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어째서 아까 이 책을 보고 고양이 푸딩을 만들었다는 걸 깜빡했을까?“어, 그, 그게⋯.”“특별히 나를 위해 만들었다면서요.”고양이 먹이를 먹었다니 속이 뒤집혀 토할 지경이었다.여름은 울 것 같았다.“사실은 지오 푸딩이었어요. 그런데 맛있다고 하니까, 사실대로 말하기 힘들더라고요.”“강여름 씨.”30년 동안 살면서 이렇게 화가 난 것은 처음이었다.여름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그래도 굉장히 영양가 있는 거예요.”“그렇게 영양가 있는 건데 직접 먹어 보시죠.”“저, 맛은 없을 것 같아요.”“이런 식으로 나오시겠다?”최하준은 맛이 있다고 말까지 했던 걸 생각하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여름이 뭔가 말하려는데 상대가 서재로 홱 들어가 버렸다.‘망했어. 진짜 화났잖아.’여름은 울고 싶었다.이번에는 들어와서 잘 지내보려 했는데 1시간도 안 돼서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외숙모로 눌러 앉으려던 목표는 점점 멀어져 갔다.잠시 후 여름이 서재 문을 두드렸다.“저리 가시죠.”분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은 절망적으로 눈을 감았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났구나. 이따 다시 오자.’여름은 샤워를 하고 귀여운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머리를 어깨 위로 늘어뜨렸다.여름은 윙크를 하고 이리저리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았다. 꽤 만족스러웠다.‘하얀 피부에 커다란 눈, 얼마나 청순하냐.’최하준도 보면 반할 게 틀림없었다. “뭐 합니까?”옆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부들부들 떨며 돌아보니 최하준이 머그잔을 들고 비웃고 있었다.‘소리도 없이 언제부터 저기 있었대?’“그게, 저, 내가⋯.”‘당신 유혹하는 연습 하고 있었다, 왜!’“거울을 보니까 내가 너무 예뻐서 그만⋯.”여름이 수줍게 더듬거리며 말했다.‘후안무치가 새로운 경지를 돌파했군.’그러나 솔직히 자신도 여름이 상큼해서 좋았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매력을 내뿜는 사람은 보기 드물었다.“뭐 하나 보고 있었더니⋯.”최하준이 비웃으며 물을
조깅을 마치고 돌아온 최하준은 여름이 차려 놓은 푸짐한 아침 식사를 보고 어리둥절했다.“이게⋯.”“쭌, 어제 고양이 푸딩을 먹게 해서 미안해요. 사과의 의미로 아침 식사는 제대로 했어요.” 여름은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국을 떠 주었다.“흠⋯⋯ 됐습니다. 어제 저녁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웠습니다.”최하준의 표정이 살짝 경직되었다.“고, 고양이 사료를 먹어보니 공감이 되더라고요.”여름은 캑캑거리며 말을 더듬었다.여름의 반응에 상대는 대꾸하지 않았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현관을 나설 때였다.“출근합니까? 역까지 태워줄까요?”최하준이 먼저 말을 걸었다.여름은 움찔했다. “저 잘렸어요.”고개를 저으며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최하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기 집안 회사에 근무하는 거 아니었나? 가족과 갈등이 심한가 보군.’“그렇군요. 그럼 지오를 잘 부탁합니다.”‘흥, 나도 나름 고급 인력인데 집에서 고양이 밥만 해줄 수는 없지.’“구직활동해야죠. 지오는 걱정 마세요. 먹이는 제때 줄 테니까.”“그러십시오.” 최하준은 무심하게 나가버렸다.******그 후 이틀 동안 여름은 직장을 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인테리어나 건축 설계에 관련된 일자리는 차고 넘쳤지만, 배경을 드러낼 수는 없어 화려한 경력을 숨겨야 했다. 게다가 나이까지 어리다 보니 어지간한 회사에서는 단순 보조 사원으로만 채용하려고 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신주인테리어’라는 작은 중소기업을 선택했다. 워낙 작은 회사인 데다 디자이너가 둘 뿐이라 디자인을 하다가도 일손이 부족하면 회사 밖에서 전단을 돌려야 했다. 여름은 이런 일이 난생 처음이라 너무 부끄러웠지만, 하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졌다. 전단지를 잘 받아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귀찮아서 무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 시간 넘게 길바닥에 서 있었더니 얼굴은 땀 범벅이 되고 피부는 붉게 달아올랐다. 가을인데도 한낮의 태양은 뜨거웠다. 또 한 사람이 여름의 전단지를 무시하고 지나가는데 검은 스포츠카가 여름
