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실소했다.“강태환 전 대표의 조카인 이민수가 리베이트 자금을 횡령하는 것을 밝혔던 게 바로 저입니다. 건물 하나 제대로 짓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개발업자가 되려고 하는데 누가 분양을 받으려고 하겠습니까?”“맞습니다. 안 되는 말이지요.”임 이사가 나서서 맞장구쳤다.“저도 고민 좀 해봐야겠습니다. 화신의 평판이 나빠지면 여러모로 곤란합니다.”“……”주주들의 반응이 조금씩 기울기 시작하자 여름이 완곡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여러분 말씀대로 저는 아직 어립니다. 아직 모자라지만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로 여기 계신 선배님들께 한 수 배워보려고 합니다. 화신이 이 위치에 오기까지는 쉽지 않았습니다. 강태환 이사가 어떤 걸 미리 약속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최종 목표는 화신이 앞으로 계속 승승장구해서 배당금 수익이 높아지는 것 아니겠습니까?”“옳습니다.”마침내 정 이사도 호응했다. 목소리에는 위엄이 넘쳤다.“상장사의 오너 리스크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강여름 씨가 대표 자리에 오르면 저는 성심성의껏 보좌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강신희 대표를 보좌했던 시절을 기억할 겁니다. 강신희 전 대표가 있었기에 오늘의 화신도 있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암, 정 이사 능력이야 우리가 인정하지.”임 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다시 거수로 투표를 진행할까요? 구 이사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호중 이사가 말했다.“내가 구 이사님과 대표자리를 놓고 경쟁하려고 했다면 오늘까지 이렇게 편안하게 자리를 보존하지 못하셨을 겁니다?”“그렇겠지요.”구 전 이사장이 강태환의 눈길을 피하면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자, 그럼 거수를 진행합니다.”거수로 표결이 시작되었고, 강여름이 9표를, 강태환이 7표를 얻었다.“강여름 신임 이사장님, 축하합니다.”정호중이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강태환은 책상을 탁 치며 벌떡 일어서 노기 어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이사장 선출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결과가 이랬다 저랬다 바뀌
“꼭 그렇게 만들 거야.”강여경이 이를 갈며 말했다.“하지만 일단은 보류해야 할 것 같아. 갑자기 강여름이 나타나서는… 방금 대표이사로 선출됐어.”“뭐?”진현일이 놀라 펄쩍 뛰었다.“무조건 당선된다고 하지 않았냐? 뭘 어쨌길래 강여름 하나를 못 당해내?”강여경은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했다.“정호중하고 엮인 줄 누가 알았겠어. 우리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됐어. 내 여자친구가 화신그룹 대표 딸이라고 여기저기 소문내고 다녔는데, 이제 얼굴 못 들고 다니겠군.”“…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오빠.”강여경이 풀이 죽어 울먹였다.“무슨 말이 그래? 우리 아버지가 화신그룹 대표가 아니면 날 버리겠다는거야?”현일은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쨌거나 강여경은 화신그룹 이사의 딸이니 매년 배당금만해도 엄청난 액수다. 황급히 멋쩍은 듯 웃었다.“그럴 리가 있나. 별 생각을 다한다, 너. 난 그냥 네가 그런 일을 당했다니 너무 화가나서 그랬어. 내가 좋아하는 건 강여경이야. 누구누구의 딸이 아니라.”“안심해 오빠. 조금만 기다려주면 상황이 바뀔거야. 강여름이 대표이사 자리에 앉긴 했지만, 오래가진 못할거니까.”강여경이 악에 받쳐 이를 갈았다.“그렇겠지. 자리를 보존하는 게 그렇게 쉽지 않으니까.”진현일이 음흉하게 웃었다.“나도 있는 힘껏 널 도울게.”“고마워, 오빠.”******12시 20분.드디어 회의가 끝났다.주주들이 한사람 한사람 여름과 정중하게 악수를 나누고 자리를 떠났다.“대표실로 모시겠습니다.”비서인 노선경이 여름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네, 그럴게요.”여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강태환이 여름과 정면으로 마주섰다.어둡게 일그러진 얼굴로 여름에게 소리를 질렀다.“천하에 배은망덕한 것! 네가 지금 다 가진 것 같지? 그래, 너한테 잠시만 양보하지. 곧 다시 내 자리가 될 테니…”“시끄러워요!”여름이 소리쳤다.강태환은 여름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신이 어질어질했다.화가 머리 끝까지 나
