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라⋯.여름은 억울했다.“그쪽에서 먼저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는 안 물어보세요?”“넌 가은이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난리지만, JJ그룹도 명문가다. 여경이는 그 집안이랑 친해지려고 일부러 가은이도 만나고 다니는 거야. 너 같은 줄 아니?온갖 나쁜 짓만 하고 다니면서 언니까지 그렇게 가만 두질 않으니. 내가 어쩌다가 너 같은 걸 길렀는지 모르겠다.”“전 안 돌아가요.”여름은 이를 악물었다.이정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그러면 평생 들어올 생각 마라. 너 같은 애 없는 셈 치면 된다!”여름은 심호흡을 했다.“날 딸 대접해주신 적이 있긴 한가요? 강여경이 돌아오기 전에도 엄마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늘 다른 사람하고 비교했어요. 강여경이 돌아오고 나서는 나를 나무라는 말뿐이셨죠. 내가 친자식이긴 한가요?”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나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집에는 이제 마음이 완전히 식어버렸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잠시 후 여름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펫샵에 가서 고양이가 잘 소화하는 음식에는 무엇이 있는지 물었다.펫샵 주인은 고양이 소화력을 높이는 좋은 음식을 생각하다가 결국 이라는 책을 건넸다.“어쨌든 소화하기 좋은 식단은 영양가 있는 것일 테니까요. 여기 있는 대로 해 먹이면 문제없을 거예요.”나름대로 일리가 있어 보여 여름은 그 책을 들고 마트에 식재료를 사러 갔다.******오후 4시.여름은 컨피티움으로 돌아왔다.지오는 여름이 돌아온 것을 보고 힘없이 한 번 ‘야옹’ 할 뿐, 집에 웅크리고 앉아서 꼼짝하지 않았다.그걸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파서 열심히 지오를 잘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간을 하지 않고 여름은 연어에 당근과 청경채를 조금 넣고 완자를 만들어 쪘다.그리고 간식으로 고양이 푸딩을 만들었다.저녁 시간.최하준이 퇴근했다.주방 유리문을 통해 요리하는 여름의 모습이 보였다. 채소 썰랴, 볶으랴 정신 없이 바빠 보였다.고소한 음식 냄새가 문틈으로 흘러나와 식욕을 자극했다.흘끗 보
여름의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어째서 아까 이 책을 보고 고양이 푸딩을 만들었다는 걸 깜빡했을까?“어, 그, 그게⋯.”“특별히 나를 위해 만들었다면서요.”고양이 먹이를 먹었다니 속이 뒤집혀 토할 지경이었다.여름은 울 것 같았다.“사실은 지오 푸딩이었어요. 그런데 맛있다고 하니까, 사실대로 말하기 힘들더라고요.”“강여름 씨.”30년 동안 살면서 이렇게 화가 난 것은 처음이었다.여름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그래도 굉장히 영양가 있는 거예요.”“그렇게 영양가 있는 건데 직접 먹어 보시죠.”“저, 맛은 없을 것 같아요.”“이런 식으로 나오시겠다?”최하준은 맛이 있다고 말까지 했던 걸 생각하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여름이 뭔가 말하려는데 상대가 서재로 홱 들어가 버렸다.‘망했어. 진짜 화났잖아.’여름은 울고 싶었다.이번에는 들어와서 잘 지내보려 했는데 1시간도 안 돼서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외숙모로 눌러 앉으려던 목표는 점점 멀어져 갔다.잠시 후 여름이 서재 문을 두드렸다.“저리 가시죠.”분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은 절망적으로 눈을 감았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났구나. 이따 다시 오자.’여름은 샤워를 하고 귀여운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머리를 어깨 위로 늘어뜨렸다.여름은 윙크를 하고 이리저리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았다. 꽤 만족스러웠다.‘하얀 피부에 커다란 눈, 얼마나 청순하냐.’최하준도 보면 반할 게 틀림없었다. “뭐 합니까?”옆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부들부들 떨며 돌아보니 최하준이 머그잔을 들고 비웃고 있었다.‘소리도 없이 언제부터 저기 있었대?’“그게, 저, 내가⋯.”‘당신 유혹하는 연습 하고 있었다, 왜!’“거울을 보니까 내가 너무 예뻐서 그만⋯.”여름이 수줍게 더듬거리며 말했다.‘후안무치가 새로운 경지를 돌파했군.’그러나 솔직히 자신도 여름이 상큼해서 좋았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매력을 내뿜는 사람은 보기 드물었다.“뭐 하나 보고 있었더니⋯.”최하준이 비웃으며 물을