여름이 난처한 듯 얼굴을 붉혔다.“동성대극장이랑 국제공항까지 설계하고 프로젝트 책임자까지 맡았던 경력자인데 나이가 어리다고 다들 믿어주질 않아요. TH그룹 딸이라는 것도 밝혀지면 안 되고. 신분이 드러나면 사람들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대기업에서 보조직을 하거나 중소기업에서 디자이너를 하거나 둘 중 선택해야 했어요.”여름은 전단지를 주우면서 말했다.“보조가 되긴 싫어요. 잡일이나 하게 되고 좋은 디자인 컨셉이 있으면 다른 메인 디자이너가 가져가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요. 작은 회사지만 여기에서 일하면 전부 내 경력이 되고 프로젝트에 대한 보람도 있고요. 돈 좀 모으면 회사를 차릴 거예요. 지금은 고생이지만, 곧 좋아지겠죠.”“TH로 돌아갈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여름은 침울한 듯 고개를 저었다. “TH그룹은 제 것이 아니에요. 내 손으로 이루어 내야 진짜 내 것이죠.”열심히 전단지를 줍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최하준은 여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줍지 말아요.”“안 돼요.” 여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렇게 전단지가 많이 없어진 걸 알면 대표님이 난리 칠 거예요.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아서 게으름 피우면 안 돼요. 게다가 환경미화원들이 이걸 언제 다 치워요?”기다란 손이 여름의 앞에 떨어진 전단지를 잡았다.“같이 하죠.” 최하준이 몸을 굽히고 손을 뻗을 때 보니 소매 안으로 보이는 시계는 여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브랜드였다. 브라운 컬러의 가죽 밴드에 사파이어 베젤이 있는 심플한 디자인의 손목시계다. 최하준이 하고 있으니 잡지 속 모델들이 차고 나오는 어떤 시계보다도 우아하게 빛났다. 여름의 시선이 하준의 다리로 옮겨갔다. 꿇어앉아 있어 짙은 네이비 슬랙스 속 근육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목욕 타월이 떨어진 날 기억이 순간 떠오르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으아아아, 내 머리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멈춰!’“왜 그럽니까? 얼굴이 너무 빨간데!” 최하준이 여름을 쳐다보았다. “그, 그게, 오늘
“좋아요. 여름 씨. 파이팅! 오후에는 사람들이 많아질 테니 빨리 일이 끝나겠군요. 입사할 때 능력이 입증되면 정직원으로 올려준다고 한 거 기억하지요? 그러니까 열심히 영업해서 프로젝트 따 와요. 아무리 실력 있는 디자이너라도 프로젝트 못 따오면 무능한 겁니다.”“네, 열심히 하겠습니다.”여름이 천천히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최하준이 슬쩍 그녀를 쳐다보았다. 차 안이 조용해서 핸드폰을 통해 염 대표의 목소리가 밖으로 다 들렸다.“다른 회사로 옮기는 게 어떻습니까?”“어디나 똑같아요. 뭐든 처음은 다 힘들죠.” 여름이 쓴웃음을 지었다.최하준은 핸들을 두드리며 침묵했다. 창문 밖으로 특이한 디자인의 건축물이 보였다.“저기는 뭐 하는 곳입니까?”하준은 별생각 없이 물었다.“동성과학문화거점센터요.” 갑자기 생각이 떠오른 듯 여름이 말을 이었다. “완공된 지 얼마 안 되었어요. TH에서 건축 설계를 따내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다른 회사에 밀렸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인테리어라도 따내려고 했는데, 이젠 생각할 필요도 없네요.”“왜요?”“공개 입찰이거든요. 우리 회사 같은 작은 중소기업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죠.”여름이 아쉬운 듯 말했다.“입찰 자격이 있어도 그 회사가 프로젝트를 따내기는 어렵겠지.”“무슨 소릴! 국제디자인건축대상에서 내가 대상을 받은 적도 있다고요. 그때 여러 회사에서 러브콜을 받았죠. 그걸 다 물리치고 TH로 돌아왔어요. 그 땐 내가 가업을 물려받을 줄 알았거든요.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동성 시에서 디자인으로 나를 따라올 사람은 없을 걸요?” 여름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최하준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뻔뻔한 데다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군.'“좋습니다. 입찰할 기회를 만들어 드리죠.”순간 그녀가 몸을 꼿꼿이 세웠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믿을 수 없다는 듯 도톰한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다만 프로젝트를 따내는 건 강여름 씨 몫입니다. 실력이 진짜인지 허풍인지 어디
