데, 구진철 이사의 손자인 구성호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강 대표님, 퇴근하시나 봅니다.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이 근처 맛집을 제가 잘 알고 있거든요…”여름은 머리가 아팠다. 회사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좋아지면서 이렇게 남자를 소개를 해주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회사 간부의 손자, 아들 할 것 없이.“죄송합니다. 제가 오늘은 집에 빨리 가봐야 해서요.”“그럼, 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구성호는 포기하지 않고 물고 늘어졌다.“가방이 무거워 보이네요. 들어드리겠습니다.”손을 뻗었지만
최하준은 대답하지 않고 몸을 기울여 여름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지 내심 궁금했다.“남자친구예요.”여름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구 이사님 뜻은 잘 알겠지만, 저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사님들께서 소개해 주시는 분들 모두 응대할 만큼 제가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고 전해주시면 좋겠네요.”구성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마디 말을 남겼다.“똑똑한 분이시니 잘 아시겠지만, 잘 생각해 보셔야 할 겁니다. 이사회의 누군가와 인연을 맺는다면 여러모로 서로에게 이득이 된다는 점은 꼭 명심하셨으면 합니다. 대표님이 지금 얼굴만 보고 남자 만나실 처지가 아닙니다.”최하준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옆에 있던 차윤은 웃음을 참느라고 얼굴이 일그러졌다.“충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 사람이 너무 좋아서 이제 이 사람 없이는 살 수 없거든요. 알았으면 그만 가보세요.”여름이 단호하게 잘라냈다.“세상 물정을 정말 모르시는군요.”구성호가 잔뜩 열이 뻗쳐 여름을 쏘아보다가 가버렸다.한숨을 내뱉고 고개를 돌리다가 모호한 최하준의 시선과 마주쳤다. 방금 했던 오글거리는 말들이 떠올라 얼굴을 붉혔다.“빨리 포기하라고 그런 거예요. 오해하지 말아요.”“무슨 오해?”최하준이 웃음기를 빼고 눈을 가늘게 뜨고 똑바로 바라보았다.“날 사랑해서 이젠 이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헉, 이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했어? 내가?’그러나 그 위험스러운 얼굴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여름의 침묵에 최하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탑시다.”차가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어색한 침묵이 싫어서 적절한 화제를 찾다 보니 또 이 말밖에 생각나지 않는다.“식사했어요?”대답이 없었다. 갑자기 여름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뱃속이 다시 조용해지자 여름이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이제 겨우 여섯 시 조금 넘었는데 왜 이렇게 배가 고프나 했더니 점심도 안 먹었잖아?” “회사 구내식당 밥이 맛이 없습니까?”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