조깅을 마치고 돌아온 최하준은 여름이 차려 놓은 푸짐한 아침 식사를 보고 어리둥절했다.“이게⋯.”“쭌, 어제 고양이 푸딩을 먹게 해서 미안해요. 사과의 의미로 아침 식사는 제대로 했어요.” 여름은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국을 떠 주었다.“흠⋯⋯ 됐습니다. 어제 저녁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웠습니다.”최하준의 표정이 살짝 경직되었다.“고, 고양이 사료를 먹어보니 공감이 되더라고요.”여름은 캑캑거리며 말을 더듬었다.여름의 반응에 상대는 대꾸하지 않았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현관을 나설 때였다.“출근합니까? 역까지 태워줄까요?”최하준이 먼저 말을 걸었다.여름은 움찔했다. “저 잘렸어요.”고개를 저으며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최하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기 집안 회사에 근무하는 거 아니었나? 가족과 갈등이 심한가 보군.’“그렇군요. 그럼 지오를 잘 부탁합니다.”‘흥, 나도 나름 고급 인력인데 집에서 고양이 밥만 해줄 수는 없지.’“구직활동해야죠. 지오는 걱정 마세요. 먹이는 제때 줄 테니까.”“그러십시오.” 최하준은 무심하게 나가버렸다.******그 후 이틀 동안 여름은 직장을 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인테리어나 건축 설계에 관련된 일자리는 차고 넘쳤지만, 배경을 드러낼 수는 없어 화려한 경력을 숨겨야 했다. 게다가 나이까지 어리다 보니 어지간한 회사에서는 단순 보조 사원으로만 채용하려고 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신주인테리어’라는 작은 중소기업을 선택했다. 워낙 작은 회사인 데다 디자이너가 둘 뿐이라 디자인을 하다가도 일손이 부족하면 회사 밖에서 전단을 돌려야 했다. 여름은 이런 일이 난생 처음이라 너무 부끄러웠지만, 하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졌다. 전단지를 잘 받아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귀찮아서 무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 시간 넘게 길바닥에 서 있었더니 얼굴은 땀 범벅이 되고 피부는 붉게 달아올랐다. 가을인데도 한낮의 태양은 뜨거웠다. 또 한 사람이 여름의 전단지를 무시하고 지나가는데 검은 스포츠카가 여름
여름이 난처한 듯 얼굴을 붉혔다.“동성대극장이랑 국제공항까지 설계하고 프로젝트 책임자까지 맡았던 경력자인데 나이가 어리다고 다들 믿어주질 않아요. TH그룹 딸이라는 것도 밝혀지면 안 되고. 신분이 드러나면 사람들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대기업에서 보조직을 하거나 중소기업에서 디자이너를 하거나 둘 중 선택해야 했어요.”여름은 전단지를 주우면서 말했다.“보조가 되긴 싫어요. 잡일이나 하게 되고 좋은 디자인 컨셉이 있으면 다른 메인 디자이너가 가져가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요. 작은 회사지만 여기에서 일하면 전부 내 경력이 되고 프로젝트에 대한 보람도 있고요. 돈 좀 모으면 회사를 차릴 거예요. 지금은 고생이지만, 곧 좋아지겠죠.”“TH로 돌아갈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여름은 침울한 듯 고개를 저었다. “TH그룹은 제 것이 아니에요. 내 손으로 이루어 내야 진짜 내 것이죠.”열심히 전단지를 줍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최하준은 여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줍지 말아요.”“안 돼요.” 여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렇게 전단지가 많이 없어진 걸 알면 대표님이 난리 칠 거예요.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아서 게으름 피우면 안 돼요. 게다가 환경미화원들이 이걸 언제 다 치워요?”기다란 손이 여름의 앞에 떨어진 전단지를 잡았다.“같이 하죠.” 최하준이 몸을 굽히고 손을 뻗을 때 보니 소매 안으로 보이는 시계는 여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브랜드였다. 브라운 컬러의 가죽 밴드에 사파이어 베젤이 있는 심플한 디자인의 손목시계다. 최하준이 하고 있으니 잡지 속 모델들이 차고 나오는 어떤 시계보다도 우아하게 빛났다. 여름의 시선이 하준의 다리로 옮겨갔다. 꿇어앉아 있어 짙은 네이비 슬랙스 속 근육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목욕 타월이 떨어진 날 기억이 순간 떠오르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으아아아, 내 머리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멈춰!’“왜 그럽니까? 얼굴이 너무 빨간데!” 최하준이 여름을 쳐다보았다. “그, 그게, 오늘