‘냉정하잖나, 이 친구야.’이지훈은 당연히 이 말을 속으로 삼켰다.“내가 센터장하고 잘 아니까 그냥 강여름 씨에게 공사를 맡기라고 할까? 이번 입찰에 TH도 참여한다고 한다던데 경쟁이 치열할걸?”“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그냥 기회만 주면 돼. 능력이 부족해서 떨어지는 건 할 수 없지. 입찰 기회만 공평하게 만들어 주면 돼.”‘역시 최하준, 와이프에게 조차 얄짤없네!’“좋아, 하라는 대로 하지.”잠시 후, 여름이 삼겹살을 사 들고 돌아왔다. “센터에 말은 넣어놨습니다.”여름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렇게 쉽게 일을 성사시키다니, 역시 잘 나가는 외삼촌인가 싶었다.“고마워요.” 여름은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최하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자, 그럼 고추장 돼지 불고기 먹으러 갑시다.”“고추장 돼지 불고기 아닌데. 삼겹살이랑 버섯 구울 건데.”여름은 일부러 놀라는 척했다.“......”최하준은 대답이 없었다.순식간에 얼굴이 싸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여름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장난이에요, 장난. 고추장 돼지불고기 하려고 준비했어요.”“강, 여, 름, 씨” 이름 석자를 힘주어 부르며 약 오른 감정을 억눌렀다.‘나를 놀려? 조금 잘 대해줬더니 금방 바보 취급을 하고 말이야.’화가 난 걸 보고 여름은 메롱으로 약을 올리더니 말했다.“좋으면 좋아한다고 말하면 되지, 뭐 부끄러운 일이라고 그래요?”최하준은 괜시리 화가 나서 고개를 돌렸다. ‘나 이런 거 좋아하니까 해줘~ 라고 말하는 거 낯간지럽다고!’“그럼, 난 뭘 좋아하는지 맞춰 봐요”여름이 살짝 웃으며 물었다. “고양이 사료.” 하준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헐~”어이가 없었다.젠장, 오늘 저녁은 다 먹었구나 싶어서 최하준은 바로 후회했다.“쭌이죠.”여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놀렸다.최하준이 여름을 흘끗 쳐다봤다.“차 안에서 남자를 도발하면 어떻게 되는지 모릅니까?그의 말에 여름은 살짝 긴장했다. ‘차에서⋯ 남자를 도발⋯
프로젝트 매니저가 말했다.“그렇게 말처럼 쉽진 않아요. 이번 경쟁에 참가한 업체 중 상장사만 해도 두 곳. 경력이 10년 이상 되는 베테랑 기업도 여러 곳인 데다 제법 탄탄한 협력사도 수십 곳입니다. TH디자인그룹이 가장 유력한 것 같습니다.”이 말을 들으니 여름은 기운이 쭉 빠졌다. 이렇게 큰 프로젝트에는 이윤도 명예도 걸려있으니 당연히 TH도 참여하겠지. 디자이너가 누구일지 궁금했다.그렇지만 여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TH디자이너 중에 자신보다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다들 경력은 있어도 창의적이진 않았다.잠시 생각하더니 여름이 입을 열었다.“기회가 왔으면 잡아야죠! 과감하게 나가 보시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과학문화센터라면 향후 대중들에게 개방이 될 겁니다. 문화와 과학기술 접목이 관건입니다. 이런 미래지향적인 컨셉이 대중들에게 잘 먹힐 겁니다.”“일리가 있군.”염 대표가 이에 동의했다.“이번 과학문화센터에 관련된 일은 강여름가 정해천 디자이너와 잘 협의해서 추진해 보도록 하세요. 6개월 밖에 시간이 없으니 이 프로젝트에만 올인하도록!”대표의 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다. 정해천은 두 살이 많다고 능력도 없으면서 이래라저래라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이제까지 정해천의 업무 역량을 보면 도면에 이미지나 입히는 수준이었다. 일반적인 실내 공간 디자인이야 가능하겠지만 이렇게 큰 프로젝트에 투입되기에는 현저히 실력이 부족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여름이 둘러 말했다.“대표님, 각자 작업하는 게 좋겠습니다. 컨셉도 상이할 텐데 협업이 오히려 진행에 방해가 될 수 있어요. 저희는 젊은 디자이너라 서로 경쟁하는 편이 결과물 면에서 훨씬 이득이 될 겁니다.”염 대표는 망설였다. 정해천은 그 소릴 듣고 기분이 나빴다.“그러니까… 당신이 나보다 낫다는 말로 들리는데….”“그게 아니라 양질의 결과를 위해 공정한 경쟁을 하자는 겁니다.”“나이도 어린 사회 초년생이 선배한테 배울 생각은 안하고 자신