“무슨 헛소리야!”강태환이 노발대발하며 벌떡 일어났다.“네 할머니는 병환으로 돌아가셨다.”“그런가요? 부검했으면 사인을 알았을 텐데 화장을 해버려서 증거가 다 사라져 버렸죠.”여름이 비아냥거렸다.“이건 알아두세요. 이대로 그냥 못 넘어갑니다. 할머니의 한, 지금까지 나한테 했던 모든 악행들, 하나씩 다 갚아줄 거예요.”여름은 휙 몸을 돌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장을 나갔다.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이를 꽉 물었다.지금까지 강태환 집안 사람들에게 갖은 모욕과 천대를 받았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의 목숨까지 노렸다. ‘오늘부터 강여름은 강해 질 거야. 이제 나 자신도 지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거야.”******대표실에 도착했다.여름은 노선경에게 회사 중역 자료를 모조리 가져오게 했다.“숨 좀 돌리고 시작하시지요. 먼저 식사부터 하시고요. 식당에 식사 준비를 시켰는데요.”“여기로 가지고 오라고 해줘요.”노선경이 나가자 여름이 차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고마워요. 오늘 차윤 씨가 아니었으면 무사하지 못했을 거예요.”“별말씀을요.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대표님을 경호하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차윤이 침착하게 대답했다.“인사를 하시려거든 최하준 변호사님께 하십시오.”안 그래도 오늘의 굉장한 소식을 최하준에게 한시라도 빨리 알리고 싶었다. 핸드폰을 들어 하준에게 전화를 했다.“쭌, 뭐해요?”“밥 먹습니다.”대답은 아주 간결했다.여름은 기분이 상했다. ‘뭐야….’“오늘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지도 않아요? 나한테 관심도 없나봐. 흥!”“1시간 전 문자로 이미 보고받았습니다.이제 강여름 대표가 화신그룹 이사회에서 활개를 치고 다닐테니, 나는 잘나가는 총수 와이프를 둔 남편으로 편하게 지낼 수 있겠군요.”최하준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이제는 제 지위가 많이 높아져서요, 남자들이 아마 줄을 설 거에요. 내 말 안 듣고 철없이 굴면 확 남편을 바꿔버릴 지 몰라요~.”여름
“조 이사가 어떤 사람인지 나한테 귀띔 좀 해주겠어요?”노선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시작했다.“조 이사는 우리 회사 요직에 앉은지 10년 가까이 된 인물입니다. 재임 기간 중 매출을 10%나 올리는데 기여해서 주주들이 무척 만족스러워 합니다. 해임시키려면 주주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거라 예상됩니다.”“알겠어요. 그만 나가보세요.”여름은 말없이 서류를 계속 들여다 보았다.그리고 오후에는 각 부서를 일일이 방문하며 시찰을 돌았다.해 질 무렵이 되어도 중역은 한 명도 코빼기를 보이지 않았다.날이 완전히 저물자 여름이 차윤에게 말했다.“나 좀 도와줘요. 스파이를 색출해내야겠어.”******저녁 7시.여름은 서류를 한 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최하준은 편안한 실내복을 입고 팔짱을 끼고 거실에 앉아 있었다. 실내복인데도 위엄이 넘쳤다. 김상혁이 옆에 서서 정중하게 무언가를 보고하고 있었다.여름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최하준의 입에는 웃음기가 없었다.“아, 강 대표님, 오셨습니까?”“지금까지 회사에서 야근하다 오느라고요. 밥 먹었어요?”최하준의 불편한 심기를 간파한 여름이 선수를 쳤다. 아무 말 않는 주인을 대신해 이모님이 얼른 변명했다.“제가 한 요리는 안 드시잖아요. 꼭 사모님이 한 것만 드시려고 해요.”여름은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최하준의 어깨에 기대어 앉았다.“쭌~, 나 온종일 얼마나 힘들었다고요. 기운이 쪽 빠져서 움직일 힘도 없어요. 이모님 음식도 맛있으니까 오늘은 그냥 먹으면 안돼요?”“왜, 일이 잘 안 풀렸습니까?”최하준이 고개를 돌려 여름을 바라보았다. 여름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그윽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네, 회사 간부들이 모두 날 무시해요. 아무래도 한 판 거하게 붙어야 할 것 같아요.”든든한 어깨에 기대어 있으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마음이 편안해졌다.최하준이 눈썹을 치켜세우고 즉시 김상혁에게 지시했다. “내일 화신에 가서 정리 좀 하지. 내일 하루 안에 좀 고