“좋아요. 여름 씨. 파이팅! 오후에는 사람들이 많아질 테니 빨리 일이 끝나겠군요. 입사할 때 능력이 입증되면 정직원으로 올려준다고 한 거 기억하지요? 그러니까 열심히 영업해서 프로젝트 따 와요. 아무리 실력 있는 디자이너라도 프로젝트 못 따오면 무능한 겁니다.”“네, 열심히 하겠습니다.”여름이 천천히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최하준이 슬쩍 그녀를 쳐다보았다. 차 안이 조용해서 핸드폰을 통해 염 대표의 목소리가 밖으로 다 들렸다.“다른 회사로 옮기는 게 어떻습니까?”“어디나 똑같아요. 뭐든 처음은 다 힘들죠.” 여름이 쓴웃음을 지었다.최하준은 핸들을 두드리며 침묵했다. 창문 밖으로 특이한 디자인의 건축물이 보였다.“저기는 뭐 하는 곳입니까?”하준은 별생각 없이 물었다.“동성과학문화거점센터요.” 갑자기 생각이 떠오른 듯 여름이 말을 이었다. “완공된 지 얼마 안 되었어요. TH에서 건축 설계를 따내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다른 회사에 밀렸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인테리어라도 따내려고 했는데, 이젠 생각할 필요도 없네요.”“왜요?”“공개 입찰이거든요. 우리 회사 같은 작은 중소기업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죠.”여름이 아쉬운 듯 말했다.“입찰 자격이 있어도 그 회사가 프로젝트를 따내기는 어렵겠지.”“무슨 소릴! 국제디자인건축대상에서 내가 대상을 받은 적도 있다고요. 그때 여러 회사에서 러브콜을 받았죠. 그걸 다 물리치고 TH로 돌아왔어요. 그 땐 내가 가업을 물려받을 줄 알았거든요.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동성 시에서 디자인으로 나를 따라올 사람은 없을 걸요?” 여름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최하준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뻔뻔한 데다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군.'“좋습니다. 입찰할 기회를 만들어 드리죠.”순간 그녀가 몸을 꼿꼿이 세웠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믿을 수 없다는 듯 도톰한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다만 프로젝트를 따내는 건 강여름 씨 몫입니다. 실력이 진짜인지 허풍인지 어디
‘냉정하잖나, 이 친구야.’이지훈은 당연히 이 말을 속으로 삼켰다.“내가 센터장하고 잘 아니까 그냥 강여름 씨에게 공사를 맡기라고 할까? 이번 입찰에 TH도 참여한다고 한다던데 경쟁이 치열할걸?”“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그냥 기회만 주면 돼. 능력이 부족해서 떨어지는 건 할 수 없지. 입찰 기회만 공평하게 만들어 주면 돼.”‘역시 최하준, 와이프에게 조차 얄짤없네!’“좋아, 하라는 대로 하지.”잠시 후, 여름이 삼겹살을 사 들고 돌아왔다. “센터에 말은 넣어놨습니다.”여름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렇게 쉽게 일을 성사시키다니, 역시 잘 나가는 외삼촌인가 싶었다.“고마워요.” 여름은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최하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자, 그럼 고추장 돼지 불고기 먹으러 갑시다.”“고추장 돼지 불고기 아닌데. 삼겹살이랑 버섯 구울 건데.”여름은 일부러 놀라는 척했다.“......”최하준은 대답이 없었다.순식간에 얼굴이 싸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여름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장난이에요, 장난. 고추장 돼지불고기 하려고 준비했어요.”“강, 여, 름, 씨” 이름 석자를 힘주어 부르며 약 오른 감정을 억눌렀다.‘나를 놀려? 조금 잘 대해줬더니 금방 바보 취급을 하고 말이야.’화가 난 걸 보고 여름은 메롱으로 약을 올리더니 말했다.“좋으면 좋아한다고 말하면 되지, 뭐 부끄러운 일이라고 그래요?”최하준은 괜시리 화가 나서 고개를 돌렸다. ‘나 이런 거 좋아하니까 해줘~ 라고 말하는 거 낯간지럽다고!’“그럼, 난 뭘 좋아하는지 맞춰 봐요”여름이 살짝 웃으며 물었다. “고양이 사료.” 하준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헐~”어이가 없었다.젠장, 오늘 저녁은 다 먹었구나 싶어서 최하준은 바로 후회했다.“쭌이죠.”여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놀렸다.최하준이 여름을 흘끗 쳐다봤다.“차 안에서 남자를 도발하면 어떻게 되는지 모릅니까?그의 말에 여름은 살짝 긴장했다. ‘차에서⋯ 남자를 도발⋯