“네, 이게 제 디자인 기획안이에요. 한번 보실래요? 수정할 곳이 있으면 알려 주세요”여름이 노트북을 들고 왔다. 그 안에는 그동안 노력한 결실이 들어 있었다. 최하준은 디자인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전체적으로 짙은 푸른색이 우주를 의미하는 컨셉이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과학 기술을 극대화하는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이었다. 여름이 설명했다.“내 디자인에 “광활한 눈”이라는 이름을 지어봤어요. 보세요. 이렇게 무수히 많은 별은 하나하나가 눈 같지 않나요? 우주는 계속해서 탐구해야 하는 미지의 세계잖아요. 이쪽 “4D World”는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 풍으로….”여름의 설명은 또박또박 차분하게 이어졌다. 최하준은 설명을 듣는 내내 내심 놀라고 있었다. 이 정도 아이디어라면 센터의 인테리어와 딱 맞아 떨어질 것이다. 굉장한 창의력이 돋보였다.이제까지 여름을 과소평가했던 자신이 슬쩍 부끄러워졌다. 디자인을 공부했으면 얼마나 했을까 생각했는데, 선입견이 완전히 무너졌다. 오히려 예전에 교류했던 거물급 디자이너들보다도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인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군’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일에 몰두하는 모습은 더욱 매력적이었다.“어떻게 생각해요?”한바탕 설명을 듣고 나서 바라보니 반짝반짝 빛나는 눈에는 열정이 가득했다. “빨리 칭찬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듯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런대로, 뭐.” 최하준은 속마음을 숨기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실망한 듯 입이 샐쭉해졌다. 어딜 봐서 ‘그런대로 뭐’ 수준이냐, 분명 대단하지 않느냐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프로젝트는 딸 수 있을까요?”여름이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너무 자만하지 마십시오. 세상에는 능력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최하준이 찬물을 끼얹었다.“......”칭찬을 받을 줄 알았는데 답답한 소리만 들었다. 더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난 반드시 해낼 거야.”여름은 혼자 중얼거리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한껏 올려 묶은 포니테일
“저 회사가 당신 디자인을 도용했다는 겁니까?”성 회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네, 그렇습니다. 제 노트북 안에 증거가 있어요. 모든 시뮬레이션도 제가 직접 했던 것들입니다. 저 평면 설계도도 물론 제가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손으로 하나하나 그린 것이고요. 여기 초안이 있습니다.”여름은 최대한 떨지 않으려고 노력했다.“한번 볼까요.”여름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자신의 노트북을 열었다. 하지만 그 안에 있어야 할 문건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심지어 가방 속에 있던 디자인 초안도 없어졌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정해천을 쏘아 보았다.“당신이 손댔어요?”이 사람 말고는 없다.“미친 거 아냐? 우리는 같은 회사 동료라고!” 정해천이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무대 위에 있던 강여경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그만해. 나에게 불만이 있으면 사석에서 해결하면 될 것이지…. 지금 이시간이 TH디자인그룹에 얼마나 중요한데, 굳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날 모함하고 난처하게 만들어야겠어?”성 회장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아는 사이입니까?”여름이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강여경이 말을 가로챘다.“제 자매입니다. 저희가 최근에 불화가 있었던지라…”이민수가 책상을 탕 치며 일어났다.“여경아, 더 이상 인정 베풀 거 없다. 네 명예를 더럽혀서 자기가 회사를 빼앗으려는 의도가 뻔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네. 네 디자인까지 몰래 훔쳐본 모양이다.”“절대 아닙니다.”여름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어쩔 줄 몰랐다.“그럼 증거를 가져와. 증거도 없이 사람을 무고하다니. 여경이가 이 프로젝트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아? 네가 남 지적할 자격이나 있어!”이때 정해천이 몸을 일으켰다. “아,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어쩐지 내 디자인보다 더 좋다 했더니…. 다른 사람 것을 표절한 것이었네요. TH그룹의 사람이었군! 염 대표님, 이거 완전 우리가 놀아난 것 아닙니까?” 염 대표의 표정이 어두웠다.“강여름 씨, 저 사람들 얘기가 모두 진짜인