최하준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슬렁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갔다.여름이 오늘 입은 세련된 오피스룩은 상당히 도도한 느낌을 물씬 풍기도 있었다. 그러나 이 시간, 그 차림에 앞치마를 두른 채 떡만두국을 끓이고 있는 모습이란… 주방의 은은한 조명이 여름의 머리 위로 비추니 더욱 아름답고, 남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최하준은 뒤에서 여름을 부드럽게 껴안았다. 자신의 얼굴을 여름의 머리에 묻었다. “많이 끓이세요. 이 정도 양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이미 다 끓였거든요.”여름이 심드렁하게 팔꿈치로 최하준의 가슴을 쿡 찔렀다.“빨리 먹고 싶으면 파 좀 쫑쫑 썰어봐요.”최하준은 어이없어하며 대꾸했다.“나한테 주방보조를 하라는 겁니까?여름이 눈을 지긋이 내리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어 건네주었다.“뭡니까?”“안에 500억 들었어요. 전에 지불하지 못했던 선임료예요.”여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따뜻했던 주방의 공기가 일순간에 냉기로 가득차는 것 같았다. 최하준의 눈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닿으면 얼어버릴 듯이.“무슨 뜻입니까?”최하준이 두 손가락으로 카드를 잡고 비아냥거리는 눈초리로 말했다.“대표 자리에 올라 돈이 생겼으니 나와의 관계도 깨끗이 청산하시겠다?”최하준이 화를 내며 힘주어 카드를 뚝 잘라버렸다.“꿈 깨요. 똑똑히 기억하십시오. 이미 계약서에 사인도 했으니 강여름 씨는 뭐가 되든 평생 내 옆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내 말 아직 안 끝났어요.”여름이 부러진 카드를 보더니 발을 탕 굴렀다.“난 빚을 갚고 평등한 관계로 쭌과 사귀고 싶어요. ‘최하준의 여자’가 아니라 파트너가 되고 싶다고요.”“무슨 뜻입니까?”최하준이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여름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소송 의뢰하면서 한 사인 때문에, 쭌 앞에서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느껴져요. 난 내가 당신 정부이고 하인이 된 것 같아요 . 눈치 보고 살살 기어야 하는.이런 관계는 정말 싫
“어물쩍 넘어가지 말고 대답하세요.”최하준의 모습을 보고 대답을 재촉했다. 당황하는 표정을 보니 속이 쓰리고 시큰거린다. 왠지 모를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일단 참고 입만 삐죽 내밀었다.“대답 안 하면 떡만두국 안 줄 거예요.”“한 번 해봤습니다.”여름이 이렇게 질투심이 많은지 몰랐다. 당황스럽다.“전 여친에게 미련이 아직 남아 있나 보네. 얘길 꺼내기 무섭게 얼굴빛이 달라지고.”여름이 쉬지 않고 쏘아댔다. 좋았던 분위기에 얼음물을 확 끼얹은 느낌이랄까.최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너무 놀라 여름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아, 미안해요.”“과거사는 서로 들추지 맙시다. 강여름 씨도 한선우와 사귀었잖습니까?”최하준이 침울하게 주의를 주었다.일순간 서로 말이 없어지고 침묵이 공간을 지배했다. 여름은 그저 얌전히 불 세기를 높여 떡만두국을 끓였다.최하준은 말없이 카드를 다시 여름의 주머니에 넣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파 좀 썰어달라니까 그냥 갔네? 이 바보!’저녁 식사 후, 여름은 계약서를 내놓으라고 계속 칭얼거렸고 최하준은 하는 수 없이 계약서를 꺼내왔다.“계약서는 찢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사적으로 양유진과 한선우 같은 이성과 접촉하지 말아요. 밤에는 반드시 정해진 시간 내에 돌아와야 합니다. 너무 늦게 귀가하지 마십시오.”최하준이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갔다.“그리고 날 떠나는 것도 불허합니다.”“네, 네, 알겠다고요. 이렇게 매력이 철철 넘치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 어떻게 떠날 수 있겠어요. 드디어 우리 사이에는 남녀간에 신뢰가 생긴 거랍니다.”여름이 최하준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그에게 키스를 퍼부었다.대담한 키스에 기분이 좋아진 최하준이 계약서를 건네주었다.여름은 계약서 조항을 불에 천천히 태워버렸다. 그동안 가슴을 짓눌렀던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마침내 사라진 기분이랄까.저녁 내내 여름은 최하준 앞에서 재잘재잘 활기에 넘쳤다.여름이 전보다 훨씬 더 생기가 넘치는 것을 본 최하준은 계약서