프로젝트 매니저가 말했다.“그렇게 말처럼 쉽진 않아요. 이번 경쟁에 참가한 업체 중 상장사만 해도 두 곳. 경력이 10년 이상 되는 베테랑 기업도 여러 곳인 데다 제법 탄탄한 협력사도 수십 곳입니다. TH디자인그룹이 가장 유력한 것 같습니다.”이 말을 들으니 여름은 기운이 쭉 빠졌다. 이렇게 큰 프로젝트에는 이윤도 명예도 걸려있으니 당연히 TH도 참여하겠지. 디자이너가 누구일지 궁금했다.그렇지만 여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TH디자이너 중에 자신보다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다들 경력은 있어도 창의적이진 않았다.잠시 생각하더니 여름이 입을 열었다.“기회가 왔으면 잡아야죠! 과감하게 나가 보시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과학문화센터라면 향후 대중들에게 개방이 될 겁니다. 문화와 과학기술 접목이 관건입니다. 이런 미래지향적인 컨셉이 대중들에게 잘 먹힐 겁니다.”“일리가 있군.”염 대표가 이에 동의했다.“이번 과학문화센터에 관련된 일은 강여름가 정해천 디자이너와 잘 협의해서 추진해 보도록 하세요. 6개월 밖에 시간이 없으니 이 프로젝트에만 올인하도록!”대표의 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다. 정해천은 두 살이 많다고 능력도 없으면서 이래라저래라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이제까지 정해천의 업무 역량을 보면 도면에 이미지나 입히는 수준이었다. 일반적인 실내 공간 디자인이야 가능하겠지만 이렇게 큰 프로젝트에 투입되기에는 현저히 실력이 부족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여름이 둘러 말했다.“대표님, 각자 작업하는 게 좋겠습니다. 컨셉도 상이할 텐데 협업이 오히려 진행에 방해가 될 수 있어요. 저희는 젊은 디자이너라 서로 경쟁하는 편이 결과물 면에서 훨씬 이득이 될 겁니다.”염 대표는 망설였다. 정해천은 그 소릴 듣고 기분이 나빴다.“그러니까… 당신이 나보다 낫다는 말로 들리는데….”“그게 아니라 양질의 결과를 위해 공정한 경쟁을 하자는 겁니다.”“나이도 어린 사회 초년생이 선배한테 배울 생각은 안하고 자신
“네, 이게 제 디자인 기획안이에요. 한번 보실래요? 수정할 곳이 있으면 알려 주세요”여름이 노트북을 들고 왔다. 그 안에는 그동안 노력한 결실이 들어 있었다. 최하준은 디자인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전체적으로 짙은 푸른색이 우주를 의미하는 컨셉이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과학 기술을 극대화하는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이었다. 여름이 설명했다.“내 디자인에 “광활한 눈”이라는 이름을 지어봤어요. 보세요. 이렇게 무수히 많은 별은 하나하나가 눈 같지 않나요? 우주는 계속해서 탐구해야 하는 미지의 세계잖아요. 이쪽 “4D World”는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 풍으로….”여름의 설명은 또박또박 차분하게 이어졌다. 최하준은 설명을 듣는 내내 내심 놀라고 있었다. 이 정도 아이디어라면 센터의 인테리어와 딱 맞아 떨어질 것이다. 굉장한 창의력이 돋보였다.이제까지 여름을 과소평가했던 자신이 슬쩍 부끄러워졌다. 디자인을 공부했으면 얼마나 했을까 생각했는데, 선입견이 완전히 무너졌다. 오히려 예전에 교류했던 거물급 디자이너들보다도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인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군’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일에 몰두하는 모습은 더욱 매력적이었다.“어떻게 생각해요?”한바탕 설명을 듣고 나서 바라보니 반짝반짝 빛나는 눈에는 열정이 가득했다. “빨리 칭찬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듯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런대로, 뭐.” 최하준은 속마음을 숨기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실망한 듯 입이 샐쭉해졌다. 어딜 봐서 ‘그런대로 뭐’ 수준이냐, 분명 대단하지 않느냐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프로젝트는 딸 수 있을까요?”여름이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너무 자만하지 마십시오. 세상에는 능력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최하준이 찬물을 끼얹었다.“......”칭찬을 받을 줄 알았는데 답답한 소리만 들었다. 더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난 반드시 해낼 거야.”여름은 혼자 중얼거리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한껏 올려 묶은 포니테일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