“야! 미쳤어?”강여경이 팔짝 뛰면서 소리를 빽 질렀다. 다시 여름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차윤이 순식간에 오른손으로 강여경의 손목을 꺾었다. 그 상태로 꺾은 손목을 잡고 강여경의 뒤로 가면서 왼손으로 뒤에서 목을 뒤로 당겼다. 강여경은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졌다. 차윤은 순식간에 바로 뒤로 물러나 얌전히 자세를 취했다.강여경은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더는 어떤 행동도 하지 못 했다. 여름이 가늘게 눈을 뜨고 미소를 지었다.“한 번만 더 내 앞에서 그 예쁜 입 놀렸다가는, 아예 말을 못 하게 될 줄 알아.”차가운 경고를 하고 난 후 입꼬리를 올리며 도도하게 떠났다.강여경은 얼얼한 팔을 매만지며 증오에 가득 찬 눈으로 여름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강여름, 조금만 기다려. 내가 널 반드시 죽여버릴 테니.******오후 3시.17층.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조 이사가 맨 앞자리에 앉았고 그 뒤로 화신의 중역이 주르르 앉아 있었다.오 부사장이 말했다.“강여름 대표이사가 새로 부임했는데, 첫 주간 미팅에 모시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그까짓 게 뭐라고.”조 이사가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애송이가 뭘 알아? 됐어. 회의 진행해. 강 상무, 신규 분양 인테리어를 맡아줄 업체는 정했나?”강여경은 어깨의 통증을 참으며 말했다.“아직 미결정 상태입니다. 인테리어 회사들이 제출한 견적이 너무 높게 책정되어 있어서, 자체 시공팀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디자인 기획안을 가져왔으니 다들 한 번 보시지요.”두툼한 설계도면과 기획안을 보란 듯이 펼쳤다.회의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 눈이 휘둥그래졌다.“이번 기획안은 굉장히 창의적이구먼. 고급스러우면서도 품격이 넘치는데.”“이게 모두 강 상무가 직접 설계한 기획안인가? 정말 대단하군!”“지난번에 분양한 인테리어보다 훨씬 낫군요.”“……”강여경은 겸손한 척하며 말을 아꼈다.“견적서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제 계산으로는 외부 인테리어 업체에 하청을 주는 것보다 30% 이상 비용을 절감할
“계속합시다. 조금 전까지 논의했던 안건은 뭐죠?”여름이 조 이사의 반응을 무시하며 담담한 얼굴로 회의장 안을 둘러보았다.“방금 인테리어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강여경 상무가 디자인 기획안을 제출했는데 저희 모두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오 부사장이 머뭇거리며 디자인 도안을 펼쳤다.강여경은 심장이 툭 떨어졌다. 강여름이 회의에 참석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여름은 분명 그 기획안을 알아볼 것이다.호텔에서의 그날, 여름이 가져왔던 그 기획안 그대로였다. 하지만 강여경이 훔쳤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면 중역의 비웃음을 살 것인데...여름은 디자인 도면들을 뚫어지게 들어다보더니 차윤에게 귓속말로 몇 마디 지시했다.차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밖으로 나갔고 여름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흠… 기획안 정말 훌륭하군요. 출력 시간이 오늘 새벽 1시인데, 강 상무는 낮에 출근한 걸 보니 철야 했나 보군요.”“그렇습니다. 강 상무가 며칠 밤을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일했다고 합니다.”“노고가 많았습니다.”회의실이 강여경을 칭찬하는 목소리로 가득 찼다. 강여경은 어깨가 으쓱해졌다. ‘일부러 늦은 시간에 출력했는데 먹혔군.’“제가 작업한 디자인 기획안 어떠신가요?”“디자인이 훌륭합니다. 그런데 아주 공교롭군요. 내가 보름 전에 이것과 똑같은 기획안을 잃어버렸거든요.”여름의 발언에 갑자기 장내 분위기가 싸하게 변해버렸다.회의 참석자들은 조용해졌다. 강여경은 질새라 억울한 척 연기를 했다.“내가 디자인을 베꼈단 말씀이신가요?”“강 상무 재능을 질투하는 건 아니겠죠?”조영호 이사가 비꼬듯이 말했다.“다들 아시겠지만 여기 두 자매분 사이가 안 좋으십니다. 두 분 사적인 관계를 회사로 끌고 들어와 괜한 힘겨루기를 하시면 곤란합니다.”잠시 모두 숨을 죽이고 여름의 표정을 살피며 눈치를 보았다. 명색이 대표이사인데 그릇이 너무 작은 거 아닌가. 회의장이 점점 술렁거렸다.“여러분들이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합니다.”여름이 짧게 한숨을 지었다.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